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브레히트 브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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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브레히트 브란디는 1914년 도르트문트에서 태어나 독일 해군에 입대하여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U보트 함장으로 복무했다. 그는 기뢰 제거함 M-1 함장, U-617, U-380, U-967 함장을 역임하며 여러 훈장을 받았으며, 특히 U-617 함장으로 4척의 상선을 격침시키고 1943년 2월 HMS Welshman을 격침시킨 공로로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또한 U보트 부대 지휘관으로 활약하며 1944년 11월 백엽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 (칼, 검, 다이아몬드)을 수여받았다. 전쟁 후에는 건축가로 활동하며 독일 건축가 협회 회장을 역임했고, 1966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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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기 생애 및 경력
알브레히트 브란디는 1935년 4월 1일 국방해군(Reichsmarine)에 입대하여 "35년도 기수"의 일원이 되었다.[1] 슈트랄준트에서 기초 군사 훈련을 받은 후, 훈련함 ''고르흐 포크''에 배치되어 1935년 9월 25일 사관후보생(미드쉽맨) 계급을 받았다.[1]
이후 경순양함 ''칼스루에''에 배치되어(1935년 9월 26일 ~ 1936년 6월 19일) 훈련 항해에 참여했다.[1] 이 항해는 테네리페, 상투메, 로비투, 더반, 세이셸의 포트 빅토리아, 바타비아, 필리핀의 일로일로, 홍콩, 여러 일본 항구, 알류샨 열도의 더치 하버, 샌디에이고, 파나마 운하를 거쳐 세인트 토머스, 폰테베드라를 경유하여 킬로 돌아오는 긴 여정이었다.
해군 사관학교 뮈르비크에서 주요 사관 생도 과정을 수료하고(1936년 6월 20일 ~ 1937년 3월 31일)[5] 해군 사관후보생(Fähnrich zur See)으로 진급했다.(1936년 7월 1일)[5] 이후 뮈르비크에서 여러 전문 무기 훈련 과정을 받았다.[6]
이후 기뢰 제거함 ''M-125''에서 세 번째 당직 사관으로, 1937년 10월 2일에는 ''M-1''으로 전출되어 한스 바르텔스 카피탄로이튼안트(Kapitänleutnant, 해군 대위)의 지휘 하에 당직 사관직을 맡았다. 1938년 1월 1일 수석 해군 사관후보생(Oberfähnrich zur See)으로, 1938년 4월 1일 해군 소위(Leutnant zur See)로 진급했다.[5]
2. 1. 출생 및 가족 배경
알브레히트 브란디는 1914년 6월 20일 도르트문트에서 태어났다. 당시 도르트문트는 프로이센 왕국의 베스트팔렌 주에 속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광업 이사이자 베라이니게 슈탈베르케(Vereinigte Stahlwerke, 연합 철강) 이사였던 에른스트 브란디였고, 어머니는 클라라(결혼 전 성은 유초)였다. 브란디는 여섯 형제 중 막내였다.[1]브란디는 김나지움에서 아비투어(대학 입학 자격 졸업장)를 취득하고, 1935년 4월 1일 국방해군(Reichsmarine)에 "35년도 기수"의 일원으로 입대했다.[1] 그는 슈트랄준트에 있는 발트해 정규 함대 부서의 제2 부서 제2 중대에서 군사 기초 훈련을 받았다.[2][3][4]
2. 2. 해군 입대 및 초기 군 생활
브란디는 1914년 6월 20일 프로이센 왕국 베스트팔렌 주 도르트문트에서 태어났다. 광업 이사 겸 ''베라이니게 슈탈베르케(Vereinigte Stahlwerke)'' (연합 철강) 이사였던 아버지 에른스트 브란디와 어머니 클라라 사이에서 여섯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1] 김나지움에서 아비투어를 취득한 후, 1935년 4월 1일 '35년도 기수'의 일원으로 국방해군(Reichsmarine)에 입대했다.[1]슈트랄준트에 있는 발트해 정규 함대 부서에서 군사 기초 훈련을 받은 후, 훈련함 ''고르흐 포크''에 배치되어 1935년 9월 25일 사관후보생(미드쉽맨) 계급을 받았다. 이후 경순양함 ''칼스루에'' (1935년 9월 26일 ~ 1936년 6월 19일)에 배치되어 1935년 10월 21일부터 1936년 6월 13일까지 ''칼스루에''의 다섯 번째 훈련 항해에 참여했다. 이 항해에서 테네리페, 상투메, 로비투, 더반, 세이셸의 포트 빅토리아, 바타비아, 필리핀의 일로일로, 홍콩, 여러 일본 항구, 알류샨 열도의 더치 하버, 샌디에이고, 파나마 운하를 거쳐 세인트 토머스, 폰테베드라를 경유하여 킬로 돌아왔다.
''칼스루에''에서의 항해를 마친 후, 해군 사관학교 뮈르비크에서 주요 사관 생도 과정을 수료했다 (1936년 6월 20일 ~ 1937년 3월 31일).[5] 이 기간 중 1936년 7월 1일 해군 사관후보생(Fähnrich zur See)으로 진급했다. 1937년 4월 1일부터는 뮈르비크에서 여러 전문 무기 훈련 과정을 받았다.[6] 이후 기뢰 제거함 ''M-125''에서 세 번째 당직 사관으로 근무했고, 1937년 10월 2일에는 기뢰 제거함 ''M-1''로 전출되어 한스 바르텔스 카피탄로이튼안트(Kapitänleutnant, 해군 대위)의 지휘 하에 당직 사관직을 맡았다. 이 임무를 수행하면서 1938년 1월 1일 수석 해군 사관후보생(Oberfähnrich zur See)으로, 1938년 4월 1일 해군 소위(Leutnant zur See)로 진급했다.
2. 3. 기뢰 제거함 복무
브란디는 해군 사관학교 뮈르비크에서 사관 생도 과정을 마친 후, 기뢰 제거함 ''M-125''에서 세 번째 당직 사관으로 근무했다.[5] 1937년 10월 2일, 기뢰 제거함 로 전출되어 제1 기뢰 제거함 전대에서 한스 바르텔스 카피탄로이튼안트(해군 대위)의 지휘 하에 당직 사관직을 맡았다.[5] 그는 이 임무를 수행하면서 1938년 1월 1일 수석 해군 사관후보생(Oberfähnrich zur See)으로, 1938년 4월 1일 해군 소위(Leutnant zur See)로 진급했다.[5]3.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브란디는 기뢰 탐색함 ''M-1''에서 복무했다. ''M-1''은 1939년 폴란드 침공에 참전하여 베스터플라테 전투에서 활약했고, 이후 북해와 발트해에서 기뢰 제거 작전을 수행했다. 1940년에는 베저위붕 작전에 참여하여 덴마크와 노르웨이 침공을 지원했다. 브란디는 이 기간 동안의 공로로 철십자 훈장 1급과 2급을 받았다.
1940년 5월, 브란디는 ''M-1''의 함장이 되었고, U-보트 호위 임무를 수행하며 유보트 부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41년 4월, U-보트 부대 전출에 성공한 그는 에리히 토프가 지휘하는 U-552에서 훈련을 받았고, 1942년에는 U-617의 함장이 되었다.
브란디는 U-617을 지휘하며 지중해에서 활약했다. 1943년 2월에는 몰타 근처에서 영국 기뢰 부설함 웰시먼을 격침시켜 큰 주목을 받았다. 이후에도 여러 척의 선박을 격침시키며 전과를 올렸고,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 검 잎사귀 기사 철십자 훈장, 검 잎사귀·검 기사 철십자 훈장을 차례로 받았다.
1943년 9월, 퍼커리지를 격침시켰으나, 영국 공군의 공격으로 U-617이 큰 피해를 입자 함선을 포기하고 탈출했다. 이후 스페인군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하여 독일로 귀환했다.
1944년에는 U-380과 U-967의 함장을 맡았으며, 페크텔러를 격침시키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944년 6월, 건강 문제로 육상 근무로 전환되었고, 동 발트해의 모든 U보트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브란디는 발트해에서 U보트 부대의 활약을 이끈 공로로 다이아몬드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3. 1. 기뢰 제거함 M-1 함장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브란디는 바르텔스 휘하의 기뢰 탐색함 ''M-1''에서 복무했다. 1939년 9월 1일 이른 아침, ''M-1''은 단치히 베스터플라테 공격 직전 증강 해군 보병 소대인 ''Marinestosstruppkompanie''를 전함으로 수송했다.[1][2] 1939년 10월 1일, 브란디는 ''오버로이테난트 추어 제''(1등 해군 중위)로 진급했다.[3] 폴란드 침공 이후, ''M-1''은 북해와 발트해에서 다양한 기뢰 제거 작전을 수행했다.1940년 2월 24일, ''M-1''은 사전 경고 없이 충돌하여 도거 뱅크 인근에서 에스비에르를 기지로 둔 덴마크 어선 4척(에이잠(E 92), 게를리스(E 456), 메르카토르(E 348), 폴라리스(E 504))을 침몰시켰다. 바르텔스는 상사에게 "군사적 이유"로 인해 아무도 구조되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당시 중립국이었던 덴마크 어부 16명이 목숨을 잃었다.[4]
1940년 4월, 브란디는 ''M-1''에 탑승하여 덴마크와 노르웨이에 대한 독일의 공격인 베저위붕 작전에 참여했으며, 철십자 훈장 1급과 2급을 수여받았다(Eisernes Kreuzde).[1] 1940년 5월 25일, 브란디는 ''M-1''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3] 그는 이 직책을 맡으면서 유보트 부대와 접촉하여 항구를 출입하는 U-보트에 호위 임무를 제공했다. 브란디는 유보트 부대 복무를 신청했지만 처음에는 거절당했다.[1]
3. 2. U-보트 부대 전출 및 훈련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브란디는 바르텔스 휘하의 기뢰 탐색함 ''M-1''에서 복무했다. 1940년 5월 25일, ''M-1''의 지휘관이 되었다.[1] 이 직책에서 브란디는 유보트 부대와 접촉하여 항구를 출입하는 U-보트에 호위 임무를 제공했다. 유보트 부대 복무를 신청했지만 처음에는 거절당했다.[2] 1941년 4월 다시 신청하여 합격했으며, 노이슈타트 인 홀슈타인에서 U-보트 훈련을 시작했다.[2]1941년 12월 25일, 에리히 토프 함장이 지휘하는 U-552에 ''코만단텐슐러''(사관 후보생)로 탑승했다.[3] 뉴펀들랜드 섬 해안에서 순찰 중 ''U-552''는 1942년 1월 15일 영국 선박 ''데이로즈'', 1월 18일 미국 선박 ''프란시스 살만''과 그리스 선박 ''마로''를 침몰시켰다.[3] 1942년 1월 28일, 브란디는 독일 해군의 Blohm & Voss 조선소 함부르크에 배치되어 VIIC형 U-보트인 U-617에 익숙해졌다. 1942년 4월 9일, 킬에서 ''U-617''을 취역시키고 제5 U보트 기지대에서 훈련을 완료했다.[2][1]
3. 3. U-617 함장
1942년 4월 9일, 알브레히트 브란디는 킬에서 ''U-617''을 취역시키고 제5 U보트 기지대에서 훈련을 완료했다.[1][2]브란디의 ''U-617''은 여러 차례 초계 임무를 수행하며 지중해에서 활약했다. 특히 1943년 2월 1일 몰타 해안에서 영국 기뢰 부설함 웰시먼을 격침시킨 것은 주목할 만한 전과였다.[5] 웰시먼은 튀니스만과 시칠리아 사이의 추축국 보급로를 공격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6] 브란디는 이 외에도 여러 척의 선박을 격침했다고 주장했으나, 확인된 것은 1943년 2월 5일 호송대 AW 22에서 격침된 노르웨이 화물선 ''코로나''와 ''헨릭''이다.

1943년 9월, 브란디는 퍼커리지를 격침시켰으나,[1]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 공군 비커스 웰링턴 항공기의 공격을 받았다.[1] 3시간 후, 또 다른 공격으로 ''U-617''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브란디는 잠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1] 결국 그는 포획을 피하기 위해 ''U-617''을 얕은 해역으로 이동시켜 멜리야 근처에서 배를 버렸다.[1] 승무원들은 고무 보트를 이용해 탈출하여 해안에 도착, 스페인 군대에 의해 억류되었다.[1] 브란디는 카디스 근처 장교 수용소에 감금되었으나, 마드리드 주재 독일 해군 무관의 도움으로 위조 여권을 받아 독일로 귀환했다.[1] 한편, 해안에 좌초된 ''U-617''은 48 비행대와 233 비행대 소속 록히드 허드슨 폭격기의 공습과 하이신스 및 울릉공의 해군 포격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2][3]
3. 3. 1. 첫 번째 초계 및 늑대떼 작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브란디는 바르텔스 휘하의 기뢰 탐색함 ''M-1''에서 복무했다. ''M-1''은 1939년 9월 1일 단치히 베스터플라테 공격 직전, 해군 보병 소대인 ''Marinestosstruppkompanie''를 전함 으로 수송했다.[1][2] 1939년 10월 1일, 그는 ''오버로이테난트 추어 제''(1등 해군 중위)로 진급했다.[3] 폴란드 침공 이후, ''M-1''은 북해와 발트해에서 다양한 기뢰 제거 작전을 수행했다. 1940년 2월 24일, ''M-1''은 충돌하여 도거 뱅크 인근에서 덴마크 어선 4척(''에이잠''(E 92), ''게를리스''(E 456), ''메르카토르''(E 348), ''폴라리스''(E 504))을 침몰시켰다. 이 사건으로 중립국이었던 덴마크 어부 16명이 목숨을 잃었다.[4] 1940년 4월, 브란디는 ''M-1''에 탑승한 채로 덴마크와 노르웨이에 대한 독일의 공격인 베저위붕 작전에 참여했으며, 철십자 훈장 1급과 2급을 수여받았다.[1]1940년 5월 25일, 브란디는 ''M-1''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3] 그는 유보트 부대에 호위 임무를 제공하면서 유보트 부대 복무를 신청했지만 처음에는 거절당했다.[1] 1941년 4월, 브란디는 다시 신청하여 합격했으며, 노이슈타트 인 홀슈타인에서 U-보트 훈련을 시작했다. 1941년 12월 25일, 브란디는 에리히 토프 함장이 지휘하는 에 탑승하여 ''코만단텐슐러''(사관 후보생)가 되었다. 뉴펀들랜드 섬 해안에서 진행된 이 순찰 동안, ''U-552''는 1942년 1월 15일 영국 선박 ''데이로즈'', 1월 18일 미국 선박 ''프란시스 살만''과 그리스 선박 ''마로''를 침몰시켰다.[5] 1942년 1월 28일, 브란디는 독일 해군의 Blohm & Voss 조선소 함부르크에 배치되어 VIIC형 U-보트인 에 익숙해졌다. 1942년 4월 9일, 브란디는 킬에서 ''U-617''을 취역시키고 제5 U보트 기지대에서 이 보트로 다양한 훈련을 완료했다.[1][2]
알브레히트 브란디는 첫 번째 초계 작전(1942년 8월 29일 ~ 10월 7일)을 위해 1942년 8월 킬을 떠나 서부 해역에서 작전을 수행한 후, 10월 프랑스 생나제르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U-617''은 제7 잠수함 기지대에 배속되었다.[3] 이 초계 작전에서 브란디는 4척의 상선을 격침시켰다고 주장했다.[6] 1942년 9월 7일, 브란디는 첫 번째 선박인 페로 제도의 트롤 어선 ''토르 2세''를 격침시켰다.[7] ''U-617''은 이후 , , , , , 및 가 포함된 늑대 무리 ''Pfeil''의 일원이 되었으며, 호송선단 SC 100을 상대로 작전을 펼쳤다. 9월 22/23일 밤, 브란디는 유조선 ''Athelsultan''을 격침시켰고, 다음 날에는 의 낙오 선박 2척을 격침시켰다. 브란디가 9월 23일에 격침시킨 낙오 선박 중 하나는 이전 덴마크 증기선 ''테네시''였다. 다른 낙오 선박인 벨기에 증기선 ''루마니''는 9월 24일 13시 58분에 격침되어 선장, 승무원 35명, 사수 6명이 사망했고, 수석 엔지니어만 생존했다. 브란디는 대제독 (독일 대제독) 카를 되니츠가 발령한 라코니아 명령을 위반하여 수석 엔지니어를 구조했다. 1942년 9월 26일, 브란디는 호송선단 ON 131을 발견했지만, 어뢰 오작동으로 공격에 실패했다. 이 초계 작전에서 브란디는 1942년 10월 1일 ''카피탄로이테난트''로 진급했다. 이후 1942년 10월 8일, 그는 잠수함 전투 훈장(U-Boot-Kriegsabzeichende)을 받았다.[1]
3. 3. 2. 지중해로 이동
1942년 11월 2일부터 28일까지 수행된 두 번째 초계에서 브란디는 지중해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제29잠수함 기지대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1] 지중해 전역에서의 임무는 북아프리카에 있는 아프리카 군단의 보급로 확보를 돕는 것이었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브란디는 삼엄한 경비를 뚫고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해야 했다. 1942년 11월 8일 잠항한 상태로 해협을 통과했으나, ''U-617''은 영국 쇼트 선더랜드 폭격기에 의해 발견되었고, 폭뢰 2발이 투하되었지만 빗나갔다. 같은 날, 영국-미국 연합군은 횃불 작전(1942년 11월 8일~16일)을 통해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상륙했다. 11월 21일 11시 27분, 브란디는 강력한 영국 해군 기동 부대를 공격하여 4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공격 후, ''U-617''은 4시간 동안 80발의 폭뢰 공격을 받았다. 11월 23일 16시, 브란디는 순양함을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1942년 11월 28일 라 스페치아에 도착했다.[2] 비록 그날 실제로 침몰한 배는 없었지만, 잠수함 기지대 사령관(FdU)은 후에 브란디에게 프랑스 또는 미국 기원의 순양함 1척과 구축함 1척을 격침시킨 것으로 평가했다. 또한 FdU는 브란디가 화물선 2척에 어뢰를 명중시켰으며, 그 침몰이 추정된다고 인정했다. FdU는 브란디가 전함을 심각하게 손상시킨 것에 대해서는 공로를 인정하지 않았다.[3]3. 3. 3. 세 번째 초계 및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
1942년 12월, 브란디는 세 번째 초계(1942년 12월 21일 ~ 1943년 1월 17일) 중 키레나이카 해안에서 를 격침시켰고,[1] 1943년 1월 15일에는 상선 2척(''Annitsa'', ''Harboe Jensen'')을 격침시켰다.[2] 살라미스에서 끝난 이 순찰 이후, FdU는 브란디가 구축함 1척, 의 예인선 1척, 톤수를 알 수 없는 바지선 1척을 격침시킨 것으로 평가했으며, 이 셋은 모두 1942년 12월 28일에 격침되었다. FdU는 또한 12월 30일에 의 선박 3척, 1943년 1월 13일에 의 선박 2척, 1월 15일에 의 선박 2척을 격침시킨 것을 인정했다. Befehlshaber der U-Boote(U보트 사령관)는 이러한 평가를 확인하고 브란디가 총 의 선박 8척과 구축함 1척을 격침시킨 것으로 평가했다.[3] 이러한 공로로 브란디는 1943년 1월 21일에 철십자 기사 십자 훈장(Ritterkreuz des Eisernen Kreuzesde)을 수여받았다. 수여식은 라 스페치아에서 에게 해 사령관인 부제독 에리히 푀르스테에 의해 진행되었다.[4]알브레히트 브란디는 1943년 1월 27일부터 2월 13일까지 네 번째 초계 임무를 수행했는데, 이 임무는 살라미스 해군 기지에서 시작하여 풀라에서 종료되었다. 그는 1943년 2월 1일 몰타 해안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 영국 기뢰 부설함을 격침시켰다.[5] 기뢰 부설함 은 기뢰 부설함 및 기뢰 부설 잠수함 과 함께 튀니스만과 시칠리아 사이의 추축국 보급로를 공격하는 작전을 수행했다.[6] 또한 브란디는 두 개의 호송대에서 4척의 선박을 격침하여 총 의 피해를 입혔다고 주장했다.[7] 확인된 사실은 1943년 2월 5일 호송대 AW 22에서 격침된 노르웨이 화물선 ''코로나''와 ''헨릭''의 격침이었다.
도르트문트 출신인 브란디는 1935년 독일 해군에 입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개전 초기, 북해의 기뢰 제거 임무를 수행했고, 이후 U보트 훈련을 받았다. 1942년 5월부터 1942년 4월까지 에리히 톱이 지휘하는 U-552에서 3차례 항해에 참여했다. 1942년 4월부터 제5 잠수함대에 소속된 U-617의 함장으로 임명되었다. 첫 번째 항해에서 상선 4척을 파괴했고, 두 번째 항해에서는 구축함 1척을 격침시키고, 탱커 1척에 큰 피해를 입혔다. 1942년 11월에 U-617은 제29 잠수함대로 전속되어 지중해 순찰을 명령받았다. 영국 선박들을 잇따라 격침시키고, 아프리카 군단을 위해 독일과 이탈리아 선박의 통과를 도왔다. 1943년 2월에는 몰타 근처에서 영국의 기뢰 부설함 웰시먼을 격침시켰는데, 이 선박의 파괴는 독일군의 몰타 방어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 공적으로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훈했다.
3. 3. 4. 네 번째 초계 및 몰타 공격
브란디는 1943년 1월 27일부터 2월 13일까지 네 번째 초계 임무를 수행했는데, 이 임무는 살라미스 해군 기지에서 시작하여 풀라에서 종료되었다. 1943년 2월 1일, 브란디는 몰타 해안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 영국 기뢰 부설함 을 격침시켰다.[1] 이 기뢰 부설함은 및 기뢰 부설 잠수함 과 함께 튀니스만과 시칠리아 사이의 추축국 보급로를 공격하는 작전을 수행했다.[2] 또한 브란디는 두 개의 호송대에서 4척의 선박을 격침하여 총 의 피해를 입혔다고 주장했다.[3] 확인된 사실은 1943년 2월 5일 호송대 AW 22에서 격침된 노르웨이 화물선 ''코로나''와 ''헨릭''의 격침이었다.[4][5]3. 3. 5. 다섯 번째 초계 및 백엽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
알브레히트 브란디는 1943년 1월 27일부터 2월 13일까지 네 번째 초계 임무를 수행했으며, 이 임무는 살라미스 해군 기지에서 시작하여 풀라에서 종료되었다. 1943년 2월 1일, 그는 몰타 해안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 영국 기뢰 부설함 웰시먼을 격침시켰다. 웰시먼은 기뢰 부설함 압디엘 및 기뢰 부설 잠수함 로르쿠알과 함께 튀니스만과 시칠리아 사이의 추축국 보급로를 공격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또한 브란디는 두 개의 호송대에서 4척의 선박을 격침하여 총 의 피해를 입혔다고 주장했다. 확인된 사실은 1943년 2월 5일 호송대 AW 22에서 격침된 노르웨이 화물선 코로나와 헨릭의 격침이었다.3. 3. 6. 여섯 번째 초계
알브레히트 브란디는 1943년 1월 27일부터 2월 13일까지 네 번째 초계 임무를 수행했다. 이 임무는 살라미스 해군 기지에서 시작하여 풀라에서 종료되었다. 1943년 2월 1일 몰타 해안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 영국 기뢰 부설함 을 격침시켰다.[1] 은 기뢰 부설함 및 기뢰 부설 잠수함 과 함께 튀니스만과 시칠리아 사이의 추축국 보급로를 공격하는 작전을 수행했다.[2] 브란디는 또한 두 개의 호송대에서 4척의 선박을 격침하여 총 의 피해를 입혔다고 주장했다.[3] 확인된 사실은 1943년 2월 5일 호송대 AW 22에서 격침된 노르웨이 화물선 ''코로나''와 ''헨릭''의 격침이었다.[4][5]3. 3. 7. U-617의 손실
1943년 9월, 브란디는 헌트급 호위 구축함 퍼커리지를 격침시켰다.[1] 그러나 직후, 영국 군용기의 공격으로 U-617이 타격을 입었다.[1] 손상이 심각하여 브란디는 함선 포기와 고무보트 탈출을 결정했다.[1] 이후 스페인군에 구금되었지만, 탈출하여 독일로 귀국했다.[1]3. 4. U-380 및 U-967 함장
알브레히트 브란디는 1941년 4월 노이슈타트 인 홀슈타인의 해군 사관학교 뮈르비크에서 U-보트 훈련을 시작하여 12월 24일에 졸업했다.[1] 1941년 12월 25일부터 1942년 1월 27일까지 에리히 토프 함장(Kapitänleutnant)이 지휘하는 ''U-552''에 탑승하여 ''코만단텐슐러''(사관 후보생)로서 한 차례의 전투 순찰에 참여했다.[1] 뉴펀들랜드 섬 해안에서 이루어진 이 순찰 동안 ''U-552''는 1월 15일 영국 선박 ''데이로즈'', 1월 18일 미국 선박 ''프란시스 살만''과 그리스 선박 ''마로''를 침몰시켰다.[1]1942년 1월 28일, 브란디는 독일 해군의 Blohm & Voss 조선소 함부르크에 배치되어 VIIC형 U-보트인 ''U-617''에 익숙해졌다.[1] 4월 9일, 브란디는 킬에서 ''U-617''을 취역시키고 제5 U보트 기지대에서 훈련을 완료했다.[1]
1942년 8월 29일부터 10월 7일까지 브란디는 첫 번째 초계 작전을 위해 킬을 떠나 서부 해역에서 작전을 수행한 후 프랑스 생나제르에 도착했다. ''U-617''은 제7 잠수함 기지대에 배속되었다.[1] 이 초계 작전에서 브란디는 4척의 상선을 격침시켰다고 주장했다.[1] 9월 7일, 페로 제도의 트롤 어선 ''토르 2세''를 격침시켰다.[1] ''U-617''은 늑대 무리 ''Pfeil''의 일원이 되어 호송선단 SC 100을 상대로 작전을 펼쳤다. 9월 22/23일 밤, 유조선 ''Athelsultan''을 격침시켰고,[1] 다음 날에는 의 낙오 선박 2척을 격침시켰다.[1] 격침시킨 낙오 선박 중 하나는 덴마크 증기선 ''테네시''였고,[1] 다른 하나는 벨기에 증기선 ''루마니''였다. 브란디는 카를 되니츠가 발령한 라코니아 명령을 위반하고 ''루마니''의 수석 엔지니어를 구조했다.[1] 9월 26일, 호송선단 ON 131을 발견했지만, 어뢰 오작동으로 공격에 실패했다.[1] 이 초계 작전에서 브란디는 1942년 10월 1일 ''카피탄로이테난트''로 진급했고, 10월 8일 잠수함 전투 훈장을 받았다.[1]
두 번째 초계 (1942년 11월 2일~28일)에서 브란디는 지중해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제29잠수함 기지대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1] 지중해 전역에서의 임무는 북아프리카에 있는 아프리카 군단의 보급로 확보를 돕는 것이었다. 1942년 11월 8일 잠항한 상태로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했으나, 영국 쇼트 선더랜드 폭격기에 의해 발견되어 폭뢰 공격을 받았지만 빗나갔다.[1] 11월 21일, 영국 해군 기동 부대를 공격하여 4발의 어뢰를 발사했으나, 4시간 동안 80발의 폭뢰 공격을 받았다.[1] 11월 23일, 순양함을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11월 28일 라 스페치아에 도착했다.[1] ''잠수함 기지대 사령관''(FdU)는 브란디에게 순양함 1척과 구축함 1척 격침, 화물선 2척 어뢰 명중을 인정했다.[1]
1942년 12월, 세 번째 순찰(1942년 12월 21일 – 1943년 1월 17일) 중 키레나이카 해안에서 ''St. Issey''를 격침시켰고,[1] 1943년 1월 15일에는 상선 ''Annitsa''와 ''Harboe Jensen''를 격침시켰다.[1] 살라미스에서 끝난 이 순찰 이후, FdU는 브란디가 구축함 1척, 예인선 1척, 바지선 1척을 격침시킨 것으로 평가했다.[1] ''Befehlshaber der U-Boote''(U보트 사령관)는 브란디가 총 의 선박 8척과 구축함 1척을 격침시킨 것으로 평가했다.[1] 이러한 공로로 브란디는 1943년 1월 21일에 철십자 기사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1]
1943년 1월 27일부터 2월 13일까지의 네 번째 초계 임무는 살라미스 해군 기지에서 시작하여 풀라에서 종료되었다. 2월 1일 몰타 해안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 영국 기뢰 부설함 ''웰시먼''을 격침시켰다.[1] 또한 브란디는 두 개의 호송대에서 4척의 선박을 격침하여 총 의 피해를 입혔다고 주장했다.[1] 확인된 사실은 1943년 2월 5일 호송대 AW 22에서 격침된 노르웨이 화물선 ''코로나''와 ''헨릭''의 격침이었다.[1]
1943년 4월, 지브롤터에서 40마일 떨어진 곳에서 경순양함을 격침시켜 기사 철십자 훈장 검 잎사귀장을 수훈했다.[1] 1943년 9월에는 헌트급 호위 구축함 ''퍼커리지''를 격침시켰다.[1] 그러나 직후, 영국 군용기의 공격으로 ''U-617''이 타격을 입었다. 손상이 심각하여 브란디는 함선 포기와 고무보트 탈출을 결정했다. 스페인군에 구금되었지만, 탈출하여 독일로 귀국했다.[1]
1944년 1월에 ''U-380''의 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 잠수함은 1944년 3월 미국 공군의 독일 해군 기지 공습으로 파괴되었다. 대신 1944년 4월에 ''U-967'' 함장이 되었다. 5월에는 미국 해군 호위 구축함 ''페크텔러''를 격침시켰다. 이 공적으로 기사 철십자 훈장 검장을 수훈했다.[1] 그러나 6월에 브란디가 심각한 병에 걸려, 기지로 귀환한 이후 육상 근무를 하게 되었다.[1]
3. 4. 1. 검 및 다이아몬드 백엽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
알브레히트 브란디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뛰어난 군사적 업적을 인정받아 검 및 다이아몬드 백엽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Ritterkreuz des Eisernen Kreuzes mit Eichenlaub, Schwertern und Brillantende)을 수여받았다.1944년 11월, 브란디는 동 발트해의 모든 U보트 사령관으로 복무하면서 발트해에 전개된 U보트가 많은 선박을 격침시킨 공적을 인정받아 이 훈장을 받았다.[1] 이 훈장은 해군에서는 브란디와 볼프강 뤼트만이 수훈한 희귀한 훈장이다.[1]
3. 5. 육상 근무 및 종전
1944년 6월, 브란디는 심각한 병에 걸려 기지로 귀환한 후 육상 근무를 하게 되었다. 동 발트해의 모든 U보트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1] 발트해에 전개된 U보트가 많은 선박을 격침시킨 공적으로 1944년 11월 기사 철십자 훈장 다이아몬드장을 수훈했다.[1] 해군에서 다이아몬드장을 받은 사람은 브란디와 볼프강 뤼트뿐이다.[1]전후 브란디는 건축가로 활동했으며,[1] 1966년 고향 도르트문트에서 사망했다.[1]
4. 전후 활동

1945년 9월, 브란디는 포로 생활에서 풀려났다. 그는 벽돌공이 되었고, 이후 에센의 ''국립 건축학교''(Staatsbauschule)에서 건축학을 공부했다. 도르트문트와 사우디 아라비아에 지어진 여러 건물을 설계했으며, 3년 동안 독일 건축가 협회(Bund Deutscher Architektende) 회장을 역임했다. 그와 그의 아내 에바는 여섯 자녀를 두었는데, 1953년에 태어난 딸 사비네 브란디|사비네 브란디de는 은퇴한 ''서독 방송]''(Westdeutscher Rundfunk)의 언론인이다. 브란디는 병에 걸려 1966년 1월 6일
5. 사망 및 유산
1945년 9월, 브란디는 포로 생활에서 풀려났다. 그는 벽돌공이 되었고, 이후 에센의 국립 건축학교(Staatsbauschule)에서 건축학을 공부했다. 도르트문트와 사우디 아라비아에 지어진 여러 건물을 설계했으며, 3년 동안 독일 건축가 협회(Bund Deutscher Architektende) 회장을 역임했다. 그와 그의 아내 에바는 여섯 자녀를 두었는데, 1953년에 태어난 딸 사비네 브란디de는 서독 방송(Westdeutscher Rundfunk)의 은퇴한 언론인이다. 브란디는 병에 걸려 1966년 1월 6일 쾰른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는 도르트문트 중앙 묘지|lt=Hauptfriedhof Dortmundde에서 군사 장례식으로 매장되었으며, 옛 "35기" 동료인 라인하르트 주렌이 추도사를 낭독했다.[1] 독일 해군(Bundesmarine)에서는 준장(Konteradmiral) 귄터 쿠нке가 대표로 참석했다.[2]
6. 평가
브란디는 U-617, U-380, U-967의 함장으로서, 20척의 선박, 순양함 3척, 구축함 12척을 격침했다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격침한 것으로 인정받았다.[1] 지중해에서 격침한 선박은 포상 목적으로 두 배로 계산되었고, 군함을 격침한 것에 대한 추가 공적이 인정되었지만, 블레어에 따르면 브란디의 실제 격침 기록은 "놀랍도록 적었다".[1] 딕슨에 따르면 브란디는 12척의 선박을 격침시켰다.[2]
7. 진급 내역
| 날짜 | 계급 |
|---|---|
| 1935년 9월 25일 | 지휘 후보생 |
| 1936년 7월 1일 | 사관 생도 |
| 1938년 1월 1일 | 선임 사관 생도 |
| 1938년 4월 1일 | 해군 소위 |
| 1939년 10월 1일 | 해군 중위 |
| 1942년 10월 1일 | 대위 |
| 1943년 6월 1일 | 1942년 3월 1일 자로 소급된 대위 |
| 1944년 6월 8일 | 1944년 5월 9일 자로 소급된 소령 [1] |
| 1944년 12월 18일 | 1944년 8월 1일 자로 소급되어 1944년 12월 1일 자로 임명된 중령 [1] |
8. 서훈 내역
- 철십자 훈장 (1939년) 2급 및 1급[1]
- 국방군 근속 훈장 4급[2]
- 기뢰 제거함 전투장 (1940년 4월)[3]
- 유보트 전투장 (1941년 10월 8일)[4]
- * 금장 다이아몬드 (1943년 4월)[5]
- 이탈리아 군사 무공 은메달 (1943년 5월 29일)[6]
- 철십자 기사십자 훈장 (백엽, 검, 다이아몬드 포함)
- * 1943년 1월 21일, ''카피탄로이테난트'' 계급, U-617 함장 자격으로 기사십자 훈장 수여[7]
- * 1943년 4월 11일, ''카피탄로이테난트'' 계급, U-617 함장 자격으로 224번째 백엽 수여
- * 1944년 5월 9일, ''카피탄로이테난트'' 계급, U-380 함장 자격으로 66번째 검 수여
- * 1944년 11월 24일, ''코르벳텐카피탄'' 계급, U-967 함장 자격으로 22번째 다이아몬드 수여
- 유보트 전선 흉장 청동 (1945)
참조
[1]
문서
Reichsmarine was renamed to Kriegsmarine
German
1935-06-01
[2]
문서
2. Kompanie
2nd company
[3]
문서
II. Abteilung
2nd department
[4]
문서
Schiffsstammdivision
standing ship division
[5]
문서
Hauptlehrgang für Fähnriche
main cadet course
[6]
문서
Waffenlehrgang für Fähnriche
weapons course for cadets
[7]
문서
Kommandierender Admiral östliche Ostsee
commanding admiral of the eastern Baltic S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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