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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 오글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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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헨 오글레드는 550년경부터 7세기까지 현재의 스코틀랜드 남부와 잉글랜드 북부에 존재했던 브리튼족의 옛 북부 왕국들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로마 제국 붕괴 이후 앵글로색슨족, 픽트족, 게일족 등 다양한 민족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으며, 내부 갈등도 잦았다. 이 시기에는 알트 클루트, 엘멧, 고도딘, 레게드 등 여러 왕국이 존재했고, 각 왕국은 동맹과 적대 관계를 통해 세력을 확장했다. 헨 오글레드에 대한 정보는 웨일스 전통, 음유 시인의 시, 역사 기록 등 다양한 자료를 통해 전해지며, 컴브릭어라는 브리튼어 방언이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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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 오글레드
개요
이름헨 오글레드 (Yr Hen Ogledd, 웨일스어)
북방 고토 (한국어 번역)
위치오늘날의 북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저지대
존속 기간약 500년 ~ 약 800년
언어고대 브리튼어
문화브리튼 문화
역사적 맥락
배경로마 제국의 브리타니아 속주 남부 철수 이후
주요 세력고도딘
레게드
알트 클루이트 (스트라스클라이드 왕국)
엘메트
페니네스
주요 사건6세기 후반: 앵글로색슨족의 침략
7세기 초: 데이라 왕국의 성장
7세기 후반: 노섬브리아의 지배력 강화
멸망앵글족과 게일족의 세력 확장으로 점차 소멸
스트라스클라이드 왕국은 11세기까지 존속
문화와 유산
문학탈리에신과 아네이린을 비롯한 바드들의 시
마비노기온과 같은 웨일스 신화 및 전설의 기원
언어적 영향현대 웨일스어, 콘월어, 브르타뉴어에 영향
역사적 중요성브리튼족의 저항과 문화적 정체성 유지
아서왕 전설 형성에 기여

2. 역사적 배경

550년경 이전의 중앙 브리튼에 대해서는 거의 확실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로마 제국의 장기적이고 효과적인 지배는 타인강과 솔웨이 만 선 북쪽에서는 존재한 적이 없었고, 그 선 남쪽에서도 로마의 효과적인 지배는 407년 로마군이 로마령 브리튼에서 철수했다는 전통적인 시기 이전에 쇠퇴하기 시작했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 등의 기록에 따르면, 100년경부터 로마의 지배력이 점차 감소했으며, 360년 이후에는 광범위한 혼란과 로마의 대규모 영토 영구 포기가 있었다.

550년경에는 동부 해안 지역을 제외한 이 지역은 토착 브리튼어를 사용하는 민족이 지배했으며, 동부 해안 지역은 버니시아와 데이라의 앵글로족이 지배했다. 북쪽에는 픽트족이 있었고 (현재는 게일화 이전의 브리튼어 사용자로 받아들여짐), 북서쪽에는 달 리아다의 게일 왕국이 있었다. 이 모든 민족은 올드 노스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쟁은 빈번하게 내부적인 갈등이었으며, 앵글족, 픽트족, 그리고 게일족과 마찬가지로 브리튼족도 공격자이자 방어자였다. 헨 오글레드에 대한 웨일스 이야기 중에서 브리튼족이 앵글족과 싸웠다는 내용은 반대편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옛 북부 왕국의 쇠퇴 이야기는 두 해안 왕국에서 시작하여 험버강 북쪽, 클라이드 만과 포스 만 남쪽에 이르는 브리튼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한 노섬브리아 왕국의 이야기이다.

550년경 브리튼 중부


600년-700년 노섬브리아의 성장


이 시대의 왕국들의 관심사는 그들의 근처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동맹은 같은 민족 집단 내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적대 관계도 인접한 다른 민족 집단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브리튼족의 동맹은 아르데리드 전투에서 또 다른 브리튼족 동맹과 싸웠다. 달 리아타의 아단 막 가브란은 북부의 인물들의 족보 중 하나인 ''보네드 구이르 어 고글레드''에 등장한다.[1] ''브리튼인의 역사''는 노섬브리아의 왕 오스위가 픽트족 조상을 둔 브리튼 여성과 결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2][3] 노섬브리아와 픽트 왕가의 결혼으로 픽트족 왕 탈로르간 1세가 탄생했다. 아단 막 가브란은 브리튼족의 동맹으로 노섬브리아와 싸웠다. 기네드 왕국의 카드왈론 압 카드판은 머시아의 펜다와 동맹하여 노섬브리아의 에드윈을 물리쳤다.

정복과 패배가 반드시 한 문화의 근절과 다른 문화로의 대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7세기에 잉글랜드 북서부의 브리튼 지역은 앵글족 노섬브리아에 흡수되었지만, 300년 후에 남부 컴브리아로 다시 나타나 북부 컴브리아(스트래스클라이드)와 통합되어 하나의 국가를 이루었다.

2. 1. 역사적 맥락

전쟁은 헨 오글레드 내부의 갈등이 빈번했으며, 앵글족, 픽트족, 게일족과 마찬가지로 브리튼족도 공격자이자 방어자였다. 헨 오글레드에 대한 웨일스 이야기 중에서 브리튼족이 앵글족과 싸웠다는 내용은 반대편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옛 북부 왕국의 쇠퇴 이야기는 두 해안 왕국에서 시작하여 험버강 북쪽, 클라이드 만과 포스 만 남쪽에 이르는 브리튼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한 노섬브리아 왕국의 이야기이다.

이 시대의 왕국들은 주변 지역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진 지역과도 동맹을 맺거나 적대 관계를 형성했다. 브리튼족의 동맹은 아르데리드 전투에서 또 다른 브리튼족 동맹과 싸웠다. 달 리아타의 아단 막 가브란은 북부의 인물들의 족보 중 하나인 ''보네드 구이르 어 고글레드''에 등장한다.[1] ''브리튼인의 역사''는 노섬브리아의 왕 오스위가 픽트족 조상을 둔 브리튼 여성과 결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2][3] 노섬브리아와 픽트 왕가의 결혼으로 픽트족 왕 탈로르간 1세가 탄생했다. 기네드 왕국의 카드왈론 압 카드판은 머시아의 펜다와 동맹하여 노섬브리아의 에드윈을 물리쳤다.

정복과 패배가 반드시 한 문화의 근절과 다른 문화로의 대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7세기에 잉글랜드 북서부의 브리튼 지역은 앵글족 노섬브리아에 흡수되었지만, 300년 후에 남부 컴브리아로 다시 나타나 북부 컴브리아 (스트래스클라이드)와 통합되어 하나의 국가를 이루었다.

2. 2. 사회적 맥락

북방의 남성들의 조직은 부족 기반으로, 친족 관계를 기반으로 한 대가족 집단이 지배적인 "왕실" 가문에 충성을 맹세하는 형태였다.[4] 이는 켈트족의 브레혼 법, 웨일스의 하웰 다 법, 스코틀랜드의 브레트족과 스코트족의 법에서 수백 년 후에도 여전히 유효했으며, 앵글로색슨 법 또한 켈트 법과 많은 유사점을 보였다.[4] 이들 법은 모두 브리튼의 로마 점령과는 관계없이 문화적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4]

주요 ''왕실 궁정''()은 "수도" 역할을 했지만, 현대 사회의 관료적 행정 중심지나 로마 통치의 정착지 또는 ''시비타스''는 아니었다. 왕은 자신의 영토 전역에 여러 궁정을 유지하며 백성의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순회했다. 이러한 고대 방식의 정의 시행은 헨리 2세 (1154–1189년 재위)의 개혁으로 법률 행정이 현대화될 때까지 왕실 절차의 일부로 살아남았다.

3. 언어

현대 학계에서는 헨 오글레드에서 사용된 브리튼어에 "컴브릭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언어는 고대 웨일스어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지역적 변이도 있었고, 콘월어, 브르타뉴어픽트어의 게일어 이전 형태와도 더 멀리 연관되어 있었다. 이 방언으로 쓰인 텍스트는 남아 있지 않다. 이에 대한 증거는 지명, 몇몇 초기 비문의 고유 명칭, 그리고 이후 컴브릭어가 아닌 출처, ''레게스 인터 브레토스 에트 스코토스''에 나오는 두 가지 용어, 그리고 거의 모두 북부를 다룬 ''친베르드''(초기 시인)의 시집에서 나온다.[5]

''친베르드'' 시는 가장 큰 정보원이며, 이 시집의 일부는 헨 오글레드에서 처음 작곡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5] 그러나, 이 시는 구전 전통이 지속된 웨일스에서 만들어진 후기 필사본에서 완전히 보존되었으며, 그것들이 원본에 얼마나 충실한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텍스트에는 웨일스 방언과 구별되는 뚜렷한 변이가 포함되어 있다. 특히, 이 텍스트에는 한때 모든 브리튼어 종류에서 흔했지만 나중에 웨일스어와 남서 브리튼어에서 사라진 여러 고어가 포함되어 있다.[5] 그러나 일반적으로 차이점은 미미해 보이며, 컴브릭어와 고대 웨일스어의 구분은 언어학적이라기보다는 지리적인 것으로 보인다.[6]

컴브릭어는 앵글로색슨족, 그리고 나중에는 스코틀랜드인과 노르드인에게 정복당하면서 점차 사라졌지만, 현재 스코틀랜드의 덤바턴에 있는 알트 클루트를 중심으로 한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에서는 살아남았다. 케네스 H. 잭슨은 스트래스클라이드가 그 지역을 지배하면서 10세기에 컴브리아에서 다시 나타났다고 제안했다. 컴브릭어가 언제 최종적으로 소멸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18세기 이후 북부 잉글랜드에서 기록된 일련의 브리튼 기원의 숫자 세는 체계가 컴브릭어의 요소가 살아남았다는 증거로 제시되었다.[6] 하지만 이 견해는 언어학적 근거로 인해 대부분 거부되었으며, 고대 영어 시대 이후 잉글랜드로 유입되었다는 증거가 있다.[7][8]

3. 1. 컴브릭어의 특징

컴브릭어는 고대 웨일스어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진 언어로, 헨 오글레드에서 사용된 브리튼어의 일종이다.[5] 콘월어, 브르타뉴어, 그리고 픽트어의 게일어 이전 형태와도 연관되어 있다.[5] 이 언어는 현대 학계에서 "컴브릭어"라는 용어로 불린다. 컴브릭어로 쓰인 텍스트는 남아 있지 않지만, 지명, 초기 비문의 고유 명칭, ''레게스 인터 브레토스 에트 스코토스''에 나오는 용어, 그리고 ''친베르드''(초기 시인)의 시집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5]

''친베르드'' 시는 컴브릭어의 특징을 보여주는 가장 큰 정보원이며, 이 시집의 일부는 헨 오글레드에서 처음 작곡된 것으로 여겨진다.[5] 이 시는 구전 전통이 지속된 웨일스에서 만들어진 후기 필사본에서 보존되었으며, 원본에 얼마나 충실한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텍스트에는 웨일스 방언과 구별되는 뚜렷한 변이가 포함되어 있으며, 특히 모든 브리튼어 종류에서 흔했지만 나중에 웨일스어와 남서 브리튼어에서 사라진 여러 고어가 포함되어 있다.[5] 그러나 일반적으로 차이점은 미미하며, 컴브릭어와 고대 웨일스어의 구분은 언어학적이라기보다는 지리적인 것으로 보인다.[6]

컴브릭어는 앵글로색슨족, 그리고 나중에는 스코틀랜드인과 노르드인에게 정복당하면서 점차 사라졌지만,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에서는 살아남았다. 케네스 H. 잭슨은 스트래스클라이드가 그 지역을 지배하면서 10세기에 컴브리아에서 컴브릭어가 다시 나타났다고 제안했다. 컴브릭어가 언제 최종적으로 소멸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18세기 이후 북부 잉글랜드에서 기록된 브리튼 기원의 숫자 세는 체계가 컴브릭어 요소의 생존 증거로 제시되기도 했다.[6] 하지만 이 견해는 언어학적 근거로 인해 대부분 거부되었으며, 고대 영어 시대 이후 잉글랜드로 유입되었다는 증거가 있다.[7][8]

3. 2. 컴브릭어의 소멸

컴브릭어는 앵글로색슨족, 그리고 나중에는 스코틀랜드인노르드인에게 정복당하면서 점차 사라졌지만, 현재 스코틀랜드의 덤바턴에 있는 알트 클루트를 중심으로 한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에서는 살아남았다.[6] 케네스 H. 잭슨은 스트래스클라이드가 그 지역을 지배하면서 10세기에 컴브리아에서 다시 나타났다고 제안했다. 컴브릭어가 언제 최종적으로 소멸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18세기 이후 북부 잉글랜드에서 기록된 일련의 브리튼 기원의 숫자 세는 체계가 컴브릭어의 요소가 살아남았다는 증거로 제시되었다.[6] 하지만 이 견해는 언어학적 근거로 인해 대부분 거부되었으며, 고대 영어 시대 이후 잉글랜드로 유입되었다는 증거가 있다.[7][8]

4. 웨일스 전통

쿠네다와 그의 아들들은 "북쪽의 사람들"의 계보와 관련되며, 쿠네다는 중세 웨일스 왕국 중 가장 크고 강력했던 그위네드 왕국의 왕족 시조이자 헨 오글레드와의 지속적인 연결 고리로 여겨진다. 쿠네다의 계보는 그가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장군 중 한 명인 파테르누스의 후손임을 보여주는데, 파테르누스는 막시무스에 의해 알트 클루트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9][10] 웨일스인과 북쪽의 사람들은 자신을 같은 민족으로 여겼을 수도 있다. 웨일스어로 자신을 지칭하는 이름인 ''Cymry''는 이러한 고대 관계에서 유래되었지만, 그위네드가 그들과 세레디기온과 좋은 관계를 맺었던 반면 다른 웨일스 왕국들이 그들을 어떻게 보았는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논쟁의 여지가 있다. 특히 당시 아일랜드의 영향력이 컸던 디페드 왕국과 이스트라드 타이위와 같은 남부 왕국들은 스스로 통일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Cymry'는 웨일스인과 북쪽의 사람들을 모두 지칭하는 용어였지만, 때로는 픽트족과 아일랜드인과 같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되었다. 이 용어는 브리튼어 단어 ''combrogoi''에서 파생되었으며, 이는 "동포"를 의미하며, 브르타뉴어의 대응어인 ''kenvroiz''가 여전히 "동포"라는 원래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 단어는 7세기 초(또는 그 이전) 북쪽의 사람들이 내칭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11] 중세 시대 전체에 걸쳐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이전 시대와 그 후 몇 세기 동안 전통적이고 문학적인 용어는 ''Brythoniaid''였으며, 이 용어는 섬의 모든 사람들이 통일을 유지했던 더 오래된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Cymry''는 오늘날 웨일스의 고유 명칭(''Cymru'', ''Cymry''의 땅)과 잉글랜드의 카운티 이름인 컴브리아에서 살아남았으며, 둘 다 "고향", "모국"을 의미한다.

헨 오글레드에 대한 많은 전통적인 정보 출처는 웨일스 전통에 남아 있으며, 아네이린 (''Y Gododdin''의 저자로 알려짐)과 같은 음유 시인들은 헨 오글레드의 궁정 시인으로 여겨진다.

4. 1. 헨 오글레드 관련 문학 및 역사 자료

헨 오글레드에 대한 정보는 다음 자료들에서 찾을 수 있다.

  • 탈리에신, 아네이린, 리워치 헨에게 귀속된 음유시인 시.[14][15]
  • 할리안 계보, ''북쪽의 남성 계보'', 예수 칼리지 MS 20의 계보.[14][15]
  • ''브리튼 섬의 삼인조'' (''웨일스 고대 유물집''의 세 번째 권에 출판된 대부분의 삼인조는 이올로 모건우그의 위조로 알려져 있으며, 역사적 정보의 유효한 출처로 간주되지 않는다).[14] 표준 학술 판은 레이첼 브롬위치의 ''Trioedd Ynys Prydein''이다.[15]
  • 보존된 다른 애가(marwnadaucy)와 찬송가(canu mawlcy), 그리고 특정 신화 이야기.[14][15]


후원자를 칭찬하고 계보를 구성하는 이야기는 편견이 없고 신뢰할 수 있는 역사적 정보의 출처가 아니다. 그러나 과장된 주장을 할 수 있지만, 음유시인의 청취자들에게 알려진 역사적 사실을 위조하거나 변경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되면 음유시인과 그들의 후원자 모두에게 조롱과 불명예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또한, 승리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패배와 비극의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것은 역사적 출처로서의 가치에 추가적인 신뢰성을 부여한다.[14][15] 이러한 맥락에서, 이 이야기에는 신뢰할 수 있는 정보가 거의 없는 영국 역사 시대에 대한 유용한 정보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자료들은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저자들과 그들의 후대 필사자들은 때때로 자신의 이익을 옹호하는 편향성을 드러내, 정의와 도덕적 정당성의 편에 서서 자신들의 의제를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그러한 의제에 반대되는 사실들은 때때로 생략되었고, 위조된 기록들이 가끔 추가되었다.[16]

베다는 노섬브리아의 편향된 입장을 가지고 있었고, 토착 브리튼인들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말했지만, 그의 ''영국 민족 교회 역사''는 정확한 역사 서술을 위해 노력하고, 신뢰할 수 있는 자료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역사적 근거가 없는 "전통적인" 정보를 전달할 때, 베다는 그것을 그렇게 언급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16]

길다스 (c. 516–570)의 ''브리타니아 파멸과 정복에 관하여''는 문학 및 역사 자료에 언급된 초기 인물과 장소를 언급한다는 점에서 가끔 관련이 있다. 이 작품은 길다스의 동시대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설파하기 위한 것이었고, 역사를 쓰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 작품은 그의 시대에 생존한 몇 안 되는 동시대 기록 중 하나이다.[16]

5. 자료의 성격

문헌 및 역사적 자료는 편견이 없고 신뢰할 수 있는 역사적 정보의 출처가 아닐 수 있다. 저자들과 그들의 후대 필사자들은 때때로 자신의 이익을 옹호하는 편향성을 드러내, 정의와 도덕적 정당성의 편에 서서 자신들의 의제를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그러한 의제에 반대되는 사실들은 때때로 생략되었고, 위조된 기록들이 가끔 추가되었다.[12]



베다는 노섬브리아의 편향된 입장을 가지고 있었고, 토착 브리튼인들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말했지만, 그의 ''영국 민족 교회 역사''는 정확한 역사 서술을 위해 노력하고, 신뢰할 수 있는 자료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역사적 근거가 없는 "전통적인" 정보를 전달할 때, 베다는 그것을 그렇게 언급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16]

길다스 (c. 516–570)의 ''브리타니아 파멸과 정복에 관하여''는 문학 및 역사 자료에 언급된 초기 인물과 장소를 언급한다는 점에서 가끔 관련이 있다. 이 작품은 길다스의 동시대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설파하기 위한 것이었고, 역사를 쓰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 작품은 그의 시대에 생존한 몇 안 되는 동시대 기록 중 하나이다.

5. 1. 지명

포스-클라이드 남부 스코틀랜드, 컴벌랜드 및 인접 카운티의 브리튼어 지명은 중세 초기에 브리튼족이 거주했던 헨 오글레드의 지역을 나타낸다.[17]

이후 브리튼족의 존재가 나타난 고립된 지역은 고대 영어고대 노르드어 기원의 지명으로도 표시된다. 요크셔에서는 고대 영어 ''walas'' "브리튼족 또는 웨일스인"에서 유래한 월든, 월튼, 월번의 이름은 앵글로색슨족이 마주한 브리튼족을 나타내며, 고대 노르드어 ''Breta'' "브리튼족"에서 유래한 버크비의 이름은 바이킹족이 브리튼족을 만난 장소를 나타낸다.[17]

5. 2. 의심스럽거나 조작된 자료

제프리 오브 몬머스의 ''브리타니아 열왕사''는 가짜 역사로 폄하되지만, 브리튼의 로맨스로 알려진 허구적인 기사도 로맨스 이야기의 주요 출처로 여겨진다.[18] ''열왕사''는 허구와 역사 왜곡이 많아 역사적 가치가 부족하며, 로이드의 1911년 저서 ''가장 초창기부터 에드워드 정복 시대까지의 웨일스 역사''와 같이 명망 있는 저자들의 학술 연구에는 제프리의 역사 왜곡에 대한 수많은 인용이 포함되어 있다.[18] 데이비스의 1990년 저서 ''웨일스 역사''의 첫 페이지 첫 단락은 제프리의 두드러짐에 대해 논의하며, 이후 그는 역사적 부정확성의 출처로만 언급된다.[19] 제임스 파커의 ''옥스퍼드의 초기 역사''에서 엘다드, 엘도드, 암브리우스 수도원장 등과 같은 인물이 제프리 자신의 상상의 결과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몇 단락을 할애하기도 했다.[20]

''이올로 원고''는 이올로 모건웍으로 더 잘 알려진 에드워드 윌리엄스가 19세기 초에 제시한 원고 모음집이다. 다양한 이야기, 일화 자료, 사실상 모든 유명 인사를 다른 모든 유명 인물(그리고 아서 왕과 이올로의 고향인 모건눅 지역과의 많은 연관성)과 연결하는 정교한 계보를 담고 있으며, 처음에는 진본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이후 이올로 자신이 주로 발명한 위조 또는 조작된 원고, 필사본, 환상의 모음집임이 밝혀졌다.

6. 왕국과 지역

6. 1. 주요 왕국

알트 클루트(이스트라드 클루드)는 현재 스코틀랜드의 덤바턴을 중심으로 한 왕국이다. 이후 스트래스클라이드[21], 컴브리아로 불렸으며, 북부 브리튼 왕국 중 가장 잘 알려진 왕국 중 하나였다. 11세기까지 독립 왕국으로 존속하다 스코틀랜드 왕국에 흡수되었다.[21]

엘멧은 잉글랜드 북부 요크셔 서부를 중심으로 한 왕국이다.[22] 다른 북부 브리튼 왕국보다 남쪽에 위치했으며, 현재의 웨일스 동쪽에 위치했지만, 7세기 초까지 존속했다.[22]

고도딘은 현재 스코틀랜드 남동부와 잉글랜드 북동부에 위치한 왕국으로, 이전에는 보타디니의 영토로 알려졌다.[23] 《Y Gododdin》의 주제이며, 이 시는 고도딘이 버네시아의 앵글족을 상대로 감행한 참담한 습격을 기리고 있다.[23]

레게드는 현재의 컴브리아 일부를 포함했던 주요 왕국이지만, 그 전체 범위는 알려져 있지 않다.[24] 한때 광대한 지역을 포함했을 수 있으며, 왕 우리엔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그의 이름은 북서부 브리튼 전역의 장소와 연결되어 있다.[24]

6. 2. 소규모 왕국 및 기타 지역

에이론은 《Y Gododdin》과 같은 자료에 언급된 소왕국으로, 그 위치는 불확실하지만, 여러 학자들은 스코틀랜드 남서부의 에어셔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25][26][27][28] 이는 우리엔 르헤드와 자주 연관되며, 그의 영토의 일부였을 수 있다.[29]

칼흐비니드("Chalkmountain")는 이 지역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지만, 분명한 통치자인 카드라우드 칼흐비니드가 《Bonedd Gwŷr y Gogledd》에 등재되어 있어 헨 오글레드 어딘가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윌리엄 포브스 스킨은 이를 스코틀랜드 변경 지역의 켈소 (구 칼초우)와 동일시했다.[30]

에이딘은 오늘날 에든버러 시 주변 지역으로, 당시에는 딘 에이딘 (에이딘의 요새)으로 알려졌다. 이는 고도딘 왕국과 밀접하게 연관되었다.[31] 케네스 H. 잭슨은 《에이딘》이 에든버러만을 지칭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지만,[32] 다른 학자들은 더 넓은 지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간주했다.[33][34] 이 이름은 오늘날에도 에든버러 (게일어로 두네딘, 컴브릭어로 딘 에이딘, 그리고 서쪽으로 15마일 떨어진 캐리든 (''Caer Eidyn''에서 유래))과 같은 지명에서 살아남았을 수 있다.[35] 딘 에이딘은 638년에 앵글인들에게 포위되었으며, 이후 3세기 동안 그들의 지배하에 있었다.[31]

마나우 고도딘은 포스 만 남쪽의 해안 지역으로, 고도딘의 영토 일부였다.[23] 이 이름은 스터링셔의 슬래매넌 무어와 슬래매넌 마을에 남아 있다.[36] 이것은 '마난의 무어'를 의미하는 ''Sliabh Manann''에서 유래되었다.[37] 또한 에든버러에서 북서쪽으로 약 5마일 떨어진 달메니의 이름에도 나타나며, 과거에는 둠매닌으로 알려졌으며, 이는 ''Dun Manann''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37] 이 이름은 또한 포스 북쪽의 픽트족 마나우에도 남아 있으며, 클랙매넌의 버러와 동명의 클랙매넌셔의 지명으로, 그곳에 위치한 기념비를 가리키는 '마난의 돌'을 의미하는 ''Clach Manann''에서 유래되었다.[38][37]

노반트는 《Y Gododdin》에 언급된 왕국으로, 아마도 스코틀랜드 남서부의 철기 시대 노반타이 부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39][40]

''Regio Dunutinga''는 《윌프리드의 생애》에 언급된 노스 요크셔의 소왕국 또는 지역이다. 이는 계보에서 알려진 두나우트 압 파보일 가능성이 있는 두나우트라는 통치자를 위해 명명된 것으로 보인다.[41] 그 이름은 오늘날 컴브리아의 덴트 타운에서 살아남았을 수 있다.[42]

6. 3. 옛 북부의 일부는 아니지만 그 역사에 속하는 왕국

6. 4. 불확실한 왕국

브르네이흐는 앵글로색슨 왕국 버니시아에 대한 브리튼 이름이다. 앵글리아 왕국 이전 이 지역에 브리튼 왕국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는 불확실하다.[43] 데이프르 또는 데우르는 앵글로색슨 데이라에 대한 브리튼 이름으로, 티스 강과 험버 강 사이 지역을 지칭한다. 브르네이흐와 마찬가지로, 이 이름은 브리튼 기원을 가지며, 이전 브리튼 왕국을 나타내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44]

참조

[1] 서적 Bromwich 2006
[2] 서적 Nennii Historia Britonum English Historical Society
[3] 간행물 Zeitschrift für Celtische Philologie Max Niemeyer
[4] 문서 Anglo-Saxon law is a modern neologism for the Saxon Law of Wessex, the Anglian Law of Mercia, and the Danelaw, all of which were sufficiently similar to merit inclusion within this umbrella term. The laws of Anglian Northumbria were supplanted by the Danelaw, but were certainly similar to these. The origins of English law have been much studied. For example, the 12th century Tractatus of Glanvill|Tractatus de legibus et consuetudinibus regni Angliae (Treatise on the laws and customs of the Kingdom of England) is the books of authority|book of authority on English common law, and scholars have held that it owes a debt to Norman law and to Germanic law, and not to Roman law.
[5] 서적 Koch 2006
[6] 서적 Koch 2006
[7] 서적 A Dictionary of English Folklore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8] 간행물 Margaret L. Faull, Local Historian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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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간행물 Y Cymmrodor Honourable Society of Cymmrodorion
[11] 간행물 Y Cymmrodor Honourable Society of Cymmrodorion
[12] 간행물 The Celtic Review Norman Macleod 1907-07 – 1908-04
[13] 간행물 Transactions of the Honourable Society of Cymmrodorion (Session 1903–1904) Honourable Society of Cymmrodorion
[14] 서적 Lloyd 1911
[15] 서적 Trioedd Ynys Prydein University of Wales Press 1991
[16] 논문 Bede on the Britons. 2009
[17] 논문 Place-Names and Settlement in the North Riding of Yorkshire 1978
[18] 서적 Lloyd 1911, A History of Wales
[19] 서적 Davies 1990, A History of Wales
[20] 서적 The Early History of Oxford 727–1100 Oxford Historical Society
[21] 서적 Koch 2006
[22] 서적 Koch 2006
[23] 서적 Koch 2006
[24] 서적 Koch 2006
[25] 서적 Koch 2006
[26] 서적 Bromwich 1978
[27] 서적 Morris-Jones
[28] 서적 Williams 1968
[29] 서적 Koch 2006
[30] 서적 Bromwich 2006
[31] 서적 Koch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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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서적 Williams 1972
[34] 서적 Chadwick
[35] 서적 Dumville
[36] 서적 Celtic Britain https://books.google[...] Society for Promoting Christian Knowledge
[37] 서적 Celtic Folklore: Welsh and Manx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38] 서적 Celtic Brit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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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서적
[41] 서적
[42] 서적
[43] 서적
[4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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