신한국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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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한국당은 1995년 12월 6일, 민주자유당이 당명을 변경하여 창당된 대한민국의 정당이다. 1990년 1월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으로 출범한 민주자유당은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당내 갈등과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문제로 당의 이미지가 악화되자 당명을 변경했다. 신한국당은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제1당을 차지했으나 과반수 확보에는 실패했고,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과의 통합을 결정하여 한나라당으로 흡수,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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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국당 - [정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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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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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이름 | 신한국당 |
한자 이름 | 新韓國黨 |
로마자 표기 | Sinhangukdang |
머리글자 표기 | Sinhan'guktang |
다른 이름 | 민주자유당 |
다른 이름 한글 | 민주자유당 |
다른 이름 한자 | 民主自由黨 |
다른 이름 로마자 표기 | Minjujayudang |
다른 이름 머리글자 표기 | Minjujayutang |
설립 및 해산 | |
창당일 | 1990년 1월 22일 |
해산일 | 1997년 11월 21일 |
전신 정당 |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
통합 정당 | 한나라당 |
주요 인물 | |
총재 | 이회창 |
대통령 | 김영삼 (1992–1997) |
정치 성향 | |
이념 | 보수주의 (대한민국) 신자유주의 국민보수주의 반공주의 사회보수주의 |
정치적 위치 | 중도우파 ~ 우익 |
조직 및 활동 | |
국제 조직 | 국제민주연합 |
중앙 당사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17-7 |
상징색 | 파랑 |
기타 | |
로마자 표기법 | Sinhangukdang |
2. 역사
1990년 1월 22일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 선언으로 민주자유당 창당이 시작되었다. 2월 9일 합당대회를 통해 민주자유당이 공식적으로 발족되었고, 2월 15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정당으로 등록되었다. 5월 9일 전당대회에서는 노태우가 총재, 김영삼이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91년 6월 20일에 실시된 지방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은 총 의석 866석 중 564석을 획득하며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1992년 3월 24일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149석을 얻는 데 그쳤으나, 이후 무소속 의원들을 영입하여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였다.
1992년 5월 19일 김영삼 대표최고위원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고, 8월 28일 김영삼 대통령 후보가 신임 총재로 선출되었다. 12월 14일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후보는 민주당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1995년 6월 27일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서울특별시장 선거 등에서 패배하였다. 이후 12월 6일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개칭하였다.
2. 1. 창당 배경
제5공화국 집권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은 1987년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를 대통령으로 당선시켰으나, 1988년 대한민국 제13대 총선에서는 과반수에 훨씬 못 미치는 125석을 획득하여 여소야대(與小野大) 구도가 되었다.[21]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 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되는 등 난관에 부딪혔고, 6월 항쟁 이후 국민들의 민주화와 군사정권 청산 요구는 민주정의당 세력에게 위협이 되었다.이러한 상황에서 노태우 정부는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보수대연합"을 비밀리에 추진하였다.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 역시 곤경에 처해 있었다.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은 원내 3당으로 밀려났고, 김영삼은 "이대로는 대통령을 할 수 없다"라는 생각에 여당의 지위를 얻고자 했다. 신민주공화당 역시 김종필에 대한 불만이 쏟아져 나왔고, 김종필 자신도 정권을 잡기 위해 합당을 결심했다.
그러나 통일민주당은 분열을 일으켰다. 노무현은 김영삼에게 강하게 반발하며 결별을 선언했고, 이기택 등 8인이 3당 합당을 거부하며 민주당(일명 꼬마민주당)을 결성하였다.
이로써 김영삼, 김대중 후보 단일화론은 좌절되었다. 1990년 1월 21일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은 한 자리에 모여 합당에 합의하였고,[21] 이튿날 3당 체제를 바탕으로 하는 민주자유당이 탄생하였다.[22]
민주자유당 결성 이유로 3당 공동선언문은 다음을 들었다.
- ① 기존 4당 체제로는 국내외 도전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고 밝은 미래를 개척할 수 없다.
- ② 경제 위기와 당면한 국가적 과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하고 민주주의 발전 과제를 완수하려면 광범위한 국민적 지지 기반 위에 새로운 정치 구조를 가져야 한다.
- ③ 통일 한국의 미래를 내다보고 민족 통일에 대비하는 정치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 ④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중도 민주 세력의 대동단결로 큰 국민 정당을 탄생시켜 정치적 안정 위에 새로운 정치 질서를 확립하고자 했다.
현실적으로는 민정당이 총선 결과 과반수를 크게 밑돌고 국회 주도권을 야당에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당 지지율이 오르지 않아 다음 선거를 치를 수 없다는 위기감, 민주당은 야당 제1당 자리를 평민당에 빼앗기고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의 입지가 위태로워질 것이라는 판단, 공화당은 야당 제3당으로 활동의 제약을 받았다는 등 3당 각각의 이해관계가 지적된다.
2. 2. 민주자유당의 창당
제5공화국의 집권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은 1987년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를 대통령으로 당선시켰으나,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인해 1988년 13대 총선에서는 과반수에 훨씬 못 미치는 125석을 얻는데 그쳐 여소야대 정국에 몰리게 되었다.[21]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 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되는 등 난관에 부딪혔고, 6월 항쟁 이후 국민들의 민주화와 군사정권 청산 요구는 민주정의당에게 큰 위협이었다.이러한 상황에서 노태우 정권은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보수대연합"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비슷한 시기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 역시 곤경에 처해 있었다. 김영삼은 원내 3당으로 밀려난 상황에서 "만약 이대로 있다가는 대통령을 할 수 없다"라는 생각에 여당의 지위를 얻고자 했고, 측근인 서석재가 무소속 후보를 매수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합당을 결심하게 되었다. 김종필 또한 정권을 잡기 위해 합당을 결심한다.
그러나 민주화 세력이었던 김영삼이 합당을 한다고 하자 통일민주당은 분열을 일으켰다. 노무현은 김영삼에게 협조적이었으나, 합당에 강하게 반발하며 결별을 선언했다. 이기택, 김정길, 장석화, 김상현, 박찬종, 홍사덕, 이철, 노무현 등 8인은 3당 합당을 거부하며 민주당(일명 꼬마민주당)을 결성하였다.[22]
이로써 민주 진영의 주요 인물인 김영삼, 김대중 후보 단일화론이 좌절되었다. 1990년 1월 21일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은 한 자리에 모여 합당에 합의하였고,[21] 이튿날 3당 체제를 바탕으로 하는 민주자유당이 탄생하였다.[22] 노태우 대통령은 1990년 1월 22일에 민정·민주·공화 3당의 합동을 선언하고, 2월 9일에 합당대회를 개최하여 민주자유당이 공식적으로 발족했다. --
“세계 질서의 재편 속에서 많은 국가들이 자기 개혁의 본류 속에 놓여 있는 현실은, 우리의 정치가 창조적 개혁에 의해 새롭게 태어나야 함을 요구하고 있으며, 신선한 국민정당의 등장만이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는 길임을 굳게 믿는다”고 선언하고, 5개 항목으로 구성된 강령을 채택했다.
2. 3. 강압적 통치
민주자유당은 개헌선을 훨씬 초과한 218석을 차지하는 등 절대 권력을 쥐게 되었으며, 날치기 통과 강행, 언론 강제 폐간, 반대파 억압, 사회운동 탄압 등의 독재정치를 펼쳤다.[1] 이에 자연히 민주 인사들의 반발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1992년 총선에서는 의석을 많이 잃어 밀려났다.[1] 물론 이는 정주영이 통일국민당을 창당하는 과정에서 여야의 낙천자들을 영입한 결과도 있다.[1]2. 4. 노태우의 탈당
노태우는 후계자로 박철언을 내정하고 있었으나, 민주계 김영삼의 반발로 취소하였다. 이후 민주자유당 당권을 놓고 김영삼과 갈등했고, 노태우는 후계자로 박철언 등을 내정하기도 했다. 이에 김영삼은 항의하며 집단 탈당과 반정부 투쟁까지 고려하였다. 결국 노태우는 김영삼에게 대권과 당권을 넘기고 1992년 8월 28일 민자당 총재직을 사퇴하였다.[23] 같은 날 김영삼이 민주자유당 총재로 취임하면서 노태우는 민자당 명예총재에 선출되었으나, 9월 18일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모든 당직을 내놓고 민자당 탈당을 선언하였다.[23]1992년 10월 5일 노태우는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거국중립내각 구성을 선언,[23] 이에 따라 10월 9일 사상 첫 여당이 없는 중립내각이 출범하였다.[24] 그러나 이는 대선 직전에 대통령이 탈당하는 선례를 만든 것이기도 했다.
2. 5. 재집권
1992년 12월 18일에 치러진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이 당선되어 정권 연장에 성공하였다. 이는 5.16 군사정변 이후 첫 민간 정부 출범이라는 의의를 가진다.[7]김영삼은 금융실명제를 실시하여 정경유착 해소를 시도했고, 과거사 청산을 통해 조선총독부 철거 등의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당 내부에서는 공화계와 민주계 간 갈등이 심화되어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공화계가 탈당하였다. 이로 인해 1995년 6월 27일에 실시된 제1회 지방선거에서 참패하였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비자금 문제와 광주학살 등의 혐의로 수사를 받게 되었고, 전두환 등 관련자들이 수감되었다. 이 과정에서 민정계는 위기를 맞았고, 총선을 앞두고 김영삼 대통령은 당 개편을 추진하게 되었다.[7]
2. 6. 신한국당으로의 변경
1995년 12월 6일, 김영삼은 1996년 4월에 치러지는 총선을 앞두고 제5공화국의 흔적이 강한 민주자유당이라는 당명을 버리고 신한국당을 창당하였다.[25][26] 이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의혹 문제로 손상된 당 이미지를 쇄신하려는 목적도 있었다.[10][11]신한국당은 민주자유당에서 민주정의당계·신민주공화당계 등의 세력을 몰아내고, 이회창, 박찬종, 이재오, 김문수, 이우재, 홍준표, 맹형규, 정의화 등을 영입하였다. 이회창은 김영삼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인물로, 국무총리 시절 김영삼에 항명한 전적이 있었다. 민중당 지도부 출신인 이재오, 김문수, 이우재 등도 신한국당에 합류했다. 신한국당은 이들 외에도 신인 인사들을 대거 영입하여 42%의 현역 교체율을 기록하면서 대대적인 물갈이를 단행했다.
2. 7. 총선 패배와 정치 공작
1996년 4월에 치러진 제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은 제1당이 되었지만, 과반수에 미치지 못하는 139석을 차지했다.[27][28] 이에 김영삼은 무소속과 통합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을 영입하여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선거 결과를 뒤엎는 정치 공작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국민들의 여론은 악화되었다.1997년 대선을 앞두고 신한국당은 전두환, 노태우 사면 논의를 시작했다.[29][30] 김윤환 고문 등 구 여권 출신 인사들은 사면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31] 법무부는 전두환, 노태우 사면을 위한 실무 검토를 마치고, 광복절 무렵 사면이 가능하다고 발표했다.[32]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는 전두환, 노태우 사면을 통해 동서 화합을 이루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33][34][35]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 역시 김대중 후보의 사면론을 무력화하고 보수 세력의 지지를 얻기 위해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추석 전 사면을 김영삼 대통령에게 요구했다.[41][42][43] 이인제 후보 또한 전두환, 노태우 사면을 공약으로 내걸었다.[52][53][54]
1997년 대선에서 주요 후보들이 모두 전두환, 노태우 사면을 공약으로 내건 상황에서, 신한국당은 김대중 후보의 비자금 의혹을 폭로하며 정치 공세를 펼쳤다.[59] 강삼재 사무총장은 김대중 후보가 노태우로부터 20억 원 외에 추가로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계좌와 수표 번호를 공개했다.[60][62][63] 김대중 후보 측은 비자금 의혹을 부인했지만,[70] 신한국당은 김대중 후보를 검찰에 고발하는 등 공세를 강화했다.[67] 그러나 검찰은 대선 이후로 비자금 수사를 유보했다.[72] 이는 경제 상황 악화와 민심 불안, 그리고 제2의 광주 사태 발생 가능성을 우려한 결정이었다.[73]
2. 8. 1997년 대통령 선거
1997년 4월 17일,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형 집행이 확정되자, 집권당인 신한국당 내부에서는 이들의 사면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김윤환 고문 등 구 여권 출신 대선주자들은 사면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31] 7월 22일에는 법무부가 사면 실무 검토를 마치고 광복절 무렵 사면 가능성을 시사하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32]이러한 상황에서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대통령 후보는 8월 31일 "김영삼 대통령 임기 중 전두환 노태우 사면"을 통해 동서화합을 이루겠다는 의견을 밝혔다.[33][34][35] 9월 1일 SBS 프로그램에서는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용서론을 강조했다.[36]
이에 맞서 9월 1일, 신한국당 대선후보 이회창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추석 전 사면을 요구했다.[41][42][43] 김영삼 대통령은 처음에는 "국민적 공감대"를 이유로 거부했으나,[44] 9월 12일 입장을 바꿔 대선 전 사면을 시사했다.[46] 이회창이 전두환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우자, 전두환은 "고맙다"는 반응을 보였고, 이회창은 "추석 때 나오시기를 바랐는데 아쉽다"고 화답했다.[47][48][49][50] 9월 24일, 이회창은 전두환, 노태우 사면에 대해 "전직 대통령 구금 상태는 바람직하지 않다"며 적극 찬성했다.[51] 이인제 또한 경쟁적으로 전두환, 노태우 사면 복권 공약을 내세웠다.[52][53][54] 결국 1997년 대선에서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세 후보 모두 전두환, 노태우 사면 복권을 경쟁적으로 공약으로 내걸었다.
1997년 7월 21일, 신한국당은 전당대회를 통해 이회창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55] 그러나 악화된 경제 상황, 기아자동차 부도 사태 등으로 신한국당과 이회창의 지지율은 하락했다.[56][57] 이인제의 독자 출마[58] 속에, 신한국당은 김대중 후보의 비자금 사건을 폭로하며 반전을 꾀했다.
신한국당 강삼재 사무총장은 김대중 후보가 노태우에게서 20억 원 외에는 받은 돈이 없다고 했으나 거짓으로 드러났다며 공격했고,[60] 김대중 비자금 공방은 김대중 친인척 명의의 378억 비자금 폭로로 극한 대치에 이르렀다.[65][66] 10월 17일, 신한국당은 김대중을 조세 포탈 및 뇌물 수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67] 김대중 지지자들은 강삼재 의원에게 살해 협박을 하고, 신한국당사 폭파 협박 전화까지 걸었다.[68][69] 같은 날 토론회에서 이회창과 김대중은 비자금 공방을 벌였고, 김대중은 비자금 의혹을 부인했다.[70] 10월 20일 김대중 비자금 수사가 시작되었으나,[71] 다음 날 검찰은 수사를 대선 이후로 유보했다.[72] 이는 제2의 광주사태 우려 및 김태정 검찰총장의 출신 지역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73][74]
이회창은 검찰의 재수사를 요구하며 김영삼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했고,[75] 김영삼 대통령은 11월 7일 신한국당을 탈당했다.[76] 이후 신한국당은 민주당과 합당하여 11월 21일 한나라당을 창당하고, 이회창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했다.[77]
김영삼 정부 말, 친인척 비리, 기업 도산, 외환 위기 등으로 김영삼의 지지율은 하락했다.[78] 이회창은 김영삼의 탈당 요구, 조순과의 단일화, 한나라당 창당 등을 통해 위기를 돌파하려 했으나, 1997년 12월 18일 대선에서 김대중에게 패배했다.[85]
2. 9. 김영삼 정부의 위기와 해체
1997년 김영삼 정부 말기, 김영삼의 친인척 비리, 기업들의 도산, 외환 위기 등으로 김영삼의 지지율이 하락하였다.[78] 신한국당 대선 후보 이회창은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 김영삼의 이인제 지원설, 김대중의 비자금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 유보 결정 등으로 위기에 몰리자 김영삼에게 탈당을 요구했다. 이인제는 15대 대선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이회창에게 패배한 뒤, 1997년 10월 10일 국민신당을 창당했고, 김대중은 새정치국민회의 대선 후보였다.[79]1997년 11월 7일, 이회창과 민주당 총재 조순은 '3김 시대 청산', 'DJP연합'의 부당성 등을 주장하며 당 대 당 통합과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였다.[80] 같은 날 김영삼은 신한국당을 탈당했다. 1997년 11월 21일, 신한국당과 민주당은 통합하여 한나라당을 창당했고, 신한국당은 해산하였다.[81][82][83] 1997년 12월 3일, 김영삼 정부는 IMF 구제금융 차입 조건으로 경제 주권을 IMF에 넘기고 IMF 구제 금융 양해각서를 체결, IMF 체제 공식화를 선언하며 국가 경제 부도를 선언했다. 이로써 한국 경제는 IMF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다.[84] 이회창은 김영삼 탈당 요구, 조순과의 단일화, 한나라당 창당 등을 관철시켰지만, 1997년 12월 18일 대선에서 김대중에게 패배했다. 정권 교체로 한나라당은 야당이 되었고, 보수 정치 세력은 이후 10년 동안 야권에 머물렀다.[85]
3. 평가
민주자유당과 그 후신인 신한국당은 여러 면에서 비판을 받았다. 3당 합당 당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등은 이를 "민주 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정치적 야합"이라고 비난했다.[12]
신한국당은 지역감정을 조장한다는 비판도 받았다.[118] 1996년 3월, 신한국당 선대위원장이었던 박찬종은 통영 유세에서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처벌하지 않았다면 전라도 데모대들이 국가를 위기로 빠트렸을 것"이라는 발언을 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119][120]
1996년 12월 26일에는 노동법 날치기 사건이 발생하여 신한국당의 반민주성이 드러났다. 당시 신한국당은 국회부의장 오세응의 주도로 11개 법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는데,[125] 이 중에는 정리해고를 법제화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124] 이 사건으로 노동계는 총파업에 돌입했고, 국민 여론이 악화되어 결국 1년 뒤 대통령 선거 패배의 한 원인이 되었다.
1997년 대선 과정에서 신한국당은 전두환, 노태우 사면 논란을 일으켰다. 이회창 대표는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사면을 주장했고,[29][30] 김윤환 고문 등도 이에 동조했다.[31]
3. 1. 6.25 전쟁에 대한 만주 폭격 발언
1996년 6월 24일 전방부대를 시찰한 자리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6.25 당시에 만주를 폭격했으면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고 발언하여 여야간 극한 언쟁이 오갔다.[86]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정동영 대변인은 "국가이익을 현저하게 해칠 우려가 있는 발언을 한 것은 대통령의 직무와 관련해 탄핵소추도 가능한 발언이라고 본다"는 논평을 냈고, 집권당인 신한국당의 김철 대변인은 "어느 쪽의 안보를 지키려는 정당인지 의심이 들 정도라는 점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회의는 북한에 대해 그렇게 미안하고 조심스러운지 묻고 싶다"는 논평을 냈다.[86]당시 공방은 김영삼 대통령이 6월 24일 중부전선 시찰 당시 발언으로, 김영삼 대통령은 심각한 북한 상황과 한국전쟁의 참상을 회고하고 당시 맥아더 장군이 주장했던 만주폭격이 가능했더라면 이미 통일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면서 철저한 안보태세를 당부했다.[87] 그러자 새정치국민회의측은 잇따라 비난공세에 나섰고 신한국당측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양쪽 공방은 김영삼 대통령의 발언이 우리 국민의 안보의식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줬다.[87]
새정치국민회의 정동영 대변인은 만주폭격 지지 발언은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중대한 발언이라고 규정했다. 그러자 신한국당 김철 대변인은 전방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과거의 통일의 기회를 아쉬워하면서 젊은 세대들에게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이같은 회상을 한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논평으로 김영삼 대통령을 비호했다.[87]
또 이번 발언이 지금은 우호국이 된 중국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도 논란이 됐다. 정동영 대변인은 한중 우호에 악영향을 초래하고 간접적으로 외환을 불러올 수도 있는 중대한 발언이라는 것이라고 논평했고, 신한국당의 김철 대변인은 반세기 전의 전쟁 상황을 기준한 대통령의 발언이 어떻게 해서 현재의 한중, 한러 관계에 영향을 준다는 얘기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논평을 냈다.[87]
새정치국민회의는 김영삼 대통령이 전국민에게 이 발언을 해명해야 한다고 촉구했고, 신한국당은 당시 공산당을 제외한 대다수 국민이 맥아더의 주장을 지지했으며 지금도 대다수 국민들이 그대로 했다면 통일이 됐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면서, 새정치국민회의가 6.25에 대한 기본적 이해도 결여돼있을 뿐 아니라 어느 쪽 안보를 지키려는 정당인지 의심이 들 정도라고 반박했다.[87]
3. 2. 1997년 대선 당시 신한국당의 전두환 사면에 대한 논란
1997년 4월 6일,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국민 대화합 차원에서 전두환, 노태우 사면에 찬성할 것이라는 보도와 김윤환 신한국당 고문의 사면 건의 보도가 나오면서, 신한국당 내에서 형 확정 전부터 사면 논의가 시작되었다.[29][30]1997년 4월 17일 형 확정 후, 신한국당 내에서 본격적인 사면 논의가 시작되었다. 김윤환 고문 등 구 여권 출신 대선주자들은 사면에 찬성했다. 김윤환 고문은 "부정축재 한 거 환수하고, 여러 가지 한다면은 죄는 주지만은 벌은 안 주었으면 하는 그런 심정이다."라며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발언으로 사면 찬성 분위기를 주도했다.[31] 7월 22일, 법무부는 사면 실무 검토를 마치고 광복절 무렵 사면 가능성을 언급하며 "언제든지 사면시킬 수 있다"고 밝혔다. 결국, 대통령과 정부의 명령만 있으면 대선 이전에 사면 준비가 완료된 셈이었다. 법무부는 추징금 문제를 검토했는데, 노태우는 대부분 보전 처분되어 문제가 없었지만, 전두환은 추징금 2.295조원 중 10%만 확보되어, 나머지에 대해 집행 불능 결정을 내리고 사면에 포함시킬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법무부는 형집행 정지도 검토했지만, 명분이 약하고 재수감 가능성이 있어 제외되었다. 가석방은 형기의 1/3을 채워야 해서 제외되었고, 특별 사면만이 가능한 길이었지만 대통령의 의중에 달려있었다.[32]
1997년 8월 31일,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대통령 후보는 "김영삼 대통령 임기중에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하여 동서화합의 길이 열리도록 하겠다"는 의견을 밝혔다.[33][34][35] 9월 1일 SBS 프로그램에서 김대중 총재는 용서론을 강조했다.[36] 경향신문은 이를 두고 “‘화해의 정치인’ 부각, 영남 끌어안기, 6공 세력 포용, 색깔론 차단, 광주 여론” 등을 노린 것이라고 분석했다.[37] 10월 23일, 새정치국민회의 박정수 부총재는 국회 연설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전두환·노태우를 사면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면 대대적인 사면이 단행될 것"이라고 밝혔다.[38][39] 새정치국민회의 박정수 부총재는 정치 보복을 하지 않겠다는 김대중 후보의 약속을 강조하며 전두환·노태우 사면을 촉구했다.[40]
9월 1일, 이회창은 김대중의 사면론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김영삼 대통령에게 추석 전 사면을 요구했다.[41][42][43] 김영삼 대통령은 "국민적 공감대"를 이유로 거절했다.[44] 정치권의 경쟁적인 사면 공약에 사회 각계에서 비판이 쏟아졌다.[45] 9월 12일, 김영삼 대통령은 입장을 바꿔 대선 전 사면을 시사했다.[46] 이회창의 사면 공약에 전두환은 "고맙다"며 기뻐했고, 이회창은 "추석 때 나오시기를 바랐는데 아쉽다"고 화답했다.[47][48][49][50] 9월 24일, 이회창은 CBS, 경실련 간담회에서 "전직 대통령 구금은 바람직하지 않고 대통합 차원에서 석방해야 한다"며 사면론에 찬성했다.[51]
이회창, 김대중의 사면 공약에 이인제도 동참했다.[52][53][54] 결국 1997년 대선에서 세 후보 모두 경쟁적으로 사면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3. 3. 노태우, 김영삼 갈등
노태우는 후계자로 박철언을 내정하고 있었으나, 민주계 김영삼의 반발로 취소되었다. 이후 민주자유당 당권을 놓고 김영삼과 갈등하면서 박철언 등을 후계자로 내정하기도 했다. 이에 김영삼은 항의하며 집단 탈당과 반정부 투쟁까지 고려하였다. 결국 노태우는 김영삼에게 대권과 당권을 넘기고 1992년 8월 28일 민자당 총재직을 사퇴하였다. 같은 날 김영삼이 민주자유당 총재로 취임하면서 노태우는 민자당 명예총재에 선출되었으나, 9월 18일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모든 당직을 내놓고 민자당 탈당을 선언했다.[23]1992년 10월 5일, 노태우는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거국중립내각 구성을 선언,[23] 10월 9일 사상 첫 여당이 없는 중립내각이 출범하였다.[24] 그러나 이는 대선 직전에 대통령이 탈당하는 선례를 만들기도 했다.
민자당 대선 후보였던 김영삼은 노태우 대통령의 사돈인 SK그룹에 대한 이동통신사업 허가 문제, 한준수 당시 연기군수가 폭로한 '관권선거 의혹사건'에 대한 중립 선거관리내각 구성을 위한 부분 개각 요구로 노태우 대통령과 충돌했고, 1992년 9월 18일 노태우 대통령은 민자당을 탈당했다.
3. 4. 지역감정 조장 논란
3당 합당으로 불거진 '영남패권주의 논란'이나 초원복집 사건과 공천, 유세 등을 통해 지역감정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았다.[118]1996년 3월, 신한국당 선대위원장이었던 박찬종은 통영 유세에서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처벌하지 않았다면 전라도 데모대들이 국가를 위기로 빠트렸을 것"이라는 지역감정 조장 발언으로 큰 비난을 받았다.[119][120] 파문이 일자 박찬종은 "김영삼 대통령이 전두환, 노태우 두 전 대통령을 봐줬다면 전라도 데모대들과 정의로운 학생, 젊은이들이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속하라며 시위를 벌여 불행한 일이 생겼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이는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최대 피해자가 전라도 사람들이기 때문에 한 표현이었을 뿐"이라고 해명했으나,[121] 그 당시 박찬종의 이 발언은 정치권에서 지역감정을 조장한 상식 이하의 발언으로 비난을 받았다.[122]
3. 5. 공화계 탈당
내각제 개헌 약속 위반과 지역 감정 논란 등으로 계파 갈등이 빚어져 김종필을 비롯한 공화계 인사들이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였다.3. 6. 선거 결과에 대한 정치 공작
신한국당은 대대적인 당 개편에도 불구하고 여소야대라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정치공작을 펼쳐 야권 의원들을 대규모로 영입했는데, 이 때문에 국민들의 여론이 크게 악화되었다.3. 7. 노동법 날치기 사건
1996년 12월 26일에 일어난 노동법 날치기 사건은 신한국당의 반민주성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당시 신한국당 국회의원[124] 154명이 잠입했는데 국회의장이 없었다. 그러자 국회부의장 오세응이 개회를 선언하고, 법안 11개를 짧은 시간 안에 날치기로 통과시켰다.[125] 이에 대표 야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 의원 전원이 항의 농성에 들어갔고, 검은 넥타이를 맨 뒤 여당 의원들의 명패에 검은 천을 씌웠다.[126] 이 사건은 정리해고를 법제화한 것이었으며, 사건 이후 노동계는 전면 총파업에 돌입했다.[124] 결국 국민들의 여론이 크게 악화되었고, 이는 1년 뒤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4. 역대 지도부
신한국당의 역대 지도부는 다음과 같다.
4. 1. 총재
신한국당의 총재는 당을 대표하고 당무를 총괄하는 직위였다. 신한국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까지 포함하면 김영삼 대통령과 이회창 총재가 이 직위를 역임했다.4. 1. 1. 민주자유당
대수 | 역대 총재 | 임기 |
---|---|---|
1 | 노태우 | 1990년 5월 9일 ~ 1992년 5월 18일 |
2 | 1992년 5월 19일 ~ 1992년 8월 27일 | |
3 | 김영삼 | 1992년 8월 28일 ~ 1995년 2월 6일 |
4 | 1995년 2월 7일 ~ 1995년 12월 6일 |
4. 1. 2. 신한국당
4. 2. 대표최고위원
신한국당의 역대 대표최고위원은 다음과 같다.대수 | 역대 대표 | 직함 | 임기 |
---|---|---|---|
1 | 김윤환 | 대표위원 | 1995년 12월 6일 ~ 1996년 5월 6일 |
2 | 이홍구 | 대표위원 | 1996년 5월 7일 ~ 1997년 3월 12일 |
3 | 이회창 | 대표위원 | 1997년 3월 13일 ~ 1997년 6월 30일 |
(임시) | 이만섭 | 대표권한대행 | 1997년 7월 1일 ~ 1997년 7월 20일 |
4 | 이회창 | 대표위원 | 1997년 7월 21일 ~ 1997년 9월 29일 |
5 | 이한동 | 대표위원 | 1997년 9월 30일 ~ 1997년 11월 21일 |
4. 2. 1. 민주자유당
대수 | 역대 대표 | 임기 |
---|---|---|
1 | 김영삼 | 1990년 5월 9일 ~ 1992년 8월 27일 |
2 | 김종필 | 1992년 8월 28일 ~ 1995년 1월 20일 |
3 | 이춘구 | 1995년 2월 7일 ~ 1995년 8월 20일 |
4 | 김윤환 | 1995년 8월 21일 ~ 1995년 12월 6일 |
4. 2. 2. 신한국당
대수 | 역대 대표 | 직함 | 임기 |
---|---|---|---|
1 | 김윤환 | 대표위원 | 1995년 12월 6일 ~ 1996년 5월 6일 |
2 | 이홍구 | 대표위원 | 1996년 5월 7일 ~ 1997년 3월 12일 |
3 | 이회창 | 대표위원 | 1997년 3월 13일 ~ 1997년 6월 30일 |
(임시) | 이만섭 | 대표권한대행 | 1997년 7월 1일 ~ 1997년 7월 20일 |
4 | 이회창 | 대표위원 | 1997년 7월 21일 ~ 1997년 9월 29일 |
5 | 이한동 | 대표위원 | 1997년 9월 30일 ~ 1997년 11월 21일 |
5. 주요 선거 결과
신한국당의 주요 선거 결과는 아래와 같다.
5. 1. 대통령 선거
선거 | 후보 | 득표수 | 득표율 | 결과 |
---|---|---|---|---|
1992년 대선 | 김영삼 | 9,977,332 | 41.96% | 당선 |
5. 2. 국회의원 선거
연월일 | 대 | 의석 수 (지역구+비례대표) | 득표율 |
---|---|---|---|
1996년 4월 11일 | 제15대 총선 | 139석 (121석+18석) | 34.5% |
5. 3. 지방선거
선거 | 광역자치단체장 | 광역의회 | 기초자치단체장 |
---|---|---|---|
1995년 |
6. 역대 전당대회
신한국당은 1997년 11월 21일 전당대회에서 민주당과의 합당을 통해 한나라당을 창당할 것을 결의했다.[1]
6. 1. 민주자유당
민주자유당은 1990년 3당 합당으로 창당된 정당이다.1990년 5월 9일 제1차 전당대회에서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 박태준 민주정의당 대표가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노태우 대통령이 총재로 추대되었다. 노태우 총재는 김영삼을 대표최고위원으로 지명했다.
1992년 8월 28일 상무위원회에서 김영삼 대표가 총재로 선출되었고, 김종필 최고위원이 대표로 지명되었다.
1993년 4월 9일 상무위원회에서 최고위원제가 폐지되고 대표위원제가 신설되는 당헌개정안이 의결되었다.
1995년 12월 6일, 민주자유당 당무회의는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변경할 것을 의결했다.[1]
6. 1. 1. 민주자유당 제1차 전당대회
1990년 5월 9일, 민주자유당 창당 후 처음 열린 전당대회에서는 최고위원회의를 중심으로 하는 단일성 집단지도체제 당헌과 내각제 추진 의사를 포함하는 강령을 채택하였다. 이 전당대회에서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 박태준 민주정의당 대표가 최고위원으로 호천되었다. 김영삼 최고위원의 제청으로 노태우 대통령이 총재로 추대되었고, 노태우 총재는 김영삼 최고위원을 대표최고위원으로 지명했다.6. 1. 2. 민주자유당 제2차 전당대회
1990년 5월 9일, 민자당은 창당 후 처음으로 전당대회를 열었다. 이 전당대회에서는 최고위원회의를 중심으로 하는 단일성 집단지도체제 당헌을 채택하고, 내각제 추진 의사를 포함하는 강령을 채택하였다. 또한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 박태준 민주정의당 대표를 최고위원으로 추대하였다. 김영삼 최고위원의 제청에 따라 노태우 대통령이 총재로 추대되었고, 노태우 총재는 김영삼 최고위원을 대표최고위원으로 지명했다.[1]6. 1. 3. 1992년 8월 28일 민주자유당 상무위원회
1992년 8월 28일, 민주자유당 상무위원회는 사퇴한 노태우 총재를 명예 총재로 추대하고, 김영삼 대표를 총재로 선출했다. 김영삼 총재는 김종필 최고위원을 대표로 지명했다.6. 1. 4. 1993년 4월 9일 민주자유당 상무위원회
1993년 4월 9일, 민주자유당 상무위원회는 최고위원제를 폐지하고 대표위원제를 신설하는 단일지도체제 당헌개정안을 의결했다.[3]6. 1. 5. 민주자유당 제3차 전당대회
1990년 5월 9일, 창당 후 처음 열린 민자당 전당대회는 최고위원회의를 중심으로 하는 단일성 집단지도체제 당헌을 채택하고 내각제 추진 의사를 포함하는 강령을 채택했다.[1] 이 전당대회에서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 박태준 민주정의당 대표가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1] 김영삼 최고위원의 제청에 따라 노태우 대통령이 총재로 추대되었고, 노태우 총재는 김영삼 최고위원을 대표최고위원으로 지명했다.[1]6. 1. 6. 1995년 12월 6일 민주자유당 당무회의
1995년 12월 6일, 민주자유당 당무회의는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변경할 것을 의결했다.[1]6. 2. 신한국당
1995년 12월 6일 민주자유당이 당명을 변경하여 신한국당이 창당되었다. 신한국당은 1996년 2월 6일 전당대회에서 당헌을 채택하고 정강정책을 통해 일류국가건설 의지를 밝혔다.[1] 1997년 9월 30일 전당대회에서는 이회창 후보를 총재로 선출하고 김영삼 대통령을 명예총재로 추대했으며, 이한동 고문을 새 대표최고위원으로 지명하였다.[1] 1997년 11월 21일 전당대회에서는 민주당과의 합당을 통해 한나라당을 창당할 것을 결의했다.6. 2. 1. 신한국당 제1차 전당대회
1996년 2월 6일, 신한국당 전당대회는 당헌을 채택해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변경하고, 정강정책을 통해 일류국가건설 의지를 담았다.6. 2. 2. 신한국당 제2차 전당대회
1996년 2월 6일, 신한국당 전당대회는 당헌을 채택해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변경하고, 정강정책으로 일류국가건설 의지를 채택했다.[1]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 신한국당 후보 경선
6. 2. 3. 신한국당 제3차 전당대회
1997년 9월 30일, 신한국당 전당대회는 이회창 후보를 총재로 선출한 뒤 김영삼 대통령을 명예총재로 추대했다. 이후 이회창 총재는 집단지도체제로 개편된 당헌에 따라 이한동 고문을 새 대표최고위원으로 지명하고 전당대회는 이를 인준하였다.[1]6. 2. 4. 신한국당 제4차 전당대회
1996년 2월 6일 열린 신한국당 전당대회에서는 당명 변경을 포함한 당헌 개정안과 일류국가 건설 의지를 담은 정강정책을 채택했다.1997년 9월 30일 열린 전당대회에서는 이회창 후보를 총재로 선출하고 김영삼 대통령을 명예총재로 추대했다. 이회창 총재는 집단지도체제로 변경된 당헌에 따라 이한동 고문을 새 대표최고위원으로 지명했으며, 전당대회는 이를 인준하였다.
1997년 11월 21일 전당대회에서는 민주당과의 합당을 통해 한나라당을 창당할 것을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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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8·15 사면 실무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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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전)|盧(노)씨 사면 결정 김(김)대통령 임기 내 "김대중(김대중) 총재 국민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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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전)·盧(노)씨 현 정권서 사면해야” 김대중 총재 밝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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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의 정치인' 부각 영남 끌어안기 6공 세력들도 포용 색깔론 차단 효과까지 ‘용서’ 광주 여론도 한몫 국민회의 김대중(김대중) 총재가 정치권의「뜨거운 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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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영삼 대통령.이회창 대표,두 전직 대통령 특별 사면 파문 관련 심야 긴급 회동
http://imnews.imbc.c[...]
mbc
1997-09-02
[43]
뉴스
전노씨 추석 이후로 사면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7-09-01
[44]
뉴스
"전·노 추석전 사면 불가"
http://newslibrary.n[...]
매일경제
1997-09-03
[45]
뉴스
한가위'정치오염'
http://newslibrary.n[...]
한겨레신문
1997-09-11
[46]
뉴스
전·노씨 대선전 사면 검토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7-09-18
[47]
뉴스
옥중 전씨 사면건의 고맙다, 이회창 대표에 구두 메세지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7-09-24
[48]
뉴스
이대표-전씨 비밀메시지 오갔다 사면파동후 변호사 통해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7-09-24
[49]
뉴스
이대표-전씨 비밀메시지 오갔다 사면파동후 변호사 통해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7-09-24
[50]
뉴스
사면 노력해줘 고맙다” 전씨, 이회창대표에 인사말
http://newslibrary.n[...]
한겨레
1997-09-24
[51]
뉴스
이회창, 대표인선 원점 재검토
http://newslibrary.n[...]
한겨레
1997-09-24
[52]
뉴스
97대선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 경남,부산 유세,집권후 정계
http://imnews.imbc.c[...]
mbc
1997-12-15
[53]
뉴스
이인제 pk다지기
http://newslibrary.n[...]
한겨레
1997-12-16
[54]
뉴스
빠른 시일 내에 전노씨 사면, 이인제 후보 기자회견서 밝혀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7-12-16
[55]
뉴스
與 대선후보 李會昌씨
동아일보
1997-07-22
[56]
뉴스
김대중 지지율 계속 상승
http://newslibrary.n[...]
한겨레
1997-10-03
[57]
뉴스
2위 혼전…당선가능성 이회창씨가 이인제씨 앞서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7-10-06
[58]
뉴스
이인제 경기지사 9월초 경기지사직 사퇴 결정
http://imnews.imbc.c[...]
mbc
1997-08-20
[59]
뉴스
신한국당, DJ 비자금 670억 조성했다 주장
http://imnews.imbc.c[...]
mbc
1997-10-07
[60]
뉴스
김대중 비자금 670억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7-10-08
[61]
뉴스
null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7-10-08
[62]
뉴스
김대중 총재, 관훈 토론회에서 670억 비자금은 사실무근
http://imnews.imbc.c[...]
mbc
1997-10-08
[63]
뉴스
신한국당, 김대중 비자금 입출금 계좌와 수표 일련번호 공개
http://imnews.imbc.c[...]
mbc
1997-10-09
[64]
뉴스
신한국당,국민회의 김대중 총재 기업 돈 134억 받았다 주장
http://imnews.imbc.c[...]
mbc
1997-10-10
[65]
뉴스
비자금 극한 대치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7-10-09
[66]
뉴스
신한국당, DJ 친인척 378억 비자금
http://imnews.imbc.c[...]
mbc
1997-10-14
[67]
뉴스
신한국 김대중총재 고발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7-10-17
[68]
뉴스
비자금 전쟁 여야 표정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7-10-12
[69]
뉴스
경찰, 여야 지구당 경비 강화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7-10-10
[70]
뉴스
여야 대선 후보들, 비자금 문제 정면 격돌
http://imnews.imbc.c[...]
mbc
1997-10-17
[71]
뉴스
김대중 총재 비자금 의혹 검찰 공식 수사 선거전 종결 가능
http://imnews.imbc.c[...]
mbc
1997-10-20
[72]
뉴스
검찰,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 비자금 수사 유보
http://imnews.imbc.c[...]
mbc
1997-10-21
[73]
뉴스
각하 제 2의 광주사태가 올 것입니다
http://newslibrary.n[...]
한겨레신문
1998-02-02
[74]
뉴스
김태정 검찰총장 임명, 야권 웬일이지 기우뚱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7-08-08
[75]
뉴스
이회창 총재, 김영삼 대통령에게 탈당 요구
http://imnews.imbc.c[...]
mbc
1997-10-22
[76]
뉴스
김영삼대통령, 정치권 허위사실 유포 엄단
http://imnews.imbc.c[...]
mbc
1997-11-07
[77]
뉴스
3김 청산 내건 한나라당 공식 출범
http://imnews.imbc.c[...]
mbc
1997-11-21
[78]
웹사이트
대통령 친인척 비리 수사로 본 레임덕
http://www.naeil.com[...]
내일신문
2011-12-16
[79]
웹사이트
탁월한 리더십 불구 대권ㆍ개헌의 꿈 못 이뤄… 절반의 성공
http://economy.hanko[...]
서울경제
2011-12-13
[80]
뉴스
신한국-민주당 합당 선언, 후보 이회창 총재 조순
http://newslibrary.n[...]
한겨레신문
1997-11-08
[81]
뉴스
창당 14주년 맞은 한나라당 충북도당
http://www.cbinews.c[...]
충북인뉴스
2011-11-22
[82]
뉴스
무엇을 위한 신당인가
https://news.naver.c[...]
국민일보
2002-08-12
[83]
뉴스
역대 권력투쟁의 교훈
http://news.nate.com[...]
이데일리
2006-08-06
[84]
간행물
IMF 구제금융 대신 모라토리엄 선언했다면
http://h21.hani.co.k[...]
한겨레21
2010-11-05
[85]
뉴스
대한민국 정치권 역대 신당 창당 사례는?
https://news.naver.c[...]
뉴시스
2011-11-27
[86]
뉴스
여야, 김대통령의 6.25 만주 폭격 발언 놓고 치열한 성명전
https://imnews.imbc.[...]
mbc뉴스데스크
1996-06-26
[87]
뉴스
김영삼대통령의 6.25 만주폭격주장 회고 관련 안보논쟁 가열
http://mn.kbs.co.kr/[...]
kbs뉴스
1996-06-26
[88]
뉴스
김영삼 대통령 만주폭격 발언 일파만파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1996-06-27
[89]
뉴스
여야 만주폭격 공방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96-06-27
[90]
뉴스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입장 밝힐 예정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7-04-08
[91]
뉴스
李(이)대표全(전)|盧(노)씨 사면건의 검토 金潤煥(김윤환)고문"대법 刑(형)확정후 실시 이미 건의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7-04-06
[92]
뉴스
전두환.노태우 전직 대통령 최종 판결후 사면 문제 제기
http://imnews.imbc.c[...]
mbc뉴스
1997-04-17
[93]
뉴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팔일오 사면 실무 검토
http://imnews.imbc.c[...]
mbc뉴스
1997-07-22
[94]
뉴스
全(전)|盧(노)씨 사면결정金(김)대통령 임기내" 金大中(김대중)총재 국민회의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7-08-31
[95]
뉴스
全(전)·盧(노)씨 현정권서 사면해야” 김대중총재 밝혀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7-08-31
[96]
뉴스
김대중 총재,김대통령 임기내 전직대통령 사면 요청
http://imnews.imbc.c[...]
mbc 뉴스
1997-08-31
[97]
뉴스
국민회의와 자민련, 두 전직 대통령 사면 시기 이견
http://imnews.imbc.c[...]
mbc뉴스
1997-09-01
[98]
뉴스
'화해의 정치인'부각 영남 끌어 안기6共(공)세력들도 포용 색깔론 차단 효과까지 ‘용서’광주여론도 한몫 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김대중))총재가 정치권의「뜨거운 감자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7-09-01
[99]
뉴스
"全(전)·盧(노)씨 사면 바람직"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7-10-23
[100]
뉴스
집권하면 대사면 단행” 국민회의 국회 대표연설 박정수 국민회의 부총재
http://newslibrary.n[...]
한겨레
1997-10-23
[101]
뉴스
국민회의, 전두환.노태우씨 사면 촉구
http://imnews.imbc.c[...]
mbc뉴스
1997-10-23
[102]
뉴스
신한국당 이회창,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추석전 조기 석방 건의
http://imnews.imbc.c[...]
mbc
1997-09-01
[103]
뉴스
김영삼 대통령.이회창 대표,두 전직 대통령 특별 사면 파문 관련 심야 긴급 회동
http://imnews.imbc.c[...]
mbc
1997-09-02
[104]
뉴스
전노씨 추석 이후로 사면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7-09-01
[105]
뉴스
"全(전)·盧(노) 추석전 사면 不可(불가)"
http://newslibrary.n[...]
매일경제
1997-09-03
[106]
뉴스
한가위'정치오염'
http://newslibrary.n[...]
한겨레신문
1997-09-11
[107]
뉴스
全(전)·盧(노)씨 대선前(전) 사면 검토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7-09-18
[108]
뉴스
옥중 전씨 사면건의 고맙다, 이회창 대표에 구두 메세지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7-09-24
[109]
뉴스
李(이)대표-全(전)씨 비밀메시지 오갔다 사면파동후 변호사 통해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7-09-24
[110]
뉴스
李(이)대표-全(전)씨 비밀메시지 오갔다 사면파동후 변호사 통해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7-09-24
[111]
뉴스
사면 노력해줘 고맙다” 전씨, 이회창대표에 인사말
http://newslibrary.n[...]
한겨레
1997-09-24
[112]
뉴스
이회창, 대표인선 원점 재검토
http://newslibrary.n[...]
한겨레
1997-09-24
[113]
뉴스
97대선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 경남,부산 유세,집권후 정계
http://imnews.imbc.c[...]
mbc
1997-12-15
[114]
뉴스
이인제 pk다지기
http://newslibrary.n[...]
한겨레
1997-12-16
[115]
뉴스
빠른 시일 내에 전노씨 사면, 이인제 후보 기자회견서 밝혀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7-12-16
[116]
뉴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 사면에 여야 모두긍정적 반응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7-12-21
[117]
뉴스
全(전)-盧(노)씨 사면 「12.12사태」서「12.22석방」까지 뒤바뀐 영욕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7-12-22
[118]
뉴스
<대선(大選)현장> 유세장 지역감정 조장 빈발
http://media.daum.ne[...]
연합뉴스
1997-12-12
[119]
뉴스
박찬종씨'지역감정'발언 물의
http://newslibrary.n[...]
한겨레신문
1996-02-28
[120]
뉴스
朴燦鍾(박찬종)씨 데모대발언 5.18단체 사과 요구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6-02-29
[121]
뉴스
박찬종씨 데모대발언 해명
http://newslibrary.n[...]
한겨레신문
1996-02-29
[122]
뉴스
정치인들 지역감정 조장 여전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6-03-09
[123]
뉴스
97 대선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 영남 득표전
http://imnews.imbc.c[...]
mbc
1997-12-16
[124]
웹인용
힘들게 대기업 합격, 그런데 출근은 하지 마라?
http://www.pressian.[...]
2013-08-18
[125]
웹인용
신한국당,노동법 개정안과 안기부법 개정안 기습처리[김상수]
https://web.archive.[...]
2013-08-18
[126]
웹인용
야당, 신한국당의 법안 기습처리 관련 무효투쟁 결의[김세용]
https://web.archive.[...]
2013-08-18
관련 사건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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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미국에 잠시 다녀오겠다···당이 날 버려”
권오을 전 사무총장 “이재명 지지” 선언…민주당 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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