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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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을미 전쟁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대만이 일본의 지배하에 놓이자, 대만 중부 지역 유력 인사들이 대만 민주국을 선포하고 일본에 저항한 사건이다. 대만 민주국은 대중적 지지 부족과 국제 사회의 외면으로 인해 1주일 만에 멸망했다. 이후 일본군은 대만을 침략하여 주요 전투를 벌였고, 대만 저항 운동을 진압했다. 일본은 대만을 통치하며 '채찍과 당근' 정책을 사용했고, 일본군과 대만 게릴라 부대 간의 전투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을미 전쟁은 청일 전쟁의 일부인지 별개의 전쟁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으며, 다양한 연구와 평가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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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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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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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 제1차 청일 전쟁 |
원인 | 시모노세키 조약 |
날짜 | 1895년 5월 29일 – 1895년 10월 21일 |
장소 | 타이완 및 펑후 제도 |
결과 | 일본의 승리 |
상세 결과 | 포르모사 공화국의 5개월간의 저항 붕괴 일본의 타이완 병합 |
교전 세력 | |
교전국 2 | 포르모사 공화국 지역 민병대 |
지휘관 및 지도자 | |
일본 제국 | 가바야마 스케노리 아리치 시나노조 노기 마레스케 기타시라카와 요시히사 친왕 (전투 중 사망) 후시미 사다나루 친왕 히시지마 요시테루 |
포르모사 공화국 | 탕징쑹 류융푸 이빙루이 추펑자 린차오둥 리빙쥔 우탕싱 리웨이이 우펑녠 양자이윈 장사오주 쉬샹 추펑양 젠다스 커톄후 린사오마오 |
병력 규모 | |
일본 제국 | 7,000명 (1895년 10월까지 37,000명으로 증가), 약 12척의 군함 |
포르모사 공화국 | 75,000명 (구 청나라 정규군, 지역 자원병 및 객가인 민병대) |
피해 규모 | |
일본 제국 | 전사: 333명 부상: 687명 질병으로 사망: 6,903명 |
포르모사 공화국 | 사망: 민간인 사망자 포함 14,000명 |
2. 배경
1894년, 청일 전쟁에서 일본은 청나라의 북양 함대를 격파하고 만주에서 청군을 물리쳤으며, 뤼순과 웨이하이웨이를 점령했다. 거의 모든 전투가 중국 북부에서 벌어졌지만, 일본은 중국 남부에 대해서도 영토적 야심을 품고 있었다.[16] 청일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일본은 대만이 평화 조약에 따라 일본에 할양될 것을 예상하고 군사적 점령을 준비했다. 1895년 3월,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일본과 청나라 간의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협상 기간 동안 중국 북부에서의 적대 행위는 중단되었지만, 대만과 펑후 제도(어업도)는 휴전 범위에서 제외되었다. 중국 본토와 대만 사이에 위치한 펑후 제도의 점령은 대만의 성공적인 점령에 필수적이었다.
당시 청나라 당국은 대만과 펑후 제도가 일본에 넘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 나중에 반환한다는 조건으로 영국에 일시적으로 할양하겠다고 제안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 제안은 영국 내각에서 논의되었으나, 영국 총리 로즈베리 경과 외무 장관 킴벌리 경은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영국이 이 제안을 거부한 이유는 대만을 받아들이면 영국이 일본과 얽힐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 아니라, 대만이 일시적이라도 영국 식민지가 되면 중국 분할이 뒤따를 것이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일본의 펑후 제도 점령은 청나라가 대만 주둔군을 증원하는 것을 막는 전략적 중요성을 지녔다. 일본은 청나라가 대만에서 성공적으로 싸우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강화 협상에서 대만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시모노세키 조약은 1895년 4월 17일에 체결되었으며, 대만과 펑후 제도의 할양을 요구하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5월 10일, 가바야마 스케노리가 대만의 초대 일본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조약 내용이 대만에 알려지자, 추펑자를 중심으로 한 대만 중부 지역의 유력 인사들은 대만이 일본에 넘어가는 것에 저항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베이징에서는 대만 저항 운동에 대한 지지가 없었다. 당시 일본에게 랴오둥 반도를 포기하도록 설득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이 진행 중이었다. 삼국 간섭으로 알려진 외교적 조치에서, 러시아, 프랑스, 독일은 1895년 4월 말 일본에 랴오둥 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5월 5일 일본은 증액된 배상금을 대가로 랴오둥 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하기로 했지만, 조약 개정 협상은 1895년 12월까지 걸렸고, 그동안 일본군은 랴오둥 반도에 주둔했다. 당시 청 조정은 일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대만에서의 저항 움직임을 외면했다. 5월 중순, 청 조정은 대만에서 일부 관리들이 일본 점령에 저항하고 청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공화국을 세우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경악했다. 대만 민주국 선포 직전, 청 조정은 이홍장의 조카이자 양자인 리징팡에게 대만으로 가서 청나라에서 일본으로 섬의 주권을 공식적으로 이양하라고 명령했다. 5월 20일, 타이베이로 칙서를 보내 탕징쑨에게 모든 청나라 관리와 장교, 군인에게 대만을 떠나라고 지시했으며, 탕징쑨 자신도 베이징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2. 1. 대만 민주국 선포
1895년 5월 25일, 타이베이에서 탕징쑨을 총통, 추펑자를 부총통, 류융푸를 대장군으로 하는 대만 민주국이 선포되었다.[17] 청나라의 대만 순무였던 탕징쑨은 대만 민주국의 초대 총통이 되었고, 10년 전 베트남 북부에서 프랑스에 승리하여 중국에서 국민 영웅이 된 은퇴한 흑기군 사령관이자 그의 오랜 친구인 류융푸는 육군 대원수로 초빙되었다. 추펑자는 민병대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일본에 저항하기 위해 섬 전역에 걸쳐 지방 민병대를 소집할 권한을 받았다. 중국 본토에서는 량광 총독 장즈둥이 대만 저항 운동을 암묵적으로 지원했고, 공화주의자들은 유럽식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불명예스러운 중국 외교관 천지통을 공화국의 외무 장관으로 임명했다. 그의 임무는 공화국을 해외에 알리는 것이었다.[38][30]대만 민주국은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른 청나라의 의무를 회피하기 위한 냉소적인 책략으로 여겨졌다.[30] 새로운 공화국의 권위 아래 행동하면서, 중국군은 기술적으로 조약 조건을 위반하지 않고 대만에서 일본에 저항할 수 있었고, 만약 성공한다면 대만은 미래에 중국의 통치로 돌아갈 수 있었다. 명목상 독립적인 공화국이 중국의 종주권을 인정했다는 것은 중요했다.[30]
삼국 간섭의 결과에 만족한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프랑스 등 열강은 대만 민주국을 승인하지 않았고, 영국도 움직이지 않았다.[13]
3. 일본군의 침공과 주요 전투
1895년 3월,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을 위한 평화 협상 동안 대만과 팽호 열도는 휴전 범위에서 제외되었다. 펑후 열도 점령은 대만 점령의 핵심이었다. 5월 29일, 일본 근위사단은 지룽 동쪽 산티아오곶에 상륙했다. 이는 을미 전쟁의 시작이었다.
6월 2일, 지룽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6월 3일 지룽을 점령했다. 청나라 지휘관들은 도주하고 수비대는 지휘관 없이 남겨졌다. 같은 날, 청나라는 기륭(基隆) 해안에서 대만의 주권을 일본에 공식 이양했다. 대만 민주국 총통 탕징쑹 등 지도부는 6월 4일 타이베이에서 도주했다.[30] 혼란 속에 구셴룽 등 지역 사업가들은 일본군을 초청, 6월 7일 일본군은 타이베이에 무혈 입성했다.[30] 6월 8일, 일본군은 단수이를 점령하고 수백 명의 중국군 항복을 받았다.
6월 14일, 가바야마 스케노리는 타이베이에서 일본 행정부 수립을 발표했다. 일본군은 지룽, 타이베이, 단수이에서 포로로 잡은 중국 군인들을 푸젠성 아모이로 송환했다.
6월 말, 일본의 침략에 대한 민간 저항이 증가했다. 6월 26일, 류영복가 타이난에서 대만 민주국 대통령직을 맡아 수도를 타이난으로 이전했다.
6월 11일, 근위사단은 타이베이를 출발, 남쪽으로 진격했다. 6월 22일, 신주를 점령했다. 신주 함락 후, 객가 민병대가 일본군에 완강히 저항했다. 6월 24일부터 26일 사이, 일본군은 십팔첨산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대규모 교전을 벌였다. 7월 10일, 일본군은 먀오리 근처 검필산 고지에서 객가 민병대와 다시 격돌했다.
일본군은 대만 게릴라의 공격에 잔혹한 보복을 가하며, 의심되는 마을 사람들을 총살하고 마을 전체를 불태웠다.
8월 6일, 근위사단은 신주를 출발, 먀오리로 진격했다. 8월 14일, 먀오리에 저항 없이 진입했다.
8월 말, 바과산 전투에서 일본군은 창화를 점령했다. 이 전투는 타이완 땅에서 벌어진 가장 큰 규모의 야전 전투였으며, 이 전투의 패배는 대만 민주국의 조기 패배를 결정지었다. 이후 일본군은 한 달간 진격을 멈추고 증원군을 기다렸다. 이 기간 동안 창화에서 말라리아가 발생, 2,000명 이상의 일본군이 사망했다.
3. 1. 타이난 전투와 대만 민주국의 멸망
류영복은 일본군이 타이난을 세 방향에서 공격할 수 있게 되자 1895년 10월 10일, 일본에게 조건부 항복을 제안했다. 그는 일본에 대항하여 무기를 든 대만인은 처벌받지 않아야 하며, 대만에 남아있는 모든 중국 군인들은 광저우 또는 샤먼으로 송환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15] 이 항복 제안은 영국 군함 HMS ''피크''를 통해 펑후 제도의 일본 본부에 전달되었고, 일본은 10월 12일 류융푸의 제안을 논의하기 위해 타이난 외항인 안핑으로 군함을 보낼 것이라고 답했다.[15] 그러나 류융푸는 배신을 두려워하여 배에 타는 것을 거부했고, 일본은 무조건 항복만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통보했다.[15]10월 20일, 류융푸는 쿨리(하급 노동자)로 변장하여 영국 상선 SS ''탈레스''를 타고 중국 본토 샤먼으로 도주했다. 이 배는 일본 순양함 ''야에야마''에 의해 추격당했고, 일본 수병들이 배에 올라 류융푸를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그와 그의 동료 몇 명을 의심스러운 자들로 체포했다. 영국 선장의 항의로 류융푸를 포함한 구금된 사람들은 석방되었다. 아리치 시나노조는 영국의 항의로 인해 사임해야 했다.[15]
10월 21일, 타이난은 일본에 항복했다. 이로써 대만에서의 저항은 사실상 종식되었고, 일본 통치하의 대만 시대가 시작되었다.[15] 타이난 함락 이후, 류융푸의 잔당은 도시를 배회했고, 외국인들은 그들이 약탈을 시작할까 두려워 무기를 내려놓게 했다. 두 명의 영국 선교사 퍼거슨 씨와 바클레이는 중국인 거주자들의 편지를 가지고 일본군 본부로 갔다. 노기 마레스케는 10월 21일 도시에 입성했고, 나머지 군대도 곧 뒤따랐다.[15]
4. 대만 저항 운동의 전개와 진압
1895년 6월 14일, 가바야마 제독이 타이베이에 도착하여 일본 행정부 수립을 발표하면서, 일본의 대만 점령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그러나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초기 예상과 달리, 대만 각지에서는 일본의 침략에 대한 저항이 거세게 일어났다.
특히, 신주 함락 이후 현지에서 모집된 대만 군대가 전투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zh, zh, zh이 이끄는 객가 민병대는 일본군의 진격을 끈질기게 막아섰다. 6월 24일부터 26일까지 일본군은 안핑진으로 돌아가 zh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격렬한 전투를 벌여야 했다. 비록 일본군이 우세한 훈련과 무기를 바탕으로 승리했지만, 대만군은 며칠 동안 신주 근처에서 저항을 계속했다.[2]
7월 10일, 일본군은 먀오리 근처 검필산 고지에서 다시 객가 민병대와 맞붙었다. 대만군은 참호를 구축했지만 현대식 포병이 없어 불리한 상황이었다. 일본군은 양쪽에서 공격하여 대만군을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11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 대만군은 200명의 시신이 수습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은 110명의 포로를 잡았는데, 그중에는 19세의 민병대 지도자 장사오쭈도 포함되어 있었다. 장사오쭈는 7월 11일, 생 아편을 먹고 자살했다. 이후 우탕싱이 객가 민병대의 지휘권을 이어받아 7월 23일 먀오리로 후퇴했다.[2]
대만 민병대가 전선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동안, 대만 반란군은 일본군 후방의 타이베이와 신주 사이의 길에서 고립된 연락병과 소규모 일본군 부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종종 일본군 부대가 접근했을 때 항복 의사를 밝힌 마을 사람들이었고, 외국 관찰자들은 이들의 백기 악용을 비난했다.[2]
일본군은 이러한 공격에 대해 잔혹한 보복을 가했다. 의심되는 마을 사람들을 총살하고 마을 전체를 불태우는 등 강경하게 대응했다.[4] 가장 성공적인 반란군 공격 중 하나는 7월 11일에 발생했다. 타이베이에서 토코함으로 배로 물자를 운송하던 35명의 일본 보병대가 매복 공격을 받아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은 반란군을 추격하여 7월 12일 롱탐포 전투에서 격파했지만, 대만인들의 저항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2]
7월 마지막 주 동안 일본군은 타이베이, 토코함, 하이소안카우에서 두 차례에 걸쳐 조직적인 소탕 작전을 펼쳤다. 7월 22일과 23일에는 삼각갱(오늘날의 산샤)에서, 8월 2일에는 신푸에서 대규모 반란군과 교전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2]
마지막 남은 대만 민병대는 1895년 11월 26일 창싱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 전투는 불타는 마을 전투로도 알려져 있는데, 일본군은 하카족 민병대와 zh이 지휘하는 무장 하카족 마을 사람들의 저항에 맞서 창싱 마을을 불태우고 공격했다. 이 패배 이후 살아남은 대만인들은 흩어졌다.
이후에도 1902년까지 게릴라적인 저항이 계속되었으며, 특히 고산족의 저항은 1933년까지 이어졌다.
4. 1. 일본의 통치 정책과 사회 변화
가바야마 제독은 1895년 6월 14일 타이베이에 도착하여 대만에서 일본 행정부 수립을 발표했다. 일본군은 북부 대만을 장악한 후, 지룽, 타이베이, 단수이 등지에서 포로로 잡은 수천 명의 중국 군인들을 본국으로 송환했다. 이들은 타이완 해협을 건너 푸젠성의 아모이 항구로 보내졌다.[30]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대만과 펑후 제도에 대한 권리를 획득했다.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에 의해 청일 전쟁이 종결되고,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정식으로 대만의 할양을 받았다. 6월 2일, 이징팡과 가바야마 총독은 대만 수수 절차를 진행했고, 일본은 대만을 정식으로 영유했다.(일본 통치 시대의 대만)[13]
6월 17일, 일본 측은 타이베이에서 대만총독부 시정식을 거행했고[14], 남쪽으로 진격했지만 각지에서 민병의 저항이 있었다. 일본군의 타이완 침공으로 인한 전투 사상자는 비교적 적었다. 장교와 사병 164명이 사망하고 515명이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질병으로 인한 사상자가 훨씬 많았다. 일본 측 자료에 따르면, 4,642명의 병사가 타이완과 펑후 제도에서 질병으로 사망했다.[7]

일본은 대만 통치 초기, '채찍과 당근' 정책을 사용했다. 항복하는 반군에게는 사면을 약속했지만, 저항하는 세력은 철저히 소탕했다. 또한, 게릴라를 숨겨준 것으로 의심되는 마을에는 잔혹한 보복을 가했다.[4]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군은 타이베이 시린 교외에서 일본인 교사를 살해한 하카족에 대한 보복으로 하카족 마을 주민들을 대량 학살하기도 했다.[5]
일본을 지원했던 사업가들은 일본 통치 하에서 번영했다. 1895년 6월 초 일본군을 타이베이로 초청했던 구셴룽은 대만에서 독점적인 사업권을 부여받아 가장 부유한 대만인이 되었다. 그의 아들 구첸푸는 재산을 물려받아 구 그룹을 설립했다.[30]
전 대만 총독부 산업국 국장이었던 니토베 이나조는 대만 통치 초기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섬이 평정되었지만 아무도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우리는 사람들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했다. 일본인은 대만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대만인은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더 적었다. 당연히 상호 불신과 의심이 있었다."[6]
1899년(메이지 32년)에는 야스쿠니 신사에 을미전쟁 전사자와 병사자를 합사하기 위한 특지가 내려져 추가 합사되었다. 이는 일본군의 병사자 처우를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33] 또한, 황족으로서는 최초로 외지에서 순직한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을 주 제신으로 하는 신사가 대만 각지에 많이 건립되었다. 타이베이에는 타이완 신사(타이완 신궁), 서거지에는 타이난 신사가 건립되었다. 이들 요시히사 친왕을 모신 60개의 신사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대만의 주권을 회복한 중화민국 정부에 의해 모두 파괴되었다. 또한, 대만총독부가 개청한 6월 17일은 '대만시정기념일'로 지정되어 일제강점기 대만에서 중요한 축제일로 여겨졌다.
5. 역사적 평가와 논쟁
을미 전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논쟁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이 사건을 청일 전쟁의 일부로 볼 것인지, 아니면 별개의 독립된 전쟁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존재한다.[36]
동아시아사적 관점에서, '''일대 전쟁'''(닛타이센소)이라는 용어가 일부에서 사용되기도 한다. 이 용어는 1995년 "청일 전쟁 100주년 국제 심포지엄"에서 히야마 유키오가 처음 사용했다.[46] 『청일 전쟁 비장 사진이 밝히는 진실』[47]에서는 일본군 사망자 절반을 냈다는 규모, 대본영의 관여 방식, 전투 주체가 청나라 군대가 아닌 대만 민주국 및 의용병으로 옮겨간 점 등을 이유로 '일대 전쟁' 용어를 사용한다. 고마고메 타케시도 이 용어를 채택했다.[48] 그러나 '일대 전쟁' 외에도 대만 정복 전쟁, 대만 영유 전쟁, 대만 식민지 전쟁, 항일 운동 등 다양한 용어가 존재하며, 내용과 사용 시기 등에 대한 이견도 있다.
NHK는 2009년 4월 5일 NHK 스페셜 시리즈 「JAPAN 데뷔」 제1회에서 이 전쟁을 '일대 전쟁'으로 표현했다. 이에 대해 산케이 신문은 프로그램에 출연한 대만인의 비판, 사망자 대부분이 병사자였다는 사실을 전달하지 않은 점, 국립국회도서관 논문 검색에서 해당 단어가 검색되지 않는 점 등을 비판했다.[49][50] 일본 이등휘우의회 관계자는 "'일대 전쟁'은 헤이세이 시대에 만들어진 용어이며, 전쟁의 정의도 없는 치안 회복을 위한 소탕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51] NHK는 히야마 유키오가 1995년부터 사용한 단어[47]이기 때문에 사용했다고 설명[52]했지만, 프로그램 출연진과 시청자로부터 집단 소송을 당했다.[53]
5. 1. 을미사변과 한국의 관계
청일 전쟁의 일부로 볼 것인지, 별개의 전쟁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갈리고 있다.[36]일본에서의 청일 전쟁 연구에서 대만은 중시되지 않았지만, 오에 시노부의 발표 이후[42], 청일 전쟁 전체에서 대만 문제를 다루는 문헌이 급속히 증가했다. 오에는 일본 최초의 식민지 전쟁임을 강조하고, 1915년까지의 대만 식민지 전쟁 중 1895년 3월까지를 대만 정복 전쟁으로 규정했다.[43] 현재 많은 연구자가 이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21][31][44][45]
6. 기념물 및 문화적 영향
1895는 1895년 일본과 타이완 저항 운동 간의 전쟁을 묘사한 객가어 영화로, 2008년 11월에 개봉되었다.
일본 체신성은 1896년(메이지 29년) 8월 1일 대만 타이난에서 병사한 북백천궁 능구 친왕의 초상을 그린 기념 우표를 발행했다. 이 우표에는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의 초상도 함께 그려져 있었다. 우표 자체에는 기념 우표라는 명칭이 없지만, 당시 신문[34]에서는 "메이지 27·28년 전역 전승 기념"이라고 소개되었으며, 현재는 사쿠라 일본 우표 카탈로그 등에서 "청일 전쟁 승리 기념" 우표로 소개되고 있다.
대만총독부는 능구 친왕이 상륙한 아오디 지역에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북백천궁 정토 기념비"를 건설하여, 일본에 의한 대만 통치의 기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대만의 주권을 되찾은 중화민국 정부에 의해 파괴되었고, 그 자리에는 1975년에 "항일 기념비"가 건설되었다.[35] 2005년에 기념비의 일부가 복원되었지만, "북백천궁 정토 기념비"의 비문은 제거된 상태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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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Data in English is under preparation] 附録・附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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蛮地を近代化した日本人の神技*極めて短い時間で、他の民族が出来なかった「険悪な野蛮地を近代化」に成功したのは、感嘆すべき神技!*すべての殖民国家の典範である。SAVAGE ISLAND OF FORMOSA TRANSFORMED BY JAPANESE; Wonders Worked in a Few Years With a People That Others Had Failed to Subdue -- A Lesson for Other Colonizing Nations.
http://ritouki-ai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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土着化か、あるいは漢化か? ーー「漢族系台湾人」のエスニシティについてー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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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清戦争における台湾作戦:戦争か治安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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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日清戦争と東アジア世界の変容
ゆまに書房
[31]
서적
日清戦争
吉川弘文館
[32]
논문
下級兵士がみた植民地戦争 -台湾における「生蕃討伐」と加藤洞源-
https://hdl.handle.n[...]
早稲田大学アジア太平洋研究センター出版・編集委員会
2007-03
[33]
서적
靖国神社
岩波書店
[34]
뉴스
東京朝日新聞
1896-06-14
[35]
문서
台湾小事典
中国書店
[36]
서적
Taiwan Studies in Chinease Local History
Columbia University Press
[37]
서적
台湾民主国の研究
東京大学出版会
[38]
서적
日本統治下の台湾 : 抵抗と弾圧
東京大学出版会
[39]
서적
図説 台湾の歴史
平凡社
[40]
서적
中日甲午戦争論集
歴史数学月刊社
[41]
간행물
植民地下台湾の弾圧と抵抗:日本植民地統治と台湾人の政治的抵抗文化
https://hdl.handle.n[...]
札幌学院大学
[42]
서적
日露戦争と日本軍隊
立風書房
[43]
서적
帝国統治の構造
岩波書店
[44]
간행물
台湾の植民地化と郷土兵
[45]
간행물
台湾植民地戦争における憲兵の生活環境 : 明治28~36年(1895-1903)高柳彌平『陣中日誌』より
http://id.nii.ac.jp/[...]
京都府立大学学術報告委員会
2004-12
[46]
서적
日清戦争と東アジア世界の変容
ゆまに書房
[47]
서적
日清戦争 秘蔵写真が明かす真実
講談社
[48]
서적
東アジア国際政治史
名古屋大学出版会
[49]
뉴스
【検証】NHKスペシャル 台湾統治めぐり「一面的」 (1/3ページ)
http://sankei.jp.msn[...]
産経デジタル
2009-05-03
[50]
문서
NDL-OPACは全文検索ではないので、本や論文の題名や件名に使われず、章題や節題にある場合などはヒットしない。
[51]
뉴스
【NHK提訴】JAPANデビュー どこが問題になっているのか (1/2ページ)
http://sankei.jp.msn[...]
産経デジタル
2009-06-25
[52]
웹사이트
シリーズ・JAPANデビュー 第1回「アジアの“一等国”」に関しての説明
http://www.nhk.or.jp[...]
2009-08-19
[53]
뉴스
パイワン人も提訴、原告1万人突破 NHK台湾特集訴訟
2009-08-12
[54]
웹사이트
国立公文書館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内閣より 在台湾文武諸官員外征従軍者として取扱の件」
http://www.jacar.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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