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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리메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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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우리메돈 전투는 기원전 466년 또는 469년 경에 쾨프뤼차이 강에서 벌어진 델로스 동맹과 페르시아 제국 간의 전투이다.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이후 그리스는 페르시아에 대한 반격을 시작했고, 아테네의 장군 키몬은 카리아와 리키아의 그리스 도시들을 동맹에 편입시킨 후 에우리메돈 강에 주둔한 페르시아 군을 공격했다. 전투는 델로스 동맹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으며,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 위협을 종식시키고 아테네가 에게 해의 패권을 장악하는 데 기여했다. 이 전투의 결과로 키몬은 명성을 얻었지만, 칼리아스 화약의 체결 여부와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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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리메돈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명에우리메돈 전투
분쟁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시기기원전 466년 또는 기원전 469년
장소에우리메돈강 하구 (튀르키예 안탈리아주)
결과델로스 동맹의 승리
아스펜도스 근처의 에우리메돈 강
아스펜도스 근처의 에우리메돈강
교전 세력
교전국 1델로스 동맹
교전국 2아케메네스 제국
지휘관
델로스 동맹키몬
아케메네스 제국페렌다테스 (전사), 티트라우스테스
병력 규모
델로스 동맹삼단노선 200 ~ 250척
아케메네스 제국삼단노선 340척, 육군 (규모 미상)
피해 규모
델로스 동맹미상
아케메네스 제국전함 200척 파괴 (투퀴디데스), 100척 이상 나포 (디오도로스)

2. 배경

제2차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가 승리한 후, 기원전 478년 아테네를 중심으로 델로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델로스 동맹은 에게해와 소아시아 지역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규합하여 페르시아의 재침략 위협에 대응하고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강력한 해군력을 구축했다.[42] 초기에는 스파르타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나, 비잔티온 점령 이후 스파르타 장군 파우사니아스의 행동으로 인해 동맹 내 불신이 커지면서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다.[40][41]

밀티아데스의 아들 키몬은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정치적 역량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기원전 478년 스파르타에 의한 비잔티움 공성전과 기원전 475년 아테네가 이끄는 델로스 동맹에이온 공략 이후,[78] 키몬은 피레아스에서 보급을 완료하고 함대를 이끌고 원정을 시작했다.

2. 1.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전개

제2차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리스는 페르시아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기원전 478년에는 스파르타비잔티움을 공략했고(비잔티움 공성전), 기원전 475년에는 아테네가 이끄는 델로스 동맹에이온을 함락시켰다(에이온 공성전).[78] 에이온 탈취 후, 당시 지휘관이었던 아테네의 장군 키몬은 더 큰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피레아스에서 다시 보급을 완료하고 200척의 함대를 이끌고 출항했다. 여러 동맹 도시 국가에서 원군이 보태져 함대는 300척으로 늘어났다. 그는 카리아, 리키아의 그리스 도시들을 설득하거나 무력으로 아군으로 끌어들인 뒤,[79] 군대를 페르시아 군이 있었던 에우리메돈강으로 진군하게 했다.

에우리메돈강의 페르시아 군은 수군과 육군 양군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페렌다티스가 이끄는 육군은 페르시아만에 자리를 잡았고,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 1세의 서자 티트라우스테스가 이끄는 해군은 페니키아, 키프로스, 그리고 카리아 인으로 구성된 340척이 있었다.[80] 또한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전군 총사령관은 아리오만데스였다.[81]

이 시기에 대한 많은 세부 정보를 제공하는 투키디데스


두 번째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 (기원전 480–479년)과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원전 431-404년) 사이의 그리스 군사 역사는 남아있는 고대 자료에 의해 제대로 증명되지 않는다. 때때로 학자들에 의해 ''펜테콘타에티아''라고 불리는 이 기간은 그리스 내에서 상대적인 평화와 번영의 시대였다.[1][2] 이 기간에 대한 가장 풍부한 자료이자 가장 동시대적인 자료는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이며, 이는 현대 역사가들이 일반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1차 자료로 간주한다.[3][4][5]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이어지는 아테네의 세력 성장에 대한 여담에서만 ''펜테콘타에티아'' 시기를 언급한다. 이 여담은 간결하고, 아마도 선택적이며, 어떠한 날짜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6][7]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가들은 투키디데스의 기록을 사용하여 이 기간에 대한 대략적인 연대기를 구성하고, 고고학적 기록 및 다른 작가들의 해석의 기초로 삼았다.[6]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의 아리스티데스와 특히 키몬의 전기는 추가적인 세부 정보를 제공한다. 플루타르코스는 사건 발생 후 6세기 후에 글을 썼으므로 2차 자료이지만, 종종 그의 자료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여 그의 진술을 일부 확인할 수 있다.[8]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전기에서 투키디데스의 기록이 생략한 이 기간의 세부 사항을 보존하면서 생존하지 못한 많은 고대 역사에서 명시적으로 가져온다.

이 기간에 대한 유일한 다른 주요 현존 자료는 디오도로스 시켈로스가 기원전 1세기에 쓴 보편사인 ''역사총서''이다. 디오도로스의 이 기간에 대한 설명의 많은 부분은 현재 소실된 보편사를 쓴 훨씬 더 이전의 그리스 역사가인 에포로스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인다.[9] 그러나 현대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에포로스의 역사를 폄하한다.[5] 따라서 현대 역사가들에게 자주 무시되는 디오도로스는[10] 이 기간에 대한 특별히 좋은 자료가 아니다. 디오도로스의 기록을 영어로 번역한 역사가 찰스 헨리 올드파더는 에우리메돈 원정을 묘사하는 구절에 대해 "앞의 세 장에서 디오도로스가 최악의 모습으로 드러난다"라고 언급했다.[11]

이 기간에 대한 비문을 포함한 고고학적 증거도 존재한다. 특히 유용한 것은 델로스 동맹 회원들의 추정되는 공물 목록이다.[3][12]

Περσικά|페르시카|grc 또는 Μηδικά|메디카|grc라고 불리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키루스 대왕페르시아 제국이 소아시아 특히 이오니아의 그리스 도시들을 정복하면서 시작되었다. 페르시아인들은 이오니아를 통치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각 이오니아 도시에서 참주를 후원하는 것으로 해결했다.[23] 과거 그리스 국가들은 종종 참주에 의해 통치되었지만, 이것은 쇠퇴하는 정부 형태였다.[24] 기원전 500년경, 이오니아는 반란을 일으킬 준비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긴장은 밀레투스의 참주 아리스타고라스의 행동으로 인해 마침내 공개적인 반란으로 번졌다. 기원전 499년, 페르시아의 후원을 받은 실패한 원정 이후 아리스타고라스는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밀레투스를 민주주의로 선포하기로 결정했다.[25] 이것은 이오니아 전역과 심지어 도리스아이올리스에서도 유사한 혁명을 촉발하여 이오니아 반란을 시작했다.[26]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의 그리스 국가들은 아리스타고라스에 의해 이 분쟁에 끌려들어갔고, 그들의 유일한 군사 작전 기간(기원전 498년) 동안 페르시아의 지역 수도인 사르디스를 점령하고 불태우는 데 기여했다.[27] 이후, 이오니아 반란은 (추가적인 외부 지원 없이) 5년 동안 지속되었고, 마침내 페르시아인들에게 완전히 진압되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결정으로,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1세는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음에도 불구하고, 아테네와 에레트리아가 반란을 지원한 것에 대한 징벌을 가하는 미완의 과제가 남아 있다고 결정했다.[28] 이오니아 반란은 다리우스 제국의 안정을 심각하게 위협했고, 본토 그리스 국가들은 대처하지 않으면 그 안정을 계속 위협할 것이었다. 따라서 다리우스는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의 파괴를 시작으로 그리스를 완전히 정복하는 것을 고려하기 시작했다.[28]

그 후 20년 동안 그리스에 대한 두 번의 페르시아 침공이 있었으며, 여기에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전투들이 포함되었다. 그리스에 대한 1차 페르시아 침공 동안 트라키아, 마케도니아에게해 제도가 페르시아 제국에 추가되었고, 에레트리아는 적절하게 파괴되었다.[29] 그러나, 침공은 기원전 490년에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다.[30] 두 차례의 침공 사이에서 다리우스가 사망했고, 전쟁에 대한 책임은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에게 넘어갔다.[31] 크세르크세스는 기원전 480년에 그리스에 대한 2차 페르시아 침공을 직접 이끌었고, 엄청난(비록 종종 과장된) 군대와 해군을 그리스로 데려왔다.[32] 저항하기로 선택한 그리스인(연합군)은 육지에서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바다에서 아르테미시움 해전에서 각각 패배했다.[33] 펠로폰네소스를 제외한 모든 그리스가 페르시아의 손에 들어갔지만, 연합 해군을 최종적으로 파괴하려 하자 페르시아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겪었다.[34] 그 다음 해인 기원전 479년, 연합군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가장 큰 그리스 군대를 소집하여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페르시아 침공군을 격파하여 침공과 그리스에 대한 위협을 종식시켰다.[35]

전통에 따르면, 플라타이아이와 같은 날 연합 함대는 미칼레 해전에서 페르시아 함대의 사기를 잃은 잔존 세력을 격파했다.[36] 이 작전은 페르시아 침공의 종식과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다음 단계인 그리스 반격의 시작을 알린다.[37] 미칼레 이후,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은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이제 페르시아인들은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38] 그 후 연합 함대는 아직 페르시아가 점령하고 있던 트라키아 헤르소네소스로 항해하여 세스토스 마을을 포위하고 점령했다.[39] 그 다음 해인 기원전 478년, 연합군은 비잔티움 (현대 이스탄불)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포위는 성공했지만, 스파르타 장군 파우사니아스의 행동은 많은 연합군을 소외시켰고, 파우사니아스의 소환으로 이어졌다.[40] 비잔티움 포위는 페르시아 침공을 격파한 헬레니즘 동맹의 마지막 작전이었다.

비잔티움 이후, 스파르타는 전쟁에 대한 관여를 끝내기를 열망했다.[40] 스파르타인들은 본토 그리스와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을 해방함으로써 전쟁의 목적이 이미 달성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아시아 그리스인들의 장기적인 안보를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느낌도 있었을 것이다.[41] 크세르크세스의 침공에 맞서 싸운 도시 국가들의 느슨한 동맹은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의해 지배되었다. 스파르타의 철수로, 그리스인들의 지도력은 이제 명시적으로 아테네인들에게 넘어갔다.[40][41] 새로운 동맹을 설립하여 페르시아에 대한 싸움을 계속하기 위해 신성한 섬 델로스에서 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동맹은 이제 많은 에게해 섬들을 포함하여, 일반적으로 델로스 동맹으로 알려진 '제1 아테네 동맹'으로 공식적으로 구성되었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동맹의 공식적인 목표는 "왕의 영토를 황폐화함으로써 그들이 겪은 고통을 복수하는 것"이었다.[42] 델로스 동맹의 군대는 다음 10년 동안 대부분을 트라키아에서 남아있는 페르시아 수비대를 몰아내고 동맹이 통제하는 에게해 영토를 확장하는 데 사용했다.[41]

페르시아군이 유럽에서 대부분 무력화되자 아테네는 소아시아에서 동맹을 확장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43][44] 사모스, 키오스, 레스보스 섬은 미칼레 이후 원래 헬레네 동맹의 일원이 된 것으로 보이며, 아마도 델로스 동맹의 초기 멤버였을 것이다.[45] 그러나 다른 이오니아 도시들, 또는 소아시아의 다른 그리스 도시들이 정확히 언제 동맹에 가입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어떤 시점에는 확실히 가입했다.[46] 투키디데스는 기원전 478년 비잔티움에 이오니아인들이 있었다고 증언하므로, 적어도 일부 이오니아 도시들이 기원전 478년 초에 동맹에 가입했을 가능성이 있다.[47] 아테네 정치가 아리스티데스는 공무 중 폰토스 왕국(기원전 468년경)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아리스티데스가 각 동맹국의 재정적 기여를 조직하는 책임을 맡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여행은 동맹이 소아시아로 확장되는 것과 관련이 있었을 수 있다.[48]

키몬의 에우리메돈 원정 자체는 에우리메돈 강 입구 근처의 아스펜도스에서 대규모 페르시아 함대와 군대가 집결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43][44] 일반적으로 페르시아가 잠재적 침략자였고, 키몬의 원정은 이 새로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시작되었다고 주장된다.[19][43][44][49] 코크웰은 페르시아의 군비 증강이 두 번째 침공 실패 이후 그리스인들의 활동에 대응하려는 최초의 공동 노력이라고 주장한다.[50] 페르시아 제국 내부의 갈등이 이 원정을 시작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데 기여했을 가능성이 있다.[50] 코크웰은 페르시아의 전략적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 "페르시아는 해군을 적대 해역에서 자유롭게 활동시키지 않고 군대와 긴밀하게 연결하여 사용하는 육상 강국이었습니다. 어쨌든 안전한 해군 기지가 필요했습니다. 이오니아 반란에서 육군이 이미 이오니아와 에게해 연안의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실 군대와 해군이 반란을 진압하는 것은 쉬웠지만, 기원전 479년 [이오니아] 도시들의 일반적인 반란과 그리스 해군의 잇따른 성공을 고려할 때 페르시아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함대와 군대가 함께 이동하면서 도시마다 질서를 회복하면서 해안을 따라 이동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51]

고대 시대의 해전의 특성은 대규모 노잡이 팀에 의존했기 때문에, 배는 며칠마다 식량과 물을 재보급하기 위해 상륙해야 했다.[52] 이것은 고대 함대의 범위를 심각하게 제한했으며, 본질적으로 해군은 안전한 해군 기지 근처에서만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53] 따라서 코크웰은 아스펜도스에 집결한 페르시아군이 소아시아 남부 해안을 따라 이동하여 각 도시를 점령하고, 결국 페르시아 해군이 다시 이오니아에서 작전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제안한다.[44]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원전 333년 겨울에 이 전략을 역으로 사용할 것이다. 페르시아를 상대할 해군이 부족했던 알렉산드로스는 대신 소아시아 남부의 항구를 점령하여 페르시아 해군에게 적절한 기지를 제공하지 못하게 했다.[44]

플루타르코스는 페르시아 군대가 아스펜도스에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키몬이 크니도스(카리아)에서 200척의 삼단 노선으로 출항했다고 말한다. 키몬이 이러한 병력을 소집한 것은 아테네가 아시아 그리스인들을 재정복하기 위한 페르시아의 곧 있을 원정에 대한 경고를 받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분명히, 다른 동맹 사업에는 그렇게 큰 병력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44] 키몬은 페르시아가 사르디스에서 왕도를 따라 이오니아로 곧장 진격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카리아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수 있다.[44]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키몬은 이 200척의 삼단 노선으로 파셀리스 (리키아)의 그리스 도시로 항해했지만 입국을 거부당했다. 그래서 그는 파셀리스의 땅을 약탈하기 시작했지만 함대의 키오스 분견대의 중재로 파셀리스 사람들은 동맹에 가입하기로 동의했다. 그들은 원정에 군대를 제공하고 아테네에 10talent를 지불하기로 했다.[43] 키몬이 선제적으로 파셀리스로 항해하여 점령했다는 사실은 그가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해안 도시를 점령하려는 페르시아의 원정을 예상했다는 것을 시사한다.[44] 아스펜도스에 육군과 해군이 모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이오니아에 대한 즉각적인 공격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게 했을 수 있다. 소아시아에서 가장 동쪽에 있는 그리스 도시인 파셀리스(그리고 에우리메돈 서쪽에 바로 위치)를 점령함으로써 그는 페르시아 원정이 시작되기 전에 이를 효과적으로 차단하여 그들이 통제해야 할 첫 번째 해군 기지를 빼앗았다.[44] 더 나아가 키몬은 직접 아스펜도스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공격하기 위해 이동했다.[43]

2. 2. 델로스 동맹의 결성

제2차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가 승리한 후, 기원전 478년 아테네를 중심으로 델로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델로스 동맹은 에게해와 소아시아 지역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규합하여 페르시아의 재침략 위협에 대응하고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강력한 해군력을 구축했다.[42] 초기에는 스파르타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나, 비잔티온 점령 이후 스파르타 장군 파우사니아스의 행동으로 인해 동맹 내 불신이 커지면서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다.[40][41]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델로스 동맹의 공식적인 목표는 페르시아에게 복수하고 영토를 황폐화 시키는 것이었다.[42]

2. 3. 키몬의 등장과 군사적 역량

밀티아데스의 아들 키몬은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정치적 역량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기원전 478년 스파르타에 의한 〈비잔티움 공성전〉과 기원전 475년 아테네가 이끄는 델로스 동맹의 〈에이온 공성전〉 이후 에이온을 함락시킨 후,[78] 당시 지휘관이었던 키몬은 피레아스에서 보급을 완료하고 200척의 함대를 이끌고 출항했다. 동맹 도시 국가에서 원군이 보태져 함대는 300척으로 늘어났다. 그는 카리아, 리키아의 그리스 도시들을 설득하거나 무력으로 아군으로 끌어들인 뒤[79] 에우리메돈강으로 진군했다.

3. 전투의 전개



키프로스에서 80척의 증원군과 합류하기 위해 에우리메돈강 근처에 정박하고 있던 페르시아 군을 키몬이 이끄는 델로스 동맹군이 공격했다.[82] 델로스 동맹 함대는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했고, 생존한 페르시아 군은 육군이 있는 곳으로 도망쳤다. 키몬은 여세를 몰아 페르시아 육군을 공격하여 격전 끝에 승리했다.[82] 이후, 히드로스에 80척의 페르시아 함대가 정박해 있다는 소식을 접한 키몬은 즉시 진격하여 아군의 패배를 모르는 함대를 궤멸시켰다.[83]

디오도로스는 첫 전투가 에우리메돈강이 아니라 키프로스에서 있었다고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키몬이 250척의 함대로 키프로스에서 격전 끝에 적선 대부분을 파괴하고 100여 척을 노획했다고 주장했다. 패주한 페르시아 군은 육지로 도망갔고, 배는 적의 손에 넘어갔다. 키몬은 에우리메돈 강변의 페르시아 육군을 공격하기 위해 노획한 적선에 페르시아 복장을 한 병사들을 승선시켜 적진으로 보냈고, 페르시아 군은 이들을 아군으로 오인했다. 그날 밤 델로스 동맹의 야습으로 페르시아 군 지휘관 페렌다티스가 죽는 등 혼란이 발생했고, 많은 페르시아 군이 살상된 후 바다로 도망쳤다.[84]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이 투키디데스의 간략한 기록과 부합하며 전투 시기와 더 가깝기 때문에 신뢰도가 높다고 평가된다.[85]

3. 1. 페르시아군의 전략과 키몬의 대응

그리스와 페르시아 함대가 사용한 선박 유형인 삼단노선의 재건 모형


페르시아는 키프로스에서 오는 80척의 증원군과 합류하기 위해 에우리메돈 강 근처에 대규모 함대를 정박시키고 있었다.[82] 이 정보를 입수한 키몬은 적에게 증원군이 오기 전에 전투를 개시하여 승리하고자 했다.[82]

키몬은 우선 델로스 동맹의 함대를 이끌고 페르시아 함대를 공격하여 격파했다. 살아남은 페르시아 군은 육군이 있는 곳으로 도망쳤다.[82] 키몬은 여세를 몰아 페르시아 육군을 공격했고,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를 낸 격전 끝에 승리했다.[82]

그 후, 키몬은 히드로스에 80척의 페르시아 함대가 정박해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83] 그는 최고 속도로 진격하여 아군의 패배를 모르는 페르시아 함대를 괴멸시켰다.[83]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델로스 동맹 함대는 200척의 삼단노선으로 구성되었다.[43] 이 배들은 원래 테미스토클레스가 주로 충돌 작전을 위해 개발했지만,[54] 키몬에 의해 선상 전투에 더 적합하도록 개조되었다.[43]

3. 2. 해전과 육상 전투

델로스 동맹 함대는 키프로스에서 원군 80척과 합류하기 위해 에우리메돈강 근처에 정박하고 있던 페르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했다. 키몬은 적에게 원군이 오기 전에 전투를 개시하여 델로스 동맹 함대로 페르시아 함대를 공격해 격파했고, 살아남은 페르시아 군은 육군이 있는 곳으로 도망쳤다.[82]

키몬은 이 승리에 만족하지 않고 여세를 몰아 페르시아 육군을 공격했다.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를 낸 격전 끝에 델로스 동맹은 승리했다.[82]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페르시아 함대는 에우리메돈 강 입구에 정박하여 키프로스에서 온 80척의 페니키아 선박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키몬은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페르시아군을 공격했고, 페르시아 함대는 전투를 피하기 위해 강 안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키몬이 계속해서 페르시아군을 압박하자, 그들은 전투를 받아들였다. 페르시아 전투 대열은 빠르게 붕괴되었고, 페르시아 선박들은 방향을 돌려 강둑으로 향했다. 배를 강가에 대고, 승무원들은 근처에서 대기 중인 군대와 피난처를 찾았다.[43]

페르시아군은 그리스 함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키몬은 해병을 상륙시켜 페르시아군을 공격했다.[8] 처음에는 페르시아 대열이 아테네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결국 중무장한 호플리테 중장 보병이 우위를 점했고, 페르시아군을 격파했다. 그들은 그들의 캠프로 도망갔고, 승리한 그리스인들에게 그들의 캠프와 함께 포획되었다.[62]

투키디데스는 200척의 페니키아 선박이 포획되어 파괴되었다고 말한다.[63] 플루타르코스는 파괴되거나 도망간 배들 외에 200척의 배가 포획되었다고 말한다.[43] 고대 자료에는 양측의 군인 사상자에 대한 추정치가 없다.

플루타르코스는 키몬은 페르시아인들이 기대했던 80척의 페니키아 선박 함대를 가로채기 위해 가능한 한 빨리 그리스 함대를 타고 항해했다고 한다. 그들을 기습하여, 그는 전체 함대를 포획하거나 파괴했다.[62] 그러나 투키디데스는 이 부수적인 행동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며, 일부는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58]

이후, 히드로스에 80척의 페르시아 함대가 정박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키몬은 최고 속도로 진격해 들어가 아군의 패배를 모르는 함대를 궤멸시켰다.[83]

3. 3. 전투 기록의 비교 (플루타르코스와 디오도로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키몬 전’과 디오도로스의 《역사총서》에는 에우리메돈 전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만, 두 기록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페르시아 함대는 키프로스에서 오는 80척의 지원군과 합류하기 위해 에우리메돈 강 근처에 정박해 있었다. 키몬은 적에게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전투를 벌이기로 결심하고, 먼저 델로스 동맹 함대로 페르시아 함대를 공격하여 격파했다. 살아남은 페르시아 군은 육군이 있는 곳으로 도망쳤고, 키몬은 여세를 몰아 페르시아 육군을 공격하여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를 낸 격전 끝에 승리했다.[82] 그 후, 페르시아 함대 80척이 휴도로스에 정박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키몬은 최고 속도로 진격해 아군의 패배를 모르는 함대를 괴멸시켰다.[83]

반면, 디오도로스는 첫 전투가 에우리메돈 강이 아니라 키프로스에서 벌어졌다고 기록했다. 그는 키몬이 250척의 함대를 이끌고 키프로스로 가서 격전 끝에 적선 대부분을 파괴하고 100여 척을 승무원과 함께 노획했다고 주장했다. 패주한 페르시아 군은 육지로 도망가고, 배는 적의 손에 넘어갔다. 키몬은 이 승리에 만족하지 않고 에우리메돈 강변에 주둔하던 페르시아 육군에게 향했다. 그는 키프로스에서 노획한 적 함선에 페르시아 풍으로 변장한 병사들을 승선시켜 적진으로 보냈고, 페르시아 군은 그들을 아군으로 착각했다. 그날 밤 델로스 동맹이 야습을 가해 적을 혼란에 빠뜨렸고, 페르시아 군 지휘관 페렌다티스는 붙잡혀 죽었다. 이 전투에서 많은 페르시아 군이 죽고, 살아남은 자들은 바다로 도망쳤다.[84]

두 기록 중에서는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이 더 신뢰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이는 플루타르코스가 전투와 더 가까운 시대에 살았고, 그의 기록이 투키디데스의 간략한 기록과 일치하기 때문이다.[85] 투키디데스는 이 전투에 대해 간략하게만 언급했지만, 그의 기록은 가장 신뢰할 만한 자료로 여겨진다.[11]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에우리메돈 전투에서 승리한 키몬은 큰 명성을 얻었고, 기원전 449년 칼리아스 화약 체결로 그리스와 페르시아 간 전쟁은 종결되었다.[77] 이 전투로 에게해 제해권은 페르시아에서 그리스로 넘어가 아테네가 그리스 패권국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454년 이집트 반란 지원에 나선 아테네 군이 전멸하면서 페르시아는 지중해 해상 세력으로 다시 부상했다.

4. 1. 델로스 동맹의 에게해 장악

에우리메돈 전투에서 승리하여 키몬은 큰 명성을 얻었으며, 기원전 449년 칼리아스 화약이 체결되면서 그리스와 페르시아 간 전쟁은 종결되었다.[77] 이 전투를 계기로 에게해의 제해권은 페르시아에서 그리스인들에게 넘어가, 아테네는 그리스의 패권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454년, 이집트 반란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아테네 군이 전멸하면서, 페르시아는 다시 지중해 해상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4. 2. 아테네의 패권 강화

에우리메돈 전투의 승리로 키몬은 큰 명성을 얻었고, 기원전 449년 칼리아스 화약이 체결되어 그리스와 페르시아 간 전쟁은 끝났다.[77] 이 전투 이후 에게해 제해권은 페르시아에서 그리스로 넘어가 아테네가 그리스 패권국으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454년 이집트 반란을 돕기 위해 파견된 아테네 군이 전멸하면서 페르시아는 지중해 해상 세력으로 다시 부상했다.

4. 3. 칼리아스 화약 (논란)

에우리메돈 전투에서 승리한 키몬은 큰 명성을 얻었으며, 기원전 449년 칼리아스 화약이 체결되어 그리스와 페르시아 간의 전쟁이 종결되었다는 주장이 있다.[77] 그러나 칼리아스 화약의 실존 여부와 체결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 조약이 실제로 체결되지 않았거나, 에우리메돈 전투 직후가 아닌 기원전 450년경에 체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5. 추가 사료

이 시기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투키디데스, 플루타르코스, 디오도로스의 저작에서 찾을 수 있다.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이 시기에 대한 가장 풍부하고 동시대적인 자료로, 일반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1차 자료로 간주된다.[3][4][5] 그러나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이어지는 아테네의 세력 성장에 대한 여담에서만 이 시기를 간략하게 언급하며, 연대기적 정보는 부족하다.[6][7]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중 아리스티데스키몬 전기는 이 시기에 대한 추가적인 세부 정보를 제공한다. 플루타르코스는 사건 발생 후 6세기 후에 글을 썼기 때문에 2차 자료이지만, 자신의 자료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여 그의 진술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8]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의 ''역사총서''는 이 기간에 대한 또 다른 주요 자료이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그의 기록을 신뢰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9][10] 디오도로스의 기록을 영어로 번역한 역사가 찰스 헨리 올드파더는 에우리메돈 원정을 묘사하는 구절에 대해 "앞의 세 장에서 디오도로스가 최악의 모습으로 드러난다"라고 언급했다.[11]

델로스 동맹 회원국들의 공물 목록과 같은 고고학적 증거도 이 시기의 상황을 유추하는 데 도움을 준다.[3][12]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웹사이트 Themistocles 25 https://www.perseus.[...]
[9] 서적
[10] 서적
[11] 웹사이트 note to Diodorus XI.62 http://www.perseus.t[...]
[12] 서적
[13] 논문 Cimon's Eurymedon Campaign Reconsidered
[14] 서적
[15] 서적
[16] 서적
[17] 서적
[18] 서적 A History of Greece, 1300 to 30 BC Wiley-Blackwell
[19] 서적
[20] 서적
[21] 서적
[22] 서적
[23] 서적
[24] 서적
[25] 서적 Histories https://www.perseus.[...]
[26] 서적
[27] 서적
[28] 서적
[29] 서적
[30] 서적
[31] 서적
[32] 서적
[33] 서적
[34] 서적
[35] 서적
[36] 서적 2005
[37] 서적 1993
[38]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https://www.perseus.[...]
[39] 서적 Histories https://www.perseus.[...]
[40]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https://www.perseus.[...]
[41] 서적 2005
[42]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https://www.perseus.[...]
[43] 서적 Cimon
[44] 서적 2005
[45] 서적 Histories https://www.perseus.[...]
[46] 서적 1976
[47] 서적 1983
[48] 서적 Aristides
[49] 서적 1988
[50] 서적 2005
[51] 서적 2005
[52] 서적 2004
[53] 서적 1988
[54] 서적 2009
[55] 서적 1993
[56] 서적 Histories https://www.perseus.[...]
[57] 서적 2009
[58] 서적 2005
[59] 서적 1978
[60] 웹사이트 Eurymedon Bottle 1 – Livius.org https://www.livius.o[...]
[61] 서적 1997
[62] 서적 Cimon
[63]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https://www.perseus.[...]
[64] 서적 1983
[65] 서적 2005
[66] 서적 2005
[67] 서적 2002
[68]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https://www.perseus.[...]
[69] 서적 I. 94-95, 98
[70] 서적 XI. 60
[71] 간행물 ibid, XI. 60
[72] 서적 プルタルコス, 「キモン伝」, 12
[73] 간행물 ibid, 12
[74] 간행물 ibid, 13
[75] 서적 ディオドロス, XI. 61
[76] 서적 トゥキュディデス, I. 100
[77] 서적 ディオドロス, XII. 6
[78] 서적 투키디데스, I. 94-95, 98
[79] 서적 디오도로스, XI 60
[80] 간행물 ibid, XI 60
[81] 서적 플루타르코스, 〈키몬 전〉, 12
[82] 간행물 ibid 12
[83] 간행물 ibid 13
[84] 서적 디오도로스, XI. 61
[85] 서적 투키디데스, I.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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