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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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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호는 촉한의 환관으로, 총명하지만 간사한 성품으로 묘사된다. 동윤의 견제 속에서 낮은 벼슬에 머물렀으나, 동윤 사후 유선에게 아첨하며 권력을 잡고 국정을 농락했다. 강유를 모함하고, 위나라의 침공을 막지 못해 촉한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촉한 멸망 후 등애에게 죽을 뻔했으나 뇌물로 목숨을 건졌고, 이후의 행적은 기록되지 않았다. 역대 평가에서는 부정적으로 묘사되며, 삼국지연의에서는 간신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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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황호
원어 이름黃皓
직책봉거도위
중상시
황문승
군주유선
활동 시기삼국 시대
상세 정보
생년알 수 없음
몰년알 수 없음
직업환관, 정치인

2. 생애

황호는 촉한환관으로, 황제 유선의 총애를 받아 권력을 장악하고 국정을 농단한 인물이다. 총명했지만 간사하고 아첨에 능하여 유선의 신임을 얻었으며,[1] 초기에는 동윤의 견제를 받았으나 그의 사후 진지와 결탁하여 세력을 키웠다. 마침내 황제를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중상시(中常侍) 등의 직위에 올라 정사를 좌지우지하게 되었다.[1]

258년 이후 황호는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고 권력을 남용하여 자신에게 반대하는 인물들을 억압하고 측근들을 요직에 앉히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이러한 그의 행태는 촉한의 국정을 크게 어지럽혔으며, 많은 이들이 황호를 견제했던 동윤을 그리워했다고 전해진다.[8] 특히 촉한의 주요 장수였던 강유와 갈등을 빚었으며, 강유가 황호를 제거하려 했으나 유선의 비호로 실패했다.[6]

263년 위나라의 침공이 임박했다는 강유의 경고를 무시하고 적절한 방비를 하지 못하게 막아 촉한 멸망의 한 원인을 제공했다. 촉한 멸망 후, 등애에게 처형될 위기에 처했으나 뇌물을 써서 목숨을 부지했으며,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2. 1. 초기 생애와 출세

황호는 220년대 어느 시점에 환관 신분으로 촉나라 황궁에 들어가 황제 유선을 보좌하기 시작했다. 그는 총명했지만 간사하고 아첨을 잘하여 유선의 총애를 받았다.[1] 황호가 국정에 간섭하려 할 때마다 당시 촉한의 중신이었던 동윤은 유선에게 아첨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황호를 꾸짖으며 견제했다. 동윤이 살아있는 동안 황호의 벼슬은 황문승(黃門丞)에 머물렀다.

246년 12월경 동윤이 사망하자[1], 대장군 비의는 선조랑(選曹朗) 진지를 동윤의 후임으로 추천했다. 황호는 진지와 결탁하여 함께 유선에게 아부했고, 이들의 부추김으로 유선은 생전에 자신을 경계했던 동윤을 비판하기도 했다.[1] 황호는 이를 발판 삼아 승진을 거듭하여 황제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중상시(中常侍)와 봉거도위(奉車都尉)의 자리에 올랐다.[1]

258년 진지가 사망한 후, 황호는 성도촉나라 조정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자가 되어 정사를 완전히 장악했다.[1] 그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따르는 자들을 승진시키고, 반대하거나 자신을 싫어하는 인물들에게는 불이익을 주었다.

  • 상서령(尚書令) 번건은 황호와 일절 교류하지 않았다.
  • 나헌은 황호에게 협력하지 않아 그의 미움을 사 파동군(巴東郡, 현재 충칭 펑제 현 일대) 태수로 좌천되었다.[4] (이후 황호의 측근인 파동도독 염우가 나헌을 부관으로 삼았다.)
  • 유선의 이복동생인 감릉왕(甘陵王) 유영은 황호를 미워하는 기색을 보였다가 황호의 모함으로 10여 년 동안 조정에 나오지 못했다.[5]
  • 대장군 강유를 몰아내고 자신의 측근인 우장군(右將軍) 염우로 대체하려 했다. 이를 눈치챈 강유가 262년 유선에게 황호를 처형할 것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유선의 명으로 황호가 강유에게 사과했지만, 강유는 후환을 두려워하여 답중(沓中, 현재 간쑤성 주치 현 북서쪽)으로 가서 둔전하며 성도로 돌아오지 못했다.[6]
  • 극정은 황호의 총애도 미움도 받지 않아 수십 년간 승진하지 못했지만 참언도 당하지 않았다.[6]
  •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황호에게 굽히지 않아 여러 차례 강등되었다.[7]


황호가 권력을 잡고 전횡하자 촉나라 사람들은 그를 막았던 동윤을 그리워했다고 전해진다.[8] 화양국지 등에서는 황호가 권력을 남용하여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었다고 평가한다.

2. 2. 권력 장악과 전횡

황호는 총명하지만 간사한 성품을 지녔다고 평가된다. 환관으로서 220년대 어느 시점에 유선을 보좌하기 위해 촉나라 황궁에 들어갔고, 아첨을 잘하여 유선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동윤(董允)이 황호의 국정 간섭을 경계하고 자주 꾸짖었기에, 동윤이 살아있는 동안 황호의 벼슬은 황문승(黃門丞)에 머물렀다.

246년경 동윤이 사망하자[1], 후임으로 진지(陳祗)가 임명되었다. 황호는 진지와 결탁하여 유선에게 아첨하며 신임을 얻었고, 이로 인해 승진을 거듭하여 황제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중상시(中常侍)와 봉거도위(奉車都尉)의 자리에 올랐다. 진지가 258년 사망한 후, 황호는 성도 중앙 정계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정사를 완전히 장악했으며, 그의 위세와 권력 앞에 많은 대신들이 뜻을 굽히고 따라야 했다. 황호는 자신에게 아부하는 무리를 등용하고, 마음에 들지 않거나 반대하는 인물들은 관직 등용을 막거나 좌천시키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촉서 동윤전이나 화양국지에 따르면, 황호의 전횡이 심해지자 많은 촉나라 사람들이 황호를 견제했던 동윤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황호의 전횡에 대한 여러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 상서령(尚書令) 번건(樊建)은 황호와 어떠한 교류도 하지 않았다.
  • 나헌(羅憲)은 황호에게 협력하지 않아 그의 미움을 사 파동태수(巴東太守)로 좌천되었다.[4] (다만 파동도독 염우(閻宇)는 나헌을 높이 평가하여 부관으로 삼았다.)
  • 유선의 이복동생인 감릉왕(甘陵王) 유영(劉永)이 황호를 미워하는 기색을 보이자, 황호는 유영을 모함하여 10여 년 동안 조정에 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5][1]
  • 대장군 강유(姜維)를 몰아내고 자신과 결탁한 우장군(右將軍) 염우(閻宇)를 그 자리에 앉히려 했다. 이를 눈치챈 강유가 262년 유선에게 황호를 처형할 것을 청했으나, 유선은 황호가 심부름하는 하인일 뿐이라며 거절했다. 황호는 유선의 명으로 강유에게 사과했지만, 강유는 황호와 그 추종자들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답중(沓中, 현재 간쑤성 주치 현 북서쪽)으로 가서 둔전하며 다시는 성도(成都)로 돌아오지 못했다.
  • 극정(郤正)은 황호의 총애도 미움도 받지 않아 수십 년간 승진하지 못했지만(관위가 600석을 넘지 못함), 동시에 모함을 받아 해를 입지도 않았다.[6]
  • 《삼국지》의 저자 진수(陳壽)는 황호에게 굽히지 않아 여러 차례 강등되었다.[7]


당시 촉한의 정무를 맡았던 제갈첨, 동궐, 번건 등은 서로를 비호하기만 할 뿐 황호의 전횡을 막지 못해 정치 혼란을 바로잡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다만 번건은 황호와 거리를 두었다.) 오나라의 사신 설후(薛珝)는 귀국 후 손휴에게 촉의 상황에 대해 "군주는 어리석어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하고, 신하들은 제 몸 보신에만 급급하며, 조정에서는 바른 말을 들을 수 없다"고 보고했다. 오나라의 장제(張悌) 역시 환관(황호)이 촉나라 조정을 제멋대로 주무르고 있다고 평가했다.

262년 강유는 위(魏)관중 지역에 군대를 집결시키며 촉을 침공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보고하며 방비를 강화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주술을 신봉했던 황호는 무당의 점괘를 믿고 "적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유선에게 전했고, 강유의 보고는 묵살되었다. 결국 263년 위나라 군대가 침공했고, 제대로 된 방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촉군은 곳곳에서 격파당했다. 면죽관에서 위군과 싸우다 전사한 제갈첨의 아들 제갈상(諸葛尚)은 "일찍이 황호를 베지 못했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렀다. 살아서 무엇하겠는가!"라고 한탄하며 적진에 뛰어들어 죽었다. 결국 등애(鄧艾)가 이끄는 위군이 산악 지형을 넘어 성도 외곽까지 진격하자 유선은 항복했고, 촉나라는 멸망했다.

촉 멸망 후, 등애는 황호가 간악한 인물이라는 말을 듣고 그를 체포하여 처형하려 했다. 그러나 황호는 등애의 부하들에게 많은 뇌물을 주어 풀려났고, 이후 행적은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2. 3. 촉나라 멸망과 최후

262년, 촉나라 장군 강유위나라가 촉을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유선에게 방비를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주술을 신봉했던 황호는 무당을 불러 점을 치게 했고, 무당이 "적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하자 이 말을 유선에게 전하며 강유의 보고를 묵살했다. 조정의 다른 신료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같은 시기, 오나라의 사신으로 촉에 다녀온 설휴는 손휴에게 촉의 정황을 묻자, 황호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주군은 어리석어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신하들은 제 몸 보신에만 급급하여 잘못을 덮으려 하며, 조정에서는 바른 말을 들을 수 없다"고 보고했다. 오나라의 장제 역시 환관(황호)이 촉의 조정을 제멋대로 주무르고 있어 국가의 기강이 서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결국 다음 해인 263년, 종회등애가 이끄는 위나라 군대가 대대적으로 침공해왔다. 황호의 방해로 제대로 된 방어 준비를 갖추지 못했던 촉나라는 곳곳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면죽에서 위군과 맞서 싸우던 제갈첨의 아들 제갈상은 패색이 짙어지자 "진작 황호를 베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 살아서 무엇하겠는가!"라고 외치며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했다.

위나라 장수 등애가 성도 코앞까지 진격하자, 유선은 싸워보지도 않고 스스로 몸을 묶고 나아가 항복함으로써 촉한은 멸망했다.

성도에 입성한 등애는 황호가 나라를 망친 간신이라는 말을 듣고 그를 체포하여 처형하려 했다. 그러나 황호는 등애의 측근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이후 황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3. 평가

삼국지연의에서는 황호가 촉한 멸망의 주요 원인 제공자로 그려진다. 위나라가충(賈充)이 사마소에게 강유 암살을 건의하자, 종사중랑(從事中郎) 순욱(荀勖)은 강유가 답중에 머무는 것이 황호의 농간 때문이라며, 황호의 존재를 촉의 약점으로 지적하고 정벌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황호의 폐해가 적국에까지 알려져 이용될 정도였음을 보여준다. 소설 속 황호의 최후는 사서와 달리, 낙양으로 압송된 후 사마소에 의해 능지처참을 당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 외의 세부적인 묘사는 대체로 사서의 기록과 비슷하게 그려진다.

3. 1. 부정적 평가

황호는 총명하지만 간사한 성품을 지닌 인물로 평가된다. 동윤(董允)이 살아있을 때는 그의 엄격한 관리와 꾸짖음 때문에 황문승(黃門丞)이라는 낮은 직책에 머물렀다.

그러나 245년 동윤이 사망한 후, 비의(費禕)는 진지(陳祗)를 후임으로 삼았다. 황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진지와 결탁하여 유선(劉禪)에게 아첨하며 신임을 얻었고, 결국 황제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중상시(中常侍) 자리까지 올랐다.

258년 무렵 황호는 정사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의 위세에 눌려 대부분의 대신들은 뜻을 굽히고 따랐으며, 황호는 자신에게 비협조적이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들의 관직 등용을 막거나 불이익을 주었다. 이러한 전횡 속에서도 황호에게 영합하는 무리가 생겨났지만, 《촉서》 동윤전이나 《화양국지》에 따르면 많은 촉나라 사람들은 황호의 전횡을 막았던 동윤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황호의 권력 남용은 결국 국가를 위태롭게 만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황호의 전횡에 저항하거나 거리를 둔 인물들도 있었다.

  • 상서령 번건(樊建)은 황호와 교류하지 않았다.
  • 나헌(羅憲)은 황호에게 협력하지 않아 그의 미움을 사 파동태수로 좌천되었다.[4]
  • 유선의 이복동생인 감릉왕(甘陵王) 유영(劉永)은 황호를 싫어하는 기색을 보였다가 모함을 받아 10여 년간 조정에 나오지 못했다.[5]
  • 대장군 강유(姜維)는 황호를 제거하려 했으나 유선의 반대로 실패했다. 황호는 유선의 명으로 강유에게 사과했지만, 강유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답중(沓中)으로 물러나 둔전하며 성도(成都)로 돌아오지 못했다. 황호는 강유를 몰아내고 자신과 결탁한 우장군(右將軍) 염우(閻宇)를 그 자리에 앉히려 했다.
  • 극정(郤正)은 황호와 30년간 함께 일하면서도 그의 호의나 미움을 사지 않아 오랫동안 승진하지 못했지만, 동시에 참언으로 인한 피해도 입지 않았다.[6]
  • 《삼국지》의 저자 진수(陳壽)는 황호에게 굽히지 않아 여러 차례 강등되었다.[7]


황호 집권기의 정치는 혼란스러웠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8] 동시대 오나라의 사신으로 촉을 방문했던 설휴(薛珝)는 손휴(孫休)에게 촉의 상황을 보고하며 황호의 이름은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주군(유선)은 어리석어 과오를 깨닫지 못하고, 신하는 자기 몸 보신에만 급급하며, 조정에서는 바른 말을 들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오나라의 장제(張悌) 역시 환관(황호)이 조정을 제멋대로 주무르고 국가의 정령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262년 강유가 위나라의 침공 가능성을 알렸으나, 황호는 무당의 점괘를 믿고 "적이 오지 않을 것"이라며 유선을 안심시키고 강유의 보고를 묵살했다. 결국 다음 해 263년 위나라 군대가 침공했고, 제대로 방비하지 못한 촉나라는 곳곳에서 패배했다. 면죽에서 싸우다 전사한 제갈첨의 아들 제갈상(諸葛尚)은 "빨리 황호를 베지 못했기 때문에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다"고 한탄하며 죽음을 맞이했다. 결국 등애(鄧艾)가 이끄는 위군이 성도까지 진격하자 유선은 항복했고 촉나라는 멸망했다.

촉 멸망 후, 등애는 황호가 간악하다는 평판을 듣고 그를 체포하여 처형하려 했다. 그러나 황호는 등애의 측근에게 거액의 뇌물을 바쳐 목숨을 건졌고,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황호가 정사 기록보다 훨씬 이전인 제갈량 생존 시기부터 권력을 탐하는 간신으로 등장한다. 위나라로부터 뇌물을 받고 강유의 북벌을 방해하는 등 사리사욕을 채우는 악인으로 묘사되며, 촉한 멸망의 가장 큰 원흉으로 그려진다. 성도를 함락한 등애에게 처형될 뻔하지만, 그 부하에게 뇌물을 건네 일시적으로 죽음을 면하는 것은 정사와 유사하다. 그러나 이후 낙양으로 압송된 뒤 이 사실이 사마소(司馬昭)에게 발각되어 미움을 샀고, 결국 사마소의 손에 의해 저자에서 능지처참을 당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시대별 황호 평가
시대인물평가 내용
(晉)진수"황호는 죽은 뒤 황문령에서 중상시, 봉거도위가 되어 위세를 부리며 결국 나라를 뒤엎었다."
(晉)상거 (화양국지)제갈상의 말을 인용: "부자가 나라의 은혜를 입었는데, 일찍이 황호를 베지 않아 멸망에 이르렀으니, 살아서 무엇하겠는가!"
(唐)이밀"안락공(유선)은 제갈량을 얻어 위(魏)에 대항했지만, 황호를 등용하여 나라를 잃었다."
(唐)이기부 (원화군현지)제갈첨의 말을 인용: "내부적으로 황호를 제거하지 못하고, 외부적으로 강유를 제어하지 못하며, 진격하여 강유를 지키지 못하니, 나에게 세 가지 죄가 있는데,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겠는가?"
(宋)사마광 (자치통감)강유의 말을 인용: "황호는 간교하고 제멋대로 하여 나라를 망칠 것이다."
(宋)사마광 (자치통감)유선의 말을 인용: "황호는 재빨리 아첨하는 작은 신하일 뿐이다."
(明)장대 (야항선)"촉한(蜀漢)의 환관 황호는 아첨하고 간사하며 아첨에 능했고, 후주(유선)가 그를 총애했다."
(淸)종경백 (휘평삼국지연의)"서촉(西蜀)의 기틀은 백 가지 계략으로 얻었고, 백 번 싸워 지켜냈지만, 결국 황호에게 미혹되어 한(漢)과 함께 불타게 되었다."


4. 기타

삼국지연의에서 묘사된 황호의 행적 중 일부는 정사 기록과 차이가 있지만, 그 외의 상당 부분은 사서의 기록과 유사하게 그려진다.

4. 1. 대중문화

삼국지연의에서는 황호가 주요 간신으로 등장하며, 정사 기록보다 훨씬 이른 시기인 제갈량 생존 시기부터 권력을 잡은 것으로 묘사된다.[1] 위나라로부터 뇌물을 받고 강유북벌을 방해하는 등 사리사욕을 채우는 악랄한 인물로 그려진다. 예를 들어, 등애사마망이 강유에게 패배하자 양양 사람 당균(黨均)을 시켜 성도의 황호에게 뇌물을 바치게 했고, 뇌물을 받은 황호는 당균과 함께 강유가 위나라에 항복하려 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강유가 군사를 물리게 만들었다.[2] 또한 촉한 멸망 직전에는 강유성 함락 사실을 숨기는 등 나라를 망하게 한 가장 큰 원흉으로 묘사된다.[1]

가충사마소에게 강유를 암살할 것을 건의하자, 종사중랑(從事中郎) 순욱(荀勖)은 강유가 답중에 머무르는 것이 황호의 농간 때문이므로 군사를 보내 촉나라를 정벌하면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장면도 나온다.[2]

소설 속 황호의 최후는 정사 기록과 차이가 있다. 성도를 함락한 등애에게 처형당할 뻔하지만, 그의 부하에게 뇌물을 건네 일시적으로 죽음을 면하는 것은 사서 기록과 비슷하다.[1][2] 그러나 이후 유선을 따라 위나라 수도 낙양으로 갔을 때, 이 사실이 사마소에게 발각되어 미움을 사게 되고, 결국 사마소의 명령에 따라 저잣거리에서 능지처참당하는 것으로 묘사된다.[1][2][3]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34 (추정: Sanguozhi 저자)
[2] 서적 삼국지·董允傳
[3] 서적 晉書·李密傳
[4] 서적 양양기
[5] 서적 삼국지 권34 이주비자전
[6] 서적 삼국지 권42 극정전
[7] 서적 진서 진수전
[8] 서적 삼국지 권35 제갈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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