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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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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앤은 1665년에 태어나 1702년부터 1714년까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여왕으로 재위했다. 스튜어트 왕가의 일원으로서, 앤은 잉글랜드 왕 제임스 2세의 딸이었다. 그녀는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으로 통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도 관여했다. 앤은 17번의 임신을 했지만, 5명의 아이만 출산했고, 그들 모두 성인이 되기 전에 사망했다. 그녀의 통치 기간은 양당 정치의 발전, 예술과 문화의 번영, 그리고 종교적 갈등으로 특징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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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영국)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
로마자 표기Anne
별칭브랜디 낸
앤, 파란색과 노란색 예복을 입고 있다. 왕관 보석이 그녀의 왼쪽에 있는 테이블 위에 있다.
1705년 미카엘 달이 그린 초상화
앤 여왕의 서명
앤 여왕의 서명
통치 정보
직위잉글랜드 여왕
스코틀랜드 여왕
아일랜드 여왕
재위 기간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1702년 3월 8일 – 1707년 5월 1일
대관식1702년 4월 23일
이전 군주윌리엄 3세
직위 (그레이트브리튼)그레이트브리튼 여왕 및 아일랜드 여왕
재위 기간 (그레이트브리튼)1707년 5월 1일 – 1714년 8월 1일
후임 군주조지 1세
결혼과 자녀
배우자덴마크의 조지 왕자 (1683년 7월 28일 결혼, 1708년 10월 28일 사망)
자녀글로스터 공작 윌리엄 왕자
자녀 상세 정보더 많은 정보...
가문 정보
왕가스튜어트 가문
아버지제임스 2세
어머니앤 하이드
생애 정보
출생일1665년 2월 6일
출생지세인트 제임스 궁전, 웨스트민스터, 잉글랜드
사망일1714년 8월 1일 (49세)
사망지켄싱턴 궁, 런던, 잉글랜드
매장일1714년 8월 24일
매장지웨스트민스터 사원
종교
종교성공회

2. 생애

1665년 제임스 (훗날의 제임스 2세)와 그의 아내 앤 하이드 사이에서 차녀로 태어났다. 언니는 메리 2세이다. 성공회 신자로 자랐지만 정규 교육보다는 스포츠나 승마를 좋아했다. 아버지 궁정의 궁녀였던 사라 제닝스는 소녀 시절부터 친한 친구였다.

앤(가운데)과 여동생 메리(왼쪽) 그리고 부모인 요크 공작과 공작 부인, 피터 렐리와 베네데토 게나리 2세가 그린 그림


앤은 1665년 2월 6일 밤 11시 39분 런던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태어났다. 요크 공작(후일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국왕 제임스 2세이자 7세)과 그의 첫 번째 부인 앤 하이드 사이에서 태어난 네 번째 아이이자 두 번째 딸이었다.[1] 그녀의 아버지는 찰스 2세의 남동생이었고, 어머니는 클래런던 백작 에드워드 하이드의 딸이었다. 성공회 세례식에서 언니인 메리 2세가 대모 중 한 명이었다.[2] 앤의 부모는 여덟 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앤과 메리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3]

어린 시절 앤은 눈에 이상이 있어 치료를 위해 프랑스에서 외할머니, 숙모와 함께 살았다. 1670년 숙모가 갑자기 사망하자 잉글랜드로 돌아왔고, 다음 해에 어머니가 사망했다.[5]

왕실 가족의 전통대로, 앤과 그녀의 여동생은 서리주 리치먼드에서 아버지와 떨어져 자랐다.[6] 찰스 2세의 지시에 따라, 아버지가 가톨릭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개신교도로 양육되었다.[7] 교육은 성공회 교리에 초점을 맞추었다.[9] 런던 주교 헨리 컴프턴이 앤의 가정교사였다.[10]

1671년경 앤은 훗날 그녀의 절친한 친구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조언자 중 한 명이 되는 사라 제닝스를 처음 만났다.[11]

2. 1. 즉위 이전

1685년 찰스 2세가 사망하자 앤의 아버지 제임스가 잉글랜드의 제임스 2세이자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7세로 즉위했다. 제임스 2세는 검정법에 위배되는 가톨릭 신자 등용으로 국민들의 불안감을 일으켰다.[33] 앤은 이러한 상황에 우려를 표하며 성공회 예배에 계속 참석했다. 당시 앤과 그녀의 가족은 잉글랜드에서 개신교 예배에 참석한 유일한 왕족이었다.[34] 앤은 아버지가 막내딸을 가톨릭 신앙으로 세례 받도록 강요하려 하자,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는 사악하고 위험하며, 그들의 의식들—대부분—은 명백히 완전한 우상 숭배입니다."라고 자신의 자매에게 편지를 보내며 강하게 반발했다.[35][36] 이로 인해 앤은 아버지 및 계모와 사이가 멀어졌다.[37]

1687년 초, 앤은 유산을 겪었고, 남편 덴마크의 조지는 천연두에 걸렸으며, 두 어린 딸들 역시 같은 감염으로 사망했다.[38] 레이디 레이철 러셀은 조지와 앤이 이 비극을 매우 힘들어했다고 기록했다.[38] 그해 후반, 앤은 또다시 사산을 겪었다.[39]

모데나의 메리와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앤의 계모와 이복형제


제임스 2세의 부인 모데나의 메리가 임신하자, 제임스의 가톨릭 신앙에 대한 대중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40] 앤은 자매 메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왕비가 거짓 상속인을 통해 왕위를 계승하려 한다고 의심하며, "그들은 그들의 이익을 증진시킨다면 아무리 사악한 일이라도 서슴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적었다.[41] 1688년 4월, 앤은 또 한 번 유산을 겪었고, 회복을 위해 바스로 떠났다.[42]

1688년 6월 10일, 앤의 계모는 아들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를 낳았고, 이로써 가톨릭 왕위 계승 가능성이 높아졌다.[43] 앤은 바스에 있었기 때문에 출산을 직접 보지 못했고, 이는 아이가 가짜라는 믿음을 더욱 키웠다. 앤은 의도적으로 출산에 불참했을 수도 있고, 건강이 좋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44] 제임스 2세가 모든 개신교도들을 국가 문제에서 배제하려 했을 가능성도 있다.[45][46] 앤은 자매에게 "나는 이제 아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결코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편지를 썼다.[47]

제임스 2세는 가짜 아이라는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출산에 참석했던 40명의 증인을 비밀 내각 회의에 소집했지만, 앤은 자신이 임신했기 때문에(사실이 아니었음) 참석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48] 이후 "필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증언을 읽는 것조차 거부했다.[49]

소년 시절 (피터 레리(Peter Lely) 작)

2. 1. 1. 성장 배경

1665년 제임스 (훗날의 제임스 2세)와 그의 아내 앤 하이드 사이에서 차녀로 태어났다. 언니는 메리 2세이다. 성공회 신자로 자랐지만 정규 교육보다는 스포츠나 승마를 좋아했다. 아버지 궁정의 궁녀였던 사라 제닝스는 소녀 시절부터 친한 친구였다.

앤은 1665년 2월 6일 밤 11시 39분 런던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태어났다. 요크 공작(후일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국왕 제임스 2세이자 7세)과 그의 첫 번째 부인 앤 하이드 사이에서 태어난 네 번째 아이이자 두 번째 딸이었다.[1] 그녀의 아버지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세 왕국을 통치한 찰스 2세의 남동생이었고, 어머니는 클래런던 백작 에드워드 하이드의 딸이었다. 세인트 제임스 궁전의 왕실 예배당에서 있었던 성공회 세례식에서, 언니인 메리 2세가 대모 중 한 명이었고, 먼머스 공작 부인 앤 스콧과 캔터베리 대주교 길버트 셸던도 대모였다.[2] 앤의 부모는 여덟 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앤과 메리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3]

어린 시절 앤은 눈에 이상이 있었는데, 과도한 눈물로 나타나는 "점액성 분비물"이었다. 치료를 위해 프랑스로 보내져 파리 근처 콜롱브 샤토에서 외할머니인 프랑스의 앙리에트 마리와 함께 살았다.[4] 1669년 외할머니가 사망한 후에는 숙모인 오를레앙 공작 부인 앙리에트 앤과 함께 살았다. 1670년 숙모가 갑자기 사망하자 앤은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해에 어머니가 사망했다.[5]

왕실 가족의 전통대로, 앤과 그녀의 여동생은 서리주 리치먼드에 있는 자체 거처에서 아버지와 떨어져 자랐다.[6] 찰스 2세의 지시에 따라, 아버지가 가톨릭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개신교도로 양육되었다.[7] 에드워드 빌리어스 대령과 프랜시스 빌리어스 여사의 보살핌을 받았고,[8] 교육은 성공회 교리에 초점을 맞추었다.[9] 런던 주교 헨리 컴프턴이 앤의 가정교사로 임명되었다.[10]

1671년경 앤은 나중에 그녀의 절친한 친구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조언자 중 한 명이 되는 사라 제닝스를 처음 만났다.[11] 제닝스는 1678년경 존 처칠(미래의 말버러 공작)과 결혼했다. 그의 여동생 아라벨라 처칠은 요크 공작의 정부였고, 존 처칠은 앤의 가장 중요한 장군이 될 것이었다.[12]

2. 1. 2. 결혼과 불행

1683년 7월 28일 덴마크크리스티안 5세의 남동생인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자 요르겐과 결혼했다. 앤은 남편과의 사이에서 모두 19명의 아이를 임신했지만 14명이 유산(또는 상상임신)이나 사산으로 죽었고 2명은 태어난 그 날 중에 사망하였으며 나머지 3명도 10살까지 살지 못하는 불행을 겪었다.[28] 정략결혼이었지만, 그들은 충실하고 헌신적인 배우자였다.[29]

앤 여왕, 빌렘 위싱과 얀 판 더 파르트 작, 1684년경


앤 여왕의 불행한 출산의 원인은 항인지질항체증후군(APS)을 앓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앤 여왕은 17번의 임신을 했으며, 그중 5번이 출산으로 이어졌지만, 자녀들은 모두 성인이 되기 전에 사망했다.

자녀출생사망매장비고
사산된 딸1684년 5월 12일
런던[223]
1684년 5월 13일
웨스트민스터 사원[224]
메리1685년 6월 2일
화이트홀 궁전
1687년 2월 8일
윈저 성[39]
1687년 2월 10일 웨스트민스터 사원[225][226]천연두로 사망.[38]
앤 소피아1686년 5월 12일
윈저 성
1687년 2월 2일
윈저 성[39]
1687년 2월 4일 웨스트민스터 사원[226][229]
유산1687년 1월 21일[230]
사산된 아들1687년 10월 22일
화이트홀[231]
1687년 10월 22일 웨스트민스터 사원[232]
유산1688년 4월 16일[233]
글로스터 공작 윌리엄 왕자1689년 7월 24일
햄튼 코트 궁전
1700년 7월 30일
윈저 성[234]
1700년 8월 9일 웨스트민스터 사원[235]11세의 나이로 원인 불명으로 사망.[236]
메리1690년 10월 14일
세인트 제임스 궁전
1690년 10월 14일 웨스트민스터 사원[237]
조지1692년 4월 17일
사이온 하우스
1692년 4월 18일 웨스트민스터 사원[240]몇 분 동안만 살았음.[241]
사산된 딸1693년 3월 23일
버클리 하우스[243]
1693년 3월 24일 웨스트민스터 사원[244]
유산1694년 1월 21일
유산된 딸[248]1696년 2월 17일[249] 또는 18일[250]
유산1696년 9월 20일[250]
유산1697년 3월 25일[254]
유산1697년 12월 초[255]
사산된 아들1698년 9월 15일
윈저 성[258]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246]
사산된 아들1700년 1월 24일
세인트 제임스[259]
웨스트민스터 사원[246]


2. 1. 3. 명예혁명과 왕위 계승

1688년 명예 혁명에서 형부인 네덜란드의 오라녜 공 윌리엄이 잉글랜드에 상륙하자 윌리엄에게 투항했다.[16] 제임스 2세가 추방되어 언니 메리와 윌리엄이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로서 공동 통치자로 즉위하였지만, 사이가 나빴던 두 사람 사이 아이가 없었으므로 앤은 일찍부터 왕위 후계자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1692년 제임스 2세가 총애했던 장군 말버러 백작 존 처칠이 옛 주인 제임스와 극비리에 통신한 의혹을 받고 투옥되었을 때, 앤은 친구 사라의 남편이었던 존 처칠의 투옥에 반대하여 메리 여왕과 사이가 벌어졌다. 이 사건 이후 앤은 메리 여왕과 관계를 끊었다.[262]

2. 2. 재위 기간

앤 여왕은 1694년 메리 2세와 1702년 윌리엄 3세가 사망하자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여왕으로 즉위했다.[98] 즉위식에서 앤은 "나의 모든 정성을 오로지 잉글랜드를 위해 바치겠노라"는 연설을 하여 국민의 갈채를 받았다.[99] 앤 여왕은 남편 덴마크의 조지에게 대제독 지위를 주어 영국 해군(Royal Navy)에 대한 명목상의 지휘권을 부여했지만,[100] 덴마크의 조지는 통치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찰스 저버스(Charles Jervas) 작


앤 여왕의 즉위와 함께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잉글랜드는 네덜란드,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 스페인과 맞서 싸웠다. 앤 여왕은 친구의 남편 말버러 공작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플랑드르·독일에 파병하고, 시드니 고돌핀을 대장경에 임명하여 전쟁을 수행하게 했다.[263] 말버러 공작은 네덜란드 전선(현 벨기에)에서 큰 전과를 올렸고, 1704년 블렌하임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크게 무찔렀다.[263] 또한 영국 함대는 스페인의 지브롤터를 함락시켰다. 북아메리카식민지에서 벌어진 앤 여왕 전쟁은 결착이 나지 않았다.[263]

상원의원들에게 연설하는 앤 여왕


1707년 5월 1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연합법을 체결하여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으로 통합되었고, 앤 여왕은 그 최초의 군주가 되었다.[122] 앤 여왕은 잉글랜드 의회에 대한 첫 연설에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연합을 "매우 필요하다"고 선언했다.[111] 그러나 1702년 10월의 영국-스코틀랜드 합동 위원회는 1703년 2월 초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결렬되었다.[112][113]

스코틀랜드 의회는 안전 조치법을 통과시켜 여왕에게 자녀가 없을 경우 의회가 스코틀랜드 왕족의 개신교 후손 중에서 다음 국왕을 선택할 권한을 부여했다.[114] 앤 여왕은 처음에는 왕실 재가를 거부했지만, 의회가 재정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하자 재가를 허용했다.[116] 잉글랜드 의회는 1705년 외국인법으로 맞섰고, 스코틀랜드 의회는 결국 잉글랜드와의 연합을 선택했다.[117] 1706년 초, 앤 여왕은 연합 조건을 협상하기 위해 새로운 위원들을 임명했고,[119] 1707년 1월 16일과 3월 6일에 각각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의회에서 비준되었다.[121] 연합 조약에 따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1707년 5월 1일 단일 의회를 가진 그레이트브리튼이라는 단일 왕국으로 통합되었다.[122]

2. 2. 1. 즉위

1694년 메리 2세가 사망하고, 1702년 윌리엄 3세마저 사망하자 앤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여왕으로 즉위했다.[98] 즉위식에서 앤은 "나의 모든 정성을 오로지 잉글랜드를 위해 바치겠노라"는 연설을 하여 국민의 갈채를 받았다.[99] 앤 여왕은 즉위 후 곧 남편 덴마크의 조지에게 대제독 지위를 주어 영국 해군(Royal Navy)에 대한 명목상의 지휘권을 부여했다.[100] 그러나 덴마크의 조지는 여왕의 배우자로서 통치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2. 2. 2.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앤 여왕이 즉위했을 때 선왕 생전에 준비되었던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본격화되어 잉글랜드는 네덜란드와 함께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스페인과 싸우게 되었다. 앤 여왕은 친구의 남편 말버러 공작을 잉글랜드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플랑드르·독일에 파병하고, 말버러 공작의 친구인 시드니 고돌핀을 대장경에 임명하여 전쟁을 수행하게 했다.[263]

말버러 공작은 네덜란드 전선(현 벨기에)에서 큰 전과를 올렸고, 앤 여왕은 그를 말버러 공작으로 서임했다. 1704년에는 말버러 공작이 남독일에서 행해진 블렌하임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크게 무찔렀고, 그 후에도 플랑드르 지방에서 계속 승리를 거두었다.[263]

또한, 스페인과의 전쟁에서는 영국 함대가 스페인의 지브롤터를 함락시켰다. 영국과 프랑스가 북아메리카식민지에서 벌인 전쟁은 앤 여왕 전쟁이라고 불리지만, 이쪽은 결착이 나지 않았다.[263]

2. 2. 3.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합병

1707년 5월 1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양국의 연합법이 체결되면서 제임스 1세 이래 100년 동안 동군연합으로 묶여 있던 두 나라는 정식으로 통합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되었고, 앤 여왕은 그 최초의 군주가 되었다.[122]

아일랜드는 잉글랜드 왕관의 지배를 받았고 웨일스는 잉글랜드 왕국의 일부였지만, 스코틀랜드는 자체 의회와 법률을 가진 독립적인 주권 국가였다. 잉글랜드 의회가 통과시킨 1701년 왕위 계승법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국에는 적용되었지만, 스코틀랜드에는 적용되지 않았다.[110] 앤 여왕은 잉글랜드 의회에 대한 첫 연설에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연합을 "매우 필요하다"고 선언했다.[111] 1702년 10월, 앤 여왕의 전 거주지였던 코크핏에서 영국-스코틀랜드 합동 위원회가 조건을 논의하기 위해 회합했지만, 1703년 2월 초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결렬되었다.[112][113]

스코틀랜드 의회는 안전 조치법을 통과시켜 여왕에게 더 이상 자녀가 없을 경우, 스코틀랜드 왕족의 개신교 후손 중에서 다음 스코틀랜드 국왕을 선택할 권한을 의회에 부여했다.[114] 의회가 선택한 인물은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는 사람과 동일인이 될 수 없었으며,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 상인에게 완전한 무역 자유를 허용하는 경우에만 예외였다.[115] 앤 여왕은 처음에는 법안에 대한 왕실 재가를 거부했지만, 의회가 재정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하자 이듬해 재가를 허용했다.[116]

이에 잉글랜드 의회는 1705년 외국인법으로 맞섰다. 이 법은 스코틀랜드가 안전 조치법을 폐지하거나 잉글랜드와의 연합으로 나아가지 않는 한, 경제 제재를 가하고 스코틀랜드 국민을 잉글랜드에서 외국인으로 선언하겠다고 위협했다.[117] 스코틀랜드 의회는 후자를 선택했고, 잉글랜드 의회는 외국인법을 폐지하는 데 동의했다.[118] 1706년 초, 앤 여왕은 연합 조건을 협상하기 위해 새로운 위원들을 임명했다.[119] 위원들이 승인한 연합 조항은 1706년 7월 23일 앤 여왕에게 제출되었고,[120] 1707년 1월 16일과 3월 6일에 각각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의회에서 비준되었다.[121]

연합 조약에 따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1707년 5월 1일 단일 의회를 가진 그레이트브리튼이라는 단일 왕국으로 통합되었다.[122] 국경 양쪽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앤 여왕은 연합을 꾸준히 열렬히 지지했으며, 세인트폴 대성당에서 감사 예배에 참석했다. 스코틀랜드인 존 클라크 1대 남작은 "이 자리에서 여왕 자신보다 더 진심으로 경건하고 감사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기록했다.[123]

2. 3. 말년

1708년 10월 남편 조지 왕자가 사망하자 앤 여왕은 큰 슬픔에 빠졌다.[160] 이 사건은 앤 여왕과 말버러 공작 부인 사라와의 관계에 전환점이 되었다. 사라가 왕자의 죽음 직후 켄싱턴 궁에 도착하여 앤 여왕의 뜻에 반하여 켄싱턴 궁을 떠나 세인트 제임스 궁으로 갈 것을 강요하고, 여왕의 침실에서 조지 왕자의 초상화를 치우는 등 참견하는 행동을 하자 앤 여왕은 분개했다.[161][162]

휘그당은 조지 왕자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그들은 조지 왕자와 그의 부관 조지 처칠이 해군을 잘못 관리했다고 비난하며 해군성에 대한 불만을 제기했다.[163] 휘그당은 의회에서 우위를 점하고 앤 여왕이 남편을 잃은 슬픔을 이용하여, 앤 여왕에게 자신들의 지도자인 섬즈 경과 워튼 경을 내각에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앤 여왕은 남편을 대신할 내각 구성원을 임명하는 대신 직접 해군성의 직무를 수행하겠다고 고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휘그당은 오퍼드 백작을 제1 해군성 장관으로 임명할 것을 요구했고, 앤 여왕은 1708년 11월 온건파인 펨브로크 백작을 임명했다. 펨브로크 백작은 휘그당의 압력으로 1년도 채 되지 않아 사임했고, 1709년 11월 앤 여왕은 결국 오퍼드 백작을 제1 해군성 장관에 임명했다.[164]

사라는 앤 여왕에게 애비게일과의 우정을 비난하는 편지를 계속 보냈고, 1709년 10월 앤 여왕은 말버러 공작에게 편지를 써서 사라에게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것을 그만두고 친구이자 여왕에게 마땅히 해야 할 예의를 갖추라"고 요청했다.[165] 1710년 4월 6일 성목요일에 앤 여왕과 사라는 마지막으로 만났는데, 사라는 앤 여왕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서면으로 적어도 좋다"는 등의 말을 반복하며 냉담했다고 기록했다.[166]

메리 2세 부부와 앤 여왕에게는 성인이 된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즉위 전부터 후계자 문제가 발생했다. 앤 여왕은 여러 차례 임신과 출산을 했지만, 뇌수종을 앓았던 글로스터 공작을 제외한 모든 아이들이 유아기에 사망했다. 앤 여왕의 이복동생 제임스는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개신교 중심의 의회는 그의 즉위를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스튜어트 왕조의 혈통을 이으면서 개신교도인 하노버 선제후의 부인 소피아가 주목받았다. 1701년, 의회는 소피아와 그녀의 자손만이 계승자가 되어야 함을 명시한 왕위 계승법을 제정했다.

1714년 8월 1일 앤 여왕이 붕어하자 스튜어트 왕조는 단절되었다. 6월에 소피아도 사망했기 때문에, 그녀의 장남인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루트비히가 조지 1세로 즉위했다. 하리 신존 등은 앤 여왕 말년에 신임을 잃었고 조지 1세에게도 버림받아 실각했으며, 제임스의 왕위 탈환을 목표로 한 자코바이트의 반란도 진압되어 휘그당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후 조지 1세의 하노버 왕조에서 의회 민주주의가 발전해 나갔다.

2. 3. 1. 말버러 공작의 실각

1710년 앤 여왕은 오랜 친구이자 정치적 조언자였던 말버러 공작 부인 사라를 궁정에서 추방했다. 여왕은 점차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정치 세력에 기울었고, 사라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265] 같은 해, 평화 추진파인 토리당이 선거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았다.

토리당은 말버러 공작의 군자금 횡령 의혹을 조사했고, 이듬해 횡령 사실이 보고되면서 말버러 공작은 실각했다.[265] 주전론자였던 말버러 공작의 실각으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고,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영국은 지브롤터 등 여러 해외 영토를 획득하여 현재까지 영유하고 있다.[265]

2. 3. 2. 후계자 문제

앤 여왕은 성년이 된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즉위 전부터 왕위 계승 문제가 중요하게 거론되었다. 앤에게는 이복 남동생 제임스가 있었으나, 그는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 개신교 중심의 의회 세력은 가톨릭 왕이 전제정치를 부활시킬 것을 우려하여 제임스의 즉위를 반대했다.[198]

이에 따라, 스튜어트 왕조의 혈통을 이으면서 개신교도인 제임스 1세의 외손녀 소피아(하노버 선제후 왕비)와 그 자손을 왕위 계승자로 정하는 법률이 의회에서 제정되었다.

1714년 8월 1일 앤 여왕이 사망하면서 스튜어트 왕조는 단절되었다. 앤 여왕보다 두 달 앞서 소피아가 사망했기 때문에, 1701년 왕위 계승법에 따라 소피아의 아들인 하노버 선제후 조지가 왕위를 계승했다. 이복동생 제임스를 포함한 가톨릭 계승권 주장자들은 모두 무시되었다. 조지 1세의 즉위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이루어졌으며, 1715년 자코바이트 반란은 실패로 끝났다.[198]

2. 3. 3. 죽음

1714년 본태성 고혈압과 염증성 장질환으로 사망했다. 앤은 복부 비만 체질로 어디를 가더라도 가마를 타고 다녔고, 말년에는 전혀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비만이 심해져 궁전 안을 이동할 때도 경비대장의 도움으로 휠체어를 사용하였다. 1714년 사망 당시 관이 정방형이었다고 전해진다.[266] 앤 여왕이 사망하자 스튜어트 왕조는 단절되었고, 하노버 선제후였던 앤의 먼 친척 오라버니뻘인 게오르그 루트비히가 조지 1세로 즉위하였다.

3. 정치적 성향과 주요 사건

앤 여왕은 이복동생 제임스가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 중심의 의회는 그의 즉위를 원하지 않았다. 의회는 스튜어트 왕가의 혈통을 이은 프로테스탄트인 소피아를 주목했고, 1701년 왕위 계승법을 제정하여 소피아와 그녀의 자손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했다.[124]

1714년 앤 여왕이 사망하면서 스튜어트 왕조는 단절되었다. 소피아 역시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그녀의 장남인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루트비히가 조지 1세로 즉위했다. 조지 1세는 앤 여왕 말년에 신임을 잃은 인물들을 내치고 휘그당 정권을 수립했으며, 이후 하노버 왕조에서 의회 민주주의가 발전했다.

앤 여왕은 독실한 성공회 신자로서 토리당을 선호했다. 토리당은 성공회를 지지하고 지주 계급의 이익을 대변한 반면, 휘그당은 상업적 이익과 개신교 비국교도들과 연합했다. 앤 여왕은 심사율의 허점을 막아 비국교도들을 공직에서 배제하려는 1702년의 경우적 순응법을 지지했으나, 휘그당의 반대로 실패했다.[127]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앤 여왕은 말버러 공작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고, 1704년 블렌하임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면서 휘그당의 영향력이 커졌다. 그러나 앤 여왕은 사라와 불화를 겪으며 토리당에 더 가까워졌다.

1707년 5월 1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연합법 체결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탄생했고, 앤 여왕은 첫 번째 군주가 되었다.[160]

3. 1. 양당 정치의 발전

앤 여왕의 통치 기간은 양당제의 발전으로 특징지어진다. 일반적으로 토리당은 성공회를 지지하고 지주 계급의 이익을 대표한 반면, 휘그당은 상업적 이익과 개신교 비국교도들과 연합했다. 독실한 성공회 신자였던 앤 여왕은 토리당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124]

그녀의 첫 번째 내각은 주로 토리당으로 구성되었으며, 노팅엄 백작과 같은 극단적 토리당과 그녀의 삼촌인 로체스터 백작이 포함되었다.[125] 이 내각은 재무장관 고돌핀 백작과 앤 여왕의 총애를 받던 말보로 공작이 이끌었는데, 이들은 온건한 토리당으로 여겨졌으며, 하원의장 옥스퍼드와 모티머 백작도 포함되었다.[126]

앤 여왕은 토리당이 지지하고 휘그당이 반대한 1702년의 경우적 순응법을 지지했다. 이 법안은 공직에서 개신교 비국교도를 배제하기 위해 시험법의 허점을 막는 것을 목표로 했는데, 시험법은 공직을 성공회 국교도들에게만 제한하는 법률이었다. 기존 법률은 비국교도들이 매년 한 번 성공회 성찬식에 참여한다면 공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앤 여왕의 남편은 앤 여왕이 루터교도였던 그 자신도 경우적 순응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법안에 찬성하도록 강요했을 때 불행한 입장에 처했다. 휘그당은 의회 회기 동안 이 법안을 성공적으로 막았다.[127]

존 클로스터먼(John Closterman) 화파의 초상화, 1702년경


휘그당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강력하게 지지했으며, 말보로 공작이 1704년 블레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 후 더욱 영향력이 커졌다. 프랑스에 대한 육상 전쟁에 대한 영국의 개입에 반대한 많은 극단적 토리당원들이 해임되었다.[133] 고돌핀, 말보로, 그리고 노팅엄을 대신하여 북부 담당 국무장관이 된 할리는 "삼두정치"를 구성했다.[134] 그들은 휘그당, 특히 앤 여왕이 싫어했던 휘그 동맹 – 소머스 경, 할리팩스 백작, 오퍼드 백작, 워튼 후작, 선더랜드 백작 –의 지지에 점점 더 의존해야 했다.[135] 말보로 공작 부인 사라는 여왕에게 휘그당을 더 많이 임명하고 자코바이트와 다를 바 없는 토리당의 권력을 줄이라고 끊임없이 요구했고, 여왕은 그녀에게 점점 불만을 느꼈다.[136]

1706년, 고돌핀과 말보로 부부는 앤 여왕에게 준토 휘그당원이자 말보로 부부의 사위인 선더랜드 경을 할리의 동료이자 남부 담당 국무장관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137] 이것은 의회에서 내각의 입지를 강화했지만, 앤 여왕이 고돌핀과 그녀의 전 총애자인 말보로 공작 부인이 선더랜드와 다른 휘그당 후보들을 정부와 교회의 공석에 지지하는 것에 점점 더 짜증을 내면서 여왕과 내각의 관계는 악화되었다.[138] 여왕은 말보로와 고돌핀의 휘그당으로의 전향에 불편함을 느낀 할리에게 사적인 조언을 구했다. 그녀는 또한 앤 여왕과 사라의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영향력이 커진 침전실 여인인 메이샴 여남작에게도 의지했다.[139] 애비게일은 할리와 공작 부인 모두와 친척이었지만, 정치적으로 할리와 더 가까웠고, 그와 여왕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했다.[140]

내각 내 분열은 1708년 2월 8일, 고돌핀과 말보로 부부가 여왕에게 할리를 해임하거나 그들의 봉사 없이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여왕이 주저하는 듯하자 말보로와 고돌핀은 내각 회의에 참석하기를 거부했다. 할리는 전 동료 없이 업무를 처리하려고 시도했고, 소머싯 공작을 포함한 여러 참석자들은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참여를 거부했다.[141] 여왕은 할리를 해임했다.[142]

앤 여왕의 반크라운 주화, 1708년. 비문은 라틴어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앤)라고 적혀있다.

3. 2. 종교와 정치적 갈등

앤 여왕은 독실한 성공회 신자였기 때문에, 토리당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토리당은 성공회를 지지하고 지주 계급의 이익을 대변한 반면, 휘그당은 상업적 이익과 개신교 비국교도들과 연합했다.[124]

앤 여왕은 토리당이 지지하고 휘그당이 반대한 1702년의 경우적 순응법(Occasional Conformity Bill)을 지지했다.[127] 이 법안은 성공회 국교도가 아니면 공직을 맡을 수 없도록 제한한 심사율의 허점을 막아, 비국교도들을 공직에서 배제하려는 목적이었다. 기존 법률은 비국교도들이 매년 한 번 성공회 성찬식에 참여하면 공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허용했지만, 이 법안은 이를 막으려 했다. 앤 여왕의 남편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조지는 루터교 신자였음에도 이 법안에 찬성해야 했다. 휘그당은 이 법안을 막는 데 성공했다.[127]

앤 여왕은 윌리엄 3세가 미신으로 여겨 배척했던, 왕이 악을 치유하는 전통적인 종교 의식을 다시 도입했다.[128] 1703년 대폭풍 이후에는, "이 나라의 엄청난 죄를 용서하고 이 슬픈 심판을 내린 것에 대한 사죄"를 청하기 위해 전국적인 금식을 선포했다.[129] 폭풍 이후 경우적 순응법이 다시 부활했지만,[130] 앤 여왕은 정치적 다툼을 우려하여 지지를 보류했고, 법안은 다시 실패했다.[131] 1704년 11월, 재정법 수정안으로 이 법안을 도입하려는 세 번째 시도도 실패했다.[132]

휘그당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강력하게 지지했고, 블레넘 전투에서 말버러 공작이 큰 승리를 거둔 후 더욱 영향력이 커졌다. 프랑스와의 전쟁에 반대하던 많은 극단적 토리당원들이 해임되었다.[133]

3. 3.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과 내각 변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잉글랜드 참전으로 본격화되자, 앤 여왕은 친구의 남편 말버러 백작을 잉글랜드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플랑드르와 독일에 파견하였다. 또한 말버러 백작의 친구 시드니 고돌핀을 백작으로 임명하여 전쟁을 수행하게 하였다. 말버러 백작은 네덜란드 전선(현재의 벨기에)에서 큰 공을 세웠고, 앤 여왕은 그를 말버러 공작으로 서임했다. 1704년 블렌하임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치는 큰 승리를 거둔 이후에도 플랑드르 방면에서 계속 승리하였다.

앤 여왕의 통치 기간은 양당제의 발전으로 특징지어진다. 토리당은 영국 성공회를 지지하고 지주 계급의 이익을 옹호한 반면, 휘그당은 상업적 이익과 프로테스탄트 비국교도들과 연합했다. 독실한 성공회 신자였던 앤 여왕은 토리당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124] 그녀의 첫 번째 내각은 주로 토리당으로 구성되었으며, 노팅엄 백작과 같은 극단적 토리당과 그녀의 삼촌인 로체스터 백작이 포함되었다.[125] 이 내각은 재무장관 고돌핀 백작과 앤 여왕의 총애를 받던 말버러 공작이 이끌었는데, 이들은 온건한 토리당으로 여겨졌으며, 하원의장인 옥스퍼드와 모티머 백작도 포함되었다.[126]

휘그당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강력하게 지지했으며, 말버러 공작1704년 블렌하임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 후 더욱 영향력이 커졌다. 프랑스에 대한 육상 전쟁에 대한 영국의 개입에 반대한 많은 극단적 토리당원들이 해임되었다.[133] 고돌핀, 말보로, 그리고 노팅엄을 대신하여 북부 담당 국무장관이 된 하르레이는 "삼두정치"를 구성했다.[134] 그들은 휘그당, 특히 앤 여왕이 싫어했던 휘그 동맹 – 소머스 경, 할리팩스 백작, 오퍼드 백작, 워턴 후작, 선더랜드 백작 –의 지지에 점점 더 의존해야 했다.[135] 말버로 공작 부인 사라는 여왕에게 휘그당을 더 많이 임명하고 자코브파와 다를 바 없는 토리당의 권력을 줄이라고 끊임없이 괴롭혔고, 여왕은 그녀에게 점점 불만을 느꼈다.[136]

1706년, 고돌핀과 말보로 부부는 앤 여왕에게 준토 휘그당원이자 말보로 부부의 사위인 선더랜드 백작을 하르레이의 동료이자 남부 담당 국무장관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137] 이것은 의회에서 내각의 입지를 강화했지만, 앤 여왕이 고돌핀과 그녀의 전 총애자인 말보로 공작 부인이 선더랜드와 다른 휘그당 후보들을 정부와 교회의 공석에 지지하는 것에 점점 더 짜증을 내면서 여왕과 내각의 관계는 약화되었다.[138] 여왕은 말보로와 고돌핀의 휘그당으로의 전향에 불편함을 느낀 하르레이에게 사적인 조언을 구했다. 그녀는 또한 앤 여왕과 사라의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영향력이 커진 침전실 여인인 메이샴 여남작에게도 의지했다.[139] 애비게일은 하르레이와 공작 부인 모두와 친척이었지만, 정치적으로 하르레이와 더 가까웠고, 그와 여왕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했다.[140]

내각 내 분열은 1708년 2월 8일, 고돌핀과 말보로 부부가 여왕에게 하르레이를 해임하거나 그들의 봉사 없이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여왕이 주저하는 듯하자 말보로와 고돌핀은 내각 회의에 참석하기를 거부했다. 하르레이는 전 동료 없이 업무를 처리하려고 시도했고, 서머싯 공작을 포함한 여러 참석자들은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참여를 거부했다.[141] 여왕은 하르레이를 해임했다.[142]

3. 4. 말버러 공작 부인과의 불화

1710년 앤 여왕은 사라 처칠(말버러 공작 부인)을 궁정에서 추방했다.[265] 사라는 여왕에게 휘그당을 더 많이 임명하고 토리당의 권력을 줄이라고 압박했으며, 여왕은 사라에게 점점 불만을 느꼈다.[136]

앤 여왕은 사라의 사촌인 아비게일 메이샴을 중용하여 토리당에 가까워졌다.[265] 아비게일은 로버트 하르레이와 사라 모두와 친척이었지만, 정치적으로 하르레이와 더 가까웠고, 그와 여왕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했다.[140]

말버러 공작 부인은 아비게일이 자신이 사용하던 켄싱턴 궁전의 방으로 이사하자 분노했다.[148] 1708년 7월, 사라는 앤 여왕과 아비게일 사이의 레즈비언 관계를 암시하는 음란한 시를 가지고 법정에 왔고,[150] 앤 여왕에게 편지를 써서 "그런 여자에 대한 강한 열정을 품은 것... 이상하고 설명할 수 없는 일"로 명성을 손상시켰다고 비난했다.[151]

3. 5. 스코틀랜드와의 연합

1707년 5월 1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양국의 연합법이 체결되면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탄생했고, 앤 여왕은 그 첫 번째 군주가 되었다. 이는 제임스 1세 이래 100년 동안 동군연합으로 묶여 있던 양국이 정식으로 통합된 결과였다.[160]

4. 평가와 유산



앤 여왕은 여러 차례 임신했지만, 뇌수종을 앓았던 글로스터 공작 외에는 모든 아이들이 유아기에 사망했다.[1] 1700년 유일하게 성장한 윌리엄 왕자마저 11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후계자 문제가 심각해졌다.[1]

앤에게는 이복동생 제임스가 있었지만,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 중심의 의회는 그의 즉위를 원하지 않았다.[1] 이에 하노버 선제후의 부인 소피아가 새로운 왕위 계승자로 주목받았고,[1] 1701년 의회는 왕위 계승법을 제정하여 소피아와 그녀의 자손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했다.[1] 1714년 앤 여왕과 소피아가 모두 사망하자, 소피아의 장남인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루트비히가 조지 1세로 즉위하여 하노버 왕조가 시작되었다.[1]

조지 1세 즉위 후, 하리 신존(Harley-St John) 등은 실각하고, 제임스의 왕위 탈환을 위한 자코바이트의 반란도 진압되면서 휘그당 정권이 수립되었다.[1] 이후 하노버 왕조에서 의회 민주주의가 발전하게 되었다.[1]

4. 1. 전통적 평가와 재평가

앤 여왕은 여러 차례 임신과 출산을 했지만, 뇌수종을 앓았던 글로스터 공작을 제외한 아이들은 모두 유아기에 사망했다.[1] 1700년, 유일하게 성장한 왕자 윌리엄마저 11세의 나이로 잃고, 여왕 또한 36세 직전 17번째 임신에서 사산하면서 후계자 문제가 심각해졌다.[1]

앤 여왕에게는 이복동생 제임스가 있었지만, 그는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 중심의 의회는 그의 즉위를 원하지 않았다.[1] 이에 따라 스튜어트 왕가의 혈통을 이은 프로테스탄트인 하노버 선제후의 부인 소피아가 새로운 왕위 계승자로 주목받았다.[1]

1701년, 의회는 소피아와 그녀의 자손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는 왕위 계승법을 제정했다.[1] 1714년 앤 여왕이 붕어하고, 소피아 또한 사망하면서, 그녀의 장남인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루트비히가 조지 1세로 즉위하여 하노버 왕조가 시작되었다.[1]

조지 1세의 즉위 후, 하리 신존(Harley-St John) 등은 실각하고, 제임스의 왕위 탈환을 위한 자코바이트의 반란도 진압되면서 휘그당 정권이 수립되었다.[1] 이후 하노버 왕조에서 의회 민주주의가 발전하게 되었다.[1]

4. 2. 문화적 유산

앤 여왕은 예술, 문학, 과학 분야를 장려하고 후원했다. 블레넘 궁전과 하워드 성 등 건축 분야에도 영향을 미쳤다. 앤 여왕 양식 건축과 가구가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앤 여왕 시대에 다니엘 디포, 알렉산더 포프, 조나단 스위프트 등 저명한 작가들이 활동했다.

4. 3. 영향력

앤 여왕의 통치 기간은 영국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앤 여왕 정부의 정치적, 외교적 업적은 영국이 유럽의 주요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앤 여왕의 통치 기간 동안 군주와 의회 간의 헌법적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앤 여왕의 현명한 선택과 능력 덕분이었다.[1]

5. 칭호, 작위 및 문장

Anne영어 여왕은 덴마크 공주 시절,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여왕으로 즉위한 후, 그리고 1707년 연합법에 따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성립된 이후 각각 다른 문장을 사용했다.

덴마크 공주 시절에는 스튜어트 왕가의 문장을 바탕으로 덴마크 왕실 문장이 결합된 형태를 사용했다. 1702년 여왕 즉위 후에는 1603년부터 사용된 스튜어트 왕가의 왕실 문장을 사용했는데, 이는 4분원으로 나뉘어 있었다. 1사분면과 4사분면은 다시 프랑스(청색 바탕에 금색 플뢰르드리 3개)와 잉글랜드(적색 바탕에 금색 사자 3마리)를 나타내는 문장으로 4분할되었고, 2사분면은 스코틀랜드(금색 바탕에 붉은색 이중 3중선 안 붉은색 사자), 3사분면은 아일랜드(청색 바탕에 금색 하프)를 상징했다.[220] 앤 여왕은 엘리자베스 1세와 같은 "semper eadem"("항상 동일하게")이라는 모토를 채택했다.[220]

1707년 연합법에 따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합쳐져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되면서 문장도 바뀌었다. 연합 조약은 "해당 연합 왕국의 문장은 폐하께서 지정하시는 대로 한다"고 명시했다.[221] 이에 따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문장이 같은 사분면에 나란히 배치(병기)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1사분면과 4사분면에는 잉글랜드(적색 바탕에 금색 사자 3마리)와 스코틀랜드(금색 바탕에 붉은색 이중 3중선 안 붉은색 사자) 문장이 함께 들어갔고, 2사분면은 프랑스(청색 바탕에 금색 플뢰르드리 3개), 3사분면은 아일랜드(청색 바탕에 금색 하프)를 나타냈다.[220]

앤 여왕의 문장 변화
덴마크 공주 시절1702년 ~ 1707년1707년 ~ 1714년
덴마크 공주 시절 앤의 문장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여왕으로서의 문장
그레이트브리튼 여왕으로서의 문장


5. 1. 칭호 및 작위

Anne영어 여왕은 덴마크 공주 시절,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여왕으로 즉위한 후, 그리고 1707년 연합법에 따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성립된 이후 각각 다른 문장을 사용했다.

덴마크 공주 시절에는 스튜어트 왕가의 문장을 바탕으로 덴마크 왕실 문장이 결합된 형태를 사용했다. 1702년 여왕 즉위 후에는 1603년부터 사용된 스튜어트 왕가의 왕실 문장을 사용했는데, 이는 4분원으로 나뉘어 있었다. 1사분면과 4사분면은 다시 프랑스(청색 바탕에 금색 플뢰르드리 3개)와 잉글랜드(적색 바탕에 금색 사자 3마리)를 나타내는 문장으로 4분할되었고, 2사분면은 스코틀랜드(금색 바탕에 붉은색 이중 3중선 안 붉은색 사자), 3사분면은 아일랜드(청색 바탕에 금색 하프)를 상징했다.[220] 앤 여왕은 엘리자베스 1세와 같은 "semper eadem"("항상 동일하게")이라는 모토를 채택했다.[220]

1707년 연합법에 따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합쳐져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되면서 문장도 바뀌었다. 연합 조약은 "해당 연합 왕국의 문장은 폐하께서 지정하시는 대로 한다"고 명시했다.[221] 이에 따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문장이 같은 사분면에 나란히 배치(병기)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1사분면과 4사분면에는 잉글랜드(적색 바탕에 금색 사자 3마리)와 스코틀랜드(금색 바탕에 붉은색 이중 3중선 안 붉은색 사자) 문장이 함께 들어갔고, 2사분면은 프랑스(청색 바탕에 금색 플뢰르드리 3개), 3사분면은 아일랜드(청색 바탕에 금색 하프)를 나타냈다.[220]

앤 여왕의 문장 변화
덴마크 공주 시절1702년 ~ 1707년1707년 ~ 1714년
덴마크 공주 시절 앤의 문장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여왕으로서의 문장그레이트브리튼 여왕으로서의 문장


5. 2. 문장

앤 여왕의 문장은 재위 기간 동안 왕국의 변화를 반영하여 바뀌었다. 1702년 즉위 당시 앤 여왕은 1603년부터 사용된 스튜어트 왕가의 문장을 사용했다. 이 문장은 4분원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1사분면과 4사분면은 다시 프랑스를 상징하는 플뢰르드리(fleur-de-lis)와 잉글랜드를 상징하는 사자 문양으로 나뉘었고, 2사분면은 스코틀랜드를 상징하는 붉은 사자, 3사분면은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하프 문양으로 구성되었다.[220] 앤 여왕은 엘리자베스 1세와 같은 "semper eadem"("항상 동일하게")이라는 모토를 채택했다.[220]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연합하여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되면서 앤 여왕의 문장도 바뀌었다. 연합 조약은 "해당 연합 왕국의 문장은 폐하께서 지정하시는 대로 한다"고 명시했다.[221] 새로운 문장에서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상징하는 문양이 1사분면과 4사분면에 함께 배치(병기)되었고, 2사분면은 프랑스, 3사분면은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문양이 유지되었다.[220]

1702년부터 1707년까지 잉글랜드 여왕으로서의 문장1707년부터 1714년까지 그레이트브리튼 여왕으로서의 문장


6. 임신과 자녀

앤은 1683년 7월 28일 덴마크의 조지와 결혼했다.[28] 이들은 2촌 당숙 관계였다.[26] 정략결혼이었지만, 충실하고 헌신적인 부부였다.[29] 앤은 남편과의 사이에서 17번의 임신을 하였으나, 잦은 유산과 사산, 그리고 어린 자녀들의 요절로 인해 큰 슬픔을 겪었다.

자녀출생사망매장비고
사산된 딸1684년 5월 12일
런던[223]
1684년 5월 13일
웨스트민스터 사원[224]
결혼 몇 달 만에 가진 첫 임신이었으나 사산했다.[32]
메리1685년 6월 2일
화이트홀 궁전
1687년 2월 8일
윈저 성[39]
1687년 2월 10일
웨스트민스터 사원[225][226]
런던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으며,[227] "레이디 메리"로 불렸다.[226] 1687년 초 윈저 성에서 천연두로 사망했다.[38]
앤 소피아1686년 5월 12일
윈저 성
1687년 2월 2일
윈저 성[39] 또는 화이트홀[228]
1687년 2월 4일
웨스트민스터 사원[226][229]
더럼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레이디 처칠이 대모 중 한 명이었다.[227] "레이디 앤 소피아"로 불렸다.[226] 언니 메리와 같은 시기에 천연두로 사망했다.[38]
유산1687년 1월 21일[230]
사산된 아들1687년 10월 22일
화이트홀[231]
1687년 10월 22일
웨스트민스터 사원[232]
앤은 임신 7개월 만에 출산했지만, 아기는 "태중에서 한 달 동안 죽은 채로 있었다"고 한다.[231]
유산1688년 4월 16일[233]
글로스터 공작 윌리엄 왕자1689년 7월 24일
햄튼 코트 궁전
1700년 7월 30일
윈저 성[234]
1700년 8월 9일
웨스트민스터 사원[235]
11세의 나이로 원인 불명으로 사망했다.[236]
메리1690년 10월 14일
세인트 제임스 궁전
1690년 10월 14일
웨스트민스터 사원[237]
두 달 조산되었으며,[238] 약 두 시간 살았다.[239]
조지1692년 4월 17일
사이온 하우스
1692년 4월 18일
웨스트민스터 사원[240]
몇 분 동안만 살았고,[241] 세례를 받을 만큼만 살았다.[242] "로드 조지"로 불렸다.[240]
사산된 딸1693년 3월 23일
버클리 하우스[243]
1693년 3월 24일
웨스트민스터 사원[244]
유산1694년 1월 21일근대 역사가 에드워드 그레그와 앨리슨 위어는 아들[245]이었는지 아니면 딸이었을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246]
유산된 딸[248]colspan=2 style="text-align: center;" |
유산1696년 9월 20일[250]
유산1697년 3월 25일[254]
유산1697년 12월 초[255]
사산된 아들1698년 9월 15일
윈저 성[258]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246]
사산된 아들1700년 1월 24일
세인트 제임스[259]
웨스트민스터 사원[246]


7.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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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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