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간 왕국은 1044년 버마족이 이라와디강 유역에 건국한 미얀마 최초의 통일 왕국이다. 아노라타 왕은 주변 지역을 정복하고 몬족 문화를 수용하여 세력을 확장했으며, 상좌부 불교를 국교로 삼아 불교 문화를 발전시켰다. 13세기에는 몽골의 침입으로 쇠퇴하여 1299년 멸망했다. 이 시기 미얀마 문자, 불교 건축, 예술 등이 발전했으며, 현재 미얀마 민족 구성의 기틀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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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간 왕국 - 나라티하파테 나라티하파테는 바간 왕조의 왕으로, 초기에는 재상의 영향력 아래 왕권 강화를 시도하고 불교 중흥에 힘썼으나, 대원제국의 침공을 초래하여 몽골에 항복 후 귀환 중 아들에게 살해당하며 "중국에서 도망친 왕"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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쀼가 멸망한 후, 티베트버마어계 민족인 버마족이 이라와디강 유역으로 진출하였다. 1044년, 아노라타 왕은 바간을 중심으로 미얀마 최초의 통일 왕국인 바간 왕조를 세웠다. 아노라타는 이라와디강 유역을 기반으로 주변 지역을 정복하며 세력을 넓혔고, 1057년에는 남쪽 몬족의 타톤을 정복하여 많은 몬족 포로를 데려왔다. 이를 통해 선진적인 몬족 문화가 유입되었고, 몬족 세력을 통합하며 왕조는 더욱 강성해졌다.
제3대 챤지타 왕 시대까지 약 반세기 동안, 바간 왕조는 몬족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점차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으며, 이는 현재 미얀마 문화의 기반이 되었다. 실론과의 교류를 통해 들어온 상좌부 불교는 국가의 보호 아래 크게 융성하였다. 이 시기에는 수많은 불교 사원이 건축되었는데, 아난다 사원을 비롯한 수천 개의 웅장한 사원들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13세기에 바간을 방문한 마르코 폴로는 그의 여행기에서 이곳을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 있는 도시’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또한 이 무렵 몬 문자를 바탕으로 버마 문자가 만들어졌다.
바간 왕조는 송나라에 파간(蒲甘)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조공을 바치기도 했다. 그러나 화려한 불교 문화의 이면에는 지나친 사원 건축으로 인한 국력 소모라는 문제점이 있었고, 이는 왕조 쇠퇴의 한 원인이 되었다. 결국 1277년부터 1287년까지 네 차례에 걸친 원나라의 침공을 받아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1299년에 멸망하였다.
2. 1. 건국과 발전
쀼의 멸망 이후, 티베트버마어계 민족인 버마족이 이라와디강 유역으로 이동하였다. 남조의 선봉으로 상부 버마에 있던 삐우를 정복한 후 이라와디 평원에 정착한 이들이 바간 왕국의 조상이 되었다.[4] 버마족은 849년경 파간(Pagan)에 수도를 건설했는데,[5] 이 지역은 강수량이 적어 벼농사에는 불리했지만, 주요 쌀 생산지인 차우세 지역과 민부 지역의 중간에 위치하는 이점이 있었다. 버마족은 선주민이었던 삐우족으로부터 농업 기술을 배우고 불교를 접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6]
1044년, 아노라타(재위 1044년 ~ 1077년) 왕이 바간에서 미얀마 최초의 통일 왕국인 바간 왕조를 세웠다. 현존하는 유물을 통해 실존이 확인되는 최초의 왕으로 여겨지는[3] 아노라타는 이라와디강 유역을 중심으로 아라칸 지방과 하미얀마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1057년에는 남쪽 몬족의 타톤 왕국 수도 못타마(현재의 타툰 지역)를 함락시키고 많은 몬족 포로를 데려왔다.[7] 이를 계기로 선진적인 몬족 문화가 유입되었고, 몬족 세력을 흡수하여 왕국의 기반을 다졌다. 또한, 아노라타는 국내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강한 밀교적 성향을 지녔던[8] 아리 승려들을 배척하고 국가를 상좌부 불교 중심으로 재편했다. 이는 민중에게 영향력이 컸던 아리 승려들을 억압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 민중과의 결속을 다지려는 목적이었다.[9] 아노라타의 이름이 새겨진 전불의 출토지는 왕조 기록에 나타난 그의 성채 위치와 거의 일치하여,[9] 초기 바간 왕조의 지배 영역을 짐작하게 한다.[9]
제3대 챤지타 왕의 시대까지 약 반세기 동안 바간 왕조는 몬족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점차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으며, 이는 현재 미얀마 문화의 기초가 되었다. 실론(현재의 스리랑카)과의 교류를 통해 들어온 상좌부 불교는 국가의 적극적인 보호 아래 크게 융성하였다. 이 시기에는 몬 문자를 바탕으로 버마 문자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불교의 융성은 수많은 불교 사원 건축으로 이어졌다. 이때 세워진 수천 개의 웅장한 사원들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으며, 아난다 사원이 대표적이다. 13세기에 이곳을 방문한 마르코 폴로는 그의 여행기에서 바간을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 있는 도시’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화려한 불교 문화의 이면에는 지나친 사원 건축으로 인한 국력 소모라는 문제점이 있었고, 이는 왕조 쇠퇴의 한 원인이 되었다.
바간 왕조는 송나라에 파간(蒲甘)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조공을 바치기도 했다. 그러나 1277년부터 1287년까지 네 차례에 걸친 원나라의 침공을 받으면서 급격히 쇠약해졌고, 결국 1299년에 멸망하였다.
2. 2. 전성기
쀼의 멸망 이후 티베트버마어계 민족인 버마족이 이라와디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1044년바간에서 미얀마 최초의 통일 왕국인 바간 왕조를 세웠다. 건국 군주 아노라타는 이라와디강 유역을 중심으로 영토를 넓혔고, 1057년에는 남부의 몬족 국가 타톤을 정복하여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국력을 신장시켰다.
제3대 왕인 챤지타는 아노라타 시대의 원정에 참여했으며, 즉위 후에는 하미얀마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크메르 제국과의 전투에서도 활약한 뛰어난 군인이었다.[10] 내정에서는 관개 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버마족과 몬족의 화합을 도모하여 국가 안정과 경제 발전에 힘썼다. 챤지타 치세부터 약 반세기 동안 바간 왕조는 전성기를 누렸는데, 이 시기에는 몬족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자적인 미얀마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실론과의 교류를 통해 전래된 상좌부 불교가 국가의 보호 아래 크게 융성하였으며, 몬 문자를 바탕으로 버마 문자가 창제되기도 했다.
나라투 왕이 무역 이권을 둘러싼 싱할라 왕조와의 갈등 속에서 침입을 받아 전사하고[12](일부 버마어 연대기에는 벵골 지역 파티카야 왕이 보낸 암살자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기록도 있다[11]), 그의 아들 나라틴카가 잠시 왕위를 이었으나 비문에 이름이 확인되지 않는 등[13] 정통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이후 아노라타의 혈통을 이은 나라파티시두가 쿠데타를 통해 집권했다.[14]
나라파티시두 시대에 바간 왕조는 최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차우세와 쉐보 지역 등지에서 대규모 관개 사업을 벌여 농업 생산력을 크게 증대시켰으며, 왕국의 지배 영역을 남쪽으로 말레이반도 북부까지 확장하였다. 문화적으로도 버마 고유의 특색이 더욱 뚜렷해지는 발전을 이루었다.[15]
이 시기 바간에는 수많은 불교 사원이 세워졌는데, 아난다 사원을 비롯한 수천 개의 사원들이 오늘날까지 남아 바간의 독특한 풍경을 이루고 있다. 13세기에 이곳을 방문했던 마르코 폴로는 그의 여행기 《동방견문록》에서 바간을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 있는 도시’라고 묘사하며 그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처럼 불교 문화는 화려하게 꽃피웠다.
그러나 나라파티시두 사후, 차조와 시대에 이르러서는 사원에 기증되는 토지가 지나치게 늘어나 국가 재정이 악화되고 치안이 불안정해지는 등 점차 쇠퇴의 기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16] 오우사나와 그의 아들 민얀이 암살자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고, 다음 왕인 나라티하파테 시대에 이르러 왕조는 외부의 침입으로 인한 국난을 맞게 된다.
2. 3. 쇠퇴와 멸망
오우사나 사후, 민얀의 아들 나라티하파테가 즉위했다. 한때 융성했던 바간 왕조였으나, 지나친 불교 사원 건축에 국력을 소비하여 쇠퇴하기 시작했다. 1253년 미얀마 북부의 대리국이 몽골 제국에 정복되면서 외부의 위협이 커졌다. 과도한 사찰 기증으로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고[17], 왕실과의 혼인 관계를 통해 궁정 내 영향력을 키운 샨족 출신의 세 형제, 아산카야, 야자틴잔, 티하투가 군사력을 바탕으로 민사인 왕국(Myinsaing) 지역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1277년, 원은 바간에 파견한 조공 요구 사절이 실종되고, 원나라에 복속한 금치족이 바간의 공격을 받는다는 명분으로[18] 군대를 보내 바간을 압박했다. 이후에도 나라티하파테가 원에 복종하지 않자, 원은 1286년 에센 테무르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대규모 침공을 준비했다. 이듬해인 1287년 벌어진 바간 전투에서 바간 군대는 패배했고, 나라티하파테는 수도 바간을 버리고 남부의 파테인으로 도망쳤다. 결국 바간은 함락되었고, 몽골군 철수 조건으로 원나라에 조공을 바치기로 약속했다.
수도로 돌아오던 중 나라티하파테는 자신의 서자 티하투에게 독살당했으며[19], 그의 아들들인 우자나와 티하투 역시 후계자 다툼 과정에서 사망했다. 살아남은 아들 초우스와가 왕위를 이었다. 초우스와는 원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왕위를 인정받았으나, 독자적으로 사절을 보낸 샨족의 아산카야 역시 원나라로부터 인정을 받아[20] 사실상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한편, 1281년 무렵부터 미얀마 남부 항구 도시 못타마에서 반란이 일어나, 1287년에는 몬족의 와레루가 수코타이 왕조의 지원을 받아 페구 왕조를 세우며 독립했다.
1299년경, 샨족 3형제는 나라티하파테의 왕비였던 소우와 공모하여 초우스와를 폐위시키고 그의 아들 소우닛을 왕으로 내세웠다. 대도로 망명한 소우닛의 형제가 원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21], 1301년 몽골군이 다시 미얀마를 침공했으나 아산카야가 이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22] 이 승리는 비문에도 기록되어 칭송받았다.[23] 샨족 형제에게 추대된 소우닛은 실권이 없는 명목상의 왕이었고[24], 1314년 바간 왕가에 전해지던 상징물인 금대와 금분이 티하투에게 넘어가면서 왕조는 실질적으로 멸망했다. 왕위에서 물러난 소우닛은 바간 지역의 묘자(지방 수령)로 임명되었으나, 1369년 그의 아들 우자나 2세가 사망하면서 바간 왕가의 남성 후계자는 완전히 단절되었다.[25]
바간 왕조는 나라티하파테가 원나라에 항복한 1287년을 기점으로 사실상 멸망하였다.[24] 하지만 그의 아들인 초스와가 살해당한 1299년을 완전한 멸망 시점으로 보기도 한다. 자료에 따라 왕의 이름 표기와 재위 기간이 서로 다르지만, 위 목록은 주로 『출생표집왕통사』(ဇာတာတော်ပုံ ရာဇဝင်|자타도본 야자윈mya)를 따른다.
주요 구성 민족은 버마족을 포함한 14개의 민족이며, 파라웅족, 몬족, 샨족, 와족, 크메르인 등이 왕국 내에 거주하고 있었다.[27] 그 외에 원주민인 퓨족, 인도와 중국에서 이주한 사람들도 포함된다.
신분은 왕족, 궁중 신하, 일반 서민, 승려 외에 노예로 구성되어 있었다. 노예는 개인에게 부역하는 노비와 사찰에 헌납된 삼보 노예로 크게 나뉜다.[28] 삼보 노예는 공덕을 쌓는다는 목적 상, 원래는 하층 계급으로 여겨지지 않았으며, 식자율도 10% 정도로 높았다.[29] 그들이 종사하는 작업은 농업, 승려 시중, 장인, 예인의 네 가지로 분류되며, 신도들은 가족, 때로는 자신을 봉헌하여 내세의 행복을 기원했다. 이들 노예는 삼보 노예, 노비 노예와 함께 "춘"이라 불렸고, 그 자손은 노예 신분에 구속되어 세습 노예(타바우)라는 신분이 새롭게 형성되었다. 타바우는 차별을 받아 거주지, 직업, 결혼에 큰 제한이 가해졌고, 20세기 버마 독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편견으로부터의 해방이 시작되었다.[30]
4. 2. 왕권과 관제
국왕은 전제군주였으며 그 권력은 절대적이었다고 여겨진다. 비문에는 왕이 만물을 지배하는 인물로 새겨져 있다. 또한 왕은 보살이자, 보살의 화신으로 여겨지는 흰 코끼리의 소유자로 간주되었다[31]. 왕위 계승은 원칙적으로 세습이었으며, 다음 왕위는 전대 왕의 직계 비속이 잇는 것이 일반적이었다[31]. 부모에서 자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형제간 계승이나 찬시타 왕이 손자 아라운시두를 후계자로 임명한 사례도 있었다.
관료 조직의 최고위직은 대신으로, 국정 전반을 총괄했다. 대신은 국왕의 신임이 가장 두터운 인물이 임명되었으며, 원칙적으로 여러 명이었으나[32] 그 수는 2명에서 7~8명까지 다양했다. 이 외의 중요 관직으로는 군사 분야의 사령관, 각 장수, 수군 장수, 사법 분야의 판사, 검사, 서기장, 서기관 등이 있었다. 지방 행정 조직에는 군수·읍장·리장 등 각 단계의 장이 있었고, 조세 분야에는 칸코운(곡물 창고)의 쌀을 관리하는 창고 관리직이 있었다. 그 외 제사를 담당하는 점성술사와 브라만, 어의가 있었으며, 왕궁 내에서는 국왕의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을 모두 돌보는 민친과 민세라는 남성 관리가 있었다.
4. 3. 행정 구역
바간 왕국 정부는 토지를 크게 세 구역으로 나누어 관리했다. 카린(Kyaing), 투익(Tuik), 누인남(Nuinngan)이 그것이다.[33]
카린(Kyaing): 왕조가 처음부터 지배했던 핵심 지역으로, 생산성이 높은 차우세(Kyaukse), 민부(Minbu), 타웅비욘(Taungbyon) 등이 포함되었다. 행정의 중심지였지만, 버마족 외에 다른 민족들도 함께 살았다.[33]
투익(Tuik): 왕조가 확장하면서 얻은 땅으로, 카린 지역 주변에 배치되었다. 주로 밭농사가 이루어지던 지역이다.[33]
누인남(Nuinngan): 투익 바깥에 위치한 지역으로, 중앙 정부의 통치력이 잘 미치지 않았다.
지방의 기본적인 행정 단위는 마을(ルワー|rwāmya)이었으며, 규모가 큰 마을이 주변의 작은 마을들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지리적으로는 이라와디강이 수도 파간과 벼농사 중심지인 카린 지역을 연결하고, 그 바깥으로 밭농사 지대인 투익이 펼쳐진 구조였다.[33]
수도 파간 근처에는 큰 농업 지대가 없었기 때문에, 왕국은 지방의 식량 생산, 특히 대규모 관개 시설을 갖춘 차우세 지역에 크게 의존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왕조에 매우 치명적이었다. 또한 왕조 말기에는 해상 무역의 중요 거점이었던 모타마(Mottama)를 잃으면서 몰락이 더욱 가속화되었다.[34] 왕조 말기에 샨족 삼형제가 정치적 실권을 잡을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는, 당시 왕이었던 나라티하파테(Narathihapate)가 이들에게 차우세 지역의 통치권을 맡겨 식량 공급을 장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35]
4. 4. 사법 제도
Tinbama|틴파마my 또는 Tasiphama|타시파마my라고 불리는 판사가 보통 3명에서 4명 있었다.[36] 이들은 주로 왕족과 귀족 중에서 선발되었으나, 승려가 판사를 겸임하는 경우도 있었다.
민사 사건의 판결은 법전인 Dhammathat|다마탓my을 참고하였다. 형사 사건은 Ko Taungyi|코 토우지my라고 불리는 검사가 담당했으며, 판례인 Amnunzar|암눈자my를 근거로 판결이 내려졌다. 범죄자에게는 일반적으로 재산형이 부과되었지만, 죄질이 나쁜 범죄, 특히 도둑질에는 가혹한 형벌이 내려지기도 했다.[37]
민사 소송에서는 피고와 원고가 법정에서 불경과 불사리를 들고 맹세하는 절차를 거쳤다. 소송 관련 기록은 바간 시대 전반기보다 후반기에 더 많이 남아 있으며, 소송 당사자 또한 국왕과 승려, 국왕과 평민, 승려와 재가 신도 등 다양했다. 특히 상속을 둘러싼 소송이 많았다.[38]
판결이 내려지고 사건이 해결되면, 피고와 원고가 식용 차를 함께 마시는 관습이 있었다.[39]
5. 경제
바간 왕국의 경제는 주로 농업에 기반했으며, 역대 왕들은 바간 주변 지역의 개척과 치수(治水) 사업에 주력했다.[40] 토양과 기후 조건에 따라 논, 정원, 충적지, 밭 등 다양한 형태의 농지가 개발되었고, 쌀, 병아리콩, 참깨를 비롯한 여러 작물이 재배되었으며 소, 물소, 말 등이 경작에 활용되었다.[41] 그러나 국가 주도의 대규모 관개 사업과 불교 사원 건축은 땔감용 목재 남벌과 토양 환경 변화를 야기했으며, 이는 왕조 후기 식량 공급 감소와 인구 유출의 한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42] 또한 사찰 소유의 토지가 점차 증가하면서 국가의 세수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문제도 발생했다.[45]
상업 분야에서는 9세기까지 존재했던 몬족 국가들과 달리 주조된 화폐가 통용되지 않았다.[46] 거래는 주로 노예, 코끼리, 말, 배 등을 이용한 물물교환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때로는 금, 은, 구리와 같은 귀금속의 무게를 기준으로 가치를 측정하여 상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주요 거래 품목은 토지, 노예, 가축 등이었다.[46]
5. 1. 농업과 치수
역대 바간의 왕들에게 중요한 과제는 수도 바간 주변 지역을 개척하고 물을 관리하는 치수(治水) 사업이었다.[40] 아노야타 왕은 차우세 지역의 관개 시설과 메이티라 지역의 치수 사업을 시행했다. 차우세 지역의 판라웅 강과 조지 강에는 5개의 제방과 용수로가 설치되었으며, 이후 나라파티시두 왕 시대에 제방 하나가 더 건설되었다. 알라웅시투 왕과 나라투 왕은 만달레이 근처에 두 개의 인공 호수를 만들었고, 나라파티시두 왕은 몬(Mon)과 무(Mu) 지역에서 운하 공사를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40]
농업은 토양과 기후 조건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저습지에는 논(လယ်|lè|레mya), 고지대에는 정원(ဥယျာဉ်|ʼṵyáñ|우인mya), 홍수가 잦은 저지대에는 충적지(ကိုင်း|kuing:|카인mya), 물을 구하기 어려운 땅에는 밭(ရာ|yà|야mya) 등 네 종류의 농지가 개척되었다.[41] 논은 다시 겨울철 재배용인 무인(မုရင်း|muyìn:|무인mya)과 우기에 강수량이 필요한 탄(တန်း|tan:|탄mya)으로 나뉘었다. 경작에는 소, 물소, 말 등이 이용되었으며, 주요 수확물은 쌀, 병아리콩, 참깨, 코코넛, 바나나 등이었다. 비문 기록에 따르면 현재까지 총 77종류의 작물이 확인되었다.[41]
국가가 주도한 대규모 관개 사업과 당시 성행했던 불교 사원 건축은 바간 지역의 토양 환경에 변화를 가져왔다.[42] 버마(미얀마)의 역사학자 G. E. 하비(Harvey)는 바간 왕조 멸망의 원인 중 하나로 수도 바간의 인구 유출을 지적하며, 그 배경에 토양 변화가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불탑 건축에 필요한 벽돌을 굽기 위해 땔감으로 사용된 목재의 남벌과 차우세 지역의 대규모 관개 사업으로 인해 바간의 토양이 왕조 초기보다 더욱 척박해졌다고 보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몽골의 침입으로 인한 파괴가 겹치면서 식량 공급량이 감소했고, 이는 수도의 인구 유출을 가속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고 설명한다.[42]
바간 왕조 시대의 농업 규모에 대해, 버마 역사학자 탄 툰(Than Tun)은 왕조 전체의 농지 면적을 88000ha에서 440000ha 사이로 추정했다.[43] 이는 영국령이 된 직후인 1892년 당시 버마 전체 농지 면적(3640000ha)[44]의 약 40분의 1에서 8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그러나 이 농지의 상당 부분은 사원의 사유지였으며, 왕조 후기로 갈수록 사원 소유의 토지가 증가하면서 국가의 세수 감소가 문제로 떠올랐다.[45] 이에 차스와 왕 등 일부 왕들은 사원 영지에 세금을 부과하려 시도했지만, 사원 측의 강한 반대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5. 2. 토지 소유와 세금
바간 왕국에서는 토양과 기후 조건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농지가 개척되었다. 저습지에는 논(レー), 고지대에는 정원(ウイン), 홍수가 잦은 저지대에는 충적지(カイン), 물을 구하기 어려운 땅에는 밭(ヤー)이 만들어졌다. 논은 다시 겨울철 재배용인 무인(ムイン)과 우기에 강수량이 필요한 탄(タン)으로 나뉘었다. 경작에는 소, 물소, 말 등이 이용되었으며, 주요 수확물로는 쌀, 병아리콩, 참깨, 코코넛, 바나나 등이 있었다. 비문 기록에 따르면 현재까지 총 77종의 작물이 확인되었다.[41]
국가가 주도한 대규모 관개 사업과 당시 성행했던 불교 건축은 왕도 바간의 토양 환경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미얀마의 역사학자 하비(Harvey)는 왕조 멸망의 원인 중 하나로 바간의 인구 유출을 지적하며, 그 배경에는 토양 변화가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고 보았다. 불탑 건축에 필요한 벽돌을 굽기 위해 연료로 사용된 목재의 무분별한 벌채와 차우세 지역에서의 대규모 관개 사업으로 인해 바간의 토양은 과거보다 훨씬 척박해졌다. 하비는 이러한 토양 악화가 몽골의 침입과 맞물려 식량 공급량을 감소시켰고, 결과적으로 왕도의 인구 유출을 가속화시켜 왕조 멸망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42]
농업이 이루어졌던 범위에 대해, 미얀마 역사학자 탄톤(Than Tun)은 바간 왕조 전체 농지 면적을 88000ha에서 440000ha 사이로 추정했다.[43] 이는 영국 식민 지배 직후인 1892년 당시 미얀마 전체 농지 면적(364만ha)[44]의 약 40분의 1에서 8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그러나 이 농지의 상당 부분은 사찰의 사유지였으며, 특히 왕조 후기로 갈수록 사찰 소유 영지가 늘어나면서 국가의 세수 감소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45] 이에 차스와 왕을 비롯한 일부 군주들이 사찰 영지에 대한 과세를 시도했으나, 사찰 세력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실패로 돌아갔다.
5. 3. 상업과 교역
9세기까지 존재했던 몬족 국가와는 달리, 바간 왕조에는 주조된 화폐가 없었다.[46] 교역은 주로 물물교환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노예, 코끼리, 말, 배 등이 주요 교환 대상이었다. 때로는 금, 은, 구리와 같은 금속의 무게를 기준으로 상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주요 거래 대상은 토지와 노예, 가축이었다.[46] 노예의 가격은 나이와 성별에 따라 다르게 책정되었다. 토지의 경우, '칼라인'(kalin)이라는 요소가 많이 포함된 차우세(Chause)와 민부(Minbu) 지역의 땅값이 높았고, 투이크(Twik) 지역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거래를 할 때는 반드시 증인이 필요했으며, 계약이 성사된 후에는 증인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관습이 있었다.
6. 문화
바간 왕국의 문화는 상좌부 불교를 중심으로 독자적으로 발전했으며, 종교, 건축, 문자,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이러한 문화는 이후 미얀마 문화의 근간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수많은 사원과 탑이 건설된 건축 분야의 발전이 두드러졌으며, 버마 문자의 정립과 미얀마 문학의 발전에도 중요한 기틀을 마련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6. 1. 종교
밀교적 요소가 강한 벽화가 그려진 파야톤주 사원
바간 왕조의 국교는 상좌부 불교였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종교가 공존했다. 왕조를 세운 아노라타는 타톤에서 초빙한 고승 신 아라한의 영향으로 상좌부 불교로 개종했으며, 당시 민중에게 영향력이 컸던 아리 승려들을 강제로 환속시켰다. 아노라타가 타톤을 공격한 이유에 대해 사료는 불교 경전과 사리를 얻기 위해서라고 기록하고 있으나[47], 일부 연구자들은 순수한 종교적 동기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48].
제3대 챤지타 왕의 시대까지 약 반세기 동안, 바간은 몬족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점차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해 나갔다. 이 시기는 현재 미얀마 문화의 기반이 마련된 중요한 시기로 평가받는다. 특히 스리랑카와의 교류를 통해 들어온 상좌부 불교는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크게 융성했다. 수많은 불교 사원과 탑이 건설되었는데, 이때 세워진 웅장한 사원 수천 개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으며 아난다 사원이 대표적이다. 13세기에 바간을 방문한 마르코 폴로는 그의 여행기에 바간을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 있는 도시'라고 기록할 정도로 불교 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웠다. 그러나 지나친 사원 건축은 국력을 소모시켜 왕조 쇠퇴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1190년, 스리랑카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타라인 출신 승려 차파타는 남방 전래 계통의 대사파를 창설했고, 이 종파는 점차 왕조의 공식적인 종교로 자리 잡았다. 차파타 사후 대사파는 세 개의 분파로 나뉘었으며, 타톤에서 유래한 기존의 상좌부 불교 분파와 함께 모두 신자 확보를 위한 포교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이들의 전도 활동은 육로와 수로를 통해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까지 퍼져나가 오늘날 동남아시아에서 상좌부 불교가 주요 종교로 자리 잡는 데 기여했다[49].
상좌부 불교가 국교였음에도 불구하고, 대승 불교, 밀교, 힌두교 역시 바간 사회에 공존했으며, 당시 사람들은 이들 종교 간의 차이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50]. 주민들 사이에서는 토착 나가(Nāga) 신앙을 믿는 사람들도 많았고[51], 궁정 의례에는 힌두교 점성술사나 브라만 승려가 참여하기도 했다. 상좌부 불교를 도입한 아노라타 자신도 대승 불교에 가까운 신앙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되며[52], 그의 이름이 새겨진 관음상이 다수 발견되었다. 챤지타 왕 시대까지 대승 불교, 밀교, 힌두교는 바간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53]. 왕조 말기인 1255년에 탐부라 왕비가 건립한 파야톤주 사원에는 밀교적 요소가 강한 벽화가 그려져 있어[54] 당시의 종교적 다양성을 보여준다.
13세기 이후에는 밀교적 성향이 강한 아라냐 승단이 세력을 키웠다. 이들은 숲 속에서 수행하는 승려 집단에서 시작하여 마하카사파라는 승려 아래에서 크게 성장했다. 1388년의 비문에 따르면, 마하카사파가 난다웅먀 왕의 병을 고쳐주고 그 대가로 많은 재물과 토지를 하사받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55]. 아라냐 승단은 1240년대에 차우세 지역으로 진출하여 1247년부터 1272년까지 쉐보, 친드윈 일대의 토지를 사들여 사원의 영지를 크게 늘렸다. 이들은 토지 매입 계약을 맺는 것은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음주나 육식을 하는 등[56] 기존 상좌부 불교의 계율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아라냐 승단의 사원 영지 확대로 국가 수입이 줄어들자, 차조와 왕은 스리랑카 불교계와 협력하여 이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지만[56], 마하카사파 사후에도 아라냐 승단의 가르침은 계속 퍼져나가 바간 왕조 멸망 이후 미얀마 불교계의 주요 세력 중 하나가 되었다.
6. 2. 건축
바간 왕조 시대에 건축된 사원(불탑)은 미얀마 예술의 정점으로 일컬어진다.[57] 이 시기에는 특히 대형 사원 건축 기술이 현저하게 발전하였고,[58] 슈웨지곤 파고다는 후대에 지어진 불탑의 기본적인 형태가 되었다.[59] 쀼 문화에서 계승된[60] 입우박지(入隅迫持) 공법에 의한 아치 건축이 특징이며, 나라파티시투 왕 이후로는 밝은 색채를 사용한 굴원(窟院)과 불탑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61]
왕족, 귀족과 같은 부유층은 내세의 행복을 기원하며 공덕을 쌓기 위해 종교 시설 건설과 삼보(三宝)에 대한 기증을 활발히 진행했다.[62] 사원 건립에는 막대한 비용이 투입되었는데, 예를 들어 1196년 나라파티시투가 세운 불탑 한 기당 은 44027MMK가 지불되었다.[63] 당시 성인 남자 노예 한 명의 가격이 은 20MMK에서 25MMK였던 것을 감안하면,[64] 불탑 하나를 짓는 데 노예 약 2,200명에 해당하는 비용이 들었던 셈이다. 다른 비문에 따르면, 굴원 건설 비용은 시설 전체를 포함하여 20000MMK가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65] 불상, 굴원, 승원, 담장 등 모든 시설을 건축하는 데 은 10,000크라야브(약 165kg, 노예 300명 이상 해당)가 지출되었다는 기록도 있다.[62] 이러한 대규모 건축 사업에 필요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많은 노동자들이 보수로 지급되는 은, 의복, 식량을 얻고자 바간으로 모여들었다.[66]
가옥을 짓는 재료는 신분에 따라 엄격히 구분되었다. 고위층은 목조 저택에 거주했지만, 일반 백성들은 니파야자, 띠 지붕, 대나무 벽으로 만든 집에 살았다. 벽돌은 오직 불교 건축물에만 사용이 허용된 특별한 건축 자재였으며, 이러한 건축 재료의 구분은 세속과 성역의 경계를 명확히 하여 민중의 신앙심을 공고히 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여겨진다.[67]
바간의 수많은 사원들은 그 아름다움으로 유명했으며, 13세기에 이곳을 방문한 마르코 폴로는 자신의 견문록에 바간을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 있는 도시’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아난다 사원 등이 있다. 이처럼 바간 왕조는 화려한 불교 문화를 꽃피웠으나, 지나친 사원 건축에 국력을 소모하면서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바간 왕조 초기에는 다양한 문자가 사용되었다. 아노라타 시대의 비문에는 산스크리트어만 사용되었고, 다음 소우루 시대에는 팔리어가 사용되었다. 아라운시두 시대에는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가 함께 사용되었다.[68] 챤지타 왕의 통치 시기에는 몬어 문자가 자주 사용되었는데, 이는 그가 몬족과 관련이 있었음을 시사한다.[68]버마 문자가 비문의 주류가 된 것은 나라파티시두의 통치 시대 이후부터였다. 이 시기부터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몬어의 사용은 점차 줄어들었다.[60]
바간 시대의 버마 문자는 표기가 일정하지 않았고 형태도 불규칙적인 특징을 보였다.[69]1112년에 제작된 먀제디 석비는 중요한 유물이다. 이 비문의 네 면에는 각각 버마어, 몬어, 팔리어, 퓨어로 왕의 공덕이 기록되어 있어, 이집트의 로제타석에 비견되기도 한다.[69]
불교 경전을 바탕으로 한 미얀마 문학은 바간 왕조에서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비문에는 버마 문자로 된 산문도 기록되었으며,[70] 4음절 1행의 운문 형식인 "린가(mya)"가 탄생한 것도 이 시대이다.[70]
6. 4. 예술
바간 왕국 시대에는 악기가 연주되었고, 노래와 춤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71] 당시 사용된 악기로는 북, 심벌즈, 나팔, 뿔피리 등이 있었으며, 연주자는 주로 삼보 노예였지만,[29] 악기 연주를 직업으로 삼는 전문 예능인들도 존재했다. 이들 예능인의 모습은 사찰 내부의 불교 벽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불교 벽화는 사찰 내부의 정해진 위치에 그려졌으며, 주요 주제는 불교 관련 사건뿐만 아니라 새나 식물 무늬, 기하학 무늬 등 다양했다.[72] 특히 왕조 말기 찬시타 온민 사원 내부의 벽화에는 미얀마를 침입한 몽골군과 원나라의 대칸쿠빌라이의 모습이 그려져 있어, 당시 왕조가 처했던 위기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73]
7. 외교
국토를 접하는 크메르 제국과는 빈번히 분쟁을 벌였다. 아노라타 시대부터 지배하에 둔 살윈강 하구 지역을 통해 태국의 북부와 중부 지역과 교역하였다.
스리랑카와는 왕국 남부의 항구 도시를 통해 경제적, 종교적으로 교류했으며, 특히 12세기 말부터는 불교 승려의 상호 파견을 통해 불교 지식 전달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양국 관계가 항상 원만했던 것은 아니어서, 스리랑카의 역사서 『마하밤사』에 따르면 나라파티시투 왕이 스리랑카 상인과 주재관을 축출하고 투옥하거나 추방했으며, 스리랑카 상선에 대한 보급 중단과 코끼리 수출 금지 조치를 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74][75] 이에 대한 보복으로 스리랑카는 바간의 마을을 파괴하고 주민을 납치하여 노예로 삼았다. 이후 승려들의 중재를 통해 양국 관계가 회복되었다고 『마하밤사』는 설명하지만, 미얀마 측 연대기에는 스리랑카와의 이러한 갈등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74]
중국의 역사 기록에는 바간이 '''포감(蒲甘)'''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북송 시대부터 교류가 있었다. 1004년(경덕 원년)에는 스리위자야 왕국과 아랍의 사절과 함께 송나라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제만지』에 남아 있다.[76]1106년(숭녕 5년)에는 다시 조공하였는데, 이때 바간이 이전과 달리 대국으로 성장했음을 인정받아 다른 소국들과 달리 아랍, 베트남 등과 동등한 예우를 받아야 한다는 송나라상서성의 통지가 있었다는 기록이 『제만지』, 『송사』, 『문헌통고』 등에 남아 있다.[77] 그러나 이후 원나라와는 적대 관계로 변하여, 1277년부터 1287년 사이에 네 차례에 걸친 원나라의 침공을 받았고, 결국 1299년에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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