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전쟁 (1521년~152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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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 전쟁 (1521년~1526년)은 1518년 런던 조약 이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간에 벌어진 일련의 무력 충돌이다. 막시밀리안 1세의 사망으로 신성 로마 황제 선출 경쟁이 심화되었고, 카를 5세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갈등이 격화되었다. 프랑스는 이탈리아를 침공했으나, 초기 전투에서 패배하고 부르봉 공작 샤를 3세의 배신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가 포로로 잡히면서 프랑스는 마드리드 조약을 통해 굴욕적인 조건을 받아들였지만, 조약은 곧 파기되고 코냑 동맹 전쟁으로 이어졌다. 결국 프랑스는 롬바르디아를 회복하지 못하고, 스페인이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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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전쟁 (1521년~1526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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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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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521년–1526년 (5년) |
장소 | 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
결과 | 합스부르크 왕가의 승리 |
상세 결과 |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 포로 1525년 로마 조약 1526년 마드리드 조약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프랑스 왕국 스위스 용병 베네치아 공화국 교황령 (1524–1525) 살루초 변경백국 |
교전국 2 |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잉글랜드 왕국 교황령 (1521–1523 및 1525–1526) 밀라노 공국 (1522) 만토바 변경백국 (1521~1522) |
지휘관 | |
프랑스 측 지휘관 | 프랑수아 1세 로트레크 자작 기욤 드 보니베 피에르 드 바야르 로베르 드 라 마르크 몽모랑시 앙리 2세 프랑수아 드 로렌 리처드 드 라 폴 자크 드 라 팔리스 루이 라 트레무유 달랑송 공작 올버니 공작 안드레아 도리아 안토니오 그리마니 안드레아 그리티 15px 살루초 후작 엔리케 2세 데 알브레트 |
합스부르크 측 지휘관 | 카를 5세 샤를 드 라누아 페르난도 다발로스 부르봉 공작 프란츠 폰 지킹겐 게오르크 폰 프룬츠베르크 서퍽 공작 프로스페로 콜론나 하인리히 폰 나사우 알바 공작 안토니오 데 레이바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 만토바 변경백 |
참고 | |
관련 전투 |
2. 서막
1518년 런던 조약 체결 이후, 잉글랜드 왕국, 프랑스 왕국,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군주국은 표면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공격받는 국가를 돕고 평화를 깨는 국가에 대항하여 연합할 것을 약속했다.[5]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계승 문제를 두고 이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막시밀리안 1세는 합스부르크가의 세습을 위해 손자인 카를 5세를 후계자로 밀었지만, 프랑수아 1세는 자신이 황제 후보로 나섰다.[6]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으로 인해 교황청과 신성 로마 제국은 협력해야 했다. 루터는 일부 제국 귀족들에게 지역 교회를 장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그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제국과 교황청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협력이 필요했다.[7] 동시에 프랑수아 1세는 헨리 8세의 유능한 고문관이자 추기경이었던 토머스 울지를 상대해야 했다.[8]
1519년 막시밀리안 1세가 사망하면서 신성 로마 황제 선출이 유럽 정치의 주요 문제로 떠올랐고,[9] 교황 레오 10세는 스페인 군대의 위협을 느껴 프랑수아 1세를 지지했다.[10] 황제 선출 과정에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선제후들은 카를 5세로부터 뇌물을 받았다.[11] 막시밀리안 1세와 프랑수아 1세, 카를 5세는 모두 선제후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제공했고,[11][12][13] 결국 선제후들은 카를 5세를 황제로 선출, 1520년 카를 5세는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했다.[13] 당시 카를 5세는 이미 스페인의 왕이었고, 저지대 국가에서 부르고뉴 공국의 영토를 물려받은 상태였다.[14]
카를 5세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프랑수아 1세는 대리전을 계획했고, 1520년부터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프랑스는 로베르 3세 드 라 마르크가 뫼즈 강을 공격하고, 프랑스와 나바라 연합군이 나바라 왕국을 침공하는, 동시 공격을 지원했다.[8] 그러나 프랑스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고, 노아인 전투에서 패배하여 나바라에서 철수해야 했다.[10]
한편, 1521년 보름스 의회에서 카를 5세는 마르틴 루터를 처리하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황제와 교황은 루터에 대항하기 위해 협력하기로 결정했고, 보름스 칙령을 발표하여 루터를 파문하고 제국 아흐트형에 처했다. 또한 황제는 파르마와 피아첸차를 교황에게 반환할 것을 약속했다. 레오 10세는 종교 개혁에 대항하기 위해 제국의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롬바르디아에서 프랑스를 몰아내는 것을 돕기로 동의했고, 프랑수아 1세의 이탈리아 내 동맹국은 베네치아 공화국만 남게 되었다.
잉글랜드는 울지 추기경의 주도로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 사이의 중재를 시도했다. 헨리 8세와 프랑수아 1세는 금란의 들판에서 회담을 가졌고, 울지 추기경은 칼레에서 카를 5세를 접대했다. 이후 울지 추기경은 칼레에서 중재 회의를 열었으나, 이듬해 4월까지 이어진 회의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 1.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계승 분쟁
1518년 런던 조약 이후, 프랑스 왕국, 잉글랜드 왕국,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 등 유럽 주요 강대국들은 표면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 조약은 공격받는 서명국을 돕고 평화를 깨는 국가에 대항하여 연합할 것을 약속했다.[5]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계승 문제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 막시밀리안 1세는 합스부르크가의 세습을 위해 손자인 카를 5세를 후계자로 밀었지만, 프랑수아 1세는 자신이 황제 후보로 나섰다.[6]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으로 인해 교황청과 신성 로마 제국은 협력해야 했다. 루터는 일부 제국 귀족들에게 지역 교회를 장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그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제국과 교황청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협력이 필요했다.[7] 동시에 프랑수아 1세는 헨리 8세의 유능한 고문관이자 추기경이었던 토머스 울지를 상대해야 했다.[8]
1519년 1월 막시밀리안 1세가 사망하면서 신성 로마 황제 선출이 유럽 정치의 주요 문제로 떠올랐다.[9] 교황 레오 10세는 스페인 군대가 바티칸에서 64km 떨어진 곳에 주둔하고 있어 위협을 느껴 프랑수아 1세를 지지했다.[10] 황제 선출은 기정사실이 아니었다.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1세 네스터를 제외한 대부분의 선제후들은 카를 5세로부터 뇌물을 받았다.[11] 막시밀리안 1세는 이미 선제후들에게 500000플로린을 뇌물로 주었지만,[12] 프랑수아 1세는 3000000플로린을 제안했고,[11] 카를 5세는 푸거 가문에게서 거액을 빌려 이에 대응했다.[13] 결국 선제후들은 카를 5세를 황제로 선출했고,[11] 1520년 10월 23일 카를 5세는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했다.[13] 당시 카를 5세는 이미 스페인의 왕이었고, 저지대 국가에서 부르고뉴 공국의 영토를 물려받은 상태였다.[14]
2. 2. 프랑스의 대리전 전략
카를 5세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프랑수아 1세는 대리전을 계획했다. 1520년 12월, 프랑스는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헨리 8세가 평화를 깨는 쪽에 개입할 것을 선언했기 때문에,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를 직접 공격할 수 없었다. 그 대신 독일과 스페인 영토에 대한 지원 공격을 감행했다. 로베르 3세 드 라 마르크가 뫼즈 강을 따라 공격했고, 동시에 프랑스와 나바라 연합군이 생장피에드포르를 점령한 후, 당시 스페인이 점령하고 있던 나바라 왕국 전체를 침공했다.[8] 이 원정은 명목상 18세의 나바라 왕 앙리 달브레가 이끌었지만, 실제로는 앙드레 드 푸아가 군대를 지휘했고, 프랑스가 자금과 장비를 지원했다.[9]
프랑스의 계획은 곧 실패로 드러났다. 뫼즈 강 공격은 하인리히 3세에게 격퇴되었고, 드 푸아는 팜플로나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1521년 6월 30일 노아인 전투에서 패배하여 나바라에서 철수해야 했다.[10]
한편, 1521년 4월 보름스 의회에서 카를 5세는 마르틴 루터를 처리하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황제는 종교 개혁으로 제국이 해체될 것을 두려워했고, 교황 레오 10세도 루터가 교황의 권위를 부정했기 때문에 결별, 두 사람은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프란츠 폰 지킹겐과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지지를 받는 루터에 대항하여, 황제와 교황 대사 지롤라모 알레안드로는 1521년 5월 25일 보름스 칙령을 발표하여 루터를 로마 교회에서 파문하고 제국 아흐트형에 처했다. 황제는 또한 당시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던 파르마와 피아첸차를 메디치 가문에게, 밀라노 공국을 스포르차 가문에게 반환할 것을 교황에게 약속했다. 레오 10세는 종교 개혁에 대항하기 위해 제국의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롬바르디아에서 프랑스를 몰아내는 것을 돕기로 동의했고, 이로 인해 프랑수아 1세의 이탈리아 내 동맹국은 베네치아 공화국만 남게 되었다.
잉글랜드는 울지 추기경의 주도로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 사이의 중재를 시도했다. 헨리 8세와 프랑수아 1세는 금란의 들판에서 회담을 가졌고, 울지 추기경은 칼레에서 카를 5세를 접대했다. 이후 울지 추기경은 칼레에서 중재 회의를 열었으나, 이듬해 4월까지 이어진 회의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3. 양측의 초기 전투 (1521년 ~ 1522년)
1521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잉글랜드 왕 헨리 8세는 브뤼허 조약을 비밀리에 체결하여 프랑스에 대항하기로 합의했다.[11] 프랑스의 로트렉은 제국군과 교황군에 맞서 밀라노를 방어해야 했으나, 프로스페로 콜론나에게 패하여 1521년 11월 밀라노에서 쫓겨나 아다 강으로 후퇴했다.
한편, 프랑스-나바라 연합군은 카스티야군이 막 강화를 마친 아마유르마야 요새로 진격했고, 1521년 10월 3일 카스티야군은 안전하게 카스티야로 돌아가는 조건을 내걸고 항복했다. 기욤 구피에의 프랑스군은 이룬으로 진격해 우란추 요새를 함락시켰고, 클로드 드 로렌의 군대와 함께 프랑스-스페인 국경 지역의 비다소아강 어귀에 있는 온다리비아를 점령했다.[9] 프랑스군은 1524년 3월까지 온다리비아를 점령하여 스페인 북부를 위협했다.[10]
북쪽에서는 하인리히 폰 나사우가 이끄는 신성 로마 제국군이 프랑스 북동부를 침공하여 아데를 점령하고 무종에 큰 피해를 입혔다.[1] 제국군은 메지에르 공방전에서 피에르 테라유 드 바야르가 이끄는 프랑스군에 막혔으나, 프랑수아 1세가 군대를 모을 시간을 벌어주었다.[1] 투르네 역시 제국군에 함락되었다.[3]
1522년 4월, 비코카 전투에서 로트렉의 프랑스군은 제국-교황 연합군에게 대패했다. 로트렉은 포병을 활용하려 했으나, 스위스 용병들이 무모하게 돌격하여 스페인 아쿼버스 부대와 란츠크네히트에게 큰 피해를 입었다. 이 패배로 스위스 용병들은 고향으로 돌아갔고, 프랑스는 롬바르디아를 잃었다.[14] 이후 콜론나와 다발로스는 제노바를 점령했다.[15]
3. 1. 프랑스 북부 전선
1521년 8월 20일, 로베르 3세 드 라 마르크의 룩셈부르크 공격에 대한 대응으로 하인리히 폰 나사우가 이끄는 신성 로마 제국군이 프랑스 북동부를 침공했다.[1] 아데는 제국군에게 점령되었고, 무종은 공성전 이후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며, 오벙통은 약탈당하고 주민들이 학살되었다.[1][2] 제국군은 메지에르 공방전에서 피에르 테라유 드 바야르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3주간 대치했고, 이를 통해 프랑수아 1세는 메지에르를 구원하기 위해 랭스에서 대규모 군대를 모을 수 있었다.[1] 9월 26일, 프랑수아 1세가 메지에르에 도착하기 며칠 전 포위된 프랑스군은 보급을 받았지만, 이미 마을은 심각하게 파괴된 뒤였다. 하인리히는 철수해야 했지만, 후퇴하는 동안 가는 길에 있는 마을들을 엉망으로 만들었다.[1] 1519년 런던 조약에 따라 프랑스에 반환된 투르네도 제국군의 공격을 받았다.[3] 프랑수아 1세의 명령에 따라 프랑스군이 후퇴하고 해체되면서 투르네는 제국군에 항복했다.[4][5]3. 2. 이탈리아 전선
1521년 11월 말, 프랑스의 오데 드 푸아는 제국군과 교황군에 맞서 밀라노를 방어해야 했으나, 프로스페로 콜론나에게 패하여 밀라노에서 쫓겨나 아다 강으로 후퇴했다.[12] 그곳에서 스위스 용병의 지원을 받았지만, 봉급을 줄 돈이 없었던 푸아는 제국군과 바로 싸우자는 용병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13]1522년 4월 27일, 푸아는 밀라노 근처 비코카 전투에서 콜로나가 이끄는 제국-교황 연합군을 공격했다. 푸아는 포병을 활용하려 했지만, 적을 공격하기 급급했던 스위스 용병들이 포병을 막고 스페인 아쿼버스 부대에 돌격했다.[14] 이어진 혼전에서 스위스군은 스페인군과 란츠크네히트에게 패배했다. 사기가 떨어진 스위스군은 각자의 칸톤으로 돌아갔고, 롬바르디아는 버려졌다.[14] 콜론나와 다발로스는 프랑스군과 대치 없이 1522년 5월 30일 제노바를 점령했다.[15]
한편, 프랑스-나바라 연합군은 카스티야군이 막 강화를 마친 아마유르마야 요새로 진격했고, 1521년 10월 3일 카스티야군은 안전하게 카스티야로 돌아가는 조건을 내걸고 항복했다. 기욤 구피에의 프랑스군은 이룬으로 진격해 우란추 요새를 함락시켰고, 클로드 드 로렌의 군대와 함께 프랑스-스페인 국경 지역의 비다소아강 어귀에 있는 온다리비아를 점령했다.[9] 1524년 3월까지 프랑스군은 스페인 북부에 있는 온다리비아를 지켰다.[10]
4. 반프랑스 연합
1522년 잉글랜드는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고, 같은 해 6월 16일 카를 5세와 윈저 조약을 체결했다.[47] 이 조약에는 잉글랜드와 신성 로마 제국의 공동 프랑스 공격 계획이 담겨 있었으며, 카를 5세는 프랑스와의 분쟁으로 잉글랜드가 입을 손실을 보상하고 이전 빚을 갚기로 약속했다. 또한 동맹 강화를 위해 카를 5세는 헨리 8세의 외동딸 메리와 결혼하기로 합의했다.[39]
한편, 샤를 3세 드 부르봉 공작은 수잔나 드 부르봉과의 결혼으로 재산 대부분을 상속받았는데, 프랑수아 1세는 자금 마련을 위해 그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수잔나가 사망하자, 그녀의 여동생이자 왕의 어머니인 루이제 드 사보이는 자신이 더 가까운 친족이라는 이유로 상속 재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프랑수아 1세는 분쟁 지역을 몰수하면 전쟁 자금을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루이즈의 이름으로 영토 일부를 몰수하기 시작했다. 이에 분노하고 궁정에서 고립된 부르봉 공작은 카를 5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에서는 안토니오 그리마니가 사망하고 안드레아 그리티가 도제 자리에 올랐다. 그는 곧바로 황제와 협상하여 1523년 7월 29일 보름스 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에서 이탈했다. 부르봉 공작은 카를 5세와 계속 공모하여 프랑수아 1세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고 자금과 독일군 지원을 제안했다.
5. 프랑스의 이탈리아 침공 (1523년 ~ 1524년)
1523년부터 1524년까지 프랑스는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지역을 다시 차지하기 위해 군사 작전을 펼쳤다.
1524년, 부르봉 공작과 페스카라 후작은 프로방스를 침공하여 엑상프로방스를 점령했다.[41] 그러나 마르세유 함락에는 실패했고, 프랑수아 1세가 이끄는 프랑스군 본대의 접근 소식에 이탈리아로 퇴각했다.[41]
같은 해 10월, 프랑수아 1세는 4만 명이 넘는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밀라노로 진격했다. 나폴리 부왕은 아스티(Asti)에서 밀라노 방향으로 후퇴했고, 라누아는 1만 6천 명의 병력으로 밀라노를 방어할 수 없다고 판단, 로디(Lodi)로 물러났다.[30] 살라초 휘하의 프랑스 선봉대가 밀라노에 입성했다.
이후 프랑수아 1세는 루이 2세 드 라 트레모이에(Louis II de la Trémoille)를 밀라노 총독으로 임명하고, 안토니오 데 레이바(Antonio de Leyva)가 지키는 파비아(Pavia)로 진격하여 10월 24일 도착했다.[34]
5. 1. 프랑스의 롬바르디아 재침공
1524년 10월, 프랑수아 1세는 4만 명이 넘는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밀라노로 진격했다. 부르봉과 페스카라가 제노바로 돌아간 상황에서, 황제군은 제대로 저항할 수 없었다.
프랑스군이 진격하자 나폴리 부왕은 아스티(Asti)에서 밀라노 방향으로 후퇴했다. 1만 6천 명의 병력을 집결시킨 라누아는 밀라노를 방어할 수 없다고 판단, 10월 26일 로디(Lodi)로 물러났다.[30] 살라초 휘하의 프랑스 선봉대가 다른 문을 통해 들어오는 동안 밀라노를 떠났다.
프랑수아 1세는 루이 2세 드 라 트레모이에(Louis II de la Trémoille)를 도시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보니베의 주장에 따라 후퇴하는 라누아를 더 적극적으로 추격해야 한다는 다른 고위 지휘관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국왕의 군대는 안토니오 데 레이바(Antonio de Leyva)가 상당한 수비대와 함께 남아있는 파비아(Pavia)로 진격했다.[34] 프랑스군 주력 부대는 10월 24일 파비아에 도착했다.
5. 2. 프로방스 전투
1524년, 부르봉 공작 샤를 3세 드 부르봉과 페스카라 후작은 2년 전에 프랑스에 빼앗겼던 프로방스를 침공하여 엑상프로방스를 점령했다.[41] 부르봉 공작은 마르세유를 포위했지만 함락에는 실패했고, 프랑수아 1세가 이끄는 프랑스군 본대의 접근 소식에 이탈리아로 퇴각했다.[41]6. 파비아 전투 (1525년)
1524년 프랑수아 1세가 밀라노를 점령한 후 안토니오 데 레이바(Antonio de Leyva)가 지키는 파비아(Pavia)를 포위했다.[5] 1525년 2월 24일, 샤를 드 라누아가 이끄는 황제군은 야간 기습으로 파비아 성벽을 돌파하여 프랑스군을 공격했다.[41]
4시간 동안 이어진 전투에서 프랑스 중기병은 빠른 진격으로 아군 포병의 사격을 방해했고, 란츠크네히트와 스페인 아르케부스병에게 포위되어 무너졌다. 갑옷으로 무장한 프랑스 기사들은 쉽게 사살되거나 단검에 찔려 죽었다. 스위스 보병과 프랑스 보병 역시 패주하면서, 프랑스군은 막대한 피해를 보며 병력 대부분을 잃었다. 라 팔리스, 라 트레모이유 등이 전사했고, 프랑수아 1세는 여러 귀족과 함께 포로로 잡혔다.[41]
6. 1. 파비아 포위전
1524년 10월 말, 프랑수아 1세는 4만 명이 넘는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밀라노로 진격했다.[1] 샤를 3세 드 부르봉과 페스카라는 프로방스 전역에서 아직 회복되지 않아 제대로 저항할 수 없었다.[2] 프랑스군이 진격하자 나폴리 부왕 샤를 드 라누아는 아스티(Asti)에서 밀라노 방향으로 후퇴했다.[3] 1만 6천 명의 병력을 집결시킨 라누아는 흑사병이 휩쓴 밀라노를 방어할 수 없다고 판단, 10월 26일 로디(Lodi)로 물러났다.[4] 루이 2세 드 라 트레모이에(Louis II de la Trémoille)를 밀라노 총독으로 임명한 프랑수아 1세는 보니베의 주장대로 라누아를 추격하는 대신, 안토니오 데 레이바(Antonio de Leyva)가 상당한 수비대를 둔 파비아(Pavia)로 진격했다.[5]
10월 24일, 프랑스군 주력 부대가 파비아에 도착했다.[6] 11월 2일까지 안 드 몽모랑시가 티치노 강을 건너 파비아 남쪽을 포위했다.[7] 안에는 약 9,000명의 병력이 있었는데, 대부분 레이바가 도시 교회 금은 보물을 녹여 급여를 지급해야 했던 용병들이었다.[8] 11월 6일, 프랑스군의 파비아 포격이 시작되었다.[9] 11월 21일, 프랑수아 1세는 두 개의 틈새를 통해 공격을 시도했지만, 큰 사상자를 내고 격퇴되었다.[10] 비가 오는 날씨와 화약 부족으로 프랑스군은 수비군이 굶어 죽기를 기다리기로 결정했다.[11]
12월 초, 휴고 데 몬카다가 지휘하는 스페인 군대가 제노바 근처에 상륙, 친 발루아와 친 합스부르크 파벌 간 갈등에 개입하려 했다.[12] 프랑수아 1세는 살루초의 미켈레 안토니오 1세 휘하의 더 큰 병력을 파견했다.[13] 더 많은 수의 프랑스군과 안드레아 도리아가 지휘하는 친 발루아 함대의 도착으로 해군 지원을 받지 못한 스페인군은 항복했다.[14]
1525년 1월, 라누아는 신병과 기병을 이끌고 온 프룬츠베르크의 도착으로 공세를 재개했다.[15] 산 안젤로의 프랑스 전초 기지가 점령되어[16] 파비아와 밀라노 간 통신선이 차단되었고, 조반니 데 메디치와 보니베가 이끄는 기습으로 잠시 격퇴당했음에도 벨조이오소로 진격한 별동대의 란츠크네히트가 마을을 점령했다.[17] 1월 22일, 로디에 주둔한 주력 황제군은 밀라노를 상대로 공세를 시뮬레이션했지만, 프랑스군을 유인하는 데 실패했다.[18] 황제 사령관들은 22,000명의 보병, 2,300명의 기병, 17문의 대포를 이끌고 1월 25일 로디에서 파비아로 진격했다.[19]
2월 초, 1,000명의 이탈리아 군인이 파비아에 있는 프랑스군에게 도달하기 전에 알레산드리아에서 격파되었다.[20] 메디치가 2월 8일 파비아로 돌아와 페라라 공작이 수집한 화약을 수비대에 보충하면서 프랑스군은 약화되었다.[21] 또한 2,000명의 독일인의 탈영과 약 5,000명의 그라우뷘덴 스위스 용병이 키아벤나가 밀라노군에 점령된 후 자신들의 칸톤으로 돌아가 자신들의 지역을 방어하면서 더욱 약화되었다.[22] 프랑수아 1세는 그의 군대 대다수와 함께 도시 성벽 밖에 있는 미라벨로의 큰 벽으로 둘러싸인 공원에 야영하여 레이바의 수비대와 접근하는 구원군 사이에 배치했다.[23] 2월 4일, 공원에 대한 공격은 프랑스군에 의해 격퇴되었다.[24] 2월 한 달 동안 수비대의 소규모 전투와 출격이 계속되었다.[25] 메디치는 심각한 부상을 입고 피아첸차로 물러나 회복했고, 프랑수아 1세는 검은 부대의 이탈을 상쇄하기 위해 밀라노 수비대의 많은 병력을 소환해야 했다.[26] 2월 21일, 황제군은 공원의 성문을 공격하려 했지만 프랑스군에 의해 격퇴되었다.[27]
6. 2. 전투의 경과
1525년 2월 24일 파비아 전투에서 황제군은 야간 기습을 통해 파비아 성벽을 돌파했다. 4시간에 걸친 전투에서 프랑스 중기병은 급속한 진격으로 자체 포병의 시야를 가렸고, 란츠크네히트와 공원의 숲 속에 은폐된 위치에서 프랑스군을 공격한 1,000명의 스페인 아르케부스병에 의해 포위되어 격파되었다.[41] 갑옷을 입은 프랑스 기사들은 쉽게 사살되었고, 나중에는 단검으로 도륙당했다. 일련의 지루한 보병 교전으로 스위스 및 프랑스 보병은 패주했다. 프랑스군은 엄청난 사상자를 냈고, 군대의 대부분을 잃었다. 라 팔리스, 라 트레모이유 등이 전사했으며, 프랑수아 1세는 수많은 하급 귀족들과 함께 포로로 잡혔다.[41]7. 마드리드 조약 (1526년)
마드리드 조약은 1526년 1월 14일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 사이에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이탈리아, 아르투아, 플랑드르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부르고뉴를 카를 5세에게 양도했다.[27] 프랑수아 1세는 두 아들을 스페인에 인질로 보내고, 부르봉 공작의 영토를 반환하며, 카를 5세의 누이와 결혼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나바라 왕위를 카를 5세에게 양도하도록 앙리 2세를 설득하기로 했다.[21]
7. 1. 프랑수아 1세의 유폐와 협상
프랑수아 1세는 파비아 전투 패배 후 포로로 잡혀 스페인으로 이송되어 마드리드에 유폐되었다.[1] 카를 5세는 프랑스에 부르고뉴와 롬바르디아 등 영토 할양을 요구하며 협상을 시도했으나 난항을 겪었다. 한편, 프랑수아와 함께 포로로 잡혔던 나바라의 앙리 2세는 1525년 12월 탈출에 성공했다.[1]7. 2. 조약의 내용과 파기
1526년 1월 14일,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는 마드리드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 국왕은 이탈리아, 아르투아, 플랑드르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했다.[27] 그는 부르고뉴를 카를 5세에게 양도했고,[27] 자신의 두 아들을 스페인 궁정에 인질로 보내기로 합의했으며, 부르봉 공작으로부터 빼앗은 영토를 그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또한 "루터교 이단과 다른 모든 정죄된 종파의 오류를 뿌리 뽑기 위해" 헨리 2세에게 나바라 왕위를 카를 5세에게 양도하도록 설득하기로 동의했으며,[21] 카를 5세의 누이인 스페인의 엘레오노르와 결혼하기로 했다.8. 결과 및 영향
프랑수아 1세는 1526년 3월 6일에 풀려나 프랑스로 돌아갔고, 그의 아들들인 도팽과 그 형제는 인질로 스페인에 보내졌다.[1] 같은 해 8월,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햄프턴 코트 궁전에서 햄프턴 코트 조약을 체결하여 평화를 이루었다.[2]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황제 카를 5세의 세력이 커지는 것에 위협을 느껴 프랑수아 1세에게 동맹을 제안했다.[3] 프랑수아 1세는 마드리드 조약을 파기하고, 1526년 6월 교황, 밀라노, 베네치아, 피렌체, 제노바와 함께 코냑 동맹 전쟁을 일으켰다.[4] 그러나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동맹에 공식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5]
프랑수아 1세와 그의 후계자 앙리 2세는 밀라노에 대한 권리 주장을 계속했지만,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을 통해 포기했다.[6] 결국 프랑스는 롬바르디아에서 영토를 회복하지 못했고, 스페인이 밀라노, 나폴리, 시칠리아, 사르데냐, 사보이, 피에몬테를 지배하게 되었다.[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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