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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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치통감은 사마광이 편찬한 중국의 대표적인 통사로, 선진 시대부터 오대 십국 시대까지 16개 시대를 편년체로 서술했다. 황제가 쉽게 역사서를 읽을 수 있도록 방대한 기존 역사서를 정리하고, 유교적 역사관을 바탕으로 정치와 인물의 득실을 평론하여 교훈적인 내용을 담았다. 정사 외에도 야사 등 다양한 자료를 활용하고, 문관의 시문이나 기이한 현상 등은 삭제하는 등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편집 방식을 선보였다. 자치통감은 송대 이후 역사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자치통감강목, 속자치통감장편 등 수많은 파생 저작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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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편찬 배경 및 목적
사마광은 기존 역사서들이 너무 방대하여 황제가 모두 읽기 어렵다는 점을 인식하고, 이를 하나로 정리한 통사(通史) 편찬에 착수하였다. 1064년 영종(英宗)에게 《통지(通志)》 8권을 바쳤는데, 이는 구양수의 《신오대사》처럼 《춘추》의 규범을 따랐다.[31] 신종(神宗) 대에 이르러 이 책은 "정치에 도움이 되는 거울"이라는 의미의 '자치통감'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자치통감'은 정치의 규범으로 삼고 왕조 흥망의 원인과 대의명분을 밝히려는 목적을 담고 있었다. 사실을 그대로 기술하기보다는, 사마광의 역사관에 따라 기사를 선택하고 정치와 인물의 득실(得失)을 평론하여 귀감이 될 만한 내용을 담았다. 위나라와 남조의 연호를 사용하여 정통성을 명시하였다.
사마광은 전국 시대부터 5대(五代)까지 1362년의 정치적 변천을 정리하여 대의명분을 밝히고, 제왕(帝王)의 정치에 거울로 삼고자 했다. 그는 "신(臣)의 정력이 이 서(書)에 다하였도다"라고 상주(上奏)할 정도로 19년간의 편찬 작업에 몰두했다. 각 왕조의 정사(正史) 외에 322종의 잡사(雜史)를 참고하고, 수 · 당 시대 부분은 구양수의 《신당서》 편찬 이후 수집된 자료까지 채록하여 높은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32] 사마광은 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날짜순으로 정리한 '대자료집'(장편)을 완성하고(제1단계), 이 중에서 정치에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뽑아 《자치통감》을 완성했다(제2단계).
제1단계는 사마광 혼자 한 것이 아니라, 유반(劉攽)이 전·후한 시대, 범조우(范祖禹)가 당대사, 유서(劉恕)가 삼국에서 남북조 부분을 맡는 등 시대별 전문가들이 분담하였다.[33] 정사(正史)뿐 아니라 실록(實錄) ·야사(野史) ·소설(小說) ·묘지류(墓誌類) 등 다양한 자료를 참고하고, 《춘추좌씨전》의 서법(書法)에 따라 완성하였다. 중요 기사에는 ‘신광왈(臣光曰)’이라 하여 사마 광 자신의 평론을 덧붙였다.
신종(神宗)은 《자치통감》이라 이름을 붙이고 서문(序文)을 썼다. 사마광은 고증이 필요한 부분을 정리한 《자치통감고이(資治通鑑考異)》(30권), 연표인 《자치통감연표》(30권)를 만들었다. 《통감목록(通鑑目錄)》(30권), 《통감석례(通鑑釋例)》(1권)는 목록과 범례를, 《계고록(稽古錄)》(20권)은 《자치통감》의 부족한 내용을 보충한 것이다.
사마광은 황제에게 보낸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어려서부터 역사를 두루 살펴왔습니다. 기전체는 내용이 너무 방대하고 많아서 비록 박학한 학자라도 여러 번 읽어도 이해하고 정리하기 어렵습니다. … 저는 늘 전국 시대부터 오대에 이르기까지, 『좌전(左傳)』의 형식을 대략적으로 따르고, 정사 외의 다른 책들을 참고하여 통치자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담은, 즉 왕조의 성쇠와 백성의 희로애락과 관련되고, 선은 본보기가 되고 악은 경고가 될 수 있는 연대기 역사를 쓰고 싶었습니다.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기전체 대신 편년체를 선택했는데, 이는 유학 경전인 『춘추』를 본받고 객관을 중시하며 주관을 배제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당시 기전체 사서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사마광은 정사에 없는 야사, 가전, 잡설 등 322종의 자료를 활용했다. 특히 수, 당, 오대 부분은 구양수의 『신당서』 편찬 시 버려진 자료나 이후 수집된 자료를 활용하여 사료적 가치가 높다.[3]
당시 정사 편찬은 유교 경전을 암기한 사관이 유교 도덕적으로 문제없는 이야기를 기전체로 쓰는 것이 선호되었다. 귀족 출신 관료들은 무관을 천시하고 문관의 공적을 과장했다.[4] 사마광은 군사적 사실과 민간 야사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역사학자 이나바 이치로는 사마광이 야사를 많이 사용하고 편년체로 역사를 쓰려 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 정사가 방대하고 관료 이력서, 상표문으로 가득 차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 송의 과거 관료는 민중 출신이 많아 귀족의 역사 저술에 불만이 있었다.
- 단대사의 기전체에서는 승자 왕조가 “선”으로 여겨져 불공평한 묘사가 있었다.
- 춘추학 발달로 편년체가 재검토되었다.[5]
당시 정사 편찬관의 편견에 대해 송의 홍매는 『용재사필』 권11에 자세히 기록했다.[6]
홍매에 따르면, 당시 정사 편찬관은 야사, 종군기, 가전을 버리고 유교 도덕적으로 문제없는 이야기만 사서에 기재했다. 사마광은 야사를 사용하여 부도덕한 일도 기재했다.[7]
사마광이 야사를 채용했기 때문에, 자치통감은 잔혹한 묘사가 많다는 평가를 받았다. 상원규장[8]은 자치통감의 식인 묘사를 바탕으로 “支那人間に於ける食人肉の風習”이라는 논문을 썼다.[9] 사마광은 유교적 곡필을 배제하고, 정사가 배제했던 무인의 종군 기록과 민간인의 수기를 참고했다.[10] 원의 『문헌통고』는 사마광이 세상을 교정하고 어지러운 중국 풍속을 바로잡으려 했다고 변호했다.[11]
사마광은 문관의 시문과 상표문, 기이한 현상은 삭제하고 역사의 큰 흐름만 기록했다. 조수 유서의 아들 류희중은 『통감문의』에서 이를 비판했지만, 사마광은 개의치 않았다. 유방의 백사 벤 이야기만 후에 부활시켰다.[12]
사마광은 제도사·경제사를 경시했던 정사를 한탄하며, 자치통감에 제도의 변천, 경제사, 천문, 지리 등 백과사전적 기재를 많이 했다.[13] 주석을 단 호삼성은 사마광의 백과사전적 기재에 놀라며, “통감을 읽는 사람은 음하의 쥐와 같다. 각자 그 양을 채우는 것뿐이다.”라고 했다.[14]
자료 수집 후 연월일에 정리하여 자료집(장편)을 만들고(제1단계), 사마광이 치세에 도움 되는 것만 골라 『자치통감』을 완성했다(제2단계).
한대는 류탁(류창의 동생), 당대는 범조우, 남북조 시대는 유서가 담당했다. 유서의 사료 수집은 완벽하여 사마광은 할 일이 없었다고 한다.
사마광은 춘추의 서법을 의식했다. 그의 문집, 류창과의 서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증이 필요한 자료는 『'''통감고이'''』 30권, 연표는 『'''통감목록'''』 30권으로 정리했다.
북송 시대에 『자치통감』은 인기가 없었다. 사마광의 정적 왕안석의 신법당은 정부 비판의 책이라며 인정하지 않았다. 사마광 사후 판목을 부수려는 자도 있었지만, 황제의 서문 덕에 면했다.[15]
남송 시대 지식인들 사이에서 읽혔지만, 주희는 정통성에 문제가 있다며 비판했다.[12]
금(金)·원(元) 같은 정복 왕조에서 인기를 얻었다. 금의 세종과 원의 세조 쿠빌라이는 애독자였다.[12] 금 세종은 중국 역대 흥망을 잘 알 수 있다고 극찬했다. 쿠빌라이는 『자치통감』 강의를 듣고, 약본(통감절요)을 몽골어로 번역하게 했다.[12]
3. 편찬 과정
사마광은 황제가 모든 역사책을 다 읽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여, 여러 역사책을 하나로 묶은 《통지》 8권을 편찬했다. 이 책은 편년체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구양수의 《신오대사》처럼 《춘추》의 규범을 따랐다.[31] 1064년 영종에게 처음 바쳐진 이 책은 신종 때에 이르러 "정치에 도움이 되는 거울"이라는 의미의 '자치통감'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사마광은 이 책을 통해 전국 시대부터 5대까지 1362년 동안의 정치적 변화를 정리하고, 왕조 흥망의 원인과 대의명분을 밝혀 제왕의 정치에 귀감이 되도록 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역사관을 바탕으로 기사를 선택하고, 정치나 인물의 득실을 평가하여 귀감이 될 만한 내용을 많이 담았다. 편년체 서술에 있어서도 위나라와 남북조 시대에는 남조의 연호를 사용하여 정통성을 명확히 했다.
사마광은 "신(臣)의 정력이 이 서(書)에 다하였도다"라고 말할 정도로 19년간의 편찬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각 왕조의 정사뿐만 아니라 322종에 달하는 야사, 소설, 묘지류 등 다양한 자료를 참고했다.[33] 특히 수, 당 시대 부분은 구양수의 《신당서》 편찬 이후 수집된 자료까지 포함하여 사료적 가치를 높였다. 사마광은 가능한 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날짜순으로 정리해 '장편'이라고 불리는 '대자료집'을 완성했다(제1단계). 그 후, '대자료집'에서 정치에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선별하여 《자치통감》을 완성했다(제2단계).
제1단계 작업은 사마광 혼자 한 것이 아니라, 당대 최고의 역사학자들이 함께 참여했다. 전·후한 시대는 유반이, 당대사는 범조우가,[32] 삼국에서 남북조 부분은 유서가 맡았다.[33] 이들은 각자 전문 분야를 맡아 효율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했다. 사마광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기사에는 '신광왈(臣光曰)'이라는 자신의 평론을 덧붙여 자신의 사관을 드러냈다.
신종은 《자치통감》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직접 서문을 썼다. 사마광은 자료 중 고증이 필요한 부분을 따로 정리하여 《자치통감고이》(30권)를 만들었고, 연표인 《자치통감연표》(30권)도 만들었다. 《통감목록》(30권)과 《통감석례》(1권)는 사마광이 《자치통감》의 목록과 범례를 수록한 것이며, 《계고록》(20권)은 완성된 《자치통감》의 부족한 내용을 보충한 것이다.
사마광은 의도적으로 기전체 대신 편년체를 선택했다. 이는 유교 경전인 《춘추》를 본받고자 한 목적과 객관성을 중시하고 주관을 배제하는 그의 사상 때문이었다. 또한, 당시 기전체 사서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라는 연구도 있다.
《자치통감》은 처음에는 '통지'라고 불렸으며, 1064년 영종에게 8권으로 바쳐졌다. 이후 신종 때 '자치통감'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정사에 기록되지 않은 야사 등 322종의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쓰여졌으며, 특히 수, 당, 오대 부분은 구양수의 《신당서》 편찬 이후 수집된 자료를 활용하여 사료적 가치가 높다.[3]
사마광이 야사를 많이 활용한 것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일이었다. 당대 이후 정사 편찬에서는 유교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는 이야기를 기전체로 쓰는 것이 선호되었다. 그러나 사마광은 군사적 측면의 사실과 민간 야사에 남아 있던 이야기를 많이 다루었다.[4]
역사학자 이나바 이치로는 사마광이 야사를 많이 사용하고 편년체로 역사를 쓰려고 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 정사가 방대하고 관료들의 이력서와 상표문으로 가득 차 있어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 송의 과거 관료는 민중 출신이 많아 귀족 중심의 역사 서술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 정사, 특히 단대사의 기전체에서는 역사를 편찬한 승자 왕조가 '선'으로 여겨져 불공평한 묘사가 있었다.
- 당시 춘추학이 발달하여 편년체가 재검토되고 있었다.[5]
당시 정사 편찬관들은 야사나 종군기, 가전을 버리고 유교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는 이야기만을 사서에 기록했다. 그러나 사마광은 야사를 사용하여 부도덕한 일도 기록했다.[6][7]
사마광이 야사를 많이 채택했기 때문에 《자치통감》에는 잔혹한 묘사가 많다는 평가도 있다.[8][9] 그는 유교적인 윤색을 배제하고 정사가 배제했던 무인의 종군 기록과 민간인의 수기를 '정치가의 경계'로 삼았기 때문이다.[10] 이 때문에 '통감은 소설을 채용한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원나라의 《문헌통고》는 사마광이 세상을 교정하고 어지러운 풍속을 바로잡으려 한 것이라고 옹호했다.[11]
반면, 문관의 공적을 칭찬하기 위해 정사가 채택했던 시문과 상표문은 거의 정리되었다. 또한, 기이한 현상도 모두 삭제하고 역사의 큰 흐름만을 기록했다. 유서의 아들 류희중은 이를 비판했지만, 사마광은 개의치 않았다.[12]
사마광은 당시 정사가 제도사, 경제사를 경시하는 것을 한탄하며, 《자치통감》에서는 제도의 변천, 경제사, 천문, 지리 등 백과사전적인 내용도 많이 다루었다.[13] 주석을 단 호삼성은 사마광의 백과사전적인 기록에 감탄하며, "통감을 읽는 사람은 음하의 쥐와 같다. 각자 그 양을 채우는 것뿐이다."라고 말했다.[14]
《자치통감》의 제작 방법은 두 단계로 나뉜다.
1. 자료를 수집하여 연월일순으로 정리한 거대한 자료집(장편)을 만든다.
2. 장편을 바탕으로 사마광이 정치에 도움이 되는 것만을 골라 《자치통감》을 완성한다.
제1단계는 사마광 혼자 한 것이 아니라, 한대는 류탁, 당대는 범조우, 남북조 시대는 유서가 담당했다.
사마광은 춘추의 서법을 의식하여 편년체를 취했다. 그의 문집에 남은 기록이나 류창과의 서신 교환 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고증이 필요한 자료는 《자치통감고이》 30권으로 정리되었고, 연표인 《자치통감목록》 30권도 만들어졌다.
4. 구성 및 내용
《자치통감》은 총 294권으로, 사마광이 송나라 영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편년체 역사책이다. 전국 시대부터 오대까지 16개 시대, 1362년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각 시대별 구성은 다음과 같다.
- 주기(周紀) 5권
- 진기(秦紀) 3권
- 한기(漢紀) 60권
- 위기(魏紀) 10권
- 진기(晉紀) 40권
- 송기(宋紀) 16권
- 제기(齊紀) 10권
- 양기(梁紀) 22권
- 진기(陳紀) 10권
- 수기(隋紀) 8권
- 당기(唐紀) 81권
- 후량기(後梁紀) 6권
- 후당기(後唐紀) 8권
- 후진기(後晉紀) 6권
- 후한기(後漢紀) 4권
- 후주기(後周紀) 5권
각 시대별 주요 사건, 인물, 제도 변화 등을 상세히 기록하였으며, 특히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기사에는 사마광 자신의 평론인 '신광왈(臣光曰)'을 덧붙여 자신의 역사관을 드러냈다.[33]
사마광은 자료의 출처와 내용 고증, 목록 등을 정리하기 위해 《자치통감고이(資治通鑑考異)》(30권), 《자치통감목록(資治通鑑目錄)》(30권) 등을 부수적으로 편찬했다.

4. 1. 주기(周紀)
4. 2. 진기(秦紀)
진(秦)기는 진 소양왕부터 이세황제까지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4. 3. 한기(漢紀)
漢紀|한기중국어는 전한 고제부터 후한 헌제까지 기록된 부분으로 총 60권이다.
4. 4. 위기(魏紀)
魏紀중국어는 삼국시대 위나라 문제부터 원제까지를 다룬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4. 5. 진기(晉紀)
晉紀중국어는 자치통감의 한 부분으로, 서진 무제부터 동진 공제까지를 다루며 총 4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4. 6. 송기(宋紀)
宋紀중국어는 유송 시기를 다루며, 무제부터 순제까지 총 1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4. 7. 제기(齊紀)
제기(齊紀)는 남제(479년–502년) 시대를 다룬 10권 분량의 기록이다.
4. 8. 양기(梁紀)
梁紀|양기중국어는 양나라 무제부터 경제까지 2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4. 9. 진기(陳紀)
陳紀중국어는 남조 진나라 무제부터 장성공(말제)까지 다룬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4. 10. 수기(隋紀)
隋紀중국어는 수 문제부터 수 공제까지 8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4. 11. 당기(唐紀)
唐紀|당기중국어는 자치통감의 한 부분으로, 당나라 고조부터 소선제(애제)까지 81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4. 12. 후량기(後梁紀)
後梁紀중국어는 양 태조부터 말제까지 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4. 13. 후당기(後唐紀)
後唐紀중국어는 후당 장종부터 말제(노왕)까지 8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4. 14. 후진기(後晉紀)
《자치통감》의 '후진기'는 진 고조부터 진 출제까지 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4. 15. 후한기(後漢紀)
후한기는 한 고조부터 한 은제까지 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4. 16. 후주기(後周紀)
후주기는 태조부터 공제까지 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5. 영향 및 파생 저작
《자치통감》은 송대 이후 역사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편년체 역사 서술의 모범이 되었으며, 이후 《자치통감강목》, 《속자치통감장편》, 《통감기사본말》 등 많은 파생 저작들이 편찬되었다.[16] 원나라 호삼성의 주석(호주胡注)은 《자치통감》의 기사를 보정하고 다른 사료의 내용도 제공하여 본서를 읽는 데 필수적인 문헌으로 평가받는다.[24]
고려 시대에는 이 책이 '자리통감'(資理通鑑)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읽혔는데, 고려 성종의 휘가 왕치(王治)였기 때문에 피휘를 하기 위해 치(治)를 뜻이 같은 리(理)로 바꾼 것이다. 조선 시대에도 중요한 역사서로 인식되었다. 권중달 역의 《자치통감》 완역본(총 32권)은 1997년 번역을 시작해 2005년에 완료되었으며,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출간되어 한국 독자들이 이 방대한 역사서를 접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35]
《자치통감》의 영향을 받은 역사서는 크게 두 가지 계통으로 나뉜다.[17]
- 주희의 《자치통감강목》, 원술의 《통감기사본말》과 같은 다이제스트본(약본) 계통: 《자치통감》은 방대하여 남송 시대부터 여러 다이제스트 판본이 존재했다.
- 이도의 《속자치통감장편》, 비원의 《속자치통감》, 황이주·진훤업 등의 《속자치통감장편십보》 등과 같이 《자치통감》의 속편을 의도하여 쓰여진 책들이다.
후대에 두 계통을 종합한 《통감집람》, 《경헌유언》과 같은 역사서도 쓰였다.[21]
6. 평가 및 의의
《자치통감》은 방대한 분량, 엄밀한 고증, 객관적인 서술로 중국 역사학의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평가받는다. 편년체 서술 방식으로 역사의 흐름을 명확히 제시하고, 다양한 자료를 활용하여 역사적 사실을 다각도로 조명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3]
사마광은 유교 경전인 《춘추》의 서술 방식을 본받아 편년체를 채택하여 역사의 흐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정사뿐만 아니라 야사, 가전, 잡설 등 322종에 이르는 풍부한 자료를 참고하여 역사적 사실을 다각도로 조명했다.[3] 특히 당나라와 5대 시대 부분은 《신당서》 편찬 이후 수집된 자료까지 활용하여 사료적 가치가 높다.[3]
사마광은 정사에 기록된 문관들의 시문과 상표문은 거의 정리하고, 기이한 현상에 대한 기록도 삭제하여 역사의 큰 흐름만을 중점적으로 기록했다. 이는 문관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 군사적 측면과 민간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고자 한 시도였다.[4]
《자치통감》은 한국 역사와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고려 시대에는 고려 성종의 휘를 피휘하기 위해 '자리통감'이라고 불렀으며, 조선 시대에는 집현전 학사들이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다.[34]
《자치통감》은 단순한 역사 기록을 넘어, 과거의 경험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위한 교훈을 얻고자 하는 실용적인 역사관을 보여준다. 이는 역사를 통해 사회 개혁과 발전을 추구하는 진보적 관점과도 일맥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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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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