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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란의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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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금란의 들판은 1520년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상호 우호 관계를 다지기 위해 만난 외교 회담이다. 르네상스 군주를 자처한 두 왕은 화려한 의상과 음식, 다양한 행사로 경쟁하며 국력을 과시했다. 회담은 잉글랜드 총리 토머스 울지의 주도로 잉글랜드 영토인 칼레 인근에서 열렸으며, 겉으로는 성공적인 만남이었으나 정치적 결과는 미미했다. 이후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토머스 울지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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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란의 들판
행사 개요
명칭금란의 들판 (Field of the Cloth of Gold)
프랑스어 명칭Le Camp du Drap d'Or
로마자 표기Le Camp du Drap d'Or (Camp du Drap d'Or)
위치프랑스 칼레 근처, 현재의 파드칼레 발링헴과 아르드르 사이
날짜1520년 6월 7일 - 6월 24일
참가자프랑수아 1세
헨리 8세
목적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우호 관계 강화
배경
주요 사건1514년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조약 체결 후 양국 관계 개선 시도
외교적 상황유럽 내 정치적 긴장 완화 및 평화 유지 노력
추가 배경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부상에 대한 공동 대응 필요성
행사 내용
주요 행사토너먼트, 연회, 종교 의식, 외교 회담
특징웅장한 규모와 화려한 장식
양국 왕실의 재력 과시
외교적 협상과 우호 증진 시도
준비 과정수천 명의 수행원 및 하인 동원
막대한 비용 지출
임시 궁전 및 경기장 건설
결과 및 영향
정치적 결과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관계 개선 미미
카를 5세의 영향력 강화
잉글랜드의 외교적 고립 심화
역사적 평가외교적 실패 사례로 평가
르네상스 시대의 화려한 궁정 문화 보여주는 행사로 기억
막대한 비용 낭비에 대한 비판 존재
기타
관련 인물토마스 울지
카를 5세
관련 장소칼레
아르드르
참고 문헌

2. 배경

16세기 초, 서유럽에는 프랑수아 1세 치하의 프랑스와 카를 5세 치하의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두 강대국이 있었다. 잉글랜드 왕국은 상대적으로 미약했지만, 두 강대국 모두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고자 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이 동남 유럽으로 팽창하고 있었기에, 유럽 주요 강국들은 1518년 런던 조약을 체결하여 서로 침략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헨리 8세는 금란의 들판 행사 한 달 전 네덜란드에서 카를 5세를 만났고, 이후 잉글랜드가 유럽 대륙에 유일하게 소유한 영토인 칼레에서도 만났다.

헨리 8세와 프랑수아 1세는 모두 르네상스 군주로 보이길 원했다. 르네상스 사상은 강력한 통치자가 힘을 가진 상태에서 평화를 선택할 수 있다고 보았다. 금란의 들판 회담은 각 왕실이 얼마나 웅장한지를 보여주고, 이를 통해 전통적인 적대국이었던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서로 존중하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기획되었다. 헨리 8세와 프랑수아 1세는 비슷한 나이와 멋진 명성을 가졌기에 서로에게 호기심을 느꼈을 것이다.

회담 장소는 칼레 주변 잉글랜드 영토 가장자리에 있었으며(현재 D231 도로, "마르퀴즈 도로(Route de Marquise)"에 기념패로 표시되어 있음), 양측이 동등한 위치에서 만날 수 있도록 계곡 지형을 정비했다. 이 모든 행사는 교황 레오 10세교황 대사로서 막대한 권력을 가졌던 잉글랜드의 추기경 토마스 울지가 계획하고 실행했다. 잉글랜드 측에서는 토마스 모어와 앤 불린의 어머니 및 자매가 참석했다.[3]

울지 추기경


1396년 10월 27일부터 30일까지 프랑스 샤를 6세와 잉글랜드 리처드 2세는 백년 전쟁의 평화를 논의하기 위해 칼레 근처 아르드르에서 만났는데, 이 회담의 규모, 화려함, 장관은 1520년 같은 장소에서 열린 금란의 들판 회담과 유사했다.[4]

2. 1. 캉브레 동맹 전쟁과 런던 조약 (1518)

캉브레 동맹 전쟁은 16세기 초,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다.[27] 교황이 주도한 이 동맹은 이름과는 달리, 상황에 따라 동맹과 적을 바꾸는 배신의 연속이었다. 전쟁의 명분은 교황에게 불복하는 베네치아 공화국을 징벌하는 것이었지만, 프랑수아 1세가 이탈리아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자 교황은 오히려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축출하고자 하였다.[28] 1509년 즉위한 헨리 8세는 교황 측에 가담하였고, 교황은 헨리 8세에게 "프랑스의 합당한 국왕" 자리를 약속했다.[29] 그러나 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다.

1513년 새롭게 즉위한 교황 레오 10세는 베네치아의 영토를 축소하고 교황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였고, 이로 인해 동맹은 분열되었다. 1515년 프랑스의 새 국왕으로 즉위한 프랑수아 1세는 이 틈을 타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고, 마리냐노 전투에서 승리하였다.[30]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의사가 없었던 신성 동맹 측은 결국 프랑스와 강화 조약을 맺었다.

1519년 카를 5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새 황제로 즉위하면서 프랑스, 잉글랜드, 신성 로마 제국은 모두 비슷한 연령대의 젊은 군주들이 통치하게 되었고, 외교 관계를 재정립할 필요성이 생겼다. 1518년, 잉글랜드의 총리였던 토머스 울지의 제안으로 세 나라는 런던 조약을 통해 상호 불가침을 약속하였다.[31] 금란의 들판 회동은 이 조약을 재확인하기 위한 자리였다. 교황 레오 10세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맞서 "기독교 세계"를 지키기 위해 유럽 강국들의 단합을 요구했고, 추기경이었던 토머스 울지는 교황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프랑스 측에 회담을 제안했다.[32]

2. 2. 북방 르네상스

캉브레 동맹 전쟁 이후 프랑수아 1세헨리 8세는 스스로 학문과 예술의 후원자를 자처하며 르네상스 군주로 비춰지길 원했다. 당시 르네상스 사상은 강력한 통치자가 강한 입장에서 평화를 선택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두 왕은 이러한 이미지를 적극 활용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 펼쳐진 북방 르네상스는 국왕에 의해 주도되면서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있었다.[33]

이미 15세기부터 이탈리아에서는 고대 로마의 주요 사건을 당대의 지배자에 투영하여 권위를 정당화하는데 회화와 조각 등이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안드레아 만테냐의 《카이사르의 개선식》은 카이사르를 소재로 삼고 있지만, 만토바 공국의 지배 가문이었던 곤차가를 위한 것이었다.[34] 북방의 군주들도 자신을 고대의 영웅에 빗대며 스스로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루이 12세는 이탈리아 곳곳에서 고대 로마의 양식을 앞세운 개선식을 열었고, 훗날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 역시 이탈리아를 행군하며 개선식을 선보였다.[35]

헨리 8세와 프랑수아 1세는 어려서부터 인문학과 예술에 대한 교양을 교육받으며 성장하였고, 즉위 이후 학문과 예술의 수호자를 자처하여 왕권 강화를 꾀하였다.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에서 예술가를 초빙하는 한편 각종 건축을 지시하며 프랑스 르네상스의 초석을 다졌다.[36] 헨리 8세 역시 스스로 작곡을 하고 시를 지으며 예술적 재능을 과시하였다.[29]

금란의 들판 회담은 각 왕실이 얼마나 웅장한지를 보여주고, 이것이 전통적인 적대국 간의 상호 존중과 평화의 기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기획되었다. 헨리와 프랑수아는 비슷한 나이와 멋진 명성을 가진 인물이었기에, 상호 간에 호기심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두 왕은 서로에게 질 수 없다는 경쟁심을 보였고, 자신의 궁정을 상대에게 과시하고자 하였다.

모든 사항은 양측이 동등하게 준비하였고, 당시 양국의 국경 부근에 위치한 회담 장소 마저 국경을 사이에 두고 비슷한 경사를 이루는 계곡이라는 것이 선택의 이유였다. 잉글랜드 측 회담 준비 책임자는 토머스 울지였고, 토머스 모어와 훗날 잉글랜드 정치 파동의 핵심에 놓이게 될 앤 불린의 가문 역시 준비에 참여하였다.[37]

3. 준비

금란의 들판 회담은 단순한 우호 확인을 넘어, 양국이 서로의 국력을 과시하려는 경쟁의 장이었다. 전쟁 대신 문화적 과시를 통해 경쟁하고자 했기에, 회담 준비는 극도의 사치와 호화로움으로 점철되었다. 특히 잉글랜드의 토머스 울지 추기경은 회담 장소 선정부터 가건물 설치, 의상, 음식, 행사 등 모든 준비 과정을 주도했으며, 헨리 8세는 회담을 위해 궁전에 버금가는 호화로운 가건물을 짓도록 지시했고, 금란을 비롯한 값비싼 옷감과 재료들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3. 1. 회담 장소 및 가건물

토머스 울지는 회담 장소로 칼레 인근의 발렝강을 제안했는데, 당시 잉글랜드 영토였던 칼레와 프랑스 영토인 아르드레의 중간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양국이 동등한 위치에서 회담을 갖는다는 상징성을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39]

당시 잉글랜드 영토였던 발렝강에는 소규모 요새인 귀네성을 배경으로 10000m2에 달하는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었고, 이 들판에 회담장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헨리 8세는 단 한 번의 회담을 위한 가건물을 궁전에 버금갈 정도로 호화롭게 꾸몄다.[39] 잉글랜드는 들판을 네 개의 구획으로 나누어 회담 장소로 마련하였다.[40] 네 구역 중앙에 마련된 회담장은 임시로 지어진 궁전이라 불릴 만하였다.[39]

가건물의 크기는 한 변이 100m에 달했고, 기둥과 벽을 지지하기 위한 2m 높이의 기단을 다졌다.[41] 기단 위로 10m 높이의 나무 기둥을 세우고 벽돌을 이용하여 벽을 세운 뒤 온갖 화려한 옷감과 캔버스 천을 이용하여 마감하였다. 회담장을 비롯한 주변의 텐트 역시 금란을 비롯한 값비싼 옷감을 아낌없이 사용하여 마치 들판 전체를 금란으로 두른 듯 하였고, 이후 이 회담은 "금란의 들판"으로 불리게 되었다.

회담장의 치장을 위해 브뤼허 출신의 스테인드글라스 장인 갈리온 혼이 고용되었다.[42] 회담을 위한 가건물이었음에도 온갖 사치스러운 장식으로 치장되었고 곳곳에 금을 입혀 마감하였다.[40] 야외에는 두 개의 분수를 설치하였는데 포도주가 샘솟게 하였다. 회담장에 사용된 자재들은 이후 재활용되기도 하였는데, 목재 지붕은 해체되어 켄트주의 에이텀 장원을 건축할 때 사용되었다고 한다.[43] 회담장의 지붕은 양국을 상징하는 색으로 물들인 기름 먹인 천을 덮었다. 기록에 따르면 천정에는 커다란 유리로 채광창을 두어 회담장이 마치 야외에 설치된 듯 빛이 들어왔다고 한다. 역시 임시로 지어진 예배소에는 35명의 사제가 배치되었다.

3. 2. 의상 및 음식

도버 해협을 건너기 위해 정박해 있는 잉글랜드의 선박들을 묘사한 그림.


금직물 들판에서의 레슬링 (태피스트리, c. 1520). 프랑수아 1세가 실제 금직물 위에 오른쪽에 표시되어 있다.


헨리 8세


프랑수아 1세


금란의 들판 회담은 우호를 확인하기 위한 자리였지만, 양국은 상대를 압도하는 국력을 과시하려는 경쟁심이 더 컸다. 전쟁이 아닌 우호를 위한 경쟁이었던 만큼 군사력 대신 문화적 과시가 필요했고, 회담은 준비부터 실행까지 사치와 호화로움으로 가득했다. 헨리 8세는 단 한 번의 회담을 위해 궁전에 버금갈 정도로 호화로운 가건물을 꾸몄다.[39] 회담장을 비롯한 주변의 텐트에도 금란을 비롯한 값비싼 옷감을 아낌없이 사용하여 마치 들판 전체를 금란으로 두른 듯했고, 이후 이 회담은 "금란의 들판"으로 불리게 되었다. 헨리 8세는 금실로 나뭇잎을 수 놓은 옷감으로 두 군주의 자리를 치장하게 하였는데, 이 직물은 오스만 제국의 술탄 셀림 1세가 선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41]

회담장 치장을 위해 브뤼허 출신의 스테인드글라스 장인 갈리온 혼이 고용되었다.[42] 가건물이었음에도 온갖 사치스러운 장식으로 치장되었고 곳곳에 금을 입혀 마감하였다.[40] 야외에는 포도주가 샘솟는 두 개의 분수를 설치하였다. 회담장의 지붕은 양국을 상징하는 색으로 물들인 기름먹인 천을 덮었으며, 천정에는 커다란 유리로 채광창을 두어 회담장이 마치 야외에 설치된 듯 빛이 들어왔다고 한다.

회담 기간 내내 연회와 각종 경기, 재담과 서커스가 펼쳐졌다. 프랑수아 1세는 자신의 궁정에서 광대와 익살꾼들을 데리고 왔으며, 당대 유명한 음악가 장 무통을 초빙하여 각종 음악을 총괄하게 하였다. 당대 유럽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였던 프랑스의 궁정 합창단은 연일 이어지는 연회에서 청중들을 기쁘게 하였다.[44] 잉글랜드 측에서는 윌리엄 코니시가 지휘하는 악단이 동원되었다.[45]

회담 참가자를 위해 2,200 마리의 양을 비롯한 여러 식료품이 헨리 8세에 의해 마련되었고, 인근 성채를 배경으로 2,800 개의 텐트가 설치되었다.[40]

3. 3. 행사



회담 기간 동안 연회, 경기, 음악회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양국은 서로를 압도하는 국력을 과시하고자 경쟁하였는데, 이는 군사력이 아닌 문화적 과시로 나타났다. 회담은 준비부터 실행까지 사치스러움과 호화로움으로 가득 찼다.[39]

프랑수아 1세는 궁정 광대와 익살꾼들을 데려와 연회에서 재주와 익살을 선보이게 했고, 당대 유명한 음악가 장 무통을 초빙하여 음악을 총괄하게 했다. 프랑스 궁정 합창단은 연일 연회에서 청중들을 즐겁게 했다.[44] 잉글랜드 측에서는 윌리엄 코니시가 지휘하는 악단이 동원되었다.[45]

회담 참가자를 위해 2,200 마리의 양을 비롯한 여러 식료품이 헨리 8세에 의해 마련되었고, 인근 성채를 배경으로 2,800 개의 텐트가 설치되었다.[40]

두 왕은 서로를 능가하기 위해 텐트와 의상, 연회, 음악, 결투, 게임으로 경쟁했다. 텐트와 의상에는 금직물, 비단과 금실로 짠 값비싼 직물이 많이 사용되어 회합 장소의 이름이 "금란의 들판"이 되었다.

며칠 동안 두 왕이 모두 참가한 토너먼트가 진행되었다.[5] 왕들은 서로의 여왕을 즐겁게 하는 연회를 열었다. 다른 오락 행사에는 궁술 시연과 브르타뉴 및 콘월 레슬러 간의 레슬링이 포함되었다.

울지는 미사를 드렸고, 두 군주는 세례 요한 축일인 6월 24일 일요일에 헤어졌다. 그림은 머리 위로 날아가는 용을 묘사하고 있으며, 이는 미사 자체가 신도들 위로 날아가는 신비한 사건, 즉 용으로 인해 중단되었음을 의미할 수 있다. 미신적인 사람들은 이것을 큰 징조로 보았을 것이지만, 그것은 아마도 우연히 또는 의도적으로 발사된 불꽃놀이였을 것이다. 또는 그림 속의 용은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며, 아마도 매우 낭만화된 전설 속의 도롱뇽 (프랑수아의 상징) 또는 파멸의 징조, 즉 모든 매력에도 불구하고 정상 회담이 대체로 성과가 없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설교는 에라스뮈스의 절친한 친구인 리처드 페이스가 읽었다. 울지는 참석한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인 대사를 주었다.

4. 회담

두 군주의 만남은 사전에 철저히 준비되었다. 헨리 8세는 칼레 인근 긴에, 프랑수아 1세는 아르드레에 각각 거점을 마련했다. 1520년 6월 4일, 토머스 울지가 프랑수아 1세를 방문하면서 일정이 시작되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인 6월 7일, 두 군주는 발도르에서 처음 만났다.[40]

회담 기간 동안 마상창시합, 레슬링, 궁술 대회, 노래와 시 낭독 등 다채로운 행사가 포함된 토너먼트가 열렸다.[39] 헨리 8세와 프랑수아 1세는 서로의 힘을 과시하고자 토너먼트에 직접 참가했다.[40]

세례자 요한 축일인 6월 24일, 울지 추기경의 미사 집전을 끝으로 회담이 마무리되었다. 마지막 날에는 불꽃놀이로 추정되는 용 모양의 불꽃이 하늘을 나는 광경이 펼쳐졌다.[40]

4. 1. 만남과 토너먼트



1520년 6월 7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목요일, 헨리 8세와 프랑수아 1세는 발도르에서 처음 만났다.[40] 이들은 각각 잉글랜드 영토였던 칼레 인근의 긴과 프랑스 영토인 아르드레에 자리를 잡았다. 6월 4일, 잉글랜드 총리 토머스 울지가 화려한 트레인 차림으로 프랑수아 1세를 방문하면서 회담 일정이 시작되었다.

다음 날, 마상창시합, 레슬링 등 육체적 힘을 과시하고 노래와 시 낭독 등을 즐기는 토너먼트가 열렸다.[39] 헨리 8세와 프랑수아 1세는 비슷한 나이의 르네상스 군주이자 기사로서 강인함을 과시하고자 토너먼트에 직접 출전했다.[40] 토너먼트 규칙은 두 국왕이 직접 대결하지 않도록 짜였으나, 헨리 8세가 갑작스럽게 레슬링 시합을 제안했고, 프랑수아 1세가 순식간에 헨리 8세를 제압하여 그의 자존심을 구겼다.[47]

4. 2. 레슬링 경기



토너먼트마상창시합레슬링과 같은 육체적 힘을 과시하는 경기뿐만 아니라 노래와 시 낭독과 같은 행사도 함께 열렸다.[39] 헨리 8세와 프랑수아 1세는 비슷한 연배의 대표적인 르네상스 군주였고 스스로가 기사임을 자부하였으며 이 기회에 각자의 강인함을 과시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두 군주 모두 토너먼트에 출전하였다.[40] 토너먼트 경기의 규칙은 두 국왕이 직접 마주하지 않도록 주의깊게 준비되었지만, 헨리 8세가 급작스럽게 프랑수아 1세에게 레슬링 시합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프랑수아 1세는 순식간에 헨리 8세를 제압하여 헨리 8세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구겨졌다.[47] 잉글랜드와 프랑스 참가자들의 레슬링 대회도 열렸다.

4. 3. 미사와 마무리

세례 요한의 축일이었던 6월 24일 일요일, 울지 추기경이 직접 미사를 집전하는 것으로 회담은 마무리되었다.[40] 당대 기록에는 마지막 날 용이 하늘을 날았다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는 아마도 불꽃놀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5. 결과 및 영향

이 회담은 동시대인들에게 큰 인상을 주었지만, 정치적 결과는 매우 미미했다.[5] 비록 토너먼트의 규칙에는 두 왕이 서로 경쟁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지만, 헨리 8세는 프랑수아 1세에게 레슬링 경기를 도전했고, 경기에서 패배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13]

5. 1. 정치적 결과의 미미함

회담은 당대에 깊은 인상을 남겼으나 정치적 결과물은 미미하였다.[40] 행사를 주도한 울지는 이 우호 관계를 영속시키고자 하였으나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우호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당대의 사람들 조차 오랜 숙적이었던 두 국가의 상호불가침 조약이 오래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1521년 이탈리아 전쟁이 시작되자 잉글랜드는 프랑스와 대적하고 있던 신성 로마 제국카를 5세와 동맹을 맺었다. 이 와중에 헨리 8세가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는 과정에서 교황청과 갈라서고 수장령을 선포하자 토머스 울지는 반역자로 몰리게 되었다. 1530년 11월 29일 재판을 위해 압송되던 토머스 울지는 레스터를 지나다 병사하였다.[5]

5. 2. 잉글랜드-프랑스 관계 악화

금란의 들판 회담은 당대에 깊은 인상을 남겼으나 정치적 결과는 미미하였다.[40] 행사를 주도한 울지는 이 우호 관계를 영속시키고자 하였으나,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우호 관계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당대의 사람들조차 오랜 숙적이었던 두 국가의 상호 불가침 조약이 오래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5] 특히, 헨리 8세는 프랑수아 1세와의 레슬링 경기에서 패배하면서 불쾌해했다는 프랑스인의 기록이 있다.

이 사건 직후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는데, 추기경 울시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동맹을 맺었고, 카를 5세는 그해 말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1521년 이탈리아 전쟁이 시작되었다.[13]

5. 3. 토머스 울지의 몰락

금란의 들판에서 열린 회담은 당대에 깊은 인상을 남겼으나 정치적 결과물은 미미하였다.[40] 행사를 주도한 울지는 이 우호 관계를 영속시키고자 하였으나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우호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당대의 사람들 조차 오랜 숙적이었던 두 국가의 상호불가침 조약이 오래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1521년 이탈리아 전쟁이 시작되자 잉글랜드는 프랑스와 대적하고 있던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와 동맹을 맺는다. 이 와중에 헨리 8세가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는 과정에서 교황청과 갈라서고 수장령을 선포하자 토머스 울지는 반역자로 몰리게 되었다. 1530년 11월 29일 재판을 위해 압송되던 토머스 울지는 레스터를 지나다 병사하고 만다.

6. 회담 참가자

회담 참가자 명단은 러틀랜드 문서[3]와 ''헨리 8세 국왕의 외교 및 국내 서신 및 문서''[14]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헨리 8세 국왕의 외교 및 국내 서신 및 문서''는 "1519년 3월 12일 조약에 따라 프랑수아 1세와의 회담에 국왕과 왕비를 수행할 귀족, 여사, 신사의 수와 지위를 명시한 서신"으로 분류된다.

6. 1. 헨리 8세 측

토머스 울지의 제안으로 런던 조약을 통해 잉글랜드,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은 상호 불가침을 약속하였다.[31] 금란의 들판 회동은 런던 조약의 재확인을 위한 것이었다. 추기경이기도 하였던 토머스 울지는 교황의 요구를 실현시키기 위해 프랑스 측에 회담을 제안하게 된다.[32]

회담 참가자 명단은 러틀랜드 문서[3]와 ''헨리 8세 국왕의 외교 및 국내 서신 및 문서''[14]에서 발견된다.

다음은 "1519년 3월 12일 조약에 따라 프랑수아 1세와의 회담에 국왕과 왕비를 수행할 귀족, 여사, 신사의 수와 지위를 명시한 서신"의 내용이다.

헨리 8세 측 주요 참가자
구분직위이름시종채플린신사
추기경요크 대주교토머스 울지300명12명50명50필
대주교1명70명5명10명30필
공작2명각 70명5명10명30필
후작1명56명4명8명26필
백작10명각 42명3명6명20필
주교윈체스터1명56명4명8명26필
주교4명각 44명4명6명20필
남작20명각 22명2명2명12필
성 조지 기사단 기사4명각 22명2명2명48필
기사70명
(윌리엄 매튜 경 포함)
각 12명1명8필
긴 로브의 의원국왕의 비서, 부총장,
예배당 학장, 자선 담당관
각 12명1명8필
국왕 채플린12명각 6명3필
왕실 경호원12명각 1명2필
국왕의 근위병200명100필
침실 시종70명100필
궁정 직원266명70필
마구간 및 무기고 시종205명211필
에식스 백작
(국왕 원수)
130명100필
(위에 언급된 인원 외)
총계3,997명2,087필



잉글랜드 국왕이 의회에 참석하도록 임명된 사람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 보병에게 명령을 내릴 사절단
  • 웨스턴 브라운 경
  • 에드워드 페리스 경
  • 로버트 콘스터블 경
  • 랄프 에거튼 경
  • 토머스 루시 경
  • 존 마니 경
  • 칼레 회담에 영국 국왕을 수행할 귀족
  • 국왕의 자문 위원회
  • 울지 추기경
  • 추밀원
  • 링컨 주교
  • 노리치 주교
  • 헤리퍼드 주교
  • 로체스터 주교
  • 노퍽 공작
  • 버킹엄 공작
  • 도싯 후작
  • 서리 백작
  • 슈루즈베리 백작
  • 우스터 백작
  • 더비 백작
  • 노섬벌랜드 백작
  • 에식스 백작
  • 윌트셔 백작
  • 성 요한 경
  • 버가베니
  • 데번셔
  • 몬태규
  • 마운트이글
  • 코밤
  • 페러스
  • 피츠월터
  • 더들리
  • 사우스 데이커스
  • 다시
  • 코니어스
  • 오들리
  • 브로크
  • 피츠워렌 경
  • 왕실 예배당
  • 성 바울의 학장
  • 리치몬드의 부제
  • 솔즈베리 학장
  • 닥터 식스틴
  • 닥터 클라크
  • 글래스톤베리
  • 웨스트민스터
  • 버리
  • 윈치콤의 수도원장
  • 국왕 자문 위원회의 모든 기사 및 기타 인물
  •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 비서관
  • 시그넷 서기
  • 헤럴드
  • 왕실 관료
  • 음유시인

6. 2. 프랑수아 1세 측

프랑수아 1세는 당대 최고의 음악가로 알려진 장 무통을 초빙하여 음악을 총괄하게 하였고, 궁정 합창단을 동원하여 연일 연회에서 청중들을 즐겁게 하였다.[44] 또한, 프랑수아 1세는 자신의 궁정 광대와 익살꾼들을 데려와 연회에서 재주와 익살을 선보이게 하였다.[44]

프랑스 측 참가자 명단은 ''헨리 8세 국왕의 외교 및 국내 서신 및 문서''[14]에서 확인할 수 있다.

} 드뢰 및 레텔 백작, 오르발 영주 및 샹파뉴 총독

|-

| 베농 백작, 라 트레모유 영주, 제1 실장, 기옌 해군 제독 및 부르고뉴 총독

|-

| 에탕프 및 카라바 영주, 부아시 영주, 그랜드 마스터 및 도팽 총독 (1519년 사망)

|-

| 보니베, 프랑스 해군 제독

|-

| 로트레크 자작

|-

| 라 팔리스

|-

| 샤티용 (원수)

|-

| 기즈 백작, 로렌 공작의 형제

|-

| 사부아의 사생아, 빌라르와 보포르 백작, 프로방스 총독

|-

| 라발 백작

|-

| 드 샤토브리앙

|-

| 아르쿠르 백작

|-

| 오랑주와 탈르몽의 공작

|-

| 드 네베르

|-

| 몽스 데스파록스, 기옌 중위 및 몽포르 백작

|-

| 드 레스킨

|-

| 몽모렌시

|-

| 그랑 에퀴에

|-

| 드 라 샹브르

|-

| 토네르

|-

| 브리엔

|-

| 조니, 브레미와 몽 루엘 백작

|-

| 달브레

|-

| 기타 훈장의 기사들

|-

| 왕의 가신, 200명의 신사

|-

| 생 발리에

|-

| 노르망디 대원수, 선장

|-

| 경비대 궁수 400명, 선장 4명

|-

| 드 플로렌게스 (스위스인 100명 지휘)

|-

| 마이트르 도텔, 파네티에, 발레 등

|-

| 평의회 및 재정부 신사

|}

이 귀족들은 약 200마리의 말만 데리고 다닐 예정이었다.[14]

7. 대중문화 속 금란의 들판

조지 페인 레인스포드 제임스, 매그너스 밀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과 리처드 로저스와 셸던 하르니크의 뮤지컬 등 여러 문학 작품에서 금란의 들판 회담을 소재로 다루었다.[1][3][6][7] 드라마 《튜더스》와 《스페인 공주》에서도 이 만남을 극화하거나 허구적으로 재구성했다.[1][5] 영국 북부 비숍 오클랜드에서 열리는 야외 역사 야간 쇼 킨렌에서도 금란의 들판을 소재로 한 장면을 선보인다.[4]

7. 1. 문학

조지 페인 레인스포드 제임스는 그의 두 번째 소설인 《다즐리: 황금의 옷감 평원》(1830)에서 이 만남을 극화했다.[1] 매그너스 밀스의 2015년 소설 《황금의 옷감 평원》의 줄거리는 이 만남의 요소를 반영한다.[3] 마르셀 프루스트는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화자가 길베르트와 만나는 장면에서 "황금의 옷감 평원"을 언급한다.[6] 리처드 로저스가 작곡하고 셸던 하르니크가 작사한 1976년 뮤지컬 《렉스》는 헨리 8세의 이야기를 다루며 "황금의 옷감 평원"이라는 노래로 이 사건을 묘사한다.[7]

7. 2. 드라마/영화


  • 쇼타임의 드라마 《튜더스》는 첫 번째 시즌(2007)에서 이 만남을 극화했다.[1]
  • Starz 시리즈 《스페인 공주》는 두 번째 시즌(2020)에서 이 만남의 허구 버전을 포함한다. 스페인 국왕 카를 5세는 그의 고모인 캐서린 아라곤의 초대로 정상 회담에 참석하는 것으로 잘못 묘사되는데, 이는 그녀가 헨리 8세에게 6세 공주 메리를 20세 카를에게 약혼시키도록 설득하려 하고, 프랑수아 1세의 두 살배기 아들 대신 선택하려는 의도이다.[5]

7. 3. 기타


  • 영국의 소설가 조지 페인 레인스포드 제임스는 그의 두 번째 소설인 《다즐리: 황금의 옷감 평원》(1830)에서 이 만남을 극화했다.
  • 쇼타임의 드라마 《튜더스》는 첫 번째 시즌(2007)에서 이 만남을 극화했다.
  • 매그너스 밀스의 2015년 소설 《황금의 옷감 평원》의 줄거리는 이 만남의 요소를 반영한다.
  • 영국 북부 비숍 오클랜드에서 열리는 인기 야외 역사 야간 쇼 킨렌은 금란의 들판을 소재로 한 장면을 선보인다.
  • Starz 시리즈 《스페인 공주》는 두 번째 시즌(2020)에서 이 만남의 허구 버전을 포함한다. 스페인 국왕 카를 5세는 그의 고모인 캐서린 아라곤의 초대로 정상 회담에 참석하는 것으로 잘못 묘사되는데, 이는 그녀가 헨리 8세에게 6세 공주 메리를 20세 카를에게 약혼시키도록 설득하려 하고,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두 살배기 아들 대신 선택하려는 의도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그는 화자가 길베르트와 만나는 장면에서 "황금의 옷감 평원"을 언급한다. "그녀[길베르트]는 사실 나를 눈 덮인 잔디밭을 가로질러 그녀의 캠프로, '들판을 차지하도록' 소환했는데, 태양이 그 위에 장미빛 광채를 드리우면서 오래되고 낡은 금속성 광택의 브로케이드로 변모시킨 곳이었다."
  • 1976년 뮤지컬 《렉스》는 리처드 로저스가 작곡하고 셸던 하르니크가 작사했으며, 헨리 8세의 이야기를 다루며 "황금의 옷감 평원"이라는 노래로 이 사건을 묘사한다.

참조

[1] 간행물 Field of the Cloth of Gold 2020-07
[2] 서적 The Field of Cloth of Gold Yale University Press
[3] 서적 Rutland Papers: Original Documents Illustrative of the Courts and Times of Henry VII and Henry VIII Selected from the Private Archives of His Grace the Duke of Rutland https://books.google[...] Camden Society
[4] 웹사이트 Image of St Michael http://www.history.a[...] Institute of Historical Research, Royal Holloway College, University of London 2018-09-26
[5] EB1911
[6] 서적 Chronicle https://archive.org/[...]
[7] 서적 Grafton's Chronicle, or Chronicle at Large
[8] 서적 The Windows of King's College Chapel Cambridge
[9] 서적 Music in the Renaissance W.W. Norton
[10] 서적 Ightham Mote National Trust
[11] 웹사이트 HOASM: William Cornysh 'junior' http://www.hoasm.org[...]
[12] 서적 Queenship and Counsel in Early Modern Europe Palgrave Macmillan
[13] 웹사이트 Tournaments at the court of King Henry VIII http://www.royalarmo[...] 2019-11-10
[14] 서적 Letters and Papers, Foreign and Domestic, Henry VIII Institute of Historical Research
[15] 서적 The Field of Cloth of Gold Yale University Press
[16] 문서 son of Thomas Grenville (died 1513)
[17] 서적 Music in the Renaissance New York, W.W. Norton & Co.
[18] 서적 Ightham Mote National Trust
[19] 간행물 Field of the Cloth of Gold 2020-07
[20] 서적 The Field of Cloth of Gold Yale University Press
[21] 웹사이트 Cloth of Gold: the Golden Threads of an Ancient Tradition https://www.luigi-be[...]
[22] 논문 르네상스기 이태리 도시국가의 정부: 자유와 법치의 공화정 https://www.kci.go.k[...]
[23] 웹사이트 The on-going rivalry between Charles V and Francis I https://www.emperorc[...]
[24] 웹사이트 Guelf and Ghibelline https://www.britanni[...]
[25] 웹사이트 The European Balance of Power https://ehne.fr/en/e[...]
[26] 서적 The Kings and Queens of England Quercus Books
[27] 웹사이트 League of Cambrai https://www.britanni[...]
[28] 뉴스 자고나면 바뀐 '캉브레 동맹' https://www.sedaily.[...] 서울경제 2019-12-09
[29] 서적 Henry VIII Yale University Press
[30] 웹사이트 Battle of Marignano https://www.britanni[...]
[31] 웹사이트 Thomas, Cardinal Wolsey https://www.britanni[...]
[32] 웹사이트 The King, the Cardinal-Legate and the Field of Cloth of Gold https://research.stm[...] Wincester University Press
[33] 웹사이트 The northern Renaissance https://www.britanni[...]
[34] 논문 안드레아 만테냐의 카이사르의 개선식에 반영된 르네상스 군주정의 정치이념 https://www.kci.go.k[...]
[35] 논문 이탈리아 전쟁 시기(1494-1559) 루이 12세와 카를 5세의 개선식: ‘주권의 예술적 표현’ https://www.kci.go.k[...]
[36] 웹사이트 Francis I https://www.azay-le-[...]
[37] 서적 Rutland Papers: Original Documents Illustrative of the Courts and Times of Henry VII and Henry VIII Selected from the Private Archives of His Grace the Duke of Rutland https://books.google[...] Camden Society
[38] 웹인용 Image of St Michael http://www.history.a[...] Institute of Historical Research, Royal Holloway College, University of London 2018-09-26
[39] 웹사이트 The Field of Cloth of Gold https://www.hrp.org.[...]
[40] 간행물 Field of the Cloth of Gold EB1911
[41] 서적 Chronicle https://archive.org/[...]
[42] 서적 The Windows of King's College Chapel Cambridge
[43] 서적 Ightham Mote National Trust
[44] 서적 Music in the Renaissance W.W. Norton
[45] 웹인용 HOASM: William Cornysh 'junior' http://www.hoasm.org[...]
[46] 논문 Between Kings and Emperors: Catherine of Aragon Palgrave Macmillan
[47] 웹인용 Tournaments at the court of King Henry VIII http://www.royalarmo[...] 2019-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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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1세 측 주요 참가자 명단[14]
이름
나바르 왕
알랑송 공작
부르봉 공작
방돔 공작
로렌 공작
생 폴 백작
라 로슈 쉬르 욘 공
{{lang|fr|장 달브레 (샹파뉴 총독)|장 달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