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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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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은찬은 강원도 원주 출신의 의병장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의병을 일으켰으며,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다시 의병을 조직했다.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본격적인 의병 활동을 시작하여 13도 창의군 결성에 참여, 중군대장으로 활동했다. 한성 진공 작전 실패 후 유격전을 벌이다 체포되어 1909년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건국훈장을 추서했고, 원주에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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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훈장 정보

2. 생애

강원도 원주군 부흥사면(현 원주시 판부면)에서 태어났다. 성리학을 공부하던 유생으로,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발생하자 경상북도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관군의 공격으로 해산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다시 홍천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1907년 8월 군대 해산 이후 본격적인 의병 활동을 이끌었다.

3. 의병 활동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발하여 경상북도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해산 군인들과 민긍호 부대가 합류하면서 군세가 2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직업 군인들의 합류는 의병 부대의 전투력, 조직력, 기동력, 지속성을 강화하고 일본군에 대한 타격력을 증강시키는 데 기여했다.

1907년 9월, 이구채와 함께 강원도 원주에서 활동하며 문경의 이인영을 찾아가 총대장 직을 맡아줄 것을 설득, 이인영이 원주로 오게 하였다. 이후 횡성, 지평(지평) , 춘천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 격문을 보내 11월 경기도 양평(지평리)에 집결할 것을 독려했다. 양주에 모인 의병들은 13도 창의군을 결성,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이은찬은 중군대장으로서 군무를 총괄했다.

3. 1. 초기 의병 활동 (1895년, 1905년)

1905년, 29세의 나이에 일본이 강압적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자 경상북도 지방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해산 군인들이 의병에 합세하였고, 특무정교 민긍호가 300여 명을 이끌고 합류하여 군세가 2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직업군인이 의병부대에 합류하면서 의병부대의 전투력, 조직력, 기동력, 지속성이 실질적으로 증가하였고, 일본군에 대한 타격력도 강화되었다.

1907년 9월, 이은찬은 강원도 원주 일대에서 이구채와 함께 활약하며 문경의 이인영을 찾아갔다. 당시 을미의병 출신인 이인영은 문경에서 은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을미사변 이후 유인석, 이강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은찬 등은 이인영에게 총대장이 되어 줄 것을 4일 동안 간청하였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오늘날, 국가의 일이 급하고 부자(父子)의 은혜가 가벼운데 어찌 사사로운 일로 공적인 일을 뒤로 미루겠습니까?"라는 이은찬의 권유에 이인영은 동의하고 이들과 함께 원주로 출진하였다. 또한 사방으로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지원자의 수는 날마다 늘어갔다.

이후 이은찬은 원주를 떠나 횡성, 지평(현재 양평군 지평면), 춘천 등지를 돌며 의병을 모으는 데 힘썼으며,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전국 각지에 격문을 보내 11월에 경기도 양평(현재 양평군 지평리)으로 집결할 것을 촉구하였다. 의병들이 양주에 집결하자 13도 창의군을 조직하여 이인영을 원수부 13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이은찬 자신은 이인영의 중군대장이 되어 군무를 총괄하였으며, 이구재는 총독장이 되었다.

3. 2. 13도 창의군 결성과 한성 진공 작전 (1907년)

1905년, 29세의 나이에 일본이 강압적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자, 경상북도 지방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였고, 특무정교 민긍호가 300여 명을 이끌고 합류하면서 군세가 2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직업 군인이 의병 부대에 합류하면서 의병 부대는 전투력, 조직력, 기동력, 지속성이 실질적으로 증가했고, 일본군에 대한 타격력도 강화되었다.

1907년 9월, 이은찬은 강원도 원주 일대에서 이구채와 함께 활약하며 문경의 이인영을 찾아갔다. 당시 을미의병 출신인 이인영은 문경에서 은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을미사변 이후 유인석, 이강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이인영에게 총대장이 되어 줄 것을 4일 동안 간청했다. "국가의 일이 급하고 부모와 자식 간의 은혜가 가벼운데, 어찌 사사로운 일로 공적인 일을 뒤로 미루겠습니까?"라는 이은찬의 권유에 이인영은 동의하고 이들과 함께 원주로 출진했다. 또한 사방으로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지원자 수는 날마다 늘어났다.

이후 이은찬은 원주를 떠나 횡성, 지평(현재 양평군 지평면), 춘천 등지를 돌며 의병을 모으는 데 힘썼으며,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전국 각지에 격문을 보내 11월에 경기도 양평(현재 양평군 지평리)에 집결할 것을 촉구했다. 의병들이 양주에 집결하자 13도 창의군을 조직하여 이인영을 원수부 13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이은찬 자신은 이인영의 중군대장이 되어 군무를 총괄했으며, 이구재는 총독장이 되었다.

3. 3. 한성 진공 작전 실패 이후의 유격전 (1908년 ~ 1909년)

한성탈환작전 실패 후, 이은찬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양주로 돌아와 2년 동안 경기도황해도 각지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주요 전투로는 계평리 싸움, 연평도 기습, 석우리 전투 등이 있다.

1908년 12월, 이은찬은 양근·포천 쪽으로 이동하여 임진강 유역에서 허위와 함께 임진강 의병 연합 부대를 만들었다. 허위를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농민 출신 의병장 김수민 의병 부대와도 협력하였다.

1908년 말 허위와 김수민이 순국한 후, 의병 부대는 수십 명에서 200명 정도의 규모로 나뉘어 양주, 포천, 영평, 연천, 삭녕, 금천, 배천, 연안 등지에서 활동했다.

1909년 1월 초,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자 이은찬 의병 부대는 연안·청단역 사이를 거쳐 남쪽의 연안 도서 지방으로 이동했다. 1월 19일 밤, 의병들은 두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연평도 일본군 파견대를 기습 공격하고 증산도로 후퇴했다. 이 과정에서 이근수 등 46명이 순국했다.

1909년 2월 27일, 이은찬은 양주군 북방 석우리에서 윤인순, 정용대 등 약 300명의 부하를 이끌고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이후 3월, 의병 부대를 해산하고 만주 북간도로 건너가 군사를 양성하여 항전을 계속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서울의 밀정 박노천, 신좌균이 조수연을 시켜 군자금을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이은찬을 서울로 유인하는 함정을 팠다.

4. 체포와 순국 (1909년)

1909년 3월 31일 이은찬은 모사에 빠져 한성 용산역에서 잠복 중이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경성지방법원은 5월 10일 교수형을 선고했고, 6월 16일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향년 33세였다.

5. 사후

그의 유해는 심복 부하인 박찬문이 거두어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 현 천주교 공동묘지에 안장하였으며,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도 묘소가 마련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968년 10월 27일 강원도 원주시 학성2동에 의병장이은찬공추모비가 건립되었다.

6. 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이석하
부인밀양 박씨치교의 딸
아들이한주
동생이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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