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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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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부택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육군 장교로 복무한 군인이다. 1919년 전라남도 나주에서 태어나 일본군에 입대하여 복무했고, 광복 후 대한민국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여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9연대장, 육군본부 작전과장 등을 역임했으며,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6사단 7연대장으로 춘천 전투, 동락리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5·16 군사정변 당시 혁명 협력에 동의하여 체포 위기를 넘겼으며, 예비역 편입 후 한국비료공업 상임감사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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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부택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임부택
한자 표기林富澤
가나 표기イム・ブテク
로마자 표기Im Bu-taek
출생일1919년 9월 24일
출생지일제강점기 전라남도 나주군
사망일2001년 11월 13일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묘소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1묘역 144호
본관나주
종교(정보 없음)
별명(정보 없음)
서명(정보 없음)
군사 경력
소속일본제국 육군, 대한민국 육군
복무 기간1938년 ~ 1945년 (일본제국 육군), 1946년 ~ 1962년 (대한민국 육군)
최종 계급일본제국 육군 조장(상사), 대한민국 육군 중장
근무육군본부
지휘제6보병사단 제7연대
제11보병사단
제2군 관구
제3군 관구
제1군단
제6군단
주요 참전 전투/전쟁
참전 전쟁한국 전쟁
주요 전투춘천 전투
무극리 전투
동락리 전투
이화령-문경 전투
희천 전투
초산 전투
온정리 전투
용문산 전투
금성 전투
훈장 내역
훈장태극무공훈장 (2회)
을지무공훈장 (4회)
충무무공훈장 (4회)
화랑무공훈장 (2회)
대통령 개인 공로 표창장
미국 훈공장
그리스 십자 훈장
방위포상
3등 근무공로훈장

2. 생애

임부택은 1919년 9월 24일 전라남도 나주에서 태어났다. 1939년 일본 육군에 지원 입대하여[2] 이등병으로 복무하다가 1944년 제대하였다. 그러나 다시 군에 들어가 종전까지 신병 교육을 담당했다. 종전 당시에는 조선 지원병 제3훈련소 교관, 조장이었다.

1946년 1월,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제1연대에 입대하여 군번 110001번을 부여받고 임조장이 되었다[3]. 제1대대 A중대 선임하사관으로 복무하다가 같은 해 6월 경비사관학교 제1기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군번 10117번)하였다.

1948년 5월 6일 제9연대 제1대대장으로 발령받아 제주도 반란 진압에 참여하였다. 이후 제9연대장 직무대리와 제11연대 작전참모를 겸임하다가 6월 16일 제9연대장에 정식 임명되었다. 그러나 연대장 박진경은 군 내부 좌파 세력에 의해 암살당하였다[4]. 1949년 3월 2일에는 제주도 전투사령부 전투 제1대대장으로 다시 진압전에 복귀[4]하여 소좌로 특진하였다.

1949년 12월 19일, 제7연대장이 되었다. 한국 전쟁 발발 당시, 제7연대는 1950년 6월부터 북방에서 이상을 감지하고 비상 경계 태세를 취하여 기습을 받지 않은 유일한 연대가 되었다.

1954년 5월, 소장으로 임명된 후, 같은 해 10월 국방부 제1국장을 역임했다.[1] 1955년 10월에는 육군본부 병참감, 1956년 6월에는 합동참모작전국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교에 유학했다.[1]

1957년 8월, 제1군(사령관 송요찬 중장) 참모장을 역임했다.[1] 1959년 7월, 제2관구사령관, 1960년 2월에는 제3관구사령관이 되었으며, 4·19 혁명 당시 충청도 계엄사령관을 맡았다. 같은 해 10월 제1군단장으로 승진했다.[1] 1961년 초, 서울 방어 계획을 입안하였으나,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국무총리로부터 쿠데타 모의 의혹을 받았다.[1]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정변 당시 진압 명령을 받았으나, "혁명에 협력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여 출동 준비를 해제했다. 이로 인해 반혁명 혐의로 체포될 위기에 처했으나, 진상이 밝혀져 현직에 유임되었다.[1]

1962년 3월, 예비역으로 편입[1]된 후, 1973년 2월 한국비료공업 상임감사, 1980년 11월 대한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 가산대리점 운영, 1984년 10월 한국자동차보험주식회사 가산대리점 운영 및 해동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 고문을 역임했다.[1] 1993년 8월, 6·25 전쟁 참전군인연맹 회장이 되었다.[1]

2. 1.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林富澤|임부택일본어은 1919년 9월 24일 전라남도 나주에서 태어났다. 1939년 일본 육군에 지원 입대하여(제2기)[2] 육군 병 지원자 훈련소를 수료하고, 이등병 계급으로 보병 제76연대에 배속되었다. 1944년 12월에 복무 기간을 마치고 제대하였으나, 태릉의 훈련소에서 신병 시절 교관을 만나 다시 군에 들어가 종전까지 신병의 군사 교육을 담당하였다. 종전 당시에는 조선 지원병 제3훈련소 교관, 조장이었다.

1946년 1월 15일 창설된 조선경찰예비대에 들어가 대한민국 최초의 사병 군번인 110001번[8]을 수여받고 일등중사 계급을 받았다. 그리고 제1연대 제1대대 A중대 선임하사관이 되었다. 그해 5월 1일 미 군정청이 만든 조선경찰예비대 훈련소(이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로 개칭)에 입교해 약 한달 간 훈련을 마치고, 9월에 참위(소위)로 임관되었다.[9] 같은 해 6월 경비사관학교 제1기 졸업, 임소위(군번 10117번).

2. 2. 대한민국 국군 초기 활동 및 제주 4.3 사건

1946년 1월,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제1연대에 입대하여 군번 110001번을 부여받고 임조장이 되었다[3]. 제1대대 A중대 선임하사관으로 복무하다가 같은 해 6월 경비사관학교 제1기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군번 10117번)하였다.

1948년 5월 6일 제9연대 제1대대장으로 발령받아 제주도 반란 진압 작전에 참여하였다. 5월 15일 박진경 연대장이 신설된 제11연대장으로 이동하면서 제9연대장 직무대리를 겸임하였고, 6월 16일 정식으로 제9연대장에 임명되었다. 당시 제9연대와 제11연대의 통합 사령부 구상이 있었으나, 참모 인원 부족으로 제11연대 작전참모도 겸임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박진경은 군 내부 좌파 세력에 의해 암살당하였다[4].

1949년 3월 2일 제주도 전투사령부 전투 제1대대장으로 다시 진압 작전에 복귀하였으며[4], 소좌로 특진하였다.

2. 3. 6.25 전쟁 참전

1949년 6사단 7연대장으로 부임하여 북한군과의 전쟁에 철저히 대비했다. 춘천 및 홍천 전투에서 북한군 2개 사단을 괴멸시켜 대한민국 국군을 후방에서 속전속결로 공격하려던 북한의 계획을 무산시켰다.[5] 이어 퇴각 중 충주 신니면에서 북한군 15사단 48연대를 격파하여 7연대 전체가 1계급 특진되었다. 낙동강 전투에서는 영천 신녕 지역에서 활약했다. 이후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임부택 연대장을 사로잡거나 제7연대를 없애버려라"라고 특별 지시를 내렸을 정도였다.

1951년 4월, 중국군의 2차 춘계 공세 때 용문산에서 중국군 63군 예하 3개 사단의 공격을 받았으나 반격하여 격퇴했고, 6사단 전체는 적 사살 2만여 명, 생포 3,500여 명의 큰 전과를 올렸다.

1952년 준장으로 진급하여 11사단 사단장이 되었고, 1953년 7월 금성 지구에서 5사단, 8사단과 함께 2군단을 이뤄 중국군과 싸워 크게 이겼다.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제7연대는 춘천에서 북한군 제2사단(사단장: 이청송 소장)과 3일간 교전하여 큰 타격을 입혔다(춘천 전투). 또한 춘천에서 트럭 90대를 징발하여 연대를 차량화했다.

6월 28일, 제6사단 사령부의 명령으로 춘천에서 철수하여 제6사단 주력의 후퇴를 호위했다. 임부택 중령은 "왜 후퇴 명령만 계속 내려오는 걸까? 왜 반격하지 않는 걸까?"라며 불만을 토로했다고 한다.[5]

제7연대는 후위로 홍천, 음성에서 적에게 피해를 입히면서 후퇴했다. 7월동락리 전투의 공적으로 대령으로 진급했다. 음성에서는 7일부터 8일에 걸쳐 제1사단(사단장: 백선엽 대령)의 진지 점령을 지원했고,[6] 9일에는 독단으로 제1사단에 압력을 가하고 있던 우회 부대에 공격을 개시하여 백선엽이 감사했다.[6]

부산교두보 전투에서는 신녕 전면을 고수하며 북한군 제8사단(사단장: 오백룡 소장)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9월 16일부터 공세로 전환하여 제7연대는 계속 제6사단의 선봉을 맡았고, 순천에서는 미군 공수부대와 협력(숙천·순천 전투) 후 압록강을 향해 급진했다. 10월 26일, 정찰대가 초산에 진출하여 제7연대는 압록강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 하지만 중공군10월 25일에 개입하여 한국군 제2군단을 압박했기 때문에 제7연대는 적진에 고립되었다. 연대는 일심으로 혈로를 열었지만 대군에 포위된 연대는 혼란에 빠졌다. 임부택은 부하 수십 명과 함께 23일간 적진을 헤매다 맹산에 생환했다. 이때 미군 고문관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는데, 체력이 부족하여 스스로 적진에 남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맹산 국민학교에서 연대를 재편한 후, 평양으로 후퇴하여 제6사단(사단장 장두영 준장) 예하에 복귀했다. 평양에서 제6공병대대의 대동교 폭파를 지원한 후, 38선으로 후퇴하여 의정부 북쪽을 방어했다. 하지만 1951년 1월 1일, 중공군의 정월 공세에 포위되어 혈로를 열고 여주로 후퇴하여 적의 공격을 기다렸지만 기력이 다한 중공군은 추격하지 않았다.

유엔군은 1월 하순부터 공세로 전환했다. 제7연대는 3월 양평, 다음으로 가평을 탈환했고, 임부택은 제6사단 부사단장이 되었다. 하지만 4월, 중공군의 춘계 공세를 받아 다시 7일간 산속을 헤매게 된다. 하지만 중공군의 5월 공세에서는 양평 동쪽에서 전주 방어를 지휘하여 노네임 라인을 확보했다.

1951년 7월, 보병학교 부교장이 되었지만 10월에 제5사단 부사단장에 임명되어 고성 남쪽의 351고지(앵커 힐) 쟁탈을 지휘한다.

1952년 8월, 오덕준 준장의 뒤를 이어 제11사단장이 되어 준장으로 진급했다. 남강 남안의 방어를 맡았다.

1953년 3월경, 남강 남안의 방어를 신편된 제27사단에 위임하고, 제11사단은 제2군단의 예비사단이 되어 화천으로 이동했다. 7월, 임부택은 후방으로 이동했는데, 경험이 부족한 사단장이 임무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중공군의 최종 공세를 받자 곧바로 소환된다. 우군이 후퇴하는 가운데 중공군의 선봉을 향해 정면으로 반격하여 남하를 저지하고, 공세로 전환하여 적근산을 탈환했다.

2. 4. 전후 활동 및 사망

1954년 5월,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국방부 제1국장을 역임했다.[1]

1955년 10월, 육군본부 병참감이 되었다.[1]

1956년 6월, 합동참모작전국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교에 유학했다.[1]

1957년 8월, 제1군(사령관 송요찬 중장) 참모장을 역임했다.[1]

1959년 7월, 제2관구사령관이 되었다.[1]

1960년 2월, 제3관구사령관이 되었으며, 4·19 혁명 당시에는 충청도 계엄사령관을 맡았다. 10월에는 제1군단장으로 승진했다.[1] 1961년 초, 서울 방어 계획을 입안하고 포병의 측지(測地)를 실시하게 하였는데,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국무총리로부터 임부택 군단장과 최경록 참모총장이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았고, 최경록은 제2군 사령관으로 전출되어 장도영 중장과 교체되었다고 한다.[1]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정변 당시 이한림 제1군 사령관으로부터 진압 명령을 받고 출동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김종오 중장과 김점곤 소장과 미군 전용 회선으로 연락하여, 김 소장의 "혁명에 협력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고 출동 준비를 해제하고 그 뜻을 4명의 각 군단장에게 통보했다. 그러나 임부택의 진의가 서울에 전달되지 않아 반혁명 혐의로 체포될 위기에 처했으나, 진상이 밝혀져 현직에 유임되었다.[1]

1962년 3월,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1]

1973년 2월, 한국비료공업 상임감사가 되었다.[1]

1980년 11월, 대한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 가산대리점을 운영했다.[1]

1984년 10월, 한국자동차보험주식회사 가산대리점을 운영했다. 같은 해 10월, 해동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 고문이 되었다.[1]

1993년 8월, 6·25 전쟁 참전군인연맹 회장이 되었다.[1]

3. 5.16 군사정변 관련 논란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이한림 제1군 사령관으로부터 진압 명령을 받고 출동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김종오 중장 및 김점곤 소장과 미군 전용 회선으로 연락하여, 김 소장의 "혁명에 협력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고 출동 준비를 해제했으며 그 뜻을 4명의 각 군단장에게 통보했다.[1] 그러나 임부택의 진의가 서울에 전달되지 않아 반혁명 혐의로 체포될 위기에 처했으나, 진상이 밝혀져 현직에 유임되었다.

4. 학력

5. 이력

연도내용
1946년 1월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제1연대에 입대, 임조장(군번 110001번)[3], 제1대대 A중대 선임하사관.
1946년 6월경비사관학교 제1기 졸업, 임소위(군번 10117번).
1948년 5월 6일제9연대 제1대대장에 발령되어 제주도 반란 진압.
1948년 5월 15일제9연대장 직무대리 겸임.
1948년 6월 16일제9연대장 발령.
1948년 7월 15일총사령부로 전속.
1948년 8월육군본부 작전국 작전과장.
1949년 3월 2일제주도 전투사령부 전투 제1대대장, 소좌로 특진.[4]
1949년 6월제7연대 부연대장.
1949년 12월 19일제7연대장.
1950년한국 전쟁 발발 당시, 제7연대는 기습을 받지 않은 유일한 연대가 됨.
1951년 4월제6사단 부사단장.
1951년 7월육군보병학교 부교장.
1951년 11월제5사단 부사단장.
1952년 8월육군 준장 진급 및 제11보병사단 사단장 취임.
1954년 5월육군 소장.
1954년 10월국방부 제1국 국장.
1955년 10월육군본부 병참감.
1956년 6월합동참모작전국장,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교 유학.
1957년 8월제1군 참모장.
1959년 7월제2군 관구 사령관.
1960년 2월제3관구사령관, 4·19 혁명 당시 충청도 계엄사령관.
1960년 10월육군 제1군단장 보임과 동시에 육군 중장 진급.
1961년 3월육군 제6군단장 보임.
1961년5·16 군사정변 당시 이한림 제1군 사령관으로부터 진압 명령을 받고 출동 준비를 갖추었으나, 김종오 중장과 김점곤 소장의 "혁명에 협력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 출동 준비 해제.
1962년 3월육군 제6군단장 재직 중 육군 중장 전역 및 예비역 편입.
1973년 2월한국비료공업 상임감사.
1980년 11월대한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 가산대리점 운영.
1984년 10월한국자동차보험주식회사 가산대리점 운영.
1984년 10월해동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 고문.
1993년 8월6·25 전쟁 참전군인연맹 회장.


6. 상훈

수여 년도훈장
1950년 1월무성 화랑무공훈장
1950년 12월무성 을지무공훈장
1951년 4월은성 충무무공훈장
1951년 6월은성 충무무공훈장
1952년 5월은성 을지무공훈장
1952년 5월금성 화랑무공훈장
1952년 10월무성 충무무공훈장 (11사단장 재직 중)
1953년 5월무성 태극무공훈장 (11사단장 재직 중)
1953년 5월금성 을지무공훈장 (11사단장 재직 중)
1953년 5월금성 충무무공훈장 (11사단장 재직 중)
1954년 1월금성 을지무공훈장 (11사단장 재직 중)
1954년 6월은성 태극무공훈장
1954년 9월 30일레지옹 도뇌르 훈장[7]
1955년 8월그리스 공화국 십자훈장
1956년 10월방위포장
1962년 3월3등 근무공로훈장


참조

[1] 서적 朝鮮戦争/韓国編 上巻
[2] 뉴스 지원병출신 처음 일반병서 하사관·장교로까지 확대6·25때 용맹떨쳐…희생도 커-송요찬·문형태장군등 20여명 장성진급 http://news.joins.co[...] 1982-11-26
[3] 서적 朝鮮戦争/韓国編 上巻
[4] 뉴스 済州4・3事件と第11連隊長 故朴珍景大領 http://www.jejukyeon[...] 2022-04-06
[5] 서적 朝鮮戦争/韓国編 下巻
[6] 서적 朝鮮戦争/韓国編 下巻
[7] 웹사이트 Lim Boo Taek http://valor.militar[...] Military Times
[8] 기타
[9] 뉴스 6•25 50주년 특별연재|‘잊혀진 전쟁’의 비록<상> http://shindonga.don[...] 신동아 2000-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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