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와지마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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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와지마번은 헤이안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존재했던 일본의 번으로, 현재의 에히메현 우와지마시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다스렸다. 헤이안 시대에는 해적의 근거지였으며, 전국 시대에는 사이온지 씨가 지배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 이후 도도 다카토라를 거쳐 다테 가문이 번주가 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도미타 가문이 잠시 통치하기도 했으며, 다테 가문은 센다이번의 다테 마사무네의 서자 다테 히데무네를 초대 번주로 하여 10만 석의 영지를 받았다. 이후 다테 가문은 여러 번주를 거치며 통치했으나, 재정난과 지번인 이요 요시다번과의 분쟁을 겪었다. 막말에는 다테 무네나리가 서구화를 추진하고 막부 정치에 관여했으나, 보신 전쟁에서는 중립을 지켰다. 메이지 시대에는 폐번치현으로 우와지마현이 되었으며, 다테 무네나리는 후작의 지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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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와지마번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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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 이름 | 우와지마번 |
| 로마자 표기 | Uwajima-han |
| 지방 | 이요국 |
| 현재 위치 | 에히메현 |
| 통치 | |
| 정치 체제 | 번 |
| 역사 | |
| 성립 | 1608년 |
| 폐지 | 판적봉환 |
| 시대 | 에도 시대 |
| 정보 | |
| 석고 | 10만석 |
| 문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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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헤이안 시대 우와지마(특히 우와지마 만의 히부리 섬)는 세토 내해의 해적 소굴이었으며,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의 거점이 되었다.[1] 무로마치 시대에는 아시카가 막부가 사이온지 씨의 분가를 이 지역의 지사로 임명했지만, 오우치 요시타카, 모리 모토나리, 오토모 소린, 토사 이치조 씨, 초소카베 씨 등 주변 세력의 침략을 끊임없이 받았다. 사이온지 씨는 이들과 동맹과 적대를 반복하며 존속했지만 결국 초소카베 모토치카에게 정복당했고, 모토치카는 다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대에 의해 전복되었다.
이요 국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 주어졌고, 다카카게는 우와지마 주변 지역을 양자이자 이복 형제인 고바야카와 히데카네에게 할당했다. 이후 다카카게는 규슈로 전출되었고, 히데요시의 장군 도다 가쓰타카로 교체되었다. 도다는 고바야카와와 달리 가혹하게 통치하며 사이온지 씨의 후손을 살해하고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강도, 강간, 살해를 아무렇지 않게 자행했다. 1592년 조선 침략에 병력을 파견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도다는 선박 건조를 위해 영내 신사와 사찰의 큰 나무를 베어 버렸다. 그는 조선에서의 작전 중 미쳐서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히데요시는 도도 다카토라를 이 지역에 임명했고, 다카토라는 6년 동안 이타지마 성(후의 우와지마 성)을 건설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등에서 공을 세운 다카토라는 이세 국 쓰 번으로 승진했다.[1]
1608년, 도미타 노부타카가 도쿠가와 히데타다로부터 우와군 10만 1,900석을 받아 우와지마 번을 건립했다. 그러나 노부타카는 1613년 사카자키 나오모리와의 갈등으로 영지를 몰수당하고 이와키다이라 번으로 유배되었다.[1]
1614년, 다테 마사무네의 서자 다테 히데무네가 10만 석으로 우와지마 번에 봉해졌다. 히데무네는 오사카 전투에서 도쿠가와 가문에 충성했다.[1] 이 번은 센다이 번의 분가는 아니었지만, 완전히 독립적인 번으로 간주되었다.[1] 1617년경, 이타지마 마루쿠시 성(板島丸串城)은 우와지마 성으로, 이타지마(板島)는 우와지마(宇和島)로 개명되었다. 히데무네는 아버지 마사무네에게서 창업 자금을 빌렸고, 번 재정은 어려웠다. 1620년 오사카 성 석축 공사를 담당했고, 1637년 중풍으로 쓰러져 차남 다테 무네토키가 번정을 담당했다.
1657년, 히데무네의 은퇴 후, 아들 다테 무네토시가 7만 석을 상속받고, 동생 다테 무네즈미는 3만 석으로 이요-요시다 번을 설립했다.[1] 무네토시는 가뭄, 재정난, 홍수, 화재, 경계 분쟁에 시달렸다.[1] 1688년 5개년 계획을 세웠고, 1693년 사위 다테 무네요시에게 번을 물려주었다.[1] 1696년, 신전 개발로 10만 석으로 복원되었으나, 유시마 세이도 재건으로 지출이 늘었다.[1]
1711년, 무네토시의 아들 다테 무라토시가 4대 다이묘가 되었으나, 1735년 31세로 사망했다. 5대 다이묘 다테 무네토키는 번교 메이린칸을 개설하고 왁스 독점권을 확립하는 등 개혁을 추진했지만, 덴메이 대기근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다테 무네나가는 상업 작물과 양잠 재배를 장려했지만, 잦은 재해와 1812년 '하가모리 사건'으로 재정이 어려웠다. 1817년 무네나가는 은퇴하고, 1824년 다테 무네타다가 7대 다이묘가 되었다. 1844년 다테 무네나리가 8대 다이묘가 되어 서구화를 추진하고 바쿠마츠 시대 4대 현명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불렸다.[1] 안세이 대옥으로 은퇴했으나, 사쿠라다몬 밖의 변 이후 복귀하여 고메이 천황을 알현하고 보신 전쟁에서 중립을 유지했다.[1]
메이지 정부에서 무네나리는 외무대신을 지냈고, 1871년 청일 수호 통상 조약 체결 전권 대사가 되었다.[1] 폐번치현으로 우와지마 번은 에히메현의 일부가 되었다.[1]
2. 1. 에도 시대 이전
헤이안 시대 우와지마(특히 우와지마 만의 히부리 섬)는 세토 내해의 해적 소굴이었으며,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의 거점이 되었다.[1]무로마치 시대에는 아시카가 막부가 사이온지 씨의 분가를 이 지역의 지사로 임명했지만, 오우치 요시타카, 모리 모토나리, 오토모 소린, 토사 이치조 씨, 초소카베 씨 등 주변 세력의 침략을 끊임없이 받았다. 사이온지 씨는 이들과 동맹과 적대를 반복하며 존속했지만 결국 초소카베 모토치카에게 정복당했고, 모토치카는 다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대에 의해 전복되었다. 이요 국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 주어졌고, 다카카게는 우와지마 주변 지역을 양자이자 이복 형제인 고바야카와 히데카네에게 할당했다. 이후 다카카게는 규슈로 전출되었고, 히데요시의 장군 도다 가쓰타카로 교체되었다.
도다는 고바야카와와 달리 가혹하게 통치하며 사이온지 씨의 후손을 살해하고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강도, 강간, 살해를 아무렇지 않게 자행했다. 1592년 조선 침략에 병력을 파견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도다는 선박 건조를 위해 영내 신사와 사찰의 큰 나무를 베어 버렸다. 그는 조선에서의 작전 중 미쳐서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히데요시는 도도 다카토라를 이 지역에 임명했고, 다카토라는 6년 동안 이타지마 성(후의 우와지마 성)을 건설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등에서 공을 세운 다카토라는 이세 국 쓰 번으로 승진했다.[1]
2. 1. 1. 헤이안 시대
헤이안 시대 우와지마(특히 우와지마 만의 히부리 섬)는 세토 내해의 해적 소굴이었으며,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의 거점이 되었다.[1] --우와지마만 서쪽 약 28km 해상에 있는 히부리 섬은 헤이안 시대 해적 소굴이었으며,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 당시 스미토모 휘하 해적들의 근거지였다. 스미토모는 원래 교토에서 권세를 떨치던 후지와라 북가 출신으로, 후지와라노 후유쓰구의 증손자 요시노리의 아들로 여겨진다(다른 설에서는 이요의 재지 호족 다카하시 씨 출신이라고도 함). 중앙 권력에서 밀려난 스미토모는 이요 고쿠시로 부임하여 처음에는 해적 토벌로 공을 세워 수도로 돌아가려 했으나, 해적 행위가 재연되자 기노 스미토와 함께 해적 진무를 위해 이요로 파견되었다.
939년 가을, 스미토모는 스스로 해적 활동을 시작하여 비젠비젠노스케후지와라노 시코의 코를 베고 아내를 빼앗는 등 횡포를 부렸다. 그는 교토에서 출세하지 못한 중급 관인들을 끌어들여 서국에 세력을 형성했다.
당시 간토에서는 다이라노 마사카도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마사카도와 스미토모는 연합하여 교토를 제압하고 간파쿠가 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오오카가미』). 조정은 스미토모를 회유하려 종5위하에 서임했지만, 그는 빈추와 아와지에서 해적질을 계속했다. 다이라노 사다모리와 후지와라노 히데사토가 마사카도를 토벌하면서 조정은 서국에 군대를 보낼 수 있게 되었고, 스미토모는 궁지에 몰렸다. 941년 5월, 다자이후를 공격하여 점령했으나 오노노 요시미치가 이끄는 조정군에 격파되어 이요로 도망쳤다. 6월, 다치바나노 토모야스에게 붙잡혀 아들 시게타마루와 함께 처형당하면서 스미토모의 난은 막을 내렸다.
지쇼·주에이의 난(겐페이 합전) 때는 헤이시 토벌에 공을 세운 미나모토노 요시쓰네가 조정으로부터 이요노카미에 임명되었다.
2. 1. 2. 무로마치 시대
헤이안 시대 우와지마 만의 히부리 섬은 세토 내해 해적의 소굴이었고, 후지와라노 스미토모 반란의 거점이 되었다.[1] -- 스미토모는 교토에서 권세를 떨치던 후지와라 북가 출신으로, 해적 토벌에 공을 세웠으나 939년 스스로 해적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비젠 국에서 횡포를 부리고 서국에 세력을 형성했다. 다이라노 마사카도와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941년 조정군에 패하고 처형되었다.[1]무로마치 시대 아시카가 막부는 사이온지 씨의 분가를 이 지역 지사로 임명했지만, 오우치 요시타카, 모리 모토나리, 오토모 소린, 토사 이치조 씨, 초소카베 씨 등 주변 세력의 침략을 받았다. 사이온지 씨는 이들과 동맹과 적대를 반복하며 존속했다.[1] 초소카베 모토치카의 시코쿠 제패 때 사이온지 킨히로는 저항했지만 패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로 모토치카가 항복하면서 이요 국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 주어졌다. 다카카게는 양자 고바야카와 히데카네에게 남이요 지배를 맡겼다.[1]
규슈 정벌 이후 다카카게는 지쿠젠, 지쿠고로 이봉되었고, 도다 가쓰타카가 이요 오즈 10만 석(실제 7만 석) 영주가 되었다. 도다는 가혹한 통치를 하여 사이온지 킨히로를 암살하고, 잇키를 진압하며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1] 조선 침략에 참전한 도다는 거제도에서 병사하고 후계가 없어 단절되었다.[1] -- 이후 도도 다카토라가 우와 군 7만 석 영주가 되어 6년간 우와지마 성을 축성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선 다카토라는 이마바리 번 20만 석으로 가증 이봉되었다.[1]
2. 1. 3.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헤이안 시대 우와지마만 서쪽 약 28km 해상에 있는 히부리 섬은 해적의 소굴이었으며,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 때는 스미토모 휘하 해적들의 근거지가 되었다.[1] 교토에서 권세를 떨치던 후지와라 북가 출신인 스미토모는 후지와라노 후유쓰구의 증손자 요시노리의 아들이었으나, 중앙 권력에서 밀려나 이요의 고쿠시로 부임했다.[1] 처음에는 해적 토벌에 공을 세워 수도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해적 행위가 다시 시작되자 기노 스미토와 함께 해적 진압을 위해 이요로 파견되었다.[1] 그러나 939년 가을, 스미토모는 스스로 해적 활동을 시작하여, 비젠 비젠노스케후지와라노 시코의 코를 베고 아내를 빼앗고 자식을 죽이는 등 횡포를 부렸다.[1]스미토모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중급 관인들을 끌어들여 서국에 세력을 형성했다.[1] 당시 간토에서 반란을 일으킨 다이라노 마사카도와 공동 모의를 했다는 설도 있지만, 조정은 스미토모를 회유하려 종5위하에 서임하기도 했다.[1] 그러나 스미토모는 빈고와 아와지에서 해적 행위를 계속했고, 다이라노 사다모리와 후지와라노 히데사토가 마사카도를 토벌하면서 조정은 서국에 군대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1] 941년 5월, 스미토모는 다자이후를 공격해 점령했지만, 오노노 요시미치가 이끄는 조정군에 격파되어 이요로 도망쳤고, 6월에 다치바나노 토모야스에게 붙잡혀 아들과 함께 참수되었다.[1]
지쇼·주에이의 난(겐페이 합전) 때는 미나모토노 요시쓰네가 이세 헤이시 추토에 활약한 공으로 조정으로부터 이요노카미에 임명되었다.[1]
무로마치 시대에는 무로마치 막부가 킨쓰네를 우와 군의 지행국 주로 임명했다.[1] 전국 시대에 오오우치 요시타카, 모리 모토나리, 오토모 소린, 도사 이치조 씨, 초소카베 씨 등 주변 다이묘들이 우와지마 지역을 침략했고, 사이온지 씨는 이들과 적대와 동맹을 반복하며 존속했다.[1] 초소카베 모토치카의 시코쿠 제패 때 사이온지 킨히로는 우와지마에서 저항했지만 패배하여 항복했다.[1]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로 모토치카는 항복하고 도사 일국(一國)을 안도받았고, 이요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영토가 되었다.[1] 남이요 지배는 다카카게의 양자이자 이복 동생인 히데카네에게 맡겨졌고, 가신 모치다 우쿄가 실제 지배를 담당했다.[1] 다카카게는 규슈 정벌에서 전공을 세워 지쿠젠・지쿠고로 이봉되었고, 도다 가쓰타카가 이요 오즈 10만 석(실제로는 7만 석)의 영주가 되었다.[1]
도다는 다카카게와 달리 가혹한 통치를 하여, 전 영주 사이온지 킨히로와 가신들을 모두 추방하고 킨히로를 암살했다.[1] 도다는 살인을 서슴지 않는 광인으로 여겨졌고, 통치 기간 동안 잇키가 자주 일어났지만, 이를 진압하면 대량 학살을 하거나, 이타지마(우와지마) 성하에서 살인·강탈·강간을 했다고 한다.[1] 다만, 히부리 섬의 토호에게 연공을 면제하고, 잇키 진압 후 옛 성주에게 회유책을 쓰는 등 민정 안정과 殖産興業에 진력했다는 이설도 있다.[1]
도다는 조선 출병 때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부장으로 출병했고, 우와지마 지방의 사찰의 나무를 벌채하여 선재로 사용했다.[1] 분로쿠의 역에서 강화 교섭을 맡았고, 귀국 중 거제도에서 발병하여 1595년 10월에 사망했고, 후사가 없어 도다가는 단절되었다.[1]
도다가가 단절된 후, 도도 다카토라가 우와 군 7만 석의 영주로 들어왔다.[1] 다카토라는 6년 동안 이타지마(우와지마) 성 축성 공사를 했다.[1]
1600년 9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다카토라는 동군(도쿠가와 측)으로 참전했고, 그 공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이요 이마바리 번 20만 석으로 가증 이봉되었고, 이타지마(우와지마)에는 다카토라의 사촌 도도 요시카쓰가 성대로 배치되었다.[1] 세키가하라 직전, 우와 군 마쓰바(현재의 세이요 시우와 정)의 토호 미세 로쿠베가 모리 데루모토와 통해 마쓰바 소동이라는 반란을 일으켰지만, 다카토라는 진압하여 지배 체제를 굳혔다.[1] 다카토라는 이에야스 밑에서 출세하여 1608년에 이세쓰 번 22만 석의 번주로 가증 이봉되었다.[1]
2. 2. 에도 시대
1608년, 도미타 노부타카가 도쿠가와 히데타다로부터 우와군 10만 1,900석을 받아 우와지마 번을 건립했다. 그러나 노부타카는 1613년 사카자키 나오모리와의 갈등으로 영지를 몰수당하고 이와키다이라 번으로 유배되었다.[1]1614년, 다테 마사무네의 서자 다테 히데무네가 10만 석으로 우와지마 번에 봉해졌다. 히데무네는 오사카 전투에서 도쿠가와 가문에 충성했다.[1] 이 번은 센다이 번의 분가는 아니었지만, 완전히 독립적인 번으로 간주되었다.[1]
1617년경, 이타지마 마루쿠시 성(板島丸串城)은 우와지마성으로, 이타지마(板島)는 우와지마(宇和島)로 개명되었다. 히데무네는 아버지 마사무네에게서 창업 자금을 빌렸고, 번 재정은 어려웠다. 1620년 오사카 성 석축 공사를 담당했고, 1637년 중풍으로 쓰러져 차남 다테 무네토키가 번정을 담당했다.
1657년, 히데무네의 은퇴 후, 아들 다테 무네토시가 7만 석을 상속받고, 동생 다테 무네즈미는 3만 석으로 이요-요시다 번을 설립했다.[1] 무네토시는 가뭄, 재정난, 홍수, 화재, 경계 분쟁에 시달렸다.[1] 1688년 5개년 계획을 세웠고, 1693년 사위 다테 무네요시에게 번을 물려주었다.[1] 1696년, 신전 개발로 10만 석으로 복원되었으나, 유시마 세이도 재건으로 지출이 늘었다.[1]
1711년, 무네토시의 아들 다테 무라토시가 4대 다이묘가 되었으나, 1735년 31세로 사망했다. 5대 다이묘 다테 무네토키는 번교 메이린칸을 개설하고 왁스 독점권을 확립하는 등 개혁을 추진했지만, 덴메이 대기근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다테 무네나가는 상업 작물과 양잠 재배를 장려했지만, 잦은 재해와 1812년 '하가모리 사건'으로 재정이 어려웠다. 1817년 무네나가는 은퇴하고, 1824년 다테 무네타다가 7대 다이묘가 되었다. 1844년 다테 무네나리가 8대 다이묘가 되어 서구화를 추진하고 바쿠마츠 시대 4대 현명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불렸다.[1] 안세이 대옥으로 은퇴했으나, 사쿠라다몬 밖의 변 이후 복귀하여 고메이 천황을 알현하고 보신 전쟁에서 중립을 유지했다.[1]
메이지 정부에서 무네나리는 외무대신을 지냈고, 1871년 청일 수호 통상 조약 체결 전권 대사가 되었다.[1] 폐번치현으로 우와지마 번은 에히메현의 일부가 되었다.[1]
2. 2. 1. 도미타 노부타카 시대
게이초 13년(1608년) 음력 9월 15일, 이세 쓰번 5만 석의 번주였던 도미타 노부타카가 도쿠가와 히데타다로부터 우와군 10만 1,900석을 받아 이타지마마루쿠시 성주로 들어오면서 우와지마 번이 건립되었다. (다만, 도미타 노부타카 시대가 아닌 다테 히데무네의 입부를 번의 시작으로 보는 설도 있다.)도미타 노부타카의 정실은 우키타 타다이에의 딸(나오이에의 조카, 히데이에의 사촌)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모리 히데모토군을 상대로 분전하여 적병 몇 명을 직접 쓰러뜨렸다고 전해지는 여무사로 유명하다. 이 정실의 형 또는 동생으로 전해지는 사카자키 나오모리가 조카인 우키타 사몬과 대립하여 사건을 일으켰는데, 그 발단은 다음과 같다. 나오모리에게 총애하는 미동이 있었는데, 이 미동이 사몬과 밀통했기 때문에 나오모리가 격노하여 가신에게 미동을 베게 했다. 하지만 사몬이 이 가신을 베고 도망쳐 숙모에 해당하는 노부타카 정실에게 의지했고, 당시 쓰번주였던 노부타카에게 보호받았다. 이 소식을 들은 나오모리는 노부타카에게 사몬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지만, 노부타카가 시치미를 떼자 나오모리는 격노하여 무력 충돌 직전까지 이르렀다. 다행히 가신의 간언으로 멈췄지만, 나오모리는 오고쇼 이에야스와 쇼군 히데타다에게 호소하여 사몬의 인도를 요구했다. 사몬은 노부타카의 곁을 떠나 히고 구마모토번주 가토 기요마사, 휴가 노베오카번주 다카하시 모토타네에게 의탁했다. 이때 노부타카 정실은 노베오카에 있는 사몬에게 300석의 쌀을 보냈지만, 사몬의 가신으로 행동을 함께 했던 시노하라 모모가 배신하여, 노부타카 정실이 사몬에게 보낸 서찰을 훔쳐 나오모리에게 귀순을 청했고, 나오모리는 이 서찰을 증거로 다시 이에야스와 히데타다에게 호소했다.
게이초 18년(1613년) 음력 10월 8일, 이에야스와 히데타다가 함께 있는 앞에서 나오모리와 노부타카·모토타네는 대결했고, 나오모리가 승소했다. 사몬 은닉이 승소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노부타카·모토타네는 개역되어, 노부타카는 오슈 이와키다이라번주 도리이 타다마사에게 맡겨져, 이요로 귀국하지 못하고 배소로 향했다. 소동의 원인이 된 사몬은 옥사했는지 참살되었는지 전해진다.
도미타 가의 개역에 관해서는 오쿠보 나가야스 사건에 의한 연좌, 우와지마의 향토사료에서는 도미타가의 시오나리 파기 공사로 인한 부정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지만, 전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후자는 상당히 의심스러운 설로 여겨지고 있다.
도미타 가 개역으로 우와지마는 막부 직할령이 되었고, 막부 대관으로 도도 요시카쓰가 들어왔다. 도미타 가신들은 우와지마를 퇴거할 때 연공 미징수로 곤란을 겪었지만, 창미 3000석을 요시카쓰가 빌려주어 모두 퇴거했다. 노부타카는 간에이 10년(1633년)에 오나하마(현재의 후쿠시마현 이와키시)에서 사망했다. 노부타카의 장남 도모유키가 미토번사로, 차남 도모마사가 7,000석의 막부 하타모토로 존속했다.
우와지마 시내에서 도미타 가와 관련된 것으로는 사에키 마을과 사에키 다리가 있으며, 이는 도미타 가 가로인 사에키 곤노스케의 저택이 있었기 때문에 이 마을 이름과 다리 이름이 붙여졌다. 또한 노부타카 정실의 초상화가 우와지마시 오미야초 (구 키타마치)의 진종 오타니파 사이쇼산 릿쇼지 (기와데라)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 릿쇼지는 난요 최초의 기와를 얹은 사찰이었다고 전해진다.
2. 2. 2. 다테 히데무네 시대
1614년, 다테 히데무네는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로부터 10만 곡의 우와지마번을 수여받았고, 이듬해 우와지마성으로 이주했다.[1] 히데무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로 자랐지만 오사카 전투에서 도쿠가와 가문에 충성을 바쳤던 다테 마사무네의 서자였다.[1] 이 번은 센다이 번의 분가였던 것은 아니지만, 센다이 측과의 빈번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독립적인 번으로 간주되었다.[1]1657년, 히데무네는 은퇴하고 아들 무네토시를 후계자로 삼았지만, 번을 분할했다.[1] 무네토시는 7만 곡만을 소유했고, 그의 동생 다테 무네즈미는 3만 곡을 받아 이요-요시다 번이라는 분가이자 부속 번을 설립하도록 허락받았다.[1]
우와지마번은 히데무네가 입부하기 전까지 단기간에 영주·번주의 교체가 계속되어 피폐해졌고, 사쿠라다 모토치카(桜田元親)를 사무라이 다이쇼(侍大将), 야마가 미노루(山家公頼)를 총봉행(奉行)으로 시작한 번정은 전도가 다난했다. 겐와(元和) 3년경에 이타지마 마루쿠시 성(板島丸串城)은 우와지마성으로, 이타지마(板島)도 우와지마(宇和島)로 개명되었다.
번 재정은 매우 어려웠고, 히데무네는 우와지마 입부에 즈음하여 아버지 마사무네로부터 창업 자금으로 황금 3만 냥(6만 냥 설도 있음)을 차용했으며, 그 반환을 둘러싸고 번론이 분규하게 되었다. 야마가는 센다이 번과 마사무네의 관계를 중시하여, 마사무네 은거료 명목으로 매년 3만 석을 반환에 충당하기로 했고, 겐와 4년에는 우와지마 성 아래 북쪽에 센다이 번의 관청이 설치되어 간에이(寛永) 12년까지 18년간 3만 석을 반환했다. 단, 마사무네는 간에이 13년 사망할 때까지 은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은 사실상 우와지마번 영지를 센다이 번에 분할한 것과 같았고, 또한 우와지마 번사의 많은 수가 감봉을 면치 못하게 되어, 이 헌책을 행한 야마가는 사쿠라다 모토치카 등에게 크게 원망받았다. 히데무네도 빚 반환 문제를 둘러싸고 야마가와 대립하게 되었다.
겐와 6년 1월, 막부 명령에 의해 오사카 성 석축 공사를 담당하게 되어, 야마가와 사쿠라다는 봉행으로서 오사카로 향했다. 그러나 공사 진척 상황 보고에 관해 야마가와 사쿠라다 사이에 의견 불일치가 있어, 사쿠라다의 참언으로 야마가는 우와지마로 귀국하여 근신하게 되었다. 6월 29일, 히데무네의 명령을 받은 사쿠라다 일파에 의해 야마가와 그 아들 등 일족은 살해되었다. 사건을 알게 된 마사무네는 격노하여 히데무네를 면직하고, 더 나아가 막부에 "히데무네는 큰 바보여서 도저히 10만 석을 다스릴 그릇이 아니다. 몰수해 주길 바란다"고 간청할 정도였다. 이에 대해서는, 히데무네 정실의 형인 이이 나오타카(井伊直孝)와 도이 도시카쓰(土井利勝)에 의한 정치 공작으로 수습되었다.
우와지마번의 번정은 히데무네 시대에 거의 확립되었다. 하지만, 히데무네는 간에이 14년에 중풍으로 쓰러졌고, 실제 번정은 차남이자 후계자인 무네토키가 담당했다. 이 때문에, 무네토키를 우와지마번의 2대 번주로 보는 경우도 있다.
2. 2. 3. 다테 무네토시 시대
메이레키 3년(1657년) 7월, 다테 히데무네는 은퇴하고, 그의 아들 무네토시가 정식으로 2대 번주가 되었다.[1] 무네토시는 요절한 형 무네토키를 대신하여 번의 실질적인 운영을 담당했었다. 무네토키는 사찰 조영, 식수, 영내 검지를 실시했으며, 이 검지를 바탕으로 정면법을 채택했고, 더 나아가 가신의 지행을 기존의 급지제(지방지행제)에서 창미제(쌀 현물 지급)로 이행했다.무네토시의 재임 기간은 36년으로, 이후 세대에 모범이 되었지만, 그는 가뭄, 재정난, 홍수, 대형 화재, 그리고 도사 번 및 이요 요시다번과의 경계 분쟁에 시달려야 했다.[1]
무네토키 사후, 히데무네의 다섯째 아들이자 무네토시의 이복 동생인 무네즈미가 히데무네로부터 받은 3만 석의 칙허(분지장)를 내세우며, 우와지마번에서는 와레이 소동 이후의 소동이 일어났다. 이 소동에는 히데무네의 친척이자 막부의 숙로인 이이 나오타카, 센다이번의 실력자 무네카쓰가 연루되었으며, 더 나아가 무네즈미와 그 휘하 가신들의 음모 등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나오타카의 설득으로 무네토시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무네즈미에게 3만 석을 분지하여 이요 요시다번을 창설했다. 1657년 8월, 무네즈미는 정식으로 이요 요시다번 3만 석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1] 그러나 요시다번 영지의 주요 부분은 비옥한 곡창 지대였으며, 월경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우와지마번과의 경계선이 복잡해져, 영지 귀속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무네토시는 요시다번 창설에 즈음하여, 고록의 가신을 무네즈미에게 떠넘기는 보복을 했기 때문에, 양 번의 반목은 오래도록 이어지게 된다.
1688년, 무네토시는 5개년 계획을 수립했고, 1693년 11월, 사위인 다테 무네요시에게 번을 넘겨주고 은퇴했다.[1] 1696년, 번은 새로운 벼농사 개발을 통해 공식적으로 고쿠다카를 10만 곡으로 복원할 수 있었지만, 쇼군 정부는 번에게 에도의 유시마 세이도를 재건하도록 강요하여 지출을 늘렸다.[1]
2. 2. 4. 다테 무네요시 시대
1657년, 다테 히데무네는 은퇴하고 아들 무네토시를 후계자로 삼았지만, 번을 분할했다. 무네토시는 7만 곡만을 소유했고, 그의 동생 다테 무네즈미는 3만 곡을 받아 이요 요시다번이라는 분가이자 부속 번을 설립하도록 허락받았다.[1]무네토시의 재임 기간은 36년이나 되었으며, 이후 세대에 모범이 되었지만, 그는 가뭄, 재정난, 홍수, 대형 화재, 그리고 도사번 및 이요 요시다번과의 경계 분쟁에 시달려야 했다. 1688년 5개년 계획이 수립되었고, 1693년 11월, 무네토시는 사위인 다테 무네요시에게 번을 넘겨주고 은퇴했다. 1696년, 번은 새로운 벼농사 개발을 통해 공식적으로 고쿠다카를 10만 곡으로 복원할 수 있었지만, 쇼군 정부는 번에게 에도의 유시마 세이도를 재건하도록 강요하여 지출을 늘렸다.[1]
겐로쿠 9년(1696년), 3대 번주 다테 무네요시의 시대에 신전 개발을 이유로 7만 석에서 10만 석으로 영지 석고 수정을 막부로부터 인정받았으며, 그 대신 이요 요시다 번의 정식 독립이 인정되어 분쟁은 해결되었다. 10만 석으로의 석고 수정은 인정되었지만, 우와지마 번의 실제 수확량은 7만 석이었기 때문에, 더욱 신전 개발과 산업 진흥에 힘썼지만, 번 재정은 피폐해졌다. 한편, 이요 요시다 번도 이 독립을 계기로 우와지마 번과 우호 관계를 맺어, 실질적으로 우와지마 지번적인 존재로 변해갔다.
2. 2. 5. 다테 무라토시 ~ 무라나가 시대
1657년, 다테 히데무네는 은퇴하고 아들 무네토시를 후계자로 삼았지만, 번을 분할했다. 무네토시는 7만 곡만을 소유했고, 그의 동생 다테 무네즈미는 3만 곡을 받아 이요 요시다번이라는 분가이자 부속 번을 설립하도록 허락받았다.[1]무네토시의 재임 기간은 36년이나 되었으며, 이후 세대에 모범이 되었지만, 가뭄, 재정난, 홍수, 대형 화재, 그리고 도사번 및 이요 요시다번과의 경계 분쟁에 시달려야 했다. 1688년 5개년 계획이 수립되었고, 1693년 11월, 무네토시는 사위인 다테 무네요시에게 번을 넘겨주고 은퇴했다. 1696년 번은 새로운 벼농사 개발을 통해 공식적으로 고쿠다카를 10만 곡으로 복원할 수 있었지만, 쇼군 정부는 번에게 에도의 유시마 세이도를 재건하도록 강요하여 지출을 늘렸다. 1711년 무네토키가 사망하고 그의 셋째 아들 무라토시가 4대 다이묘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가뭄, 기근, 홍수가 계속되었고, 지폐 발행, 피해자 구제, 나무 심기, 난민을 위한 응급 고용 조치로서의 토목 공학 프로젝트, 검약 조례 등 다양한 개혁을 이끌었지만, 1735년 5월 31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했다.
2. 2. 6. 다테 무네나리 시대
1817년, 무네나가는 병으로 은퇴하고 그의 후계자 무네타다가 번의 행정을 이어받았으며, 1824년 공식적으로 7대 다이묘가 되었다. 그는 1844년에 은퇴했고, 다테 무네나리가 8대 다이묘가 되었다.[1] 무네나리는 서구화를 추진했고, 특히 번의 군사 분야에서 오무라 마스지로 등을 고문으로 고용했다.[1] 그는 또한 쇼군 정부의 행정에 관여했으며, 후에 바쿠마츠 시대의 4대 현명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불렸는데, 후쿠이 번의 마쓰다이라 슈운가쿠, 도사 번의 야마우치 요도, 사쓰마 번의 시마즈 나리아키라와 함께였다.[1] 그는 이이 나오스케에 의해 안세이 대옥 동안 강제로 은퇴했고, 그의 아들 무네에가 다이묘로 임명되었다.[1] 그러나 무네나리는 뒤에서 계속 통치했고, 무네에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1] 무네나리는 1860년 사쿠라다몬 밖의 변에서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된 후 다시 전면에 나서 고메이 천황과 알현했고, 쇼군 정부와 황실 사이의 "중개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1] 보신 전쟁 동안, 그는 번을 중립으로 유지하고 전투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뜨리려고 노력했으며, 친도쿠가와 세력인 이요-요시다 번이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못하도록 하고, 친도쿠가와 오우에쓰 열반 동맹의 수장인 다테 요시쿠니를 설득하여 항복시키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1]메이지 정부 하에서, 무네나리는 외무대신으로 재직했으며, 1871년 4월에는 청일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전권 대사로 임명되었다.[1] 그해 말, 폐번치현으로 우와지마 번은 우와지마 현이 되었고, 이후 에히메현의 일부가 되었다.[1] 1884년, 다테 무네나리는 화족의 백작이 되었다. 이는 센다이 분가보다 높은 작위였지만, 우와지마는 보신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고 그 신하 중 도쿄로 떠난 사람이 거의 없어 메이지 정부에서 작은 역할을 했다.[1]
2. 2. 7. 다테 무네이에 시대
1614년, 다테 히데무네는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로부터 10만 곡의 우와지마번을 수여받았고, 이듬해 우와지마성으로 이주했다.[1] 히데무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로 자랐지만 오사카 전투에서 도쿠가와 가문에 충성을 바쳤던 다테 마사무네의 서자였다. 엄밀히 말해, 이 번은 센다이 번의 분가였던 것은 아니지만, 센다이 측과의 빈번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독립적인 번으로 간주되었다.[1]1617년경, 이타지마 마루쿠시 성(板島丸串城)은 우와지마 성(宇和島城)으로, 이타지마(板島)는 우와지마(宇和島)로 개명되었다. 히데무네는 우와지마 입부에 즈음하여 아버지 마사무네로부터 창업 자금으로 황금 3만 냥(6만 냥 설도 있음)을 차용했다. 번 재정이 어려워, 야마가 미노루(山家公頼)는 센다이 번과의 관계를 중시하여 마사무네 은거료 명목으로 매년 3만 석을 반환에 충당하기로 했다. 1618년에는 우와지마 성 아래 북쪽에 센다이 번의 관청이 설치되어 1635년까지 18년간 3만 석을 반환에 충당했다.
1620년 1월, 막부 명령에 의해 오사카 성(大坂城) 석축 공사를 담당하게 되었다. 6월 29일, 히데무네의 명령을 받은 사쿠라다 모토치카(桜田元親) 일파에 의해 야마가와 그 아들 등 일족은 살해되었다. 사건을 알게 된 마사무네는 격노하여 히데무네를 면직하고, 더 나아가 막부에 대해 "히데무네는 큰 바보여서 도저히 10만 석을 다스릴 그릇이 아니다. 몰수해 주길 바란다"고 간청할 정도였다. 이는 히데무네 정실의 형인 이이 나오타카(井伊直孝)와 도이 도시카쓰(土井利勝)에 의한 정치 공작으로 수습되었다.
1637년에 히데무네는 중풍으로 쓰러졌고, 실제 번정은 차남이자 후계자인 무네토키(宗時)가 담당했다. 무네토키는 사찰 조영, 식수, 영내 검지를 실시했으며, 이 검지를 바탕으로 정면법을 채택했고, 더 나아가 가신의 지행을 기존의 급지제(지방지행제)에서 창미제(쌀 현물 지급)로 이행했다. 그러나 1653년에 무네토키는 요절했다.
히데무네의 다섯째 아들이자 무네토키의 이복 동생인 무네즈미(宗純)가 히데무네로부터 받은 3만 석의 칙허(분지장)를 내세우며, 우와지마번에서는 와레이 소동 이후의 소동이 일어났다. 결국, 나오타카의 설득으로 무네토시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무네즈미에게 3만 석을 분지하여 이요 요시다번을 창설했다.
1657년 7월에 히데무네는 은퇴했다.
3. 역대 번주
1614년 다테 히데무네가 도쿠가와 히데타다로부터 10만 곡의 우와지마 번을 받아 성립되었다.[1] 히데무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로 자랐지만 오사카 전투에서 도쿠가와 가문에 충성을 바쳤던 다테 마사무네의 서자였다.[1] 우와지마 번은 센다이번의 분가가 아니었지만, 센다이 측과의 빈번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독립적인 번으로 간주되었다.[1]
1657년 히데무네는 은퇴하고 아들 무네토시를 후계자로 삼았지만, 번을 분할했다. 무네토시는 7만 곡만을 소유했고, 그의 동생 무네즈미는 3만 곡을 받아 이요-요시다 번이라는 분가이자 부속 번을 설립했다.[1]
무네토시의 재임 기간은 36년으로, 이후 세대에 모범이 되었지만, 가뭄, 재정난, 홍수, 대형 화재, 그리고 도사 번 및 이요-요시다 번과의 경계 분쟁에 시달려야 했다.[1] 1693년 무네토시는 사위인 다테 무네요시에게 번을 넘겨주고 은퇴했다.[1] 1711년 무네토시가 사망하고 그의 셋째 아들 무라토시가 4대 다이묘가 되었다. 무라토시는 여러 개혁을 이끌었지만, 1735년 31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했다.[1]
5대 다이묘 무라토키는 무라토시의 아들이었으며, 60년 재임 기간 동안 장기적인 부흥을 추진했다.[1] 1748년 번교인 나이토쿠칸(후에 메이린칸)을 개설했다.[1] 그는 왁스를 번의 중요한 제품으로 만들었고, 왁스와 종이에 대한 독점권을 확립했다.[1] 그러나 덴메이 대기근은 번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 잇따른 봉기와 농민 반란을 초래했다.[1]
무네토키 사후 무네나가가 뒤를 이었다.[1] 1817년 병으로 은퇴한 무네나가의 뒤를 이어 무네타다가 1824년 7대 다이묘가 되었다.[1] 1844년 무네타다가 은퇴하고 무네나리가 8대 다이묘가 되었다.[1] 무네나리는 서구화를 추진했고, 오무라 마스지로 등을 군사 고문으로 고용했다.[1] 안세이 대옥으로 강제 은퇴당한 후 아들 무네에가 다이묘가 되었으나, 무네나리가 뒤에서 실권을 행사했다.[1]
보신 전쟁 동안 무네나리는 번을 중립으로 유지하고, 친도쿠가와 세력인 이요-요시다 번과 오우에쓰 열반 동맹의 다테 요시쿠니를 설득하여 항복시키는 데 노력했다.[1]
메이지 정부에서 무네나리는 외무대신을 지냈고, 1871년 청일 수호 통상 조약 체결을 위한 전권 대사로 임명되었다.[1] 같은 해 폐번치현으로 우와지마 번은 우와지마 현이 되었고, 이후 에히메현에 편입되었다.[1]
3. 1. 도미타 가문
富田信高|도미타 노부타카일본어는 1608년부터 1613년까지 우와지마 번을 다스린 도자마였다. 노부타카의 재임 기간 동안 우와지마 번은 12만 석의 고쿠다카를 가졌다.| # | 이름 | 재임 기간 | 통칭 | 조정 관위 | 고쿠다카 |
|---|---|---|---|---|---|
| 1 | 富田信高|도미타 노부타카일본어 | 1608년 ~ 1613년 | 시나노노카미 (信濃守) | 종4위하 (従四位下) | 120,000 석 |
3. 2. 막부 직할령
1613년부터 1614년까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막부 직할령이었다.[1]| # | 이름 | 재임 기간 | 통칭 | 조정 관위 | 고쿠다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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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 다테 가문
| # | 이름 | 재임 기간 | 통칭 | 조정 관위 | 고쿠다카 | |
|---|---|---|---|---|---|---|
| 1 | 다테 히데무네|伊達秀宗일본어 | 1614년 ~ 1657년 | 도토미노카미 (遠江守); 지주 (侍従) | 종4위하 (従四位下) | 100,000 곡 | |
| 2 | 다테 무네토시| 伊達宗利일본어 | 1657년 ~ 1693년 | 도토미노카미 (遠江守); 지주 (侍従) | 종4위하 (従四位下) | 70,000 곡 | |
| 3 | 다테 무네요시| 伊達宗贇일본어 | 1693년 ~ 1711년 | 기이노카미 (紀伊守); 지주 (侍従) | 종4위하 (従四位下) | 70,000 → 100,000 곡 | |
| 4 | 다테 무라토시|伊達村年일본어 | 1711년 ~ 1735년 | 도토미노카미 (遠江守) | 종4위하 (従四位下) | 100,000 곡 | |
| 5 | 다테 무라토키|伊達村候일본어 | 1735년 ~ 1794년 | 사코네노추조 (左近衛権少将) | 종4위하 (従四位下) | 100,000 곡 | |
| 6 | 다테 무라나가| 伊達村寿일본어 | 1794년 ~ 1824년 | 우코네노추조 (右近衛権少将) | 종4위하 (従四位下) | 100,000 곡 | |
| 7 | 다테 무네타다| 伊達宗紀일본어 | 1824년 ~ 1844년 | 사코네노추조 (左近衛権少将) | 종4위하 (従四位下) | 100,000 곡 | |
| 8 | 다테 무네나리|伊達宗城일본어 | 1844년 ~ 1858년 | 사코네노추조 (左近衛権少将); 지주 (侍従) | 종4위상 (従四位上) | 100,000 곡 | |
| 9 | 다테 무네이에| 伊達宗徳일본어 | 1858년 ~ 1871년 | 도토미노카미 (遠江守) | 종4위하 (従四位下) | 100,000 곡 |
1614년 12월 28일, 다테 히데무네가 도쿠가와 히데타다로부터 이요 우와지마번 10만 석을 받아, 1615년 3월 18일에 이타지마마루쿠시성(우와지마성)에 입성하면서 우와지마번이 정식으로 성립되었다[1]. 히데무네는 전국 시대에 "독안룡"으로 불린 센다이번의 번주 다테 마사무네의 서장자였다[2]. 히데무네는 처음에는 마사무네의 세자였으나, 도요토미 가문에서 도쿠가와 가문으로 천하의 패권이 넘어가고, 마사무네와 정실 메히메 사이에 타다무네가 태어나면서 히데무네의 입장이 문제가 되었다. 이에 마사무네는 도쿠가와 가문에 히데무네의 신변 보장을 간청했고,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 마사무네와 히데무네가 함께 도쿠가와 측으로 종군하자, 막부는 마사무네의 전공과 히데무네의 충성에 보답한다는 이유로 우와지마번을 하사했다[3]. 우와지마번 다테 가문은 센다이번의 지번이 아닌 신규 국주 격 다이묘로 임명되었으며, 히데타다로부터 "서국의 다테, 동국의 다테가 나란히 한다"는 명령을 받았다[3]. 다만, 막부의 유력 외양 다이묘 통제 정책의 일환으로 다테 가문을 동서로 분단하고, 도요토미 가문에 가까운 히데무네를 변경인 시코쿠로 멀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4]. 히데무네 입부 당시 가신단은 요네자와 시대의 "다테 57기" 중에서 선발되었기 때문에 센다이번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지만, 센다이번은 지번이라고 주장했고, 특히 히데무네 시대에는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 57기는 마사무네가 선발했다고 한다[4].
우와지마번의 번정은 히데무네 시대에 거의 확립되었다. 그러나 히데무네는 1637년 중풍으로 쓰러졌고, 실제 번정은 차남이자 후계자인 무네토키(宗時)가 담당했다[5]. 이 때문에 무네토키를 우와지마번의 2대 번주로 보기도 한다[5]. 무네토키는 사찰 조영, 식수, 영내 검지를 실시했으며, 이 검지를 바탕으로 정면법을 채택했고, 가신의 지행을 급지제(지방지행제)에서 창미제(쌀 현물 지급)로 이행했다[6]. 그러나 1653년 무네토키는 요절했고, 동생인 무네토시(宗利)가 후계자가 되었다[7].
무네토키 사후, 히데무네의 다섯째 아들이자 무네토키와 무네토시의 이복 동생인 무네즈미(宗純)가 히데무네로부터 받은 3만 석의 칙허(분지장)를 내세우면서 우와지마번에서는 와레이 소동 이후의 소동이 일어났다. 히데무네의 친척이자 막부 숙로인 이이 나오타카, 센다이번 실력자 무네카쓰(宗勝)가 연루되었으며, 무네즈미와 그 휘하 가신들의 음모 등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나오타카의 설득으로 무네토시는 굴복하여 무네즈미에게 3만 석을 분지, 이요 요시다번을 창설했다. 그러나 요시다번 영지는 비옥한 곡창 지대였고 월경지를 가지고 있어 우와지마번과의 경계선이 복잡해져 영지 귀속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무네토시는 요시다번 창설에 즈음하여 고록의 가신을 무네즈미에게 떠넘기는 보복을 했기 때문에 양 번의 반목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1657년 7월 히데무네는 은거했고, 무네토시가 정식으로 2대 번주가 되었으며, 8월에는 무네즈미가 정식으로 이요 요시다번 3만 석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4. 지번
이요 요시다 번은 무쓰 고산케 중 하나인 미토 번 초대 번주 도쿠가와 요리후사의 4남 마쓰다이라 요리사다를 시조로 하는 신판 다이묘 가문이다.
5. 경제
우와지마번은 성립 초기부터 재정이 어려웠다. 도요토미 시대에 도다, 도도 가문과 교체되었고, 도쿠가와 시대에는 토미타, 막부령으로 자주 바뀌었기 때문에 영지가 피폐해졌다. 이 때문에 센다이번으로부터 3만 량, 또는 6만 량을 차입했지만, 그 반환, 요시다 분할령으로 인한 3만 석의 손실과 그 후의 측량에 의한 10만 석의 석고 복귀와 그에 따른 막부 토목 공사 부담 증가 등으로 재정이 매우 어려웠다. 역대 번주에 의한 번정 개혁도 끊임없는 천재 등으로 효과를 기대할 수 없었고, 막말에는 무네노리, 무네나리, 무네노리 3대의 트로이카 체제 때문에 재정 지출이 더욱 늘어나, 막말에는 번 재정을 영민으로부터의 헌금으로 간신히 유지하는 지경이었다.
무네나리는 재정난 타개를 위해 1856년에 우와지마에 물산방 역소를 설치하여, 특산품 개발, 제조, 판매에 힘썼으며, 인삼 재배, 한천 제조, 번 내의 산물 연구에 힘썼다. 증기선에 흥미를 보이던 무네나리는 앞으로는 석탄이 중요해질 것을 내다보고, 후쿠오카번에서 기술자를 초빙하여 석탄 매장 조사를 하기도 했다. 물산방은 왁스, 차, 구리, 비료, 해조 등 많은 품목을 취급했지만, 어느 것도 번을 윤택하게 할 정도의 실적을 올리지 못했다.
6. 사회
우와지마번의 번정은 히데무네 시대에 거의 확립되었다. 하지만, 히데무네는 1637년에 중풍으로 쓰러졌고, 실제 번정은 차남이자 후계자인 무네토키가 담당했다.[1] 이 때문에, 무네토키를 우와지마번의 2대 번주로 보기도 한다.[1] 무네토키는 사찰 조영, 식수, 영내 검지를 실시했으며, 이 검지를 바탕으로 정면법을 채택했고, 더 나아가 가신의 지행을 급지제(지방지행제)에서 창미제(쌀 현물 지급)로 이행했다.[2] 그러나 1653년에 무네토키는 요절했고, 동생인 무네토시가 후계자가 되었다.[3]
무네토키 사후, 히데무네의 다섯째 아들이자 무네토키와 무네토시의 이복 동생인 무네즈미가 히데무네로부터 받은 3만 석의 칙허(분지장)를 내세우며 소동이 일어났다.[4] 이에 히데무네의 친척이자 막부의 숙로인 이이 나오타카, 센다이번의 실력자 무네카쓰가 연루되었으며, 무네즈미와 그 휘하 가신들의 음모 등도 있었다고 전해진다.[5] 결국, 나오타카의 설득으로 무네토시는 굴복, 무네즈미에게 3만 석을 분지하여 이요 요시다번을 창설했다.[6] 그러나 요시다번 영지의 주요 부분은 비옥한 곡창 지대였으며, 월경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우와지마번과의 경계선이 복잡해져, 영지 귀속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6] 무네토시는 요시다번 창설에 즈음하여, 고록의 가신을 무네즈미에게 떠넘기는 보복을 했기 때문에, 양 번의 반목은 오래도록 이어지게 된다.[7]
1657년 7월에 히데무네는 은거했고, 무네토시가 정식으로 2대 번주가 되었으며, 8월에 무네즈미가 정식으로 이요 요시다번 3만 석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반교에는 국학 연구자이자 황학 교수인 스즈키 시게키 (후일 법학자 호즈미 노부시게의 아버지)가 있었고, 존왕 운동을 추진했다. 영국 대사 어니스트 사토의 방문을 받아 환대했다.
우와지마번에는 포술에 6개의 유파가 있었지만, 무네나리는 최신의 포술을 도입하여 이를 위원류로 일원화했다. 또한 무네나리는, 옛부터 경솔한 무기였던 조총을 하급, 상급을 불문하고 숙련하도록 명령하고, 궁대를 조총대로 개편했다. 무네나리는 여러 번 군사 훈련을 반복하고, 대포의 시험 사격을 스스로 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또한 군대를 양식화하여, 총대는 영국식, 포대는 네덜란드식으로 했다. 무네나리는 조선 기술에도 열심한 관심을 보이며, 세공사인 가조(마에하라 고잔)를 이용하여 나가사키에 유학시키는 등 했다.
우와지마번에서는 1855년과 1871년 두 차례에 걸쳐 무례토치가 일어났다. 전자는 번의 명령에 의한 직접적인 무례토치였지만, 후자는 일본 최후의 무례토치로 전해진다.
1855년의 사건에서는 시시도 고타로라는 무사가 칼을 빼앗길 뻔했지만, 간신히 지켜냈지만 칼집을 빼앗겨 체면을 잃었고, 번의 도움을 받아 범인인 모토스케, 고헤에를 베어 죽였다. 시시도의 실력은 꽤 미숙하여, 여러 번 칼을 휘두른 끝에 겨우 베어 죽였다고 하며, "훌륭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1871년의 사건에서는 소키의 측근 스도 요리아키가 백성인 우시마쓰를 벤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사에키 다리에서 스도와 우시마쓰가 마주쳤을 때, 술에 취한 우시마쓰가 스도의 통행로를 막는 장난을 했다. 이 때문에 스도는 주의를 주었지만, 우시마쓰는 상대가 젊은 사무라이라고 면박을 주었고, 구경꾼이 모인 앞에서 우시마쓰를 단칼에 베어 죽였다. 덧붙여, 무례토치 금지령은 1871년 8월 17일에 내려졌기 때문에, 일본 최후의 무례토치로 전해지고 있다.
7. 주요 인물
스즈키 시게키는 국학 연구자이자 황학 교수였다. 훗날 법학자 호즈미 노부시게의 아버지가 되었으며, 존왕 운동을 추진했다. 영국 대사 어니스트 사토의 방문을 받아 환대했다.[1]
우와지마번 출신의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참조
[1]
서적
江戸三百藩大全 全藩藩主変遷表付
Kosaido Publishing
2015
[2]
서적
藩と城下町の事典―国別
Tokyodo Printing
2004
[3]
서적
Historical and Geographic Dictionary of Japan
Tuttle (reprint) 1972
[4]
서적
The Bakufu in Japanese History
https://books.google[...]
[5]
서적
Warlords, Artists, & Commoners: Japan in th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6]
문서
본가말가론쟁
[7]
문서
관문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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