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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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인임은 고려 말의 문신으로, 공민왕, 우왕 대에 권력을 행사했다. 성산 이씨 출신으로, 홍건적과 최유의 침입을 격퇴하고 원나라의 동녕부를 토벌하는 등 군사적 공을 세웠다. 신돈 사후 수문하시중에 임명되어 광평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공민왕 사후 우왕을 옹립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권문세족의 수장으로서 친원 정책을 펼치며 신진사대부들을 억압하고 심복들을 요직에 앉혀 토지를 수탈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1388년 최영, 이성계 등에 의해 제거되었으며, 사후 명나라에서 이성계의 부친으로 기록되어 외교적 마찰을 빚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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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임 - 이숭인
이숭인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학자로,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고, 정몽주 등과 함께 성균관에서 학관을 겸하며 명나라와의 외교 업무를 수행했으나, 정도전 등과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며 유배와 감금을 반복하다 조선 건국 후 정몽주의 일당으로 몰려 처형당했다. - 이인임 - 이인복 (1308년)
이인복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이조년의 손자이며 주자학에 밝았고, 과거 급제 후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조일신의 난을 진압하고 찬성사에 올라 공신이 되었으며, 신돈에게 반대하여 퇴직 후 사망했다. - 권문세족 - 지윤
지윤은 고려 말 무녀 출신 어머니를 두었음에도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판숭경부사에 이르렀으나, 권신 이인임의 심복으로 활동하며 친명파를 탄압하고 권력을 남용했다는 비판과 함께 북원과 심왕의 위협에 맞서기도 했으며, 이인임 제거 실패 후 처형, 조선 개국 후 왕실 외척이 되었지만 반역자로 기록되었다. - 권문세족 - 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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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배는 고려 후기 무신으로, 홍건적 격퇴에 기여하여 공신이 되었으나 김용의 모함으로 처형되었으며, 정몽주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인임 | |
---|---|
기본 정보 | |
직책 | 고려국 서북면 도통사 |
군주 | 민왕 왕기 |
섭정 | 신돈(前) |
임기 | 1368년 2월 29일 ~ 1371년 8월 29일 |
직책2 | 직하시중 겸 섭정대신 |
군주2 | 고려 우왕 왕우 |
임기2 | 1380년 1월 12일 ~ 1383년 1월 14일 |
이름 | 광평부원군 이인임 |
출생일 | 1312년 |
출생지 | 경상도 성주군 고령현 |
사망일 | 1388년 6월 |
사망지 | 고려 경상도 경산부에서 병사 |
정당 | 권문세족 후예 세력 |
본관 | 성주(星州) |
종교 | 유교(성리학) → 불교 |
별명 | 호(號)는 승암(勝巖) 시호(諡號)는 황무(荒繆) |
배우자 | 有 |
부모 | 이포(부), 경주 설씨 부인(모) |
형제 | 이인복(형) 이인미(아우) 이인립(아우) 이인달(아우) 이인민(아우) |
친인척 | 이조년(할아버지) 이장경(증조할아버지) 이백년(큰할아버지) 이천년(큰할아버지) 이만년(큰할아버지) 이억년(큰할아버지) 이인기(5촌 종숙부) 이승경(5촌 종숙부) 이능(5촌 종고모부) 이제(조카) 이직(조카) 하윤(조카사위) 이숭인(5촌 조카) 이교(고모부) 이임(고종사촌) 근비 이씨(진외종질녀) 우왕(진외종질서) 배극렴(고종육촌) 조민수(고종육촌) 신원경(처외숙부) 신돈(외사촌 처남) 도길부(사돈) |
2. 생애
고려 경상도 성주군 고령현 성산면(지금의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에서 대제학 이조년의 손자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성산군 이조년이고, 아버지는 성산후 이포이다. 이인임은 음보로 관직에 올라 공민왕 초에 좌부승선으로 승진했다. 1359년(공민왕 8년) 서경존무사로 임명되어 평양으로 부임하였고, 숙부 이승경과 함께 홍건적의 침입을 막아 1등 공신에 올랐다.[1]
1364년(공민왕 13년) 최유 등이 덕흥군을 받들고 고려에 쳐들어오자 서북면 순문사 겸 평양윤으로 이를 격퇴했고, 1368년(공민왕 17년) 서북면도통사로 원의 동녕부를 토벌하여 공을 세웠다. 신돈이 살해된 후 한직으로 밀려났으나, 1374년(공민왕 23년) 수문하시중에 임명되고, '''광평부원군'''에 봉해졌다.
그 해 공민왕이 시해되자 홍륜, 최만생과 그 일파를 모두 처형하고, 명덕태후는 왕족으로 대통을 잇게 하려 하였으나, 이인임은 공민왕의 유일한 아들 모니노를 우왕으로 추대하여 정권을 잡았다. 정권 장악 후에는 권문세족의 수장으로서 친원 정책을 견지하여 친명 정책을 주장하던 신진사대부와 개혁 세력 관료들을 추방했고, 10년간 우왕을 섭정했다.
이후 지윤, 임견미, 염흥방 등 심복들을 요직에 앉히고 토지를 수탈하게 했으며, 문하시중 경복흥을 참소하여 귀양보냈다. 노쇠하여 우왕에게 사직을 청했으나 우왕이 받아들이지 않았고, 영문하부사, 영삼사사, 영중방 사헌 개성부사에 임명되었다가 1386년(우왕 12년) 좌시중이 되었고 이듬해 노병으로 은퇴하였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고려 경상도 성주군 고령현 성산면(지금의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성산군 이조년이고, 아버지는 성산후 이포(李褒)이다.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이인임은 이포의 둘째 아들이며, 이인복의 동생이자 이인미의 둘째 형이다. 고려 멸망 후 은거한 도은 이숭인의 5촌 당숙이기도 하다.[1]음보(蔭補)로 전객시승(典客寺丞)이 되고, 전법총랑(典法摠郞)을 거쳐 공민왕 초에 좌부승선(佐副承宣)으로 승진했다. 1359년(공민왕 8년) 서경존무사에 임명되어 평양으로 부임하였고, 그해 숙부 이승경과 함께 홍건적의 침입을 막았으며, 1등 공신에 올랐다.[1]
2. 2. 공민왕 시대의 활동
1359년(공민왕 8년) 서경존무사로 임명되어 평양으로 부임하였고, 그해 숙부 이승경과 함께 홍건적의 침입을 막아 1등 공신에 올랐다.[1]1364년(공민왕 13년) 최유 등이 덕흥군을 받들고 고려에 쳐들어오자 서북면 순문사 겸 평양윤으로 이를 격퇴했다. 1368년(공민왕 17년) 서북면도통사로 원의 동녕부를 토벌하여 공을 세웠다. 한때 신돈의 문하에 있다가 신돈이 살해된 후 한직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1374년(공민왕 23년) 수문하시중에 임명되고,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에 봉해졌다. 그해 공민왕이 시해되자 공민왕을 죽인 홍륜, 최만생과 그 일파를 모두 처형하고, 명덕태후는 왕족으로 대통을 잇게 하려 하였으나, 이인임은 공민왕의 유일한 아들인 모니노를 우왕으로 추대하여 정권을 잡았다.
2. 3. 우왕 옹립과 권력 장악
1359년(공민왕 8년) 서경존무사로 평양에 부임, 그해 숙부 이승경과 함께 홍건적의 침입을 막아 1등 공신에 올랐다.[1] 1364년(공민왕 13년) 덕흥군을 받들고 쳐들어온 최유(崔濡)를 격퇴하고, 1368년(공민왕 17년) 서북면도통사로 원의 동녕부를 토벌하였다. 신돈 사후 한직으로 밀려났으나 1374년(공민왕 23년) 수문하시중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에 봉해졌다. 그해 공민왕이 시해되자 홍륜, 최만생 일파를 처형하고, 명덕태후의 뜻에 반하여 공민왕의 아들 모니노를 우왕으로 추대하여 정권을 잡았다. 정권 장악 후 친원 정책을 견지, 친명 정책을 주장하던 신진사대부들을 추방하고 10년간 우왕을 섭정했다. 지윤, 임견미, 염흥방 등 심복들을 요직에 앉히고 토지를 수탈하게 했으며, 문하시중 경복흥을 참소하여 귀양보냈다. 노쇠하여 우왕에게 사직을 청했으나 우왕이 받아들이지 않았고, 1386년(우왕 12년) 좌시중이 되었다가 이듬해 은퇴하였다.2. 4. 권력 남용과 실정
1374년 (공민왕 23년) 수문하시중에 임명되고,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에 봉해졌다.[1] 그 해 공민왕이 시해되자 공민왕을 죽인 홍륜, 최만생과 그 일파를 모두 처형하고 왕족으로 대통을 잇게 하려는 명덕태후 (공원왕후)의 뜻에 반하여 공민왕의 유일한 아들인 모니노를 우왕으로 추대하여 정권을 잡았다. 정권을 장악한 후에는 권문세족의 수장으로서 친원 정책을 견지하여 친명 정책을 주장하던 신진사대부들과 개혁 세력의 관료들을 추방했고, 10년간 우왕을 직접 섭정했다.그 후 지윤, 임견미, 염흥방 등 심복들을 요직에 앉히고 토지를 수탈하는 등 탐학을 자행하게 두었으며, 문하시중 경복흥을 도당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참소하여 귀양보냈다.[1]
2. 5. 은퇴와 죽음
1386년(우왕 12년) 좌시중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노병으로 은퇴하였다.[1] 은퇴 이후 임견미, 염흥방 등 이인임의 일파는 탐학과 부패를 더욱 극악무도하게 일삼아 고려 조정의 몰락을 초래했다. 1388년 이러한 횡포에 분격한 최영, 이성계 등에 의해 이인임 일당은 축출되었다. 임견미, 염흥방, 도길부, 이성림, 반복해 등은 가족, 친척, 측근, 악노(惡奴)들과 함께 참수되었고, 이인임은 최영의 건의로 경산부에 안치되었다가 곧 병사했다. 시호는 황무이다.3. 평가
이인임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조선 왕조 측에서는 그를 고려 멸망의 원흉으로 간주하여 부정적으로 묘사했지만, 이러한 평가는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고혜령은 '이인임 정권에 대한 일고찰'이라는 논문에서 이인임이 실제로는 권력 남용이나 부패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그의 몰락은 임견미, 염흥방 등 부패한 측근들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2] 이색은 이인임과 동시대 인물로, 자신의 저서에서 이인임을 명재상으로 칭송하기도 했다.[2]
3. 1. 부정적 평가
그러나 이인임이 고려 말을 망친 간신이라는 이야기는 조선 왕조 측이 조작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왕조는 우왕을 거짓 임금으로 조작했기 때문에, 거짓 임금을 옹립한 이인임도 사실과 다르게 부정적으로 조작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종계변무' 사건으로 인해 조선 왕조의 화풀이 대상으로 간신으로 남았다는 것이 이인임에 관한 가장 유명한 논문인 '이인임 정권에 대한 일고찰'에서 고혜령 씨가 밝히고 있다.[2] 실제 이인임과 같은 시대를 살았고, 조정에서 늘 보아왔던 이색은 그의 저서 '목은집'에서 그를 명재상으로 칭송하는 글들을 여럿 남겼다. 심지어 조선 왕조 측에서도 이성계는 이인임과 조민수를 복권시키려고 했고, 이인임의 경우 대역 죄인에게 관행처럼 해왔던 해당 집을 헐고 연못으로 만드는 행동을 나중에 그만두고 그 연못을 흙으로 메꾸는 조치도 취해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2]3. 2. 긍정적 평가
고혜령은 '이인임 정권에 대한 일고찰'이라는 논문에서 이인임이 불법, 권력 남용, 부패, 수탈과 관계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이인임 밑에 있던 임견미, 염흥방, 도길부 등의 탐학과 부패가 극심하여 1388년 우왕, 최영, 이성계가 주도한 '부패 권문세족' 대숙청에서 이들이 모두 가족, 친척, 측근, 악노들까지 사형될 때, 이인임과 그 가족, 친척들은 살아남아 이후 조선 왕조에서 출사해 관리가 된 점을 들었다. 연려실기술의 이긍익과 더불어 조선 시대 최고의 역사학자이자 조선 왕조를 제외한 우리나라 전체 역사를 체계화한 안정복이 그의 문집인 순암집에서 스승이자 조선 시대의 대표 실학자 이익에게 '이인임은 과연 어떤 사람이냐'고 물은 것 역시 이인임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1]고혜령은 이 논문에서 이인임 정권이 흔히 알려진 것처럼 우왕 시절 내내 절대권력을 누리지 못했고, 최영과의 연합 정권으로 정권을 유지했으며 독자적인 세력을 만들지 못해 1388년의 부패 권문세족 대숙청 때 몰락했다고 설명했다.[1]
3. 3. 재평가의 필요성
그러나 이인임이 고려 말을 망친 간신이라는 이야기는 조선 왕조 측에서 조작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왕조는 우왕을 거짓 임금으로 조작했기 때문에, 거짓 임금을 옹립한 이인임도 사실과 다르게 부정적으로 조작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종계변무' 사건으로 인해 조선 왕조의 화풀이 대상으로 간신으로 남았다는 것이 이인임에 관한 가장 유명한 논문인 '이인임 정권에 대한 일고찰'에서 고혜령 씨가 밝히고 있다.[2]실제 이인임과 같은 시대를 살았고, 조정에서 늘 보아왔던 이색은 그의 저서 '목은집'에서 그를 명재상으로 칭송하는 글들을 여럿 남겼다. 심지어 조선 왕조 측에서도 이성계는 이인임과 조민수를 복권시키려고 했다. 이인임의 경우 대역죄인에게 관행처럼 해왔던 해당 집을 헐고 연못으로 만드는 행동을 나중에 그만두고 그 연못을 흙으로 메꾸는 조치도 취해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2]
고혜령 씨는 '이인임 정권에 대한 일고찰'이라는 논문에서 이인임은 불법, 권력 남용, 부패, 수탈과 관계가 없었는데, 그 밑에 있던 임견미, 염흥방, 도길부 등의 탐학과 부패가 극심해 1388년 우왕, 최영, 이성계가 주도한 '부패 권문세족' 대숙청에서 이들이 모두 가족, 친척, 측근, 악노들까지 모두 사형될 때 이인임과 그 가족, 친척들은 살아남아 이후 조선 왕조에서 출사해 관리가 된 점을 지적했다. 이는 조선 시대의 야사 모음집인 연려실기술의 이긍익과 조선 시대 최고의 역사학자인 안정복이 그의 문집인 순암집에 스승이자 조선 시대의 대표 실학자 이익에게 '이인임은 과연 어떤 사람이냐'고 물은 대목에서도 잘 나온다. 즉, 그는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에서 나온 이인임의 간신론에 의문을 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고혜령 씨의 이 논문에서는 이인임 정권이 흔히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우왕 시절 내내 절대권력을 누리지 못했고, 최영과의 연합 정권으로 정권을 유지했으며 독자적인 세력을 만들지 못해 1388년의 부패 권문세족 대숙청 때 몰락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4. 사후 사건
명나라 법전 및 역사서인 대명회전에서 조선 왕조의 계보를 작성하던 도중에 이인임을 이성계의 부친(실제 부친은 쌍성총관부의 유력자인 이자춘)으로 기입하여,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외교적 마찰이 발생하였다.
1518년(중종 13년) 이계맹을 주청사로 보내 대명회통에 이인임과 단(旦, 태조 이성계의 본명)이 고려 사왕(四王, 공민, 우, 창, 공양)을 시해하였다는 잘못된 기록까지 확인했다. 이러한 외교적 마찰은 종계변무로 이어져 남곤이 주청사로 가서 시정을 요구하는 등 중종 때만 해도 여러 번 사신을 보냈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1584년(선조 17년) 종계변무주청사 황정욱 등이 가서 정정키로 확정을 보고, 1588년 유홍이 고쳐진 《대명회전》을 가지고 돌아와 일단락되었다. 결국 명나라 만력제 치세에 이르러서야 개정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5.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조부 | 이조년 |
아버지 | 이포(李褒) |
어머니 | 경주 설씨 부인(慶州 薛氏 夫人) |
형 | 이인복 |
아우 | 이인미 |
아우 | 이인립 |
아우 | 이인달 |
아우 | 이인민 |
부인 | 부인 박씨 |
아들 | 이환(李瓛) |
아들 | 이민(李珉) |
양자 | 우왕 |
양녀 겸 며느리 | 근비 이씨 |
양손자 | 반복해 |
양손자 | 창왕 |
장녀 | 연안 이씨 |
차녀 | 안동 권씨 |
삼녀 | 진주 강씨 |
6. 이인임이 등장하는 작품
참조
[1]
서적
고려사
[2]
역사기록
태조실록
1394-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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