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고 (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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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고는 당나라 시기의 학자이자 관료로, 한유의 영향을 받아 고문(古文) 문체를 익혔으며, 798년 진사에 급제했다. 그는 벼슬을 거쳐 산남동도 절도사에 이르렀고, 836년 또는 841년에 사망했다. 이고는 유교에 능통했으나, 불교, 도교, 선학 사상을 융합하여 인성론 《복성서》를 저술했으며, 이는 송나라 시대의 신유학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여행 기록인 《래남록》은 중세 중국 남부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으며, 그의 외손자들은 당나라 황제 아래에서 재상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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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당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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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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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고 |
자 | 습지 (習之) |
출생 | 772년 |
사망 | 841년 |
시대 | 당나라 |
출생지 | 조주 |
사상 | 유교, 성리학 |
직업 | 관료, 학자, 철학자 |
신분 | 진사 |
한자 정보 | |
한자 | 李翱 |
병음 | Lǐ Áo |
로마자 표기 | 웨이드-자일스: Li Ao 주음부호: ㄌㄧˇ ㄠˊ |
광동어 | lei5 ngou4 |
생애 및 활동 | |
주요 활동 | 한유의 문하생 원화 8년 (813년) 진사 급제 국자감 진주, 율주, 강주, 조주 자사 역임 불교 비판 및 유교 부흥 운동 전개 |
사상 | |
주요 사상 | 성리학의 선구자 불교의 선종 비판 심성론 강조 도교 사상 비판 |
저서 | |
주요 저서 | 《부성서 (復性書)》 《이문집 (李文集)》 |
2. 생애
이고(李翺)는 당나라 왕실의 시조인 이고의 후예라고 알려졌으나 낮은 신분의 출신이다. 한유에게 고문(古文)의 문체를 배우고, 그의 혈연을 아내로 삼았으며 사상적으로도 깊은 영향을 받았다. 798년 진사과에 합격하였다.
후베이 성 샹양에서 사망했을 당시, 그는 산남동도 절도사(현재의 후베이 성과 허난 성)의 지위에 있었다. 그의 사망 연도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구당서''에는 841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청나라 역사가들은 836년으로 주장해 왔다.
많은 벼슬을 거쳐 산남동도(山南東道) 절도사(節度使)에까지 이르렀다가 죽었다. 정원 14년(798년)에 진사가 되었다. 원화 연간 초에 국자 박사로 임명되었고, 원화 15년(820년)에 사관 수찬이 되어 고공원외랑을 겸임했다. 이후 낭주 자사와 여주 자사로 좌천되었고, 대화 원년(826년)에 문종이 즉위하자 입조하여 간의대부가 되었으며, 곧 지제고로 복귀했다. 대화 7년(833년)에 담주 자사, 대화 9년(835년)부터 호남관찰사·검교 호부 상서·양주 자사·산남동도 절도사를 거쳐 양주로 부임하던 중 사망했다. 시호는 문공이다.
809년, 그는 남부 지방에 배치되어 임신한 아내와 함께 뤄양에서 광저우까지 9개월에 걸쳐 여행했다. 그들이 거쳐간 경로는 현대의 허난 성, 안후이 성, 장쑤 성, 저장 성, 장시 성, 광둥 성을 포함했다. 그의 여행 기록인 ''래남록''(來南録, "남쪽으로 오는 기록")에는 중세 중국 남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담겨 있으며, 초기 형태의 일기로 여겨진다.
이오는 한유의 고제자였으며, 선비를 좋아하는 면이 비슷했다. 사람에게 한 가지 선행과 재능이 있으면 반드시 칭찬하고, 현자를 추천할 기회를 항상 구했다고 한다. 후기 제국 시대의 학자들은 이오를 당나라와 송나라 시대의 10대 철학 학파 중 하나의 창시자로 여겼다. 철학자로서 이오는 량쑤[1]와 같은 불교 철학자, 그리고 위대한 신유학자 한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광범위한 저작은 ''이문공문집''(李文公文集)에 보존되어 있다. 이 작품은 아마도 ''신당서''에 언급된 ''이오집''(李翺集)의 10개 장의 후기 판본일 것이다. 그가 쓴 몇 안 되는 시들은 ''전당시''(全唐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오의 외손자 루시에와 정톈은 모두 당 희종 황제 아래에서 재상을 지냈다.
2. 1.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평가
3. 사상
유학에 통하였으나 국가 공인의 《오경정의》(五經正義) 주석에 만족하지 않고, 불교나 노장(老莊)·선학(禪學) 등의 사상도 받아들여 마침내 철학적으로 깊이 있는 인성론인 《복성서(復性書)를 저술하였다.[2] 한편 미완이지만 한유와 공저인 《논어필해》(論語筆解)를 남겼고, 《맹자》(孟子)와 《예기》(禮記), 《대학》(大學), 《중용》(中庸)이나 《역전》(易傳)을 들어 순자(荀子) 양웅(楊雄)의 유물론적 경향을 배격하였다. 한당 훈고학의 경전 해석이 현성(賢聖)의 마음을 탐구하는 데 우원(迂遠)한 방법이라고 하였으며, 공자, 자사(子思), 맹자에 연결되는 정통론(正統論)을 만들었다. 이것 등은 송의 주자(朱憙)를 시초로 하는 신유학(新儒學)에 의해 《4서》(四書)와 《역전》이 주요 경전(經典)이 됨과 동시에 도통사상이 중시되는 계기가 되었다.[2]
주백곤은 "인성 본선"이라는 발상은 이고의 『복성서』에서 시작되었다고 지적한다. 다케우치 요시오에 따르면, 이고는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고 생각했지만, 정을 일으킬 때 악이 따르므로, 만물이 감각 기관에 접촉해도 정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는 것이 "복성"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다케우치는 한유와 이고를 송학의 선구자로 여겼다.[2] 한유로부터 배불의 주장을 이어받았지만, 그 자신 안에서는 불교와 도교의 사상을 융합하여 오히려 선종의 달관에 접근하고 있다. 약산유엄 선사에게 보낸 시도 있지만, 난해하고 관념적인 작품이다.
젊은 시절에는 황보식(皇甫湜)과 함께 한유의 문장을 배웠다. 황보식이 한유의 기발한 일면을 나타내는 데 비해, 이고는 그 평이한 일면을 대표한다고 일컬어졌다. 덧붙여 이고는 한유의 생전에 묘비명을 위촉받았다. 저작은 『이문공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3. 1. 복성(復性) 사상
유학에 통달하였으나 국가 공인의 《오경정의》 주석에 만족하지 않고, 불교, 노장, 선학 등의 사상도 받아들여 철학적으로 깊이 있는 인성론인 《복성서》(復性書)를 저술하였다.[2] 순자와 양웅의 유물론적 경향을 배격하고, 한당 훈고학의 경전 해석이 현성(賢聖)의 마음을 탐구하는 데 우원(迂遠)한 방법이라고 비판하였다. 공자, 자사, 맹자로 이어지는 정통론(正統論)을 만들었는데, 이는 송나라 주희의 성리학에 영향을 주었다.[2]《복성서》는 이고의 주요 논문 3편을 모은 책이다. 인간은 성(性)과 정(情)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데, 선천적으로 평등한 성(性)이 외계의 자극으로 변화하는 것은 각자의 칠정에 의한다고 보았다. 어리석은 사람일수록 정욕으로 인해 본성이 어지러워지므로, 성인의 마음을 깨닫기 위해 정욕을 끊고 청정한 본성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인성론은 불교의 진여(眞如)와 유사하며, 정욕을 사려와 구별하여 그것과 다른 것으로 간주한 점은 천태종의 지관(止觀)법과 비슷하다. 정(情)과 성(性)을 모두 잊어 적연부동(寂然不動)의 초월적인 절대경지에 달하는 수양방법은 선학의 영향이었다. 이 경지는 ‘지성(至誠)’이라 불리며, 《중용》의 사상을 부연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유교 교의(敎義)로 불교 신앙의 권위에 대신하게 하려 하였으며, 주관유심주의(主觀唯心主義)의 직각(直覺)에 의한 돈오(頓悟)의 사상은 한당 훈고학의 방법을 의심하였다. 성현에 직접 통하는 길은 공자, 자사, 맹자에서 《중용》에 이르는 계열을 추종해야 하는 것이라 하는 도통사상을 낳았다. 송대 신유학의 기본적인 윤곽은 대략 여기에 준비되어 있으며, 후일의 정치(精緻)한 성리학의 선구가 되었다. 이 논문은 한유의 〈원성〉(原性)과 동일한 기본 사상을 갖지만, 그 사고는 훨씬 깊다.
주백곤은 "인성 본선"이라는 발상은 이고의 『복성서』에서 시작되었다고 지적한다. 다케우치 요시오에 따르면, 이고는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고 생각했지만, 정을 일으킬 때 악이 따르므로, 만물이 감각 기관에 접촉해도 정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는 것이 "복성"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2]
3. 2. 성리학에 미친 영향
유학에 통달하였으나 국가 공인의 《오경정의》 주석에 만족하지 않고, 불교, 노장, 선학 등의 사상도 받아들여 철학적으로 깊이 있는 인성론인 《복성서》를 저술하였다.[2] 한유와 공저인 《논어필해》를 남겼고, 《맹자》, 《예기》, 《대학》, 《중용》, 《역전》을 들어 순자, 양웅의 유물론적 경향을 배격하였다. 한당 훈고학의 경전 해석이 현성(賢聖)의 마음을 탐구하는 데 우원(迂遠)한 방법이라고 하였으며, 공자, 자사, 맹자에 연결되는 정통론(正統論)을 만들었다. 이것 등은 송나라 주자를 시초로 하는 신유학에서 《4서》와 《역전》이 주요 경전이 됨과 동시에 도통사상이 중시되는 계기가 되었다.[2]주백곤은 "인성 본선"이라는 발상이 이고의 『복성서』에서 시작되었다고 지적한다. 다케우치 요시오에 따르면, 이고는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고 생각했지만, 정을 일으킬 때 악이 따르므로, 만물이 감각 기관에 접촉해도 정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는 것이 "복성"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다케우치는 한유와 이고를 송학의 선구자로 여겼다.[2] 한유로부터 배불의 주장을 이어받았지만, 그 자신 안에서는 불교와 도교의 사상을 융합하여 오히려 선종의 달관에 접근하고 있다.[2]
그의 산문은 한유의 달의(達意)한 면을 계승하여 평이한 글로 우수한 전장(傳狀=전기나 행장)의 글을 남겼다. 젊은 시절에는 과 함께 한유의 문장을 배웠는데, 황보식이 한유의 기발한 일면을 나타내는 데 비해, 이고는 그 평이한 일면을 대표한다고 일컬어졌다.
3. 3. 한계
4. 저서
이고는 당나라 때 활동한 인물로, 그의 저술 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제공되지 않았다.
5. 평가
5. 1. 외손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Chinese Philosophy
[2]
서적
中国思想史
岩波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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