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만주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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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만주 침공은 1931년 만보산 사건과 만주 사변을 시작으로 일본 제국이 만주 지역을 침략한 사건이다. 관동군 소속 이타가키 세이시로와 이시와라 간지가 꾸민 위장 사건으로 시작되었으며, 일본은 남만주철도 폭파를 자작극으로 연출하여 군사 행동을 개시했다. 일본군은 만주 전역을 빠르게 점령하고 친일 정권인 만주국을 수립했다. 이 사건은 일본 내에서 대중적 지지를 얻었고, 국제 연맹의 무력함을 보여주며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지는 침략 행위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한국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위협했지만, 항일 무장 투쟁을 더욱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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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만주 침공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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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개요 | |
분쟁 명칭 | 일본의 만주 침공 |
분쟁 시기 | 1931년 9월 18일 – 1932년 2월 27일 |
분쟁 지역 | 중화민국 만주 |
분쟁 결과 | 일본의 승리 |
관련 조약 | 탕구 평화 협정 채결 |
관련 전투 | 만주사변 만주 쟝챠오 눈강 다리 진저우 하얼빈 |
관련 정보 | 중일전쟁의 일부 간토 군에 의해 만주 점령 만주국을 일본의 괴뢰 국가로 설립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일본 제국 |
교전국 1-1 | 만주국 (1932년부터) |
교전국 1-2 | 중국인 협력자 |
교전국 2 | 중화민국 |
지휘관 | |
일본 제국 | 혼조 시게루 타몬 지로 도조 히데키 하야시 센주로 |
만주국 | 푸이 장하이펑 |
중화민국 | 장쉐량 마잔산 펑짠하이 딩차오 |
병력 규모 | |
일본 제국 | 30,000 – 60,450명 |
중화민국 | 160,000명 |
2. 배경
1931년 7월 1일 발생한 만보산 사건은 중국인과 조선인 농민 간의 사소한 분쟁이었으나, 일본 제국은 이를 반중 감정을 부추기고 침략의 명분을 쌓기 위한 선전 도구로 활용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일본 관동군은 만주에서의 분쟁이 일본의 국익에 부합한다고 판단하고, 게코쿠조(하극상) 정신 아래 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관동군 대좌 이타가키 세이시로와 중좌 이시와라 간지 등은 1931년 9월 18일, 남만주철도 선로를 의도적으로 폭파하는 류탸오후 사건을 일으켰다. 실제 피해는 미미했으나 중국 측의 소행으로 조작되었으며,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군은 선양 등 만주 주요 지역에 대한 군사 행동을 개시했다. 이것이 만주 사변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군부의 독단적인 침략 행위는 당시 일본 내에서 군부의 영향력이 강화되고 민간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실제로 만주 침공 이후 1932년 초 1·28 상하이 사변이 발발하고, 같은 해 5월에는 일본 총리가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일본 내 민간 통치는 더욱 약화되었다.
2. 1. 만보산 사건
1931년 7월 1일, 만주의 만보산 지역에서 중국인 농민과 조선인 농민 사이에 사소한 충돌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만보산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농민 간의 사소한 분쟁이었으나, 일본 제국과 한국 언론은 이 사건을 과장하고 왜곡하여 매우 선정적으로 보도했다. 일본 제국은 이를 반중 감정을 부추기고 이후 만주 침략의 명분을 쌓기 위한 선전 도구로 적극 활용했다. 이러한 조작된 여론은 결국 같은 해 9월 18일 만주 사변 발발의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2. 2. 만주사변

1931년 7월 1일 발생한 만보산 사건은 중국인과 한국인 농민 간의 분쟁이었으나, 일본 제국과 한국 언론에 의해 선정적으로 보도되며 일본 내 반중 감정을 고조시키는 선전 도구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31년 9월 18일, 만주 사변이 발발했는데, 이는 일본 관동군이 조작한 위장 공격 사건이었다.
만주에서의 분쟁이 일본의 국익에 부합한다고 판단한 관동군 대좌 이타가키 세이시로와 중좌 이시와라 간지는 게코쿠조(하극상) 정신에 입각하여 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한 위장 사건, 즉 류탸오후 사건을 독자적으로 계획했다.
원래 9월 28일로 예정되었던 작전은 9월 18일로 앞당겨졌다. 남만주철도를 경비하던 독립수비대 제29보병연대 소속 소위 스에모리 고모토가 철도 선로 근처에 폭발물을 설치했으나, 실제 큰 피해를 주지는 못할 정도였다. 9월 18일 오후 10시 20분경 폭발이 일어났지만, 폭발 규모는 미미하여 레일 한쪽의 1.5m 구간만 손상되었을 뿐이었다. 심지어 장춘에서 출발한 열차는 이 손상된 선로를 문제없이 통과하여 오후 10시 30분에 선양에 도착했다.[6]
그러나 일본군은 이를 중국 측의 공격으로 몰아붙였다. 9월 19일 아침, 선양의 장교 클럽에 설치된 포 2문이 인근 중국 수비대를 향해 포격을 시작했다. 장쉐량 휘하의 소규모 공군은 파괴되었고, 중국군은 일본군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약 500명의 일본군은 7,000명 가량의 중국 수비대를 공격하여 베이다잉 병영을 점령했다. 저녁 무렵 전투가 끝나자 일본군은 중국군 약 500명의 사망자를 낸 반면, 자신들은 단 2명의 사망자만으로 선양을 점령하며 본격적인 만주 침략의 서막을 열었다.
사건 발생 직후, 일본 제국 대본영은 사태를 국지적으로 수습하라는 결정을 내리고 이를 관동군 사령부에 전달했다. 하지만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는 이 명령을 무시하고 오히려 휘하 부대에 남만주철도 전역으로 작전을 확대하라고 지시했다. 9월 19일 새벽, 제29보병연대는 봉천(선양)에 진입하여 저항하는 중국군을 제압하고 내성을 점령했다.[7] 동시에 제2대대는 북대영과 동대영을 점령했으며,[7] 제2사단 병력까지 동원되어 봉천 동부 지역의 남은 중국군을 소탕했다.[7] 제1대대는 장춘 인근 관성자에서 중국군과 교전했다.[7] 같은 날, 혼조의 요청을 받은 조선군 사령관 하야시 센주로는 히로히토 천황의 재가도 없이 제20보병사단 병력을 쪼개 제39혼성여단을 편성하고 만주로 파병했다. 9월 19일 말까지 일본군은 영구, 랴오양, 봉천, 푸순, 단둥, 사평, 장춘 등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다. 다음 날, 중국 제2군 사령관 완수성은 톈진으로 철수 명령을 내렸다.[7]
일본군의 침략은 계속 확대되었다.
- 9월 21일: 길림시 점령.
- 9월 23일: 교하, 돈화 점령.
- 9월 26일: 길림성 성장 장쭤샹을 축출하고, 시차를 임시 주석으로 하는 친일 괴뢰 정부인 "길림성 임시정부" 수립.[8] 이 정부는 일본의 길림시 무혈 점령을 도왔다.[8]
- 10월 1일: 장하이펑이 타오난 지역에서 항복.
- 10월 중: 지싱이 옌볜 조선족 자치주 지역에서 항복.[9]
- 10월 17일: 위즈산이 랴오닝성 동부를 일본에 넘김.
도쿄의 일본 문민 정부는 군대가 중앙 정부의 명령 없이 독단적으로 행동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연이은 승전보가 전해지자, 군부에 맞설 힘이 없음을 깨닫고 오히려 제7사단의 제14혼성여단을 시작으로 3개 보병 사단을 추가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메이지 헌법 하에서는 육군과 해군 대신을 임명해야 내각 구성이 가능했기 때문에, 선출된 정부는 사실상 군부에 인질로 잡힌 것과 다름없었다. 군부의 지지 없이는 정부 자체가 붕괴될 수 있는 구조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1932년 초에는 상하이에서 1·28 상하이 사변이 일어났고, 같은 해 5월에는 일본 총리가 암살당하면서 일본 내에서 군부의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고 민간 통치는 약화되었다.
3. 침공 초기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일본 대본영은 사건을 국지화하기로 결정했으나,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는 이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남만주 철도 전역으로 작전 확대를 명령했다.[7] 이에 따라 관동군은 철도를 따라 주요 도시들을 빠르게 점령하기 시작했다.
또한, 9월 19일 혼조 시게루의 요청과 조선군 사령관 하야시 센주로의 결정으로, 한반도에 주둔 중이던 제20사단의 일부 병력이 차출되어 제39혼성여단으로 편성되었고, 이 부대는 히로히토 천황의 재가 없이 만주로 파견되었다.[7] 이처럼 침공 초기부터 일본 군부는 중앙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독단적으로 전쟁을 확대해 나갔다.
3. 1. 일본군의 군사 작전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일본 대본영은 사건을 국지적으로 마무리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관동군에 통보했다. 그러나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는 중앙 정부의 방침을 무시하고, 오히려 남만주 철도 전역으로 작전을 확대하라는 독단적인 명령을 내렸다.혼조의 명령에 따라 타몬 지로가 지휘하는 제2사단은 철도를 따라 빠르게 진격하여 안산, 하이청, 카이위안, 톄링 시, 푸순 시, 쓰핑 시, 창춘시, 화뎬 시, 잉커우 시, 단둥 시, 번시 시 등 약 1175km에 달하는 지역을 점령했다. 9월 19일 새벽에는 제29보병연대가 봉천에 진입하여 중국군의 저항을 제압하고 성내를 장악했으며, 제2대대는 북대영과 동대영을 점령했다.[7] 제1대대는 장춘 인근 관성자에서 중국군과 교전했다.[7]
같은 날인 9월 19일, 혼조 시게루의 요청과 조선군 사령관 하야시 센주로의 명령으로 한반도에 주둔 중이던 제20사단 병력 일부가 차출되어 제39혼성여단이 급히 편성되었다. 이 부대는 쇼와 천황의 재가도 없이 당일 만주로 파견되는 등, 군 통수권을 무시한 작전이 강행되었다. 9월 19일 말까지 일본군은 영구, 랴오양, 봉천, 푸순, 단둥, 사평, 장춘 등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다.[7]
9월 20일부터 25일 사이 일본군은 시온귀에 진, 창투 현, 랴오양, 랴오위안, 타오난, 지린성 주요 지역, 자오허, 룽화 진, 신민 시 등을 추가로 장악했다. 이로써 일본군은 랴오닝성과 지린성 대부분을 점령하고, 만주와 한반도를 철도로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
9월 21일에는 길림시를 점령했으며, 9월 23일에는 교하와 돈화를 점령했다. 9월 26일, 일본군은 길림성 성장 장쭤샹을 몰아내고 친일 인물인 시차를 임시 주석으로 하는 "길림성 임시정부"를 수립했다.[8] 이 괴뢰 정부의 협조 아래 일본군은 큰 저항 없이 길림시를 점령할 수 있었다.[8] 10월에는 장하이펑이 타오난 지역을, 지싱(吉興)이 옌볜 지역을[9], 위즈산이 동부 랴오닝 지역을 일본에 넘기며 항복했다.
한편, 도쿄의 일본 중앙 정부는 군부가 명령 계통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전쟁을 확대하고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민간 정부는 군부의 이러한 하극상적인 행태에 혼란에 빠졌으나, 전선에서 연이어 들려오는 승전 소식에 군부에 대한 반대 목소리는 힘을 잃었다. 결국 정부는 군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제7사단의 제14혼성여단을 시작으로 일본 본토에서 3개 보병사단을 추가로 파병하는 것을 승인했다. 당시 메이지 헌법 체제 하에서는 군부 인사가 내각 구성에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군부의 지지 없이는 내각 자체가 붕괴될 수 있는 구조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로 인해 선출된 민간 정부는 사실상 군부의 독주를 제어할 힘이 없었다.
3. 2. 일본 군부의 독주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일본 대본영은 사건을 국지적으로 해결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관동군 사령부에 전달했다. 그러나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는 이 결정을 무시하고, 오히려 휘하 부대에 남만주 철도 전역으로 작전을 확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7] 타몬 지로가 지휘하는 제2사단은 철도를 따라 빠르게 진격하여 안산 시, 하이청 시, 카이위안 시, 톄링 시, 푸순 시, 쓰핑 시, 창춘시, 화뎬 시, 잉커우 시, 단둥 시, 번시 시 등 약 1175km에 달하는 지역을 점령했다. 9월 19일 새벽에는 제29보병연대가 봉천에 진입하여 중국군의 저항을 제압하고 내성을 점령했으며, 제2대대는 북대영과 동대영을 점령했다.[7]같은 날인 9월 19일, 혼조 시게루의 요청을 받은 조선군 사령관 하야시 센주로는 제20보병사단의 일부 병력을 차출하여 제39혼성여단을 급히 편성했고, 이 부대는 히로히토 천황의 재가도 없이 당일 만주로 파견되었다. 이는 명백한 군 통수권 침해 행위였다. 9월 19일 말까지 일본군은 영구, 요양, 봉천, 푸순 시, 단둥 시, 사평, 장춘 등 주요 도시들을 장악했다.
일본군의 침략은 계속되어 9월 20일부터 25일 사이에는 시온귀에 진, 창투 현, 랴오양 시, 랴오위안 시, 타오난 시, 길림성, 자오허 시, 룽화 진, 신민 시 등을 추가로 점령했다. 9월 21일에는 길림시를, 9월 23일에는 교하와 돈화를 점령했다. 이를 통해 일본군은 랴오닝성과 지린성 대부분을 장악하고 한반도와의 철도 연결을 확보했다. 9월 26일, 길림성 성장 장쭤샹은 축출되었고, 일본은 시차를 임시 성장으로 내세워 친일 괴뢰 정부인 '길림성 임시정부'를 수립했다.[8] 10월에는 장하이펑이 타오난 지역을, 지싱(吉興)이 옌볜 조선족 자치주 지역을, 위즈산이 랴오닝성 동부 지역을 일본에 넘겨주었다.[9]
한편, 도쿄의 일본 중앙 정부는 군부가 명령 없이 독단적으로 작전을 확대했다는 소식에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다. 민간 정부는 군부의 이러한 하극상적인 행동에 당황했으나, 연이어 들려오는 승전 소식에 군부에 대한 비판 여론은 힘을 잃었다. 결국 일본 정부는 군부의 독주를 제지하기는커녕, 오히려 제7사단 제14혼성여단을 시작으로 일본 본토에서 3개 보병사단을 추가로 파병하며 침략을 지원했다. 당시 메이지 헌법 하에서는 육군과 해군 대신이 내각 구성에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군부의 지지 없이는 내각 자체가 성립될 수 없었다. 이는 선출된 민간 정부가 사실상 군부에 종속되어 군부의 독주를 제어할 수 없었던 당시 일본 정치의 구조적 한계를 보여준다.
4. 분리 독립 움직임
일본은 만주 침공 이후 각지에서 친일 세력을 동원하여 중화민국으로부터의 분리 독립 움직임을 조장했다. 이는 장차 만주국 수립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려는 시도였다. 랴오닝성에서는 정부가 선양에서 철수한 뒤 들어선 "민족보전위원회"가 독립을 선언했으며, 일본군이 점령한 지린성에서는 만주국군 지휘관 시차가, 하얼빈에서는 장징후이 등이 분리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랴오닝성 서북부 타오난 시의 장하이펑 장군은 일본의 군수 지원을 받는 대가로 독립을 선포하기도 했다.[7]
이러한 분리 독립 시도가 항상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1931년 10월 13일, 장하이펑은 헤이룽장성의 성도 치치하얼 시를 점령하려 했으나, 마잔산이 이끄는 군대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했다. 마잔산의 군대는 넨강 철교를 폭파하며 일본과 그 동조 세력의 진격을 저지했다. 이처럼 일부 지역에서는 저항이 있었으나, 일본은 만주 전역에서 분리 독립 공작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4. 1. 친일 세력의 등장
랴오닝성 정부가 선양에서 철수한 뒤, "민족보전위원회"가 들어서 랴오닝성의 중화민국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선언했다. 지린성에서는 일본군 점령 하에 만주국군의 지휘관이었던 시차가, 하얼빈에서는 장징후이가 분리주의 운동을 추진했다. 9월 26일, 장쭤샹 성장이 물러난 자리에 시차를 임시 주석으로 하는 "길림성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이 정부는 일본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 일본군이 큰 충돌 없이 지린시를 점령하는 데 기여했다.[8] 대부분의 기존 성 관리들은 자리를 유지했다.[8]10월 초에는 랴오닝성 서북부 타오난 시의 장하이펑 장군이 일본군으로부터 대량의 군수 물자를 지원받는 대가로 분리독립을 선포했다. 이 외에도 10월 중 옌볜 조선족 자치주 지역의 지싱(吉興)이 투항했고,[9] 10월 17일에는 위즈산이 랴오닝성 동부 지역을 일본에 넘겨주었다. 이러한 친일 세력의 등장은 일본이 만주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확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5. 중국군의 저항
만주 침공 초기, 헤이룽장성의 실질적 통치자였던 마잔산(馬占山) 장군은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교전 금지 방침에도 불구하고 저항을 선택했다.[1][2] 일본군이 넨장 강 다리 수리를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하자, 마잔산의 부대는 1931년 11월 초부터 이들과 교전을 벌였다.[1][2]
비록 넨장 다리를 지키는 데 실패하고 이후 치치하얼까지 함락당했지만, 마잔산의 저항은 중국 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켜 그를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었다.[1][2] 이는 중국 및 국제 언론에 널리 보도되었고, 더 많은 중국인들이 항일의용군에 자원하는 계기가 되었다.[1][2] 그러나 일본군은 증강된 병력과 화력을 앞세워 저항을 진압하고 만주 점령을 계속해 나갔다.[1][2]
5. 1. 넨장 다리 전투
넨 강 다리 수리를 구실로 일본군은 1931년 11월 초 공병대와 보호 부대를 파견했다.[1][2] 당시 헤이룽장성의 실질적 통치자였던 마잔산(馬占山) 장군은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교전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저항하기로 결정하면서, 일본군과 마잔산 휘하 부대 간의 전투가 벌어졌다.[1][2]마잔산 부대는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넨장 다리를 지키는 데에는 실패했다.[1][2]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잔산 장군의 저항은 중국 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켜 그를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었으며, 이는 중국 및 국제 언론에 널리 보도되었다.[1][2] 이러한 소식은 더 많은 중국인들이 항일의용군에 자원하는 계기가 되었다.[1][2]
수리된 다리는 일본군의 추가 진격을 위한 중요한 통로가 되었으며, 일본군은 이를 통해 장갑 열차 등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1][2] 일본은 11월 한 달 동안 제8사단 소속의 제4혼성여단을 포함한 추가 병력을 만주로 파견했다.[1][2]
11월 5일부터 시작된 전투로 인해 400명 이상이 사망하고 300명 이상이 부상을 입는 등 큰 피해에도 불구하고, 마잔산 장군은 11월 15일 일본군의 치치하얼(齐齐哈尔) 항복 요구를 거부했다.[1][2] 이에 11월 17일, 다몬 지로(多門二郎)가 지휘하는 일본군 약 3,500명은 영하의 추운 날씨 속에서 총공격을 감행했고, 결국 11월 19일 치치하얼은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1][2]
5. 2. 치치하얼 전투
넨강 다리(嫩江橋|눈장교중국어)에서의 저항 이후, 마잔산( 馬占山|마잔산중국어 ) 장군은 비록 다리를 지키는 데 실패했지만 중국 내에서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의 저항은 중국 및 국제 언론에 널리 보도되었으며, 이는 더 많은 지원자들이 항일의용군에 합류하는 계기가 되었다.일본군은 넨강 다리를 수리한다는 명목 하에 11월 초 공병대와 함께 병력을 파견했다. 수리된 다리는 일본군의 추가 진격과 장갑열차 운행을 가능하게 했다. 일본은 11월 동안 일본 제국 육군 제8사단 소속의 제4혼성여단을 포함한 추가 병력을 만주로 보냈다.
1931년 11월 15일, 11월 5일부터 시작된 전투로 이미 400명 이상이 사망하고 3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은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치치하얼( 齐齐哈尔|치치하얼중국어 )에 주둔한 마잔산의 부대는 일본군의 항복 요구를 거부했다. 이에 11월 17일, 다몬 지로( 多門二郎|다몬 지로일본어 )가 지휘하는 3,500명의 일본군은 영하의 추운 날씨 속에서 총공격을 시작했다. 결국 11월 19일, 일본군은 치치하얼을 점령했고 마잔산 장군은 치치하얼에서 후퇴했다.
6. 남만주 작전
1931년 11월 말, 일본군은 진저우 점령을 시도했으나 국제 연맹의 중재안 등으로 인해 일시 중단되었다. 그러나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이 붕괴하고 이누카이 쓰요시 내각이 들어서면서 국민당 정부와의 협상이 최종 결렬되자, 일본 정부는 만주로의 추가 병력 증파를 승인했다.
12월에는 제20보병사단의 나머지 부대, 제19사단의 제38혼성여단, 제10사단의 제8혼성여단 등이 한반도와 일본 본토에서 만주로 파견되었다. 이로써 관동군의 총 병력은 약 60,450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증강된 병력을 바탕으로 일본군은 12월 21일부터 랴오닝성과 지린성에서 현지 중국인들의 저항 운동을 진압한다는 명분 하에 대규모 대게릴라 작전을 개시했다.
같은 시기 중국에서는 난징 정부의 각료들이 총사퇴하는 등 정치적 혼란이 극심해졌고, 이는 군 지휘 체계의 혼란으로 이어졌다. 결국 중국군은 만리장성 이남 허베이성으로 후퇴하였고, 국제적으로 중국의 이미지가 실추되었다.[22][10]
1932년 1월 3일, 일본군은 중국군이 전투 없이 철수한 진저우를 점령했다. 다음 날인 1월 4일에는 산하이관까지 장악함으로써 남만주 지역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
6. 1. 진저우 작전
1931년 11월 말, 혼조 시게루는 폭격기의 호위를 받으며 13대의 장갑열차에 1만 명의 병력을 태워 선양에서 진저우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부대는 진저우에서 약 30km 떨어진 지점까지 진격했으나, 갑자기 후퇴 명령을 받았다. 이 작전은 일본 육군성 장관 미나미 지로가 취소한 것이었다. 당시 도쿄의 일본의 내각총리대신 와카쓰키 레이지로가 이끄는 문민 정부가 국제 연맹의 제안을 받아들였기 때문인데, 이는 장래의 일본-중국 평화회담을 위해 만주와 중국 본토 사이에 완충지대, 즉 일종의 '중립지역'을 설정하자는 내용이었다.하지만 양측은 지속적인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와카쓰키 내각은 곧 붕괴되었고,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가 이끄는 새 내각이 들어섰다. 국민당 정부와의 추가 협상이 실패하자, 일본 정부는 만주로의 병력 증강을 승인했다. 12월에는 제20보병사단의 나머지 부대 전부와 제19사단 소속 제38혼성여단이 한반도에서 만주로 파견되었고, 제10사단 소속 제8혼성여단이 일본 본토에서 만주로 파견되었다. 이로써 관동군의 총 병력은 약 60,450명으로 증가했다.
증강된 병력을 바탕으로, 일본군은 12월 21일부터 랴오닝성과 지린성에서 현지 중국인들의 저항 운동을 진압하기 위한 대규모 만주 대게릴라 작전을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12월 28일, 난징 정부의 모든 각료가 사임하고 새 내각이 구성되면서 중국 내부에 혼란이 발생했다. 이는 군 지휘 체계에도 영향을 미쳐 중국군은 만리장성 남쪽 허베이성으로 굴욕적으로 후퇴했으며, 이는 국제적으로 중국의 이미지를 실추시켰다.[22][10] 1932년 1월 3일, 일본군은 중국군 수비대가 전투 없이 후퇴하여 비어 있는 진저우를 점령했다. 다음 날인 1월 4일에는 산하이관까지 장악하면서 남만주 지역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
7. 북만주 작전
남만주를 확보한 일본군은 만주 전역을 장악하기 위해 북쪽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일본군은 마잔산 장군과 딩차오 장군에게 항복 및 협력을 요구했으나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북만주 공략에 나섰고, 중국군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1932년 2월 4일 하얼빈을 점령하며 북만주의 주요 거점을 장악해 나갔다.
결국 2월 말, 마잔산은 일본군에 투항하여 일본이 세운 괴뢰 정권인 만주국의 헤이룽장성 성장(省長) 겸 군정부 부장(部長)으로 합류했다. 1932년 2월 27일에는 딩차오마저 적대 행위 중단을 선언하면서 만주에서의 중국 정규군의 공식적인 저항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중국 정규군의 저항이 끝난 후에도 만주 지역에서는 게릴라전 형태의 항일 투쟁이 계속되었으며, 일본은 만주국 평정 작전이라는 명목 하에 수년간 소탕 작전을 벌이며 완전한 통제를 시도해야 했다.
7. 1. 하얼빈 방어전
남만주를 확보한 일본군은 북만주 점령을 위해 북쪽으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마잔산 장군과 딩차오 장군에게 친일파로 전향할 것을 요구했으나 협상이 실패하자, 1월 초 도이하라 겐지 대령은 친일파 장군 치아시와 협력하여 하얼빈 점령을 지시했다.딩차오 장군이 이끄는 북만주의 마지막 중국 정규군은 초기에는 치아시 군대에 맞서 하얼빈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그러나 다몬 지로 중장이 지휘하는 일본 제국 육군 제2사단이 도착하자 전세가 기울어 결국 패퇴했다. 1932년 2월 4일, 일본군은 하얼빈을 점령했다.
2월 말, 마잔산 장군은 일본군에 항복하고 새로 수립된 괴뢰 정권인 만주국에 합류하여 헤이룽장 성의 성장(省長) 겸 군정부 부장(部長)이 되었다.
1932년 2월 27일, 딩차오는 전투 중단을 선언하며 만주에서의 중국 정규군의 공식적인 저항은 끝났다. 하지만 이후에도 만주 지역의 중국인들은 게릴라전과 같은 비정규 전투를 통해 일본군에 대한 저항을 이어갔으며, 일본군은 만주국 평정 작전을 통해 만주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수년간 소탕 작전을 벌여야 했다.
8. 만주국 수립과 그 이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 지역을 점령한 후, 이 지역에 대한 통치를 공고히 하려 하였다. 1932년 3월 1일, 일본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집정으로 내세워 만주국이라는 이름의 국가를 수립했다. 만주국은 표면적으로는 독립 국가의 형태를 취했으나, 실제로는 일본의 정치적, 군사적 통제하에 운영되는 괴뢰 국가였다. 일본은 만주국을 통해 만주 지역의 풍부한 자원을 수탈하고 대륙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다.
만주국 수립 이후에도 만주 지역에서는 일본의 지배에 대한 저항이 끊이지 않았다. 한국 독립군을 비롯한 여러 항일 세력들은 만주국군 및 일본군과 맞서 싸우며 항일 무장 투쟁을 지속했다. 이러한 저항은 만주 지역의 완전한 안정을 원하는 일본에게 지속적인 부담으로 작용했다.
9. 영향
(내용 없음)
9. 1. 일본 국내에 미친 영향
만주 침략은 풍부한 천연자원을 가진 땅을 확보하여 대공황의 영향에서 벗어날 경제적 "생명선"으로 여겨져 일본 내에서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11] 미국의 역사학자 루이스 영은 1931년 9월부터 1933년 봄까지 일본이 만주 침략으로 인해 "전쟁 열기"에 휩싸였으며, 이 전쟁이 매우 대중적이었음을 지적했다.[12] "생명선"이라는 표현은 만주가 일본 경제에 필수적이라는 인식을 반영하며, 이는 만주 침략이 큰 인기를 얻고 이후 일본 여론이 만주를 포기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13]당시 일본의 검열은 이후 시대만큼 엄격하지는 않아서, 이론적으로는 언론인과 편집자들이 반전 정서를 표현할 수 있었다.[14] 실제로 자유주의 성향의 잡지 ''개조''는 1931년 11월호에서 기자 고토 시노부를 통해 관동군이 도쿄 정부와 중국 정부 모두를 기만하는 "이중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비판하며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14] 그러나 이러한 목소리는 소수에 불과했고, ''아사히''와 같은 주요 신문들은 반전 논조가 판매 부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깨닫고, 판매를 늘리기 위해 오히려 공격적인 군국주의적 사설을 게재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14]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저명한 평화주의자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시인 요사노 아키코는 1904년 러일 전쟁 당시 군 복무 중인 남동생에게 보낸 반전 시 "오빠, 목숨을 버리지 마세요"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인물이다.[15] 하지만 1931년 일본 사회를 휩쓴 "전쟁 열기" 속에서 아키코조차 입장을 바꿔, 1932년에는 ''무사도'' 정신을 찬양하고 관동군에게 "타협이라는 비겁한 꿈을 깨부수라"고 촉구하는 시를 발표했다. 그녀는 나아가 전투에서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일본 남성이 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행위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15]
한편, 일본 공산당은 기관지 적기를 통해 침략을 비난하고 일본 정부에 반대하는 반전 운동을 시도했으나,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16] 당 지도자 노사카 산조는 1933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연설에서 침략 행위를 규탄하고 일본 국민들에게 정부에 맞서 싸울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17]
9. 2. 국제 관계에 미친 영향
서구 미디어에서는 이 침공에 대해 무고한 민간인을 폭격하거나 쉘쇼크 피해자를 다룬 사진 등 일본군의 만행을 중점적으로 보도했다.[23][18] 이러한 보도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에 대한 국제 사회의 상당한 반감을 형성하는 배경이 되었다.[23][18]국제 연맹은 만주 사변 조사를 위해 에드워드 불워 리턴을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을 파견하여 리턴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는 중국 측이 일본을 자극한 측면이 있고, 만주에 대한 중국의 주권이 절대적이지는 않다고 일부 인정하면서도, 일본의 침략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고 명확히 밝혔다.[24][19] 일본은 이 보고서의 결론을 수용하지 않고 국제 연맹에서 탈퇴함으로써 국제적 고립을 자초했다.[24][19]
만주 사변은 국제 연맹의 권위와 영향력에 큰 손상을 입혔다.[25][19] 이 사건을 통해 국제 연맹이 강대국의 침략 행위를 막을 실질적인 힘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며[20], 일본과 같은 국가가 국제 사회의 제재 없이 침략을 감행할 수 있다는 위험한 선례를 남겼다.[20]
국제 연맹의 이러한 무력함은 아돌프 히틀러와 베니토 무솔리니와 같은 다른 독재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일본의 사례를 통해 국제 사회의 개입을 크게 우려하지 않게 되었고, 이는 이후 이탈리아 왕국의 에티오피아 침공(1935–1937), 나치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병합(1938–1939) 및 폴란드 침공(1939) 등 추가적인 침략 행위로 이어지는 한 원인이 되었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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