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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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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화영은 1879년 황해도 평산에서 출생하여, 동학을 거쳐 개신교로 개종한 인물이다. 3·1 운동에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으로 참여하여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만세 운동을 조직했으며, 신간회 간사, 조선민흥회 준비위원, 조선물산장려회 고문 등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조선민족당 당수,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 등을 지내며 정치 활동을 했으며, 건국대학교의 전신인 조선정치대학관을 설립했다. 1950년 제2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되었으나 한국 전쟁 중 납북되었고, 1960년 사망하여 평양 근교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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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화영
기본 정보
오화영
오화영 선생
본관해주 오씨
하정(夏庭)
출생1876년 1월 16일
사망1960년 9월 2일
학력
수학한성사범학교 졸업
수학일본체육학교 졸업
경력
대한체육회창립발기인
종목육상
종목야구
종목정구
종목축구
종목농구
종목배구
기타기타
기타펜싱
기타역도
기타수영
기타빙상
기타정구
기타권투
기타레슬링
기타사이클
기타하키
기타스키
기타승마
기타조정
기타유도
수상체육포장
기타대한민국체육상 공로상

2. 생애

오화영은 1879년 4월 5일 황해도 평산 금암면 대촌리에서 오석조(吳錫祚)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본관은 고창이다.[2] 어릴 때 한학을 공부하다 동학에 입문하기도 했으나, 곧 개신교로 개종하여 1906년 세례를 받았다. 1906년 만주에서 돌아온 그는 미국 남(南)감리교의 기이남(奇二男, Rev W.G.cram영어)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1909년부터 남감리회 소속 전도사로서 그는 전도 활동을 시작하였다. 개성 서구역(1909~1911), 개성 북부교회(1911~1913) 전도사를 거쳐 1913년 9월 원산 상리교회로 자리를 옮겼다. 1914년 8월 23일 김영학·최태곤 등과 함께 앳킨스(Atkins) 감독에게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7년 서울 도렴동 종교(宗橋)교회로 부임한 그는 이듬해 10월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8년에는 감리교 목사들의 사관학교 격인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의 목사가 되었다.

오화영은 1919년 3·1 운동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2]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목회 활동을 했던 개성과 원산 지역의 만세 운동을 조직하여,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 판결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2] 1922년 5월 5일 이갑성과 함께 만기출옥했다.[2]

출옥 후, 오화영은 1926년 10월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 창립총회에 준비위원으로, 1927년 2월 15일 개최된 신간회 창립대회에서는 간사 35명 중 1인으로 선출되었으며 서무부장, 경성지회 검사위원에 선임되기도 했다.[2] 1929년 6월에 창립된 기독신우회(信友會)의 평의원으로 참여했다.[2] 1932년에는 조선물산장려회 고문으로 활동했다.[2] 광주학생운동과 관련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2]

1925년 3월 22일, 서울 사직동 신흥우(申興雨) 집에서 결성된 흥업구락부에 참여하였다.[2] 흥업구락부는 실업단체로 위장한 1920~1930년대 기독교계의 민족운동단체였다.[2] 1937년 일제는 이 단체가 미국의 이승만과 연결되어 있음을 포착하여, 1938년 5월 흥업구락부 간부회원 60여 명을 대거 검거하였다.[2] 이 사건으로 오화영은 6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나, 신흥우 등 대다수가 전향서를 쓰고 풀려난 뒤 친일로 돌아선 것과 달리 끝까지 지조를 지켰다.[2]

오화영은 해방 후 정치 무대 전면에 나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반 환영을 위한 한국지사(志士)영접위원회에 참여하고, 건국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다.[2] 조선민족당을 결성해 당수로 추대되었으며, 우익 정치인으로서 반탁 운동에 앞장섰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 미군정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을 역임하고, 독립전취(戰取)전국대회 회장을 맡는 등 신생 조국 건설에 힘을 쏟았다.[2] 1946년에는 건국대학교의 전신인 조선정치대학관을 설립하여 이사장 겸 관장을 맡았고, 1949년에는 조선정치대학 학장이 되었다.[2]

1947년 12월에는 중간파 세력의 결집체인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하였다.[2] 1948년 4월, 그는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평양에서 열린 남북 협상에 참석하기 위해 북으로 갔다.[2]

1950년 5월 30일, 서울 종로구에서 제2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되었으나, 한국 전쟁 발발 직후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다.[2]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대회에 참석하여 최고위원, 상무위원,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는데, 이 단체는 한국 전쟁 당시 납북된 인사들이 비자발적으로 동원된 선전 단체였다.[2] 이후 오랫동안 생사가 확인되지 않다가, 2002년 통일신보 보도를 통해 1960년 9월 2일 사망하여 평양 근교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된 사실이 밝혀졌다.[2]

2. 1. 초기 생애와 종교 활동 (1879-1919)

오화영은 1879년 4월 5일 황해도 평산 금암면 대촌리에서 오석조(吳錫祚)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본관은 고창이다.[2] 어릴 때 한학을 공부하다 동학에 입문하기도 했으나, 곧 개신교로 개종하여 1906년 세례를 받았다. 1906년 만주에서 돌아온 그는 미국 남(南)감리교의 기이남(奇二男, Rev W.G.cram영어)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1909년부터 남감리회 소속 전도사로서 그는 전도 활동을 시작하였다. 개성 서구역(1909~1911), 개성 북부교회(1911~1913) 전도사를 거쳐 1913년 9월 원산 상리교회로 자리를 옮겼다. 1914년 8월 23일 김영학·최태곤 등과 함께 앳킨스(Atkins) 감독에게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7년 서울 도렴동 종교(宗橋)교회로 부임한 그는 이듬해 10월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8년에는 감리교 목사들의 사관학교 격인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의 목사가 되었다.

2. 2. 3.1 운동과 독립운동 (1919-1945)

오화영은 1919년 3·1 운동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2]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목회 활동을 했던 개성과 원산 지역의 만세 운동을 조직하여,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 판결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2] 1922년 5월 5일 이갑성과 함께 만기출옥했다.[2]

출옥 후, 오화영은 1926년 10월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 창립총회에 준비위원으로, 1927년 2월 15일 개최된 신간회 창립대회에서는 간사 35명 중 1인으로 선출되었으며 서무부장, 경성지회 검사위원에 선임되기도 했다.[2] 1929년 6월에 창립된 기독신우회(信友會)의 평의원으로 참여했다.[2] 1932년에는 조선물산장려회 고문으로 활동했다.[2] 광주학생운동과 관련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2]

1925년 3월 22일, 서울 사직동 신흥우(申興雨) 집에서 결성된 흥업구락부에 참여하였다.[2] 흥업구락부는 실업단체로 위장한 1920~1930년대 기독교계의 민족운동단체였다.[2] 1937년 일제는 이 단체가 미국의 이승만과 연결되어 있음을 포착하여, 1938년 5월 흥업구락부 간부회원 60여 명을 대거 검거하였다.[2]이 사건으로 오화영은 6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나, 신흥우 등 대다수가 전향서를 쓰고 풀려난 뒤 친일로 돌아선 것과 달리 끝까지 지조를 지켰다.[2]

2. 3. 해방 이후 정치 활동과 납북 (1945-1960)

오화영은 해방 후 정치 무대 전면에 나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반 환영을 위한 한국지사(志士)영접위원회에 참여하고, 건국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다.[2] 조선민족당을 결성해 당수로 추대되었으며, 우익 정치인으로서 반탁 운동에 앞장섰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 미군정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을 역임하고, 독립전취(戰取)전국대회 회장을 맡는 등 신생 조국 건설에 힘을 쏟았다.[2] 1946년에는 건국대학교의 전신인 조선정치대학관을 설립하여 이사장 겸 관장을 맡았고, 1949년에는 조선정치대학 학장이 되었다.[2]

1947년 12월에는 중간파 세력의 결집체인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하였다.[2] 1948년 4월, 그는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평양에서 열린 남북 협상에 참석하기 위해 북으로 갔다.[2]

1950년 5월 30일, 서울 종로구에서 제2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되었으나, 한국 전쟁 발발 직후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다.[2]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대회에 참석하여 최고위원, 상무위원,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는데, 이 단체는 한국 전쟁 당시 납북된 인사들이 비자발적으로 동원된 선전 단체였다.[2] 이후 오랫동안 생사가 확인되지 않다가, 2002년 통일신보 보도를 통해 1960년 9월 2일 사망하여 평양 근교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된 사실이 밝혀졌다.[2]

3. 사후

4. 평가

5.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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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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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국회의원 선거 (1950년)
국회의원 (초선)
1950년 총선에서 서울 종로구 을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21,199표를 얻어 58.54%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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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 제2대 국회의원 선거 (1950년)

오화영은 1950년 총선에서 서울 종로구 을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21,199표를 얻어 58.54%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제2대 국회의원으로 초선이었다.

참조

[1] 뉴스 “오화영 선생 60년 9월2일 사망” http://www.hani.co.k[...] 한겨레 (연합뉴스 인용) 2002-01-30
[2] 웹사이트 고창오씨대종회 http://gochangoh.com[...] 2013-12-24
[3] 뉴스 [민족대표 33인 열전] 세 차례 옥고에도 변절하지 않은 독립지사 https://news.naver.c[...] 오마이뉴스 2019-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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