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페루 일본 대사관 인질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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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페루 일본 대사관 인질 사건은 1996년 12월 17일 페루 주재 일본 대사관에서 좌익 게릴라 단체 투팍 아마루 혁명 운동(MRTA)이 아오키 모리히사 대사를 포함한 622명을 인질로 잡고 MRTA 멤버 석방,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 재검토 등을 요구하며 시작되었다. 페루 정부는 국제 적십자 위원회의 중재와 일부 인질 석방에도 불구하고, 127일 만인 1997년 4월 22일 특수부대를 투입하여 인질 구출 작전(차빈 데 우안타르 작전)을 감행, MRTA 대원 14명을 사살하고 인질 1명과 특수부대원 2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후지모리 대통령의 강경한 대처로 국제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MRTA 대원들의 초법적 처형 의혹이 제기되어 논란이 되었으며, 테러 대응과 인권 보호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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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페루 일본 대사관 인질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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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위치 | 리마, 산 이시드로, 페루 |
발생 기간 | 1996년 12월 17일 – 1997년 4월 22일 (127일) |
유형 | 인질극 |
목표 | 페루 주재 일본 대사관 |
관련 분쟁 | 페루 내부 분쟁 |
인명 피해 | |
사망자 | 17명 (인질 1명, 군인 2명, MRTA 무장대원 14명) |
부상자 | 8명 |
주체 및 배경 | |
가해자 | 투팍 아마루 혁명 운동 (MRTA) |
일부 | 페루 내부 분쟁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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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건 발생 배경
1996년 12월 17일, 페루 주재 일본 대사 아오키 모리히사는 천황탄생일 기념 연회를 주최했다. 현지 시각 20시경, 투팍 아마루 혁명 운동(MRTA) 소속 무장 단체 14명이 대사관 근처 빈집 담장을 폭파하고 연회장에 난입했다.[65] 이들은 네스토르 세르파 카르토리니가 이끄는 좌익 게릴라 단체였다.
이들은 아오키 대사를 비롯한 일본 대사관 직원, 페루 정부 요인, 각국 대사, 기업인 등 622명을 인질로 잡았다.[65] 당시 일본 대사관저는 12피트 높이의 벽, 쇠창살, 방탄 유리 등으로 요새화되어 있었다.
MRTA는 애초에 페루 정부 및 군부 요인, 대사관 직원 등 소수 인질을 잡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예상보다 많은 인질을 관리하게 되자 국제 적십자 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노인, 여성, 아이들을 포함한 200명 이상의 인질을 석방했다. 미국인들도 풀려났는데, 이는 미군의 개입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 하지만 페루 정부 및 군 관계자, 일본 대사관 직원 및 일본 기업인들은 여전히 인질로 남았다. 여성들은 모두 풀려났는데, 이는 화장실 감시가 어렵기 때문이며, 주콜롬비아 도미니카 공화국 대사관 인질 사건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으로 리마 증권 거래소는 주식 폭락으로 3시간 일찍 폐장했고, 언론은 페루가 테러에 시달리는 국가로 돌아갔다고 평가했다.[8]
2. 1. MRTA의 요구 사항
MRTA는 체포·구속된 MRTA 멤버 전원 석방, 안전한 탈출 및 인질 동행, 알베르토 후지모리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 전면 재검토, 몸값 지불 등 네 가지 요구를 제시했다.[65] 이들은 페루 정부가 무력 진압에 나설 것에 대비해 대인 지뢰를 설치하는 등 준비를 했다.반군이 제시한 요구 사항은 다음과 같다.
- 페루 전역의 감옥에 수감된 MRTA 구성원 석방 (최근 유죄 판결을 받은 미국 활동가 로리 베렌슨과 세르파의 아내 포함)
- 페루 정부의 신자유주의 자유 시장 개혁 재검토
- 페루의 일본 대외 원조 프로그램 비판. 이 원조가 사회의 좁은 부분에만 혜택을 준다고 주장.[11]
- 페루 감옥의 가혹하고 비인도적인 환경에 항의
하비에르 디에스 칸세코는 인질로 잡힌 직후 풀려난 38명 중 한 명으로, MRTA를 옹호하며 정부에 협상을 통한 해결을 촉구했다. 그는 인질범들이 "18세에서 20세, 아마 21세... 그들은 특수 부대, 특공대 그룹이다. 그들은 살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인 것 같다. 그들은 죽고 싶어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8]
알레한드로 톨레도는 석방된 후 MRTA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구성원들이 공적 생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사면이라고 말했다. 그는 무력으로 인질을 구출하려는 시도는 "미친 짓"일 것이며, 인질범들이 "무장하고"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한 건물 내 방과 옥상에 폭발물이 설치되어 있고, 대전차 무기를 가지고 있으며, 가슴에 달린 끈을 당기면 폭발하는 폭발물 배낭을 메고 있다고 덧붙였다.[8]
독일 신문 ''융에 벨트'' 4월 24일자 인터뷰에서 MRTA 대변인 노르마 벨라스코는 "MRTA 부대의 목표는 대사관 인질을 살해하는 것이 아니었다"며, 페루 감옥에 수감된 450명의 MRTA 수감자 석방 요구를 관철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벨라스코는 후지모리 대통령이 평화적인 해결을 원한다는 "환상은 없었다"고 말하며, "우리는 여러 나라의 국제 여론이 페루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그들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약간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녀는 페루의 경제 상황을 언급하며 "인구의 광대한 부분이 여전히 빈곤, 기아, 적절한 의료 서비스 부족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이러한 문제들은 심화되고 있습니다. 대사 관저에서 벌어진 위기의 종결은 후지모리가 전적으로 군사적 수단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2. 2. 인질 석방 과정
투팍 아마루 해방운동(MRTA)은 인질 다수를 석방했지만, 페루 정부 및 군부 관계자, 일본 대사관 직원, 일본 기업인 등은 계속 억류했다.[66]MRTA는 당초 페루 정부·군의 요인과 일본 대사관 직원 등 소수의 인질 확보를 목표로 했다. 그러나 600명 이상으로 많은 인질을 확보하게 되자, 국제 적십자 위원회 대표의 요청에 따라 후지모리 대통령의 어머니를 포함한 여성과 노인(고령자), 어린이 등 200명 이상의 인질을 우선 석방했고,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인질을 석방했다.[65]
미국인 인질도 조기 석방되었는데, 이는 MRTA가 미국인을 특정 목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자국민 보호를 이유로 특수 부대 델타 포스를 현지에 파견하여 구출 작전을 전개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그러나 원래 인질로 확보하려고 했던 페루 정부 요인 및 군인, 그리고 다수의 일본 대사관 직원과 일본 기업의 주재원은 인질로 대사 공저에 억류되었다.[66] 인질은 남성뿐이었고, 여성은 전원 석방되었다. 이는 화장실을 남녀별로 나눌 필요가 있었고, 감시에 손이 많이 간다는 이유였다. MRTA는 16년 전에 발생한 주 콜롬비아 도미니카 공화국 대사관 점거 사건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3. 협상 과정과 군사 작전
알베르토 후지모리 페루 대통령과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 국가정보부장은 사건 발생 직후 무력 진압을 검토했다. 그러나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총리의 지시를 받고 페루에 온 이케다 유키히코 외무상이 평화적 해결을 우선할 것을 주장하여 무력 진압은 보류되었다.[12]
하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교착 상태가 이어지자, 후지모리 대통령은 1997년 1월 하순 다시 무력 진압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후지모리는 일본 대사관과 똑같은 구조와 자재를 사용한 모형 건축물을 만들어 특수부대에게 돌입 훈련을 시켰다.[5][6][7]
후지모리 대통령은 앤서니 빈센트 캐나다 대사, 후안 루이스 시프리아니 대주교, 적십자 관계자 등으로 협상팀을 구성하고, 피델 카스트로 쿠바 지도자와도 대화를 나누며 MRTA 게릴라들의 쿠바 정치적 망명 가능성을 모색했다. 그러나 1월 17일, MRTA와의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13]
2월 초, 페루 군대는 대사관 경비를 맡으면서 큰 소리로 군가를 연주하고 반군에게 도발적인 행동을 했고, 이에 반군은 총격을 가했다.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총리는 인질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하지 말 것을 페루 정부에 공개적으로 촉구했다. 일본 지도자들은 인질의 안전한 석방을 보장하기 위해 후지모리 대통령에게 MRTA와 어떤 형태로든 협상된 해결책을 마련하도록 압력을 가했다.[12]
3. 1. 터널 굴착 및 도청
페루 정부는 1월부터 대사관 진입을 위해 비밀리에 터널을 뚫기 시작했다. 터널 굴착 소음을 은폐하기 위해 군가를 크게 틀어놓는 등의 위장 작전을 펼쳤다.[65] 터널의 존재는 언론에 의해 보도되어 MRTA도 알게 되었지만, 인질 탈출용으로 오인하여 인질들을 2층으로 옮기는 조치만 취했다.[65]2월 11일, 페루 정부와 MRTA 간의 첫 교섭이 시작되었다. 페루 정부 대표로 도밍고 발레르모 교육장관이 나섰고, 후안 루이스 시프리아니 대주교 등이 중재역을 맡았다. 시프리아니 대주교는 인질들에게 의료품과 식료품을 제공하며 신뢰를 얻었고, 페루 정부는 이를 이용해 커피메이커, 성경 등에 도청 장치를 설치했다.[65] 루이스 지암피에트리 (후에 페루 부통령으로 선출)에게는 소형 양방향 무선 통신기가 설치된 기타를 제공하여 군사 작전 10분 전 인질들에게 경고하고 MRTA 대원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라는 암호화된 지침을 전달했다.
정교한 소형 마이크와 비디오 카메라도 책, 물병, 테이블 게임 등에 숨겨져 대사관 안으로 반입되었다. 지암피에트리와 다른 군 장교들은 이 장치들을 집 주변의 안전한 장소에 배치하는 임무를 맡았다. 군 계획자들은 이러한 첨단 장치로 MRTA 지휘관들을 도청하여 그들의 경계 태세를 파악했다.
3. 2. 쿠바 망명안
페루 정부는 수감 중인 MRTA 멤버들을 쿠바로 추방하는 방안을 검토하였다.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도 조건부 수용 의사를 밝혔으나,[65] MRTA가 이를 거부하면서 평화적 해결은 무산되었다.[67] 페루 정부는 도청을 통해 MRTA 내부에서 쿠바 망명안에 대한 논의를 감청하고 있었다.후지모리 대통령은 앤서니 빈센트 캐나다 대사, 후안 루이스 시프리아니 대주교, 적십자 관계자 등으로 협상팀을 구성하고,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도 대화를 나누며, 언론에서는 MRTA 게릴라들의 쿠바 정치적 망명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1월 17일, MRTA와의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2월 초, 페루 군대가 대사관 경비를 맡으면서 군가를 연주하고 도발적인 행동을 하자, 반군은 총격을 가했다. 이에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내각총리대신은 페루 정부에 인질의 안전을 촉구했다. 2월 10일, 후지모리 대통령은 런던에서 "MRTA 그룹에게 망명을 허용할 국가를 찾는 것"이 방문 목적이라고 발표했지만, 이는 게릴라가 아닌 테러리스트라는 이전 입장과 모순된다는 지적을 받았다.[13]
4. 차빈 데 우안타르 작전 (인질 구출 작전)
1997년 4월 22일 페루 해군 특수 작전 부대(FOES)를 중심으로 한 군·경찰 특수 부대가 개시한 작전이다. 작전명은 세계 유산인 차빈 데 우안타르에서 유래했다. 이 작전은 하시모토 류타로에게 사전에 통보되지 않았다.[16]
알베르토 후지모리는 작전 준비를 위해 대사관저의 축척 모형을 만들었으며, 여기에는 특공대가 사용한 터널이 포함되어 있었다.[16] 페루 해군 제독 안토니오 이바르세나는 인질들에게 도청 장치를 배포했고, 루이스 지암피에트리에게는 소형 무전기를 설치한 기타를 주어 작전 10분 전 경고를 전달했다. 인질들은 밝은 색 옷을 입어 반군과 구별되었다.
3월에 MRTA는 터널 굴착 소리를 감지하고 정부와의 협상을 중단했다. 페루 신문들은 경찰이 건물 아래에 터널을 파고 있다고 보도했고, 경찰은 확성기로 큰 음악을 틀어 소리를 은폐하려 했다.
2월, 페루 신문 ''라 레푸블리카''는 미국 군대의 직접적인 참여가 포함된 정부의 비밀 "개입 계획"을 보도했다. 뉴욕 타임스는 "공격에 대한 미국의 참여는 결정적이다. 계획에 따르면 특공대는 페루 육군 특공대 학교와 미국 남부 사령부에서 올 것이다."라고 보도했다.[14]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캐나다 대사 앤서니 빈센트는 후지모리가 군사 공격을 선택했을 때 "양측이 합의에 근접했다"고 믿었다.[15]
4. 1. 작전 경과
사건 발생 127일째인 4월 22일, 페루 해군 특수작전부대를 중심으로 군경 특수부대가 대사관저에 돌입하면서 구출 작전이 시작되었다. 1월부터 공사가 이루어졌던 터널을 활용해 대사관에 진입했다. 작전명은 챠빈 데 완타르(Chavín de Huántar)였는데, 이는 고대에 존재했던 대규모 지하 통로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작전은 일본 정부에는 사전에 고지되지 않았는데, 평화적 해결에만 집착하던 일본 정부의 반대를 우려했기 때문이었다.[16]작전 당시 MRTA 조직원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건물 1층에서 축구를 즐기고 있었다. 인질로 잡혀 있던 페루군 장교가 비밀리에 반입된 무선기를 통해 사전에 정보를 알려주었고, MRTA 조직원이 방심한 틈을 노린 것이었다. 해당 장교는 이후 인질들에게 2층에 집결하도록 유도했지만, 구출 작전에 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다.
3시 23분, 구출 작전이 시작되자 특수부대는 터널을 통과해 1층 바닥을 폭파하여 대사관에 진입했다. 방심하고 있던 MRTA 조직원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구출 작전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2층에서 탈출을 시도하다가 떨어진 사람, 총상을 입은 사람도 나왔으며, 페루 대법관 한 명이 사망하고 특수부대원 두 명이 순직하는 피해도 있었지만, 나머지 인질들을 모두 구출해 내면서 작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MRTA 조직원은 전원 사살되었다.[17]
대사관 근처에는 세계 각국에서 파견된 기자와 카메라맨이 있었고, 이들에 의해 전세계로 생중계되었다. 특수부대의 돌입부터 인질 구출, 대사관에 게양되어 있던 MRTA의 깃발을 특수부대 병사가 처리하는 장면까지 모두 방송되었다.
습격 준비를 위해 페루 해군 제독이자 특수 작전 부대 전 사령관인 안토니오 이바르세나는 수백 개의 도청 장치를 인질들에게 배포했다. 그중 하나는 인질 루이스 지암피에트리 (나중에 2006~2011년 임기 동안 페루 부통령으로 선출)에게 준 그의 개인 기타였으며, 안토니오 이바르세나는 소형 양방향 무선 통신기를 설치하고 군사 작전이 시작되기 10분 전에 인질들에게 경고하고 MRTA 대원들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지시하는 암호화된 지침을 전달했다.
밝은 색 옷이 조직적으로 인질들에게 운반되어, 계획된 습격 동안 어두운 옷을 입은 반군과 쉽게 구별할 수 있도록 했다. 세르파 자신도 이 프로젝트의 일부에 의도치 않게 도움을 주었는데, 터널이 파지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게 하는 소리를 듣고 모든 인질들에게 2층에 배치하라고 명령했다.
또한, 정교한 소형 마이크와 비디오 카메라가 책, 물병, 테이블 게임에 숨겨져 거주지로 밀반입되었다. 지암피에트리와 인질들 중 다른 군 장교들은 이 장치들을 집 주변의 안전한 장소에 배치하는 책임을 맡았다. 이러한 첨단 장치의 도움으로 MRTA 지휘관들을 도청한 군 계획자들은 반군들이 그들의 경계를 신중하게 조직했으며, 특히 밤 시간 동안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는 것을 관찰했다. 그러나 매일 오후 초, 네 명의 지도자를 포함한 MRTA 대원 8명이 약 한 시간 동안 실내 축구를 했다.
푸히모리는 나중에 구출 작전을 준비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건물의 축척 모형을 공개했으며, 여기에는 특공대가 건물로 들어가는 데 사용한 인접한 집에서 연결된 터널이 포함되었다.[16]
1997년 4월 22일, 인질극이 시작된 지 4개월이 넘은 시점에서, 140명의 페루 특공대로 구성된 팀은 비밀리에 임시로 조직되어 '차빈 데 우안타르'(지하 통로로 유명한 페루 고고학 유적지의 이름을 따서)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관저를 급습하는 극적인 작전을 감행했다. 오후 3시 23분, 차빈 데 우안타르 작전이 시작되었다.
세 개의 폭발물이 1층의 세 개의 다른 방에서 거의 동시에 폭발했다. 첫 번째 폭발은 축구 경기가 진행되던 방 한가운데에 발생하여 인질범 3명이 즉사했다. 경기에 참여한 두 명의 남자와 옆에서 지켜보던 여성 1명이었다. 그 폭발과 다른 두 번의 폭발로 생긴 구멍을 통해 30명의 특공대가 건물로 돌입하여 생존한 MRTA 조직원들이 2층으로 도망치기 전에 저지하려 했다.
폭발과 동시에 다른 두 가지 움직임이 있었다. 첫 번째로, 20명의 특공대가 2층으로 가는 주요 계단이 있는 대기실에 들어가기 위해 정문으로 직접 공격을 시작했다. 들어가는 길에 그들은 정문을 지키고 있던 다른 두 명의 여성 MRTA 조직원을 발견했다. 문으로 돌입하는 특공대의 첫 번째 부대 뒤에는 사다리를 들고 온 또 다른 병사 그룹이 있었고, 그들은 건물의 뒷벽에 사다리를 설치했다.
조율된 공격의 마지막 단계에서 또 다른 특공대 그룹이 관저의 뒷마당에 도달한 두 개의 터널에서 나타났다. 이 병사들은 그들을 위해 설치된 사다리를 빠르게 기어올랐다. 그들의 임무는 인질들이 대피할 2층의 수류탄 방어문을 폭파하고, MRTA 조직원들이 인질을 처형할 시간을 갖기 전에 그들을 죽이기 위해 지붕에 두 개의 구멍을 만드는 것이었다.
결국, MRTA 게릴라 14명, 인질 1명(대법원 멤버인 카를로스 기우스티 아쿠냐 박사, 기존 심장 건강 문제로 인해), 그리고 두 명의 군인(후안 발레르 산도발 대령과 라울 히메네스 차베스 대위)이 공격으로 사망했다.
미국 국방정보국 (DIA)에 따르면, MRTA 조직원 롤리 로하스는 인질과 섞여 관저에서 걸어 나가려다 발각되었다. 한 특공대가 그를 발견하고 집 뒤로 데려가, 로하스의 머리를 날려버리는 일제 사격으로 처형했다.[17] DIA 전문에 따르면 특공대는 로하스의 머리에 단 한 발만 쏘려 했으나, 여러 발의 총알이 발사되는 실수로 인해 특공대는 로하스의 시신을 급습으로 사망한 세르파의 시신 아래 부분적으로 숨겨야 했다고 한다. 또한 전문은 또 다른 (여성) MRTA 조직원이 급습 이후 처형되었다고 전했다.
4. 2. 피해 상황
사건 발생 127일째인 4월 22일, 페루 해군 특수작전부대를 중심으로 군경특수부대가 대사관저에 돌입하면서 인질 구출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 작전으로 인질 1명(페루 대법관 카를로스 기우스티 아쿠냐)과 특수부대원 2명(후안 발레르 산도발 대령과 라울 히메네스 차베스 대위)이 사망하고, MRTA 조직원 14명은 전원 사살되었다.[16]구분 | 사망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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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질 | 카를로스 기우스티 아쿠냐 (페루 대법관) |
특수부대원 | 후안 발레르 산도발 대령, 라울 히메네스 차베스 대위 |
MRTA 조직원 | 14명 전원 |
미국 국방정보국(DIA)에 따르면, MRTA 조직원 롤리 로하스는 인질과 섞여 나가려다 발각되어 처형당했다.[17] 또한, 다른 여성 MRTA 조직원 1명도 급습 이후 처형되었다는 보고가 있다.
5. 사건의 여파
사건 이후 주페루 일본 대사관은 새 건물을 지어 이전했는데, 담장을 이중으로 두르고 네 개의 감시탑을 설치했으며 방탄 게이트를 설치하는 등 보안을 강화했다. 사건 당시와 같은 연회는 잘 개최하지 않게 되었다. 옛 대사관은 철거되어 빈터로 남아 있으며, 담장에는 당시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구출 작전을 위해 만들었던 모형 건축물은 "차빈 데 완타르 박물관"으로, 인질 사건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순직한 특수부대원들에게는 일본에서 의연금을 모아 전달했다. 부상으로 휠체어를 타게 된 아오키 대사도 묘소를 찾아 명복을 빌었으며, 이후 페루를 방문하는 일본 국무대신은 이들의 묘소를 방문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은 인질 구출 성공으로 국제적인 찬사를 받았으나, 투항한 MRTA 조직원 처형 사실이 드러나면서 논란이 되었다. MRTA는 이 사건으로 주요 멤버 대부분을 잃고 국내외 지원도 끊겨 사실상 궤멸되었다.[73] 2007년에는 지도자 빅토르 포라이가 무력 혁명 노선 패배를 인정하고 무투 노선 포기를 표명했다.
이 사건은 인질범이 인질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스톡홀름 증후군의 반대 현상인 리마 증후군이라는 심리학 용어를 탄생시켰다.
5. 1. 페루 국내외 반응
후지모리 대통령은 단호한 결정을 통해 인질들을 구출하는 데 성공하면서 세계 각국의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훗날 투항했던 MRTA 멤버들도 처형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페루 검찰에 의해 기소되었다.[21] MRTA는 페루 국내외에서 비난을 받았고 주요 멤버가 피살되었기에 결국 조직은 사실상 붕괴 상태에 빠졌다.일본 대사관저 점거는 MRTA의 가장 주목할 만한 작전이었으며, 이 공격으로 페루와 MRTA는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5][6][7] MRTA의 공격 소식에 리마 증권 거래소는 국내 주식 폭락으로 3시간 일찍 폐장했고, 한 신문 정치 칼럼니스트는 "최소 4년은 후퇴했다. 우리는 테러에 시달리는 국가로 돌아갔다."라고 논평했다. 이 소식은 후지모리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 속에 전해졌는데, 그는 이전까지 테러 활동이 대폭 줄어든 후 국가에 평화를 회복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었다.[8]
1996년 12월 22일, 알베르토 후지모리 페루 대통령은 인질극에 대한 첫 공식 발표를 통해 공격자들을 비난하며, MRTA의 공격을 "혐오스러운" 행위로 규정하고 모든 요구를 거부했다. 그는 무력 구조 시도를 배제하지 않았지만, 평화로운 해결책을 모색할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8] 몇 달 동안 반군은 여성 인질과 남성 인질 72명을 제외한 모든 인질을 석방했다.
평화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후지모리 대통령은 앤서니 빈센트 캐나다 대사, 후안 루이스 시프리아니 대주교, 적십자 관계자가 포함된 협상팀을 임명했다. 후지모리 대통령은 피델 카스트로 쿠바 지도자와도 대화를 나눴으며, 언론에서는 MRTA 게릴라들이 망명을 위해 쿠바로 갈 수 있도록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추측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97년 1월 17일 MRTA와의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졌다는 보도가 나왔다.[12]
1997년 2월 초, 페루 군대가 대사관 경비를 맡았고, 군가를 연주하고 반군에게 도발적인 제스처를 취해 총격을 유발했다. 이에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내각총리대신은 페루에 인질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하지 말 것을 공개적으로 촉구했다. 일본 지도자들은 후지모리 대통령에게 MRTA와 협상된 해결책을 마련하도록 압력을 가했다.[12]
후지모리 대통령은 이후 캐나다에서 하시모토 총리와 만났고, 두 정상은 인질 상황을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 의견 일치를 보았지만, 세부 사항은 거의 밝히지 않았다.[12] 1997년 2월 10일, 후지모리 대통령은 런던을 방문하여 "MRTA 그룹에게 망명을 허용할 국가를 찾는 것"이 목적이라고 발표했다. 2월 11일, 후지모리 대통령은 "페루 감옥은 테러리스트를 위해 국제 기준에 따라 건설되었다"고 선언했다.[13]
군사 작전 이후, 후지모리는 특공대에게 "MRTA 대원을 생포하지 말라"고 명령했다는 보고서가 나왔다.[18] 특공대가 MRTA 깃발을 찢어내자, 후지모리는 전직 인질들과 함께 페루 국가를 불렀다.[19] 페루 TV는 후지모리가 사망한 게릴라들 사이를 활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20] 군사적 승리는 정치적 승리로 홍보되었고, 그의 지지율은 거의 70%에 달해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았다.[21] 역사학자 루이스 조차모비츠는 "페루 국민들은 그것을 좋아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시인 안토니오 시스네로스는 그것이 페루 국민에게 "약간의 존엄성"을 주었다고 말했다.[21] 후지모리 또한 이 작전에 대한 개인적인 공로를 인정했다.[22]
다른 정부들은 일반적으로 군사 작전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보였다. 콜롬비아의 에르네스토 삼페르, 볼리비아의 곤살로 산체스 데 로사다, 베네수엘라의 라파엘 칼데라 등 여러 안데스 국가 대통령들은 알베르토 후지모리의 결정을 지지했다.[23] 이는 제9차 Consejo Presidencial Andino|안데스 대통령 회의es에서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몇 가지 예외도 있었다.
- 1997년 4월 25일, 칠레 산티아고에 있는 페루 대사관에서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24]
- 같은 날, 칠레 외무부는 "몇몇 생명이 희생된 것은 유감이지만, 다른 결과는 있을 수 없었다"라고 발표했다.[25]
- 4월 23일 멕시코시티에서는 페루 대사관에 모여 항의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건물에 붉은 페인트와 토마토를 던지며 "후지모리 살인자"라고 외쳤다.
- 4월 28일, ''뉴욕 타임스''는 후지모리, 몬테시노스, 그리고 군 수장 니콜라스 에르모자 리오스 장군을 "페루의 지배 트로이카"라고 묘사했다.[26]
사건 발생 직후, 일본 외무성과 경찰청에서 지원 부대가 현지로 급파되었으며, 많은 신문과 텔레비전 취재진, 저널리스트들이 리마로 향했고, 일본의 텔레비전 방송은 이 사건 보도 일색이 되었다.
5. 2. 한국의 입장과 반응
1996년 12월 17일부터 1997년 4월 22일까지 이어진 주페루 일본 대사관 인질 사건과 관련하여, 대한민국 정부는 주 페루 대한민국 대사였던 이원영 대사를 비롯한 한국인 인질들의 안전을 위해 페루 정부와 긴밀히 협력하였다.당시 한국 언론들은 이 사건의 진행 과정을 상세히 보도하였으며, 특히 1997년 4월 22일 페루 특공대의 인질 구출 작전 성공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신속하게 보도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 사건을 통해 국제 테러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재외국민 보호를 위한 대책 마련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5. 3. 초법적 처형 논란
구출 작전 이후, 항복한 MRTA 조직원들을 페루 군경이 초법적으로 처형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는 국제적인 인권 문제로 비화되었으며, 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을 비롯한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 처리 요구가 이어졌다.[22]사건의 공식 발표에 대한 의문은 곧 제기되기 시작했다. 구출 작전 당시 발생한 일들의 일부는 후지모리 정부가 몰락할 때까지 비밀로 유지되었다. 구출 작전 직후 항복한 MRTA 대원들이 초법적으로 처형되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 전 일본 대사관 1등 서기관으로 2000년에 이 사건에 대한 책을 출판한 일본인 인질 오구라 히데타카는 특공대가 건물을 습격한 직후 정원에서 반군 에두아르도 크루스("티토")가 묶여 있는 것을 보았다고 진술했다. 크루스는 살아있는 상태로 헤수스 사무디오 알리아가 대령에게 넘겨졌지만, 나중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격 중에 사망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 전 농업부 장관 로돌포 무난테는 석방된 지 8시간 후 인터뷰에서 한 반군이 수류탄을 장착한 조끼를 벗고 항복하기 전에 "항복한다"라고 외치는 것을 들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후 무난테는 이러한 발언을 부인했다.[57]
- 2001년, 당시 페루 대테러 경찰청장이었던 막시모 리베라는 작전 이후 다른 인질들로부터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21]
언론 보도는 또한 외교적 치외법권 규칙에 따라 주권 일본 영토와 같은 것으로 간주되는 곳에서 저질러진 포로 취급에 대한 국제 관행 위반 가능성에 대해 논의했고, 기소될 경우 후지모리가 일본에서 기소될 수 있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외교 관계에 관한 비엔나 협약에 따르면 대사관과 거주지는 치외법권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불가침성을 누린다(수색 면제).[58]
2001년 1월 2일, 페루의 인권 단체인 APRODEH는 알베르토 후지모리,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 니콜라스 데 바리 에르모사 리오스, 훌리오 살라자르 몬로이 및 에두아르도 니콜라스 크루스 산체스 및 기타 두 명의 MRTA(투팍 아마루 혁명운동) 대원의 자격 있는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모든 사람들을 대신하여 형사 고발을 제기했다.
2007년, 페루의 전 보안 국장인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 전 국군 참모총장, 그리고 퇴역 대령 로베르토 우아만은 MRTA 인질범에 대한 초법적 살인을 지시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유죄가 확정되면 몬테시노스와 두 명의 전직 군 장교는 최대 20년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62] 몬테시노스, 에르모사, 우아만은 2012년, 살인 사건과 관련된 지휘 체계가 입증되지 않았다는 법원의 판결에 따라 해당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63]
아래는 사건 이후 연도별 주요 진행 상황이다.
연도 | 사건 내용 |
---|---|
2000년 (헤이세이 12년) | 11월 19일 - 후지모리 대통령이 페루 국내의 반정부 운동으로 사임. 일본으로 사실상 망명. |
2001년 (헤이세이 13년) | 3월 - MRTA 멤버의 묘를 발굴하여 재검시. |
2002년 (헤이세이 14년) | 5월 - 특수부대 지휘관 등 12명에게 살인 혐의로 체포 영장. 13일, 그중 1명을 구속. |
2003년 (헤이세이 15년) | 3월 - 페루 정부의 요청을 받은 국제형사경찰기구가 후지모리 전 대통령을 인도 범죄 혐의로 국제 수배. 일본 정부는 신병 인도를 거부. |
2003년 (헤이세이 15년) | 5월 27일 - 페루 정부의 촉탁을 받은 도쿄 지방 법원이 MRTA 멤버의 생존 중 구금을 목격했던 전 인질 (당시 일본 대사관 1등 서기관)을 증인 심문. |
6. 사건의 의의와 교훈
주페루 일본 대사관 인질 사건은 국제 테러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되었다. 이 사건은 테러 대응에 있어서 강경 대응과 협상 사이의 딜레마를 보여주며, 인권 보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한국 사회에는 재외국민 보호 시스템 강화와 국제 테러 공조의 필요성을 환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6. 1. 리마 증후군
인질들은 지루함을 달래고 서로 간의 의사소통을 촉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일본어와 스페인어 상호 레슨을 하거나, 트럼프, 오셀로, 마작 등의 게임을 즐기며 교류했다. 또한, MRTA 멤버가 참여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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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TAと共闘関係にあった[[コロンビア]]の[[4月19日運動]] (M-19) は[[1990年]]に武装放棄と引き換えに合法政党化されており、MRTAもM-19のように合法化されることを狙っていたともいわれ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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