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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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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위진은 삼국 시대 위나라의 관료로, 하후돈 밑에서 시작하여 황문시랑, 상서우복야, 시중, 이부상서 등을 역임했다. 조조, 조비, 조예 시대를 거치며 한헌제의 선양을 옹호하고, 제갈량의 북벌에 대비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조예 사후에는 사공, 사도를 거쳐 장원후에 봉해졌으며, 조상이 보정을 시도했을 때 이를 거절했다. 사후 태위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경(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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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 (삼국지)

2. 생애

조비가 위왕이 되었을 때 위진은 산기상시가 되었고, 황제가 되었을 때 안국정후에 봉해졌다. 당시 신하들은 모두 위나라를 칭송하고 한조를 폄하했지만, 위진만은 한 헌제가 선양한 의미를 분명히 하고 한조의 미덕을 칭송했다.[1] 이후 상서로 승진했고, 시중·이부상서로 전임되었다. 문제광릉으로 행행할 때, 중령군을 대행하여 종군했다. 정동대장군 조휴가 항복한 적의 자백을 받아 손권이 유수구에 있다고 표를 올렸는데, 위진은 이것이 거짓임을 간파했다.

명제가 즉위하자 위진은 강향후에 봉해졌고, 상서우복야로 전임되었다. 《송서》에 따르면 이때 상서복야를 좌우로 나눈 것이 처음이라고 한다. 위진은 관리 선발을 관장하고, 시중을 겸임하였다. 중호군 장제는 한 고조가 도망친 죄인(한신)을 상장으로 썼고, 주나라 문왕은 어부(태공망)를 뽑아 태사로 쓴 일을 들어, 규범에 따라 시험을 치른 후 인재를 등용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위진은 옛사람들은 지혜를 버리고 제도로서 관리를 선발했으며, 마음대로 관리를 선발하는 선례를 남기면 천하 사람들이 다투어 일어나 분란이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1]

제갈량천수로 침입하자, 정촉장군, 가절·도독제군사가 되었다. 장안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제갈량이 후퇴했다. 돌아와서는 복직하여 광록대부를 더하였다. 명제가 궁전 건축에 열중하는 것을 자주 간언했으며, 이로 인해 전중감(殿中監)이 월권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해서도 상주하고 명제와 논쟁을 벌였다.[1]

유주 자사 관구검이 표를 올려 유주의 군대로 공손연이 할거하는 요동을 평정하기를 청했다. 위진은 공손씨가 3대를 내려오면서 요동을 통치하고 오랑캐를 위무하며 군사를 훈련시키는데, 관구검이 일지군으로 깊숙이 들어가 급히 평정하고자 하므로 망령된 것이라 말했다. 경초 원년(237년), 관구검옥새가 찍힌 조서를 가지고 공손연을 소환했으나, 이에 공손연이 군대를 일으켜 관구검과 공손연이 서로 싸워 관구검이 불리하여 퇴각했다.[1] 이후 사공으로 승진했고, 사도로 옮겼다.

정시 연간, 위진은 장원후로 승진하였다. 그는 은퇴를 청원했고, 황제 조방은 조서를 내려 집 한 채와 특진을 내리고 삼사와 같이 대우했다. 위진이 죽은 후, 태위로 추증되었고, 시호를 내려 (敬)이라 하였다. 작위는 아들 위열이 이었다.[1]

조상이 보정할 때, 위진에게 상서령을 맡기고 또 자기 아우를 위해 구혼했지만,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1]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하후돈진류 태수였을 때, 위진은 계리로 등용되었다. 한번은 하후돈이 위진의 부인을 술자리에 부르려고 했지만, 위진은 도덕에 어긋나는 행위라며 이를 거절했다. 하후돈은 화가 나서 위진을 구속했지만, 나중에 사면했다.[1]

위진은 후한 조정에 출사하여 황문시랑이 되었다. 동군의 주월이라는 인물이 난을 일으켜 위진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그러나 조조는 망한 위자(衛茲)의 충절에 늘 감동했기 때문에 이를 믿지 않았다. 순욱에게서도 믿지 말라는 보고가 있었으므로, 조조의 위진에 대한 신뢰는 더욱 강해졌다.[1]

이후 위진은 칙명을 받아 귀인을 맞이하기 위해 조조 정권에 들어갔다. 조조는 이 기회에 위진을 자신의 휘하에 두고, 상소를 올려 승상부에 넘겨받아 군사에 참여시켰다. 그리고 망한 위자의 옛 공로를 다시 포상하여 관내후로 삼았다. 위진은 후에 호조연이 되었다.[1]

조식이 조조로부터 총애를 받자, 정의가 위진과 결탁할 것을 요청했지만, 위진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1]

2. 2. 조조와의 만남과 관내후 책봉

조조동탁 토벌을 위해 의병을 일으켰을 때, 위진의 부친 위자는 조조에게 협력했으나 동탁 군의 서영에게 패한 전투에서 전사했다.[1] 위진은 진류태수 하후돈 밑에서 계리(計吏)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나, 하후돈이 부인을 연회에 출석시키려 하자 "말세의 풍속이며, 바른 예절이 아니다!"라고 비판하여 하후돈에게 사로잡혔다가 사면받았다.[1] 이후 조정에 나아가 황문시랑(黃門侍郞)이 되었다.[1]

199년(건안 4년),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가 되었다.[1] 조조는 표를 올려 위진을 승상군사에 참여하게 하고, 아버지 위자의 공을 추록하여 관내후로 삼고 호조연으로 전임시켰다.[1]

2. 3. 조식과의 관계

조조가 태자를 정하지 않고 조식을 총애했을 때, 조식의 심복 정의가 위진에게 자신들과 결탁할 것을 권했으나, 위진은 이를 거절했다. 문제가 제위에 오르고 조림을 총애했는데, 문제가 위진에게 “평원후는 어떠한가?(혹은 평원후와 같은가?)”라 묻자 그 덕행을 찬미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

2. 4. 조비 시대의 활동

문제가 위왕이 되었을 때 위진은 산기상시가 되었고, 황제가 되었을 때 안국정후에 봉해졌다. 당시 신하들은 모두 위나라를 칭송하고 한조를 폄하했지만, 위진만은 한 헌제가 선양한 의미를 분명히 하고 한조의 미덕을 칭송했다.[1] 상서로 승진했고, 시중·이부상서로 전임되었다. 문제가 광릉으로 행행할 때, 중령군을 대행하여 종군했다. 정동대장군 조휴가 항복한 적의 자백을 받아, 손권은 유수구에 있다고 표를 올렸는데, 위진은 이것이 거짓임을 간파했다.

조비가 조림을 총애하게 되자, 한번은 조비가 위진에게 평원후가 된 조식에 대해 물었다. 위진은 조식의 덕에 대해 칭찬했지만, 조림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2. 5. 조예 시대의 활동

명제가 즉위하자 위진은 강향후에 봉해졌고, 상서우복야로 전임되었다. 《송서》에 따르면 이때 상서복야를 좌우로 나눈 것이 처음이라고 한다. 위진은 관리 선발을 관장하고, 시중을 겸임하였다. 중호군 장제는 옛 한 고조가 도망친 죄인(한신)을 상장으로 썼고, 주의 문왕은 어부(태공망)를 뽑아 태사로 쓴 일을 들어, 규범에 따라 시험을 치른 후 인재를 등용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위진은 옛사람들은 지혜를 버리고 제도로서 관리를 선발했으며, 마음대로 관리를 선발하는 선례를 남기면 천하 사람들이 다투어 일어나 분란이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1]

제갈량천수로 침입하자, 정촉장군, 가절·도독제군사가 되었다. 장안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제갈량이 후퇴했다. 돌아와서는 복직하여 광록대부를 더하였다. 명제가 궁전 건축에 열중하는 것을 자주 간언했으며, 이로 인해 전중감(殿中監)이 월권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해서도 상주하고 명제와 논쟁을 벌였다.[1]

유주자사 관구검이 표를 올려 유주의 군대로 공손연이 할거하는 요동을 평정하기를 청했다. 위진은 이미 공손씨가 3대를 내려오면서 요동을 통치하고 오랑캐를 위무하며 군사를 훈련시키는데, 관구검이 일지군으로 깊숙이 들어가 급히 평정하고자 하므로 망령된 것이라 말했다. 경초 원년(237년), 관구검은 옥새가 찍힌 조서를 가지고 공손연을 소환했으나, 이에 공손연이 군대를 일으켜 관구검과 공손연이 서로 싸워 관구검이 불리하여 퇴각했다.[1]

2. 6. 조방 시대와 말년

정시 연간, 위진은 장원후로 승진하였다. 그는 은퇴를 청원했고, 황제 조방은 조서를 내려 집 한 채와 특진을 내리고 삼사와 같이 대우했다. 위진이 죽은 후, 태위로 추증되었고, 시호를 내려 (敬)이라 하였다. 작위는 아들 위열이 이었다.[1]

태조가 태자를 정하지 않고 조식을 총애했을 때, 조식의 심복 정의가 위진에게 자신들과 결탁할 것을 권했으나, 위진은 이를 거절했다. 문제가 제위에 오르고 동해왕을 총애했는데, 문제가 위진에게 “평원후는 어떠한가?(혹은 평원후와 같은가?)”라 묻자 그 덕행을 찬미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상이 보정할 때, 위진에게 상서령을 맡기고 또 자기 아우를 위해 구혼했지만,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1]

제갈탄, 하후현, 등양 등은 서로를 평가하며 이름을 붙였는데, 위열은 유방의 아들 유희, 손자의 아들 손밀과 함께 제갈탄, 하후현, 등양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아버지가 위세 있는 자리에 있으므로 함께 삼예(三豫)라 불렸다. 명제는 이러한 평가를 경박한 풍조로 여겨 싫어했고, 위열을 면직시켰다. 위열은 아버지의 뒤를 잇고, 함희 연간(264년-265년)에 광록훈이 되었다.[1]

3. 가계

위진의 가계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위경(衛京)과 위해(衛楷)는 모두 2천 석의 관직을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위권(衛權)은 자가 백여(伯輿)이며, 서진 사마량이 정권을 잡았을 때 상서랑으로 임명되었다.[1]

4. 평가

위진은 하후돈 휘하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나, 하후돈의 행동을 비판했다가 사로잡혔지만 사면받았다. 조정에 들어가서는 황문시랑이 되었고, 199년에는 상서우복야가 되었다.[1] 조조의 승상군사 참여, 관내후 임명, 호조연으로의 전임 등을 거쳤다. 조비가 위왕이 되었을 때는 산기상시, 황제가 되었을 때는 안국정후에 봉해졌다.

위진은 한 헌제의 선양 의미를 분명히 하고 한조의 미덕을 칭송했다. 상서, 시중, 이부상서로 전임되었으며, 조예 즉위 후에는 강향후에 봉해지고 상서우복야가 되었다. 관리 선발에 있어서 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제갈량의 침입 후에는 정촉장군, 가절, 도독제군사가 되었다. 장안에 도착했을 때는 제갈량이 이미 후퇴한 뒤였다. 광록대부를 더하였고, 명제의 궁전 건축에 대해 자주 간언했다.

유주자사 관구검공손연 토벌 요청에 대해, 위진은 공손씨가 3대에 걸쳐 요동을 통치하고 있어 관구검의 계획은 망령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237년 관구검은 공손연과 싸웠으나 불리하여 퇴각했다. 위진은 사공, 사도를 거쳐 정시 연간에는 장원후가 되었다. 은퇴 후에는 황제 조방으로부터 집과 특진을 받고 삼사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 사후 태위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경(敬)이다.

위진은 조조가 태자를 정하지 않고 조식을 총애했을 때, 조식 측의 결탁 권유를 거절했다. 조비조림에 대해 물었을 때 덕행을 칭찬할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조상의 상서령 제안과 구혼도 거절했다.

위진의 아들 위열은 유방의 아들 유희, 손자의 아들 손밀과 함께 '삼예'라 불렸으나, 명제는 이러한 평가를 경박한 풍조로 여겨 위열을 면직시켰다. 위열은 아버지의 뒤를 잇고, 264년부터 265년까지 광록훈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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