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그라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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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르만 그라스만은 1809년 프로이센의 슈체친에서 태어난 독일의 수학자이자 언어학자이다. 그는 선형대수학의 기초를 다지고, 벡터 공간 개념을 최초로 제시했으며, '확장 이론'을 통해 다차원 공간을 연구했다. 수학 분야에서 인정받지 못하자 언어학으로 전향하여 인도유럽어족의 음운 변화에 대한 '그라스만 법칙'을 발표하여 언어학적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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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그라스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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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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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헤르만 귄터 그라스만 |
원어 이름 | Hermann Günther Graßmann |
출생 | 1809년 4월 15일 |
출생지 | 프로이센 슈체친 (현재 폴란드) |
사망 | 1877년 9월 26일 |
사망지 | 독일 제국 슈체친 |
국적 | 독일 |
학력 및 경력 | |
모교 |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
직업 | 수학자, 언어학자, 물리학자, 생리학자 |
근무 기관 | 슈체친 김나지움 |
학문적 정보 | |
분야 | 수학, 물리학, 언어학, 생리학 |
알려진 업적 | 다중선형대수학 벡터 공간 외대수 반가환수 그라스만 다양체 그라스만 법칙 (언어학) 그라스만 법칙 (색채) 색 공간 비벡터 그라스만 수 |
수상 | 튀빙겐 대학교 명예 박사 (1876년) |
2. 생애
헤르만 그라스만은 12명의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유스투스 귄터 그라스만은 목사이자 헤르만이 교육받은 슈테틴 김나지움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쳤다.
그라스만은 프로이센 대학교 입학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1827년부터 베를린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고전 언어, 철학, 문학 수업을 들었다. 그는 수학이나 물리학 수업은 듣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830년 베를린에서 학업을 마친 후 슈테틴으로 돌아온 그라스만은 김나지움에서 수학을 가르치기 위한 시험을 치렀지만, 하위 수준에서만 가르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그는 1844년 논문 ''Die lineale Ausdehnungslehre, ein neuer Zweig der Mathematik'' ('''A1''')에서 제시한 중요한 아이디어를 발견했다. 이 논문은 1862년 ''Die Ausdehnungslehre: Vollständig und in strenger Form bearbeitet'' ('''A2''')로 수정되었다.
1834년, 그라스만은 베를린의 게베르베슐레에서 수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년 후 슈테틴으로 돌아와 오토 슐레라는 새로운 학교에서 수학, 물리학, 독일어, 라틴어, 종교학을 가르쳤다. 이후 4년 동안 그는 모든 중등학교 수준에서 수학, 물리학, 화학, 광물학을 가르칠 수 있는 시험에 합격했다.
1840년, 그라스만은 라플라스의 ''천체역학 논고''와 라그랑주의 ''해석역학''을 바탕으로 벡터 방법을 사용하여 조석 이론을 설명하는 에세이를 제출했다. 이 에세이는 선형대수학과 벡터 공간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1847년, 그라스만은 "오버레러"(교장)가 되었고, 1852년에는 슈테틴 김나지움에서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아 교수가 되었다. 같은 해, 프로이센 교육부에 대학교 직책을 요청했지만, 에른스트 쿠머는 그라스만의 에세이에 대해 "부족한 형식으로 표현되었지만 칭찬할 만한 좋은 내용"이라고 평가하여 대학교 자리를 얻지 못했다.
1848-49년, 독일의 정치적 격변기에 그라스만과 그의 형제 로베르트는 입헌군주제 하의 독일 통일을 요구하는 신문 ''독일 주간지 (Deutsche Wochenschrift für Staat, Kirche und Volksleben)''를 발행했다. 그러나 헤르만은 신문의 정치적 방향과 의견이 달라지면서 신문에서 벗어났다.
1844년, 그라스만은 그의 걸작('''A1''')인 ''Ausdehnungslehre''를 출판했다. 이 책은 기하학을 대수적 형태로 만들면 공간 차원의 수가 3에 국한되지 않고 무한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1]
1846년, 뫼비우스는 그라스만을 좌표와 계량적 속성이 없는 기하학적 계산법을 고안하는 경쟁에 초대했다. 그라스만의 ''Geometrische Analyse geknüpft an die von Leibniz erfundene geometrische Charakteristik''는 우승작이었지만, 뫼비우스는 그라스만이 추상적인 개념을 도입하는 방식을 비판했다.
1853년, 그라스만은 색상이 혼합되는 방식에 대한 이론을 발표했으며, 그의 네 가지 색상 법칙은 그라스만의 법칙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결정학, 전자기학, 역학에 관해서도 글을 썼다.
1861년, 그라스만은 ''Lehrbuch der Arithmetik''에서 페아노의 산술 공리화를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3] 1862년, '''A1'''의 제2판('''A2''')을 출판했지만, '''A1'''보다 더 나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
그의 수학적 아이디어는 말년에 이르러서야 퍼지기 시작했다. 그는 언어학과 산스크리트어 연구에 몰두하며 독일어 문법 책을 쓰고, 민요를 수집하고, 산스크리트어를 배웠다. 2,000 페이지에 달하는 사전과 《리그베다》 번역본(1,000 페이지 이상)을 저술했으며, 현대 《리그베다》 연구에서 그의 저서는 종종 인용된다.
그는 산스크리트어와 그리스어에 존재하는 음운 규칙인 그라스만의 법칙을 발견했다. 이 업적으로 미국 동양 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876년 튀빙겐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2. 1. 유년 시절
헤르만 그라스만은 1809년 4월 15일 당시 프로이센에 속했던 슈체친에서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 유스투스 귄터 그라스만(Justus Günter Graßmann)은 목사이자 슈체친 김나지움의 수학·물리학 교사였다.[1] 그라스만은 12명의 자녀 가운데 셋째였다.[1]그라스만은 슈체친 김나지움을 다녔고, 1827년에 상경하여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1] 이 밖에 라틴어나 그리스어, 문학, 철학 수업도 수강하였으나, 수학이나 물리학은 공부하지 않았다.[1] 1830년 베를린에서 학업을 마친 후 슈테틴으로 돌아왔을 때 그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수학이었지만, 대학교에서 수학을 전공하지는 않았다.[3] 그는 1년 동안 준비하여 김나지움에서 수학을 가르치기 위한 시험을 치렀지만, 하위 수준에서만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결과를 얻었다.[3]
1834년 그라스만은 베를린의 게베르베슐레에서 수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4] 1년 후, 그는 슈테틴으로 돌아와 오토 슐레라는 새로운 학교에서 수학, 물리학, 독일어, 라틴어, 종교학을 가르쳤다.[4]
2. 2. 성년 시절
1830년에 슈체친으로 귀향한 그라스만은 수학 교사 자격 시험에 응시했으나 낮은 점수를 받아 초등학교 교사밖에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그라스만은 독자적으로 선형대수학을 연구하고 있었다.[1] 1834년에는 베를린 상업학교(Gewerbeschulede)에서 수학 교사로 일했으며, 이듬해 슈체친으로 돌아와 오토 학교(Otto-Schulede)에서 수학, 물리학, 국어, 라틴어, 종교 과목을 가르쳤다.[1] 1835년부터 1839년 사이에는 교사 자격 시험에 다시 응시하여 고등학교에서 수학, 물리학, 화학, 광물학을 가르칠 자격을 얻었다.[1]1840년, 그라스만은 선형대수학의 시초로 여겨지는 논문 《조수 간만 이론》(Theorie der Ebbe und Flutde)을 출판하고, 벡터 공간 개념을 최초로 제시하였다.[1] 1844년에는 자신의 이론을 집대성한 《선형 확장 이론: 수학의 새 분야》(Die Lineale Ausdehnungslehre, ein neuer Zweig der Mathematikde)를 통해 임의의 차원에서의 벡터 공간을 추상적으로 다루며 4차원 이상의 공간 개념을 제시하였다.[1] 1845년에는 《새로운 전기역학》(Neue Theorie der Elektrodynamikde)에서 벡터를 사용하여 전기역학을 다루었으나, 당시 수학계는 공식 학력이 없던 그라스만의 업적을 외면하였다.[1]
1847년, 프로이센 교육부에 대학 교수 지원서를 제출했으나, 심사를 맡았던 에른스트 쿠머는 그라스만의 선형대수학 이론을 이해하지 못하고 낙제시켰다.[1] 1852년, 그라스만은 아버지가 교사로 일했던 슈체친 김나지움에 임용되었다.[1]
1862년, 그라스만은 자신의 논문을 더 쉽게 풀어 쓴 《체계적이고 엄밀하게 해설한 확장 이론》(Die Ausdehnungslehre: Vollständig und in strenger Form bearbeitetde)을 출판하였으나, 이 역시 학계에서 무시당했다.[1] 1864년, 그라스만의 출판사는 그의 책이 거의 팔리지 않아 재활용되었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1]
2. 3. 말년
학계의 냉담한 반응에 낙심한 그라스만은 수학에 흥미를 잃고 언어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863년에 인도유럽어족의 음운 변화에 대한 그라스만 법칙을 발표하였다.[12] 이 업적으로 그라스만은 미국 동양 학회(American Oriental Society영어)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876년에 튀빙겐 대학교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이 밖에도 그라스만은 1876년~1877년 동안 리그베다의 독일어역을 출판하였다.1877년 9월 26일에 68세의 나이로 슈체친에서 사망하였다.
그라스만의 수학적 아이디어는 그의 말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퍼지기 시작했다. '''A1'''이 출판된 지 30년 후, 출판업자는 그라스만에게 그의 저서 《확장론》이 오랫동안 절판되었으며, 거의 판매되지 않아 1864년에 약 600부가 폐지로 사용되었고, 나머지 몇 권도 현재는 도서관에 있는 한 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매진되었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수학계에서 자신의 저서에 대한 반응에 실망한 그라스만은 수학자들과의 교류를 잃었고, 기하학에 대한 관심도 잃었다. 그는 말년에 역사 언어학과 산스크리트어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독일어 문법에 관한 책을 쓰고, 민요를 수집하고, 산스크리트어를 배웠다. 그는 2,000 페이지에 달하는 사전과 《리그베다》 번역본(1,000 페이지 이상)을 저술했다. 현대 《리그베다》 연구에서 그라스만의 저서는 종종 인용된다. 1955년에 그의 사전 제3판이 발행되었다.
그라스만은 산스크리트어와 그리스어에 모두 존재하는 음운 규칙을 발견하고 제시했다. 이 음운 규칙은 그의 업적을 기려 그라스만의 법칙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발견은 당시 역사 언어학에 혁명적인 사건이었는데, 산스크리트어가 다른 인도유럽어의 더 오래된 선구자라는 널리 퍼진 생각을 뒤엎었기 때문이다.[9] 이는 산스크리트어가 더 교착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널리 받아들여진 가정이었으며, 라틴어와 그리스어와 같은 언어는 더 "현대적인" 굴절 구조에 도달하기 위해 이 단계를 거쳤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그라스만의 연구는 적어도 하나의 음운 패턴에서 독일어가 실제로 산스크리트어보다 "오래되었다"(즉, 덜 굴절적이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는 언어의 계통적 및 유형적 분류가 마침내 언어학에서 올바르게 분리되었음을 의미하며, 이후 언어학자들에게 상당한 진전을 이루게 했다.[10]
이러한 언어학적 업적은 그의 생전에 존경을 받았다. 그는 미국 동양 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876년에는 튀빙겐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수학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명백해지자 그는 언어학으로 전향하여, 독일어 문법에 관한 책을 저술하고, 민요를 수집하는 동시에, 산스크리트어 연구를 했다. 특히 『리그베다』의 번역 및 『리그베다 사전』은 문헌학자들 사이에서 높이 평가받아, 1876년 튀빙겐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3. 수학적 업적
헤르만 그라스만은 라플라스의 ''천체역학 논고''와 라그랑주의 ''해석역학''에서 기본 이론을 가져와 벡터 방법을 사용하여 조석 이론을 설명했다. 이 에세이는 1894년부터 1911년까지 출판된 ''전집''에 처음 수록되었으며, 선형대수학과 벡터 공간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44년, 그라스만은 "확장의 이론" 또는 "확대된 양의 이론"으로 번역되는 그의 걸작 ''Ausdehnungslehre''('''A1''')를 출판했다. '''A1'''은 모든 수학에 대한 새로운 기초를 제시했다. 그라스만은 기하학을 대수적 형태로 만들면 숫자 3이 공간 차원의 수로서 특권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며, 가능한 차원의 수는 무한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846년, 뫼비우스는 라이프니츠가 처음 제안한 문제, 즉 좌표와 계량적 속성이 없는 기하학적 계산법(라이프니츠가 ''analysis situs''라고 명명한 것)을 고안하는 경쟁에 그라스만을 초대했다. 그라스만의 ''Geometrische Analyse geknüpft an die von Leibniz erfundene geometrische Charakteristik''는 우승작이었다(또한 유일한 출품작).
1853년, 그라스만은 색상이 혼합되는 방식에 대한 이론을 발표했으며, 그의 이론의 네 가지 색상 법칙은 여전히 그라스만의 법칙으로 가르쳐지고 있다.[2] 그라스만은 또한 결정학, 전자기학, 역학에 관해서도 글을 썼다.
1861년, 그라스만은 그의 저서 ''Lehrbuch der Arithmetik''에서 페아노의 산술 공리화를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3]
3. 1. 선형대수학의 기초
1840년에 그라스만은 《조수 간만 이론》(Theorie der Ebbe und Flutde)을 출판하였는데, 이는 선형대수학의 시초로 여겨지며, 벡터 공간 개념이 최초로 등장한다.[1] 1844년에는 《선형 확장 이론: 수학의 새 분야》(Die Lineale Ausdehnungslehre, ein neuer Zweig der Mathematikde)를 출판하여, 임의의 차원에서 벡터 공간을 추상적으로 취급하고, 4차원 이상의 공간 개념을 제시하였다.1862년에는 《체계적이고 엄밀하게 해설한 확장 이론》(Die Ausdehnungslehre: Vollständig und in strenger Form bearbeitetde)을 출판하여 자신의 이론을 더 쉽고 엄밀하게 설명하려 했으나, 이 역시 학계에서 무시당했다.[4]
그라스만은 외적(외대수)을 도입하여, 선형대수학 및 텐서 대수의 기초를 마련하였다.[8] 그의 이론은 아핀 공간과 계량 벡터 공간을 다루며, 기하학을 대수적 형태로 만들어 숫자 3이 공간 차원의 수로서 특권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선형 공간(벡터 공간)의 정의는 헤르만 바일 등이 공식적인 정의를 발표한 1920년경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만, 주세페 페아노가 30년 전에 이미 그라스만의 수학적 작업에 정통하여 제시한 바 있다.[1] 그라스만은 공식적인 정의를 내놓지는 않았지만, 그 개념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단위' ''e''1, ''e''2, ''e''3, ...의 모음에서 시작하여, 형식적 선형 결합 ''a''1''e''1 + ''a''2''e''2 + ''a''3''e''3 + ...을 고려하고, 실수에 의한 덧셈과 곱셈을 정의하여 선형 공간 속성을 증명하였다. 또한, 선형 독립 이론을 개발하고, 부분 공간, 선형 독립, span, 차원, 부분 공간의 결합과 만남 및 사영 개념을 정의하였다.[1]
3. 2. 외적(Exterior Product)
헤르만 그라스만은 아버지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1] "조합적 곱"이라고도 불리는 외적(äußeres Produktde)을 도입했는데, 이는 현재 외대수라고 불리는 대수의 핵심 연산이다.[1] 1878년, 윌리엄 킹던 클리포드는 그라스만의 규칙 ''epep'' = 0을 규칙 ''epep'' = 1로 대체하여 이 외대수를 윌리엄 로언 해밀턴의 사원수에 결합했다.[1] (사원수의 경우, 규칙 ''i''2 = ''j''2 = ''k''2 = −1이 있다.)[1]그라스만은 아버지의 아이디어(「A1」에 인용됨)에 기반하여 새로운 형태의 곱셈인 외적(äußeres Produktde)을 도입했다.[8] 「A1」의 목적은 수학 전반에 새로운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었으며, 철학적이고 일반적인 정의부터 시작한다.[8] 「A1」은 아핀 공간을, 「A2」는 더 나아가 계량을 동반하는 공간을 다룬다.[8] 이 이론은 현재 그라스만 대수 (외대수)라는 이름으로 발전하여 선형대수학 및 텐서 대수의 기초가 되었다.[8]
3. 3. 기타 업적
1840년에 그라스만은 《조수 간만 이론》(Theorie der Ebbe und Flutde)을 출판하였는데, 이는 선형대수학의 시초로 여겨지며, 벡터 공간의 개념이 최초로 등장한다.[1] 1844년에는 《선형 확장 이론: 수학의 새 분야》(Die Lineale Ausdehnungslehre, ein neuer Zweig der Mathematikde)를 출판하여 임의의 차원에서 벡터 공간을 추상적으로 취급하고, 4차원 이상의 공간 개념을 제시하였다.[1] 이듬해 1845년에는 《새로운 전기역학》(Neue Theorie der Elektrodynamikde)에서 벡터를 사용하여 전기역학을 다루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당시 수학자들에게 외면받았다.1853년에는 색상이 혼합되는 방식에 대한 이론을 발표했는데, 그의 네 가지 색상 법칙은 그라스만의 법칙으로 알려져 있다.[2] 또한 결정학, 전자기학, 역학에 관한 글을 썼다.
1861년, 그라스만은 ''Lehrbuch der Arithmetik''에서 페아노의 산술 공리화를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3] 1862년에는 《체계적이고 엄밀하게 해설한 확장 이론》(Die Ausdehnungslehre: Vollständig und in strenger Form bearbeitetde)을 출판하였으나, 이 역시 학계에서 무시당했다.
그라스만은 외적(독일어: äußeres Produkt 또는 kombinatorisches Produkt)을 도입했는데,[1] 이는 현재 외대수라고 불리는 대수의 핵심 연산이다. 1878년, 윌리엄 킹던 클리포드는 그라스만의 외대수를 윌리엄 로언 해밀턴의 사원수에 결합했다.
아데마르 장 클로드 바레 드 생베낭은 그라스만과 유사한 벡터 미적분학을 개발하여 누가 먼저 이 아이디어를 생각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그라스만은 1844년에 자신의 결과를 발표했지만, 생베낭은 1832년에 처음으로 이 아이디어를 개발했다고 주장했다.
헤르만 헹켈은 그라스만의 아이디어를 이해한 최초의 수학자 중 한 명이었다.[5] 1872년 빅토르 슐레겔은 그라스만의 접근 방식을 사용하여 평면 기하학의 결과를 도출한 ''공간론 시스템''의 첫 번째 부분을 출판했다.[6] 펠릭스 클라인은 슐레겔의 책에 대해 비판적인 서평을 썼다.
A. N. 화이트헤드의 ''만유 대수학''(1898)은 확장 이론과 외대수에 대한 영어로 된 최초의 체계적인 해설을 포함했다. 1995년 로이드 C. 칸넨베르크는 The Ausdehnungslehre와 기타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여 출판했다.
4. 언어학적 업적
학계의 냉담한 반응에 낙심한 그라스만은 수학에 흥미를 잃고 언어학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인도유럽어 비교 문헌학을 연구하였으며, 산스크리트어와 그리스어의 음운 변화에 관한 법칙을 발견하였다. 이 법칙은 그림의 법칙의 예외로 여겨지던 것에 법칙성을 찾아낸 것으로, 현재 그라스만의 법칙으로 불린다.
또한 그라스만은 『리그베다』 사전(''Wörterbuch zum Rig-Veda''de, 1873)과 『리그베다』의 독일어 번역(2권, 1876-1877)을 출판하였다. 이 업적으로 그라스만은 미국 동양 학회(American Oriental Society영어)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876년에 튀빙겐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12]
4. 1. 그라스만의 법칙
언어학을 연구하기 시작한 그라스만은 1863년에 인도유럽어족의 음운 변화에 대한 그라스만의 법칙을 발표하였다.[12] 이 법칙은 산스크리트어와 그리스어에 모두 존재하는 음운 규칙으로, 그의 업적을 기려 그라스만의 법칙으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산스크리트어가 다른 인도유럽어의 더 오래된 선구자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으나, 그라스만의 연구는 이 생각을 뒤엎는 혁명적인 사건이었다.[9] 이는 독일어가 산스크리트어보다 하나의 음운 패턴에서 덜 굴절적이라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다.[10]이러한 언어학적 업적은 그라스만의 생전에 인정받아, 미국 동양 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876년에는 튀빙겐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라스만은 『리그베다』 사전(''Wörterbuch zum Rig-Veda''de, 1873)과 『리그베다』의 독일어 번역(2권, 1876-1877)을 출판하기도 했다.
4. 2. 리그베다 연구
그라스만은 학계의 냉담한 반응에 낙심하여 수학 연구를 중단하고 언어학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1863년에는 인도유럽어족의 음운 변화에 대한 그라스만 법칙을 발표하였다.[12] 이 업적으로 미국 동양 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876년에는 튀빙겐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그는 독일어 문법에 관한 책을 쓰고, 민요를 수집하고, 산스크리트어를 배웠으며, 2,000 페이지에 달하는 사전과 1,000 페이지가 넘는 《리그베다》 번역본을 저술하였다. 현대 《리그베다》 연구에서 그라스만의 저서는 종종 인용되며, 1955년에는 그의 사전 제3판이 발행되었다.
그라스만은 산스크리트어와 그리스어에 모두 존재하는 음운 규칙을 발견하고 제시하였는데, 이는 그의 업적을 기려 그라스만의 법칙으로 불린다. 그의 발견은 당시 역사 언어학에 혁명적인 사건이었는데, 산스크리트어가 다른 인도유럽어의 더 오래된 선구자라는 널리 퍼진 생각을 뒤엎었기 때문이다.[9] 이는 언어의 계통적 및 유형적 분류가 마침내 언어학에서 올바르게 분리되었음을 의미하며, 이후 언어학자들에게 상당한 진전을 이루게 했다.[10]
이러한 언어학적 업적은 그의 생전에 인정받아 미국 동양 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876년에는 튀빙겐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인도유럽어 비교 문헌학을 연구한 언어학자로서 저명하며, 『리그베다』 사전(Wörterbuch zum Rig-Vedade, 1873)과 『리그베다』의 독일어 번역(2권, 1876-1877)을 출판했다.
5. 저서
- 1844년, 《선형 확장 이론: 수학의 새 분야. 수학의 타 분야 · 정역학 · 동역학 · 자기학 · 결정학에 대한 응용 및 해설》
- 1847년, 《라이프니츠가 발명한 기하학적 특성에 대한 기하학적 분석》
- 1862년, 《체계적이고 엄밀하게 해설한 확장 이론》
- 1873년, 《리그베다 사전》
- 1876년-1877년, 《비평·해설 주석이 추가된 리그베다의 번역》 2권. (1권: 가족의 서(書) (2〜8장), 2권: 목록의 서(書) (1장·9장·10장))
- 1894년–1911년, 《헤르만 그라스만의 수학 및 물리학 저작》(Gesammelte mathematische und physikalische Werke), 3권. 프리드리히 엥겔 편집. 라이프치히: B.G. Teubner.[11] 1972년, 뉴욕: Johnson 재판.
참조
[1]
논문
Hermann Grassmann and the Creation of Linear Algebra
https://www.maa.org/[...]
Mathematical Association of America
1979-12
[2]
서적
Hermann Günther Graßmann (1809–1877): Visionary Mathematician, Scientist and Neohumanist Scholar
Springer Netherlands
[3]
논문
The Axiomatization of Arithmetic
Association for Symbolic Logic
1957-06
[4]
서적
Problems and Theorems in Linear Algebra
American Mathematical Society
1994
[5]
간행물
Charles Scribner's Sons
[6]
논문
Debating Grassmann's Mathematics: Schlegel Versus Klein
Springer
[7]
문서
Josiah Willard Gibbs: The History of a Great Mind
Ox Bow
1951
[8]
서적
The Road to Reality: A Complete Guide to the Laws of the Universe
Alfred A. Knopf
2005-02
[9]
웹사이트
A Reader in Nineteenth Century Historical Indo-European Linguistics, by Winfred P. Lehmann {{!}} The Online Books Page
https://onlinebooks.[...]
2023-10-18
[10]
웹사이트
A Reader in Nineteenth Century Historical Indo-European Linguistics, by Winfred P. Lehmann {{!}} The Online Books Page
https://onlinebooks.[...]
2023-10-18
[11]
논문
Book Review: ''Hermann Grassmanns gesammelte mathematische und physikalische Werke''
[12]
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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