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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무라 마스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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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무라 마스지로는 조슈번 출신으로, 19세기 일본의 군인, 의사, 랑가쿠 연구자이다. 그는 22세에 오사카에서 랑가쿠를 배우고, 나가사키에서 서양 의학을 익혔으며, 서양 군사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후 조슈번의 군사 교관으로 활동하며 근대적인 군대 건설에 힘썼고,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병부대보를 역임하며 징병제를 기반으로 한 근대적 군대 육성을 추진했다. 그의 급진적인 개혁은 반발을 사기도 했으며, 1869년 암살당했다. 그는 일본 근대 군대의 아버지로 평가받으며, 그의 군제 개혁 구상은 동료들에 의해 실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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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무라 마스지로
기본 정보
오무라 마스지로
오무라 마스지로
이름오무라 마스지로
한자 표기大村 益次郎
출생일1824년 5월 30일
출생지야마구치, 조슈 번, 에도 막부
사망일1869년 12월 7일
사망지오사카, 일본 제국
알려진 업적일본 제국 육군 창설
직업군사 이론가 및 지도자
국적일본
로마자 표기Ōmura Masujirō
정치
소속 정당무소속
전직무사 (조슈 번사)
직책초대 병부대보
취임일1869년 7월 8일
퇴임일1869년 11월 5일
원수메이지 천황
가계
양자오무라 마쓰지로 (야마모토 도우에몬의 아들)
손자오무라 히로토 (마쓰지로의 양자, 가메야마 교린의 아들)
증손자오무라 도쿠토시 (히로토의 양자, 모리 모토노리 공작의 아들)
현손오무라 야스토시
배우자코토코
학력
출신 학교데키주쿠
기타
증위종2위 추증

2. 젊은 시절

조슈번 무라타 다카마스의 아들로 태어난 오무라 마스지로는 어릴 때부터 학문에 뜻이 깊었다. 22세에 오사카로 가서 난학(네덜란드 학문)을 공부하였고, 이후 나가사키에서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에게 서양 의학을 배웠다. 지볼트는 일본에서 최초로 서양 의학을 가르친 인물이다. 오무라는 서양 학문을 공부하면서 서양 군사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1]

26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진료 활동을 시작했으나, 1853년부터 우와지마번 다이묘 다테 무네나리의 제안으로 사무라이 계급으로 격상되어 우와지마번에서 서양 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했다.[1]

당시 일본은 서양 세력의 출몰과 서구 열강의 쇄국 정책 철회 압력으로 혼란스러웠다. 오무라는 다시 나가사키에서 서양식 군함 조선술과 항해술을 배웠고, 1856년 다테를 따라 에도로 가 강무소(講武所) 교수가 되었다. 그는 미국 선교사에게 영어를 배우는 등 서양 학문 학습에 매진했다.[1]

오무라 마스지로의 초기 경력
연도사건
1843년(덴포 14년)분고국 히타의 히로세 단소가 설립한 칸기엔에 입문.
1844년(덴포 15년)칸기엔 퇴숙. 나가토국 미타지리의 우메다 학당에 재입숙.
1846년(코카 3년)셋쓰국 오사카의 적숙 입숙.
1849년(가에이 2년)적숙 숙두가 됨.
1850년(가에이 3년)적숙 퇴숙, 고향에서 의업 개업.
1851년(가에이 4년)고토코와 혼인.
1854년(가에이 7년)이요국 우와지마번 초청으로 서양 병학 번역과 난학 강의. 석고 100석, 매달 쌀 6俵 대우.
1856년(안세이 3년)에도에서 사숙 구거당 개설. 우와지마번사로서 막부 번서조소 교수방 보조가 됨.
1857년(안세이 4년)막부 강무소 교수로 이동.
1860년(만엔 원년)조슈번사, 마와이시에 준하는 대우. 연미 25포.
1861년(만엔 2년)데마와리구미 학습당 용걸이 됨.
1861년(분큐 원년)에도 파견.


2. 1. 출생과 성장

조슈번 무라타 다카마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뜻이 깊었고, 22세에 오사카로 가서 난학(네덜란드 학문)을 공부하였다. 이후 나가사키에 가서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 지도하에서 서양의학을 배웠다. 지볼트는 일본에서 최초로 서양의학을 가르친 인물이다.[1] 서양학문을 공부하면서 서양 군사학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1]

주방국기후쿠군주전사(현재 야마구치현야마구치시주전사)에서 촌의(마을 의사) 무라타 코우에키와 아내 우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3]

1842년, 보후에서 지볼트의 제자 우메다 유사이에게 란방의학·란학을 배우고, 이듬해 4월, 우메다의 권유로 분고국히타로 향하여 히로세 탄소의 사숙칸기엔에 들어갔다. 1844년까지 한적·산술·서예 등을 배웠다. 같은 해, 귀향하여 우메다 문하에 복귀한 후, 1846년, 오사카에 나가 오가타 코안의 적숙에서 배웠다. 적숙 재학 중에 나가사키의 오쿠야마 세이슈쿠 밑으로 1년간 유학하고, 그 후 귀환하여 적숙의 숙두까지 올랐다.[3]

1850년, 귀향하여 요츠즈지에서 개업하여 촌의가 되어 '''무라타 료안'''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 이름은 이미 1846년 적숙 입문 당시 명부 「적적재성명록」에 자필로 기입되어 있다.[3] 이듬해, 이웃 마을의 농가 고쥬 반베의 딸 琴子와 결혼했다.[3]

2. 2. 수학과 서양 학문

오가타 고안의 적숙(適塾)에서 난학(네덜란드 학문)을 공부했다.(22세, 오사카)[9] 이후 나가사키에서 필립 프란츠 폰 지볼트에게 서양 의학을 배웠는데, 지볼트는 일본에서 최초로 서양 의학을 가르친 인물이다.[9] 나가사키에서 서양 군사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는 훗날 그의 행보에 큰 영향을 미쳤다.[9]

2. 3. 초기 경력

조슈번 무라타 다카마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오무라는 학문에 뜻이 깊었고, 22세에 오사카로 가서 난학(네덜란드 학문)을 공부했다. 이후 나가사키에 가서 독일 의사 필립 프란츠 폰 지볼트(Philipp Franz von Siebold) 지도하에서 서양의학을 배웠다. 지볼트는 일본에서 최초로 서양의학을 가르친 인물이다. 서양 학문을 공부하면서 서양 군사학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1]

나가사키에서 공부한 후, 26세 나이로 고향으로 돌아와서 진료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1853년부터 우와지마번다이묘 다테 무네나리의 제안으로, 사무라이 계급(오무라의 집안은 원래 지배층인 사무라이 계급이 아니었다)으로 격상되어 그 번에서 서양 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했다.[1]

이 당시 일본에는 서양 세력이 자주 출몰하고, 서구 열강으로부터 쇄국 정책을 버리라는 압력이 증대되고 있었다. 오무라는 다시 나가사키로 가서 서양식 군함 조선술과 항해술을 배웠다. 그는 1856년 다테를 따라 에도로 갔고, 막부의 서양 학문 교육 기관인 강무소(講武所) 교수가 되었다. 이 와중에서도 그는 미국 선교사에게 영어를 배우는 등 서양 학문 학습에 힘썼다.[1]

오무라 마스지로의 초기 경력
연도사건
1843년 (덴포 14년)분고국 히타의 히로세 단소가 설립한 칸기엔에 입문.
1844년 (덴포 15년)칸기엔을 퇴숙. 나가토국 미타지리의 우메다 학당에 재입숙.
1846년 (코카 3년)셋쓰국 오사카의 적숙에 입숙.
1849년 (가에이 2년)적숙의 숙두가 됨.
1850년 (가에이 3년)적숙을 퇴숙. 고향에서 의업을 개업.
1851년 (가에이 4년)고토코와 혼인.
1854년 (가에이 7년)이요국 우와지마 번의 초청으로 서양 병학 번역과 란학을 강의. 석고 100석, 매달 쌀 6俵의 대우를 받음.
1856년 (안세이 3년)에도에서 사숙 구거당을 개설. 우와지마 번사로서 막부의 번서조소 교수방 보조가 됨.
1857년 (안세이 4년)막부의 강무소 교수로 이동.
1860년 (만엔 원년)조슈 번사가 되어, 마와이시에 준하는 대우를 받음. 연미 25포.
1861년 (만엔 2년)데마와리구미 학습당 용걸이 됨.
1861년 (분큐 원년)에도에 파견됨.


3. 조슈번 군사 교관

1861년 조슈번은 오무라를 군사 학교 교관으로 초빙하여 군대 근대화 임무를 맡겼다.[1] 오무라는 기도 다카요시를 통해 존왕양이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조슈로 돌아온 오무라는 서구식 무기 도입뿐만 아니라 신분제를 무시하는 국민개병(국민 모두가 병사가 됨) 개념을 도입하여 사무라이와 평민에게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이는 당시 큰 논란을 일으켰으나, 1866년 제2차 조슈 정벌에서 오무라가 이끄는 군대가 막부군을 격파하면서 그의 군사 이론은 정당성을 입증받았다. 이 병력은 보신 전쟁에서 존왕파의 핵심 전력이 되었고, 메이지 유신을 달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4. 메이지 시대 군대 건설

메이지 유신 이후, 새로 수립된 메이지 정부는 중앙집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했다. 이에 오무라 마스지로는 병부대보(兵部大輔, 육군·해군 부대신)에 임명되어 서유럽식 근대 군대 육성을 추진했다.[2] 오무라는 봉건적 무사 계급이 아닌 징병제에 기반한 국민개병제를 추진했으며, 다이묘의 사병을 철폐하여 중앙 정부에 도전할 수 있는 지방 세력을 뿌리 뽑으려 했다.

오무라는 프랑스식 육군과 영국식 해군을 이상적인 군대 모델로 삼았다.[2] 비록 프랑스가 도쿠가와 막부를 지원했지만, 오무라는 신식 군대를 위해 프랑스 군사 고문들을 다시 초빙했다.

1869년 6월 회의에서 오무라는 "정부가 군사적으로 독립적이고 강력해지려면 번(藩)과 봉건 군대를 폐지하고, 사무라이 계급의 특권을 없애고, 보편적인 징병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

그러나 오무라의 정책은 사무라이 계급의 기득권 폐지를 의미했기에,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인 사무라이 출신들의 반발에 직면했다. 오무라가 주장한 것은 수천 명의 사무라이의 생계를 끝내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그들의 특권적인 지위를 끝내는 것이었다.

5. 암살

1869년 10월, 오무라는 간사이 지역에서 신식 군대 장교 양성 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자신의 고향인 조슈번 출신 전직 사무라이들에게 습격을 당했다.[3] 오무라는 이마, 왼쪽 관자놀이, 팔, 오른쪽 손가락, 오른쪽 팔꿈치, 오른쪽 무릎 관절에 심한 부상을 입었으나,[3] 더러운 물로 가득 찬 욕조에 숨어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3]

오무라는 안토니우스 프란시스쿠스 바우두앵과 오가타 고레요시에게 치료를 받고 오사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3] 상태가 호전되지 않아 10월 27일 왼쪽 허벅지 절단 수술을 받았다.[3] 그러나 수술 허가를 받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 11월 1일 패혈증으로 고열이 발생하여[3] 11월 5일에 사망했다.[3]

범인들은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오무라의 정책에 반대하는 정부 관리들에 의해 형 집행이 미뤄졌다가 1년 뒤에 집행되었다.[3]

6. 유산

오무라 마스지로는 사망 직후 야스쿠니 신사 입구에 동상이 세워졌는데, 이는 일본 최초의 서양식 동상이었다.[6]

야스쿠니 신사에 있는 오무라 마스지로 동상


오무라의 군제 근대화 구상은 야마가타 아리토모, 기도 다카요시, 사이고 주도, 야마다 아키요시 등에 의해 실현되었다.[6] 야마다는 오무라의 구상에 따라 사관학교를 설치했고, 야마가타와 사이고는 징병제 도입을 주도했다.[6]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유럽에서 군사 과학과 기술을 연구하고 돌아와 1만 명의 병력을 조직하여 일본 제국 육군의 핵심을 만들었다.[6] 1872년에는 프랑스 군사 고문단이 일본군의 장비와 훈련을 지원했다.[6] 오무라의 정책과 아이디어는 메이지 군대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7. 평가

오무라 마스지로는 근대 일본 군대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그의 군사적 식견과 행정 능력은 높이 평가되었지만, 급진적인 개혁 성향은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13] 동시대 인물들은 그의 강직함, 청렴함, 군사적 재능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독선적인 면모와 정치적 감각 부족을 지적하기도 했다.


  • 기도 다카요시는 "강직하고 친절했다. 전혀 표리가 없었다"고 평가했다.[12]
  • 오쿠마 시게노부는 "용기와 기개가 넘치고, 말과 행동이 날카로우며, 개국과 진보의 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군사에 정통하여 서양식을 도입하여 일본의 군제를 개혁하려고 했으며, 당시의 영웅 호걸로서 거의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평가했다.[13]
  • 구로다 기요타카는 "오무라가 병부의 회계를 처리하는 것은 마치 자신의 회계를 처리하는 것과 같아서, 푼돈 하나라도 낭비하지 않았다"며 그의 청렴함을 칭찬했다.[14]
  • 이토 히로부미는 "군사 문제에 있어서는 대단히 능력이 있었다. 정치 쪽에는 별로 공적이 없다고 생각한다"며 군사적 능력은 인정하면서도 정치적 능력은 부족했다고 평가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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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라시마 슈스케는 오무라가 삼현금을 싫어했다고 전했다.[17]
  • 후쿠하 미세이는 "늙은 사이고 다카모리의 기개와 오무라의 관리 능력을 겸비했다면 천고의 완인이었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14]
  • 스즈키 다이(미토번사)는 "나는 많은 서양 학자를 만났지만, 단지 허황된 사람들만 많아서, 한눈에 싫다는 감정을 느꼈다. 지금 쇼로쿠 선생님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서양 학자에게도 인물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선생님은 분명히 크게 해낼 사람이다"라고 평가했다.[19]
  • 소가 유준은 오무라에 대해 "매우 기력이 왕성한 분으로, 호걸이었다. 강한 기억력과 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매우 검소했다"고 평가했다.[20]

8. 인물

오무라 마스지로는 오가타 고안의 적숙에서 공부하며 밤을 새워 책을 읽고 해부학 연구에 몰두하는 등 학구열이 높았다. 숙장으로서도 꼼꼼하게 강의를 준비했으며, 품행이 방정한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3]

뛰어난 어학 실력과 의학, 화학 지식을 갖췄지만, 의사로서는 무뚝뚝하고 치료에 서툴러 평판이 좋지 않았다. 에도 '구거당' 시절 숙생들은 그의 학식을 존경하면서도 "선생님은 돌팔이 의사"라고 뒷담화를 하기도 했다.[3]

메이지 유신 이후, 오무라는 "앞으로 주의해야 할 것은 서쪽이다"라고 발언하여 세이난 전쟁을 예견했다. 사이고 다카모리아시카가 다카우지에 비유하며 낮게 평가했다.[3] 쇼기타이 토벌 당시 사쓰마 병사 배치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는 설이 있지만, 도카이도 총독부 참모 기나시 세이이치로는 그러한 이야기는 없었다고 증언한다.[3]

사이온지 긴모치는 오무라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귀족 출신 옛 친구를 만나느라 방문하지 못했고, 그날 오무라가 습격당하면서 사이온지는 화를 면했다.[3] 오무라는 일본 최초의 군가·행진곡인 도코톤야레부시(미야상 미야상)의 작곡자로도 알려져 있다.[3] 1869년 6월, 보신 전쟁 전사자를 위로하기 위해 도쿄 초혼사(현재의 야스쿠니 신사) 건립을 건의했다.[3]

보신 전쟁 당시 병사들의 식사를 걱정하며 식량을 점검하는 세심함을 보였고, 항복한 오토리 게이스케의 재능을 아껴 감형을 위해 힘썼다.[3] 검소한 생활을 했고, 게이샤 놀이나 요정 출입도 하지 않았으며, 술을 즐기는 것 외에는 별다른 취미가 없었다. 두부골동품을 좋아했으며, 특히 족자를 좋아했지만 1냥 이상의 물건은 사지 않았다.[3][17]

피습 직전, 오무라는 하라다 게이사쿠와 도톤보리에서 연극 구경을 하고 요정에서 식사를 했다. 하라다는 이를 오무라가 죽음을 예감한 작별이었다고 회고했다.[3] 아내의 이름은 고토코(琴子)이다.

구로다 기요타카는 오무라가 푼돈 하나라도 낭비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14] 이토 히로부미는 군사 문제에는 능력이 있었지만 정치에는 공적이 없다고 평가했다.[15]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오무라를 전략가로서 훌륭한 사람이라고 평가하며, 자신은 그런 기획력이 없다고 말했다. 또한, 오무라의 병법가로서의 능력과 대군을 지휘하는 기량은 자신에게 형제와 같았다고 평가했다.[16]

후나코시 마모루는 오무라가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모든 것을 서양식으로 하려 했으면서도 양복을 입은 적이 없다고 평가했다. 또한, 그의 즐거움은 골동품이었으며, 특히 그림을 좋아했지만, 일정 금액 이상은 내지 않았다고 한다.[17]

나가오카 모리요시는 오무라가 담백하고 무아의 사람이었으며, 군사적인 일에 대해서는 식견이 뛰어나 북월 전투나 우에노의 쇼기대 전투 등에서 그의 예측이 정확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오무라는 순수한 사람으로 세상일에 무관심했지만, 군사 문제에는 열심히 주의를 기울였다고 한다.[18]

하라다 이치도는 오무라의 이해력과 독서, 번역 능력이 뛰어나 강무소에서의 병서 번역에 큰 공헌을 했다고 평가했다.[17] 데라시마 슈스케는 오무라가 삼현금을 싫어했다고 회고했다.[17] 후쿠바 비세이는 사이고의 기개와 오무라의 관리 능력을 겸비했다면 천고의 완인이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14] 스즈키 다이(미토 번사)는 오무라를 서양 학자 중에서도 인물이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19] 소가 유준은 오무라가 기력이 왕성하고 호걸이었으며, 강한 기억력과 넓은 지식을 가졌지만 검소했다고 평가했다.[20]

8. 1. 성격 및 일화


  • 오가타 고안의 손자인 오가타 게이지로는 아버지와 할머니 오가타 야에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오무라 마스지로가 적숙 시절 "정성을 다해 배우고, 부지런히 때로는 밤을 새워 책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라고 할 정도로 맹렬히 공부했다고 전한다. 틈만 나면 해부학 책을 읽고, 자주 동물을 해부하는 등 연구에 매우 열심이었다. 숙장으로서도 꼼꼼하게 강의를 준비했으며, 놀이를 하지 않는 품행이 방정한 인물이었다고 한다.[3]
  • 뛰어난 어학 실력과 의학, 화학 등 풍부한 지식을 갖춘 오무라였지만, 의사로서의 자질은 부족했다. 고향에서는 인사를 건네도 "여름에는 더운 것이 당연합니다.", "한중이란 이런 것입니다."라고 답하고, 기분이 좋을 때조차 "그렇습니다."라고 답할 정도로 무뚝뚝한 성격이었다. 게다가 치료도 서툴러 평판이 좋지 않았다. 에도의 '구거당' 시절 숙생들도 학식은 존경했지만, "선생님은 돌팔이 의사"라고 뒷담화를 하기도 했다. 숙생 중 한 명인 노베지 나오요시가 눈병을 앓았을 때도 "절대 약을 바르지 마라. 약은 바르는 것이 아니다. 짓무르면 물로 씻고 밤에 책을 보지 마라"라고 진단하여 숙생들에게 "선생님은 의술에 대해 모르신다"라며 비웃음을 샀다.[3]
  • 메이지 유신 이후, 오무라는 "앞으로 주의해야 할 것은 서쪽이다"라고 발언하여 서쪽(규슈)에서의 반란(세이난 전쟁)을 예견했다고 전해진다. 사이고 다카모리를 전혀 높게 평가하지 않았으며, 사이고를 겐무 신정 이후 반기를 든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비유했다고 한다.[3]
  • 가이에다 노부요시 등이 오무라에게 반감을 가진 원인 중 하나는, 쇼기타이 토벌 당시 격전이 예상되는 구로몬(黒門) 쪽에 사쓰마 병사를 배치한 오무라의 작전에 대해, 사이고와 오무라 사이에 "사쓰마 병사를 죽게 하려는 조정의 뜻인가", "오무라는 조용히 부채를 폈다 접으며 하늘을 우러러보며 말이 없었다. 이윽고 말하기를, 그러하다. 사이고는 더 이상 말없이 물러갔다"라는 기록과 같은 대화가 오갔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다만 사이고는 가이에다와 오무라의 논쟁에서 전적으로 오무라를 지지하는 등 그의 군사 지식을 높게 평가했다. 또한 도카이도 총독부 참모 기나시 세이이치로는 구로몬 쪽 담당은 희망자가 쇄도했으며, 양자 간에 그러한 이야기는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3]
  • 젊은 시절 사이온지 긴모치는 오무라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교토에 있던 사이온지가 오무라를 방문하려 했을 때, 귀족 출신 옛 친구를 만나는 바람에 방문하지 못했다. 그때 오무라가 자객에게 습격당하여 사이온지는 화를 면했다고 한다. 역시 교토 신정부에 참여하고 있던 귀인 중 한 명(구마모토 번주의 동생)이었던 나가오카 모리요시도 매일 밤 오무라를 찾아가 술잔을 기울이는 사이가 되었고, 훗날 회고의 글을 남겼다.[3]
  • 일본 최초의 군가·행진곡으로 알려진 시나가와 야지로 작사의 '도코톤야레부시(미야상 미야상)'의 작곡자로도 알려져 있다. 이 곡은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이 동정대총독에 취임하여 교토를 떠난 게이오 4년(1868) 2월경부터 일제히 불리기 시작했다고 전해지며, 가사가 적힌 종이가 배포되어 동정군 병사들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에게도 널리 퍼졌다.[3]
  • 메이지 2년(1869) 6월, 보신 전쟁에서 조정 측 전사자를 위로하기 위해 도쿄 초혼사(현재의 야스쿠니 신사) 건립을 건의했다.[3]
  • 보신 전쟁 당시 오슈와 호쿠리쿠로 원정 가는 병사들의 식사를 걱정하며, "병사들의 식사는 정말로 보잘것없다. 병사들이 의지하는 것은 쌀뿐이다"라며 끊임없이 식량을 점검하는 등 세심한 면모를 보였다.[3]
  • 보신 전쟁에서 항복한 자들 중에 적숙의 후배인 오토리 게이스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오무라는 "오토리도 역시 구해야 한다. 어떻게든 관군에 저항하여 가장 강하지만, 훗날을 위해 힘쓴다면, 오토리는 가장 적 중에서 쓸모가 있다. 어떻게든 전쟁은 저 사람이 가장 낫다."라고 말하며, 그의 재능을 아껴 감형을 위해 힘썼다고 한다.[3]
  • 검소한 생활을 했고, 게이샤 놀이나 요정 출입도 하지 않았으며, 술을 즐기는 것 외에는 별다른 취미가 없었다. 에도의 번서조소(蕃書調所) 시절 오무라의 용돈 기입장에는, 매우 좋아하는 두부를 비롯하여 문어, 도미, 가다랑어, 대합, 생선회 등 상당한 음식을 구입한 기록이 있어, 수입이 넉넉했던 적도 있어 한때는 사치스러운 식사를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만년의 오무라는 검소하게 생활했다. 병부대보의 높은 지위에 오른 후에도 "요컨대 선생님은 매우 기력이 왕성한 분으로, 호걸이었습니다. 강한 기억력과 넓은 지식을 지니고 있었지만 몸가짐은 매우 검소했습니다"라고 소가 유준이 증언할 정도였다.[3]
  • 학구적인 성격으로 취미다운 취미도 없었지만, 두부를 먹는 것과 골동품을 사는 것만은 즐거움으로 삼았다. 특히 족자를 좋아했지만, 1냥 이상의 물건은 절대 사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부하이자 군무관 권판사였던 후나코시 에이는 "'나도 족자 같은 것을 즐기지만, 그 대신에 금액을 정해 둔다. 그 정해 둔 금액 이상은 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라고 증언하고 있다.[17]
  • 피습 직전, 오무라는 군사 시설 검사를 위해 오사카를 방문하여 번서조소 시절 동료였던 하라다 게이사쿠를 불러 도톤보리에서 연극 구경을 한 후, 요정에서 함께 식사를 했다. 훗날 하라다는 평소 오무라에게는 드문 환대에 "선생님 자신은 이미 이승과의 작별이라고 생각하고, 이미 주변에 닥쳐오는 피할 수 없는 재난을 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3]
  • 아내의 이름은 고토코(琴子)이다. 구로다 기요타카는 "오무라가 병부성의 회계를 처리하는 것은 마치 자신의 회계를 처리하는 것과 같아서, 푼돈 하나라도 낭비하지 않았다."라고 평가했다.[14] 이토 히로부미는 "군사 문제에 있어서는 대단히 능력이 있었다. 정치 쪽에는 별로 공적이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평가했다.[15]
  • 이타가키 다이스케 (아이즈 전쟁 방침에서 대립했지만, 실제로 지휘한 것은 이타가키였다)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오무라는 가지에서 뿌리를 고립시킨다고 말했다. 내가 반대로 했다고 하면 내가 훌륭한 것처럼 들리지만, 오무라라는 사람은 전략가로서 훌륭한 사람이고 나는 그런 기획력이 없다. 오무라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싸운다면 이길지 모르겠지만, 삼군을 지휘하여 계산적으로 전쟁을 치르는 것은 오무라다. 오무라라는 사람은, 병법가로서 진짜다."
"오무라의 병법가로서의 능력, 대군을 지휘하는 기량이 있었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실로 형제와 같았다."[16]


  • 후나코시 마모루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어서, 어딘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모든 것을 서양식으로 하려고 했으면서, 양복을 입은 적이 없었다."[17]
"그의 즐거움은 골동품이었다. 그림이 가장 즐거움이었다. 외로워지면 산책 겸 구입하러 나가는데, 너무 위험해서 챙이 깊은 모자를 씌우고 사람을 붙여서 보냈다. 그런데 아무리 명품이라도, 일량(일정량의 돈) 이상은 내지 않는다고 한다. 일량으로 확실하게 정해 두었다. ‘사람은 어떤 즐거움이 있어야 하니까 즐거움을 가지는 것은 좋지만, 우스꽝스러운 즐거움은 하지 마라’라고 가끔 말했는데 ‘나도 그림 따위를 즐기지만, 그 대신에 금액을 정해 둔다. 그 정해 둔 금액 이상은 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꽤 좋은 것도 있었던 것 같다."[17]
"선생님은 항상 돼지고기 냄비였고, 사람에게 먹으라고 말하지 않고 혼자 돼지고기를 먹으면서 술을 마셨다. 술은 취미였지만, 아주 조금만 마셨다. 선생님 앞에서 술을 마셔도 전혀 맛이 없었다."[17]


  • 나가오카 모리요시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선생님은 본래 담백하고 무아의 사람이었고, 제가 문병을 가도 곧장 장롱에서 ‘샴페인’을 꺼내 오늘 한잔 하시지 않겠냐는 식이어서 매우 멋진 분이었다. 그런데 군사적인 일에 대해서는 실로…그 결과 곧 오늘날 육군의 제도가 되었을 것입니다만, 군사에 대해서는 대단히 식견이 뛰어나서, 군략상 그 밖에 군제상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북월 전투에 얼마나 병력을 투입할 것인가, 탄환은 얼마나 필요한가, 탄약은 얼마나 필요한가, 이 전투는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미리 정확하게 결정할 수 있었다. 나는 배석해서 정말 놀랐다. 과연 언제나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되었다. 그 후 우에노의 쇼기대 전투도 마찬가지로, 모두 원강무소에서 선생님이 연구하셔서 도쿄 근교의 지리는 결국 군사적인 고려가 있기 때문에 자세히 알고 계셨다. 도쿄의 어쩌면 뒷골목까지도 알고 계셨다. 그래서 병력 배치 등도 잘 할 수 있었다. 전쟁이 시작된 후 선생님은 어떠신가 하고 사람들이 문병을 가 보니, 선생님은 오히려 낮잠을 자고 있었다는 식이었다. 그 당시 서양식 전쟁, 오늘날의 군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던 사람은 드물다고 생각한다. 그 성격은 참으로 순수한 사람으로 세상일에 전혀 무관심했다. 그러나 군사 문제가 되면 열심히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고 매우 말이 없었다. 선생님의 군사 및 병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선생님과 같은 분은, 당시는 물론 오늘날에도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18]

  • 하라다 이치도는 "선생님은 타고난 이해력이 뛰어난 분으로 독서와 번역 모두 대단히 뛰어나셨다. 당시 강무소에서의 병서 번역은 선생님께서 참여하신 후로 급격히 면모를 일신한 것이다. 새로 들어온 어려운 외국 문헌도 선생님 앞에 가면 언제나 쉽게 해석하셨고, 대단히 감탄할 만한 학식을 가지고 계셨다."라고 평가했다.[17]
  • 데라시마 슈스케는 "삼현금을 싫어해서, 요리집에서도 오무라 번주라고 하면 기생이 와도 삼현금을 가지고 오지 않는다는 식이었다."라고 회고했다.[17]
  • 후쿠바 비세이는 "늙은 사이고의 기개와 오무라의 관리 능력을 겸비했다면 천고의 완인이었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14]
  • 스즈키 다이(미토 번사)는 "나는 많은 서양 학자를 만났지만, 단지 허황된 사람들만 많아서, 한눈에 싫다는 감정을 느꼈다. 지금 쇼로쿠 선생님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서양 학자에게도 인물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선생님은 분명히 크게 해낼 사람이다."라고 평가했다.[19]
  • 소가 유준은 "매우 기력이 왕성한 분으로, 호걸이었다. 강한 기억력과 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매우 검소했다."라고 평가했다.[20]

8. 2. 兵学者로서의 오무라 마스지로

오무라 마스지로는 서양인에게 직접 병법을 배우지 않고, 주로 네덜란드어로 번역된 전술서와 고노 나가히데 등 선배들의 번역서를 거의 독학으로 습득하는 천재적인 기량을 가지고 있었다.[1]

마이즈루번의 이토 준키치(후에 해군중장)가 다이바(포대) 건설의 명을 받고 마스지로에게 상담했을 때, 마스지로는 소규모 번에서는 다이바를 만들어도 소용없다고 말했다. 또한 에가와 히데타카가 만든 에도만의 다이바의 결점을 지적하며 "전술(戰術, tactics)만 있고 전략(戰略, strategy)을 모르는 사람이 만든 것"이라고 혹평했다.[1]

장주 전쟁(조슈 정벌)에서 마스지로는 "우리 군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겠다"며 스스로 공격하지 않고, 막부군에 대한 주민들의 반발로 인해 "내부가 와해되는 것은 필연적"이라며 적의 자멸을 기다리는 전략을 택했다. 전선에서도 검소한 복장에 돌판을 품고 항상 선두에 섰다. 부하가 위험하다고 간청해도 "총알이 함부로 맞는 것은 아니다. 죽고 사는 것은 그때의 운명이다"라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는 항상 종에게 긴 사다리를 들게 하고 나무 위나 지붕에 올라가 지형과 적의 상태를 관찰했다.[1]

마스지로는 병사들의 심리도 잘 파악하여 상황에 맞게 대처했다. 공격 시 강을 앞에 두고 주저하는 병사들에게 큰 소리로 질책했고, 병사들은 "우리를 빠뜨리려는 건가"라며 화를 내며 강을 건넜다. 그러나 돌아올 때는 임시 선박 다리가 놓여 있었고, 모두 마스지로의 판단에 감탄했다.[1]

쇼기대(彰義隊) 토벌 당시, 마스지로는 야간 기습 의견에 대해 "그들은 정권을 반납한 공의(公儀)에 어긋나는 반역자이므로 칙명에 따라 정정당당하게 토벌해야 한다. 야습은 옳지 않다"라며 백주 공격을 주장했다. 이는 야습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적이 불을 질러 시내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을 우려한 전략이었다.[1] 그는 작전 계획에서도 "우에노 산을 전투 장소로 하여 적을 막으면 시민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고, 실패하더라도 간다 강을 경계로 하여 일반 시민의 피해를 최소화하려 했다.[1]

쇼기대 섬멸의 성공 요인 중 하나는 사가 번에서 빌린 최신식 암스트롱포였다. 마스지로는 포격 기회를 충분히 계산하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포를 적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엄명했다. 전투가 오후를 넘어서도 끝나지 않자 지휘관들은 야전을 걱정했지만, 이때 암스트롱포의 우에노 산 포격이 시작되었다. 마스지로는 "저녁에는 반드시 전투가 끝날 것"이라며 태연하게 말했고, 곧 우에노 산에 불길이 오르는 것을 보고 승리를 알렸다. 전령이 도착하자 모두 마스지로의 침착함에 감탄했다.[1]

9. 관련 작품


  • 오무라 마스지로가 등장하는 대중문화 작품 목록 참조
  • 화신 (전3권) (시바 료타로, 신초문고)
  • 귀모의 사람 (단편 작품) (시바 료타로, 「인살이 이조」 외 수록, 신초문고)
  • 대촌익지로 - 배우: 이치카와 우타에몬 (1942년, 신흥키네마)
  • 꽃의 신[21] - 배우: 나카무라 우메노스케 (1977년, NHK 대하드라마)
  • 기병대 - 배우: 가타오카 쓰루타로 (1989년, 일본텔레비전 연말시대극스페셜)
  • 날갯짓처럼 - 배우: 히라타 밋스 (1990년, NHK 대하드라마)

참조

[1] 서적 Emperor Of Japan: Meiji And His World, 1852–1912
[2] 논문 The "Modern" Army of Early Meiji Japan
[3] 서적 Japan's Imperial Army: Its Rise and Fall:1853-1945
[4] 웹사이트 大村益次郎墓 https://bunka.nii.ac[...] Agency for Cultural Affairs 2021-08-20
[5] 서적 (国指定史跡事典) National Historic Site Encyclopedia 学生社 2012
[6] 서적 Soldier and Peasant in Japan
[7] 웹사이트 大村益次郎|近代日本人の肖像 https://www.ndl.go.j[...]
[8] Kotobank 大村益次郎
[9] 서적 大村益次郎伝
[10] 문서 故兵部大輔大村永敏ヲ弔シ贈位賜幣ヲ宣ス http://jpimg.digital[...] 太政類典
[11] 블로그 大村益次郎 夫人は高実琴 https://ameblo.jp/ta[...]
[12] 서적 大村益次郎小伝
[13] 서적 大隈伯昔日譚
[14] 서적 大村兵部大輔 1876-07
[15] 서적 伊藤侯 井上伯 山県侯元勲談
[16] 서적 史談会速記録99 1899-02
[17] 서적 兵部大輔大村益次郎先生
[18] 서적 大村先生逸事談話
[19] 서적 偉人豪傑言行録 修養教訓
[20] 서적 大村先生逸事談話
[21] 웹사이트 番組エピソード 大河ドラマ『花神』 NHKアーカイブス https://www2.nhk.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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