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폰 나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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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돌프 폰 나사우는 1276년 또는 1277년 나사우 백작위를 상속받았으며, 1292년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쾰른 대주교의 지원을 받아 선출되었으나, 선제후들의 요구에 따라 권력이 제한적이었다. 재위 기간 동안 봉건제를 활용하여 세수를 늘리고 영토를 확장하려 했지만, 튀링겐 지역을 매입한 것이 선제후들의 반발을 사 폐위되었다. 1298년 괼하임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망했으며, 이후 슈파이어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는 19세기에 기념물과 초상화로 재조명되었으며, 나사우 가문의 훈장에도 그의 이름이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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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폰 나사우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아돌프 폰 나사우 |
출생일 | 1255년 |
사망일 | 1298년 7월 2일 (43세) |
사망지 | 괼하임 |
매장지 | 슈파이어 대성당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작위 정보 | |
작위 | 독일의 왕 (공식적으론 로마인의 왕) |
재위 기간 | 1292년 5월 5일 – 1298년 6월 23일 |
대관식 | 1292년 6월 24일, 아헨 대성당 |
전임자 | 루돌프 1세 |
후임자 | 알브레히트 1세 |
나사우 백작 정보 | |
작위 | 나사우 백작 |
재위 기간 | 1276년 경 – 1298년 7월 2일 |
전임자 | 발람 2세 |
후임자 | 루프레히트 6세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이마기나 폰 이젠부르크림부르크 |
왕가 | 나사우 가문 |
아버지 | 발람 2세 |
어머니 | 카체넬른보겐의 아델하이트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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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문
아돌프는 독일의 작은 영지를 다스리던 백작 가문 출신이다. 그는 1255년경 나사우 백작 발람 2세와 카체넬른보겐의 아델하이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제로는 1300년에 트리어 대주교로 임명된 나사우의 디터가 있다.
2. 1. 혼인 관계
아돌프는 1270년에 이젠부르크-림부르크의 이마기나 (1313년 이후 사망)와 혼인했다. 이마기나는 이젠부르크림부르크의 게를라흐 4세와 블리스카스텔의 이마기나의 딸이었다. 이마기나의 자매인 이젠부르크-림부르크의 아그네스는 쾰른 대주교 베스터부르크의 지그프리트 2세의 형제인 베스터부르크의 하인리히와 혼인했다.아돌프와 이마기나 사이에는 여덟 명의 자녀가 있었다:
이름 | 생몰년 및 주요 사항 |
---|---|
하인리히 | 어린 나이에 사망 |
루프레히트 | 1304년 12월 2일 사망, 보헤미아의 바츨라프 2세의 딸 아그네스와 약혼 |
나사우비스바덴 백작 게를라흐 1세 | |
아돌프 | 1292년–1294년 |
나사우비스바덴의 발람 3세 | |
아델하이트 | 1338년 5월 26일 사망, 클라렌탈 대수도원 소속 |
이마기나 | 어린 나이에 사망 |
메히틸트 | 1280년 이전 – 1323년 6월 19일 하이델베르크에서 사망, 오버바이에른 공작 말더듬이 루돌프 1세와 혼인 |
1276년 혹은 1277년, 아돌프는 아버지 발람 2세의 뒤를 이어 나사우 백작이 되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타우누스산맥 남쪽의 영지를 상속받았으며, 이트슈타인과 조넨베르크를 주요 거점으로 삼았다. 백작 시절 아돌프는 엡슈타인 영주들과의 분쟁(Nassauisch-Eppsteinische Fehdede)을 겪고 이를 해결했으며, 이트슈타인에 도시 특권을 부여하는 등 영지를 관리하고 강화하는 데 힘썼다. 또한 숙부를 통해 합스부르크의 루돌프 1세 국왕과 관계를 맺고, 쾰른 대주교 및 마인츠 대주교 등과 협력하며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정치적 입지를 다져나갔다. 그는 당시 귀족으로서는 드물게 독일어, 프랑스어, 라틴어 등 여러 언어에 능통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나사우 백작 시절
3. 1. 영지 상속 및 확장
1276년 혹은 1277년에 아돌프는 아버지로부터 나사우 백작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타우누스산맥의 란강 남쪽에 있는 가문의 재산을 상속받았는데, 여기에는 비스바덴, 이트슈타인을 영지로 포함했고, 보름스 주교구 하에 있던 바일부르크의 폭트령도 있었다. 또한 그는 나사우와 라우렌부르크 성 인근 가문의 본거지 소유권도 공유했다.
1280년경, 아돌프는 엡슈타인 영주들과 '나사우-엡슈타인 원한'(Nassauisch-Eppsteinische Fehdede) 관계가 되었는데, 이 분쟁 중에 비스바덴이 크게 파괴되었고 조넨베르크 성은 무너졌다. 이 원한 관계는 1283년에 마무리되었고, 이후 비스바덴 및 조넨베르크 성이 재건되었다. 이트슈타인과 함께 조넨베르크는 아돌프의 주요 거처가 되었다. 그는 1287년 이트슈타인에 도시 특권을 부여하고 요새 시설을 건설하여 영지를 강화했다.
숙부인 카체넬른보겐 백작 에버하르트 1세를 통해 아돌프는 합스부르크의 루돌프 1세 국왕의 총애를 얻게 되었다. 루돌프 1세는 그에게 베츨라어 지역의 칼스문트 성에 대한 소유권을 수여했고, 1년 뒤에는 카우프 인근 구텐펠스 성도 하사했다. 구텐펠스 성을 받으면서 그는 라인 궁정백의 가신이 되었다.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된 이후, 아돌프는 자신의 영지 확장에 더욱 힘썼다. 1294년 1월 17일, 그는 보름스 주교구에서 400 파운드에 바일부르크를 매입했다. 그는 1295년에 바일부르크에 도시 특권을 부여했으며, 또한 1296년 비스바덴 인근에 글라라 수녀회 소속의 클라렌탈 대수도원을 세웠다.
3. 2. 분쟁과 도시 특권 부여
1280년경, 아돌프는 엡슈타인 영주들과 이른바 '나사우-엡슈타인 원한'(Nassauisch-Eppsteinische Fehdede)이라는 분쟁을 겪었다. 이 분쟁 중에 비스바덴이 초토화되었고 조넨베르크 성은 파괴되었다. 이 원한 관계는 1283년에 해결되었으며, 이후 비스바덴과 조넨베르크 성은 다시 재건되었다. 이트슈타인과 함께 조넨베르크는 아돌프의 거처가 되었다. 그는 1287년 이트슈타인에 도시 특권을 부여하고 요새 시설을 건설했다.
3. 3.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관계
숙부인 카체넬른보겐의 에버하르트 1세를 통해 아돌프는 합스부르크의 루돌프 1세 국왕의 총애를 얻게 되었다. 루돌프 1세는 그에게 베츨라어 지역의 칼스문트 성에 대한 소유권을 수여했고, 1년 뒤에는 카우프 인근 구텐펠스 성도 수여했다. 구텐펠스 성을 받으면서 그는 라인 궁정백의 가신이 되었다.
3. 4. 초기 정치 활동
1276년 혹은 1277년, 아돌프는 아버지로부터 나사우 백작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는 타우누스산맥의 란강 남쪽에 있는 가문의 영지를 상속했는데, 여기에는 비스바덴, 이트슈타인 등이 포함되었고 보름스 주교구 아래에 있던 바일부르크의 폭트 지위도 있었다. 또한 나사우와 라우렌부르크 성 인근 가문 본거지의 소유권도 일부 가졌다.
1280년경, 아돌프는 엡슈타인 영주들과 분쟁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비스바덴이 파괴되고 조넨베르크 성도 무너졌다. 이 분쟁은 1283년에 해결되었고, 이후 비스바덴과 조넨베르크 성은 재건되었다. 아돌프는 이트슈타인과 조넨베르크를 자신의 거처로 삼았으며, 1287년에는 이트슈타인에 도시 특권을 부여하고 요새를 건설했다.
숙부인 카체넬른보겐의 에버하르트 1세를 통해 아돌프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 국왕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루돌프 1세는 그에게 베츨라어 지역의 칼스문트 성과 1년 뒤 카우프 인근의 구텐펠스 성 소유권을 주었다. 구텐펠스 성을 통해 그는 라인 궁정백의 가신이 되었다.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되기 전까지 아돌프의 정치 활동은 주로 쾰른 대주교의 동맹(Bundesgenosse)으로서의 역할에 집중되었다. 그는 특정 직위는 없었지만, 미틀라인과 마인츠 지역의 정치 문제에 쾰른 및 마인츠 대주교들과 함께 개입하며 영향력을 키웠다. 또한 그는 독일어, 프랑스어, 라틴어에 능통했는데, 이는 당시 귀족들 사이에서는 드문 능력이었다.
4. 독일 왕 선출
합스부르크의 루돌프 1세가 1291년 7월 15일 사망하자, 그의 아들 알브레히트를 후계자로 세우려는 시도는 선제후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특히 쾰른 대주교 베스터부르크의 지그프리트 2세와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2세는 알브레히트의 선출에 강력히 반대했다.
쾰른 대주교 지그프리트는 왕위가 세습되어서는 안 되며 선제후들에 의해 자유롭게 선출되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고, 마인츠 대주교 게르하르트 2세, 트리어 대주교 보헤문트 1세 등 다른 선제후들을 설득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인물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했던 나사우의 아돌프가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선제후들은 아돌프가 자신들의 요구를 수용하고 광범위한 양보를 약속하는 조건으로 그를 지지하기로 합의했다. 아돌프는 선출을 위해 안더나흐 조약 등을 통해 선제후들에게 영토, 재정적 지원, 정치적 권한 등 상당한 이권을 약속해야 했다.
결국 1292년 5월 5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마인츠 대주교가 모든 선제후들을 대표하여 아돌프를 독일 왕으로 선출했다. 아돌프는 같은 해 6월 24일 아헨에서 쾰른 대주교 주관 하에 대관식을 치렀다. 비록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하지는 못했지만, 독일 제후들은 그를 사실상의 황제로 인정했다.
4. 1. 선제후들의 갈등과 아돌프의 부상
- 제국 자유 도시(도르트문트, 뒤스부르크, 에센 등), 성, 재화(은 25,000 마르크) 담보 제공
* 지그프리트의 정적 배제 및 지원 약속
* 담보 제공 후 대관식 진행 약속선거 전 최초 합의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2세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를 알브레히트에게서 회수하여 양도 약속 (아버지 오타카르 2세의 옛 영토 회복 지원)
* 알브레히트가 불응 시 1년 내 강제 집행 약속1292년 6월 30일 합의 (선거 후) 마인츠 대주교 게르하르트 2세 제국 자유 도시 뮐하우젠, 노르트하우젠 양도 (튀링겐 지역 이권)
* 재정적 이익 제공
* 게르하르트의 정적 배제 약속선거 후 합의 라인 궁정백 루트비히 2세 상대적으로 적은 이권 선거 후 합의 트리어 대주교 보헤문트 1세 상대적으로 적은 이권 선거 후 합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