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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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제는 550년 고양에 의해 건국된 중국 남북조 시대의 북조 왕조이다. 북위의 육진의 난에 참여한 고환이 동위를 건국한 후, 그의 아들 고양이 동위 효정제로부터 선양받아 건국했다. 북제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돌궐과 연합하여 북주를 견제했으나, 후주 고위의 실정으로 인해 577년 북주에 의해 멸망했다. 신라와 외교 관계를 맺고 조공을 받기도 했으며, 만리장성을 건설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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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제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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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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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제 |
일반 명칭 | 북제 |
시대 | 남북조 시대 |
지위 | 제국 |
정부 형태 | 군주제 |
건국 | 550년 |
멸망 | 577년 |
건국일 | 550년 6월 9일 |
멸망일 | 577년 2월 28일 |
멸망 후 사건 | 고소의가 북주에 포획됨 |
멸망 후 날짜 | 580년 7월 27일 |
이전 국가 | 동위 |
이후 국가 | 북주 |
수도 | 업성 |
통화 | 중국 주화, 엽전 |
면적 | 1,500,000 km² (557년) |
현재 국가 | 중국 |
정치 | |
통치자 칭호 | 황제 |
주요 통치자 | 문선제 (550년 ~ 559년) 폐제 (559년 ~ 560년) 효소제 (560년 ~ 561년) 무성제 (561년 ~ 565년) 후주 (565년 ~ 576년) 안덕왕 (576년) 유주 (577년) |
2. 역사
고환과 고징을 거쳐 고양에 의해 건국된 북제는 건국 초기부터 멸망 때까지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북제는 550년 건국 이후, 북주와 화북 지방의 패권을 두고 다투었다. 돌궐과 연합하여 거란을 제압하고 북주군을 여러 차례 격퇴하는 등 군사적 우위를 점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제는 내부적으로 지배층 간의 갈등과 권력 투쟁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선비족계 무인과 한족계 문인 관료, 그리고 황제 측근 세력 간의 대립은 북제의 구심력을 약화시키는 주요 원인이었다.
후주 고위는 소인배들의 참언에 넘어가 곡률광, 고숙 등 유능한 장수들을 처형하는 실정을 저질렀다. 이로 인해 북제는 북주와 진나라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상실하고, 국내 혼란은 더욱 심해졌다. 결국 577년, 북주의 무제가 이끄는 선비족 군대의 침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패배하여 멸망하고 말았다.
신라는 564년과 572년에 북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36][37] 565년, 북제의 무성제는 조서를 내려, 신라 진흥왕을 사지절(使持節)·동이교위(東夷校尉)·낙랑군공(樂浪郡公)·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38]
2. 1. 건국 배경
고환은 북위 육진의 난에 가담하여 흉노계 부족 중 하나인 글호족(契胡族)의 추장 이주영에게 귀순하여 커다란 명성을 날렸다. 이주영이 국정을 농단하다 효장제 원자유에게 살해되자 자립하여 이주씨 일족을 멸망시켰다. 효무제 원수를 옹립하고 승상이 되어 북위의 실권을 장악해 권력을 휘둘렀다.[35]이후 효무제는 고환을 피해 서쪽의 군벌 우문태에게 의지했다. 고환은 효정제 원선견을 옹립하고 수도를 업으로 옮겨 동위를 건국, 서위와 대립했다. 547년 고환이 죽자 아들 고징이 지위를 계승했다. 직후 하남대행대(大行臺) 후경이 배신, 하남 영지를 갖고 남조 양나라에 귀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35]
고징은 모용소종을 파견해 후경과 양나라군을 격파하고 하남을 되찾았다. 패배한 후경은 양나라에 투항했으나 양나라가 동위와 수교를 맺자 위기에 몰린 후경은 난을 일으켜 양나라를 멸망시켰다(후경의 난).
550년 후경의 모반을 꺾은 고징은 주벽으로 인한 포악한 행동으로 양나라에서 투항한 난경(蘭京)에게 살해되었다. 고징의 동생 고양이 뒤를 이어 난을 수습하고 효정제에게 선양받아 제나라를 건국했다.[35]
2. 2. 북제의 성립과 발전
북위의 육진의 난에 가담했던 고환은 흉노 계열 부족 중 하나인 글호족(契胡族)의 추장 이주영에게 귀순하여 커다란 명성을 얻었다. 이주영이 국정을 농단하다가 효장제 원자유에게 살해당하자, 고환은 자립하여 이주씨 일족을 멸망시켰다. 이후 효무제 원수를 옹립하고 승상이 되어 북위의 실권을 장악했다.[35]효무제가 고환을 피해 서쪽의 군벌 우문태에게 의지하자, 고환은 효정제 원선견을 옹립하고 수도를 업으로 옮겨 동위를 건국하여 서위와 대립했다. 547년 고환이 죽자 그의 아들 고징이 지위를 계승하였다. 그 직후 하남대행대(大行臺) 후경이 배신하여 하남의 영지를 갖고 남조 양나라에 귀순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고징은 모용소종을 파견하여 후경과 양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하남을 되찾았다. 패배한 후경은 양나라에 투항했으나 양나라가 동위와 수교를 맺자 위기에 몰린 후경은 난을 일으켜 양나라를 멸망시켰다(후경의 난).
549년, 후경의 모반을 꺾은 고징은 양나라에서 투항한 난경(蘭京)에게 살해되었다.[35] 고징의 동생 고양 (문선제)이 뒤를 계승하여 난을 수습하고, 550년 효정제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제나라를 건국했다.[35]
당시 화북은 군사력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고, 경제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다는 평가를 받았다. 북제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돌궐과 결탁해 거란을 제압하고 북주군을 여러 번 격퇴하였다.
고씨 가문은 주벽(酒癖)과 기행(奇行)이 잦아 피를 부르는 사건이 많았지만, 대부분 우수한 군사적 재능을 타고났다. 익주를 병합하여 경제력을 강화한 북주에 대해 항상 군사적 우위를 지켰으나, 후주 고위는 소인배를 신임하여 그들의 참언으로 인해 북제의 군사력을 지탱하던 곡률광, 고숙 등의 명장들을 처형하는 실정을 거듭하다가, 577년 북주에게 멸망당했다.
2. 3. 쇠퇴와 멸망
고환 사후, 장남 고징이 권력을 이었으나 후경이 배신하여 양나라로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고징은 모용소종을 파견하여 후경을 격파했고, 양나라로 도망친 후경은 반란을 일으켜 양나라를 멸망 직전으로 몰아넣었다(후경의 난).[35]549년, 고징이 암살되자 동생 고양이 뒤를 이었고, 550년 동위 효정제로부터 선양받아 북제를 건국했다. 북제는 북주와 화북 지배권을 다투고, 북방의 돌궐을 격파하는 등 군사적 우위를 보였으나, 내부적으로는 선비계 무인과 한족계 문인 관료, 그리고 황제 측근 세력 간의 권력 다툼이 심화되어 구심력이 약화되었다.[35]
후주 시기에는 명장 곡률광이 숙청되고 북주와 진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상실했다. 이후에도 한족 관료와 선비계 측근 세력 간의 내분이 계속되어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주의 무제가 침공하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패배를 거듭, 577년에 멸망했다.[8][21][35]
왕조 멸망 후, 북제 황족들은 처음에는 관대한 처분을 받았으나, 목제파의 반란 미수 고발에 연루되어 대부분 처형되었다.[35]
2. 4. 신라와의 관계
564년과 572년에 신라는 북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36][37] 565년, 북제의 무성제는 조서를 내려, 신라 진흥왕을 사지절(使持節)·동이교위(東夷校尉)·낙랑군공(樂浪郡公)·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38]3. 문화
북제 시대에는 4세기의 참혹한 침략과 사회적 혼란 이후 중국 도자기 예술이 부활하였다.[16] 북제 무덤에서는 이전에 당나라에서 개발된 것으로 여겨졌던 녹색 디자인이 뿌려진 자기와 같은 아름다운 유물이 발견되었다.[12] 576년에 폐쇄된 북제 무덤에서는 당나라의 삼채 도자기 스타일의 전조로 여겨지는 항아리가 발견되었으며,[18] 사산 왕조 스타일의 인물이 디자인된 갈색 유약 도자기도 발견되었다.[12]
이러한 작품들은 당시 중국 전역의 금속 공예품과 부조 조각에서도 볼 수 있는 강력한 세계주의와 서아시아와의 활발한 교류를 시사한다.[12] 따라서 세계주의는 당나라가 등장하기 전인 6세기 북제 시대에 이미 유행했으며 종종 불교와 관련이 있었다.[12][19] 북제 조각상은 이전 부처의 묘사와는 뚜렷하게 구별되며, 키가 약 3피트 정도로 더 작고 기둥 모양을 띤다.[17]
3. 1. 민족 정체성
북제는 한족/선비족 혼혈 출신 통치자에 의해 건국되었지만, 선비족의 민족 문화적 정체성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북제는 살아남은 선비족인 토파 (역시 선비족)와 북위 궁정의 비한족, 그리고 모든 민족의 문인들을 한족에 가깝다고 여기며, 그들을 한얼 또는 한 아이들(漢兒)이라고 불렀다.[21] 그러나 북제는 한족과 때로는 중앙 아시아 출신의 신하들을 고용했다.[22] 일부 북제 엘리트 가문들은 불분명한 이유로 강한 반한족 감정을 표현했지만, 한족 엘리트 기원을 주장하기도 했다.[23]
문제의 아버지인 가오 환은 한족과 선비족에게 서로 다른 말을 했다. 한족에게는 "선비족은 너희의 고객이다. 너희는 그들에게 곡물과 천을 주고, 그들은 너희를 위해 싸우며 너희가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도록 해준다. 너희가 왜 그들을 미워하는가?"라고 말했고, 선비족에게는 "중국인들은 너희의 노예다. 그들은 너희를 위해 농사를 짓고, 여자들은 너희의 옷을 만들고, 너희에게 식량과 옷을 가져다주며, 너희를 따뜻하고 배부르게 해준다. 너희가 왜 그들을 억압하려 하는가?"라고 말했다.[24][25] 가오 환은 현재 허베이성에 해당하는 지역의 한족 가문인 보하이 가오씨(渤海高氏)의 후손이었다.[26] 그의 할아버지가 보하이에서 이주한 후 그의 가족은 한동안 내몽골에 살면서 선비족화되었다.[27][28]
3. 2. 종교
한 중국 학자가 이 시대에 불교 경전인 열반경을 튀르크어로 번역했다. 조로아스터교의 몇몇 영향은 이전 국가에서 북제 궁정으로 이어졌는데, 예를 들어 조로아스터교에서 신성하게 여겨지는 페르시아 개를 귀족과 환관들이 애완동물로 키운 것이 있다. 중국인들은 많은 페르시아 유물과 제품을 사용했다.[29]
4. 역대 황제
(文穆皇帝)
(문선제 추숭)
(문선제 추숭)
(神武皇帝)
(문선제 추숭)
(文襄皇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