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와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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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와 왕국은 1364년 타도 민뱌가 샨족의 침략으로 사가잉 왕국과 핀야 왕국이 붕괴된 후 아바를 수도로 건국한 왕국이다. 바간 왕국의 정통성을 계승하려 했으나, 한타와디 왕국, 샨족, 라카인족과의 전쟁으로 쇠퇴했다. 16세기 초 샨족의 침략으로 멸망했으며, 잦은 반란과 타웅우 왕조의 성장으로 인해 쇠약해졌다. 잉와 왕국은 중앙 정부의 약화로 지방 자치가 강화되었으며, 미얀마 구어 문학의 발전과 불교, 건축, 대외 관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특징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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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와 왕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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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기본 정보 | |
토착어 이름 | အင်းဝပြည် |
일반 명칭 | 아바 왕국 |
국가 | 왕국 |
존속 기간 | 1365년 2월 26일 – 1555년 1월 22일 |
이전 | 핀야 왕국, 사가잉 왕국 |
이후 | 떠웅우 왕조, 프롬 왕국 |
수도 | 사가잉, 핀야, 아와 |
공용어 | 버마어, 샨어 |
종교 | 테라바다 불교 |
통화 | 은 |
역사 | |
주요 사건 | 타도 민뱌, 사가잉 왕국 점령 (1364년 5월 30일) 아바 왕국 건국 (1365년 2월 26일) 소 오마의 반란 (1367년 9월) 40년 전쟁 (1385년–1424년) 모흐닌 왕조 시작 (1426년 5월 16일) 떠웅우 분리 (1510년 10월 16일) 샨족 시대 시작 (1527년 3월 14일) 떠웅우 정복 (1555년 1월 22일) |
정치 체제 | |
정부 형태 | 군주제 |
주요 인물 | |
국왕 | 타도 민뱌 (1364년–1367년) 스와 소 케 (1367년–1400년) 밍카웅 1세 (1400년–1421년) 모흐닌 타도 (1426년–1439년) 토한바와 (1527년–1542년) 시투 쬬틴 (1551년–1555년) |
현재 국가 | |
현재 국가 | 미얀마 |
2. 역사
타도 민뱌가 1364년에 북쪽의 샨 주의 침략으로 사가잉 왕국과 핀야 왕국이 붕괴된 후 아바 왕국을 건국하였다.[4] 잉와 왕국은 건국 초기 바간 왕국의 정통 후계자를 자처하며 이전 제국을 재건하려 했다. 이를 위해 남쪽의 몬족 한타와디 왕국, 북쪽과 동쪽의 샨 주, 서쪽의 라카인 주와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1]
전성기에는 타웅우와 일부 주변 샨 주(칼라이묘, 모닌, 모가웅, 시포)를 지배했지만, 나머지 지역을 완전히 재정복하지는 못했다. 한타와디 왕국과의 40년 전쟁(1385~1424)으로 잉와 왕국은 쇠약해졌다. 1420년대부터 1480년대 초까지 잉와 왕국은 새로운 왕이 즉위할 때마다 속주에서 반란에 직면했다. 1480년대와 1490년대에는 남쪽의 프롬 왕국과 북쪽의 잉와 왕국 지배 아래 있던 샨 주가 독립했고, 타웅우 왕조는 명목상의 종주국인 잉와 왕국만큼 강력해졌다. 1510년에는 타웅우도 독립했다.[1]
16세기 초 잉와 왕국은 샨 주의 집중적인 침략을 받았다. 1527년 모닌을 중심으로 프롬 왕국과 동맹을 맺은 샨 주 연합군이 잉와를 함락시켰다.[1] 샨족 연합은 잉와 왕위에 명목상의 왕을 세우고 상부 버마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샨족 연합이 타웅우를 제압하지 못한 것은 큰 손실이었다. 적대적인 왕국들에 둘러싸인 타웅우는 1534년~1541년에 한타와디 왕국을 물리치고, 1542년에 프롬을, 1544년에는 잉와 아래에 있는 바간을 점령했다.[5] 1555년 1월, 타웅우 왕조의 바인나웅 왕이 잉와를 정복하여 이 도시가 상부 버마의 수도로서의 역할을 거의 2세기 동안 마감하게 되었다.
타도 민뱌는 아바(현재 인와) 도시를 건설하고 보석의 도시라는 뜻의 라타나푸라로 봉헌했으며, 이 도시는 19세기 중반까지 거의 지속적으로 미얀마의 수도로 남았다.[6] 이 도시는 적어도 퓨 시대부터 존재했던 전통적인 미얀마 도시 설계 원칙에 따라 설계되었다. 잉와는 완전히 성벽으로 둘러싸인 최초의 미얀마 도시로, 내부 성채와 외부 민간 도시가 있었다. 잉와의 성채는 아마도 세계 유일의 원통형 도시일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도시 성벽의 윤곽은 신화 속 미얀마 사자 친떼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7][8] 잉와는 축소된 불교 우주를 재현하도록 설계되었으며, 궁궐은 성채 중앙에 건설되어 왕을 부처와 직접적으로 연결시켰다. 이는 왕에게 신성한 지위를 부여했고 궁궐을 종교적 중심지로 만들었다.[7] 궁궐은 힌두교-불교 신앙에서 매우 길상적인 수미산을 모방하도록 설계되었다. 왕국과 그 힘은 만다라로서 도시에서 직접 발산되어 전 세계를 둘러쌌고, 따라서 도시는 신성하게 명령받은 왕국의 우주적 중심지였다.[6]
스와 소 케 통치 기간 동안, 왕, 상가, 실론 승려, 브라만이 참석하는 회의가 잉와에서 소집되었다.[6] 한 비문에는 이 도시가 불교 천국 중 가장 중요한 곳인 다바팀사만큼 즐겁다고 적혀 있다.[6] 스와 소 케는 학문적 노력을 장려한 왕으로 알려져 있으며, 도시는 지적인 대화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6]
2. 1. 건국
타도 민뱌가 1364년에 북쪽의 샨 주의 침략으로 사가잉 왕국과 핀야 왕국이 붕괴된 후 아바 왕국을 건국하였다.[4]파간 왕조 멸망 후 상부 버마를 지배한 샨족 국가 핀야 왕조 건국에 있어서, 핀야 왕조의 건국자 Thihathu|티하투영어는 왕궁 건설지로 민게 강(en:Myitnge River)와 아이라와디 강의 합류점에 있는 아바[11]를 후보로 삼았으나, 점의 결과 아바는 불길한 땅으로 기각되었고, 핀야에 왕궁이 세워졌다.[12] 핀야 왕 나라투가 핀야의 대안에 존재하는 분가인 사가인 왕조를 공격하기 위해 불러들인 마오 샨족(麓川, 문마오 왕국)의 지도자 토 치 보와(思機發)의 침입으로 핀야와 사가인이 모두 멸망한 후, 사가인 왕가의 왕자 타도 민뱌가 아바 주변 늪지대를 개척하여 1364년 아바를 수도로 하여 왕조를 창시했다. 타도 민뱌는 타웅구, 타운두인지 등 지방 도시의 반란에 시달리고, 마궤 지방 원정 귀환길에 천연두에 걸려 병사했다.[14]
2. 2. 초기 발전과 쇠퇴
아바 왕국은 1364년 타도 민뱌가 북쪽 샨족의 침략으로 사가잉 왕국과 핀야 왕국이 붕괴된 후 건국했다.[4] 초기 아바 왕국은 스스로 바간 왕국의 정통 후계자를 자처하며 이전 제국을 재건하려 노력했다. 이를 위해 남쪽의 몬족 한타와디 왕국, 북쪽과 동쪽의 샨족, 서쪽의 라카인족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1]전성기에는 타웅우와 일부 주변 샨족(칼라이묘, 모닌, 모가웅, 시포)을 지배했지만, 나머지 지역을 완전히 재정복하지는 못했다. 특히 한타와디 왕국과의 40년 전쟁(1385~1424)은 아바 왕국을 쇠약하게 만들었다.[1]
15세기 초 민카운 1세 시대까지는 국내가 비교적 안정적이었으나, 그의 아들 티하투 시대에는 각 지방 영주들이 다스리는 도시들의 반란이 잇따라 발생했다.[21] 티하투는 즉위 후 아버지의 왕비 신 보메를 왕비로 맞이했으나, 신 보메는 티하투를 살해하고 그의 아들 민라 게를 옹립했다. 이후 신 보메는 민라 게마저 살해하고, 1426년 시포(온바운)의 성주와 공모하여 카레체타운뇨를 왕위에 올렸다.[22] 페구와의 전쟁에서 활약한 영주 모닌타도는 카레체타운뇨의 즉위에 반대하여 그와 신 보메를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다. 모닌타도는 즉위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신 보메와 결혼했으며,[23] 그의 통치 기간 대부분은 도시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집중했다.[24]
모닌타도의 아들 민레초스와 시대에는 중국 명나라의 토벌로 약화된 마오 샨족을 공격하여 1442년 그들의 지도자 토 앤간 보와를 사로잡아 북쪽의 위협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25] 그러나 민레초스와의 뒤를 이은 동생 나라파티는 명나라에 토 앤간 보와를 넘겨주기를 거부하고 조공도 거절했다.[26] 이 때문에 1446년 명나라의 더 많은 원정군이 파견되었고, 나라파티는 항복하여 자살한 토 앤간 보와의 시체와 그의 신하들을 명군에 넘겨주었다.[27]
1420년대부터 1480년대 초까지 아바 왕국은 새로운 왕이 즉위할 때마다 속주에서 일어나는 반란에 직면해야 했다. 1480년대와 1490년대에는 남쪽의 프롬 왕국과 북쪽의 아바 왕국 지배 아래 있던 샨족이 독립했고, 타웅우 왕조는 명목상의 종주국인 아바 왕국만큼 강력해졌다. 1510년에는 타웅우도 독립했다.[1]
1469년 즉위한 티하투라 시대부터 도시 타웅우(타웅우)가 성주 시투쵸우틴의 지휘 아래 세력을 확장하여 주변 도시들을 제압해 나갔다. 신하들은 타웅우의 세력 확장을 반란의 징조로 보고 티하투라에게 경고하였으나, 아바 궁정에 온 시투쵸우틴이 왕에 대한 충성을 선언함으로써 타웅우 토벌은 실행되지 않았다.[28] 시투쵸우틴이 조카 민치니우에게 암살된 후, 아바 궁정은 타웅우의 반항이 그치기를 기대하며 민치니우의 즉위를 인정하였으나, 타웅구는 아바 영토에 빈번하게 침입하였다.[29]
16세기 초 슈웨난쵸우신 시대에 북방에서 소론을 지도자로 하는 도시 모닌[30]의 확장이 시작되었고, 다른 도시들도 불복종 의사를 나타냈다. 아바를 지지하는 도시는 시포뿐이었고, 각지에서 발생하는 반란을 아바의 힘만으로 진압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슈웨난쵸우신은 자신의 정적을 보호하는 타웅우에 공주와 영토를 주어 회유해야 했다.[31] 1524년 이라와디 강 연안 도시 피에(프롬)가 모닌에 항복했고, 1527년 모닌의 공격을 받은 아바는 함락되었으며, 소론은 아들 토한부와를 아바의 왕위에 올렸다. 슈웨난쵸우신은 아바 방어전에서 포격을 받고 전사했고, 도망치는 난민들은 타웅우로 유입되어[32] 타웅우의 국력은 더욱 증가했다.[33]
2. 3. 샨족의 침입과 멸망
잉와 왕국은 16세기 초 샨족의 집중적인 침략을 받았다.[1] 1527년, 모닌을 중심으로 프롬 왕국과 동맹을 맺은 샨족 연합군이 잉와를 함락시켰다.[1] 샨족 연합은 잉와 왕위에 명목상의 왕을 세우고 상부 버마의 대부분을 지배했다.샨족 출신 토한부와는 불교를 탄압하고 사찰과 탑을 파괴하며 승려들을 살해하고 경전을 불태워 백성들의 반감을 샀다.[12][34] 또한, 토한부와 즉위 후 궁정에서는 샨족 출신의 신하들이 권세를 휘둘렀고, 버마족은 그들로부터 모욕을 받게 되었다.[35] 결국 버마족 신하들의 탄원으로 토한부와는 살해되었고,[36] 이후 시뽀의 샨족 영주 콩마인이 잉와의 왕으로 추대되었다.[37]
한편, 샨족 연합의 공격을 받지 않은 타웅우 왕조는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성장하였다. 1542년에는 타웅우 왕조의 타빈슈웨티의 매부인 바인나웅과의 전투에서 잉와 왕국은 패배하였다.[32][34] 콩마인의 아들 모비 나라파티는 도시 간의 분쟁을 통제할 수 없었고, 1552년에 사린의 영주 시투초틴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바인나웅에게 복속했다.[38] 결국 1555년, 바인나웅의 공격으로 잉와는 함락되었고, 잉와 왕조는 멸망했다.[5]
3. 정치
타도 민뱌가 건설하고 미얀마의 수도 역할을 했던 아바는 전통적인 미얀마 도시 설계 원칙에 따라 설계되었다.[6] 아바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최초의 미얀마 도시였으며, 내부 성채와 외부 민간 도시로 구성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도시 성벽은 신화 속 미얀마 사자 친떼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7][8]
아바의 내부 성채는 축소된 불교 우주를 재현하도록 설계되었다. 궁궐은 성채 중앙에 건설되었는데, 이는 부처의 위치에 해당하여 왕을 부처와 직접적으로 연결시켰다. 이는 왕에게 신성한 지위를 부여하고 궁궐을 종교적 중심지로 만들었다.[7] 궁궐은 수미산을 모방하여 설계되었고, 왕국과 그 힘은 도시에서 발산되어 전 세계를 둘러쌌다. 즉, 도시는 신성하게 명령받은 왕국의 우주적 중심지였다.[6]
스와 소 케 통치 기간 동안, 왕, 상가, 실론 승려, 브라만이 참석하는 회의가 아바에서 소집되었다.[6] 한 비문에는 이 도시가 불교 천국 중 가장 중요한 곳인 다바팀사만큼 즐겁다고 기록되어 있다.[6] 스와 소 케는 학문을 장려한 왕으로 알려져 있으며, 도시는 지적인 대화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6]
3. 1. 중앙 정부와 지방 통치
아바 왕조는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지 못하고 지방 통치에 의존했다.[39] 행정은 '미오(မြို့)'라고 불리는 성벽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미오는 인근 마을과 촌락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했다.[40] 미오의 통치자인 '미오자'(성주, ミョウザー, Myoza)는 주로 왕족이나 고관이 임명되었으며, 이들의 지위는 세습되는 경향이 있었다.[42] 지방 유력자가 미오자의 지위를 장악하고 중앙 정부가 이를 추인하는 경우도 있었다.[43]14세기 중반 아바 왕조 건국 당시부터 타운드윈지(Taungdwinji), 타웅구(Taungoo), 야메딘(Yamethin) 등의 미오는 군역과 공납을 거부하며 반독립 상태에 있었다.[40] 15세기 말에는 사린(Salin), 삐에(Pyay), 냐웅얀(Nyaungyan) 등이 새롭게 독립했다.[40] 1433년부터 1440년 사이에 명나라로부터 동쪽 관할 장관(東쪽 관할 장관司)에 임명된 타운드윈지, 빼구 왕조와 동맹 관계에 있던 삐에 등은 독자적인 외교를 전개하고 자체 세력 확장에 힘썼다.[41]
미오자는 영내의 마을과 촌락을 스크리(다지, Sukhlee(Thagyi)), 프라냐차위(삐에조, Pranyachhawi(Pyazoe)), 마레투인(미에다인, Maletwin(Myedain)) 등의 세습적인 지방 관리를 통해 지배했다.[45] 이들 지방 관리는 담당 지역의 사법, 행정, 조세를 담당했다.[45] 마을과 촌락 주민들은 생산물과 상거래에 부과된 세금, 재판 수수료를 지방 관리에게 납부했고, 지방 관리는 매년 일정액의 세금을 미오자에게 납부했다. 하지만 미오자가 지방 관리를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했으며, 일부 지방 관리는 영민이 낸 세금을 착복하기도 했다.[46]
3. 2. 왕위 계승 분쟁
15세기 초 민카운 1세 시대까지는 국내가 비교적 안정적이었으나, 그의 아들 티하투 시대에 이르러 각 지방 영주가 통치하는 도시들의 반란이 잇따라 발생하였다.[21]티하투는 즉위 후 아버지의 왕비인 신 보메를 왕비로 맞이하였으나, 신 보메는 티하투를 살해하고 티하투의 아들 민라 게를 옹립하였다. 신 보메는 다시 민라 게를 살해하고, 1426년 시포(온바운)의 성주와 공모하여 카레체타운뇨를 왕위에 올렸다.[22] 페구와의 전쟁에서 활약한 영주 모닌타도는 카레체타운뇨의 즉위에 반대하여 카레체타운뇨와 신 보메를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다. 모닌타도는 즉위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신 보메와 결혼하였고,[23] 치세의 대부분을 도시들의 반란 진압에 매달렸다.[24]
모닌타도의 아들 민레초스와 시대에는 명의 토벌로 약화된 마오 샨족을 공격하여, 1442년 그들의 지도자 토 앤간 보와(思任發)를 사로잡아 북방의 위협 중 하나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다.[25] 그러나 민레초스와의 뒤를 이어 즉위한 동생 나라파티는 명에 토 앤간 보와를 넘겨주기를 거부하고, 조공도 거절하였다.[26] 그 때문에 1446년 명의 더 많은 원정군이 파견되었고, 나라파티는 항복하여 자살한 토 앤간 보와의 시체와 그의 신하들을 명군에 넘겨주었다.[27]
1469년 즉위한 티하투라 시대부터, 도시 타우응구(타우응구)가 성주 시투쵸우틴의 지휘 아래 세력을 확장하여 주변 도시들을 제압해 나갔다. 신하들은 타우응구의 세력 확장을 반란의 징조로 보고 티하투라에게 경고하였으나, 아바의 궁정에 온 시투쵸우틴이 왕에 대한 충성을 선언함으로써 타우응구의 토벌은 실행되지 않았다.[28] 시투쵸우틴이 조카 민치니우에게 암살된 후, 아바 궁정은 타우응구의 반항이 그치기를 기대하며 민치니우의 즉위를 인정하였으나, 기대와는 달리 타우응구는 아바 영토에 빈번하게 침입하였다.[29]
16세기 초 슈웨난쵸우신 시대에, 북방에서 소론(思倫)을 지도자로 하는 도시 모닌[30]의 확장이 시작되었고, 다른 도시들도 불복종의 의사를 나타냈다. 아바를 지지하는 도시는 시포뿐이었고, 각지에서 발생하는 반란을 아바의 힘만으로 진압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슈웨난쵸우신은 자신의 정적을 보호하는 타우응구에 공주와 영토를 주어 회유해야만 했다.[31] 1524년 이라와디 강 연안 도시 피에(피에)가 모닌에 항복하였고, 1527년 모닌의 공격을 받은 아바는 함락되었으며, 소론은 아들 토한부와(思洪發)를 아바의 왕위에 올렸다. 슈웨난쵸우신은 아바 방어전에서 포격을 받고 전사하였고, 도망치는 난민들은 타우응구로 유입되어[32] 타우응구의 국력은 더욱 증가하였다.[33]
토한부와가 즉위한 직후, 쏘론은 자신의 부하들에 의해 살해되었고, 잉와 왕국은 버마족의 도시인 타웅구와 전쟁을 벌였다. 1542년에는[32] 타웅구 왕 타빈슈웨티의 매부인 바인나웅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몰락했다.[34] 불교도가 아니었던 토한부와는 버마족이 믿는 불교를 탄압하고, 사찰과 탑을 파괴하며, 승려들을 살해하고, 경전을 불태워[34] 민중의 반감을 샀다.[12] 국내에서 일정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아라냐 승단도 큰 피해를 입었다.[34] 또한, 토한부와 즉위 후 궁정에서는 샨족 출신의 신하들이 권세를 휘둘렀고, 버마족은 그들로부터 모욕을 받게 되었다.[35] 버마족 신하들은 토한부와의 심복인 버마인 장군 민치얀아웅에게 탄원했고, 토한부와는 민치얀아웅의 손에 살해되었다.[36] 토한부와 사후, 버마족 신하들은 민치얀아웅에게 즉위를 청했지만 그는 그 요청을 거절하고, 시뽀의 샨족 영주 콩마인을 아바의 왕으로 추천하고 은퇴했다.[37]
콩마인의 아들 모비 나라파티는 도시 간의 분쟁을 통제할 수 없었고, 1552년에 사린의 영주 시투초틴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타웅구의 왕이 된 바인나웅에게 복속했다.[38] 1555년, 바인나웅의 공격으로 아바는 함락되었고, 잉와 왕조는 멸망했다.
4. 사회
잉와 왕국 시기에는 관개를 통한 토지 개발과 외부 인력 납치로 도시의 생산력이 증가했다.[53] 북부 도시에서는 늦벼 재배와 목화 재배가 경제의 중심이었고,[51] 남부 도시는 벼농사와 벵골 만을 통한 해상 무역으로 이익을 얻었다.[54] 이러한 경제 구조는 북부와 남부 도시 간의 상호 의존성을 심화시켰다.[54]
하위 섹션인 '사회 계층'에서 잉와 왕국의 사회 계층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을 다루고 있으므로, 이 문단에서는 경제적 측면만 간략하게 언급하는 것으로 수정했습니다.
4. 1. 사회 계층
잉와 왕국 시기에는 관개를 통한 토지 개발과 외부 인력 납치로 도시의 생산력이 증가했다.[53] 북부 도시에서는 늦벼 재배와 목화 재배가 경제의 중심이었으며,[51] 남부 도시는 벼농사와 벵골 만을 통한 해상 무역으로 이익을 얻었다.[54] 이러한 경제 구조는 북부와 남부 도시 간의 상호 의존성을 심화시켰다.[54]제시된 원본 소스에는 '사회 계층'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경제 상황을 통해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요약'에서 언급된 '아티' 계층에 대한 내용은 원본 소스에서 찾을 수 없다.
5. 경제
잉와 왕국은 관개 농업과 대외 무역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켰다.[53][54]
5. 1. 농업
잉와 왕국은 관개를 통한 토지 개발과 외부 인력 납치를 통해 농업 생산력을 높였다.[53]북부 도시의 경우, 관개지에서는 수확량이 안정적인 늦벼가 재배되었고, 주변의 천수답에서는 강수량이 충분하면 벼, 강수량이 적으면 옥수수, 병아리콩이 재배되었다.[53] 밭농사에서는 토양에 따라 생산물을 결정하여, 보수력이 있는 토지에서는 참깨, 옥수수, 수수, 콩류가 재배되었고, 척박한 땅에서는 목화가 재배되었다.[53] 벼, 밭작물이 흉작이 되더라도 많은 수확량을 얻을 수 있는 목화는 도시의 경제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으며,[54] 도시 경제는 저수지 관개에 의한 벼농사와 목화 재배를 중심으로 돌아갔다.[51]
5. 2. 대외 무역
이라와디강 유역 남부 도시들은 벼의 수확량이 안정적이었고, 강어귀에 위치한 도시들은 벵골만(Bengal Bay)을 통한 해상 무역으로 이익을 얻었다.[54] 일부 도시는 목면의 주요 수출국인 중국과 독자적으로 교류하기도 했는데, 타운두인지(Taungdwingyi)가 그 예이다.[51]6. 문화
타도 민뱌는 아바(현재 인와)를 건설하고 '보석의 도시'라는 뜻의 '라타나푸라'로 봉헌했으며, 이 도시는 19세기 중반까지 거의 계속 미얀마의 수도였다.[6] 아바는 적어도 퓨 시대부터 존재했던 전통적인 미얀마 도시 설계 원칙에 따라 설계되었고, 완전히 성벽으로 둘러싸인 최초의 미얀마 도시로 내부 성채와 외부 민간 도시가 있었다. 아바의 성채는 세계 유일의 원통형 도시로 추정된다. 전설에 따르면 도시 성벽의 윤곽은 신화 속 미얀마 사자 친떼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7][8]
아바, 혹은 적어도 그 내부 성채는 축소된 불교 우주를 재현하도록 설계되었다. 궁궐은 성채 중앙에 건설되었는데, 전통적인 미얀마 도시 설계 원칙에 따라 부처의 위치에 해당하므로 왕을 부처와 직접적으로 연결시켰다. 이는 왕에게 신성한 지위를 부여했고 궁궐을 종교적 중심지로 만들었다.[7] 궁궐은 힌두-불교 신앙에서 매우 길상적인 수미산을 모방하도록 설계되었다. 왕국과 그 힘은 만다라로서 도시에서 직접 발산되어 전 세계를 둘러쌌고, 도시는 신성하게 명령받은 왕국의 우주적 중심지였다.[6]
스와 소 케 통치 기간 동안, 왕, 상가, 실론 승려, 브라만이 참석하는 회의가 아바에서 소집되었다.[6] 한 비문에는 이 도시가 불교 천국 중 가장 중요한 곳인 다바팀사만큼 즐겁다고 적혀 있는데, 이는 미얀마 왕국의 현세 영역의 모델이기도 했다.[6] 스와 소 케는 학문적 노력을 장려한 지적인 왕으로 알려져 있으며, 도시는 지적인 대화로 가득 차 있었다.[6]
아바는 문해율이 매우 높은 사회였으며, 시는 마을 지도자와 같은 사회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 의해 지어졌다. 1355년 팔라웅의 한 마을 지도자는 시를 돌에 새겼다.[9] 바간과 아바 시대의 고전 미얀마어로 쓰인 비문을 보면, 평민과 귀족이 쓴 비문의 비율이 3:1로 평민이 더 많다.[9]
비유, 은유 등 문학적 장치의 정교한 사용은 특히 신 마하랏타타라의 작품에서 두드러진다. 그의 작품 중 하나는 결혼과 세속적인 삶의 안락함을 숲 속의 금욕적인 삶을 위해 거부한다. 다음은 Hla Pe 박사, John Okell, Anna Allott의 번역이다.
내가 결혼할 처녀는 숲 속에 사는, 은둔자에게 어울리는, 사람들의 접근이 먼 곳에 있는 자일 것이다; 그녀는 나의 모든 필요를 돌볼 것이고 항상 나에게 먹을 것을 줄 것이며, 숲의 열매를 밥으로, 숲의 열매를 카레로. 나는 지혜를 세탁수로 삼을 것이다. 그것은 탐욕, 증오, 무지의 때를 씻어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금욕주의자의 매듭을 머리카락에 단정하게 묶으면, 나는 믿음을 화환으로 장식할 것이다; 명상의 향기가 내 향나무가 될 것이고, 나는 알로에의 달콤하고 시원한 주스로 나 자신을 기름칠할 것이다. … 나는 법의 귀중하고 값비싼 의복을 입을 것이다.[9]
6. 1. 문학
팔리어 대신 구어체 미얀마어를 사용한 문학 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불교 설화를 바탕으로 한 서사시(표)가 주류를 이루었다. 승려 이외의 계층에서도 시 창작이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문인으로는 테이라운타, 마하라타타라, 아두우민니우 등이 있다.[70][72][74]아바 왕조 시대의 시문은 승려들이 저술한 종교 설화의 번역과 해석을 바탕으로 한 불전 서사시(표)가 주류였으며, 작품 수는 적었고 전대의 시문과 비교하여 문체에 큰 발전은 보이지 않았다.[70] 행 수, 절 수에 차이는 있었지만 팔리어로 기록된 불전을 소재로 한 점은 모든 작품에 공통적이었다.[71] 아바 왕조의 불전 서사시의 완성도는 후세 사람들에 의해 높이 평가되었으며, 이를 뛰어넘는 작품은 결코 나타나지 않았다고까지 여겨졌다.[72] 불전의 문학화에 대해 불교계 전체가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아니었지만, 문학 작품은 교리와 경전 해석의 이해를 돕기 위해 교육과 예능에 활용되었고, 작품은 민중들에게도 널리 퍼져나갔다.[73]
아바 왕조 시대 버마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1501년에 버마 최초의 산문 소설 『피안도 이야기』[72], 1502년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버마어 왕조사인 『우주 왕조사(야자우인조)』[74]를 편찬한 승려 테이라운타, 핀야 왕조의 혈통을 이은 시인 마하라타타라, 불교 설화를 시적으로 해석한 아가타마디 등이 있다.
불전 서사시 이외에도, 자장가 형식을 취하여 왕가의 혈통을 찬양하는 역사가요(에이진) 『아라칸 공주의 역사가요』를 지은 아라칸 출신의 시인 아두우민니우, 왕의 업적과 전쟁을 이야기하는 기록시(모군) 『프롬으로 향하는 기록시』를 지은 군인 신 투에니우 등이 나타났다. 이들과 같은 승려 이외의 계층의 사람들도 승려와 마찬가지로 경전을 인용하여 시 창작에 힘썼다.[72]
궁중의 여관들 사이에서 사용되었던 55가지의 머리 땋는 방법을 시로 지은 요웨시트웨와 같은 여성 문학가도 있었다.[75]
6. 2. 종교
파간 왕조 말기에 성립된 아라냐 승단은 잉와 왕국(아바 왕조) 통치하의 미얀마에서도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승단의 우두머리는 궁정의 왕사를 겸하고 있었다.[15] 토지 매입과 음주가 포함된 토지 거래와 관련된 의식도 계속해서 행해졌고, 적극적으로 사찰 영지의 개발과 확장을 실시했기 때문에 토지 소유권을 둘러싸고 국가와 자주 대립했다.[15] 개발 사업 중 특히 규모가 큰 것으로는 1429년 피투 싼가라자에 의한 2000ha 이상의 관개 답 개간이 있다.[15] 승단이 가진 밀교적 요소는 일반 대중에게 널리 받아들여졌고, 황폐한 토지의 개발 사업은 국가의 이익과도 일치했기에 국가는 승단의 개발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55]15세기 말부터 남쪽 페구 왕조에서 일어난 종교 개혁으로 아라냐 승단은 타격을 입었고,[20] 타웅우 왕조의 타웅누에 의한 불교 탄압으로 승단은 예전의 기세를 잃었다.[34] 타웅누의 탄압은 아라냐 승단 등 출가 집단이 가진 민중에 대한 영향력을 경계한 것이었으며, 간신히 학살을 피한 비구들은 타웅구로 망명했다.[13]
6. 3. 건축
1456년 이라와디 강에 미얀마 역사상 최초로 목조 다리가 건설되었다.[76] 아바, 핀야, 사가잉은 강폭이 1킬로미터를 넘고, 우기가 되면 강의 범람으로 양안의 대부분이 침수되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이러한 곳에 다리를 건설한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76]7. 외교
잉와 왕국은 건국 초기에 남쪽의 한타와디 왕국(페구 왕조)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으나, 야자디리 왕 즉위 후 양국 간에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은 40년 전쟁(1385~1424)으로 불리며 잉와 왕국을 쇠약하게 만들었다.[1] 민카웅 1세의 왕자 민레초스와가 전쟁에서 활약했으나, 1417년 사망하면서 잉와는 큰 타격을 입었다.[61],[62]
샨족은 1364년 사가잉 왕국과 핀야 왕국을 붕괴시키고 잉와 왕국 건국에 영향을 주었다.[4] 16세기 초에는 샨족 연합이 잉와를 함락시키고 상부 버마의 대부분을 지배하기도 했다.[5]
1383년 잉와 왕국은 명나라에 사절을 파견했고, 명나라는 잉와 왕국에 "총독" 지위를 인정했다.[65] 1440년대에 양국은 대립하기도 했으나, 타협을 통해 관계를 회복했다.[67]
1435년경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상인 니콜로 데 콘티가 잉와 왕국을 방문하기도 했다.[69]
7. 1. 한타와디 왕국과의 관계
잉와 왕국은 건국 당시 남쪽의 페구 왕조(한타와디 왕국)와 우호적인 관계였으며, 국경 설정도 평화적으로 이루어졌다.[56] 그러나 야자디리 왕 즉위 후, 잉와가 페구 내 야자디리의 정적과 결탁한 것이 발단이 되어 양국 간에 이라와디 삼각주를 무대로 전쟁이 시작되었다.[57]1407년 잉와 왕 민카웅 1세가 여동생을 야자디리에게 시집보내면서 한때 평화가 성립되었으나, 이듬해 민카웅 1세가 치앙마이와 손잡고 페구를 공격하려 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서 전쟁은 재개되었다.[58] 이 전쟁은 40년 전쟁(1385~1424)으로 불리며, 잉와 왕국을 쇠약하게 만들었다.[1] 이 전쟁은 11세기 파간 왕조 건국자 아노야타의 몬족과의 항쟁의 연장선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58] 버마 사학자 G.E. 하비는 이를 민족 이동의 전쟁으로 해석했다.[64]
페구와의 전쟁에서 민카웅 1세의 왕자 민레초스와(1391년 - 1417년)가 특히 활약했다. 전쟁 중 생모가 야자디리에게 붙잡혀 그의 측실이 된 것을 알게 된 민레초스와는 분노하여 페구가 지배하는 하부르마와 잉와에 반역한 아라칸을 공격했다.[59] 1415년에는 민레초스와가 하부르마 서부를 제압하여, 야자디리에게 남은 도시는 페구와 마르타반뿐이었다.[60] 1417년 민레초스와는 중상을 입고 야자디리의 손에 넘어가 치료를 거부하고 숨을 거두었다.[61]
민레초스와의 죽음으로 잉와 병사들은 사기를 잃었고, 민카웅도 그의 죽음에 낙담하여 여생을 신앙에 바쳤다.[62] 민레초스와 사후 전투는 진정되었고,[63] 민카웅 1세 사후에 전쟁이 끝났다.[16]
7. 2. 샨족과의 관계
샨족은 1364년에 사가잉 왕국과 핀야 왕국을 붕괴시킨 후, 타도 민뱌가 아바 왕국을 건국하는데 영향을 주었다.[4] 16세기 초, 샨족은 아바 왕국을 집중적으로 침략했다. 1527년, 모냐인을 중심으로 프롬과 동맹을 맺은 샨족 연합은 아바를 함락시키고 상부 버마의 대부분을 지배했다.[5]토한부와는 샨족 출신으로 왕위에 오른 후 불교를 탄압하고 버마족을 차별하여 민심을 잃었다.[12],[34],[35] 결국 그는 버마인 장군에게 살해되었고,[36] 샨족 영주 콩마인이 왕위를 이었다.[37] 콩마인의 아들 모비 나라파티는 도시 간 분쟁을 통제하지 못하고 시투초틴에게 왕위를 양보했다.[38]
1555년, 타웅구 왕조의 바인나웅이 아바를 정복하면서 잉와 왕조는 멸망했다.[5]
7. 3. 명과의 관계
1383년 잉와 왕국은 아바에서 운남으로 사절을 파견했다.[65] 명나라는 아바에 "총독" 지위를 인정했고, 모닝에게 경고했다. 그러나 1393년 모닝은 경고를 무시하고 다시 아바를 침입했다. 1406년 명나라는 사절을 파견했으나,[66] 1440년대에 들어 아바 왕조와 명나라 양쪽 모두와 적대하던 마오 샨족 지도자 토 웅간 보와의 처우를 둘러싸고 양국은 대립했다. 아바 왕조의 타협으로 양국 관계는 회복되었고, 아바 토벌을 위해 파견되었던 명나라 군대는 귀국 전에 야메이딘의 반란을 진압했다.[67] 1451년 명나라는 금패와 신부를 하사했고,[68] 명나라 지배하에 있던 토지의 일부를 받았다.[67]토한부와의 찬탈 이후 명나라에서 관리가 파견되었으나, 아바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귀국했다.[32]
7. 4. 유럽과의 접촉
1435년경, 베네치아 공화국의 상인 니콜로 데 콘티가 아바를 방문해 당시 아바의 모습을 여행기에 남겼다.[69]8. 역대 군주
번호 | 이름 | 재위 기간 | 전대와의 관계 |
---|---|---|---|
1 | 타도민비야 | 1364년 - 1368년 | 건국자 |
2 | 나 누 | 1368년 | 타도민비야의 신하. 왕위 찬탈. |
3 | 스와소케 | 1368년 - 1401년 | 왕위 계승. 파간 왕가와 핀야 왕가의 자손을 자칭[14]. |
4 | 타라비야 | 1401년 | 스와소케의 아들. |
5 | 나 나우 산 | 1401년 | 타라비야의 신하. 왕위 찬탈. |
6 | 민카웅 1세 | 1401년 - 1422년 | 스와소케의 아들. |
7 | 티하투 | 1422년 - 1426년 | 민카웅 1세의 아들. |
8 | 민랑게 | 1426년 | 티하투의 아들. |
9 | 칼레 켓타웅뇨 | 1426년 - 1427년 | 타라비야의 아들. |
10 | 모닌타도 | 1427년 - 1440년 | 왕위 계승. 왕실의 피를 이음[77]. |
11 | 민예껫스와 | 1440년 - 1443년 | 모닌타도의 아들. |
12 | 나라파티 | 1443년 - 1469년 | 모닌타도의 아들. |
13 | 티하투라 | 1469년 - 1481년 | 나라파티의 아들. |
14 | 민카웅 2세 | 1481년 - 1502년 | 티하투라의 아들. |
15 | 슈웨난껫오씬 | 1502년 - 1527년 | 민카웅 2세의 아들. |
16 | 토한브와 | 1527년 - 1543년 | 모닌의 지도자 소론의 아들. 왕위 찬탈. |
17 | 콘마잉 | 1543년 - 1546년 | 시포의 지도자. 왕위 계승. |
18 | 모비 나라파티 | 1546년 - 1552년 | 콘마잉의 아들. |
19 | 시투껫오틴 | 1552년 - 1555년 | 살린의 지도자.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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