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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퀴테인의 프로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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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퀴테인의 프로스페르는 5세기에 활동한 기독교 신학자이자 작가이다. 그는 아키텐 출신으로, 펠라기우스주의에 반대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을 옹호하며, 다양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주요 저서로는 『모든 민족의 소명』, 『연대기 요약』, 『장』 등이 있으며,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에서 발췌한 격언과 경구를 모은 『격언』과 『경구』도 저술했다. 프로스페르는 420년대 남부 골에서 일어난 펠라기우스주의 논쟁에서 교황 첼레스티노 1세와 함께 활동하며,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신학 사상은 중세 스콜라 철학과 종교 개혁 시기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저작들은 중세 시대에 널리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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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퀴테인의 프로스퍼
기본 정보
아퀴타니아의 성 프로스페르
아퀴타니아의 성 프로스페르
인물 정보
존칭 접두사성인
이름아퀴타니아의 프로스페르
출생기원전 390년경
사망기원전 455년경
공경로마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루터교
성공회
칭호교부
신학자
출생지로마 속주 아퀴타니아
사망지로마, 이탈리아 관구
축일6월 25일 / 7월 7일
생애
활동 시기5세기
업적로마의 기독교 작가

2. 생애

아퀴테인의 프로스페르는 아키텐 출신으로, 보르도에서 교육받았을 가능성이 있다.[4] 417년경 에 대한 고트족의 침략 이후 아키텐에서 도망쳐 마르세유에 정착했다. 429년에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서신을 주고받았으며,[4] 431년에는 교황 첼레스티노 1세에게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을 호소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했다.

440년 교황 레오 1세 즉위 초, 프로스페르는 에서 레오 1세를 만났을 가능성이 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에서 교황의 비서 또는 공증인으로 활동했다. 마르세유의 게나디우스는 프로스페르가 에우티케스에 맞서 레오 1세의 서한들을 받아썼다는 전통을 언급했다.

프로스페르는 평신도였지만, 당대의 종교적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아우구스티누스를 옹호하고 정통주의를 전파했다.[5] 그의 연대기는 455년까지 이어지며, 연대기 작가 마르켈리누스 코메스가 463년에 그를 언급한 것으로 보아 그 직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주요 저서로는 『신의 은총과 자유 의지에 대하여』(432)가 있으며, 요한 카시아누스의 『담화집』("Collatio")에 반박하기 위해 쓴 것이다. 그는 또한 『연대기 개요』("Epitoma chronicon")(379-455년)를 작성했는데, 이는 여러 차례 업데이트되었으며 마지막은 455년이었다.[6]

3. 저술 활동

아퀴테인의 프로스페르의 저술은 주로 5세기 2분기에 쓰였으며, 고전적인 특징으로 칭찬받지만, 평범하고 지루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9] 프로스페르는 펠라기우스주의에 반대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을 옹호하는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 ''De vocatione omnium gentium'' (모든 민족의 소명): 450년에 쓰여진 이 책은 프로스페르가 신학에 기여한 가장 독창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9]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을 조화시키려 시도했으며,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를 주장한다. 모든 인간이 구원받는 은총을 받지는 못하지만, 하느님의 일반적인 은총은 받는다는 것이 논지이다.
  • ''Epitoma Chronicon'' (연대기 요약): 379년부터 455년까지의 세계사를 다룬 책으로, 펠라기우스주의 논쟁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최근 역사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다.[10]
  • ''Capitulla'' (): 435년과 442년 사이에 쓰여진 이 책은 하느님의 은총의 효능과 필요성을 주장하는 10개의 교리적 요점을 간략하게 나열하고, 교황의 진술로 뒷받침했다.[11] 예정설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아우구스티누스주의의 핵심 교리를 옹호했다.[11]
  • ''Sententia'' (격언) 및 ''Epigrammata'' (경구):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에서 발췌한 392개의 격언(''Sententia'')과 106개의 경구(''Epigrammata'')를 모은 것이다. 진지한 기독교인을 위한 참고서로 사용될 의도로 작성되었으며, 은총과 성육신의 교리에 대한 논의를 담고 있다.[11] 수도원적 영향을 받아, 독자에게 역경 속에서 인내하고, 미덕을 실천하며, 끊임없이 완벽을 추구하도록 권고한다.[11]
  • ''Liber contra Collatorem'' (Collatorem 반박): 교황 식스토 3세 재위 기간에 쓰여진 이 책은 요한 카시아누스의 ''Conlationes''에 반박하며 은총의 필요성에 대한 프로스페르의 최종 견해를 나타낸다.[12]
  • ''Carmen de Providentia Divina'' (신성한 섭리에 관한 시): 반달족과 고트족의 갈리아 침략과 관련하여 섭리의 문제를 논의한 시이다. 이 작품은 과거에 아퀴테인의 프로스페르에게 귀속되었지만, 이 이론은 신뢰를 잃었다.[13]

3. 1. 주요 저서

아퀴테인의 프로스페르의 저술은 주로 5세기 2분기에 쓰였으며, 고전적인 특징으로 칭찬받지만, 평범하고 지루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9]

  • ''De vocatione omnium gentium'' (모든 민족의 소명): 450년에 쓰여진 이 책은 프로스페르가 신학에 기여한 가장 독창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9]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을 조화시키려 시도했으며,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를 주장한다. 모든 인간이 구원받는 은총을 받지는 못하지만, 하느님의 일반적인 은총은 받는다는 것이 논지이다.
  • ''Epitoma Chronicon'' (연대기 요약): 379년부터 455년까지의 세계사를 다룬 책으로, 펠라기우스주의 논쟁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최근 역사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다.[10]
  • ''Capitulla'' (): 435년과 442년 사이에 쓰여진 이 책은 하느님의 은총의 효능과 필요성을 주장하는 10개의 교리적 요점을 간략하게 나열하고, 교황의 진술로 뒷받침했다.[11] 예정설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아우구스티누스주의의 핵심 교리를 옹호했다.[11]
  • ''Sententia'' (격언) 및 ''Epigrammata'' (경구):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에서 발췌한 392개의 격언(''Sententia'')과 106개의 경구(''Epigrammata'')를 모은 것이다. 진지한 기독교인을 위한 참고서로 사용될 의도로 작성되었으며, 은총과 성육신의 교리에 대한 논의를 담고 있다.[11] 수도원적 영향을 받아, 독자에게 역경 속에서 인내하고, 미덕을 실천하며, 끊임없이 완벽을 추구하도록 권고한다.[11]
  • ''Liber contra Collatorem'' (Collatorem 반박): 교황 식스토 3세 재위 기간에 쓰여진 이 책은 요한 카시아누스의 ''Conlationes''에 반박하며 은총의 필요성에 대한 프로스페르의 최종 견해를 나타낸다.[12]


프로스페르의 『연대기 요약』은 테오도어 몸젠에 의해 『독일 역사 총서』(Monumenta Germaniae Historica)의 『소 연대기』(1892)에 수록되었으며,[13] 영어 번역본은 A. C. 머레이 편집 및 번역의 『로마 시대에서 메로빙거 시대의 갈리아로: 독자』 (온타리오, 2003) 62–76쪽에 실려있다.

3. 2. 기타 저서


  • ''Adversus ingratos'' (불감자에게): 펠라기우스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시이다.[9]
  • ''Pro Augustino responsiones'' (아우구스티누스 옹호): 레랭의 빈센트에 맞서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를 옹호하는 세 편의 시이다.[9]
  • ''Epistola ad episcopos Gallorum'' (갈리아 주교들에게 보내는 서한): 교회 일부 구성원들의 펠라기우스주의적 경향을 비판하는 공개 서한이다.[9]
  • ''Carmen de Providentia Divina'' (신성한 섭리에 관한 시): 반달족과 고트족의 침략과 관련하여 섭리의 문제를 논의한 시이다.[9][13] 다만, 이 작품은 프로스페르의 저작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신뢰를 잃었다.[13]

4. 신학

존 애로우스미스는 간과교리(Preterition)에서 아퀴테인의 프로스퍼가 펠라기우스의 교리라고 조롱한 것을 언급하였다. 프로스퍼는 그의 저서 《나라들의 부르심》에서 "구세주의 은혜가 어떤 자들은 간과되며, 교회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들리지 않는다"라고 간과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16]

프로스페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신학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 특히 은총과 자유 의지에 관한 가르침을 옹호하고 전파하는 데 대부분의 저작을 할애했다.[15] 430년 아우구스티누스 사후, 프로스페르는 그의 가르침을 계속 전파했으며, 이를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는 하느님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만,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며, 인간의 자유 의지와 하느님의 주권 사이의 조화를 모색했다. 그의 신학 사상은 중세 스콜라 철학과 종교 개혁 시기 칼뱅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프로스페르는 420년대 남부 에서 일어난 펠라기우스 논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우구스티누스교황 첼레스티노의 도움으로 프로스페르는 펠라기우스 기독교인들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그의 저작은 중세 시대에 매우 인기가 많았으며, ''격언''만 해도 180개 이상의 필사본이 남아 있다.

5. 유산

아퀴테인의 프로스페르는 쓴 것으로 더 유명하지만,[14] 많은 역사가들은 그의 명성이 역사적 저작보다는 신학자로서의 활동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 교리 전파에 있다고 본다.[15] 프로스페르는 은총 교리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15]

그의 저작 대부분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 특히 은총과 자유 의지에 관한 가르침을 옹호하고 전파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430년 아우구스티누스 사후, 프로스페르는 그의 가르침을 계속 전파했으며, 이를 수용할 수 있도록 평생을 바쳤다. 프로스페르는 히에로니무스의 기록에 덧붙인 최초의 연대기 작가였으며, 반세기 후에 그의 후속 기록을 시작했다. 프로스페르의 격언은 만년에 가장 인기를 얻어, 기독교 학생들이 도덕적 교훈과 아우구스티누스 교리의 측면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을 제공했다.

프로스페르는 420년대 남부 에서 일어난 펠라기우스주의 논쟁에서 교황 첼레스티노 1세와 함께 펠라기우스 기독교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프로스페르의 저작은 중세 시대에 매우 인기가 많았으며, ''격언''만 해도 180개 이상의 필사본이 남아 있다. 그의 ''연대기 요약''은 서로마 제국 말기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그의 신학 사상은 개신교가톨릭 모두에서 연구되며, 특히 은총과 자유 의지에 대한 그의 주장은 오늘날까지도 중요한 신학적 논쟁거리다.

참조

[1] 웹사이트 St. Prosper of Aquitaine http://www.catholic.[...]
[2] Oxford Index St. Prosper of Aquitaine http://oxfordindex.o[...]
[3] 논문 Prosper's Epitoma Chronicon: was there an edition of 443? 1986-07
[4] CE1913 Tiro Prosper of Aquitaine
[5] 문서 Seventeenth-century doubts as to its authorship, attributing it to Pope Leo I, are not sustained by its most recent editor, De Letter (1952), nor by Joseph J. Young, Studies on the style of De vocatione omnium Gentium ascribed to Prosper of Aquitaine Patristic Studies,'' '''87'''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1954.
[6] 문서 Muhlberger, "Prosper's Epitoma Chronicon", p. 240
[7] 문서 Prosper, born about 390, must have depended on other written sources for his earlier decades of Epitome chronicon but, aside from Augustine of Hippo's De haeresibus and City of God and possibly Paulus Orosius, they continue to be elusive. 1991-01
[8] EB1911 Prosper of Aquitaine
[9] 문서 White, 113
[10] 문서 Humphries, 156
[11] 문서 Muhlberger, 51–52
[12] 문서 Fathers of the Church, 337
[13] 문서 White, 114
[14] 문서 Muhlberger, 48
[15] 문서 Fathers of the Church, 336
[16] 서적 The theology of the Westminster standards : historical context and theological insights https://www.worldcat[...] Wheaton, Illino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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