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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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필순은 경기도 용인 출신으로,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여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나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행위를 보인 인물이다. 3·1 운동 가담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연계로 투옥되었으나, 이후 기독교 문화 사업에 참여하고 고베신학교 유학 후 목사가 되었다. 1930년대부터 친일 행보를 보이며 기독교보사 사장, 황민화 운동 참여 등 친일 행적을 보였으며, 광복 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구속되었으나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이후 이승만 지지 활동을 펼쳤으며, 한국 전쟁 중 교회 수호로 신임을 얻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등을 역임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전필순은 경기도 용인 출신으로, 어린 시절 개신교 신앙을 접하고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활동에 참여했다. 옥중 생활을 통해 장기적인 실력 양성과 구국 계몽의 필요성을 절감, 기독교 문화사업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나, 일제강점기 후반 친일파 행적으로 논란이 되었다. 광복 후 반민족행위처벌법으로 구속되기도 했지만, 한국 전쟁 당시 교회를 지킨 공로와 교계의 지지로 재기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는 등 교계 지도자로 활동했다. 1961년 연동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고, 1962년 은퇴했다.
전필순은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의 기타 부문,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종교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2. 생애
2. 1. 초기 생애와 독립운동 (1897년 ~ 1922년)
경기도 용인 출신이다. 1909년부터 개신교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으며, 1914년 세례를 받았다. 당시 용인 지역에는 경성부의 연동교회에서 농촌 전도를 목적으로 파견한 팀이 내려와 있었는데, 전필순은 이들의 영향을 받아 농촌 활동을 함께 하다가 1919년에는 연동교회 조사(助事)로 발탁되었다.
이 무렵 개신교 계열 인물들이 많이 참여한 3·1 운동이 발생하면서 전필순도 박용희의 지도에 따라 가담하였고, 이후 세워진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락을 계속하다가 대동단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3·1 운동의 좌절 이후 독립 운동은 여러 갈래로 발전하게 되는데, 전필순은 옥중에서 장기적인 실력 양성과 구국 계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출옥한 뒤 기독교 문화사업을 중심으로 강연회 등에 참가했다.
이러한 활동이 여의치 않자 1922년부터 4년간 고베신학교에 유학하였다.[1]
2. 2. 종교 활동과 친일 논란 (1922년 ~ 1945년)
1922년부터 4년간 고베신학교에 유학하였으며, 잠시 연동교회 전도사를 거친 뒤 1927년 경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아 묘동교회 담임 목사가 되었다.[1] 1931년 묘동교회에서 사임한 뒤 기독교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장로교와 감리교가 공동 설립한 기독교보사의 기자를 맡았고, 1933년 전필순이 개인 명의로 기독교보사를 인수하여 사장이 되었다.[1] 그러나 기독교보사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윤치호, 양주삼, 정인과 등 교계 인물들의 반발을 겪었다.[1] 이전까지 반일 인사로 분류되던 전필순은 이 무렵부터 차츰 조선총독부와 가까워지면서 친일파로 불리게 되었다.[1]
1941년 다시 연동교회 위임목사를 맡고 경기노회 회장으로서 장로회 총회에서 부의장으로 당선되는 등 교계 지도자로 활동하며 황민화 운동에도 적극 나섰다.[1] 중일 전쟁 기간 동안 지방을 순회하면서 전쟁협력을 권유하였고, 교회 내에 가미다나를 설치할 것과 황도연구회를 설립할 것을 결의했으며, 1943년 친일성이 강한 혁신교단을 조직하고 통리를 맡았으나 교단 내 심한 반발에 부딪혀 한 달 만에 무산되었다.[1]
2. 3. 광복 이후 활동 (1945년 ~ 1977년)
1949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구속되어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개신교 내에서 전필순과 같이 친일 행적이 뚜렷했던 정인과, 정춘수 등은 반민특위에 체포된 뒤 친일 논란 속에 교계에 다시 복귀하지 못했다. 그러나 전필순은 교인들에게 신임을 물은 뒤 '다같이 죄를 범했는데 누굴 돌로 칠 수 있겠느냐'는 논리에 따라 재신임을 받았다.[1]
반민특위에서 풀려난 전필순은 1952년 8.5 정부통령 선거와 1956년 5.15 정부통령 선거 때 이승만-함태영 지지운동 및 이승만-이기붕 지지운동을 앞장서서 전개하였다.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맞서 일어났던 4월 혁명 시기 새문안교회의 청년들이 발표한 성명에는 자유당 정권의 하수인 역할을 했던 전필순 목사를 규탄하는 내용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통합-합동 분열 이전의 예장 시대에 총회장을 지냈을 뿐만 아니라 경기노회장을 5년이나 역임하였다. 1977년 사망하였을 때 언론은 그를 '독립운동가'로 묘사하였다. (1949년 3월 12일자 조선일보 기사 제목은 "친일목사 전필순을 체포"였으며, 1977년 2월 15일자 조선일보 기사 제목은 "독립운동가 전필순 목사 별세"였다.)
특히 한국 전쟁 초기에 피난하지 않고 조선인민군 치하에서 교회를 지킨 일로 신임을 회복해 재기했다. 1955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부회장으로 다시 선임되었고, 1957년에는 총회장을 맡았다. 장로교는 1959년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되는데, 전필순은 전 총회장으로서 통합 측의 중심인물이었다. 1961년 연동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고, 1962년 은퇴했다.
3. 논란과 평가
3. 1. 친일 행적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의 기타 부문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종교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3. 2. 반민특위 조사와 이후 행보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의 기타 부문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종교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4. 사후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의 기타 부문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종교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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