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현 (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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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의현(臨濟義玄)은 당나라 시대의 승려로, 선종의 한 분파인 임제종을 개창했다. 20세에 출가하여 불교를 공부했으나 선종으로 전향하여 황벽 희운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황벽의 문하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임제는 '할'과 '방'으로 대표되는 파격적인 가르침을 통해 제자들의 깨달음을 이끌었으며, '무위진인' 사상을 설파했다. 그의 가르침은 『임제록』으로 편찬되어 후대에 전해졌고, 임제종은 한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선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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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현 (당나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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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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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임제 의현 |
로마자 표기 | Linji Yixuan (린지 이쉬안) |
일본어 표기 | 린자이 기겐 |
존칭 | 임제 장군 |
출생 | 미상 |
사망 | 함통 7년 4월 10일 또는 동 8년 1월 10일 (? - 866년5월 27일 또는 867년2월 18일) |
시호 | 혜조 선사 |
출생지 | 조주 남화현 (산둥성하저시둥밍현) |
입적지 | 미상 |
법맥 | |
종파 | 임제종 |
사찰 | 정정현임제원 |
스승 | 황벽 희운 |
제자 | 흥화 존장 삼성 혜연 |
저서 | |
저서 | 임제 혜조 선사 어록(어록) |
2. 생애
당나라 선종의 승려인 임제 의현(臨濟義玄)은 원화 연간(806년–820년)에 조주(曹州) 난화(南華, 현재의 산둥성 옌저우시)에서 형(邢)씨 가문에서 태어났다.[1][2]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20세에 출가하여 의현(義玄)이라는 법명을 얻었다.[3] 처음에는 계율(비나야)과 경론(경과 샤스트라)을 열심히 공부했으며[1], 특히 화엄과 유식 사상에 정통했던 것으로 보인다.[4] 그러나 이러한 학문적 접근이 세상을 구제하는 방편일 뿐 근본적인 깨달음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선종으로 방향을 바꾸었다.[3][1]
이후 강남으로 가서 선승 황벽 희운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1] 황벽 문하에서 수행하던 중, 불법의 핵심에 대해 세 번 질문했으나 세 번 모두 황벽에게 몽둥이로 맞는 경험을 한다. 이는 '황벽삼타(黃檗三打)'라 불리는 유명한 일화로, 이후 임제는 황벽의 소개로 대우 화상을 만나 결정적인 깨달음을 얻게 된다.[3][1] (자세한 내용은 황벽삼타 문단 참고)
대오(大悟) 이후, 851년경 하북 진정부(현 정딩현)로 가서 후퉈강 가에 있는 작은 사찰에 머물렀다. 이 사찰은 강가에 임해 있다는 뜻에서 임제원(臨濟院)이라 불렸고, 그의 호 '임제'는 여기서 유래했다.[1] 임제는 당시 유력 군벌이었던 성덕군 절도사 왕소의(王紹懿)[3] 또는 그 아들의 후원을 받으며[1] 이곳에서 약 10년간 머물며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의 문하에서 흥화존장, 삼성혜연 등이 배출되었으며, 이들은 훗날 임제종을 형성하는 중심 인물이 되었다.[3][1] (자세한 내용은 임제종 개창 문단 참고)
임제의 가르침은 마조도일에서 시작된 홍주종의 선풍을 계승하여 더욱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큰 소리로 꾸짖는 듯한 '갈(喝)'을 자주 사용하여 제자들을 지도하는 엄격하고 강렬한 가풍으로 유명했으며, 이는 덕산선감의 '방'(棒, 몽둥이)과 함께 언급되며 '임제장군'(臨濟將軍)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3]
당 의종 함통 8년(867년) 1월 10일, 임제는 병 없이 단정히 앉은 자세로 제자 삼성혜연과 문답을 나눈 뒤 조용히 입적하였다.[3][1] (자세한 내용은 입적 문단 참고)
2. 1. 황벽삼타(黃檗三打)
임제종의 개창자인 임제 의현은 대오하기 전, 황벽 희운 선사의 문하에서 묵묵히 좌선 수행에만 힘쓰며 3년의 시간을 보냈다.어느 날, 제자들 중 가장 지위가 높은 수좌(首座) 화상이 임제에게 다가와 "지금까지 황벽 노사께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임제는 "무엇을 여쭈어야 할지 몰라 가르침을 청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솔직히 답했다. 그러자 수좌는 "어찌하여 노사께 '불법(佛法)의 궁극적인 뜻이 무엇입니까?' 하고 여쭙지 않는가?"라며 질문할 것을 권했다.
임제는 수좌의 조언대로 황벽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그러나 임제가 질문을 마치기도 전에 황벽은 아무 말 없이 몽둥이로 임제를 서른 번 내리쳤다. 임제가 돌아오자 수좌는 "어떠하였는가?"라고 물었고, 임제는 맞기만 했다고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수좌는 임제에게 다시 가서 같은 질문을 하라고 격려했다. 임제는 다시 황벽을 찾아가 같은 질문을 했지만, 또다시 몽둥이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세 번에 걸쳐 황벽에게 질문하고 세 번 모두 혹독하게 매를 맞자, 임제는 크게 좌절했다. 그는 자신에게는 더 이상 선을 공부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황벽산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황벽을 찾아간 임제에게 황벽은 뜻밖의 지시를 내렸다. "다른 곳으로 갈 필요 없다. 고안(高安) 강가에 계시는 대우(大愚) 화상을 찾아가 보아라."
임제는 황벽의 말에 따라 대우 화상을 찾아가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하며 "도대체 저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던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대우는 웃으며 말했다. "황벽 노사께서는 마치 할머니가 손자를 아끼듯 자비로운 마음으로 너를 위해 몸소 가르침을 주셨거늘, 그 깊은 뜻을 모르고 여기까지 와서 잘못이 있었는지 묻다니!" 이 한마디에 임제는 홀연히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을 얻은 임제는 대우에게 "알고 보니 황벽의 불법이라는 것도 별것 아니군요!"라고 일부러 도발적인 말을 던졌다. 그러자 대우는 임제의 멱살을 잡고 "이 오줌싸개 같은 놈아! 조금 전까지는 잘못이 있었는지 모르겠다며 울상을 짓더니, 이제 와서 황벽의 불법이 별것 아니라고? 대체 무엇을 깨달았다는 것이냐? 어서 말해보아라!" 하고 다그쳤다. 임제는 말없이 대우의 옆구리를 세 번 주먹으로 쳤다. 임제의 눈빛과 행동에서 그의 깨달음이 진실됨을 간파한 대우는 멱살을 잡았던 손을 놓고 말했다. "너의 스승은 황벽 화상이시다. 내가 더 관여할 바가 아니니 어서 돌아가거라!"
임제는 다시 황벽에게 돌아가 대우와의 만남과 깨달음의 과정을 보고했다. 보고를 들은 황벽은 "그 녀석(대우)을 만나면 한 방 먹여주고 싶구나"라고 말했다. 임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만나기를 기다릴 것이 무엇 있겠습니까? 지금 바로 맞으시면 됩니다!"라고 외치며 황벽의 뺨을 힘껏 후려쳤다. 뺨을 맞은 황벽은 임제의 경지를 확인하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 미친놈 보게나! 감히 내 앞에서 호랑이 수염을 건드리다니!" 임제는 이에 즉시 큰 소리로 할(喝)을 했다. 황벽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시자에게 명했다. "시자여, 이 미치광이를 선당(禪堂)으로 데려가거라." 이는 임제의 깨달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인가(印可)의 표시였다. 이 일련의 사건을 '''황벽삼타'''(黃檗三打)라고 부른다.
2. 2. 임제종 개창
대오 이후, 임제는 하북의 유력 군벌이었던 성덕군 절도사 왕소의(王紹懿, 선종 기록에서는 왕상시(王常侍)라고도 함)의 지원을 받아 진정부의 임제원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흥화존장을 비롯한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며 독자적인 가르침을 펼쳤고, 그의 문하(門下)는 훗날 임제종으로 불리게 되었다.임제종의 종풍(宗風)은 마조도일에서 시작된 홍주종의 선풍(禪風)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국 선종의 정점에 이르렀다고 평가받는다. 임제의 가르침은 "갈"(喝, 고함)을 자주 사용하는 매우 엄격하고 강렬한 방식이 특징이었다. 이는 덕산선감의 "방"(棒, 몽둥이)과 함께 언급되며, 이러한 격렬함 때문에 "임제장군"(臨濟將軍)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임제의 가르침과 행적은 제자인 삼성혜연 등에 의해 임제록으로 기록되어 후대에 전해졌다.
당 의종 함통 8년(867년) 1월 10일, 임제는 제자 삼성혜연에게 법을 잘 지킬 것을 당부한 뒤 단정히 앉은 자세로 입적했다고 전해진다.
2. 3. 입적
당 의종 함통 8년(867년) 1월 10일, 임제는 제자 삼성혜연을 곁으로 불러 마지막 가르침을 남겼다. 그는 "내가 죽은 뒤에도 정법안장(正法眼藏, 부처가 전한 높은 가르침)을 없애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혜연이 "어찌 스승님의 정법안장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하자, 임제는 다시 "훗날 사람들이 너에게 불법(佛法)에 대해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혜연은 큰 소리로 한 번 '갈'(喝, 꾸짖는 듯한 외침)을 하였다. 이를 들은 임제는 "나의 정법안장이 이런 어리석은 자에게서 망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라고 탄식하며, 그 자리에서 단정히 앉은 자세로 천화(遷化, 승려의 죽음을 이르는 말)하였다고 전해진다.3. 사상
『임제록』은 임제를 파격적인 언어를 사용한 혁신적인 스승으로 묘사한다. 그는 제자들이 부처, 조사(祖師), 보살, 수행 단계, 깨달음의 경지와 같은 특정 개념에 집착하는 경향을 깨뜨리기 위해,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던 일상적인 중국어로 충격적인 표현을 사용했다.[3] 그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3]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임제의 언어는 다소 극단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이는 부처, 보리(菩提), 열반, 법, 그리고 그 외 다른 불교 개념들에 대해 고정된 생각을 갖거나 집착하는 것 자체를 일종의 망상으로 여기는 그의 태도를 반영한다. 불교학자 버턴 왓슨은 임제의 가르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임제의 설법은 거의 지겹도록 반복되면서, 그의 추종자들이 목표와 노력, 부처와 조사에 대한 모든 말들을 그들의 시야를 흐리고 이해의 길을 막도록 허용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모든 말과 개념은 외부적이고 불필요한 가정이며, 그것에 대한 집착은 감각적인 만족이나 물질적 이득과 같은 그 어떤 거친 목적에 대한 집착과 마찬가지로 망상이고 장애물이다. 그는 그들에게 모든 외부적인 관심사를 제쳐두고 모든 존재에게 내재된 불성이 있는 내면을 바라보라고 거듭 촉구한다.[3]
이러한 생각, 즉 이상적인 상태에 대한 추구조차 미묘한 집착이 될 수 있다는 관점은 이미 초기 선종 자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신회는 깨달음이나 공(空) 등을 추구하는 마음을 '미묘한 거짓'이라 지적했고,[4] 임제의 스승인 황벽 역시 부처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그 부처에게 방해받는 것이라고 말했다.[5][6] 임제는 이러한 선종의 흐름 속에서 더욱 철저하게 외부의 권위나 개념에 대한 집착을 타파하고, 자기 내면의 본성을 직시할 것을 강조하였다.
3. 1. 무위진인(無位眞人)
임제는 선 수행자들이 영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여 주변 환경에 쉽게 흔들리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는 수행자들이 경전의 구절에 얽매이거나 '범부(凡夫)' 또는 '성인(聖人)'과 같은 단어에 얽매이는 것을 비판하며, 이는 여전히 무언가에 의존하는 태도라고 지적했다. 임제는 부처, 보살, 선종의 조사(祖師)들에게 의존하기보다, 스스로 도에 의존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법문을 듣는 그대들은,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는 도인(道人)이라면 부처의 어머니이니라. 그러므로 부처는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는 경계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이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음에 깨어날 수 있다면, 붙잡을 부처는 없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이런 방식으로 사물을 볼 수 있다면, 이것이 진실하고 올바른 이해이다.
임제는 또한 모든 존재에게 내재된 참된 사람을 "고독한 밝음"(孤明)이라고 표현했다. 이 참된 사람은 외부 상황이나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존재이다.
:도(道)의 수행자들이여, 지금 내 눈앞의 이 고독한 밝음, 나를 분명히 듣고 있는 이 사람은 어떤 점에서도 막힘이 없이 시방(十方)을 관통하며 삼계(三界)에서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행한다. 어떤 환경에 직면하더라도, 그 특성과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흔들리거나 빗나갈 수 없다.[8]
이와 비슷하게 임제는 마음을 형체가 없으면서 모든 방향으로 통하는 "하나의 밝은 정수"(一精明)로 묘사했다.[9] 이 마음은 형체가 없기에 모든 곳에서 자유로우며, 따라서 무언가를 찾아 헤맬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10] 임제는 제자들에게 밖으로 찾으려 하지 말고 멈춰 서서 자기 자신을 깊이 살펴보라고 조언했다.[11]
임제가 이러한 참된 사람을 가리키는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무위진인(無位眞人)"이다. 이는 '어떠한 지위(위치)에도 매이지 않은 참된 사람'을 의미하며, 여러 초기 자료에서 임제의 핵심 가르침으로 언급된다. 조당집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어느 날, 조사(임제)가 대중에게 말했다. "나 산승(山僧)이 너희에게 분명히 말하겠다. 오온(五蘊)의 몸 안에는 무위의 진인이 항상 존재하며, 머리카락 한 올만큼도 멀리 있지 않다. 어째서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가?"
:
:그때 한 승려가 물었다. "이 무위의 진인이란 무엇입니까?"
:
:조사(임제)가 그를 치고 말했다. "무위의 진인이라니, 참으로 깨끗하지 못한 것이다."
전등록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임제는 "너희 붉은 살덩어리(肉團) 안에는 무위의 진인이 있어 끊임없이 너희 얼굴의 구멍으로 드나든다"고 말했다. 한 승려가 그 진인이 누구인지 묻자, 임제는 "무위의 진인이란, 마른 똥 막대기 같은 것이다!" (乾屎橛, 간시궐)라고 답했다.[12][13]
이처럼 임제는 부처나 깨달음과 같은 특정 개념이나 지위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고, 모든 사람 안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참된 자신(무위진인)을 깨달으라고 강조했다. 이는 외부의 권위나 형식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내면에서 진리를 찾으려는 선종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3. 2.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임제는 파격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가르침을 전한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3] 그는 사람들이 부처, 조사, 보살, 수행 단계, 깨달음의 경지와 같은 개념에 얽매이는 것을 깨뜨리기 위해, 당시의 속어를 사용하며 충격적인 표현을 구사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3]라는 그의 유명한 말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임제는 부처나 열반, 법, 공과 같은 중요한 불교 개념에 집착하는 것조차 일종의 망상이며 깨달음의 장애물이라고 보았다. 버턴 왓슨은 임제가 제자들에게 외부의 개념이나 목표에 얽매이지 말고, 모든 존재에게 본래 갖추어져 있는 불성을 보기 위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라고 거듭 강조했다고 설명한다.[3]이러한 생각은 초기 선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신회는 세속적인 욕망뿐만 아니라 깨달음이나 공, 청정함 같은 이상적인 상태를 추구하는 것조차 미묘한 집착("미묘한 허위")이라고 지적했다.[4] 황벽 역시 부처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그 부처에게 방해받는 것이라 했고, ''혈맥론''에서는 부처를 숭배하는 행위를 외형에 집착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5][6]
임제는 선 수행자들이 영적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여 주변 환경에 쉽게 흔들리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는 사람들이 '평범한 사람'이나 '성인'과 같은 말이나 경전 구절에 얽매이는 것을 비판하며, 이는 여전히 무언가에 의존하는 태도라고 지적했다. 임제는 제자들에게 부처나 보살, 또는 선종의 조사들에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아무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사람'(도인, 道人)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 법문을 듣는 그대들은,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는 도인(道人)이라면 부처의 어머니이니라. 그러므로 부처는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는 경계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이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음에 깨어날 수 있다면, 붙잡을 부처는 없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이런 방식으로 사물을 볼 수 있다면, 이것이 진실하고 올바른 이해이다.
임제는 이렇게 외부 요인에 흔들리지 않는 참된 사람을 "고독한 밝음"(孤明)이라고 불렀다.[8] 이 사람은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흔들리거나 길을 잃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하며, 모든 방향을 꿰뚫어 본다고 설명했다.
> 도(道)의 수행자들이여, 지금 내 눈앞의 이 고독한 밝음, 나를 분명히 듣고 있는 이 사람은 어떤 점에서도 막힘이 없이 시방(十方)을 관통하며 삼계(三界)에서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행한다. 어떤 환경에 직면하더라도, 그 특성과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흔들리거나 빗나갈 수 없다.
또한 임제는 마음을 형체가 없으면서 모든 방향으로 통하는 "하나의 밝은 정수"(一精明)로 묘사했다.[9] 마음은 형체가 없기 때문에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따라서 무언가를 찾아 밖으로 헤맬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10] 그는 제자들에게 밖으로 구하지 말고 멈춰 서서 자기 자신을 깊이 살펴보라고 조언했다.[11]
임제가 참된 사람을 가리키는 또 다른 중요한 개념은 "무위(無位)의 진인"(無位真人)이다. 이는 '어떤 지위나 위치에도 매이지 않는 참된 사람'을 의미하며, 임제의 핵심 가르침 중 하나로 여겨진다. 초기 자료인 ''조당집''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 어느 날, 조사(임제)가 대중에게 말했다. "나 산승(山僧)이 너희에게 분명히 말하겠다. 오온의 몸 안에는 무위의 진인이 항상 존재하며, 머리카락 한 올만큼도 멀리 있지 않다. 어째서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가?"
>
> 그때 한 승려가 물었다. "이 무위의 진인이란 무엇입니까?"
>
> 조사(임제)가 그를 치고 말했다. "무위의 진인이라니, 참으로 깨끗하지 못한 것이다."
다른 기록인 ''전등록''에서는 임제가 "너희 붉은 살덩어리 안에는 무위의 진인이 있어 끊임없이 너희 얼굴의 구멍으로 들어가고 나온다"고 말하며, 그 진인이 누구냐는 질문에 "무위의 진인이란, 마른 똥덩어리와 같은 것이다!"라고 대답하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12][13]
이러한 가르침들은 모두 외부의 권위나 형식적인 틀, 고정된 개념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자기 자신 안에서 '주인'이 되어(隨處作主), 지금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참된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立處皆眞)는 임제의 핵심 사상을 보여준다. 이는 스스로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힘과 지혜를 믿고 따르는 주체적인 삶의 태도를 강조하는 것이다.
3. 3. 믿음(信) 강조
임제에 따르면 선 수행자들이 영적인 진전을 이루지 못하는 주된 이유는 자신에 대한 믿음(信)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는 수행자들이 주변 환경에 쉽게 흔들리고[3], 경전의 구절이나 '범부(凡夫)', '성인(聖人)'과 같은 개념에 얽매이는 것을 지적했다. 임제는 이러한 것들에 의존하는 태도 자체가 문제라고 보았다.[3]임제는 청중들에게 부처나 보살, 또는 선종의 조사(祖師)들에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는 도인(道人)'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법문을 듣는 그대들은,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는 도인(道人)이라면 부처의 어머니이니라. 그러므로 부처는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는 경계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이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음에 깨어날 수 있다면, 붙잡을 부처는 없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이런 방식으로 사물을 볼 수 있다면, 이것이 진실하고 올바른 이해이다.[3]
또한 임제는 참된 자아를 깨닫기 위해 특정 방법이나 수행에 의존하는 것을 비판했다. 그는 종교적 수행을 하는 것 자체가 업을 만들어 생사(生死)의 굴레에 묶이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진정한 사람', 즉 '지금 이 순간 법을 듣고 있는 바로 이 사람'은 어떤 꾸밈이나 수행도 필요 없는 존재라고 설명했다.[3] 임제는 수행에 의존하는 대신, 자신의 본성에 대한 믿음을 가질 것을 강조했다.
> "지금 당신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이 존재를 믿으십시오. 이 존재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3]
불교학자 로버트 버스웰(Robert Buswell Jr.)에 따르면, 임제가 말한 '믿음'은 맹목적인 수용이 아니라, 이미 깨달아 있는 본성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고유한 능력을 의미한다. 즉, 믿음은 마음 본질의 '내재적 기능'과 같다는 것이다.[15] 이는 후대 임제종의 승려인 대혜종고가 믿음보다 '의심'을 수행의 중요한 방편으로 삼았던 것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16]
4. 일화
임제의 가르침과 관련된 여러 일화들은 그의 파격적이고 자유분방한 선풍(禪風)을 잘 보여준다. 그는 기존의 권위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깨달음의 본질을 직접적으로 추구할 것을 강조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어록에 잘 나타나 있다.
> 너희들은 조불(祖佛)을 만나고 싶으냐? 지금 내 앞에서 설법을 듣고 있는 너희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수행자가 그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밖으로 쫓아다니며 구하는 것이다. 설령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문자상의 것이며, 결코 살아있는 달마의 뜻이 아니다.
> 부처를 만나거든 부처를 죽여라. 조사를 만나거든 조사를 죽여라. 나한을 만나거든 나한을 죽여라. 부모를 만나거든 부모를 죽여라. 친척을 만나거든 친척을 죽여라. 비로소 해탈을 얻으리라.
이러한 말들은 외부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안의 불성(佛性)을 직접 깨달아야 한다는 임제의 핵심 사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또한, 임제는 제자인 삼성혜연이 편찬한 『임제록』을 통해 많은 일화를 남겼다. 특히 풍광승(風狂僧)으로 알려진 보화(普化)와의 여러 이야기는 임제의 선(禪) 사상과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보화와의 구체적인 일화는 하위 문단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4. 1. 보화와의 일화
『임제록』의 「감변(勘弁)」 편에 등장하는 선승 '''보화'''(普化, 생몰년 미상)는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여겨지며, 임제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의 언행에는 기이한 점이 많아 풍광승(風狂僧)이나 신이승(神異僧)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보화종은 보화를 시조로 하는 종파이다.- 어느 날, 임제는 보화와 함께 신자의 집에 재(齋, 법회의 식사) 초대를 받았다. 임제가 "한 가닥 머리카락이 큰 바다를 삼키고, 작은 겨자씨 하나에 수미산(불교 세계관의 중심 산)을 담는다는 것이 신통력의 작용인가, 아니면 본래 그러한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보화는 갑자기 식탁을 발로 걷어찼다. 임제가 "이 얼마나 거친 사람인가!"라고 말하자, 보화는 "여기가 어디라고 거칠다느니 온화하다느니 하는가?"라고 반문했다. 다음 날, 두 사람은 다시 재에 초대되었다. 임제가 "오늘의 공양은 어제와 비교해서 어떠한가?"라고 묻자, 보화는 또 식탁을 걷어찼다. 임제가 "좋기는 하지만, 여전히 거친 사람이군"이라고 하자, 보화는 "눈 먼 놈! 불법(佛法)에 거칠고 온화함이 어디 있는가!"라고 외쳤고, 임제는 자신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 또 다른 날, 임제는 하양(河陽)과 목탑(木塔) 두 장로와 함께 승당의 화로를 둘러싸고 앉아 "보화는 매일 마을에서 미친 짓을 하고 다니는데, 과연 범인(凡人)일까, 성인(聖人)일까?"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보화가 나타났다. 임제가 "그대는 범인인가, 성인인가?"라고 묻자, 보화는 "그대들이 먼저 말해보시오. 내가 범부인가, 성자인가?"라고 되물었다. 임제가 할(喝)을 하자, 보화는 세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하양은 새신랑 같고, 목탑은 할멈 같고, 임제는 어린애지만 제법 눈 밝은 아이로다"라고 말했다. 임제가 "이 못된 녀석!"이라고 하자, 보화는 "못된 놈! 못된 놈!"이라고 외치며 나가버렸다.
- 하루는 보화가 승당 앞에서 생 채소를 먹고 있었다. 이를 본 임제가 "꼭 노새 같군"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보화는 노새처럼 "메-"하고 울었다. 임제가 "이 못된 녀석!"이라고 말하자, 보화는 "못된 놈! 못된 놈!"이라고 외치며 재빨리 사라졌다.
- 보화는 늘 거리에 나가 방울을 흔들며 외쳤다. "밝음으로 오면 밝음으로 대처하고, 어둠으로 오면 어둠으로 대처한다. 사방팔방에서 오면 회오리바람처럼 응하고, 허공에서 오면 두레박질하듯 쳐서 날려버린다." 임제는 시자를 시켜 보화가 이 말을 할 때 붙잡고 "그 어느 쪽으로도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묻게 했다. 보화는 시자를 뿌리치며 "내일 대비원(大悲院)에서 공양이 있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시자가 돌아와 이를 보고하자, 임제는 "나는 전부터 저자가 범상치 않다고 여겼다"고 말했다.
- 어느 날, 보화는 거리에 나가 사람들에게 승의(僧衣, 승려의 옷)를 보시해 달라고 청했다. 많은 사람들이 옷을 주었지만 보화는 받지 않았다. 임제는 절의 집사에게 관(棺)을 하나 사 오게 한 뒤, 보화가 돌아오자 "내가 그대를 위해 수의(壽衣)를 마련해 두었네"라고 말했다. 보화는 스스로 관을 짊어지고 거리로 나가 외쳤다. "임제 스님이 나를 위해 수의를 만들어 주셨다. 나는 동문(東門)으로 가서 천화(遷化, 입적)할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구경하려고 따라나서자, 보화는 "오늘은 그만두겠다. 내일 남문(南門)으로 가서 천화하겠다"고 말했다. 이런 일이 사흘간 반복되자 사람들은 더 이상 그의 말을 믿지 않게 되었다. 나흘째 되는 날에는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다. 보화는 혼자 성 밖으로 나가 스스로 관 속에 들어가 누웠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관 뚜껑에 못을 박게 했다. 이 소문이 금세 퍼져 사람들이 앞다투어 달려와 관을 열어보았으나, 관 속은 텅 비어 있었다. 다만 허공 멀리 사라져 가는 방울 소리만 생생하게 들렸다고 한다.
5. 임제종의 계승과 영향
임제 사후, 제자들은 그의 유해를 화장하여 탑을 세웠고, 당나라 황제는 그에게 '혜조선사'(慧照禪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임제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많은 제자를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선풍(禪風)이 즉시 널리 퍼지지는 못했다. 소수의 제자 중 흥화존장의 법맥만이 이어졌으며, 몇 대를 거쳐 후대 제자들에 의해 임제종은 점차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스슈앙 추위안(石霜楚圓) 대에 이르러 중국 남부로 임제종의 가르침이 전파되면서 그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었다. 앨버트 웰터에 따르면, 임제선 종파의 실질적인 창시자는 4대손인 쇼우산 셩니안(926-993)으로 볼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임제종은 중국을 넘어 한국, 일본(린자이), 베트남 등 동아시아 각지로 전파되어 주요 선불교 종파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임제의 가르침은 제자들에 의해 기록되고 편집되어 여러 문헌으로 전해지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임제록(臨濟語錄)''이다.
5. 1. 중국 임제종
임제(臨濟)가 사망한 후, 그의 제자들은 그를 화장하고 다밍(大名) 주(州)의 수도에 스승의 유해를 기리는 기념 탑을 세웠다. 중국 황제는 임제에게 "혜조선사(慧照禪師, 지혜를 밝히는 선사)"라는 시호를 내렸다.야나기다 세이잔에 따르면, 임제는 아마 50대 초중반에 사망했으며, 당시 많은 저명한 스승들처럼 오래 살지 못했고 그의 선(禪) 스타일을 전파할 만한 많은 제자들을 남기지도 못했다.
임제의 소수의 제자 중에서는 흥화존장의 계통만이 살아남았다. 존장의 후계자인 난위안 후이용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난위안의 세 명의 후계자, 펑쉐 옌자오, 쇼우산 셩니안, 펀양 산자오는 모두 황허(黃河) 지역에 머물렀다. 앨버트 웰터에 따르면, 임제선(臨濟禪) 종파의 영감은 임제 의현이었지만, 이 운동의 실질적인 창시자는 4대손인 쇼우산 셩니안(926-993)이었다.
펀양 산자오의 후계자인 스슈앙 추위안(石霜楚圓)은 임제 계통을 중국 남부로 전파했다. 스슈앙은 임제종의 영향력을 증진하고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제자인 양기방회(楊岐方會)와 황룡혜남(黃龍慧南)은 임제종을 크게 부흥시켰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전통은 일본(린자이), 한국, 베트남에 분파를 둔 동아시아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선 종파 중 하나가 되었다.
임제의 제자들은 그의 가르침을 다양한 자료로 편집하고 전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임제록(臨濟語錄)''이다.
''임제록(臨濟語錄)''(일본어: Rinzai-goroku, ''린자이 고로쿠'') 또는 줄여서 ''임제록(臨濟錄)''은 임제에게 귀속되는 설법과 일화 모음으로, 전통적으로 임제의 가르침의 주요 출처로 여겨진다. 전체 제목은 ''진주임제혜조선사어록(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이다.[1]
''임제록''의 표준 판(c. 1120)은 임제의 사망(866) 후 250년이 지나서야 완성되었다. 따라서 텍스트의 일부는 특히 임제가 아닌 송나라 임제종의 관심사를 반영할 가능성이 높다. 표준 판은 1036년 거사 리준쉬(구인 윤총의 제자)에 의해 방대한 ''천성 광등록''에 처음 포함되었으며, 1120년 원각 종연에 의해 푸저우(현재의 푸젠성)의 구산에서 독립적으로 인쇄되었다.
야나기다 세이잔은 ''임제록''의 가장 초기 버전이 어떠했는지, 언제 편집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임제록''의 주요 설법 22편이 임제와 그의 가르침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임제의 설법에서 발췌한 더 이른 구절은 11세기 이전에 편집된 텍스트, 예를 들어 ''조당집'', ''종경록,'' ''경덕전등록'', ''천성광등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야나기다에 따르면, 이 구절들은 ''임제록''에서 발견되는 임제 설법의 병행 구절과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알버트 웰터는 임제의 가르침의 가장 초창기 단편이 952년에 편집된 ''조당집''에서 발견된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임제록''의 내용과 관련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궁극적으로, 임제록의 이야기는 임제의 이미지와 가르침을 통해 목소리와 정체성을 찾은 운동의 이야기다. 이 가르침이 나타내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되찾을 수 없는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창시자로서의 임제라는 인물에 투영된 운동 전체의 결합된 열망이다. 임제는 스스로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그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그의 설법, 강의, 대화 및 기타 상호 작용의 학생들에 의해 기록된 노트에 달려 있다. 원래 그러한 노트를 보관한 사람들의 이름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결국, 임제의 가르침의 단편이 선종 전승 기록에 포함되었다.
''임제록''에는 임제가 스승, 동시대인, 제자들과의 상호 작용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기록된 강의는 전통적인 것과 파격적인 것의 혼합이다. 임제의 파격적인 성격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를 "전통적인 불교 관습과 교리를 검열한 가장 악명 높은 중국 선종 스승 중 한 명"으로 여겼다.[2] 그러나 파격주의에도 불구하고, ''임제록''은 불교 경전에 대한 철저한 지식을 반영한다. 이 텍스트에 기록된 임제의 가르침 스타일은 마조와 그의 계승자, 예를 들어 임제의 스승인 황벽과 같은 홍주종( 洪州宗|홍주종zho )의 선종 발전을 보여준다.
5. 2. 한국 임제종
임제의 법맥은 중국 남부로 전파된 이후 점차 그 영향력을 넓혀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임제종은 일본(린자이), 한국, 베트남 등 동아시아 각지로 퍼져나가 분파를 형성했으며, 이 지역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선 종파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5. 3. 일본 임제종
의현의 사후, 그의 가르침을 이은 임제종은 시간이 지나면서 동아시아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특히 일본에서는 린자이라는 이름으로 분파가 형성되었으며, 한국과 베트남에도 전해져 동아시아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선 종파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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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etext.fgs.org[...]
佛光大辭典(불광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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