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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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톰 파커는 1909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엘비스 프레슬리의 매니저로 활동하며 음악 산업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그는 1950년대 엘비스 프레슬리를 발굴하여 전국적인 스타로 만들었지만, 과도한 수수료 요구와 프레슬리의 활동 및 사생활 통제로 비판을 받았다. 프레슬리 사후에도 그의 유산을 관리하며 논란에 휩싸였으며, 1980년대 관리 부실로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파커는 다양한 영화와 TV 드라마에서 묘사되었으며, 대중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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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파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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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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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안드레아스 코르넬리스 판 카위크 |
출생일 | 1909년 6월 26일 |
출생지 | 네덜란드 북브라반트주 브레다 |
사망일 | 1997년 1월 21일 |
사망지 |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
직업 | 연예 매니저, 콘서트 프로모터 |
활동 기간 | 1938년–1984년 |
배우자 | 마리 모트(1935년 결혼, 1986년 사별) 로안 밀러(1990년 결혼) |
수상 | 명예 대령 (루이지애나주) |
2. 초기 생애
톰 파커는 1909년 6월 26일 네덜란드 노르트브라반트주 브레다에서 안드레아스 코르넬리스 판 퀴이크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4] 그는 11명의 자녀 중 넷째였다.[5] 어린 시절부터 브레다의 사육제 등에서 호객꾼으로 일하며 쇼 비즈니스 세계에 대한 경험을 쌓았다.[44]
15세에 선원 직업을 얻어 로테르담으로 이주했으나,[44] 17세 무렵 미국으로 건너가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44] 1929년 5월, 거의 20세가 된 파커는 미국으로 돌아와 처토쿼 교육 텐트 쇼와 함께 카니발에서 일자리를 구했다.[4] 그는 불법체류 신분을 숨기기 위해 미국 육군에 입대하면서 면접관의 이름인 톰 파커를 사용하기 시작했다.[44]
파커는 하와이 포트 샤프터에서 2년간 복무한 후 플로리다주 포트 바라카스에서 재입대했다.[44] 그는 한동안 명예롭게 복무했지만, 무단 이탈 후 탈영 혐의로 기소되어 독방 감금형을 받았다. 이로 인해 정신병이 생겨 정신병원에서 두 달을 보낸 뒤 제대했다.[4]
제대 후 파커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1931년부터 1938년까지 로열 아메리칸 쇼에서 일하며 인맥을 쌓았다.[7][4] 1935년에는 27세의 마리 프랜시스 모트와 결혼했다.[96] 두 사람은 대공황 시기에 전국을 여행하며 힘든 생활을 이어갔다.[47]
2. 1. 네덜란드에서의 살인 사건 연루 의혹
파커의 전기 작가인 알라나 내쉬는 파커가 브레다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의 용의자였거나, 적어도 어떤 식으로든 연루되었을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46] 이 의혹이 사실이라면, 네덜란드는 미국과 범죄인 인도 조약을 체결하고 있었기 때문에, 네덜란드 당국의 추적을 피하려 했던 파커가 여권을 취득하지 않고 밀입국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있다.[46]3. 매니지먼트 경력
톰 파커는 1938년 인기 가수 진 오스틴의 프로모터로 음악 산업 경력을 시작했다.[48] 파커는 뛰어난 프로모터였지만, 매니지먼트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48]
파커는 테네시주내슈빌로 이주하는 대신, 플로리다주템플 테라스(Temple Terrace)에 남아 힐즈버러 군 동물 보호 협회에서 일하며 자선 행사에 미니 펄과 에디 아놀드(Eddy Arnold) 등을 초청했다.[50][51]
1945년, 파커는 에디 아놀드의 매니저가 되어 수입의 25%를 받는 계약을 맺었다.[51] 1948년에는 루이지애나주 주지사 지미 데이비스(:en:Jimmie Davis)의 선거 운동에 기여하여 루이지애나 주 방위군(Louisiana State Militia) 명예 대령(커널) 칭호를 받았다.[51] 파커는 이 칭호를 평생 사용했고, 지인들 사이에서는 "대령/더 커널 (the Colonel)"로 통했다.[51]
1952년에는 토미 샌즈(Tommy Sands)를 홍보하며 RCA 레코드의 스티브 숄즈(Steve Sholes)에게 데모 테이프를 보냈다.[52] 이후 파커는 행크 스노우(Hank Snow)와 협력하여 행크 스노우 엔터프라이즈 앤드 잠보리 어트랙션스 (Hank Snow Enterprises and Jamboree Attractions)를 설립했다.[51]
1955년 파커는 엘비스 프레슬리를 만나 그의 특별 고문이 되었고,[8] 1956년에는 프레슬리의 전속 매니저가 되었다.[58] 파커는 프레슬리를 ''The Milton Berle Show''와 ''The Ed Sullivan Show''와 같은 텔레비전 쇼에 출연시키고, 행크 사퍼스타인과의 상품화 계약을 통해 프레슬리를 전국적인 스타로 만들었다.[60]
파커는 프레슬리의 군 복무 기간 동안에도 그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고,[62] 제대 후에는 프랭크 시나트라 쇼 출연과 할리우드 영화 계약을 성사시켰다.[66] 1968년 텔레비전 스페셜 ''엘비스'' 이후, 파커는 프레슬리의 라이브 공연 복귀를 관리하며 라스베이거스 스트립에서의 성공적인 공연을 이끌었다.[21]
1973년에는 ''알로하 프롬 하와이'' 위성 콘서트를 기획하여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76] 그러나 프레슬리의 약물 의존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파커와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프레슬리는 1977년 사망할 때까지 파커의 관리를 받았다.
프레슬리가 해외 공연을 거의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파커가 불법 이민자 신분이었기 때문에 미국 여권을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86] 진보 진영에서는 파커가 자신의 불법 체류와 과거가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프레슬리의 해외 공연을 막았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한다.
3. 1. 초기 경력 (1938-1954)
파커는 1938년, 인기 가수 진 오스틴의 프로모터로 일하면서 음악 산업에 발을 들였다.[48] 1924년부터 8,600만 장 이상의 음반을 판매하고[48] 1700만달러 이상을 벌었지만, 오스틴은 사치스러운 생활로 재산을 탕진했고, 빙 크로스비와 같은 새로운 가수들의 등장으로 인기가 시들해지고 있었다.[48] 파커는 자신의 카니발 경험을 활용하여 오스틴의 콘서트 표를 판매하고 군중을 모았다.[48] 그는 성공적인 프로모터였지만, 매니지먼트로 옮기고 싶어했다.[48]오스틴은 파커에게 음악 산업의 중심지였던 테네시주 내슈빌로 이주할 것을 제안했지만, 파커는 이를 거절하고 플로리다주 템플 테라스에 있는 가족과 함께 남았다.[49] 그는 불법 이민자 신분이 드러날 수 있는 서류 제출을 피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49] 1년 안에 파커는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을 약속하는 대가로 미국 시민권을 얻을 기회를 얻었지만, 신청하지 않았다.[50]
대신 파커는 힐스버러 카운티 휴메인 소사이어티의 현장 요원으로 취직하여 안정적인 수입과 거주지를 확보했다.[50] 그는 소사이어티의 기금 모금을 위해 미니 펄, 에디 아놀드와 같은 컨트리 가수들을 초청하는 행사를 기획하며 다시 음악 홍보에 참여하게 되었다.[50]
1945년, 파커는 에디 아놀드의 전임 매니저가 되어 수입의 25%를 받는 계약을 맺고,[51] 아놀드의 히트곡, 텔레비전 출연, 라이브 투어를 성사시키는 데 기여했다.[51]
1948년, 파커는 루이지애나주 주지사 지미 데이비스로부터 루이지애나 주 방위군 명예 대령 계급을 받았다.[51] 그는 이 칭호를 평생 사용하며 '대령'으로 불리게 되었다.[51]
1952년, 파커는 젊은 가수 토미 샌즈를 발굴하여 홍보하기 시작했다.[52] 그는 샌즈를 로이 로저스와 같은 스타로 만들려 했으나, 샌즈는 이에 관심이 없었다. 파커는 샌즈의 데모 녹음을 RCA 레코드의 스티브 숄즈에게 보냈고, 숄즈는 샌즈에게 맞는 곡을 찾아주겠다고 약속했다.[52]
1953년, 에디 아놀드는 행크 스노우와의 관계가 깊어진 파커를 해고했지만,[51] 파커는 아놀드의 라이브 투어에 계속 참여하며 계약 해지를 위해 5만달러를 요구했다.[51] 이후 파커와 스노우는 협력하여 행크 스노우 엔터프라이즈와 잠보리 어트랙션을 설립하고, 컨트리 가수들을 위한 성공적인 홍보 회사를 만들었다.[51]
3. 2. 엘비스 프레슬리와의 만남 (1955)
1955년 초, 파커는 엘비스 프레슬리에 대해 알게 되었다. 프레슬리는 당시 유행하던 것과는 다른 독특한 창법을 구사했고, 파커는 이 음악 스타일에 주목했다. 당시 파커는 프레슬리가 흑인이라고 생각했다.[9] 프레슬리의 첫 매니저는 기타리스트 스코티 무어였는데, 이는 선 레코드 소유주 샘 필립스가 부도덕한 기획자들로부터 프레슬리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53]프레슬리는 스코티 무어, 베이시스트 빌 블랙과 함께 더 블루 문 보이즈라는 밴드를 결성했다. 프레슬리가 필립스와 계약을 맺었을 때 무어와 블랙은 계약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필립스는 두 사람에게 자신과가 아닌 프레슬리와 개별 계약을 맺도록 말했다.[54] 무어에 따르면, 수입의 절반은 프레슬리가, 나머지 절반은 무어와 블랙이 나누는 것으로 합의되었다.[54] 무어가 프레슬리와 맺은 1년 매니지먼트 계약은 수수료로 수입의 10%를 무어에게 지급하도록 규정했지만, 무어는 실제로 이것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프레슬리 등이 첫 녹음을 한 지 8일 후인 1954년 7월 12일자 계약서에는 프레슬리와 양친이 서명했다.[54] 이 계약이 만료되었을 때 멤피스의 라디오 방송국 진행자 밥 닐이 끼어들어 필립스와 계약하고 프레슬리의 매니저가 되었다. 이 시점에서 무어와 블랙은 필립스 및 프레슬리와의 계약이 없었다.[54]
닐은 새로운 고객의 성공을 따라가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1955년 2월 파커와의 만남 이후 프레슬리는 파커가 향후 공연 예약과 홍보의 일부를 맡도록 동의했다.[8]

파커와 닐은 프레슬리를 홍보하기 위해 함께 일했고, ''행크 스노우 투어''를 이용하여 그를 예약하고 투어했다.[8] 닐은 프레슬리의 공식 매니저였지만, 파커는 그의 경력 관리에 점점 더 관여하게 되었다. 1955년 여름까지 그는 프레슬리의 "특별 고문"이 되었다.[8] 프레슬리는 아직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그의 부모가 그를 대신하여 파커와 계약을 체결해야 했다.[10] 파커의 역할 중 일부는 더 유명한 음반사와 새로운 녹음 계약을 확보하는 것이었다.[8] 프레슬리는 경력 초부터 선 레코드에 있었지만, 샘 필립스는 미래에 성공하려면 훨씬 더 큰 브랜드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립스는 그를 빨리 떠나보내는 것을 꺼렸고, 파커에게 프레슬리의 계약을 확보하려면 당시에는 전혀 들어본 적 없는 금액인 4만 달러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8]
파커는 즉시 프레슬리를 위한 새로운 음반사를 찾기 시작했다. 머큐리 레코드와 컬럼비아 레코드 모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초기 제안은 4만 달러의 요구에 미치지 못했다. RCA 빅터, 행크 스노우의 현재 음반사도 관심을 보였지만, 계약 비용에 대해서는 다소 조심스러워했다. 그러나 RCA 빅터 프로듀서 스티브 숄스는 프레슬리의 음악 스타일이 적절한 음반사와 계약을 맺으면 엄청난 히트를 칠 것이라고 확신했고, 파커와 협상을 시작했다. RCA는 거의 무명인 가수를 위해 2만 5천 달러 이상을 지불할 의향이 없음을 분명히 했지만, 파커는 프레슬리가 평범한 무명 가수가 아니라고 설득했다.[8]
11월, 파커와 스노우는 RCA가 프레슬리를 선에서 4만 달러에 사도록 설득했고, 11월 21일 프레슬리의 계약은 공식적으로 선 레코드에서 RCA 빅터로 이전되었다.[11] 닐은 이 거래에서 더 큰 재정적 지분을 얻는 대가로 1956년 3월 계약 만료 후 프레슬리와의 매니지먼트 계약을 갱신하지 않기로 합의하여 파커가 그 자리를 차지할 기회를 얻었다.[57]
3. 3. 엘비스 프레슬리 매니지먼트 (1956-1977)
1955년 파커는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젊은 가수를 알게 되었다. 프레슬리는 당시 유행하던 것과는 다른 창법을 구사했고, 파커는 즉시 이 음악적 스타일의 미래에 관심을 가졌다.[51] 선 레코드 소유주 샘 필립스는 부도덕한 기획자들이 프레슬리를 이용할 것을 우려하여 기타리스트 스코티 무어에게 프레슬리의 첫 매니저가 되도록 권유했다.[53] 프레슬리가 필립스와 음반 계약을 체결하면서 무어와 베이시스트 빌 블랙은 제외되었고, 필립스는 그들에게 엘비스와 별도의 계약을 맺으라고 말했다.[54] 무어에 따르면, 프레슬리는 50%를 가져가고 무어와 블랙이 나머지 50%를 나누기로 합의했다.[54] 프레슬리와의 1년 매니지먼트 계약은 무어에게 10%의 수수료를 제공했지만, 그는 이를 한 번도 받지 않았다. 1954년7월 12일자 계약서에는 프레슬리와 그의 부모가 서명했다.[54] 계약이 만료되자 멤피스 라디오 방송인 밥 닐이 끼어들어 필립스와 프레슬리의 매니저가 되기로 계약을 맺었다. 이 시점에서 무어와 블랙은 필립스나 프레슬리와 계약 관계가 없었다.[54]닐은 새로운 고객의 성공을 따라가는 데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고, 1955년 2월 파커와의 만남 이후 프레슬리는 파커가 향후 공연 예약과 홍보의 일부를 맡도록 동의했다.[51] 파커와 닐은 프레슬리를 홍보하기 위해 함께 일했고, 그들의 ''행크 스노우 투어''를 이용하여 그를 예약하고 투어했다.[51] 닐은 프레슬리의 공식 매니저로 남았지만, 파커는 그의 경력 관리에 점점 더 관여하게 되었다. 1955년 여름까지 그는 프레슬리의 "특별 고문"이 되었다.[51] 프레슬리는 아직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그의 부모가 그를 대신하여 파커와 계약을 체결해야 했다.[55] 파커의 역할 중 일부는 더 유명한 음반사와 새로운 녹음 계약을 확보하는 것이었다.[51] 프레슬리는 경력 초부터 선 레코드에 있었지만, 샘 필립스는 미래에 성공하려면 훨씬 더 큰 브랜드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51]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립스는 그를 빨리 떠나보내는 것을 꺼렸고, 파커에게 프레슬리의 계약을 확보하려면 당시에는 전혀 들어본 적 없는 금액인 4만 달러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51]
파커는 즉시 프레슬리를 위한 새로운 음반사를 찾기 시작했다. 머큐리 레코드와 컬럼비아 레코드 모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초기 제안은 4만 달러의 요구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RCA 빅터도 관심을 보였지만, 계약 비용에 대해서는 다소 조심스러워했다. 그러나 RCA 빅터 프로듀서 스티브 숄스는 프레슬리의 음악 스타일이 적절한 음반사와 계약을 맺으면 엄청난 히트를 칠 것이라고 확신했고, 파커와 협상을 시작했다.[51] RCA는 거의 무명인 가수를 위해 2만 5천 달러 이상을 지불할 의향이 없음을 분명히 했지만, 파커는 프레슬리가 평범한 무명 가수가 아니라고 설득했다.[51]
1955년 11월, 파커와 스노우는 RCA가 프레슬리를 선에서 4만 달러에 사도록 설득했고, 11월 21일 프레슬리의 계약은 공식적으로 선 레코드에서 RCA 빅터로 이전되었다. 스노우는 엘비스가 파커와 함께 소유한 잼보리 어트랙션과의 매니지먼트 계약에 서명했다고 생각하고 서명식에 참석했다. 그러나 엘비스는 여전히 밥 닐과 계약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다. 11월 21일에 서명된 문서는 음반사 이전에 관한 것이었다.[56] 닐은 이 거래에서 더 큰 재정적 지분을 얻는 대가로 1956년 3월 계약 만료 후 프레슬리와의 매니지먼트 계약을 갱신하지 않기로 합의하여 파커가 그 자리를 차지할 기회를 얻었다.[57]
1956년3월 26일, 프레슬리의 매니지먼트 계약이 닐과 만료된 후, 프레슬리는 파커를 자신의 전속 대리인으로 하는 계약을 체결했다.[58] 이후, 행크 스노우가 파커에게 프레슬리와의 계약 상태에 대해 묻자 파커는 "당신은 엘비스 프레슬리와 아무런 계약도 맺고 있지 않습니다. 엘비스는 오직 콜로넬과 계약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59]
1956년, 프레슬리는 첫 번째 RCA 빅터 싱글인 "Heartbreak Hotel"로 스타가 되었고, 파커는 그의 새로운 스타를 전국 무대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는 프레슬리가 ''The Milton Berle Show''와 ''The Ed Sullivan Show''와 같은 인기 텔레비전 쇼에 출연하도록 주선하여 프레슬리를 텔레비전에서 가장 높은 출연료를 받는 스타로 만들었다.[60] 여름 무렵, 프레슬리는 그 해 가장 유명한 새로운 인물 중 한 명이 되었고, 새로운 십대 관객들 사이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켰지만, 일부 나이 많은 관객들과 종교 단체들 사이에서는 분노를 일으켰다.[60]
파커는 프레슬리를 브랜드화하기 위해 Beverly Hills의 영화 상품 판매업자인 행크 사퍼스타인과 거의 4만 달러에 달하는 계약을 체결했다.[60] 매력적인 팔찌부터 레코드 플레이어까지 78가지가 넘는 다양한 제품을 판매하면서, 프레슬리 상품은 1956년 말까지 2,2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60] 파커는 수익의 25%를 차지하며, "I Love Elvis"와 "I Hate Elvis" 버튼을 동시에 판매하는 등, 다른 매니저들이 결코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아티스트로부터 돈을 벌 방법을 찾았다.[60]
1956년 4월, 파커는 프레슬리의 경력에 대한 첫 번째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프레슬리를 라스베이거스에서 4주간 공연하도록 예약했는데, 라스베이거스가 유치하는 약간 나이가 많고 더 보수적인 관객들의 잠재적인 반응을 잘못 판단한 것이다.[61] 프레슬리가 미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었지만, 나이 많은 관객들은 그를 이상하게 여겼다.[61] 첫 몇 번의 쇼에서 냉담한 반응을 보인 후, 파커는 프레슬리의 공연 기간을 2주로 줄였다. 프레슬리는 이 사건을 그의 경력에서 최악의 순간 중 하나로 기억했다.[61]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프레슬리의 경력은 계속 성장했다. 프레슬리가 처음 만났을 때 연기에 관심을 보였다는 것을 기억하고, 파커는 Paramount Pictures와 함께 스크린 테스트를 주선했다. 회사는 프레슬리의 연기력에 감명받아 그와 7편의 영화 계약을 체결했다. 파커는 이 계약이 프레슬리가 다른 스튜디오와 매년 최소 한 편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도록 했고, 파라마운트에 직원과 함께 사무실을 설립했다. 프레슬리의 연기 경력은 처음에는 진지한 것으로 계획되었다. 그러나 파커는 프레슬리의 첫 영화인 ''Love Me Tender''의 싱글이 선주문만으로 100만 장 이상 팔리는 것을 보고 영화와 함께 싱글과 앨범을 홍보할 기회를 보면서 프레슬리가 영화에서 노래하도록 설득했다. 1956년 말까지 파커는 프레슬리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수입이 많은 연예인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
1958년 1월, 프레슬리는 미국 육군으로부터 징병 통지서를 받았다.[63] 프레슬리는 징집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의 경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마음 아파했지만, 파커는 은밀하게 기뻐했다.[62] 파커는 프레슬리가 군인이 되도록 설득하며 미래를 내다봤다. 프레슬리는 특수 부대에 입대하여 다른 군인들보다 더 편안하게 복무하면서 공연을 할 기회를 얻고 싶어 했다. 반면에 파커는 프레슬리에게 어떤 특별한 대우라도 주어지면 언론과 그의 음악 스타일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즉시 불리하게 이용될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파커는 또한 프레슬리의 징집을 막으려는 시도가 파커 자신의 복무 기록에 대한 더 자세한 조사를 초래할까 봐 두려워했다. 그는 또한 언론이 프레슬리의 입대, 즉 프레슬리의 상징적인 헤어스타일을 자르는 육군 이발을 목격하도록 함으로써 프레슬리를 홍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62]
프레슬리가 서독에서 복무하는 동안 파커는 프레슬리가 그곳에서 만날 수 있는 외부 영향에 대해 걱정했다. 파커는 프레슬리를 방문하기 위해 유럽에 가는 것을 거절했고, 영어 외에는 다른 언어를 할 줄 모른다고 주장했다. 그는 프레슬리의 친구들을 보내 그와 함께 있게 하고, 사업 파트너들을 배치하여 유럽에서 일하는 동안 그를 감시하게 했으며, 그와 정기적으로 연락을 취했다. 그는 프레슬리가 다른 매니저들이 그의 수입의 25%만큼이나 많은 수수료를 요구하지 않는 계약을 체결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까 봐 두려워했다고 한다.[64] 파커는 또한 프레슬리가 군대에 있는 동안 명성을 잃을까 봐 걱정했고, 그래서 프레슬리의 이름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그는 RCA 빅터와 대중이 더 많은 프레슬리 자료를 갈망하게 함으로써 프레슬리가 현역에서 복귀할 때 더 나은 계약을 협상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62] 그는 프레슬리가 입대 전에 5개의 싱글을 녹음하도록 주선하여 RCA 빅터가 2년 이상 발매할 수 있는 충분한 자료를 확보했다. RCA는 프레슬리가 서독에서 녹음하기를 원했지만, 파커는 녹음 스튜디오에 들어간다면 일반 병사로서의 명성을 망칠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레슬리에 대한 기사가 언론에 정기적으로 실렸는데, 여기에는 그가 복귀할 때 라이브 CCTV 방송을 할 것이고 전국에서 방송될 일련의 연례 텔레비전 특집 프로그램에 대한 계약을 체결했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64] 이 모든 이야기는 날조된 것이었지만, 그것들은 프레슬리의 이름을 대중의 의식 속에 유지시켰다.
1960년 3월 프레슬리의 복귀를 위해 파커는 워싱턴 D.C.에서 멤피스까지 그를 태우는 기차를 마련했고, 팬들이 그들의 우상을 직접 볼 수 있도록 중간에 정차했다.[65]
1950년대에 프레슬리를 록앤롤의 수치라고 선언했던 프랭크 시나트라는 그를 ''프랭크 시나트라 쇼''에 출연시키고 싶어 했다.[66] 파커는 혹독한 비판을 잊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두 곡을 부르는 데 125000USD를 요구했는데, 총 8분 동안 화면에 출연하는 조건이었다. 시나트라 본인은 쇼 전체에 이보다 적은 금액을 받았지만,[67] 그는 동의했다. "Welcome Home, Elvis" 쇼는 1957년 1월 ''에드 설리번 쇼'' 이후 프레슬리의 첫 전국 TV 출연이었다.
시나트라 스페셜 이후, 파커는 프레슬리의 미래가 할리우드에 있다고 판단했다.[66] 그는 프레슬리가 영화 배우가 되면서 엔터테인먼트 기계가 되어, 10년이 끝날 때까지 매년 3편의 장편 영화와 사운드트랙을 쏟아낼 것으로 예상했다.[66] 그는 1961년에 자선 행사로 3번의 라이브 공연을 허용했는데, 2번은 멤피스에서, 1번은 하와이에서 열렸다.[66] 그 후 프레슬리는 1968년까지 라이브 공연을 하지 않았고 팬들과의 접촉도 최소화되었다.[66] 파커는 할리우드 영화 스튜디오와 장기 계약을 체결하여,[68] 그와 프레슬리 모두에게 일자리와 수입을 보장하려 했을 것이다. 이는 뒤돌아보면 그의 실수였다. 만약 그가 이전 영화의 수익을 기준으로 각 계약을 별도로 협상했다면,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68] 1960년대 내내 파커는 프레슬리의 영화 계약을 지속적으로 재협상하면서, 종종 그의 고객의 시나리오나 우려 사항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69] 이러한 거래는 때때로 스튜디오에 너무 가혹하여 프로듀서 할 윌리스가 "악마와 거래하는 것이 낫겠다"라고 말할 정도였다.[69]
프레슬리는 RCA 빅터에 연간 3개의 앨범만 제공하면 되었고,[66] 그의 영화 사운드트랙이 이를 충족시켰다. 콘서트 투어나 대중 앞에서의 활동이 없었기에 파커는 비용을 최소한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66] 처음 몇 년 동안 프레슬리의 영화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고, 그의 앨범은 차트 1위를 차지했으며, 출시된 싱글은 대부분 히트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비틀즈가 음악 차트를 지배하기 시작하고 비틀마니아로 알려진 세계적인 현상이 시작되면서 프레슬리의 중요성은 줄어들었다. 프레슬리의 영화는 여전히 돈을 벌었고, 그의 앨범도 여전히 잘 팔렸지만, 수익은 감소했다. 이로 인해 파커는 영화를 저렴하게, 엄격한 일정으로, 최대한의 문제없이 제작할 것을 주장했다.[68]
1968년 텔레비전 스페셜 ''엘비스''(싱어 재봉틀 협찬)와 "Suspicious Minds", "In the Ghetto"와 같은 노래가 포함된 일련의 녹음 세션이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열리면서 프레슬리의 음악적 명성이 회복되었다. 텔레비전 스페셜 프로듀서인 스티브 바인더는 프레슬리가 자신의 옛 히트곡을 부르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바인더는 또한 프레슬리가 그의 옛 밴드인 스코티 무어와 D. J. 폰타나와 함께 연출된 부분을 공연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이는 프레슬리의 분장실에서 리허설 후 비공식적인 즉흥 연주에서 영감을 받았다. 프레슬리는 보통 파커에게 반항하지 않았지만, 이 TV 쇼가 제대로 된 컴백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바인더의 지원을 받아 프레슬리는 파커에게 "바인더 방식"으로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의 직감은 옳았다. TV 스페셜은 엄청난 히트를 쳤고, 스페셜의 공연을 담은 앨범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스페셜 이후 파커는 프레슬리의 라이브 공연 복귀를 관리했는데, 여기에는 짧은 미국 투어와 라스베이거스 스트립에서의 많은 공연이 포함되었다. 프레슬리의 라스베이거스 복귀가 성공한 후 파커는 인터내셔널 호텔과 계약을 맺어 프레슬리가 주당 125000USD로 한 달 동안 공연하도록 보장했는데,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프레슬리의 경력의 이 기간 동안 파커와 프레슬리는 50/50 "파트너십"에 동의했는데, 파커가 상품 판매 및 기타 음악 관련 없는 항목을 관리하면서 파커가 그의 고객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렸다.[21]
프레슬리의 라스베이거스 라이브 공연 복귀가 성공한 후 파커는 프레슬리가 13년 만에 처음으로 투어를 해야 할 때라고 결정했다.[22] 투어는 재정적으로 매우 성공적이어서 그의 남은 생애와 경력에 대한 프레슬리의 업무량을 결정했다. 이러한 투어 동안 파커의 주요 역할은 물류를 계획하고 티켓 판매를 보장하는 것이었다.[22] 그는 보통 공연장에 먼저 가서 프레슬리의 수행원들이 도착하기 전에 모든 것을 준비하는 것을 책임졌다. 그 결과 그는 프레슬리와 거의 만나지 못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파커가 프레슬리와 연락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다.[22] 이러한 라이브 공연은 재정적으로 수익성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파커가 RCA 빅터와 맺은 프레슬리의 음반 계약을 이행할 수 있도록 했다. 1969년에서 1972년 사이에 RCA는 3장의 라이브 자료 앨범을 발매했다.[23]
1972년까지 파커는 프레슬리의 라스베이거스 주급을 150000USD로 인상했고 "호텔 체인 컨설턴트"로 연간 50000USD를 확보했다.[73] 파커는 또한 프레슬리가 뉴욕으로 돌아가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6월에 공연을 할 때라고 결정했다.[73] 원래 세 번의 공연으로 계획되었지만, 수요가 너무 높아 파커는 네 번째 공연을 추가하기로 결정했고, 프레슬리는 이 공연장을 네 번 연속 매진시킨 최초의 공연자가 되었다. 이 네 번의 공연만으로 730000USD의 수익을 올렸다.[73]
1972년 7월 8일, 몇 달 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서 영감을 받아[75] 파커는 전 세계가 프레슬리 콘서트를 볼 수 있도록 하와이에서 전 세계 위성 방송을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76] 1957년 캐나다에서 몇 차례의 콘서트를 제외하고 프레슬리는 미국 외에서 공연한 적이 없었다. 파커는 1972년 9월 4일 라스베이거스에서 다시 기자 회견을 열고, 이 콘서트가 현재 ''알로하 프롬 하와이''라는 제목으로 1973년 1월 14일에 방송될 것이라고 확인했다.[77] 언론은 "전 세계에 생방송으로 방송되는 최초의 엔터테인먼트 스페셜"을 보기 위해 10억 명의 시청자가 시청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들었다.[77] 파커는 유럽과 미국의 일부 지역을 포함한 많은 국가에서 방송 시간 때문에 콘서트를 생방송으로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다.[77] 파커는 라스베이거스 기자 회견 2주 후 ''호놀룰루 어드버타이저'' 칼럼니스트 에디 셔먼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78] 셔먼은 뉴스 기사에서 콘서트 입장료가 무료이고 대신 자선 단체에 기부를 해야 한다고 읽었다. 그는 프레슬리가 Kui Lee가 작사한 "I'll Remember You"를 녹음하고 계속 공연했으므로, 1966년 작곡가의 사망 이후 설립된 Kui Lee Cancer Fund에 기부할 수 있다고 파커에게 제안했다.[78] 다시 한 번 프레슬리의 자선적인 성격을 홍보할 기회를 보고 파커는 기꺼이 동의했다.[78] 앨범은 전 세계에 동시 발매되었으며 1974년 미국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는데, 이는 ''Roustabout'' 사운드트랙 이후 프레슬리의 첫 번째 앨범이었다.[79]
1973년 5월, 파커와 프레슬리의 아버지 버논은 프레슬리가 처방약에 점점 더 의존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의 약 공급을 끊으려고 시도했다.[80] 그들은 사립 탐정을 고용하여 약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아냈고, 더 이상 프레슬리에게 약이 전달되지 않도록 성공적으로 막았다.[80] 그러나 프레슬리는 자신의 요구를 충족시켜줄 다른 의사들을 찾았다.[80] 이후 몇 년 동안, 프레슬리의 측근 중 몇몇은 프레슬리에게 약을 끊도록 설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이야기했다.[80] 그는 그들의 고용주이자 급여를 지급하는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에게도 약을 얻는 주요 공급원이었다.[80] 프레슬리의 주치의인 조지 C. 니코풀로스는 종종 프레슬리가 약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그의 약을 위약으로 대체했다.[80] 이 속임수는 잠시 동안 성공했지만, 프레슬리가 이 속임수를 알아차린 후 다른 의사들을 찾았다.[80] 작가 알라나 내시는 파커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은 이유가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일 수 있다고 제안한다.[81]
"알로하" 스페셜 이후, 파커는 나중에 프레슬리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법정에서 사용될 거래를 했다. 그는 RCA 레코드에 프레슬리의 모든 백 카탈로그를 5400000USD에 구매할 기회를 제공했다. 당시 이 카탈로그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졌고, RCA는 처음에 그 가치를 훨씬 적게 계산했지만, 나중에는 음악 사업에서 가장 가치 있는 레코드 카탈로그 중 하나가 되었다. RCA에 백 카탈로그를 판매한 것은 프레슬리의 사후에 프레슬리의 유산이 1973년 이전에 제작된 모든 프레슬리 녹음에 대한 로열티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프레슬리는 파커에게 1973년에 프리실라 프레슬리가 이혼 소송을 제기함에 따라 다가오는 이혼 합의금을 지불할 자금을 마련해 달라고 요청했었다.[73]
1973년 9월 3일, 공연 마지막 날, 프레슬리가 좋아했던 힐튼 호텔 직원이 해고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프레슬리는 무대에서 배런 힐튼 힐튼 호텔 회장을 향해 격렬한 언어 공격을 가했다. 파커는 격분하여 쇼가 끝난 후 프레슬리의 분장실로 들이닥쳐 그와 대면했다. 둘 사이의 격렬한 말다툼 끝에 프레슬리는 파커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이 분노에 화가 난 파커는 "넌 날 해고할 수 없어. 난 그만두겠어!"라고 선언했다. 파커는 그들의 업무 관계가 끝났음을 받아들이고, 프레슬리에게 계약을 종료하기 위해 200만 달러를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파커는 이 돈을 자신이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거의 2주 동안 서로 모욕적인 말을 주고받은 후, 파커와 프레슬리는 함께 계속 일하기로 결정했다.[82]
프레슬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악화되는 약물 의존에 대해 걱정했지만, 파커는 이 문제를 무시하는 듯했다. 프레슬리의 밴드 멤버 몇몇은 나중에 파커가 상황이 얼마나 심각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프레슬리의 측근 친구들과 다른 멤버들은 파커가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부정적인 언론 보도에 대해서도 걱정했다고 주장했다. 파커 자신에 따르면, 그는 개인적으로 여러 번 이 문제에 대해 그의 고객과 이야기하려고 시도했지만, 파커가 프레슬리에게 가볍게 약을 끊거나 적어도 약물 복용과 폭식을 줄이라고 말할 때마다, 프레슬리는 파커에게 그의 개인적인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1974년부터 프레슬리의 체중 증가와 처방약 남용은 통제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그는 무대에서 약에 취한 듯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말을 더듬고 노래 가사를 잊어버렸다.[82]
1974년 2월, 라스베이거스 공연 중 파커와 함께 프레슬리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존 피터스를 만났다.[83] 그들은 프레슬리가 영화 ''스타 탄생'' 리메이크작에 스트라이샌드와 함께 출연할 가능성에 대해 논의했다.[83] 프레슬리는 배우로서 진지하게 인정받을 기회로 여기고 계약 조건이 충족된다면 그 역할을 맡겠다고 동의했다. 프레슬리의 친구인 제리 쉴링에 따르면, 프레슬리는 새로운 도전을 할 기회에 흥분했다고 한다.[83] 스트라이샌드의 제작사인 퍼스트 아티스트는 프레슬리에게 500000USD의 급여와 수익의 10%를 제안했다.[83] 프레슬리의 영화 계약을 항상 처리해 왔고 이 제안을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시작으로 여겼던 파커는 대신 1000000USD의 급여, 수익의 50%, 경비로 100000USD 추가, 사운드트랙 계약 세부 사항을 정리해야 한다고 요구했다.[83] 퍼스트 아티스트는 그토록 큰 요구에 익숙하지 않아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대신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에게 원래 급여 조건과 함께 그 역할을 제안했고, 크리스토퍼슨이 이를 수락했다.[83] 파커는 나중에 프레슬리가 계약을 그렇게 까다롭게 만들어 자신에게 그 역할을 제안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주장했지만, 프레슬리의 친구들 중 다수는 프레슬리가 그 역할을 잃고 격노했다고 말했기 때문에 파커의 주장에 반박했다.[83]
1975년 후반, 사우디 아라비아 정부는 프레슬리가 그곳에서 공연하는 대가로 파커에게 5000000USD를 제안했다.[83] 파커는 그 제안을 거절했고, 프레슬리는 그들이 10000000USD를 다시 제안했을 때 매우 기뻐했다.[83] 그러나 프레슬리가 쇼를 하고 싶어했음에도 불구하고 파커는 다시 이를 거절했다.[83] 남아메리카의 프로모터들도 2500000USD에 달하는 제안을 했지만, 그들 모두 파커에 의해 거절당했다. "글쎄, 2500000USD가 필요할 때 당신에게 전화하겠소."라고 그는 한 번은 그들에게 말했다.[83] 프레슬리는 새로운 매니지먼트를 고려하기 시작했고, Concerts West의 공동 설립자인 톰 훌렛이 그 일에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83] 훌렛의 회사는 프레슬리의 투어를 관리했고 레드 제플린과 같은 아티스트들과 함께 일했다. 당시 프레슬리를 아는 여러 사람들에 따르면, 훌렛과의 대화가 너무 많이 진행되어 계약이 거의 불가피해 보였다. 유럽 투어에 대한 세부 사항도 포함되었으며, 프레슬리의 계약을 인수하는 것은 훌렛과 그의 회사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83] 하지만 이에도 불구하고, 그 거래는 성사되지 않았다. 프레슬리의 전기 작가인 피터 구랄닉에 따르면, 프레슬리와 파커는 "어떤 의미에서 결혼한 부부와 같았으며, 상당 기간 동안 지속된 큰 사랑, 충성심, 존경심으로 시작하여 프레슬리의 말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쳤고, 그들은 헤어졌어야 했습니다. 관계의 규칙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지만, 다양한 이유로 어느 쪽도 떠날 용기가 없었습니다." 어쨌든 파커는 1977년 프레슬리가 사망할 때까지 중단 없이 프레슬리의 매니저로 남았다.
이 무렵, 파커는 프레슬리가 투어에서 휴식을 취하고 처방약 중독에 대처할 기회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프레슬리의 아버지에게 한 번 전화를 걸어 휴식을 취할 것을 제안했지만, 버논 프레슬리는 프레슬리의 끊임없고 사치스러운 지출 때문에 투어를 중단할 여유가 없다고 말했다. 버논은 또한 파커가 프레슬리의 투어를 계속하지 않으면 새로운 매니저를 찾겠다고 위협했다.[84]
1976년 7월, 프레슬리의 개인 보디가드 3명과 "멤피스 마피아"의 일원인 로버트 진 "레드" 웨스트, 그의 사촌 소니 웨스트 그리고 데이비드 헤블러는 버논 프레슬리에 의해 해고되었고, 그의 측근의 삶에 대한 폭로 서적, ''엘비스: 무슨 일이 있었나?''를 쓰기로 결정했다.[85] 그런 세부 사항이 그의 경력에 미칠 영향에 대해 걱정하며, 프레슬리는 그의 아버지를 통해 파커에게 출판을 막아달라고 요청했다. 파커는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실패했다.[85] 프레슬리의 친구인 래리 겔러에 따르면, 파커는 비밀리에 그 책이 출판되기를 원했고, 프레슬리가 자신의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이에 대해 무언가를 하기를 바랐다.
3. 3. 1. 해외 공연 부재 논란
엘비스 프레슬리의 팬들 사이에서는, 매우 매력적인 제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레슬리가 해외 공연을 1957년 캐나다에서 단 한 번밖에 열지 않은 이유에 대해 여러 추측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파커가 미국 여권을 취득할 수 없거나, 신청 단계에서 국외 추방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86] 파커는 미국 육군 퇴역 군인이자 미국 시민의 배우자로서 미국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었지만, 여권 취득에 필요한 미국 시민권을 신청하면 그동안 숨겨온 네덜란드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날 수 있었다.프레슬리는 1957년 캐나다의 온타리오 주 토론토, 오타와, 브리티시컬럼비아 주 밴쿠버에서만 해외 공연을 열었다.[86] 당시에는 미국과 캐나다 국경을 넘는 데 여권이 필요하지 않았다. 밴쿠버 공연의 사회를 맡았던 라디오 스타 Red Robinson|레드 로빈슨영어은 파커가 프레슬리와 동행하지 않고 워싱턴주에 머물렀다고 말했다. 그러나 파커는 국내 투어에도 모든 공연에 동행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것이 프레슬리가 해외 공연을 하지 않은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1974년 호주 공연에 100만달러의 보수가 제시되면서 프레슬리가 첫 해외 공연을 열 가능성이 높아졌지만, 파커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86] 프레슬리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파커의 과거와 여권 미취득 이유에 대한 추측이 오갔다.[86] 결국 파커는 해외 공연 의뢰에 응하려는 프레슬리의 의향을 묵살했지만, 프레슬리 자신도 해외 공연에만 강한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86]
프레슬리가 해외 공연을 하지 않은 다른 이유로는 다음과 같은 설이 있다.
- 파커가 해외 치안이 미국보다 나쁘다고 두려워했다.[86]
- 파커가 외부 영향(매니저, 대리인 등)을 통해 프레슬리가 계약 내용의 실태를 알게 될 가능성을 두려워했다.[86]
- 프레슬리 정도의 유명인이 공연할 만큼 큰 공연장이 없었다.[86] (이는 프레슬리가 해외 공연에 관심을 보였을 때 제기된 변명으로, 프레슬리는 다른 사람과의 심한 대립을 싫어해 반론하지 않았다.)
- 일부 흥행주들이 팬들에게 1장당 100달러의 입장권을 팔려고 했고, 파커는 팬들이 착취당하는 것을 원치 않아 해외 공연을 거절하는 이유 중 하나로 삼았다.[86]
진보 진영에서는 파커가 자신의 불법 체류와 과거가 밝혀지는 것이 두려워 프레슬리의 해외 공연을 막았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한다.
4. 엘비스 프레슬리 사후 (1977-1997)
1977년 8월, 엘비스 프레슬리는 투어 출발일 전날 테네시주 멤피스 자택에서 사망했지만, 파커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행동했다고 한다.[87] 또 다른 설에 따르면, 그는 의자에 쓰러지며 "이런 젠장 (Oh dear God)"이라고 중얼거리고, 즉시 프레슬리의 아버지 버논에게 연락하여 프레슬리의 이미지를 훼손하지 않도록 조언했다고 한다.[88]
향후 대응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파커는 "왜 묻는 거야. 그냥 계속 그를 매니지먼트할 거야! (Why, I'll just go right on managing him!)"라고 대답했다.[87] 파커는 부고를 받자 멤피스가 아닌 즉시 뉴욕으로 향해, 상품 판매 사업 관계 거래처와 RCA 간부들을 만나 프레슬리 관련 상품에 생길 거대한 수요에 대비하도록 지시했다.[87] 그 후 즉시 멤피스에서 거행된 프레슬리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조문객들은 하와이의 알로하 셔츠에 야구 모자를 착용하고 담배를 피우며, 관을 들려고 하지 않는 파커를 보고 놀랐다고 한다.[87] 장례식장에서 파커는 버논을 설득하여 프레슬리의 죽음과 관련된 사업 관리를 자신에게 위임하는 계약에 서명하게 했다.[87]
1978년 9월, 프레슬리 1주기를 앞두고 파커는 팬들이 모이는 "올웨이즈 엘비스 (Always Elvis)"라는 흥행을 개최하여 버논, 프레슬리의 전 부인 프리실라와 함께 라스베이거스 힐튼 로비에 프레슬리의 청동상을 헌납했다.[89]
프레슬리의 사망 후, 파커는 Factors Etc. Inc. 와 프레슬리 관련 상품의 라이선스 업무 제휴를 추진하여 프레슬리가 남긴 자산을 지탱하는 안정적인 수입을 확보했다.[90] 프레슬리는 이 회사의 22%, 파커는 56%, 나머지 22%는 다양한 거래 관계자가 소유했다.[91] 파커와 프레슬리 사이에 맺어진 부적절한 조언에 기반한 합의 때문에, 1973년 이전의 모든 음원에 의한 수입은 RCA가 독점하게 되었고, 에스테이트는 오로지 Factors Etc. Inc.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90] 그러나 파커는 여전히 프레슬리에게 지급되는 수입의 50%를 얻고 있었기 때문에, 세금을 지불한 후에 에스테이트의 유지를 위해 남겨지는 금액은 연간 100만 달러 미만이었다.[90]
1979년 1월, 프레슬리가 작사자 또는 작곡자로 이름을 올린 곡의 사용료가 프레슬리에게 납입되지 않은 것이 밝혀졌는데, 이는 파커가 미국 작곡가 작사가 출판자 협회(ASCAP)나 후발 주자인 BMI와도 계약하지 않도록 프레슬리에게 조언했기 때문이었다.[91] 이 분야의 전문가들은 당시 이로 인해 프레슬리가 잃은 금액이 수백만 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추정했지만, 파커에게도 거액의 손실이었을 것이다.
1980년 당시, 에스테이트 유지를 위해 연간 50만 달러 정도가 필요하다고 추산되었다.[90] 프리실라와 유산 관리를 맡은 트러스트는, 계속해서 파커가 프레슬리 관련 사업에 관여하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이 인정받도록 법정에서 소송을 제기했다.[92] 그러나 조셉 에반스 판사(Judge Joseph Evans)는 프레슬리의 장녀 리사 마리 프레슬리가 미성년자였던 점을 감안하여, 법정 변호사 블란차드 E. 투알(Blanchard E. Tual)을 지명하여 파커의 매니지먼트에 대한 조사를 명령했다.[90][92] 이전에 리사 마리의 소송 후견인(guardian ad litem)으로 지명되기도 했던 투알은, 파커가 프레슬리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했던 전 기간에 걸쳐 정밀 조사하여, 우선 파커의 50%에 달하는 보수가 업계 평균 수준인 15-20%에 비해 과도하다는 것을 확인했다.[90] 투알은, 프레슬리가 생존해 있는 동안 파커의 업무 방식에 대해, 특히 1973년에 과거의 모든 음원에 관한 제 권리를 RCA에게 540만 달러에 매각한 것을 "비윤리적(unethical)"이고, 부주의한 대처였다고 논했다.[92] 그 후, 두 번째의 보다 상세한 조사에 의해, 모든 수입은 직접 파커에게 들어가지 않고, 전액이 일단 트러스트에 들어간다는 것을 투알은 확인했다.[90] 이 시점까지 미국 국세청(IRS)은 1500만 달러에 가까운 지불을 요구하고 있었고, 에스테이트는 파산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90] 결국 파커의 악행이 드러난 것이다.
1981년 8월 14일, 에반스 판사는 엘비스 프레슬리 엔터프라이즈에 대해, 부적절한 관리(mismanagement)를 해 온 파커를 제소하도록 지시했다.[92] 이에 대해 파커는 반소했다.[92] 파커에 대한 소송은 1983년에 법정 밖에서의 합의로 마무리되었다. 에스테이트는 200만 달러를 지불하고,[92] 5년 동안 프레슬리 관련 사업에서 파커를 해임했다.[90] 또한, 파커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프레슬리의 음원 및 영상의 모든 권리를 포기해야 했다.[90]
프레슬리 사망 후, 파커는 힐튼 호텔의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었지만,[93] 일부에서는 프레슬리가 힐튼 호텔에 출연했을 때 카지노의 도박으로 진 빚을 갚고 있다는 시각도 있었다.[93] 이 직함을 이용하여, 파커는 이전과 같은 4층의 스위트룸에 계속 거주했지만, 1984년에는 도박 부채가 늘어나면서 파커는 퇴거당했다.[93] 그러나 겉으로는 파커와 힐튼의 관계는 이전과 변함없이 좋았고, 파커는 힐튼에 의한 프레슬리 사망 10주년 기념 행사를 지원했다.[93]
프레슬리 에스테이트와의 분쟁에도 불구하고, 파커는 유명 고객들을 잃지 않았다. 파커는 프레슬리 사망 후에 열린 다양한 추모 행사에 참석했고, 1993년에 미국 우정국이 프레슬리를 기리는 기념 우표를 발행했을 때도 모습을 드러냈다. 파커는 에스테이트와의 관계도 회복시켜, 프리실라의 초대에 응하여 멤피스에서의 특별한 의식과 행사에 참석하기 시작했다.[93] 그러나 때로는 유족의 감정을 거스르는 듯한, 에스테이트의 결정에 반하는 발언도 했다. 1994년, 리사 마리가 마이클 잭슨과 결혼한 후, 파커는 프레슬리가 생존해 있다면 이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발언했고,[93] 1993년에는 프레슬리가 전설적인 존재로 남아있고, 현저하게 열광적인 인기가 이익을 창출하는 것에 격분하여, "내가 엘비스에게서 뜯어낸 것은 그가 지금 뜯어내지고 있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I don't think I exploited Elvis as much as he's being exploited today)"라고 말했다.[93]
1994년, 캘리포니아주팜스프링스의 팜스프링 워크 오브 스타스에서 골든 팜 스타가 파커에게 수여되었다.[94]
1997년 1월 20일, 파커의 아내는 거실에서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즉시 그녀는 거실로 가서 의자 위에서 움직이지 않는 파커를 발견했다. 그는 심장 발작을 일으켰다.[95]
다음 날 아침, 파커는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 진단서에는 출생국은 네덜란드, 국적은 미국으로 기재되어 있었다.[95] 장례식은 힐튼 호텔에서 거행되었으며, 친구들과 에디 아놀드, 샘 필립스와 같은 과거의 동료들이 모였다.[95] 엘비스 프레슬리 재단을 대표하여 프리실라 프레슬리가 참석하여 다음과 같은 조사를 낭독했다. 참석자들은 대부분 이 문구를 파커의 생애에 대한 완벽한 요약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5. 논란 및 비판
톰 파커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매니저로서 그의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여러 논란과 비판에 직면했다.
주요 논란 및 비판:
- 과도한 수입 배분: 파커는 프레슬리 수입의 최대 50%를 가져갔는데, 이는 업계 평균인 10~15%에 비해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90]
- 지나친 통제: 파커는 프레슬리의 경력뿐만 아니라 사생활까지 지나치게 통제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프레슬리의 영화 계약을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시나리오나 프레슬리의 의견을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90]
- 예술적 자유 억압: 파커는 프레슬리의 음악적, 연기적 성장을 제한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프레슬리가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영화와 음악만을 선택하도록 강요했다.
- 약물 의존 방치: 프레슬리가 약물에 의존하는 것을 알고도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프레슬리의 주치의는 종종 프레슬리의 약을 위약으로 대체하기도 했지만, 파커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거나, 부정적인 언론 보도를 우려하여 문제를 외면했다는 주장이 있다.[24]
- 도박 중독: 파커는 심각한 도박 중독으로 인해 프레슬리의 재정에 악영향을 미쳤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카지노에서 큰 돈을 잃었고, 프레슬리가 사망했을 당시 힐튼 호텔에 3000만달러 이상의 도박 빚을 지고 있었다.[90]
- 프레슬리 사후 문제:
- 프레슬리 사망 이후, 파커는 Factors Etc. Inc.와 라이선스 사업을 시작하여 프레슬리 상품을 관리하고 그의 유산을 지원하기 위해 안정적인 수입을 유지하려 했다.[4]
- 1973년 이전의 모든 녹음 로열티 소유권은 RCA에 전적으로 귀속되었기 때문에 유산은 Factors Etc.의 수입에 크게 의존했다.[4]
- 파커는 여전히 프레슬리의 모든 수입의 50%를 받을 자격이 있었고, 세금을 공제한 후 유산 유지를 위해 쓰이는 전체 금액은 연간 100만달러 미만이었다.[4]
- 1980년까지 유산 운영 비용은 연간 50만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90]
- 엘비스 프레슬리 엔터프라이즈는 파커를 관리 부실로 고소했고, 파커는 맞소송을 제기했다.[92]
- 파커를 상대로 한 소송은 1983년에 법정 밖에서 합의되었으며, 유산은 그에게 200만달러를 지불하고, 향후 5년 동안 프레슬리와 관련된 모든 수입에 대한 관여를 종료했다.[92]
- 기타 비판:
- 파커는 프레슬리가 ASCAP 또는 BMI에 가입하지 말라고 부적절하게 조언하여 프레슬리가 저자 또는 작곡가로 이름을 올린 곡에 대한 로열티를 잃게 했다.[91]
- 에디 머피와 맥 데이비스는 파커가 인종차별적인 행동을 했다고 증언했다.
이러한 논란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파커는 프레슬리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프레슬리 자신도 "그가 없었다면 이렇게 커지지 못했을 거야. 그는 매우 영리한 남자야"라고 말하며 파커의 능력을 인정했다.[42][43]
6. 대중문화 속 묘사
톰 파커는 여러 미디어에서 다양한 배우들에 의해 묘사되었다.
- 1979년 TV 영화 《엘비스》에서는 팻 힝글이 파커 역을 연기했다.
- 1988년 TV 영화 《엘비스 앤 미》에서는 휴 길린이 파커 역을 연기했다.
- 1993년 TV 영화 《엘비스 앤 더 콜로넬: 언톨드 스토리》에서는 보 브리지스가 파커 역을 연기했다.
- 2005년 CBS 미니시리즈 《엘비스》에서는 랜디 퀘이드가 파커 역을 맡아 골든 글로브, 에미상 및 새틀라이트 어워드를 수상했다.
- 2016년 영화 《샹그릴라 스위트》에서는 존 캐롤 린치가 파커 역을 연기했다.
- 2017년 CMT TV 시리즈 《선 레코드》에서는 빌리 가델이 파커 역을 연기했다.
- 2022년 영화 《엘비스》에서는 톰 행크스가 파커 역을 연기했다.
- 비베크 티와리의 그래픽 노블 전기 《제5의 비틀(The Fifth Beatle)》(2013)은 비틀즈의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을 다루며, 1960년대 중반에 파커와 엡스타인 사이에 있었던 만남을 묘사한다. 이 장면에서 파커는 탐욕스럽고 사탄적인 인물로 풍자된다.[98]
- TV 드라마 《바이닐》에서 레코드 회사 사장 리치 피네스트라(바비 카나베일)는 1973년 라스베이거스에서 엘비스 프레슬리를 만나고, 대령(진 존스)은 리치에게 분노하며 엘비스에게 총을 겨누게 한다.[39]
- TV 드라마 ''그린 에이커스''에서 유스타스 헤이니 씨(팻 버트램)는 1950년대에 버트램이 만났던 파커에게서 영감을 받았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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