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안악군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안악군은 황해남도 중북부에 위치하며 재령강 유역에 자리 잡은 지역이다. 고구려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여 안악 3호분과 같은 유적이 발견되었으며, 한사군의 대방군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신라, 고려 시대를 거치며 안악군으로 명칭이 정착되었고, 조선 시대에는 임꺽정의 활동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안악 사건이 발생했으며, 1952년 황해도 안악군과 신천군 일부 지역을 통합하여 안악군이 설치되었다. 현재는 1개의 읍과 26개의 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악 3호분은 이 지역의 대표적인 문화 유적이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안악군 - 구월산
    구월산은 황해남도 북부에 위치하며 서해안 평원에 솟아 웅장한 모습과 온대 활엽수 및 혼합림으로 덮인 국립공원으로 보호받고 있으며, 단군 관련 유적과 사찰, 폭포, 온천 등의 자연 명소가 있는 관광지이자 유네스코 세계 생물권보전지역이다.
  • 안악군 - 안악 2호분
    안악 2호분은 357년에 만들어진 고구려의 굴식돌방무덤으로, 묘주의 삶과 사후 세계를 그린 벽화가 있으며, 현실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고, 벽화는 문지기, 무인행렬, 묘주 초상 등을 묘사하며, 천장에는 별자리와 연꽃 무늬가 그려져 당시 고구려 문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 황해남도의 군 - 과일군
    과일군은 북한 황해남도 북서부에 위치한, 고구려 시대부터 시작된 역사를 가진 군으로, 1967년 송화군에서 분리되어 설립되었으며, 북한 과일 생산량의 25% 이상을 차지하는 주요 과일 산지이자 은률선이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이다.
  • 황해남도의 군 - 송화군
    송화군은 황해남도 북서부 내륙에 위치하며 고구려 시대에는 마경이와 판마곶으로 불렸고, 조선 시대에는 송화현으로 개칭되었으며, 1952년 군면리 통폐합으로 설치되어 현재 1읍 10리로 구성, 과일 재배가 활발하고 송화온천 등의 명승지가 있는 지역이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 - 평안북도
    평안북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서북부에 위치하며, 신의주를 도청 소재지로 하여 3개의 시와 22개의 군으로 구성되어 있고, 압록강과 청천강을 주요 하천으로 하며 대륙성 기후를 보이는 도이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 - 창성군
    창성군은 북한 평안북도 북서부에 위치하며 압록강을 경계로 중국과 접하고 험준한 산악 지형과 대륙성 기후를 가진 군으로, 1952년 행정 구역 개편 이후 농업, 잠업, 광업 등을 주요 산업으로 한다.
안악군 - [지명]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DPRK2006 Hwangnam-Anak.PNG
안악군 위치
기본 정보
이름안악군
원어명 (언어)한국어
한자 표기安岳郡
로마자 표기 (매큔-라이샤워)Anak-gun
로마자 표기 (개정 로마자 표기법)Anak-gun
국가북한
황해남도
면적398.5 km²
인구 (2008년)125,924명
인구 밀도자동 계산
하위 행정 구역1읍, 26리

2. 지리

황해남도 중북부에 위치하며 동쪽으로 재령군, 서쪽으로 삼천군·은률군, 북쪽으로 은천군과 접한다. 대부분 평지이나 서쪽의 은률군과의 경계에는 명산으로 여겨지는 구월산(954m)이 있다.[2]

3. 역사

재령강 유역의 비옥한 지대라 예부터 사람이 많이 살았으며, 일제강점기까지 현재의 은천군을 포함하고 있어 대동강 하구와 면해 있었다. 패총을 비롯해 안악 3호분으로 대표되는 고구려 고분 등 옛 무덤이 종종 발견된다. 한사군대방군을 안악에 비정하기도 한다.[5]

일제 강점기에는 안악사건이 일어났으며, 1938년 10월 1일 안악면이 안악읍으로 승격하였다.[7] 1952년 12월, 은천군을 분리하고 신천군의 일부 지역과 합병하여 안악군이 재편성되었다.[5]

연표는 다음과 같다.

연도사건
757년양악군(楊岳郡) 설치[5]
940년안악군(安岳郡)으로 개칭[5]
1018년풍주(풍주)에 속함[5]
조선황해도 안악군[5]
1895년해주부 안악군 (23부제)[5]
1914년 4월 1일황해도 신천군 일부 지역이 안악군에 편입, 안악군 일부 지역은 신천군으로 편입 (9면)[5]
1918년읍내면이 안악면(安岳面)으로 개칭[5]
1938년 10월 1일안악면이 안악읍(安岳邑)으로 승격 (1읍 8면)[5]
1946년안악읍이 안악면으로 강등[5]
1952년 12월황해도 안악군 안악면·룡순면·대원면·문산면, 신천군 산천면·용진면 및 노월면 일부 지역을 가지고, 안악군 설치 (1읍 27리)[5]
1954년 10월황해남도 안악군 (1읍 27리)[5]
1974년 5월류설리가 덕성리·오국리·로암리에 분할 편입 (1읍 26리)[5]


3. 1. 고대 ~ 조선 시대

재령강 유역의 비옥한 지대라 예부터 사람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패총을 비롯해 고구려 고분 등 옛 무덤이 종종 발견된다. 이 가운데 고구려 고분인 안악 3호분이 유명하다. 한사군대방군을 안악에 비정하는 경우도 있다.[5]

빗살무늬 토기와 석기 등 이른 신석기 시대 유물이 안악군 장월리, 안곡면, 안악읍 판오리 조개더미에서 발굴되어 안악이 이른 시기부터 사람이 거주해 온 곳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또한 청동기 시대의 주거지 2채가 대원면 박사리에서 발굴되었으며, 고인돌, 석검, 석도, 반월도, 석부, 석전 등 청동기 시대 유물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박사리에서는 초기 철기 시대의 유물이 다수 발굴되었으며, 문화는 선사 시대에서 역사 시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고구려 삼국 시대에는 고구려의 영토였으며, 삼국 통일 이후에는 신라의 영토에 편입되어 757년(경덕왕 16년)에 양악군(楊岳郡)으로 편성되었다.[3]

벽화로 유명한 대원면 상산리, 용순면 유선리의 안악 고분 1호, 2호, 3호는 4세기 고구려 시대의 문화 수준을 보여준다. 특히 3호 무덤은 81m2의 벽과 58m2의 천장에 다양한 인물화와 풍속화가 가득 채워져 있어, 고구려의 풍습뿐만 아니라 음악과 가옥 구조를 묘사하고 있다.

왕건(고려 태조)의 세력이 궁예와 협력하여 905년태봉(마진)의 영토에 편입되었으며, 이때 지명이 안악(安岳)으로 변경된 것으로 추정된다. 1018년(현종 9년) 풍주(풍주)의 속현이 되었고, 1106년(예종 1년)에는 거주지가 없는 유랑민이 증가하자 감무(監務)를 파견하여 주민들을 안정시켰다.

1259년(고종 46년) 몽골군의 침략을 받아 항복했다. 1270년 동녕부에 속했으나 8년 만에 다시 본래의 속현으로 복구되었다. 14세기 중엽 이후에도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여러 차례 피해를 입었다. 1348년(충목왕 4년)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황순(黃順)의 처향(妻鄕)으로 보고되면서 군(郡)으로 승격되었고, 지군사(知郡事)가 파견되었다.[3]

1413년(태종 13년)에 군으로 확정되어 군수가 임명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15세기 중반의 호수는 991호, 인구는 3,703명으로 비교적 적었다. 조선 초에도 주민들의 생활은 크게 펴지지 못했고, 16세기 중반에는 임꺽정구월산 일대에서 활동하면서 그의 주요 활동 근거지가 되었다.

행정적으로는 1589년(선조 22년)부터 1608년까지를 제외하고 여러 차례 부로 강등되는 부침을 겪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구월산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명나라 군대에 공격을 받고 퇴각하자 의병을 일으켜 공격하여 공을 세웠다.

17세기에도 구월산에 많은 산적들이 모여들어 1684년(숙종 10년)에는 신천에 주둔하던 중영장(中營將)을 안악으로 옮기고, 중군(中軍)을 파견하여 토포사(討捕使)의 임무를 맡게 했다. 그러나 이후 농업이 크게 발전하여 벼와 목화 재배를 중심으로 간척 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평안도와의 교역도 증가했다.[3]

1759년(영조 35년)에는 모두 18개 면, 80개 리로 편성되어 군사력이 크게 성장했음을 보여주며, 호수는 14,509호, 인구는 51,247명으로 도내에서 해주 다음으로 많았다. 1828년(순조 28년)의 인구는 53,546명이었다.[3]

3. 2. 일제강점기 및 광복 이후

일제강점기에 안악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다.[3] 1938년 10월 1일 안악면이 안악읍으로 승격하였다.[7]

1894년, 안악군 지역의 동학군은 해주, 신천군의 동학군과 함께 패엽사에 집결했으나, 같은 동학군인 이동엽 부대의 공격으로 붕괴되었다. 이러한 혁명 정신은 천주교와 개신교를 통해 적극적으로 수용되었으며, 면학회와 같은 교육 및 문화 단체를 통해 신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1911년 1월, 일본 제국은 이른바 '안악 사건'을 조작하여 다시 한번 타격을 입었다.[3] 당시 김구, 김홍량, 김용제, 최명식 등 160여 명이 투옥되었는데, 이는 그해 가을에 발생한 105인 사건의 전조였다. 김구가 양산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김기형, 나태섭, 오면식, 최익형 등 지역 출신 인물들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1935년에는 1읍, 8면, 113개 리로 조직되었으며, 1942년에는 19,030호에 104,572명의 인구가 있었다.[3] 1946년 안악읍이 안악면으로 강등되었다.

1952년 12월 행정 구역 개편 당시 신천군의 산천면, 용진면, 노월면과 안악군의 안악읍, 용선면이 대원면과 문산면으로 개편되었다. 1954년 황해도가 남북으로 분할되면서 이 지역은 황해남도의 일부가 되었다.[3]

4. 교통

안악군은 도로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으며, 철도는 없다.

5. 행정 구역

안악군은 1개의 읍과 26개의 리로 구성되어 있다.[4]

한글한자
안악읍安岳邑
한월리漢月里
강산리江山里
굴산리屈山里
금강리金岡里
구와리龜臥里
경지리境地里
마명리馬鳴里
남정리南井里
오국리五局里
엄곶리嚴串里
패엽리貝葉里
판륙리板六里
복사리伏獅里
봉성리鳳城里
평정리坪井里
로암리路岩里
룡산리龍山里
신촌리新村里
대추리大楸里
덕성리德成里
월정리月精里
월지리月池里
월산리月山里
원룡리元龍里
연등리燃燈里
유성리楡城里


5. 1. 안악읍 (安岳邑)

안악읍은 안악군의 읍으로, 한자로는 安岳邑(안악읍)으로 표기한다.[4] 안악군은 안악읍을 포함하여 1개의 읍과 26개의 리로 구성되어 있다.[4]

한글한자
안악읍安岳邑


5. 2. 리 (里)

안악군은 1개의 읍과 26개의 리로 구성되어 있다.[4]

한글한자
안악읍安岳邑
한월리漢月里
강산리江山里
굴산리屈山里
금강리金岡里
구와리龜臥里
경지리境地里
마명리馬鳴里
남정리南井里
오국리五局里
엄곶리嚴串里
패엽리貝葉里
판륙리板六里
복사리伏獅里
봉성리鳳城里
평정리坪井里
로암리路岩里
룡산리龍山里
신촌리新村里
대추리大楸里
덕성리德成里
월정리月精里
월지리月池里
월산리月山里
원룡리元龍里
연등리燃燈里
유성리楡城里


6. 문화/관광

고국원왕릉은 4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고구려의 고분 벽화이다. 안악 3호분이라고도 불린다.[1]

참조

[1] 웹사이트 North Korea: Administrative Division https://www.citypopu[...]
[2] 웹사이트 Archived copy http://www.cybernk.n[...] 2010-03-10
[3] 웹사이트 안악군 https://encykorea.ak[...]
[4] 웹사이트 더 북한 http://nk.joins.com/[...]
[5] 웹사이트 황해남도 안악군 역사 http://www.cybernk.n[...]
[6] 간행물 2008년 인구 조사 http://unstats.un.or[...] 조선중앙통계국 2009-00-00 #날짜 정보가 불완전하여 00-00-00으로 표시
[7] 법률 부령 제197호 (일부개정) 1938-09-2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