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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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회는 후한 말에서 촉한 시기에 활약한 인물이다. 건녕군 독우로 시작하여 유비의 익주 점령을 예측하고 유비에게 귀순, 마초를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데 기여했다. 유비가 익주를 장악한 후 공조서좌주부, 별가종사, 래강도독, 교주자사 등을 역임하며 촉한에서 활약했다. 제갈량의 남중 정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워 안한장군, 한흥정후에 봉해졌으며, 이후에도 남중 지역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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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1년 사망 - 화흠
후한 말 혼란기에 여러 세력을 거쳐 조조에게 귀순하여 위나라 건국에 공헌, 삼공의 지위에 오른 화흠은 청빈한 삶을 살았다는 평가와 폭거를 저질렀다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 231년 사망 - 장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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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은 삼국 시대 촉한과 위나라에서 활약한 인물로, 유비의 촉 정벌 이후 촉한의 신료가 되었으나 오나라 공격을 반대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위나라에 귀순하여 진남장군 등을 역임했으며, 아들 황숭은 촉에 남아 등애의 침공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 촉한의 정치인 - 양의
양의는 촉한의 정치가로, 제갈량 사후 군 철수 임무 수행과 위연 제거에 공을 세웠으나, 좁은 소견과 과도한 야심으로 장완에게 밀려 불만을 품고 자결하여 능력과 인격의 조화 및 리더십의 중요성에 대한 교훈을 남겼다.
이회 (삼국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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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이회 |
원어 이름 | 李恢 |
로마자 표기 | Li Hui |
자 | 덕앙 (德昂) |
출생지 | 익주건녕군 유원현 |
사망일 | 231년 |
사망 장소 | 익주한중군 |
직업 | 군인, 정치인 |
작위 | 한흥정후 (漢興亭侯) |
가족 | 조카: 이구 자녀: 이이 |
관직 및 직책 | |
건녕태수 | 임기 시작: 229년 임기 종료: 231년 군주: 유선 승상: 제갈량 |
안한장군 | 임기 시작: 225년 임기 종료: 231년 군주: 유선 승상: 제갈량 |
교주자사 (명목상) | 임기 시작: 221년 임기 종료: 229년 군주: 유비 / 유선 승상: 제갈량 |
내항도독 | 임기 시작: 221년 임기 종료: 231년 군주: 유비 / 유선 승상: 제갈량 전임자: 등방 후임자: 장억 |
섬긴 세력 | |
소속 | 유장 (초기) 촉한 (이후) |
2. 초기 생애 및 경력
이회는 후한 말기 건녕군(建寧郡) 유원현(俞元縣, 현재의 윈난성 청장현)에서 태어났다.[1] 그는 고향인 건녕군에서 지방 감찰관(督郵)으로 경력을 시작했다. 그의 고모부는 제갈량의 남중 정벌 이후 촉한에서 군관으로 복무한 찬습(竄習)으로, 찬습은 건령현(建伶縣, 현재의 윈난성 쿤밍시 진닝구)의 현령이었다.
2. 1. 관직 생활과 유비와의 만남
이회는 군에서 독우 벼슬을 하였는데, 건령현령이었던 고모부 찬습이 법령을 위반하여 찬습의 일에 연루되어 파면되었다.[2]태수 동화는 찬습이 그 지방의 호족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불문에 부치고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후에 이회를 유장이 다스리는 익주에 천거했다.[2]
이회는 주로 가는 도중에 유비가 가맹에서 돌아와 유장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유장이 반드시 패배할 것을 예상하여, 군의 사자라는 명목으로 북쪽 유비가 있는 곳으로 가서 면죽에서 만났다. 유비는 이회를 칭찬하고 낙성까지 수행하도록 하고, 이회를 한중으로 파견하여 마초와 우호를 맺도록 하여 마초는 유비에게 귀순했다.[2]
성도가 평정된 후, 유비는 익주목을 겸임하고 이회를 익주의 공조서좌주부로 임명했다.[2]
도망자가 이회를 모함하여 모반하려 한다고 했다. 담당관리가 이회를 체포하여 호송하자, 유비는 사실무근임을 밝히고 별가종사로 승진시켰다.[2]
장무 원년(221년), 내강 도독 등방이 세상을 떠나자 유비가 이회에게 물었다.[2]
"누가 등방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2]
이회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2]
'''사람의 재능에는 각각 장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때문에 공자는 '사람을 사용할 때는 그 사람의 재덕을 헤아려서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군주가 위에 있으면 신하는 마음을 다할 것입니다. 때문에 선령 싸움에서 조충국은 '노신(老臣)만한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신은 제 자신의 역량을 가늠할 수 없으니, 폐하께서 살피십시오.'''[2]
유비는 웃으며 말했다.[2]
"나의 본의 역시 벌써 그대에게 있습니다."[2]
그리고 이회를 내강도독ㆍ사지절로 임명하고, 교주자사를 겸임하도록 했으며 평이현에 주둔시켰다.[2]
3. 촉한에서의 활약
이회는 군에서 독우 벼슬을 하였는데, 건령현령이었던 고모부 찬습이 법령을 위반하여 파면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태수 동화는 찬습이 그 지방의 호족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불문에 부치고 이회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동화는 이회를 유장이 다스리는 익주에 천거했다.
220년, 동한 왕조가 멸망하고 삼국 시대가 시작된 후, 이회는 221년에 유비가 건국한 촉한에서 벼슬을 지냈다.[4]
건흥 7년(229년)에 교주가 오에 종속되었으므로 이회의 교주자사 직을 해제했다. 다시 건녕태수를 겸임시켰으므로 돌아와 본군에 거주하게 되었다. 한중으로 이주하여 살았으며, 건흥 9년(231년)에 사망했다. 아들 이유(李遺)가 후사를 이었다. 이회의 조카 이구는 우림우부독으로 제갈첨을 수행하여 등애를 방어했으며, 전쟁터에서 명령을 받았고 면죽에서 사망했다.
3. 1. 유비 휘하에서의 활동
유비가 가맹에서 돌아와 유장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회는 유장이 패배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군의 사자라는 명목으로 북쪽의 유비에게 가서 면죽에서 그를 만났다. 유비는 이회를 칭찬하고 낙성까지 수행하도록 했으며, 한중으로 파견하여 마초와 우호를 맺도록 했다. 마초는 이 일로 유비에게 귀순했다.[5][6]성도가 평정된 후, 유비는 익주목을 겸임하고 이회를 익주의 공조서좌주부로 임명했다.[7] 이후 이회가 모반을 꾀한다는 모함을 받았으나, 유비는 사실무근임을 밝히고 이회를 별가종사로 승진시켰다.[8]
장무 원년(221년), 내강 도독 등방이 세상을 떠나자 유비는 이회에게 등방의 후임에 대해 질문했다. 이회는 사람마다 재능에 장단점이 있음을 언급하며, 현명한 군주 아래에서는 신하들이 마음을 다할 것이라고 답했다. 선령 싸움에서 조충국이 자신을 추천한 고사를 인용하며 자신의 역량은 스스로 가늠하기 어려우니 유비가 살펴달라고 했다. 유비는 웃으며 이미 이회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답했다.
이후 이회는 내강도독ㆍ사지절로 임명되고 교주자사를 겸임하며 평이현에 주둔했다.
3. 2. 제갈량의 남만 정벌과 공적
유비가 세상을 떠난 후, 남중 지역의 유력자인 고정은 월수에서 방자한 행동을 했고, 옹개는 건녕에서 교만하게 굴었으며, 주포는 장가에서 모반했다.[17] 제갈량은 남만 정벌에 나서서 먼저 월수를 지났다. 이회는 제갈량을 따라 건녕으로 향했다. 여러 현들은 대대적으로 서로 규합하여 곤명에서 이회 군대를 포위하기에 이르렀다.[18]당시 이회의 병력은 적었고, 적군은 두 배가 되었으며, 아직 제갈량의 소식을 듣지 못했으므로, 건녕군 사람이었던 이회는 꾀를 내어 남방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속였다.
'''"관군은 식량이 다 떨어졌습니다. 병사를 물려 돌아가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 사이 오랫동안 고향을 등지고 있었는데, 오늘에서야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다시 북쪽으로 갈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대들과 함께 대사를 도모하려고 하기 때문에 진심으로 서로 알리는 것입니다."'''[19]
남방 사람들은 이회의 말을 믿어 포위를 느슨하게 했다. 이회가 출격하자 크게 격파당했다. 이회는 도주하는 적군을 추격하여 남쪽으로 반강까지 갔으며, 동쪽으로 장가와 연접해 제갈량의 명성과 위세에 서로 호응했다. 마충과 이회는 병력을 이끌고 제갈량과 촉군 주력 부대와 합류했다.[20] 남만이 평정되었으며, 이회의 군공이 많았으므로 한흥정후로 봉해지고, 안한장군 관직이 더해졌다.[21]
이후에 군대가 촉 땅으로 돌아가자, 남만족은 또 반란을 일으키고 수비하던 대장을 살해했다.[22] 이회는 직접 토벌에 나서 흉악한 행동을 한 무리들을 근절시켰고, 그곳의 유력자들을 성도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수와 복땅에서 밭가는 소, 군마, 금과 은, 무소 가죽을 공물로 납입하도록 하여 지속적으로 군용 물자를 충당했으므로, 당시 비용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였다.[23]
3. 3. 남중 통치와 안정화
221년, 뇌강 지역 사령관(庲降都督)이던 등방이 사망하자,[9] 유비는 그를 대체할 인물을 찾기 위해 이회에게 "누가 그를 대체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11] 이회는 "사람의 능력은 사람마다 다르니, 공자께서 '사람을 쓸 때는 그의 능력에 따라 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현명한 군주가 있으면, 최선을 다하려는 신하가 있을 것입니다. 선령 전투 때 조충국이 '폐하의 늙은 신하 말고는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신은 감히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여 폐하께서 저를 고려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답했다.[12] 유비는 웃으며 "이미 너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라고 말했다.[13][14]이에 유비는 이회를 내강도독ㆍ사지절로 임명하고, 촉한의 동맹국인 동오의 영토였던 교주를 명목상 감찰하는 황제의 권한을 부여했다. 이회가 뇌강 지역 사령관으로 재직했을 때 그의 행정 본부는 평이현(平夷縣; 현재 구이저우성 비제시 북동쪽)에 있었다.[15][16]
유비 사후, 고정은 월수에서 방자한 행동을 했고, 옹개는 건녕에서 교만하게 굴었으며, 주포는 장가에서 모반했다. 제갈량은 남만 정벌에 나서서 먼저 월수를 지났다. 이회는 제갈량을 따라 건녕으로 향했다. 여러 현들은 대대적으로 서로 규합하여 곤명에서 이회 군대를 포위했다.
당시 이회의 병력은 적었고, 적군은 두 배가 되었으며, 아직 제갈량의 소식을 듣지 못했으므로 건녕군 사람이었던 이회는 꾀를 내어 남방 사람들을 속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관군은 식량이 다 떨어졌습니다. 병사를 물려 돌아가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 사이 오랫동안 고향을 등지고 있었는데, 오늘에서야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다시 북쪽으로 갈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대들과 함께 대사를 도모하려고 하기 때문에 진심으로 서로 알리는 것입니다.'''
남방 사람들은 이회의 말을 믿어 포위를 느슨하게 했다가, 이회가 출격하자 크게 격파당했다. 이회는 도주하는 적군을 추격하여 남쪽으로 반강까지 갔으며, 동쪽으로 장가와 연접해 제갈량의 명성과 위세에 서로 호응했다. 남만의 토지는 평정됐으며, 이회의 군공이 많았으므로 한흥정후로 봉하고, 안한장군의 관직이 더해졌다.
제갈량과 촉군이 남중을 떠난 후, 일부 토착 부족들은 촉의 통치에 다시 반란을 일으켜 이 지역의 군을 지키는 군사 장교들을 살해했다.[22] 이회는 친히 정부군을 이끌고 반란군을 공격하여 섬멸한 후, 부족 추장들을 촉의 수도 성도로 강제 이주시켰다. 또한 叟(수)와 濮(복) 부족으로 하여금 소, 말, 금, 은, 코뿔소 뿔, 가죽 및 기타 귀중한 자원의 형태로 촉 정부에 조공을 바치도록 했다. 이러한 자원은 촉이 경쟁 국가 조위에 대항하여 벌이는 군사 작전의 자금원으로 사용되었다.[23]
229년, 촉은 동맹국 동오와의 동맹을 재확인하고 오 황제 손권의 정통성을 인정하면서, 이전의 교주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고 교주가 오의 영토라는 데 동의했다. 그 결과 이회는 교주 자사(交州刺史)라는 명목상의 임명을 그만두었다. 이후 고향인 건녕군(建寧郡)의 태수(太守)로 임명되었고 건녕군의 수도인 평이현(平夷縣; 현재 구이저우성 비제시 북동쪽)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24]
4. 말년
유비가 세상을 떠나자, 고정은 월수에서 방자한 행동을 했고, 옹개는 건녕에서 교만하게 굴었으며, 주포는 장가에서 모반했다.[1] 승상 제갈량은 남만 정벌에 나서서 먼저 월수를 지났다.[1] 이회는 제갈량을 따라 건녕으로 향했다.[1] 여러 현들은 대대적으로 서로 규합하여 곤명에서 이회 군대를 포위하기에 이르렀다.[1]
당시 이회의 병력은 적었고, 적군은 두 배가 되었으며, 또 아직 제갈량의 소식을 듣지 못했으므로 건녕군 사람이었던 이회는 꾀를 내어 남방 사람들을 속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1]
'''관군은 식량이 다 떨어졌습니다. 병사를 물려 돌아가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 사이 오랫동안 고향을 등지고 있었는데, 오늘에서야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다시 북쪽으로 갈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대들과 함께 대사를 도모하려고 하기 때문에 진심으로 서로 알리는 것입니다.'''[1]
남방 사람들은 이회의 말을 믿어 포위를 느슨하게 했다가, 이회가 출격하자 크게 격파당했다.[1] 이회는 도주하는 적군을 추격하여 남쪽으로 반강까지 갔으며, 동쪽으로 장가와 연접해 제갈량의 명성과 위세에 서로 호응했다.[1] 남만의 토지는 평정됐으며, 이회의 군공이 많았으므로 한흥정후로 봉하고, 안한장군의 관직이 더해졌다.[1]
이후에 군대가 촉 땅으로 돌아가자, 남만족은 또 반란을 일으키고 수비하던 대장을 살해했다.[1] 이회는 직접 토벌에 나서 흉악한 행동을 한 무리들을 근절시켰고, 그곳의 유력자들을 성도로 이주시킨 다음, 수와 복땅에서 밭가는 소, 군마, 금과 은, 무소 가죽을 공물로 납입하도록 하여 지속적으로 군용 물자를 충당했으므로 당시 비용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였다.[1]
건흥 7년(229년)에 교주가 오에 종속되었으므로 이회의 교주자사 직을 해제했다.[1] 다시 건영태수를 겸임시켰으므로 돌아와 본군에 거주하게 되었다.[1] 한중으로 이주하여 살았으며, 건흥 9년(231년)에 사망했다.[1] 아들 이유(李遺)가 후사를 이었다.[1] 이회의 조카 이구는 우림우부독으로 제갈첨을 수행하여 등애를 방어했으며, 전쟁터에서 명령을 받았고 면죽에서 사망했다.[1]
건흥 원년 (223년)에 유비가 사망하자, 남중에서 고정·옹개·주포가 반란을 일으켰다.[1] 건흥 3년 (225년), 제갈량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남중으로 친정했다.[1] 이회는 제갈량을 따라 남정에 참여하여, 별동대를 맡았다.[1] 곤명에서 배에 달하는 병사에게 포위되었지만 계략을 사용하여 격파했고, 도망치는 적을 쫓아 장가군까지 이르렀다.[1] 이 공로로, 안한장군·한흥정후가 되었다.[1]
제갈량이 떠난 후, 남중에서는 다시 이민족의 반란이 일어나, 운남태수 여개가 반란군에게 살해되었기 때문에, 이회는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했다.[1] 또한, 남중의 유력자들을 성도로 보내, 우마·금은 등의 공물을 납입하게 하여, 일시적으로 군사비가 크게 윤택해졌다.[1]
건흥 7년 (229년), 교주는 오에 종속되었으므로, 교주자사에서 해임되어 건녕태수가 되었다.[1] 그 후 한중으로 옮겨, 건흥 9년 (231년)에 사망했다.[1]
5. 가족 관계
6. 평가
진수는 삼국지에서 이회에 대해 "뜻과 행실이 훌륭하다고 평가받았다. 황권, 여개, 마충, 왕평, 장니 등과 더불어 그들의 자질 덕분에 천하에 널리 알려졌으며, 그들이 부여받은 기회를 잘 활용했기에 훌륭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라고 평했다.[28]
7. 《삼국지연의》에서의 이회
이회는 처음부터 유장의 신하로 등장하며, 왕루, 황권 등과 함께 유비의 입촉을 반대했다. 정사와 마찬가지로 유장의 패배를 예상하고 유비에게 귀순했으며, 장로에게 있던 마초 역시 자신이 사자로 가서 설득하여 귀순시켰다. 연의에서는 마초와 친구로 설정되어 있다. 그 후, 제갈량의 북벌에 참가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마초를 항복시킨 공적이 크게 다루어지며, 변론에 능한 인물로 묘사된다.
민간 전승에서는 이회의 아들 이위(가공 인물)가 관색의 여동생(관우의 셋째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제갈량이 이회를 파견하여 남중으로 진공했을 때, 이위 부부는 관색과 함께 선봉이 되어 반란을 평정했다고 한다.
8. 더 보기
-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마초를 항복시킨 공적이 크게 다루어지며, 변론에 능한 인물로 묘사된다.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43
[2]
서적
Huayang Guo Zh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3
[3]
서적
Sanguozhi vol. 43
[4]
서적
Sanguozhi vol. 43
[5]
서적
Sanguozhi vol. 43
[6]
서적
Sanguozhi vol. 43
[7]
서적
Sanguozhi vol. 43
[8]
서적
Sanguozhi vol. 43
[9]
논문
The Kingdoms of Nanzhong: China's Southwest Border Region Prior to the Eighth Century
2009
[10]
서적
Pei Songzhi's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3
[11]
서적
Sanguozhi vol. 43
[12]
서적
Sanguozhi vol. 43
[13]
서적
Sanguozhi vol. 43
[14]
서적
Huayang Guo Zhi vol. 4
[15]
서적
Sanguozhi vol. 43
[16]
서적
Huayang Guo Zhi vol. 4
[17]
서적
Sanguozhi vol. 43
[18]
서적
Sanguozhi vol. 43
[19]
서적
Sanguozhi vol. 43
[20]
서적
Sanguozhi vol. 43
[21]
서적
Sanguozhi vol. 43
[22]
서적
Sanguozhi vol. 43
[23]
서적
Sanguozhi vol. 43
[24]
서적
Sanguozhi vol. 43
[25]
서적
Sanguozhi vol. 43
[26]
서적
Sanguozhi vol. 43
[27]
서적
Sanguozhi vol. 43
[28]
서적
Sanguozhi vol.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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