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쿠고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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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쿠고국은 7세기 말 쓰쿠시국이 분할되어 지쿠젠국과 함께 성립된 일본의 옛 행정 구역이다. 전국 시대에는 오토모 씨가 슈고를 맡았으나, 실제로는 지쿠고 15성으로 불리는 국인 영주들이 지배했다. 에도 시대에는 구루메 번과 야나가와 번으로 나뉘었으며, 메이지 시대에 폐번치현을 거쳐 후쿠오카현에 통합되었다. 지쿠고 국은 고대부터 아시아 대륙과의 교류가 활발했고, 국부와 국분사 등 주요 시설이 위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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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쓰쿠시 국(筑紫国)이 7세기 말경 지쿠젠 국과 함께 분할되면서 성립했다.[6]
전국 시대에는 오토모 씨가 명목상 수호였으나, 실제로는 '지쿠고 15성'이라 불리는 지역 국인 영주들이 할거하며 지역을 나누어 지배했다.
에도 시대에는 북부의 아리마 씨가 다스리는 구루메 번, 남부의 다치바나 씨가 다스리는 야나가와 번 및 미이케 번으로 나뉘어 통치되었다.
2. 1. 고대
고대 쓰쿠시(筑紫) 국은 야요이 시대의 주요 중심지 중 하나였으며, 아시아 대륙과 활발히 교류했다. 1세기와 2세기 후한(後漢) 시대의 중국 왕조 공식 기록인 이십사사(二十四史), 3세기의 ''삼국지(三國志)'', 그리고 6세기의 ''수서(隋書)''와 같은 중국 역사서에서는 이곳을 3세기 야마타이(邪馬台) 국의 위치였을 가능성이 있는 지역으로 언급하기도 한다.고훈 시대에는 이 지역에 많은 고분이 만들어졌고, "쓰쿠시의 국조"라는 칭호를 가진 강력한 토착 세력이 지배했다. 일본 측 기록에 등장하는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이른바 '한반도 정벌' 이야기는 이곳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으나, 이는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후대의 기록에 나타나는 전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이곳은 중국뿐 아니라 신라, 백제 등 한반도에서 건너온 많은 도래인들이 정착한 지역이기도 했다.
527년에는 야마토 정권의 지배에 반대하고 신라와 연계하려던 쓰쿠시 국조 이와이가 이와이(磐井)의 난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531년에는 북위(北魏)에서 온 승려 전승(禪勝)이 수행도(修験道)를 창시했다는 기록도 있다.
663년,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파병되었던 야마토 수군이 백촌강 전투에서 신라와 당 연합군에게 크게 패배하자, 야마토 정권은 방어 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이곳에 군사 및 행정 중심지인 다자이후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대화 개혁(大化改新)과 율령(律令) 제도가 정비되면서, 7세기 말경 쓰쿠시 국은 지쿠젠(筑前) 국과 지쿠고(筑後) 국으로 나뉘었다.[6]
지쿠고 국의 국부(지방 행정 관청)는 현재의 구루메(久留米) 시 일대에 위치했으며, 그 유적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같은 지역에 있는 지쿠고 국분사(筑後国分寺) 유적 역시 국가 사적이다. 지쿠고 국의 으뜸 신사는 구루메 시에 있는 고라 신사(香椎宮)이며, 이 신사는 지쿠고 국의 모든 신을 모시는 소자 신사(総社)의 역할도 겸했다.[2]
2. 2. 중세
'''1359년''' (엔분 4년)에는 지쿠고가와 전투가 벌어져 아시카가 측이 군사적으로 승리했다.[3] '''1361년''' (엔분 6년)에는 기쿠치 다케미쓰(菊池武光)가 이끄는 조정군이 다자이후(太宰府)를 함락시켰다.[4]센고쿠 시대(戦国時代)에는 오토모 씨(大友氏)가 지쿠고국의 슈고(守護)였으나, 실제로는 지쿠고 15성(筑後十五城)이라 불리는 다이묘급 국인 영주들이 지역을 나누어 지배했다. 지쿠고 남부(하치쿠고 지역)는 가마치 씨(蒲池氏), 다지리 씨(田尻氏), 구로키 씨(黒木氏) 등이, 지쿠고 북부(가미치쿠고 지역)는 호시노 씨(星野氏), 구사노 씨(草野氏), 몬주쇼 씨(問註所氏) 등의 대신(大身)들이 할거하는 구도였다.
2. 3. 근세
에도 시대의 지쿠고국은 주로 북부의 아리마 씨가 다스리는 구루메번과 남부의 다치바나 씨가 다스리는 야나가와번의 지배하에 있었다.
보신 전쟁과 메이지 유신 이후 행정 구역에 변화가 있었다. 옛 막부 영토는 1868년 10월 13일 히타현에 편입되었으나, 2주 후인 10월 28일 나가사키부 관할로 변경되었다.[8] 1868년 11월 11일에는 무쓰국의 시모테도번이 지쿠고 내 미이케군으로 이전하여 미이케번을 다시 세웠다.[7]
1871년 12월 25일 폐번치현이 시행되면서 구루메번, 야나가와번, 미이케번은 각각 구루메현, 야나가와현, 미이케현이 되었다. 같은 날 제1차 부현 통합으로 이들 현은 모두 '''미즈마현'''으로 통합되었다. 이후 1876년 8월 21일 제2차 부현 통합에 따라 미즈마현은 '''후쿠오카현'''에 합병되어 현재의 행정 구역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초기 메이지 시대의 공식 자료인 『구고구령취조장(旧高旧領取調帳)』에 따르면, 당시 지쿠고국에는 총 고쿠다카 536,851 고쿠에 해당하는 789개의 마을이 있었다. 각 군(郡)의 정보는 다음과 같다.
2. 4. 근대
에도 시대 말기 지쿠고국은 북부의 아리마 씨가 다스리는 구루메 번과 남부의 다치바나 씨가 다스리는 야나가와 번으로 크게 나뉘어 있었다. 다치바나 씨가 다스리는 작은 미이케 번도 존재했다.
보신 전쟁과 메이지 유신 이후 행정 구역에 다음과 같은 변화가 있었다.
- 1868년 10월 13일: 옛 막부 직할령(덴료)이 '''히타현''' 관할이 되었다.[8]
- 1868년 10월 28일: 히타현 관할 지역이 '''나가사키부''' 관할로 변경되었다.[8]
- 1868년 11월 11일: 무쓰국의 시모테도 번이 지쿠고국 미이케군으로 이전하여 '''미이케 번'''을 다시 세웠다.[7]
- 1871년 12월 25일: 폐번치현으로 구루메 번, 야나가와 번, 미이케 번이 각각 '''구루메현''', '''야나가와현''', '''미이케현'''이 되었다. 같은 날 제1차 부현 통합으로 이들 현은 '''미즈마현'''(三潴県)으로 통합되었다.
- 1876년 8월 21일: 제2차 부현 통합으로 미즈마현이 '''후쿠오카현'''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른다.
메이지 시대 초기의 공식 정부 조사인 旧高旧領取調帳|구고구령취조장일본어에 따르면, 당시 지쿠고국은 789개 마을에 총 고쿠다카 536,851 고쿠에 달했다. 각 군의 상황은 아래 표와 같다.
메이지 유신 직전의 영역은 현재의 후쿠오카현 치쿠고 지방에 해당하며, 구체적인 지역은 아래와 같다.
지쿠고국(筑後国)은 역사적으로 여러 개의 군(郡)으로 구성되어 행정 구역이 나뉘어 있었다. 연희식(延喜式)에는 총 10개의 군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지쿠고국의 기본적인 행정 단위가 되었다.
3. 영역
4. 행정 구역
에도 시대에 들어서 지쿠고국은 주로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한 구루메 번(久留米藩)과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한 야나가와 번(柳河藩)으로 크게 양분되어 통치되었다. 이 외에도 작은 규모의 번이나 덴료(天領, 막부 직할령)가 존재하기도 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적인 행정 구역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지쿠고국의 행정 체계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1871년 폐번치현(廃藩置県)으로 번이 폐지되고 현(県)이 설치되었으며, 이후 몇 차례의 부현 통합 과정을 거쳤다. 처음에는 구루메현(久留米県), 야나가와현(柳河県), 미이케현(三池県)으로 나뉘었다가 곧바로 미즈마현(三潴県)으로 통합되었고, 최종적으로 1876년 후쿠오카현(福岡県)에 편입되어 현재의 행정 구역 체계의 일부가 되었다.
4. 1. 군(郡)
연희식(延喜式)에 기록된 지쿠고국의 군(郡)은 다음과 같다. 원래 야메군( 陽咩郡일본어 / 八女郡일본어 )이 있었으나, 연희식 편찬 이전에 가후즈마군( 上妻郡일본어 )과 시모쓰마군( 下妻郡일본어 )으로 분할되어 총 10개 군이 기록되었다.4. 2. 에도 시대의 번(藩)
에도 시대 지쿠고국(筑後国)은 주로 북부의 구루메 번(久留米藩)과 남부의 야나가와 번(柳河藩)으로 나뉘어 통치되었다. 구루메 번은 아리마 씨(有馬氏)가, 야나가와 번은 다치바나 씨(立花氏)가 다스렸다.
=== 바쿠마쓰 시대의 번 ===
보신 전쟁과 메이지 유신 이후, 옛 막부 직할령(덴료)은 1868년 10월 13일(게이오 4년 8월 28일) 히타현(日田県)에 편입되었다가[8], 같은 해 10월 28일(게이오 4년 9월 13일) 나가사키부(長崎府)로 이관되었다.[8] 1868년 11월 11일(메이지 원년 9월 27일)에는 무쓰국의 시모테도 번(下手渡藩)이 지쿠고국 미이케군(三池郡)으로 번청(藩庁)을 이전하여 미이케 번(三池藩)이 되었다.[7] 1871년 12월 25일(메이지 4년 11월 14일) 폐번치현이 단행되면서 구루메 번, 야나가와 번, 미이케 번은 각각 구루메현(久留米県), 야나가와현(柳河県), 미이케현(三池県)이 되었다. 같은 날 제1차 부현 통합으로 이들 현은 모두 미즈마현(三潴県)으로 통합되었다. 1876년(메이지 9년) 8월 21일 제2차 부현 통합에 따라 미즈마현은 후쿠오카현에 합병되어 현재에 이른다.
=== 메이지 시대 초기 군(郡) ===
메이지 시대 초기의 구고구령취조장(旧高旧領取調帳)에 따르면, 지쿠고국에는 789개 마을과 총 536,851 고쿠의 고쿠다카가 있었다. 당시 지쿠고국의 군(郡)별 상황은 다음과 같다.
5. 주요 시설
5. 1. 국부(国府)
지쿠고 국의 국부(國府)는 현재 구루메시 일부에 위치했으며, 그 유적은 지쿠고 국분사 유적과 함께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2] 지쿠고 국의 일궁(一宮)은 구루메에 있는 고라 신사이며, 이곳은 지쿠고 국의 소자 신사(総社)이기도 하다.[2]국부는 미이군에 존재했다. 에도 시대 구루메번의 학자 야노 카즈사다는 미이군 아이가와무라를 국부 위치로 추정했다. 1961년 규슈대학 고고학 연구실이 아미타 유적에서 처음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기와, 초석열, 축지 흔적 등을 발견하며 국청의 존재를 확인했다.
이후 발굴 조사를 통해 국청은 1기부터 4기까지 미이군 내에서 위치를 옮겨 다녔음이 밝혀졌다.
이 유적들은 1996년 "치쿠고 국후 터"라는 명칭으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아미타 유적에는 돌기둥과 설명판이 설치되어 있으며, 요코미치 유적은 구루메시립 남축고등학교 교내에 위치하며 당시 건물의 기둥열이 복원되어 있다.
5. 2. 국분사(国分寺)·국분니사(国分尼寺)
지쿠고 국분사 유적은 현재 구루메시 국분정에 위치하며,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는 히요시 신사 경내와 중복된다. 추정되는 사찰 영역은 약 150미터 정사각형이며, 발굴 조사를 통해 강당터, 탑터, 토대터 등이 확인되었다.
무로마치 시대부터 근세 초기에 이전했다고 전해지는 고코쿠산 국분사(구루메시 미야노진 소재)가 그 법맥을 잇고 있다.
국분니사(国分尼寺)의 터는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국분사 터의 북쪽 약 200m 떨어진 서촌 지역으로 추정된다.
5. 3. 신사(神社)
'''연희식내사'''『연희식신명장』에는 지쿠고국 내에 큰 신사(大社) 2곳과 작은 신사(小社) 2곳, 총 4곳의 신사가 기록되어 있다. 이 중 큰 신사 2곳은 모두 명신대사(名神大社)로 격이 높았다.
- 미이군 고량옥수명신사(高良玉垂命神社)
- 추정 신사: 고량대사 (구루메시 미이정 소재)
- 미이군 풍비예신사(豊比咩神社) - 현재 구루메시 내에 여러 신사가 후보지로 거론된다.
- 후보 신사: 고량대사 (구루메시 미이정 소재)
- 후보 신사: 풍희신사(豊姫神社) (구루메시 가미즈정 소재)
- 후보 신사: 풍희신사(豊姫神社) (구루메시 기타노정 오시로 소재)
'''총사·일궁'''
중세 시대 각 율령국의 신사 등급에 대한 연구[9]에 따르면 지쿠고국의 총사와 일궁은 다음과 같다.
지쿠고국에는 이궁(二宮) 이하의 격을 가진 신사는 지정되지 않았다.[9]
6. 인물
(내용 없음)
6. 1. 구니노쓰카사(国司)
701년 율령(律令) 제도가 확립되면서 기존의 쓰쿠시(筑紫) 국은 지쿠젠(筑前) 국과 지쿠고(筑後) 국으로 나뉘었다. 지쿠고 국의 국부(國府)는 현재 구루메(久留米) 시 지역에 위치했으며, 그 유적은 현재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같은 지역에는 지쿠고 국분사(筑後国分寺) 유적 또한 위치하며, 이 역시 국가 사적이다. 지쿠고 국의 일궁(一宮)은 구루메에 있는 고라 신사(高良大社)이며, 이는 동시에 소자 신사(総社)이기도 하다.[2]6. 1. 1. 지쿠고노카미(筑後守)
헤이안 시대 말기부터 가마쿠라 시대 초기까지는 지쿠젠슈(筑前守)와 지쿠고슈(筑後守)를 동일하게 취급하였다.
6. 1. 2. 슈고(守護)
센고쿠 시대 동안 지쿠고국의 슈고는 명목상 오토모 씨였으나, 실제로는 카마치 씨, 타지리 씨, 구로키 씨 등 15개의 소규모 영주들이 각 지역을 나누어 지배하고 있었다.
6. 2. 센고쿠 시대
센고쿠 시대 동안 지쿠고국의 슈고는 명목상 오토모 씨였으나, 실제로는 카마치 씨, 타지리 씨, 구로키 씨 등을 포함한 15개의 소규모 고쿠진 영주들이 지방을 지배했다.6. 2. 1.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
센고쿠 시대 동안 지쿠고국의 슈고는 명목상 오토모 씨였으나, 실제로는 카마치 씨, 타지리 씨, 구로키 씨 등을 포함한 15개의 소규모 고쿠진 영주 가문들이 각 지역을 나누어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을 통칭하여 지쿠고 15성이라고 부른다.- 카마치 씨: 오토모 씨 휘하에서 야나가와 성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 지쿠고 지역의 실력자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오토모 씨가 쇠퇴한 후, 히젠국의 류조지 다카노부에게 1581년 공격받아 다이묘로서 멸망하였다. 지쿠고 15성의 다른 가문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지쿠고 15성 문서를 참조할 것.
- 오토모 씨: 분고국을 본거지로 삼아 지쿠고국의 슈고직을 겸임하였다. 그러나 지쿠고 지역에서는 류조지 씨와의 경쟁에서 밀려 점차 영향력을 잃었다.
- 류조지 다카노부: 히젠국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1581년 카마치 씨를 멸망시키고 지쿠고 지역까지 영향력을 넓혔다. 그러나 1584년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세력이 약화되어 히젠으로 물러났다.
6. 2. 2. 도요토미 정권의 영주
센고쿠 시대 동안 지쿠고국의 슈고는 오토모 씨였으나, 실제로는 가마치 씨, 다지리 씨, 구로키 씨 등 15개의 소규모 영주 가문들이 각 지역을 나누어 지배하고 있었다.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 하에서는 다음과 같은 영주들이 지쿠고국 내 영지를 다스렸다.
6. 3. 에도 시대 이전
고대 쓰쿠시(筑紫) 국은 야요이 시대의 주요 중심지였으며, 아시아 대륙과의 교류가 활발했다. 1세기와 2세기 후한 시대의 중국 왕조 공식 기록인 이십사사(二十四史), 3세기의 ''삼국지(三國志)'', 6세기의 ''수서(隋書)''에 언급된 야마타이(邪馬台) 국이 이곳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고훈 시대에는 많은 고분이 건설되었고, 이 지역은 "쓰쿠시의 국조(國造)"라는 칭호를 가진 강력한 씨족에 의해 지배되었다. 또한, 신공황후의 한국 정복이라는 전설적인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묘사되기도 하며, 중국, 신라, 백제 등에서 온 많은 토라이진(渡来人) 이민자들이 정착한 지역이었다.527년에는 야마토 지배에 반대하며 신라를 지지하는 세력 간의 이와이(磐井)의 난이 발생했다. 531년에는 북위에서 온 승려 전승(禪勝)이 수행도(修験道)를 창시했다고 전해진다. 663년, 백촌강 전투에서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패배한 야마토 정부는 지역의 군사 및 행정 중심지로 다자이후를 설치했다. 이후 701년 대화 개혁(大化改新)과 율령(律令) 제도가 확립되면서 쓰쿠시 국은 지쿠젠(筑前) 국과 지쿠고(筑後) 국으로 나뉘었다.
지쿠고 국의 국부(國府)는 현재 구루메(久留米) 시 지역에 위치했으며, 그 유적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지쿠고 국분사(筑後国分寺) 유적 또한 같은 지역에 있으며, 마찬가지로 국가 사적이다. 지쿠고 국의 일궁(一宮)은 구루메에 있는 고라 신사(高良大社)이며[2], 이곳은 지쿠고 국의 소자 신사(総社) 역할도 겸했다.
6. 4. 에도 시대
에도 시대 지쿠고국은 북부를 아리마 씨가 다스리는 구루메번이, 남부를 다치바나 씨가 다스리는 야나가와번이 주로 지배하였다. 야나가와번 남쪽에는 미이케번과 같은 작은 번도 존재했다.
보신 전쟁과 메이지 유신 이후, 옛 막부령은 1868년 10월 13일 히타현(日田県)에 편입되었고, 2주 후 나가사키현에 합병되었다. 1868년 11월 11일, 무쓰국의 시모테도번(下手渡藩)이 지쿠고로 이전하여 미이케번을 다시 세웠다. 1871년 12월 25일 폐번치현으로 구루메, 야나가와, 미이케는 각각 현(県)이 되었고, 이후 '미즈마현(三潴県)'으로 통합되었다. 1876년 8월 21일, 미즈마현은 후쿠오카현에 합병되었다.
메이지 시대 초기의 공식 정부 자원 평가인 구고구령취조장(旧高旧領取調帳)에 따르면, 지쿠고국에는 총 536,851 고쿠에 달하는 789개의 마을이 있었다. 당시 지쿠고국의 군 구성은 다음과 같다.
7. 지쿠고 국의 전투
- 527년 - 528년: 이와이의 난. 야마토 왕권(모노노베노 아라카비物部麁鹿火|모노노베노 아라카비일본어) vs 쓰쿠시노키미 이와이筑紫君磐井|쓰쿠시노키미 이와이일본어.
- 1359년: 지쿠고가와 전투. 남조(기쿠치 다케미쓰菊池武光|기쿠치 다케미쓰일본어 등 4만) vs 북조(쇼니 요리히사少弐頼尚|쇼니 요리히사일본어 등 6만). 일본 3대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참조
[1]
서적
Japan Encyclopedia
Google Books
2005
[2]
웹사이트
Nationwide List of Ichinomiya
http://eos.kokugakui[...]
2012-10-26
[3]
서적
The Humanitarian Ideas of the Japanese
1932
[4]
웹사이트
Kikuchi Takemitsu
https://books.google[...]
2005
[5]
문서
별칭「筑州」는, 筑前国과 함께, 또는 단독으로의 호칭.
[6]
서적
福岡県の歴史 (県史)
山川出版社
1997-12-20
[7]
문서
記載は三池藩。
[8]
웹사이트
福岡県統計年鑑 平成22年
http://www.pref.fuku[...]
[9]
서적
中世諸国一宮制の基礎的研究
岩田書院
2000
[10]
논문
大友氏の豊後支配
戎光祥出版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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