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우에 가쿠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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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일본의 실업가이자 정치인으로, 1860년에 태어나 1930년대까지 활동했다. 그는 게이오기주쿠를 졸업하고, 스승 후쿠자와 유키치의 지시로 조선에 건너가 신문 발행에 참여했으며,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후 일본으로 돌아와 정계에 입문하여 중의원 의원을 지냈으며, 홋카이도 탄광 철도 사장, 일본제강소 설립 등 실업가로서 다양한 사업을 추진했다. 그는 홋카이도의 산업 발전에 기여했으며, 여러 기업의 경영진을 역임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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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우에 가쿠고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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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출생일 | 1860년11월 30일 (만엔 원년 10월 18일) |
출생지 | 비젠국후카쓰군 |
사망지 | 알려지지 않음 |
출신 학교 | 게이오기주쿠 본과 |
전 직업 | 조선 정부 고문 |
현 직업 | 알려지지 않음 |
소속 정당 | 중앙교섭회 입헌정우회 |
칭호 및 훈장 | 녹수포장 훈6등단광욱일장 |
친족 (정치가) | 알려지지 않음 |
배우자 | 알려지지 않음 |
서명 | 알려지지 않음 |
웹사이트 | 알려지지 않음 |
사이트 제목 | 알려지지 않음 |
국기 | 알려지지 않음 |
조선 정부 고문 | |
직책 | 이씨조선 고문 |
내각 | 알려지지 않음 |
취임일 | 1883년 |
퇴임일 | 1910년 |
소속 위원회 | 알려지지 않음 |
의원회관 | 알려지지 않음 |
원수 직 | 알려지지 않음 |
원수 | 알려지지 않음 |
국기 | JPN |
중의원 의원 | |
직책 | 중의원 의원 |
내각 | 알려지지 않음 |
선거구 | 히로시마현 제9구 |
당선 횟수 | 14회 |
취임일 | 1890년11월 12일 |
퇴임일 | 1924년1월 31일 |
소속 위원회 | 임시 제철 사업 조사 위원회 |
의원회관 | 알려지지 않음 |
원수 직 | 알려지지 않음 |
원수 | 알려지지 않음 |
2. 생애
2. 1. 성장 배경
1860년 빈고국 후카쓰 군 노가미 촌(현재의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시)에서 다다고로와 스미코 부부의 5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6세부터 데라코야에서 글공부를 시작했고, 8세부터 빈고 후쿠야마번의 유학자 야마무로 큐코에게 한자를 배우기 시작했다. 학업 성적이 우수했기 때문에 야마무로의 추천으로 월반하여 후쿠야마 번교 세이시칸에 특례 입학했다. 입학 후에는 한학과 수학을 배웠고, 특히 수학이 우수하여 준득업생(특대생)이 되었다.1873년, 이노우에 가문의 소유지에 그 지역 최초의 초등학교가 설립되었는데, 당시 14세였던 이노우에는 마을 사람들의 요청으로 그 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17세에 히로시마현립 심상사범학교 후쿠야마 분교에 입학, 19세에 졸업하고 몇몇 초등학교에 근무했다. 이듬해 같은 고향 출신 선배 코바야시 요시나오를 의지해 상경했다. 3개월쯤 지나 코바야시의 추천으로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생이 되어 게이오기주쿠에 입학했다. 재학 중에는 후쿠자와 가문에서 가정교사를 맡으면서 같은 저택 내에 거주했고, 1880년 23세에 본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에도 후쿠자와의 인맥으로 고토 쇼지로 백작의 서생이 되어 2년 넘게 활동했다.
2. 2. 조선으로 건너감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제물포 조약 체결 과정에서 이노우에 가오루와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 측 관계자들을 지원했다.[6][7] 같은 해 12월, 후쿠자와 유키치의 지시에 따라 조선 정부 고문으로 파견된 우시바 다쿠조, 다카하시 마사노부와 함께 이노우에도 조선으로 건너갔다.[8]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의 독립과 조선인 계몽을 위해 조선어 신문 발행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2]우시바와 다카하시는 어려운 상황을 깨닫고 귀국했지만, 이노우에는 조선에 남아 1883년 외아문 고문(외교 고문)으로 임명되었다.[8] 이노우에는 조선 정부의 조직과 운영을 관찰하고 개혁을 위해서는 왕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개혁 분위기 조성을 위해 관보에 가까운 신문 발행을 제안했다.[8] 이 제안은 받아들여져 교육과 문화를 담당하는 박문국이 설치되었고, 온건파인 김윤식이 책임자가 되었다. 1883년 10월 1일, 박문국에서 한성순보를 창간했다.[2][3][8] 이노우에는 번역 및 편집 지도를 담당했다. 한성순보는 국왕의 인가를 받은 정부 기관 발행물로, 조선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2] 한성순보는 조선 최초의 근대 신문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보수파는 신문이 위험 분자를 조장한다고 반대했다. 또한 청은 청의 종속국인 조선이 관보에 독립론을 게재한 것은 용서할 수 없으며, 그 배후에 일본이 있다고 비난했다.[8]
한성순보는 처음에는 순수한 한문으로 작성되었으나,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노우에가 보낸 한성순보 제1호와 제2호를 보고 "조선에는 한글이 있을 것이다. 언문을 사용하면 많은 사람이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8] 이노우에는 즉시 한글 사용을 검토했지만, 보수파의 반대로 어려움을 겪었다.[8]
1884년 12월, 조선에서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 개혁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은 대한제국 병합의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이노우에는 이 사건에 연루되어 주차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와 재류 일본인들과 함께 한성을 탈출하여 일본으로 피신했다.[9][10]
1885년 초, 이노우에가 조선으로 돌아가려 하자 후쿠자와 유키치는 만류했지만, 이노우에는 한글 보급을 위해 꼭 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한성으로 돌아갔다.[8] 그러나 박문국은 불타 복구에 시간이 걸렸고, 한글 사용 분위기도 조성되지 않았다. 이노우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글 사용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마침내 실현시켰지만, 한글 활자를 만들 직공이 없었다. 이 때문에 이노우에는 일본으로 돌아가 활자 직공 두 명을 데리고 한성으로 돌아왔다.[8]
이노우에는 서둘러 준비를 진행하여, 1886년 1월 한성순보의 후속지인 한성주보를 창간했다. (주 1회 발행) 한성주보는 정부 공인 공문서(관보)로는 처음으로 한글로 된 조선 문(이두문 등, 한자 표기의 조선어가 정부의 실무 문서에 사용되는 것과 민간에 대한 교화나 포고가 한글로 나오는 것은 있었다)이 사용되었다.[2] 여기에는 국한문이라는 일본의 한문 훈독체를 본뜬 새로운 문체(한글 창제 이후 사용되었던, 단순한 한자 혼용문과는 별개)가 채택되었는데, 이는 일본의 한문 훈독체에 능통했던 이노우에의 아이디어와 시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문체를 작성한 것은 늙은 유학자 강위로 여겨진다. 한성주보의 발행 부수는 약 3000부였고, 독자는 주로 관료였다. 이 신문 자체는 서민에게 침투하지 못했으며, 새로운 문체인 국한문도 식민지 통치기에 관보 등에서 제한적으로 사용되는 데 그쳤지만, 신문에 한글 표기의 조선어가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조선에서의 한글 사용에 큰 획을 그었다.
이 신문은 이노우에의 지도로 궤도에 올랐지만, 처음에는 협조적이었던 관계자들이 점차 멀어졌다. 이는 명성황후 등 반일적인 보수파가 세력을 확장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개화를 위해 조선에 왔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불만을 품고 그해 말, 이노우에는 귀국한다. 하지만 이노우에가 귀국한 후에도 신문 발행은 계속되었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의 일제강점기에 한글은 조선의 보통학교(초등학교)의 교과서에 실려 조선의 아이들에게 보급되었다.[2]
3. 조선에서의 활동과 언론 개혁
1882년 게이오기주쿠 대학을 졸업하고 스승 후쿠자와 유키치의 지시에 따라 조선의 신문 발간을 위해 조선을 방문했다. 1883년 4월 다른 일본인 동료들은 모두 일본으로 귀국하고 홀로 남아 신문 발간 준비를 계속했다.
김윤식(당시 외아문협변 지위)을 찾아가 신문 창간의 필요성을 호소하여, 민영익을 소개받는 등 김윤식의 지인들과도 친목을 다졌다. 1883년 6월 김윤식의 사촌 김만식이 한성판윤에 임명되자 이노우에 가쿠고로도 고종으로부터 내명을 받고 조정에 머물게 되고, 외아문의 고문으로 박문국에 출임한다.
1883년 9월 김윤식은 이노우에 가쿠고로에게 신문발간의 계획대요를 제시하라고 요청하여, 김만식과 합의 하에 다음과 같은 발간 계획을 완성시켰다.
- 신문은 순보로 하고 매월 10일 1회 발간할 것
- 관보는 제일로 하고 내외의 시사를 병기할 것
- 인지를 개발하고 식산을 장려하며 그 외 풍교상 필요한 논설을 기재할 것
- 각 고위고등관 및 중앙, 지방관 등은 의무구독을 명할 것
- 편집사무 의원은 모두 관원으로 하고 내외 사정에 정통한 자, 문학 소양을 가진 자를 채용할 것
- 정식으로 한문만으로 할 것
- 국원일체의 봉급, 모든 급여는 외아문에서 이것을 지출하고, 그 외 비용은 한성부에서 지변할 것
이와 같이 정하고 김윤식에게 제출하였더니 계획은 용이하게 받아들여져, 새롭게 박문국이라는 교육 사무를 임무로 하는 관청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신문의 편집, 사무, 인쇄의 관게각원을 임명하고 이것에 주사, 사사를 부여해 마침내 『한성순보』 제1호를 발행 하기에 이른다. 창간일은 1883년 10월 31일(음력 10월 1일)이었다. 한성순보는 순한문으로 발행되었으며, 관보의 성격을 띠고 내외 시사를 다루었다.
1884년 1월 『한성순보』 제10호(1884년 양력 1월 30일자) 에 실린 기사가 문제를 일으켰다. 당시 청으로부터 조선 정부의 내정, 외교, 등에 간섭이 심해지는 와중에, 특히 주둔하고 있던 청국 병사들의 약탈 및 강간 등의 횡포가 심하였다. 그래서 한성순보 제10호는 청국병사에 의한 「서울약국 주인피살사건」을 폭로하는 기사를 게재하고 이를 규탄한다. 이것이 청을 자극해 강한 반발을 일으켰다. 이에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의 이름으로 조선정부 및 박문국에 서간을 보내 "한성순보는 관보이며, 관보는 민보가 수문수록하는 것과 달라, 이번 기사는 오류로 말살하기 어려우며 단연 청국에 예를 잃은 것이다"라고 비난했다.
그래서 당시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이는 자신의 소견을 기록한 것이기에, "책임은 나 한 사람에게 있다"면서 스스로 책임을 지고 『한성순보』 제16호를 발간한 후 외아문 고문과 박문국 주재를 모두 사임하고 1884년 5월 귀국한다. 이 같은 경위로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결국 이 사건은 한국에서 신문보도가 국제적인 파문을 일으킨 최초의 필화사건이기도 하다.
같은 해 8월,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지지신보』 기자 신분으로 다시 조선으로 가 박문국에 다시 채용되어 조선의 신문 발행에 참여했다.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에 가담하여 다이너마이트 폭발 작업을 도왔다.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개화파를 지원하였으며, 갑신정변 당시 급진개화파들을 도와주기로 했던 다케조에 신이치로 공사가 약속을 어기자 일본으로 귀국 후 강한 비판을 하게 되었고, 내무대신을 지냈었던 이노우에 가오루에게도 이 일을 언급한다. 갑신정변 실패 후 1884년 12월 13일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유혁노, 변수 등 6명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한다.
1885년 초, 이노우에가 조선으로 돌아가려 하자 후쿠자와는 "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라고 말렸지만, 이노우에는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신 한글 보급을 위해 꼭 가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한성으로 돌아갔다。그러나 박문국은 불타 복구에 시간이 걸렸고, 한글을 사용한다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일이 있을 때마다 한글 사용의 필요성을 설파해 마침내 실현되었지만, 한글 활자를 만드는 직공이 없었다. 이 때문에 이노우에는 일본으로 돌아가 활자 직공 두 명을 데리고 한성으로 돌아왔다。
1886년 1월 25일, 한성순보의 후속지인 한성주보를 창간했다. 한성주보는 조선 최초로 국한문혼용체를 도입하여 한글과 한문을 함께 사용한 신문이었다. 이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의견을 따른 것으로, 한자만으로는 서양의 학문과 사상을 습득하기 어렵다는 그의 견해를 반영한 것이다.
3. 1. 한성순보 창간 (1883년)
1882년 게이오기주쿠 대학을 졸업하고 스승 후쿠자와 유키치의 지시에 따라 조선의 신문 발간을 위해 조선을 방문했다. 1883년 4월 다른 일본인 동료들은 모두 일본으로 귀국하고 홀로 남아 신문 발간 준비를 계속했다.김윤식(당시 외아문협변 지위)을 찾아가 신문 창간의 필요성을 호소하여, 민영익을 소개받는 등 김윤식의 지인들과도 친목을 다졌다. 1883년 6월 김윤식의 사촌 김만식이 한성판윤에 임명되자 이노우에 가쿠고로도 고종으로부터 내명을 받고 조정에 머물게 되고, 외아문의 고문으로 박문국에 출임한다.
1883년 9월 김윤식은 이노우에 가쿠고로에게 신문발간의 계획대요를 제시하라고 요청하여, 김만식과 합의 하에 다음과 같은 발간 계획을 완성시켰다.
- 신문은 순보로 하고 매월 10일 1회 발간할 것
- 관보는 제일로 하고 내외의 시사를 병기할 것
- 인지를 개발하고 식산을 장려하며 그 외 풍교상 필요한 논설을 기재할 것
- 각 고위고등관 및 중앙, 지방관 등은 의무구독을 명할 것
- 편집사무 의원은 모두 관원으로 하고 내외 사정에 정통한 자, 문학 소양을 가진 자를 채용할 것
- 정식으로 한문만으로 할 것
- 국원일체의 봉급, 모든 급여는 외아문에서 이것을 지출하고, 그 외 비용은 한성부에서 지변할 것
이와 같이 정하고 김윤식에게 제출하였더니 계획은 용이하게 받아들여져, 새롭게 박문국이라는 교육 사무를 임무로 하는 관청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신문의 편집, 사무, 인쇄의 관게각원을 임명하고 이것에 주사, 사사를 부여해 마침내 『한성순보』 제1호를 발행 하기에 이른다. 창간일은 1883년 10월 31일(음력 10월 1일)이었다. 한성순보는 순한문으로 발행되었으며, 관보의 성격을 띠고 내외 시사를 다루었다.
1884년 1월 『한성순보』 제10호(1884년 양력 1월 30일자) 에 실린 기사가 문제를 일으켰다. 당시 청으로부터 조선 정부의 내정, 외교, 등에 간섭이 심해지는 와중에, 특히 주둔하고 있던 청국 병사들의 약탈 및 강간 등의 횡포가 심하였다. 그래서 한성순보 제10호는 청국병사에 의한 「서울약국 주인피살사건」을 폭로하는 기사를 게재하고 이를 규탄한다. 이것이 청을 자극해 강한 반발을 일으켰다. 이에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의 이름으로 조선정부 및 박문국에 서간을 보내 "한성순보는 관보이며, 관보는 민보가 수문수록하는 것과 달라, 이번 기사는 오류로 말살하기 어려우며 단연 청국에 예를 잃은 것이다"라고 비난했다.
그래서 당시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이는 자신의 소견을 기록한 것이기에, "책임은 나 한 사람에게 있다"면서 스스로 책임을 지고 『한성순보』 제16호를 발간한 후 외아문 고문과 박문국 주재를 모두 사임하고 1884년 5월 귀국한다. 이 같은 경위로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결국 이 사건은 한국에서 신문보도가 국제적인 파문을 일으킨 최초의 필화사건이기도 하다.
3. 2. 한성순보 필화 사건 (1884년)
1884년 1월, 한성순보 제10호(1884년 양력 1월 30일자)에 실린 기사가 필화 사건을 일으켰다. 당시 청은 조선 정부의 내정, 외교 등에 간섭이 심했고, 특히 주둔하고 있던 청국 병사들의 약탈 및 강간 등의 횡포가 심했다. 한성순보 제10호는 청국 병사에 의한 '서울약국 주인피살사건'을 폭로하는 기사를 게재하고 이를 규탄했다. 이는 청을 자극해 강한 반발을 일으켰고, 북양대신 이홍장은 조선 정부 및 박문국에 서간을 보내 "한성순보는 관보이며, 관보는 민보가 수문수록하는 것과 달라, 이번 기사는 오류로 말살하기 어려우며 단연 청국에 예를 잃은 것이다"라고 비난했다.이노우에 가쿠고로는 "책임은 나 한 사람에게 있다"면서 스스로 책임을 지고 한성순보 제16호를 발간한 후 외아문 고문과 박문국 주재를 모두 사임하고 1884년 5월 귀국했다. 이 사건은 한국에서 신문 보도가 국제적인 파문을 일으킨 최초의 필화 사건이다. 같은 해 8월,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지지신보』 기자 신분으로 다시 조선으로 가 박문국에 다시 채용되어 조선의 신문 발행에 참여했다.
3. 3. 갑신정변 가담 (1884년)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에 가담하여 다이너마이트 폭발 작업을 도왔다.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개화파를 지원하였으며, 갑신정변 당시 급진개화파들을 도와주기로 했던 다케조에 신이치로 공사가 약속을 어기자 일본으로 귀국 후 강한 비판을 하게 되었고, 내무대신을 지냈었던 이노우에 가오루에게도 이 일을 언급한다. 갑신정변 실패 후 1884년 12월 13일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유혁노, 변수 등 6명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한다.3. 4. 한성주보 창간과 국한문혼용체 도입 (1886년)
1882년 10월 게이오기주쿠 대학을 졸업하고 스승 후쿠자와 유키치의 지시에 따라 조선의 신문 발간을 위해 조선을 방문한다. 1883년 4월 다른 일본인 동료들은 모두 일본으로 귀국하고 홀로 남아 신문 발간 준비를 계속한다.김윤식(당시 외아문협변 지위)을 찾아가 신문 창간의 필요성을 호소한다. 김윤식과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자 김윤식은 민영익을 소개하는 등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김윤식의 지인들과도 친목을 다졌다. 궁중에서도 내관이 찾아오는 등 이노우에 가쿠고로의 주변은 번창해졌다. 이 후 김윤식에게 탁원(琢園)이라는 호를 지어주었고, 주변 지인들로부터 정탁원(井琢園) 혹은 정상탁원(井上琢園)이라 불리게 된다.
1883년 6월 김윤식의 사촌 김만식이 한성판윤에 임명되자 이노우에 가쿠고로도 고종으로부터 내명을 받고 조정에 머물게 되고, 외아문의 고문으로 박문국에 출임한다.
1883년 9월 김윤식은 이노우에 가쿠고로에게 신문발간의 계획대요를 제시하라고 요청하여, 김만식과 합의 하에 다음과 같은 발간 계획을 완성시켰다.
# 신문은 순보로 하고 매월 10일 1회 발간할 것
# 관보는 제일로 하고 내외의 시사를 병기할 것
# 인지를 개발하고 식산을 장려하며 그 외 풍교상 필요한 논설을 기재할 것
# 각 고위고등관 및 중앙, 지방관 등은 의무구독을 명할 것
# 편집사무 의원은 모두 관원으로 하고 내외 사정에 정통한 자, 문학 소양을 가진 자를 채용할 것
# 정식으로 한문만으로 할 것
# 국원일체의 봉급, 모든 급여는 외아문에서 이것을 지출하고, 그 외 비용은 한성부에서 지변할 것
이와 같이 정하고 김윤식에게 제출하였더니 계획은 용이하게 받아들여져, 새롭게 박문국이라는 교육 사무를 임무로 하는 관청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신문의 편집, 사무, 인쇄의 관게각원을 임명하고 이것에 주사, 사사를 부여해 마침내 『한성순보』 제1호를 발행 하기에 이른다. 창간일은 1883년 10월 31일(음력 10월 1일)이었다.
1884년 1월 『한성순보』 제10호(1884년 양력 1월 30일자) 에 실린 기사가 문제를 일으켰다. 당시 청으로부터 조선 정부의 내정, 외교, 등에 간섭이 심해지는 와중에, 특히 주둔하고 있던 청국 병사들의 약탈 및 강간 등의 횡포가 심하였다. 그래서 한성순보 제10호는 청국병사에 의한 「서울약국 주인피살사건」을 폭로하는 기사를 게재하고 이를 규탄한다. 이것이 청을 자극해 강한 반발을 일으켰다. 이에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의 이름으로 조선정부 및 박문국에 서간을 보내 "한성순보는 관보이며, 관보는 민보가 수문수록하는 것과 달라, 이번 기사는 오류로 말살하기 어려우며 단연 청국에 예를 잃은 것이다"라고 비난했다.
그래서 당시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이는 자신의 소견을 기록한 것이기에, "책임은 나 한 사람에게 있다"면서 스스로 책임을 지고 『한성순보』 제16호를 발간한 후 외아문 고문과 박문국 주재를 모두 사임하고 1884년 5월 귀국한다. 이 같은 경위로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결국 이 사건은 한국에서 신문보도가 국제적인 파문을 일으킨 최초의 필화사건이기도 하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지지신보』의 기자 신분으로 다시 조선으로 가 박문국에 다시 채용되며 조선의 신문 발행에 참여한다.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에 가담하였다(다이너마이트 폭발 작업을 도왔다). 이로 인해 같은 해 12월 13일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유혁노, 변수 등 6명과 함께 일본으로 밀항한다(나가사키항). 갑신정변 당시 급진개화파들을 도와주기로 했던 다케조에 신이치로 공사가 약속을 어기자 일본으로 귀국 후 강한 비판을 하게 되었고, 당시 일본의 내무대신을 지냈었던 이노우에 가오루(정상형, 井上馨)에게도 이 일을 언급한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갑신정변 후 조선 주재 일본 공사(주한일본공사)로 조선을 방문하는 인물이다. 1884년 1월의 『한성순보』 기사파문 사건 이후에 이노우에 가쿠고로를 조선에 다시 보낸 이도 바로 이 이노우에 가오루이다. 청에게 『한성순보』를 넘기지 않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아무튼 다케조에 신이치로 공사는 이노우에 가쿠고로가 자신을 비판했다는 것을 알고는 이 때부터 이노우에 가쿠고로를 주시하기 시작한다.
1884년 12월 21일 이노우에 가오루가 특파 전권대사(주한일본공사)로 임명되어 갑신정변의 수습원으로 조선을 방문한다(이노우에 가쿠고로도 동행한다). 당시 조선 정부는 친청파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노우에 가오루 대사 일행이 인천에 도착하자 조선 정부는 돌연 대사의 경성입성을 거부하고 성문을 폐쇄해 조선 병사와 청나라 병사에게 전투준비를 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당시 청나라 병사들의 일본인에 대한 적대적 태도가 가장 심했다. 결국 이노우에 가오루 대사와 김홍집, 김윤식과의 회담은 결론을 내지 못하고 끝났다. 그래서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이노우에 가오루 대사의 의향을 두 김씨에게 전달하였다. 그 결과 양국의 갈등은 어느 정도 누그러졌고, 김윤식에 의해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다시 외아문의 고문이 된다. 이노우에 가오루 대사는 1885년 1월 6일 국왕을 알현해 국서를 봉정하고, 조선전권대사 김홍집과 담판을 개시하게 된다.
1885년 4월 10일 톈진 조약이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와 청의 이홍장의 조인에 의해 평화적으로 끝났으므로 조선 정부는 이노우에 가오루 대사에게 속은 것처럼 느껴 이노우에 가쿠고로를 향해 이노우에 가오루 대사가 이노우에 가쿠고로에게 식언을 한 일이 있었는지 몇 번이나 물었다. 그 후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당시의 일본 내에서도 톈진조약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노우에 가쿠고로의 분개는 극에 달해 외무성으로 가서 이노우에 가오루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하게 된다. 이로 인해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이노우에 가오루에 의해 행방을 탐지당하게 되고 훗날 사문서위조죄와 관리모욕죄 혐의로 체포되었다.
1886년 1월 25일 『한성주보』를 창간하기에 이른다. 조선 최초의 '국한문혼용체'로서 이 한성주보에서 최초로 한글을 사용하게 된다(한글과 한문을 병용한 신문이다). 이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의견을 따른 것인데, 한자만으로는 서양의 학문과 사상을 습득하기 어렵다는 그의 견해로 보여진다.
4. 일본 귀국 후 정치 활동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미국에서 귀국하여 갑신정변과 관련된 혐의로 체포되었다. 갑신정변 당시 일본 정부가 개혁파 지원을 약속했음에도 형세가 불리해지자 침묵하는 것은 비겁하다며 정부를 비판하고,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등 원로원 의관을 모욕했다는 이유였다.[13] 관료 모욕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헌법 발포에 따른 은사로 이듬해 1월 복역, 2월 대사로 출옥했다.[13]
1888년 미국에서 귀국한 후, 게이오기주쿠 재학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고토 쇼지로의 대동단결 운동에 참가했다. 사쓰마번벌 정치 타파를 목표로 정계 진출을 결심하고, 1890년 제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890년 제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보궐 당선되었다.[13] 제1의회에서는 예산 문제로 정부를 지지하여 자유당에서 제명되었다.[13] 1892년에는 리당 계열의 중앙 교섭부에 적을 두었고, 홋카이도 탄광 철도 사장이 되어 외자 도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실업계 의원"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이를 좋지 않게 본 장사(정치 활동가)들의 표적이 되어 자주 폭행을 당했다. 1891년에는 이노우에에게 폭행을 가한 자들이 보안 조례에 근거하여 의회 회기 중 퇴거를 명받기도 했다. 1892년에는 자유당의 장사를 자칭하는 자에게 습격당하여 대결전을 벌였다. 이 해의 『도쿄 니치니치 신문』에 "민당 장사가 노리는 것은 오직 이노우에에게 그치지 않고, 온건파 의원의 쟁쟁한 자들에게는 모두 난폭을 걸 것이라는 모습도 보이니, 지금부터는 어디서든 어떤 소동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고 한다"라는 격렬한 장사의 발언이 게재되었다.
그 후, 국민협회에는 참가하지 않고 독자적인 회파를 결성했지만, 철도 국유 정책에서 의견이 일치하는 헌정당에 입당했다. 이어서 정우회에도 소속되었지만, 재정 방침으로 대립하여 1901년 정우회에서 제명되었다. 1924년까지 연임 14회, 제1회부터 제47회까지의 제국 의회에 참가했다. 1915년 12월 3일, 대심원에서 선거법 위반 사건 재판이 확정되어 의원직을 사퇴했다.[14]
이노우에는 고토 쇼지로와 함께 활동했지만, 고토의 변덕스러운 정치 행보로 인해 이노우에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또한, 심한 천연두 자국으로 인해 "게갑 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었으며, 이 무렵 신문에는 게의 얼굴을 한 이노우에의 만화가 자주 그려졌다. 천연두가 유행하던 무렵, 집 입구에 "이노우에 가쿠고로 님 댁"이라고 쓴 종이를 붙이면 천연두 예방이 된다는 소문이 퍼지는 등 이 시대의 명물 남자였다.
4. 1. 정치 입문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미국에서 귀국하여 갑신정변과 관련된 혐의로 체포되었다. 갑신정변 당시 일본 정부가 개혁파 지원을 약속했음에도 형세가 불리해지자 침묵하는 것은 비겁하다며 정부를 비판하고,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등 원로원 의관을 모욕했다는 이유였다.[13] 관료 모욕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헌법 발포에 따른 은사로 이듬해 1월 복역, 2월 대사로 출옥했다.[13]1888년 미국에서 귀국한 후, 게이오기주쿠 재학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고토 쇼지로의 대동단결 운동에 참가했다. 사쓰마번벌 정치 타파를 목표로 정계 진출을 결심하고, 1890년 제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4. 2. 중의원 의원 활동
1890년 제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보궐 당선되었다.[13] 제1의회에서는 예산 문제로 정부를 지지하여 자유당에서 제명되었다.[13] 1892년에는 리당 계열의 중앙 교섭부에 적을 두었고, 홋카이도 탄광 철도 사장이 되어 외자 도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실업계 의원"으로 이름을 알렸다.[13] 그러나 이를 좋지 않게 본 장사(정치 활동가)들의 표적이 되어 자주 폭행을 당했다.[13] 1891년에는 이노우에에게 폭행을 가한 자들이 보안 조례에 근거하여 의회 회기 중 퇴거를 명받기도 했다.[13]그 후, 국민협회에는 참가하지 않고 독자적인 회파를 결성했지만, 철도 국유 정책에서 의견이 일치하는 헌정당에 입당했다.[13] 이어서 정우회에도 소속되었지만, 재정 방침으로 대립하여 1901년 정우회에서 제명되었다.[13] 1924년까지 연임 14회, 제1회부터 제47회까지의 제국 의회에 참가했다.[13] 1915년 12월 3일, 대심원에서 선거법 위반 사건 재판이 확정되어 의원직을 사퇴했다.[14]
이노우에는 고토 쇼지로와 함께 활동했지만, 고토의 변덕스러운 정치 행보로 인해 이노우에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13] 또한, 심한 천연두 자국으로 인해 "게갑 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었으며,[13] 이 무렵 신문에는 게의 얼굴을 한 이노우에의 만화가 자주 그려졌다.[13]
5. 실업가로서의 활동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실업가로서 다방면에 걸쳐 업적을 남겼다.[15] 경부철도, 남만주철도 설립에 관여하고, 홋카이도 탄광 철도(후에 홋카이도 탄광 기선) 전무(실질 사장)로서 철도 업무 기구 개편, 새로운 탄광 개발, 부대 사업 확장을 추진했다. 경영 조직에서 사쓰마벌과 관료제를 제거하고, 근대적 경영 조직을 육성했다. 무로란 항 개발에 착수하여, 북탄사를 근대적 수직 기업으로 발전시키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이노우에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지원했다고 한다. 후쿠자와 모모스케는 이노우에가 북탄 전무 시절의 부하·참모였다.[4][16]
이노우에는 제철업이야말로 근대화의 근간이라고 생각하여, 철도 국유화에 의한 매각 수입을 이용하여 홋카이도에서 민간에 의한 제철 사업을 계획했다. 그러나, 병기 국산화를 목표로 했던 해군의 설득에 의해 1907년, 제강과 병기 제조를 하는 일본 최초의 외자 (영국 자본) 도입이라고 하는 일본제강소를 설립했다.[4][5][17] 1909년에는 북탄 린니 제철소 (현재의 신일본제철 무로란 제철소)를 설립,[18][19][20] "무로란의 제철업의 조상"이라고 불렸다.[21][22][23] 이러한 사업에 따라 철도 수송력을 강화, 테미야선, 소라치선, 무로란선, 유바리선 등의 개량을 실시하여 홋카이도의 탄광 철도 사업, 및 홋카이도의 중화학 공업 발전에 다대한 공적을 남겼다.[24]
1910년 도모 경편철도 (현재의 도모철도) 창립 발기인,[25] 1912년우와지마 철도 사장,[26] 1916년 전기 제강소 (현・다이도 특수강) 설립에 출자했다.[27] 같은 해, 경영 부진에 빠진 교토 전기 철도 사장에 취임하여 이를 재건, 1918년에 교토시에 인계하여 교토시 전차 통일 문제를 해결했다.[28] 1920년에는 야하키 수력 (후에 주부 전력),[ref name="wiki-4"/> 1923년에는 나고야 화력 발전소를 설립·기공하는 등 많은 탄광과 발전소, 철도의 개발·정비에 맹활약을 펼쳤다.
그 외 일본에서 최초로 주석의 대량 생산에 성공하거나, 홋카이도 인조 비료 사장, 일본 페인트 (현·일본 페인트 홀딩스) 회장, 가부키자 공동 대표 (1909년),[29] 시나가와 은행, 지요다 생명 보험 상호의 창립으로 이사, 일본 가스 이사, 일본 인조 견사 (후에 테이진) 감사역, 등 많은 회사, 은행, 등의 경영자·임원을 역임한 외에, 도쿄 상공 회의소 부회두, 제국 철도 협회 부회장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4] 1909년에 "국민 신문"이 "수완 있는 실업가는 누구인가"로서 일반 투표를 실시한 결과 최고위에 선정되어, "게 갑 장군"이라는 조롱 외에 "이노의 각 씨"라고 친근하게 불리기도 했다. 또한 교육계에서도 큰 발자취를 남겨, 국민 공업 학원 이사장으로서, 그 창립, 경영에 힘썼고, 공업 도덕의 진흥에 힘썼다.
5. 1. 주요 기업 설립 및 경영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실업가로서 경부철도, 남만주철도 설립에 관여했다.[15] 홋카이도 탄광 철도(후에 홋카이도 탄광 기선) 전무(실질 사장)를 역임하며 철도 업무 기구 개편, 새로운 탄광 개발, 부대 사업 확장을 추진했다.[15] 경영 조직에서 사쓰마벌과 관료제를 제거하고, 근대적 경영 조직을 육성했다.[15] 이토 히로부미는 이노우에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지원했다고 한다.[15]1907년에는 영국 자본을 도입하여 제강과 병기 제조를 하는 일본제강소를 설립했다.[4][5][17] 1909년에는 북탄 린니 제철소 (현재의 신일본제철 무로란 제철소)를 설립,[18][19][20] "무로란의 제철업의 조상"이라고 불렸다.[21][22][23]
1916년 경영 부진에 빠진 교토 전기 철도 사장에 취임하여 이를 재건하고, 1918년 교토시에 인계하여 교토시 전차 통일 문제를 해결했다.[28] 1920년에는 야하키 수력(후에 주부 전력)[4], 1923년에는 나고야 화력 발전소를 설립·기공했다.
그 외에도 일본에서 최초로 주석의 대량 생산에 성공하고, 홋카이도 인조 비료 사장, 일본 페인트 (현·일본 페인트 홀딩스) 회장, 가부키자 공동 대표 (1909년)[29], 시나가와 은행, 지요다 생명 보험 상호의 창립으로 이사, 일본 가스 이사, 일본 인조 견사 (후에 테이진) 감사역 등 많은 회사, 은행 등의 경영자·임원을 역임했다.[4]
5. 2. 기타 경제 활동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실업가로서 다방면에 걸쳐 업적을 남겼다.[15] 경부철도, 남만주철도 설립에 관여하고, 홋카이도 탄광 철도(후에 홋카이도 탄광 기선) 전무(실질 사장)로서 철도 업무 기구 개편, 새로운 탄광 개발, 부대 사업 확장을 추진했다. 경영 조직에서 사쓰마벌과 관료제를 제거하고, 근대적 경영 조직을 육성했다. 무로란 항 개발에 착수하여, 북탄사를 근대적 수직 기업으로 발전시키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이노우에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지원했다고 한다. 후쿠자와 모모스케는 이노우에가 북탄 전무 시절의 부하·참모였다.[4][16]이노우에는 제철업이야말로 근대화의 근간이라고 생각하여, 철도 국유화에 의한 매각 수입을 이용하여 홋카이도에서 민간에 의한 제철 사업을 계획했다. 그러나, 병기 국산화를 목표로 했던 해군의 설득에 의해 1907년, 제강과 병기 제조를 하는 일본 최초의 외자 (영국 자본) 도입이라고 하는 일본제강소를 설립했다.[4][5][17] 1909년에는 북탄 린니 제철소 (현재의 신일본제철 무로란 제철소)를 설립,[18][19][20] "무로란의 제철업의 조상"이라고 불렸다.[21][22][23] 이러한 사업에 따라 철도 수송력을 강화, 테미야선, 소라치선, 무로란선, 유바리선 등의 개량을 실시하여 홋카이도의 탄광 철도 사업, 및 홋카이도의 중화학 공업 발전에 다대한 공적을 남겼다.[24]
1910년 도모 경편철도 (현재의 도모철도) 창립 발기인,[25] 1912년우와지마 철도 사장,[26] 1916년 전기 제강소 (현・다이도 특수강) 설립에 출자했다.[27] 같은 해, 경영 부진에 빠진 교토 전기 철도 사장에 취임하여 이를 재건, 1918년에 교토시에 인계하여 교토시 전차 통일 문제를 해결했다.[28] 1920년에는 야하키 수력 (후에 주부 전력),[ref name="wiki-4"/> 1923년에는 나고야 화력 발전소를 설립·기공하는 등 많은 탄광과 발전소, 철도의 개발·정비에 맹활약을 펼쳤다.
그 외 일본에서 최초로 주석의 대량 생산에 성공하거나, 홋카이도 인조 비료 사장, 일본 페인트 (현·일본 페인트 홀딩스) 회장, 가부키자 공동 대표 (1909년),[29] 시나가와 은행, 지요다 생명 보험 상호의 창립으로 이사, 일본 가스 이사, 일본 인조 견사 (후에 테이진) 감사역, 등 많은 회사, 은행, 등의 경영자·임원을 역임한 외에, 도쿄 상공 회의소 부회두, 제국 철도 협회 부회장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4] 1909년에 "국민 신문"이 "수완 있는 실업가는 누구인가"로서 일반 투표를 실시한 결과 최고위에 선정되어, "게 갑 장군"이라는 조롱 외에 "이노의 각 씨"라고 친근하게 불리기도 했다. 또한 교육계에서도 큰 발자취를 남겨, 국민 공업 학원 이사장으로서, 그 창립, 경영에 힘썼고, 공업 도덕의 진흥에 힘썼다.
6. 평가 및 비판
6. 1. 긍정적 평가
6. 2. 부정적 평가
7. 저서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한성의 잔몽』(1891), 『예산 의견』(1891), 『저축 장려의 방법』(1902), 『관음이란 무엇인가』(1925), 『후쿠자와 선생님의 조선 경영과 현대 조선의 문화에 관하여』(1934), 『김옥균 군에 대하여』(1937), 『신앙과 정치』(1937) 등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8. 가족 관계
- 아내: 와카(1880년 12월 출생[1] - 사망)는 야마다 소조사부로의 장녀이다.[1]
- 아들: 노보루(1893년 7월 출생[1] - 사망)는 교토 제국 대학 조교수를 역임했다.[31]
- 아들: 고로(1899년 8월 16일 출생[1] - 1981년 11월 18일 사망[32])는 주고쿠 전력 초대 사장, 동력로·핵연료 개발 사업단 초대 이사장을 역임했다.[4]
- 장녀: 유키(1901년생)는 아토미 여자 학원 출신으로, 와카야마 타카네의 아내이다.
- 차녀: 토요(1903년생)는 아토미 여자 학원 출신으로, 히라야마 켄자부로의 아내이다.
- 삼녀: 히데코(1905년생)는 아토미 여자 학원 출신으로, 타키타 준고의 아내이다.
- 손녀: 샤윈 유코(1936년 9월 13일 출생[34] ~ )는 작가이자 화가이다.[3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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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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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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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峡を越えて 「朝のくに」ものがたり (26)ハングル普及に貢献した日本人 中国崇拝一辺倒を打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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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経済新聞社
2022-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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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の歴史改竄 日本統治で搾取……本当はハングルを広めた
https://www.news-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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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部のエネルギーを築いた人々 福沢諭吉の薫陶を受けて政財界で活躍し、矢作水力社長を勤めた 井上角五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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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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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4章 アメリカ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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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田原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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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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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治15年(1882年)10月19日、済物浦条約履行のために日本側の花房公使と明治丸に同船して訪日した修信使は、朴泳孝(正史)、金晩植(副使)、徐光範(従事官)である。また、視察目的で閔泳翊、金玉均が随行している
[7]
문서
滞在中の朝鮮側関係者が花房へ借款等を申し入れし、花房と福澤が便宜を図り、借款不可な残金については『朝鮮国内の教育向上の資金に充当すること』を条件に事実上の日本側の拠出とした。1883年には李氏朝鮮から日本の慶應義塾や士官学校への留学希望者33名の受け入れとともに、井上を含む日本国からの技術者等の派遣により、以降の朝鮮国内では新聞発行などを含む言論の自由やハングル文字の再利用の動きに至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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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韓国研究センターとは | 現代韓国研究センター紹介 | KC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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雁屋哲の今日もま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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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室蘭でフォーラム・5氏が製鉄の歴史、鉄文化について講演(室蘭民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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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イヌ民族関連報道クリッ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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室蘭の製鉄業の祖、井上角五郎を題材に/演劇「鐵の人」来月公演/室蘭と札幌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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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部のエネルギーを築いた人々 木曽谷の夜明け ~その5~ 大同製鋼、東海電極、木曽川電力に貢献した 川崎舎恒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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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都市の電車統一 京鉄の経営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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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戸大学 電子図書館システ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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歌舞伎座百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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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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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外アソシエー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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シャーウィン裕子 -Hiroko Sherwin- 公式サイ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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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ahi.com(朝日新聞社):越境の魅力 日本語の壁を外から内から、軽々と - 話題の本棚 - BOOK
http://book.asahi.co[...]
201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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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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