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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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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평원왕은 고구려의 제25대 왕으로, 559년에 즉위하여 590년에 사망했다. 그는 용감하고 궁술에 능했으며, 왕권 약화 속에서 농업과 양잠을 장려하고 왕실 식단을 줄이는 등 백성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수, 진, 북제, 북주 등 주변 국가들과 비교적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며 조공을 보냈고, 570년에는 왜(일본)와 화친을 맺었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고구려를 압박하자 군사력을 강화했으며, 온달 장군과 평강공주 설화의 배경이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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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원왕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평원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강서대묘
칭호태왕
재위 기간559년 3월 ~ 590년 10월
즉위559년 3월
이전 국왕양원왕
다음 국왕영양왕
고양성/고탕
출생지평양성
사망일590년 10월
사망 장소평양성
능묘강서대묘
자녀대원
건무
대양
평강공주
존호평안상호태왕, 평강태왕
시호평원태왕
왕족
왕조고구려
직업
종교불교
왕세자
재위 기간557년 4월 ~ 559년 3월
즉위557년 4월
이전 왕세자평성
다음 왕세자대원
이름
한글평원왕, 평강(상호)왕
한자平原王, 平岡(上好)王
로마자 표기Pyeongwon-wang, Pyeonggang(sangho)-wang
한글 (출생)양성 or 탕
한자 (출생)陽成 or 湯
로마자 표기 (출생)Yangseong or Tang

2. 생애

양원왕의 아들로 557년태자로 책봉되었고, 559년에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 중국, , 북제, 북주 등 여러 왕조와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570년에는 (일본)와도 화친하였다. 북주의 무제가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온달 장군의 활약으로 이를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586년에는 수도를 장안성으로 옮겼다. 평원왕의 시대는 수나라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점차 고구려를 압박하기 시작했으며, 한반도 내에서는 신라백제나제동맹이 깨져 삼국 간의 대립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또한, 온달 장군과 평강공주 설화의 배경이 된 시대로도 알려져 있다.

589년 수나라중국 대륙을 통일하자, 평원왕은 수의 침략 가능성을 우려하여 군사력을 강화하는 등 대비에 힘썼다. 재위 32년째인 590년에 사망하였다.

2. 1. 재위 기간

양원왕의 아들로, 557년태자로 책봉되었고 559년에 왕위에 올랐다.[1][3] 즉위 당시 왕권은 귀족 세력에 의해 상당히 약화된 상태였으나, 평원왕은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농업과 양잠을 장려하고 왕실의 식사 비용을 줄이는 등 민생 안정에 힘썼다.[3][4] 개인적으로는 용맹하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다고 전해진다.[1][3] 565년에는 아들 원(元)태자로 삼았다.

평원왕 재위기는 중국 대륙이 분열되어 있던 시기에서 수나라에 의해 통일되는 격변기였으며, 한반도 내에서는 신라백제나제동맹이 깨지고 삼국 간의 대립 구도가 새롭게 형성되던 시기였다. 유명한 온달 장군과 평강공주 설화의 배경이 된 시대로 알려져 있다.

대외적으로 평원왕은 중국의 여러 분열된 왕조들(북제, 북주, ) 및 북방의 돌궐과 긴장 관계 속에서도 비교적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여러 차례 조공 사절을 보내며 외교 관계를 맺었고, 각 왕조로부터 책봉을 받았다.[1][3]

  • 560년: 북제로부터 '사지절·영호동이교위·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으로 책봉됨.
  • 562년: 으로부터 '녕동장군'으로 책봉됨.
  • 577년: 북주로부터 '개부의동삼사·대장군·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으로 책봉됨.


570년에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기도 했다. 그러나 577년 요동 반도에서 북주와 잠시 군사적 충돌이 있었으며,[1][3] 북주 무제의 침입을 온달의 활약으로 물리쳤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한반도 내에서는 나제동맹 붕괴 이후 삼국 간의 대립이 심화되었지만, 오히려 이전보다 대규모 전쟁은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신라가 독자적으로 중국조공-책봉 관계를 맺으면서 고구려의 동아시아 내 우위가 약화되었고, 삼국 모두 중국의 정세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추구하게 되었다.

581년 수나라가 건국되자 평원왕은 즉시 조공 사절을 보내 '대장군·요동군공'으로 책봉받는 등 관계를 맺었다. 586년에는 수도를 평양의 장안성으로 옮겼는데,[3] 이는 다가올 수나라와의 충돌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되기도 한다.

589년 수나라가 마침내 을 멸망시키고 중국 대륙을 통일하자, 평원왕은 수나라의 침략 가능성을 심각하게 우려하여 국방력 강화에 총력을 기울였다.[5] 병사들에게 군사 훈련을 강화하도록 명령하고 군수 물자를 비축하는 등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5] 수나라는 고구려의 이러한 움직임을 경계하며 책망하기도 했다.

평원왕은 수나라에 사죄의 뜻을 담은 표문을 보내려 했으나, 사신을 보내기 전인 590년 10월, 재위 32년 만에 사망하였다. 사후 '평원왕(平原王)'이라는 시호를 받았다.[1] 그의 정확한 사망 원인이나 매장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삼국사기』는 평원왕의 사망 연도를 590년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수서』나 『자치통감』 등의 중국 기록에는 개황 17년(597년)에 고구려 왕이 수나라의 조서를 받았다는 내용이 있어 약간의 혼선이 있다. 『삼국사기』는 해당 조서를 받은 왕이 평원왕이며 그의 사망은 590년이 맞다는 입장에서 관련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2. 2. 대외 관계

평원왕 재위 시기 고구려는 중국의 여러 왕조 및 주변국과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 북제, 북주 등 분열된 중국 왕조들과 긴장 속에서도 비교적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으며,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조공하며 외교 관계를 이어갔다.[1][3] 북방의 돌궐과도 긴장 관계를 유지했다.[1][3] 570년에는 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기도 했다.

고구려는 각 중국 왕조로부터 다음과 같은 책봉을 받았다.

연도왕조책봉 내용
560년북제사지절·영호동이교위·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
562년녕동장군
577년북주개부의동삼사·대장군·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
581년대장군·요동군공



577년에는 북주의 무제가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요동 반도에서의 전투에서 온달 장군의 활약 등으로 이를 물리쳤다.[1][3]

한편 한반도 내에서는 신라백제나제동맹이 붕괴되고 삼국 간의 대립 구도가 심화되었다. 특히 신라가 독자적으로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고 책봉 체제에 편입되면서, 고구려의 전통적인 외교적 우위는 약화되었다. 삼국은 각자 중국의 동향을 살피며 독자 외교를 펼쳤고, 이 시기에는 오히려 대규모 전쟁 발생 빈도는 낮아졌다.

589년 수나라을 멸망시키고 중국 대륙을 통일하자, 평원왕은 수의 침공 가능성을 크게 우려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전쟁 준비에 착수했다.[5] 고구려의 이러한 움직임에 수나라는 불쾌감을 표하며 책망했다. 평원왕은 관계 개선을 위해 사죄 사절을 보내려 했으나, 사신을 파견하기 전인 590년 10월에 사망하였다.

2. 3. 사망

589년 수나라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 대륙을 통일하자, 평원왕은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우려하여 즉시 방비 체제를 갖추었다.[5] 이듬해인 590년 진나라 멸망 소식을 듣고는 더욱 경계하여, 방어 목적으로 병사들에게 군사 훈련을 명령하고 군수 물자를 증강시켰다.[5]

고구려의 이러한 군사적 대비 움직임을 본 수나라는 이를 문제 삼아 고구려를 책망하였다. 이에 평원왕은 두려움을 느껴 사신을 보내 사죄하려 하였으나, 사신을 보내기 전인 재위 32년째인 590년 10월에 사망하였다. 그의 구체적인 사망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문서는 남아있지 않다.

사후 평원왕(平原王)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1] 매장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평원왕의 사망 연도에 대해서는 기록 간에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는 평원왕이 590년에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중국의 『수서』와 『자치통감』에는 수나라의 조서를 받은 해가 개황 17년인 597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는 중국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며, 평원왕이 조서를 받은 사실과 그의 사망 시점을 590년으로 보는 기록을 우선하여 기술하고 있다.

3. 가족 관계


  • '''아버지''' : 양원왕(陽原王) - 제24대 국왕
  • '''어머니''' : 미상
  • * '''조부''' : 안원왕(安原王)
  • * '''조모''' : 중부인(中夫人)
  • 부인 : 미상
  • * '''장남''' : 영양왕(嬰陽王) - 제26대 국왕. 이름은 원(元).
  • * '''차남''' : 영류왕(榮留王) - 제27대 국왕. 이름은 건무(建武).
  • * '''3남''' : 대양(大陽) - 보장왕의 아버지.
  • * '''장녀''' : 평강공주(平岡公主) - 온달(溫達)과 혼인했다.

4. 대중 문화

참조

[1] 웹사이트 평원왕 https://www.doopedia[...] Doopedia 2016-09-28
[2] 웹사이트 평원왕즉위하다 https://db.history.g[...]
[3] 웹사이트 King Pyeongwon http://world.kbs.co.[...] KBS World
[4] 웹사이트 큰가뭄이들다 https://db.history.g[...]
[5] 서적 Samguk sagi
[6] 서적 삼국사기
[7] 서적 수서
[8] 서적 평원왕이 즉위하다 https://db.history.g[...] 삼국사기
[9] 논문 평원왕대 고구려의 대외관계 : 요해지역의 동향을 중심으로 https://www.dbpia.co[...]
[10] 웹사이트 한국 고대 사료 DB https://db.history.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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