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라 산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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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마이라 산체스는 1985년 네바도델루이스 화산 폭발로 발생한 아르메로 참사 당시 잔해에 갇혀 사망한 콜롬비아 소녀이다. 화산 폭발로 인한 라하르(화산 이류)로 인해 집이 무너졌고, 산체스는 잔해에 다리가 갇힌 채 60시간 동안 구조를 기다리다 사망했다. 그녀의 죽음은 콜롬비아 정부의 미흡한 재난 대응과 열악한 구조 환경을 보여주는 사례로, 프랑스 사진작가 프랭크 푸르니에가 촬영한 사진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아르메로 참사 이후 콜롬비아 정부는 재난 예방 및 대응 시스템을 강화했으며, 산체스는 재난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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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라 산체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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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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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오마이라 산체스 가르손 |
출생일 | 1972년 8월 28일 |
출생지 | 아르메로, 톨리마 주, 콜롬비아 |
사망일 | 1985년 11월 16일 |
사망 장소 | 아르메로, 톨리마, 콜롬비아 |
사망 원인 | 네바도델루이스 화산 폭발로 사망 |
국적 | 콜롬비아 |
부모 | 알바로 엔리케 산체스 마리아 알레이다 가르손 |
2. 역사적 배경: 아르메로 참사
1985년 11월 13일, 콜롬비아의 네바도델루이스 산 화산이 폭발했다. 그날 저녁 9시 9분경, 화구에서 분출된 화산쇄설류가 산 정상의 빙하를 녹여 거대한 라하르(화산 이류)를 형성했고, 이는 강 계곡을 따라 빠르게 흘러내렸다.
세 차례에 걸쳐 밀려온 라하르 중 첫 번째 파동이 가장 큰 피해를 입혔다. 초당 약 6m의 속도로 이동한 라하르는 산기슭의 아르메로 마을 대부분을 덮쳐 최대 2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이어지는 파동으로 건물들이 추가로 파괴되었다. 인근 친치나 시에서도 또 다른 라하르로 인해 1,800명이 사망했다.[2] 결과적으로 총 23,000명이 사망하고 아르메로를 포함한 13개 마을이 파괴되는 참사가 발생했다.[3]
이러한 대규모 인명 피해는 임박한 위험의 명확한 징후에도 불구하고 당국이 예방 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못한 점으로 인해 악화되었다.[9] 1845년 이후 화산 폭발이 없었기 때문에 주민과 당국 모두 안일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현지인들은 화산을 "잠자는 사자"라고 불렀다.[4]
1985년 9월, 화산 주변에서 지진과 수증기 분출이 감지되자 관계자들은 대피 계획 수립을 시작했다. 10월에는 콜롬비아 화산에 대해 최초로 위험 지도가 제작되었다.[6] 이 지도는 무리요, 산타 이사벨, 리바노 인근 지역의 화산재 낙진 및 화산암 위험과 함께, 마리키타, 구아야발, 친치나, 특히 아르메로 지역의 라하르 위협을 명확히 경고했다.[5] 그러나 이 지도는 가장 위험에 노출된 주민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여러 주요 신문에 지도가 실리기는 했지만, 많은 생존자들은 지도 존재 자체를 몰랐다고 증언했다.[6] 콜롬비아 광산 지질 연구소의 헨리 비예가스는 지도가 아르메로의 위험을 명확히 했음에도 "경제적 이해관계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고 지적했으며, 지도 제작과 실제 폭발 사이의 시간이 짧아 효과적인 배포가 어려웠다고 덧붙였다.[7]
게다가 콜롬비아 의회는 위험을 경고하는 과학 및 시민 방위 기관을 오히려 공포감을 조성한다며 비판했고, 정부와 군대는 당시 수도 보고타에서 격화되던 게릴라전에 집중하느라 화산 위협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8]
결국 조기 경보 시스템의 부재,[9] 라하르 발생 가능성이 높은 경로에 마을이 건설된 부적절한 토지 이용,[33] 그리고 화산 인근 지역 사회의 재난 대비 부족[9]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피해 규모를 키웠다. 아르메로 참사로 알려진 이 사건은 콜롬비아 역사상 최악의 자연 재해로 기록되었으며,[10] 1902년 마르티니크의 펠레 산 폭발 다음으로 20세기 두 번째로 많은 사망자를 낸 화산 재해였다.[11] 또한 서기 1500년 이후 기록된 화산 폭발 중 네 번째로 치명적인 사건이었으며,[12] 발생한 라하르는 화산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25]
2. 1. 오마이라 산체스의 생애와 구조 노력
오마이라 산체스는 쌀과 수수 수집가인 아버지 알바로 엔리케와 어머니 마리아 알레이다, 남동생 알바로 엔리케, 고모 마리아 아델라 가르손과 함께 산탄데르 지역에 살았다.[13][14][19] 네바도 델 루이스 화산 폭발 전, 어머니는 사업차 보고타에 가 있었다.[17] 재난 당일 밤, 오마이라와 가족은 화산 폭발로 인한 화산재 낙하를 걱정하며 잠 못 이루다가 다가오는 라하르(화산 이류) 소리를 들었다.[13] 라하르가 집을 덮친 후, 오마이라는 콘크리트와 다른 잔해 아래에 갇혀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었다. 구조대가 그녀를 도우려 했을 때, 그녀의 다리가 이미 숨진 고모의 팔에 단단히 붙잡힌 채 집 지붕 아래에 끼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4][17] 산체스가 갇힌 정도에 대해서는 출처마다 차이가 있는데, 자이더만(2009)은 그녀가 '목까지 갇혔다'[15]고 기술했고, 바라간(1987)은 허리까지 갇혔다고 기록했다.[13]라하르가 덮친 후 처음 몇 시간 동안, 그녀는 콘크리트에 덮여 있었지만 잔해 틈새로 손을 내밀 수 있었다. 한 구조대원이 잔해 더미에서 그녀의 손을 발견했고, 다른 구조대원들과 함께 하루 동안 타일과 목재를 치웠다. 소녀의 상반신이 드러나자 구조대원들은 그녀를 끌어내려 했지만, 다리를 골절시키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를 잡아당길 때마다 주변에 물이 고여 차올랐고, 놓아주면 익사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구조대원들은 그녀가 물에 뜰 수 있도록 몸 주위에 타이어를 둘렀다. 다이버들이 확인한 결과, 산체스의 다리는 벽돌로 된 문짝 아래에 걸려 있었고, 이미 숨진 고모의 팔이 그녀의 다리와 발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13]
매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산체스의 구조 활동은 60시간 동안 이어졌다. 다리와 허리가 잔해에 끼고 목까지 진흙탕에 잠긴 상태에서도 산체스는 놀라운 침착함을 보였다. 그녀는 자원봉사자로 구조 활동에 참여한 저널리스트 헤르만 산타마리아 바라간과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구조대원들은 노래를 좋아하는 산체스를 위해 노래를 부르며 작업을 계속했고, 산체스는 단 음식을 원하고 탄산 음료를 마셨다. 때때로 두려움에 울거나 기도를 하기도 했다.[13]
재난 발생 사흘째 밤, 산체스는 환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학교에 지각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거나 수학 시험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의 눈은 붉게 충혈되었고 얼굴은 부어올랐으며 손은 하얗게 변했다. 죽음을 직감했는지, 산체스는 구조대원들에게 현장에서 잠시 떠나 쉬라고 간청했다. '아저씨들도 피곤하시죠. 조금 쉬세요.'[13]
진흙탕이 된 현장의 지반은 매우 불안정했고, 잔해를 철거하기 위한 중장비를 투입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수위를 낮추기 위한 펌프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산체스가 위독한 상태였다. 그녀의 다리는 무릎을 꿇은 듯 콘크리트 아래로 꺾여 있었고, 다리를 절단하지 않고는 구출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절단 수술을 위한 의료 기기가 부족했고, 물속에서 다리를 절단할 경우 출혈을 막기 어렵다는 문제 때문에 구조 활동에 참여한 의사들은 산체스를 안락사시키는 것이 더 인도적이라는 어려운 결론에 도달했다. 오마이라 산체스는 11월 16일 오전 10시 5분경, 괴저 또는 저체온증으로 결국 사망했다.[13]
산체스의 오빠는 재난에서 살아남았지만, 아버지와 고모는 사망했다. 보고타에 있어 화를 면한 어머니는 '그것은 끔찍한 일이지만, 우리는 살아가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손가락을 잃은 아들을 위해 살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산체스의 비극적인 죽음과 사흘간의 구조 과정은 대중 매체를 통해 전 세계에 보도되며 큰 충격을 주었다. 콜롬비아 정부는 산체스의 죽음에 대해 국민에게 사흘간의 애도를 선포했다. 그러나 구조 현장에서는 삽, 절단 도구, 들것 등 기본적인 장비조차 부족했고, 라디오 방송을 통해 필요한 물품 지원을 호소해야 했다. 오랜 콜롬비아 내전으로 국정이 불안정했던 콜롬비아 정부는 콜롬비아 혁명군(FARC)과의 전투에 시달리고 있었다. 부족한 소방 및 구조 체계가 산체스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비판에 대해, 당시 콜롬비아 국방부 장관 미겔 우리베는 '콜롬비아는 그러한 장비를 갖추지 못했다', '개발도상국'이라고 해명했다.
2. 2. 죽음과 사회적 영향
오마이라 산체스는 아르메로의 진흙과 잔해 속에 60시간 가까이 갇혀 있었지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비교적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그녀는 자원 봉사자로 활동하던 저널리스트 게르만 산타 마리아 바라간에게 노래를 불러주기도 하고,[17] 단 음식을 찾거나 탄산 음료를 마셨으며,[13] 인터뷰에 응하기도 했다. 하지만 때로는 두려움에 떨며 기도하거나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16]구조 작업 사흘째 밤이 되자 산체스는 환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학교에 지각하고 싶지 않다거나,[18] 수학 시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등[17]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의 눈은 충혈되고 얼굴은 부어올랐으며 손은 하얗게 변해갔다. 산체스는 죽음을 직감했는지 구조대원에게 현장에서 떠나 쉬라고 간청하기도 했다. 몇 시간 후, 구조대원들이 펌프를 가져와 물을 빼내려 시도했지만, 그녀의 다리는 콘크리트 아래에서 무릎을 꿇은 듯 꺾여 있어 다리를 절단하지 않고는 구출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현장에는 절단 수술 후의 출혈을 감당할 만한 의료 장비가 부족했고, 물속에서의 수술 위험성 때문에 현장의 의사들은 그녀를 그대로 두는 것이 더 인도적이라고 판단했다.[13] 산체스는 총 60시간가량 갇혀 있다가 11월 16일 오전 10시 5분경, 괴저나 저체온증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16][18]
산체스의 오빠는 화산 이류 속에서 살아남았지만, 아버지와 이모는 목숨을 잃었다. 당시 보고타에 있어 화를 면했던 어머니는 딸의 죽음에 대해 "끔찍한 일이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을 생각해야 한다... 손가락 하나를 잃은 아들을 위해 살 것"이라고 말했다.[14][19]
대중 매체를 통해 산체스의 상황을 알게 된 대중은 그녀의 죽음을, 구출될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희생자들을 제대로 돕지 못한 관리들의 실패를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30] 신문 등을 통해 구조 현장의 열악한 상황, 즉 삽, 절단 도구, 들것과 같은 기본적인 장비조차 부족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은 더욱 커졌다.[20] 이는 당국이 최고의 물자를 사용하고 있다는 초기 발표와는 상반되는 내용이었다. 자원봉사 구조대원들은 자원이 부족하여 기본적인 물자마저 고갈되었다고 증언했으며, 구조 과정은 많은 군중과 혼란으로 인해 방해를 받았다. 익명의 경찰관은 정부가 인력에만 의존했을 뿐 체계적인 구조 시스템이 부재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20] 당시 콜롬비아 국방부 장관 미겔 우리베는 구조 노력에 대한 비판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콜롬비아는 "그런 종류의 장비를 갖추지 못한 개발 도상국"이라는 현실적 한계를 언급했다.[20] 콜롬비아 내전 등으로 인한 불안정한 국내 상황과 미비한 재난 대응 체계가 이러한 비극을 막지 못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콜롬비아 정부는 산체스의 죽음에 대해 국민에게 3일간의 애도를 선포했다.
당시 엘 템포의 기자 게르만 산타 마리아 바라간은 "콜롬비아와 세계의 절반은 오마이라 산체스가 아르메로의 잔해 속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60시간 가까이 갇힌 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쓰라린 감정을 느꼈다. 그녀의 얼굴, 그녀의 말, 그리고 그녀의 용기는 텔레비전을 통해 전 세계로 방송되었고, 미국과 유럽의 주요 신문과 잡지에 가슴 아픈 이미지로 남아, 최소한 비극을 덜 심각하게 만들 수 있었던 사람들에 대한 비난의 증거로 남았다"고 기록하며 당시의 충격과 비판 여론을 전했다.[30]
3. 사진: "오마이라 산체스의 고통"
프랑스의 사진기자 프랭크 푸르니에는 1985년 11월 15일 콜롬비아 보고타에 도착했다. 그는 16일 새벽 아르메로 현장에 도착하여 한 농부의 안내로 오마이라 산체스를 만났다. 당시 산체스는 건물 잔해에 갇힌 지 거의 사흘이 되어가고 있었고, 구조의 손길이 거의 미치지 못하는 상태였다.[18] 푸르니에는 당시 마을의 상황을 "매우 잊혀지지 않는", "소름 끼치는 침묵" 속에서 비명만이 들리는 곳으로 묘사했다.[18] 그는 산체스의 마지막 순간들을 사진으로 기록하며 "오마이라 산체스의 고통"이라는 제목을 붙였다.[21] 푸르니에는 자신이 "무력감"을 느꼈으며, "어린 소녀의 용기와 고통, 그리고 존엄성을 제대로 보도"하여 재난 구호의 필요성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진을 찍었다고 밝혔다.[18][22]
산체스의 사진은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재난 대응 실패에 대한 국제적인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익명의 BBC 기자는 "많은 사람들이 오마이라의 마지막 몇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을 너무 가까이에서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전했다.[18] 푸르니에의 사진이 프랑스 시사 주간지 파리 매치에 게재되자, 일각에서는 그를 비극을 이용하는 "독수리"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푸르니에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보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고,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것이 더 기뻤습니다.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았다면 더 나빴을 것입니다. ... 저는 이 사진이 전 세계에서 구호 자금을 모으는 데 도움이 되었고, 해당 국가 지도자들의 무책임함과 용기 부족을 강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18]
이 사진은 1986년 올해의 세계 보도 사진으로 선정되며 그 영향력을 인정받았다.[23] 사진은 대중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칠레의 작가 이사벨 아옌데는 산체스의 비극을 바탕으로 단편 소설 'De barro estamos hechos|우리는 흙으로 만들어졌다es'(And of Clay Are We Created)를 집필했다. 아옌데는 "그녀(오마이라 산체스)의 크고 검은 눈은 아직도 내 꿈 속에서 나를 따라온다. 이야기를 쓰는 것으로 그녀의 유령을 떨쳐낼 수 없었다"고 술회했다.
4. 유산: 아르메로 참사 이후의 변화
아르메로 참사는 M-19 게릴라 그룹의 습격과 그에 이은 11월 6일 정의궁 점거 사건 직후에 발생하여 이미 혼란스러웠던 콜롬비아 사회에 더 큰 충격을 주었다. 오마이라 산체스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콜롬비아 정부는 화산 폭발 전 명백한 경고 징후들을 무시하고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24]
콜롬비아 화산 감시 센터에 따르면 네바도델루이스 화산은 여전히 활동 중인 활화산이다. 만약 산 정상의 얼음 중 10%만 녹아도 200000000m3에 달하는 거대한 라하르(화산이류)가 발생할 수 있으며, 이는 1985년 아르메로를 파괴했던 규모와 유사하다.[25] 이러한 라하르는 불과 몇 시간 만에 강 계곡을 따라 최대 100km까지 흘러내릴 수 있다.[25] 현재 콤베이마, 친치나, 코엘로-토체, 구알리 계곡 등에 거주하는 약 50만 명이 잠재적인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이 중 10만 명은 고위험 지역에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26] 한때 번성했던 아르메로 시는 이제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기독교 십자가와 오마이라 산체스를 기리는 작은 기념비가 세워져 참사의 비극을 증언하고 있다.[27]
참사 이후 수년 동안 오마이라 산체스는 특히 ''엘 티엠포''와 같은 언론 매체를 통해 반복적으로 기억되었다.[28] 참사의 수많은 희생자들이 추모되었지만, 산체스는 대중 시, 소설, 음악 등 다양한 문화 영역에서 지속적인 관심을 받으며 비극의 상징적인 인물로 남았다.[29]
예를 들어, 2008년 칠레에서 결성된 한 펑크 록 밴드는 자신들의 이름을 '오마이라 산체스'라고 지으며, "오늘날 세상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과실에 대한 불만"을 음악을 통해 표출한다고 밝혔다.[30] 에두아르도 산타는 참사에 대한 응답으로 Adiós, Omayra: La catástrofe de Armerospa (1988)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은 소녀의 마지막 며칠을 상세히 기록하며 서문에서 그녀를 참사의 영원한 상징으로 언급했다.[30] 헤르만 산타 마리아 바라간은 그의 저서 No Morirásspa (1994)에서 아르메로에서 목격한 모든 공포 중에서도 집의 폐허 아래 갇힌 오마이라 산체스의 얼굴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었다고 회고했다.[17] 칠레의 유명 작가 이사벨 아옌데는 단편 소설 "그리고 우리는 흙으로 만들어졌다"(De barro estamos hechosspa)에서 폐허 속 벽난로 아래 갇힌 어린 소녀를 돕는 기자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아옌데는 훗날 "그녀[산체스]의 크고 검은 눈은 체념과 지혜로 가득 차 있으며, 여전히 내 꿈속에서 나를 쫓아온다. 이야기를 쓰는 것으로 그녀의 유령을 떨쳐낼 수 없었다"고 술회했다.[31] 프랑스의 포토 저널리스트 프랭크 푸르니에가 산체스가 사망하기 직전에 촬영하여 '오마이라 산체스의 고뇌'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사진은 전 세계 언론에 게재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고, 1986년 월드 프레스 포토 상을 수상했다.
이러한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콜롬비아 정부는 '국가 재난 대비 사무소'(Oficina Nacional para la Atención de Desastresspa)를 설립했으며, 이는 현재 '재난 예방 및 대비국'(Dirección de Prevención y Atención de Desastresspa)으로 운영되고 있다.[32] 또한, 콜롬비아의 모든 도시는 자연재해에 대비한 계획을 의무적으로 수립하도록 규정되었다.[33]
한편, 아르메로 참사 현장에서 발견된 한 귀뚜라미 종은 2020년에 새롭게 기술되었으며, 오마이라 산체스를 기리기 위해 학명 ''Gigagryllus omayrae''로 명명되었다.[3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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