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동인도 회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프랑스 동인도 회사는 1604년 프랑스 앙리 4세에 의해 설립되어 프랑스와 동인도 간 무역 독점권을 부여받았다. 17세기에 여러 차례의 시도와 실패를 거듭했으며, 1664년 장-바티스트 콜베르에 의해 재편되어 자본금 1,500만 리브르 규모의 주식회사로 출범했다. 마다가스카르 식민지 건설 실패 이후 인도 무역에 집중했으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의 경쟁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18세기에는 영국과의 잦은 전쟁과 내부 문제로 쇠퇴하여 1769년 폐지되었다가 1785년 재건되었지만,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1794년 최종 청산되었다. 청산 과정에서 부정 사건이 발생하여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인도 무역을 위해 다양한 화폐를 주조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664년 설립된 기업 - 프랑스 서인도 회사
프랑스 서인도 회사는 17세기 프랑스의 식민지 무역 확대를 위해 설립되어 북미와 남미 지역에 대한 독점적인 상권을 확보하고 세네갈과 기니만 연안에서 세금 감면 혜택을 누렸으나, 영국과의 전쟁으로 인한 재정 악화로 9년 만에 해산되었다. - 1664년 설립된 기업 - 크로넨버그 맥주
크로넨버그 맥주는 1649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시작되어 크로넨부르크로 이전한 후, 1922년 티그르 복을 거쳐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되었으며, 현재 칼스버그 그룹이 소유한 프랑스의 맥주 브랜드이다. - 프랑스의 역사 - 삼부회
삼부회는 프랑스에서 성직자, 귀족, 평민 대표로 구성된 신분제 의회로, 국왕의 과세 동의 기능을 수행하며 왕권 강화에 기여했으나, 프랑스 혁명 직전 소집 후 의결 방식 갈등으로 국민 의회 결성되어 해체되고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 프랑스의 역사 - 프랑스 제4공화국
프랑스 제4공화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수립되어 의회 권한이 강력한 양원제 공화정 체제였으나, 정치적 불안정과 식민지 문제에 직면하여 군부 쿠데타로 붕괴하고 프랑스 제5공화국으로 대체되었다.
프랑스 동인도 회사 - [회사]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회사 이름 | 프랑스 동인도 회사 |
원어 이름 | Compagnie française pour le commerce des Indes orientales |
원어 이름 (언어) | fr |
회사 형태 | 공개 회사 국영 기업 |
산업 분야 | 무역 |
설립일 | 1664년 9월 1일 |
설립자 | 장바티스트 콜베르 |
해체 | 1769년 해체 후 프랑스 왕실에 흡수, 1785년 재건, 1794년 파산 |
후신 | |
위치 | 로리앙 |
슬로건 | Florebo quocumque ferar |
슬로건 (라틴어) | 어디로 끌려가든 번성하리라 |
![]() | |
![]() | |
역사 | |
주요 활동 | 프랑스 동인도 무역 |
관련 인물 | |
관련 인물 | 마카라 아반친츠 |
2. 역사
1664년 재무총감 장 바티스트 콜베르의 주도로 프랑스 동인도 회사가 재편되어 루이 14세의 승인을 받았다. 이는 중상주의를 신봉했던 콜베르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모델로 삼아 추진한 정책이었다.
1680년대에는 회사가 파산하여 독점권을 상인들에게 임대해야 했다. 1716년 존 로가 프랑스 왕실에 국가 은행 설립과 지폐 도입을 제안하며 프랑스 경제를 신용 경제로 전환시키려 했다. 회사는 마다가스카르에 성공적인 식민지를 건설하지는 못했지만, 레위니옹과 모리셔스에 항구를 건설했다.
1666년 9월 4일, 프랑스는 무굴 제국 황제 아우랑제브로부터 수라트 항구에서 무역할 수 있는 왕실 허가를 받았다.[2] 1683년까지 퐁디셰리에 주목했지만, 회사의 만성적인 자본 부족은 해소되지 않았다.[2] 1738년까지 회사는 1,432명의 노예를 소유했으며, 그중 630명은 프랑스 섬에 거주했다. 식민지의 많은 노예들은 서아프리카의 세네감비아 지역에서 회사에 의해 수입되었으며, 여기에는 회사의 배에 강제로 복무한 아프리카 노예인 ''laptots''가 포함되었다.
1719년, 존 로에 의해 프랑스가 운영하던 모든 국영 무역회사(서방회사, 세네갈 회사, 아프리카 회사, 기니아 회사, 산도밍고 회사, 중국 회사 및 동인도회사)가 통합되어 '''인도회사'''(Compagnie des Indes)로 개칭되었다. 이때 주식도 왕립은행의 은행권과 통합되었으나, 버블 붕괴로 1725년 은행에서 분리되었다. 1731년, 아프리카와 루이지애나 무역을 분리하여 다시 동인도회사라는 이름으로 영업을 계속했지만, 일반적으로 이후에도 인도회사로 불렸다.
이처럼 동인도회사 또는 인도회사라는 명칭이지만, 무역 대상은 인도에 한정되지 않고 전 세계에 걸쳐 있었다. 특히 18세기 이후의 실태는 국영 무역의 '''종합상사'''였다.
1693년, 영불 식민지 전쟁으로 폰디셰리는 네덜란드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프랑스와 마르탱은 샹데르나고르로 옮겨 이곳을 새로운 중계 기지로 삼았다. 1702년의 함대 준비에서 자금난에 빠진 회사는 국왕에게 구제 자금을 청원했지만, 85만 리브르의 대부를 제공하는 대신 중역에게도 4만 리브르의 출자를 명령하고, 주주에게도 부담을 요구했다. 이 결정은 이 해의 주주총회에서 주주의 강한 반발을 받고, 1710년부터 회사는 점차 청산을 시작했다.
1769년에 일단 폐지되었으나, 1785년 재무총감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에 의해 재건되어 무역회사로서 1795년까지 활동했다. 청산 과정에서 인도회사 횡령 사건을 일으켰는데, 이는 조르주 당통파의 숙청 이유가 되었다.
잔무 정리가 끝난 1875년에는 인도차이나 은행이 설립되어 폰디셰리 등에서의 금융 업무를 계승했다.
2. 1. 설립 초기 (17세기)
1604년, 프랑스의 앙리 4세는 프랑스와 동인도 간 무역에 대한 15년 독점권을 부여하며 ''Compagnie des Indes Orientales''(동인도회사)의 설립을 승인했다.[2] 이 회사는 장바티스트 콜베르가 설립한 동일한 이름의 회사의 전신이었지만, 최초의 사업은 주식회사가 아니었으며 프랑스 왕실이 자금을 지원했다. 17세기에는 동인도와의 무역을 위한 여러 프랑스의 시도가 있었다. 그들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성공적인 사업 활동에 영향을 받았다. 1630년대부터 1660년대 초까지 프랑스의 노력은 규모가 작았지만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프랑스의 상선들은 페르시아만, 홍해, 그리고 인도 아대륙의 북서 해안을 항해했다.1664년 6월 5일 12명의 파리 대상인을 칙명으로 지명하여 위원으로 하고, 콜베르를 위원장으로 하는 회사 운영위원회를 설립했다. 회사의 자본금은 1,500만 리브르로 결정되었다. 그 출자 내역은 국왕이 5분의 1인 300만 리브르, 왕비와 왕세자는 각각 6만 리브르, 콩데 대공과 콩티 대공, 콜베르는 3만 리브르를 출자했다. 궁정 전체에서는 200만 리브르의 현금을 제공했다. 고등법원과 금융업자가 각각 200만 리브르, 상인조합이 65만 리브르를 인수하고, 리옹시가 100만 리브르, 파리시가 65만 리브르, 루앙시가 55만 리브르, 보르도시가 44만 리브르 등 거의 모든 도시가 인구 비율로 할당되었다.
1665년의 첫 항해는 300톤의 상선 3척과 코르벳으로 구성된 소규모 함대였다. 제2차 영란전쟁의 영향으로 귀환 중 1척이 영국에 침몰되었다. 이 보도는 회사의 신용을 떨어뜨리고, 제3차 항해까지 회사는 자금난에 빠졌다. 주주총회에서 파리 시장과 중역들은 마다가스카르섬 식민지 건설에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는 것에 항의하며 대립했다. 콜베르와 국왕은 식민지 경영에 고집했지만, 1669년 마다가스카르섬이 불모의 땅이라는 보고를 받고 단념, 회사는 인도 무역에 전념하게 되었다.

프랑스 동인도회사는 이웃 국가인 네덜란드와 영국(잉글랜드)을 본받아 1604년 앙리 4세에 의해 15년간의 유한 독점 특허장(Charter)을 부여받은 회사 조직으로 설립되었다. 이는 전년 프랑스에서 인도 항로가 개척된 데 자극받은 사건이었다. 1635년, 재상 리슐리외도 마다가스카르섬에 중계항을 건설하여 인도와의 무역을 활성화하려 했지만, 실패로 끝났고 네덜란드와 영국의 무역 독점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동인도회사의 구상은 한동안 방치되었지만, 루이 14세가 친정을 시작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중상주의 국책으로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재무총감 콜베르는 (동맹국이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모범으로 삼아 회사를 개조했다.
2. 2. 발전과 쇠퇴 (18세기)
무굴 제국의 쇠퇴와 함께 프랑스는 인도 남부의 지역 통치자들과 동맹을 맺어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인도의 정치 문제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1741년부터 조제프 프랑수아 뒤플레 지휘하의 프랑스는 인도인과 영국인 모두에 대해 공격적인 정책을 추구하다가 결국 로버트 클라이브에게 패했다.[2] 퐁디셰리와 찬데르나고르를 포함한 여러 인도 무역 항구는 1954년까지 프랑스의 통제하에 있었다.
프랑스의 주요 경쟁자는 영국이었다. 특히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과 같은 유럽에서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해 영국은 인도의 프랑스 영토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1763년 파리 조약에 따라 이 영토들은 프랑스에 반환되었다.[2] 이 회사는 재정적으로 유지할 수 없었고 1769년 폐지되었다.[2] 루이 15세는 1769년 칙령을 발표하여 회사가 로 평가된 모든 자산과 권리를 국가에 이전하도록 했다. 국왕은 회사의 모든 부채와 의무를 지불하기로 합의했지만, 회사 주식 및 어음 보유자는 1790년 기업 청산이 끝날 무렵 투자액의 약 15%만 받았다.[2]
이 회사는 1785년 재건되었으며,[2] 주당 1,000리브르로 40,000주가 발행되었다.[2] 7년 동안 희망봉 너머 국가들과의 모든 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받았다.[2] 하지만 이 합의는 프랑스 혁명을 예상하지 못했고, 1790년 4월 3일 이 독점권은 새로운 프랑스 의회의 법률에 의해 폐지되었으며, 수익성이 높은 극동 무역이 앞으로는 "모든 프랑스인에게 개방될 것"이라고 열렬하게 선언했다.[2] 경쟁이나 공식적인 불이익에도 익숙하지 않은 회사는 꾸준히 쇠퇴하여 1794년에 최종적으로 청산되었다.[2]
2. 3. 청산 스캔들
회사는 의도적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고, 그 과정에서 가장 악명 높은 스캔들에 휘말리게 되었다. 혁명정부의 공공안전위원회는 1793년 8월 24일 모든 주식회사를 금지하고, 특히 동인도회사의 자산과 서류를 압수했다. 청산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회사 이사들은 정부의 감독을 받는 대신 회사가 자체 청산을 할 수 있도록 고위 관리들에게 뇌물을 제공했다. 이 사실이 다음 해에 알려지자, 그 결과 발생한 스캔들로 인해 파브르 다글랑틴(Fabre d'Églantine)과 조제프 들로네(Joseph Delaunay)를 비롯한 핵심 몽타뉴파 의원들이 처형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한 내분은 조르주 당통의 몰락을 가져왔으며, 몽타뉴파 전체의 몰락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3. 화폐
4. 지도
5. 주요 연표 (일본어 문서)
연도 | 사건 |
---|---|
1604년 | 앙리 4세, 프랑스 동인도회사 설립 |
1635년 | 리슐리외 추기경, 마다가스카르섬에 항구 건설 |
1662년 |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 아유타야 주재 |
1664년 | 프랑스 동인도회사 설립 (초대 사장 프랑수아 카롱) |
1665년 | 부르봉섬(레위니옹) 식민지 시작 |
1673년 | 폰디셰리 상관 개설 |
1674년 ~ 1706년 | 프랑수아 마르탱, 폰디셰리 상관장 취임 |
1680년 | * 아유타야 왕조 나라이 왕, 외교 사절 프랑스 파견 (도중 조난) |
1684년 | * 제2차 아유타야 사절 프랑스 파견 |
1685년 | * 슈발리에 드 쇼몽 프랑스 사절단, 아유타야 도착, 태불 무역 조약 체결 |
1686년 | 제3차 아유타야 사절 프랑스 파견 |
1687년 | 프랑스 동인도회사 이사, 프랑스 사절단 이끌고 아유타야 도착, 태불 신조약 체결 |
1688년 | 아유타야 궁정 혁명, 프랑스 관계 악화 |
1693년 |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폰디셰리 점령 |
1697년 | 리스위크 조약, 폰디셰리 반환 |
1710년 | 동인도회사 청산 시작 (2번째 해산) |
1719년 | 국영 무역회사 통합, “인도회사”로 사명 변경 |
1724년 | 중국 광둥 상선 파견 |
1731년 | 동인도회사 재출발 |
1740년 | 프랑스섬(모리셔스섬) 점령 |
1740년 ~ 1748년 |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
1742년 | 조제프 프랑수아 뒤플렉스, 폰디셰리 총독 취임 |
1744년 ~ 1748년 | 제1차 카르나틱 전쟁 |
1749년 ~ 1754년 | 제2차 카르나틱 전쟁 |
1750년 | 뒤플렉스, 남인도 총독 취임 |
1751년 | 하부 버마 몬 왕국과 원조 조약 체결 |
1754년 | 뒤플렉스 해임, 영국과 휴전 |
1756년 | * 버마 알라웅파야 왕, 시람 항 점령, 프랑스 선박 2척 나포 |
1757년 | 플라시 전투 |
1758년 | 프랑스군, 마드라스 포위 (마드라스 포위전) |
1760년 | 영국군, 폰디셰리 포위 (이듬해 점령) |
1763년 | 파리 조약, 일부 상관 제외 모든 영토 상실 (폰디셰리 반환) |
1769년 | 동인도회사 청산 시작 (3번째 해산) |
1778년 | 폰디셰리 함락 (미국 독립 전쟁 프랑스 참전) |
1783년 | 베르사유 조약, 폰디셰리 등 점령지 반환 |
1785년 | 인도회사 재건 |
1793년 | 인도회사 청산 시작 (4번째 해산) |
1795년 | 인도회사, 사실상 소멸 |
1875년 | 잔무 정리 완료 |
1954년 | 프랑스 정부, 폰디셰리와 찬데르나고르 등 행정권 인도 반환 |
6. 평가 및 영향
프랑스 동인도 회사는 1604년 프랑스의 앙리 4세가 설립을 승인하고, 장바티스트 콜베르에 의해 재편된 국영 무역 회사였다.[2]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성공에 영향을 받았지만, 영국이나 네덜란드 공화국보다 반세기 이상 늦게 시작되어 초기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무굴 제국의 쇠퇴와 함께 프랑스는 인도의 정치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조제프 프랑수아 뒤플레 지휘하에 인도에서 영국에 대항하여 공격적인 정책을 추구했지만, 결국 로버트 클라이브에게 패배했다. 퐁디셰리와 찬데르나고르 등 일부 인도 무역 항구는 1954년까지 프랑스 통제하에 있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 등 유럽에서의 전쟁으로 인해 영국은 인도의 프랑스 영토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고, 1763년 파리 조약으로 프랑스는 대부분의 인도 식민지를 상실했다. 회사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어 1769년 폐지되었다.[2]
1785년 재건되었지만, 프랑스 혁명을 예상하지 못하고 1790년 독점권이 폐지되었고, 1794년에 최종 청산되었다.[2]
1664년 6월 5일 설립 당시 자본금은 1,500만 리브르였다. 출자 내역은 국왕이 300만 리브르(전체의 5분의 1), 왕비와 왕세자가 각각 6만 리브르, 콩데 대공과 콩티 대공, 콜베르는 3만 리브르였다. 궁정 전체에서는 200만 리브르의 현금을 제공했다. 고등법원과 금융업자가 각각 200만 리브르, 상인조합이 65만 리브르를 인수하고, 리옹시가 100만 리브르, 파리시가 65만 리브르, 루앙시가 55만 리브르, 보르도시가 44만 리브르 등 거의 모든 도시가 인구 비율로 할당되었다.
1693년 폰디셰리는 네덜란드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1702년 함대 준비에 자금난을 겪은 회사는 국왕에게 구제 자금을 청원했지만, 85만 리브르의 대부를 제공하는 대신 중역에게도 4만 리브르의 출자를 명령하고, 주주에게도 부담을 요구했다. 1710년부터 회사는 점차 청산을 시작했다.
1769년, 동인도회사는 케이프 이스트의 상업 특권이 정지되었다. 인도 무역은 자유화되었고, 회사와 국가와의 관계가 정리되어 본격적인 청산이 시작되었다. 회사는 국왕에게 모든 식민지, 동산, 부동산, 함대, 선원을 양도하고, 국고는 회사의 채무를 인수하여 상환 의무를 지고, 회사에 연리 1,200만 리브르를 지불하게 되었다.
1785년 4월 14일, 재무총감 칼론느가 신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사업이 재건되었다.[8] 왕실 재정 악화를 무역 수입으로 보충하려 했기 때문이다. 신회사는 구회사의 특권을 그대로 계승하고, 인도와 케이프타운 이스트의 상업 독점, 로리앙 항과 도크, 파리의 상관 이용권을 얻었다.
프랑스 혁명이 시작될 무렵, 영불 통상 조약(이든-레느발 조약) 덕분에 회사의 사업은 성공하여 주가는 액면을 초과하여 상승하고 있었다. 1790년, 보르도 대표가 연설하여 노예 무역 폐지를 반대하면서도 동인도회사는 상업 발전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폐지를 요구했다. 1791년 12월 13일, 아시니아의 하락을 조장하는 투기 대책으로 유가 증권 이전세가 신설되었지만, 동인도회사 이사는 이것을 불복하고, 지롱드파 재무대신 그라비에르의 공인 아래 탈세를 시작했다.
1875년 5월 15일에 마지막 주주총회가 열리고, 모든 잔여 자산을 분배하여 완전히 소멸했다.
참조
[1]
harvard_reference
[2]
웹사이트
The Compagnie des Indes
http://www.booneshar[...]
2008-03-06
[3]
웹사이트
The Compagnie des Indes
http://www.booneshar[...]
2008-03-06
[4]
서적
Catalogue général des manuscrits des bibliothèques publiques de France. Départements
https://books.google[...]
Plon, Nourrit & cie
2021-05-18
[5]
서적
A Collector's Guide to Books on Japan in English
https://books.google[...]
[6]
서적
[7]
서적
Diaspora as a Resource: Comparative Studies in Strategies, Networks and Urban Space
https://books.google[...]
LIT Verlag Münster
2021-05-18
[8]
서적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