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제26왕조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집트 제26왕조는 기원전 664년부터 기원전 525년까지 이집트를 통치한 왕조이다. 이집트 제24왕조의 계승을 주장하며, 프삼티크 1세가 이집트 전체를 통일하면서 시작되었다. 아시리아의 지배와 신 바빌로니아 제국의 위협 속에서 이집트의 자립을 위해 노력했으나, 페르시아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이 왕조는 '사이스 르네상스'로 불리는 고왕조 및 중왕조 양식을 본뜬 미술 양식을 발전시켰으며, 네카우 1세, 프삼티크 1세, 네코 2세, 아흐모세 2세, 프삼티크 3세 등의 파라오가 통치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기원전 6세기 이집트 - 네카우 2세
네카우 2세는 이집트 제26왕조의 파라오로, 아시리아 지원과 유다 왕국 조공국화, 카르케미시 전투 패배, 무역 장려, 그리스 관계 강화, 운하 건설 시도, 아프리카 일주 명령 등의 활동을 했다. - 기원전 6세기 이집트 - 이집트 말기왕조
이집트 말기 왕조는 기원전 664년부터 기원전 332년까지 이집트를 통치한 시기로, 독립과 페르시아 지배가 반복되었으며 사이스 왕조가 통일을 이루고 근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다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으로 헬레니즘 시대가 시작되었다. - 기원전 7세기 이집트 - 네카우 2세
네카우 2세는 이집트 제26왕조의 파라오로, 아시리아 지원과 유다 왕국 조공국화, 카르케미시 전투 패배, 무역 장려, 그리스 관계 강화, 운하 건설 시도, 아프리카 일주 명령 등의 활동을 했다. - 기원전 7세기 이집트 - 프삼티크 1세
프삼티크 1세는 아시리아의 지원으로 이집트 제26왕조를 창건한 파라오로, 이집트 통일, 경제 재건, 군사력 강화, 활발한 군사 활동을 펼쳤다.
이집트 제26왕조 - [전쟁]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정식 명칭 | 이집트 제26왕조 |
존속 기간 | 기원전 664년 ~ 기원전 525년 |
정치 체제 | 군주제 |
수도 | 사이스 |
공용어 | 이집트어 |
종교 | 고대 이집트 종교 |
![]() | |
역사 | |
기원 | 제25왕조로부터 분리 |
주요 사건 | 앗시리아의 이집트 정복 카르케미시 전투 |
멸망 | 아케메네스 제국의 침공 |
역대 파라오 | |
초대 파라오 | 프삼티크 1세 (기원전 664년 ~ 기원전 610년) |
마지막 파라오 | 프삼티크 3세 (기원전 526년 ~ 기원전 525년) |
이전과 이후 | |
이전 | 아시리아의 이집트 정복 이집트 제3중간기 이집트 제25왕조 |
이후 | 이집트 제27왕조 |
2. 역사
이집트 제26왕조는 이집트 제24왕조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프삼티크 1세는 바켄라네프의 후손으로 추정되지만, 다른 자료에서는 고대 리비아 출신이라고도 한다.[2][3]
타하르카와 탄타마니 통치 기간 동안 아시리아가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나파타를 기반으로 한 이집트 제25왕조가 붕괴된 후, 프삼티크 1세는 이집트 전체의 유일한 왕으로 인정받았다. 프삼티크 1세는 리디아의 기게스 왕과 동맹을 맺고 카리아와 고대 그리스에서 온 용병을 이용하여 이집트 전체를 통일하였다.
기원전 612년 니네베 약탈과 신 아시리아 제국의 몰락으로 프삼티크 1세와 그 후계자들은 근동에서 이집트의 권력을 다시 주장하려 했지만, 네부카드네자르 2세 치하의 신 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좌절되었다. 아프리에스는 그리스 용병을 통해 바빌로니아의 이집트 정복 시도를 막아냈다.
기원전 525년, 캄비세스 2세가 이끄는 페르시아 군이 이집트를 침략하여 프삼티크 3세를 처형하면서 제26왕조는 멸망했다. 캄비세스 2세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영토인 제1 이집트 총독령을 설립하고, 이집트 제27왕조의 첫 번째 파라오로 즉위했다.
2. 1. 아시리아의 이집트 지배와 사이스의 왕가
기원전 7세기 전반, 아시리아가 이집트를 침입하여 이집트 제25왕조가 붕괴하였다. 사이스를 지배하고 있던 네코 1세와 프삼티크 1세는 아시리아에 의해 이집트의 관리를 맡게 되었으며, 각각 '사이스의 왕', '아트리비스의 왕'이라는 지위를 승인받았다.타하르카의 후계자 타누트아멘이 체제를 재건하여 기원전 664년에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북상하였다. 네코 1세는 아시리아의 종속 왕으로서 타누트아멘과 싸워 패배하여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따르면, 프삼티크 1세도 아시리아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시리아 왕 아슈르바니팔의 재차 원정으로 같은 해 안에 타누트아멘이 격파되어 제25왕조가 멸망하자, 프삼티크 1세는 다시 왕의 지위를 보장받았다. 이를 이집트 제26왕조의 성립으로 간주하며, 아시리아의 비호 아래 그 세력을 확고히 해나가게 된다.
2. 2. 이집트의 자립
프삼티크 1세는 타하르카와 탄타마니 통치 기간 동안의 이집트 아시리아 정복과 그에 따른 나파타를 기반으로 한 이집트 제25왕조의 붕괴 이후, 이집트 전체의 유일한 왕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리디아의 기게스 왕과 동맹을 맺고, 카리아와 고대 그리스에서 온 용병을 이용하여 이집트 전체를 자신의 통치 아래 통일했다.[2][3]프삼티크 1세는 하이집트 지배권을 확립한 후, 상 이집트의 테베에 대해서도 자신의 권위를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제25왕조 시대부터 테베의 장관 지위에 있던 멘투엠하트(Mentuemhat)는 프삼티크 1세의 딸 니토크리스(Nitocris)가 장래 "아멘의 성처(聖妻)" 지위에 오르는 것을 받아들였다.
이처럼 국내 지배를 확립한 프삼티크 1세는 신왕국의 행정 제도를 본뜬 내정 개혁에 착수했다. 그러나 그 칭호는 고왕조풍의 것을 채택하여 의식적으로 "과거의 영광"을 추구했다. 이러한 지배자의 경향은 미술품에도 강하게 영향을 미쳐, 고왕조나 중왕조풍 양식을 본뜬 복고적인 미술 양식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사이스 르네상스(Sais Renaissance)"라고 부른다.
기원전 7세기경에는 아시리아의 세력이 축소되면서 그 종주권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시리아 방면으로 세력 확대를 꾀했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프삼티크 1세는 아슈도드(Ashdod)를 29년 동안 공략하여 함락시켰다. 한편, 이 무렵 오리엔트에 침입한 스키타이인이 시리아 지방에 들어오자, 프삼티크 1세는 "선물과 애원"으로 그들의 공격을 회피했다고 한다.
2. 3. 아시리아의 멸망
아슈르바니팔 왕의 치세 말기부터 아시리아는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동쪽에서는 이란 고원을 중심으로 한 메디아[17]가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기원전 7세기 경에는 바빌로니아 총독 나보폴라사르도 아시리아에 반기를 들어 독자적인 왕국을 세웠다 (신바빌로니아[18]). 메디아와 신바빌로니아는 동맹을 맺고 아시리아를 공격하여 수도 니네베를 비롯한 중심 지역을 제압했다.프삼티크 1세는 과거의 지배자였던 아시리아를 돕는 길을 선택하여 기원전 7세기에 시리아로 출병하여 신바빌로니아 군과 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대세는 변하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디아와 신바빌로니아 연합군에 의해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가 함락되었고, 아시리아 귀족이었던 아슈르-우발리트 2세는 하란으로 도주했다.
기원전 610년에 프삼티크 1세가 사망하자, 아들 네코 2세가 왕위를 계승하여 아시리아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며 시리아로 재출병했다. 그는 도중에 유다 왕 요시야를 살해하고[19], 팔레스타인을 통과하여 하란의 아슈르-우발리트 2세와 합류했지만, 신바빌로니아 군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퇴각했고, 이로써 아시리아는 기원전 609년에 멸망했다.
아시리아 구출에 실패한 네코 2세는 시리아 지방에서 패권을 확립하려 했으나, 아시리아를 격파한 신바빌로니아 왕 나보폴라사르는 아들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게 명하여 시리아의 이집트 군을 공격했다. 이집트와 신바빌로니아의 시리아에서의 싸움은 수년간 계속되었지만, 메기도 전투 (기원전 609년)에서 유다 왕국을 격파하고, 마침내 기원전 605년, 카르케미시 전투에서 이집트 군은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고, 네코 2세의 시리아 정책은 완전히 좌절되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여세를 몰아 이집트까지 진군해 왔을 때 이를 격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후 시리아 지방에서의 군사 활동은 할 수 없었다.
2. 4. 시리아와 리비아에서의 패배
아시리아 멸망 후 오리엔트 세계에서 세력을 떨친 것은 이집트, 신바빌로니아, 메디아, 아나톨리아 반도의 리디아라는 네 개의 강대국이었다. 이집트에게 가장 우려스러운 상대는 국경을 접한 신바빌로니아였으며, 네코 2세가 패배한 후에도 시리아를 둘러싼 전쟁이 반복되었다.네코 2세 사후, 기원전 595년에 왕위를 계승한 Psamtik II|프삼티크 2세영어는 신 바빌로니아와의 전쟁을 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음 왕인 Apries|아프리에스영어(우아히브라) 시대에는 다시 시리아 지방에서 신 바빌로니아와 충돌했다. 유다 왕국은 신 바빌로니아에 제압된 후에도 이집트와의 완충국 역할을 기대하며 종속국으로 존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588년 유다 왕국의 주전파가 신 바빌로니아로부터의 이반을 꾀하자, 아프리에스는 이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신속하게 유다 왕국으로 출병하여 기원전 587년에는 수도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아프리에스는 즉시 구원군을 파견하여 예루살렘 근교에서 신 바빌로니아 군과 싸웠으나 패배했고, 예루살렘도 함락되어 유다 왕국은 완전히 멸망했다.[20]
시리아에서 패배한 아프리에스는 이후에도 군사적인 실패를 거듭했다. 리비아의 식민 도시 퀴레네에 그리스인들이 대거 이주하여 주변 리비아인들과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리비아인의 왕 아디크란은 아프리에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아프리에스는 퀴레네를 향해 대군을 파견했지만, 테스테 샘 부근의 전투에서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퇴각하게 되었다.[21]
2. 5. 반란과 찬탈
리비아에서 생환한 이집트 병사들은 아프리에스 왕이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의로 출병을 강행했다며 반란을 일으켰다. 아프리에스는 병사들의 반란을 설득으로 진압하려 시도하여 누비아 원정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아흐메스 2세를 파견했다. 이아흐메스 2세는 반란 병사들과 협상을 거듭했지만, 반란 병사들은 이아흐메스 2세에게 자신들이 아프리에스보다 이아흐메스 2세 쪽을 왕으로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고 전했고, 이아흐메스 2세는 이에 동조하여 왕을 칭하며 반란 측으로 돌아섰다.이아흐메스 2세가 반란 측에 가담한 사실이 알려지자 아프리에스의 인사상의 실책도 더해져 많은 이집트인들이 이아흐메스 2세 측에 붙었다. 이 때문에 아프리에스는 이오니아계 그리스인과 카리아인 용병을 중심으로 한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토벌하러 갔고, 모멘피스(현: 메누프) 마을에서 이아흐메스 2세의 군대와 싸웠다. 아프리에스의 용병들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수적으로 열세하여 패배했고, 아프리에스는 이아흐메스 2세에게 붙잡혔다. 그리고 아프리에스는 처형되었고, 그의 유해는 역대 왕들과 마찬가지로 왕에게 걸맞은 예식에 따라 매장되었다.[22]
이리하여 이아흐메스 2세는 왕위 찬탈에 성공했고, 이후 40년 이상 이집트를 통치하게 된다.
2. 6. 이아흐메스 2세
이아흐메스 2세는 시우프라는 마을의 평민 출신으로,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따르면 젊은 시절부터 술과 장난을 좋아하고 도둑질을 일삼았다고 한다. 왕위에 오른 후에도 아침에는 정무에 힘썼지만, 이후에는 술을 마시고 떠드는 등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행동을 보였다.[5] 신하들이 이를 걱정하여 간언했지만, 이아흐메스 2세는 활을 당기고 풀어놓는 것에 비유하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다.[5]처음에는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이집트인들에게 얕보였지만, 점차 주변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의 치세 하에 이집트는 전례 없는 번영을 누렸다고 한다.[5] 그는 각지에서 건축 활동을 활발히 하는 한편, 나우크라티스로 이주한 그리스인들에게 상업상의 특권을 부여하여 대외 무역 확장을 꾀했다.[5] 또한 그리스를 편애하여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재건 비용으로 거액을 제공하기도 했다.[5] 대외적으로는 키프로스를 복속시키고, 신바빌로니아와의 관계 개선을 통해 국경을 안정시켰다.[5]
2. 7. 아케메네스 왕조의 이집트 정복
아케메네스 왕조(페르시아 제국)의 등장은 이아흐메스 2세 치세 말기 오리엔트 세계의 정치 정세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본래 메디아에 종속된 작은 왕국이었던 아케메네스 왕조는 키루스 2세 시대에 메디아를 병합하였다(기원전 550년).[2]이아흐메스 2세는 신바빌로니아의 왕 나보니두스,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 등과 동맹을 맺고 이에 대응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키루스 2세에게 멸망당했고, 이집트 침공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키루스 2세가 카스피 해 지역 전투와 마사게타이인과의 싸움에서 전사하면서(기원전 530년) 진군은 늦어졌지만, 그의 후계자 캄비세스 2세는 기원전 526년 말 또는 이듬해 초 이집트 원정을 시작했다.[2]
이아흐메스 2세는 사모스의 참주 폴리크라테스와 동맹을 맺는 등 전쟁 준비에 힘썼으나, 폴리크라테스는 아케메네스 제국 측으로 돌아섰고, 이아흐메스 2세는 전쟁 직전(기원전 526년 말) 사망하였다. 아들 프삼티크 3세가 왕위를 계승하여 이오니아계 그리스인과 카리아인 용병을 이끌고 나일강 펠루시움 하구에서 페르시아군과 맞섰으나 패배하고 멤피스로 후퇴했다.[2]
프삼티크 3세는 항복 권고 사자를 살해하고 농성했으나, 멤피스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에서 패배했다. 캄비세스 2세에게 끌려간 그는 답변의 훌륭함으로 처형은 면했지만, 반란을 기획하다 발각되어 처형당했고, 제26왕조는 막을 내렸다.[2]
3. 역대 파라오
파라오 | 이미지 | 프레노멘 (왕위명) | 호루스 이름 | 통치 기간 | 매장지 | 배우자 | 설명 |
---|---|---|---|---|---|---|---|
프삼티크 1세 (프사메티쿠스 1세) | ![]() | 와히브레 | 아이브 | 기원전 664년 ~ 기원전 610년 | 사이스 | 메히텐웨스케트 | 이집트를 재통일하고 누비아인의 상 이집트 지배를 종식시켰다. 마네토는 그의 통치 기간을 54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
네코 2세 | ![]() | 웨헤미브레 | 시아이브 | 기원전 610년 ~ 기원전 595년 | 케데브네이티르비네트 1세 | 네코 2세는 여러 성경에 언급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파라오이다. | |
프삼티크 2세 (프사메티쿠스 2세) | ![]() | 네페리브레 | 메네키브 | 기원전 595년 ~ 기원전 589년 | 타쿠이트 | ||
와히브레 하아이브레 (아프리에스) | ![]() | 하아이브레 | 기원전 589년 ~ 기원전 570년 | 와히브 | 아흐모세 2세에 의해 전복되어 망명했다. 바빌론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돌아왔으나 패배했고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마네토는 그의 통치 기간을 19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 ||
아흐모세 2세 (아흐모세 2세) | 크넴-이브-레 | 세멘마트 | 기원전 570년 ~ 기원전 526년 | 사이스 | 텐크헤타 낙투바스테라우 |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침략했을 때, 헤로도투스는 그가 아흐모세의 이전 악행과 속임수에 대한 복수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의 시신을 발굴하여 훼손하고 미라의 잔해를 불태웠다고 주장한다. | |
프삼티크 3세 (프사메티쿠스 3세) | ![]() | 앙크카엔레 | (미상) | 기원전 526년 ~ 기원전 525년 | 헤로도투스에 따르면 페르시아의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프삼티크 3세를 포로로 잡기 전, 그는 단 6개월 동안 통치했다. 페르시아 포로 생활 중 자살했다. |
4. 예술
프삼티크 1세는 국내 지배를 확립한 후 신왕국의 행정 제도를 본뜬 내정 개혁에 착수했다. 그는 고왕조풍의 칭호를 채택하여 의식적으로 "과거의 영광"을 추구했다. 이러한 경향은 미술품에도 강하게 영향을 미쳐, 고왕조나 중왕조풍의 양식을 본뜬 복고적인 미술 양식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사이스 르네상스(Sais Renaissance)"라고 부르며, 이 시기에 제작된 조상이나 부조 중에는 현대 학자가 고왕조 시대에 제작된 것인지 제26왕조 시대의 것인지 판별하기 어려울 정도의 것도 있다.
5. 고고학
2020년 5월, 에스더 폰세가 이끄는 이집트-스페인 고고학 발굴단은 고대 옥시린쿠스 유적에서 이집트 제26왕조 (엘-사위 시대라고도 함)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약을 바른 석회암으로 지어진 독특한 묘지를 발견했다. 고고학자들은 또한 청동 주화, 점토 인장, 로마 묘비, 작은 십자가 등도 발굴했다.[4][5][6] 2020년 10월 3일, 이집트는 약 2,500년 전의 이집트 제26왕조 시대의 사제와 서기관 59개의 관을 공개했다.[7]
참조
[1]
서적
The Complete Royal Families of Ancient Egypt
The American University in Cairo Press
2004
[2]
서적
Ancient Greece
https://books.google[...]
1913
[3]
서적
The A to Z of Ancient Egyptian Warfare
https://books.google[...]
Scarecrow Press
2010-06-07
[4]
웹사이트
Egypt makes major archaeological discovery amid coronavirus crisis
https://www.al-monit[...]
2020-05-26
[5]
웹사이트
Unique cemetery dating back to el-Sawi era discovered in Egypt amid coronavirus crisis
https://zeenews.indi[...]
2020-05-28
[6]
웹사이트
StackPath
https://dailynewsegy[...]
2020-05-18
[7]
웹사이트
Egypt unveils 59 ancient coffins in major archaeological discovery
https://www.reuters.[...]
2020-10-03
[8]
웹사이트
Metropolitan Museum of Art
https://www.metmuseu[...]
[9]
서적
The Third Intermediate Period in Egypt, 1100-650 B.C.
Aris & Phillips
1986
[10]
문서
エジプト以外の3大国は、[[リュディア|リュディア王国]]、[[メディア王国]]、[[新バビロニア|新バビロニア王国]]。
[11]
문서
参考文献『考古学から見た古代オリエント史』注釈p108の記述による。
[12]
문서
『歴史』第2巻150節 - 152節。以下『歴史』の記述を多用するが、ヘロドトスの叙述がどの程度信頼できるかについては議論があり、単純に全てを史実であるとすることはできない
[13]
문서
『歴史』第2巻154節
[14]
문서
無論、当時のエジプト人が意識するとしないとに関わらず、活発な対外交渉の結果として異文化の影響も著しかった。
[15]
문서
『歴史』第2巻157節
[16]
문서
『歴史』第1巻105節
[17]
문서
[[メディア人]]は[[ペルシア人]]などと同じく[[インド・ヨーロッパ語族]]の言語を話した人々。メディア人に関する歴史も、ヘロドトスの記録が中心となる。
[18]
문서
カルデア王国とも言う。新バビロニアと言う呼称は、[[紀元前18世紀]]頃の[[古バビロニア王国|古バビロニア]]と区別した呼称である。
[19]
문서
ネコ2世がユダ王ヨシヤを殺害したと言う旧約聖書の記述は、説明が不明瞭で詳細がよくわかっていない。大まかなまとめについては参考文献『聖書時代史 旧約編』p161 - 162を参照。
[20]
문서
ちょうどこの頃、ヌビアの中心はかつての[[ナパタ]]から[[メロエ]]へと移っている。これをプサメティコス2世の遠征と関連付けて考える学者もいる。
[21]
문서
『歴史』第2巻161節
[22]
문서
ヘロドトスの記述を信ずるならば、アプリエスはパタルベミスという部下に対し、イアフメス2世を降伏させてつれてくるように指示したが、パタルベミスがそれを果たせず一人で帰ってきたことに怒り彼の鼻と耳をそぎ落とさせた。これを見たエジプト人の重臣達はイアフメス2世の下へと走ったと言う。
[23]
문서
혼란기로 통일왕조 없음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