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 벨라스코 알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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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안 벨라스코 알바라도는 페루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1968년 쿠데타를 통해 페르난도 벨라운데 테리 대통령을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군부혁명정권"을 표방하며 토지 개혁, 국유화 정책, 교육 개혁 등을 추진하여 페루 사회의 구조적 개혁을 시도했다. 벨라스코는 반제국주의 외교를 펼치며 소련 및 쿠바와 국교를 수립하고, 미국과의 관계를 긴장시켰다. 1975년 쿠데타로 실각했으며, 그의 정책은 페루 경제에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모두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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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벨라스코 알바라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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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후안 프란시스코 벨라스코 알바라도 세가라 |
출생일 | 1910년 6월 16일 |
출생지 | 페루 피우라 카스티야 |
사망일 | 1977년 12월 24일 |
사망지 | 페루 리마 |
배우자 | 콘수엘로 곤살레스 (1940년 결혼) |
직업 | 군인 |
정치 경력 | |
직위 | 페루의 제50대 대통령 |
직위 상태 | 혁명군사정부의 초대 대통령 |
대통령 임기 시작 | 1968년 10월 3일 |
대통령 임기 종료 | 1975년 8월 30일 |
총리 | 에르네스토 몬타녜 루이스 에드가르도 메르카도 하린 프란시스코 모랄레스 베르무데스 |
군사 경력 | |
직위 | 페루 육군 사령관 |
임기 시작 | 1967년 |
임기 종료 | 1968년 |
이전 사령관 | 훌리오 도이그 산체스 |
다음 사령관 | 에르네스토 몬타녜 산체스 |
소속 | 페루 |
군 종류 | 육군 |
계급 | 장군 |
기타 정보 | |
로마자 표기 | Juan Francisco Velasco Alvarado Zegarra |
2.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1929년, 벨라스코는 배에 몰래 타고 리마로 가서 나이를 속이고 페루 육군 장교로 입대하려 했다. 그러나 시험에 늦게 도착하여 1929년 4월 5일에 이병으로 입대했다. 1년 후, 에스쿠엘라 밀리타르 데 초릴로스 입학 시험을 치러 응시자 중 최고 점수를 받았다. 1934년,[4] 그는 최우등으로 졸업했다.[3]
2. 1. 출생 및 가정 환경
후안 벨라스코는 페루 북부 해안 피우라 근처 도시인 카스티야에서 태어났다. 그는 의무 보조원인 마누엘 호세 벨라스코와 11명의 자녀를 둔 클라라 루스 알바라도의 아들이었다. 벨라스코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피우라에서 구두닦이로 일하며 존엄하게 가난하게 살았던" 시절로 묘사했다.[3] 1940년 콘수엘로 곤잘레스 포사다와 결혼하여 여러 명의 자녀를 두었다.[5]2. 2. 군 입대 및 사관학교 시절
후안 벨라스코 알바라도는 페루 북부 해안의 피우라 근처 도시인 카스티야에서 태어났다. 그는 의무 보조원인 마누엘 호세 벨라스코와 11명의 자녀를 둔 클라라 루스 알바라도의 아들이었다. 벨라스코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피우라에서 구두닦이로 일하며 존엄하게 가난하게 살았던" 시절로 묘사했다.[3]1929년, 벨라스코는 배에 몰래 타고 리마로 가서 나이를 속이고 페루 육군 장교로 입대하려 했다. 그러나 시험에 늦게 도착하여 1929년 4월 5일에 이병으로 입대했다. 1년 후, 그는 에스쿠엘라 밀리타르 데 초릴로스 입학 시험을 치러 응시자 중 최고 점수를 받았다. 1934년에 그는 최우등으로 졸업했다.[3][4]
그는 1940년 콘수엘로 곤잘레스 포사다와 결혼하여 여러 명의 자녀를 두었다.[5]
2. 3. 결혼
후안 벨라스코는 1940년에 콘수엘로 곤잘레스 포사다와 결혼하여 여러 명의 자녀를 두었다.[5]3. 1968년 쿠데타와 정권 장악
1968년 페루 쿠데타로 집권한 후안 벨라스코 알바라도는 자신의 정권을 "군부혁명정권"으로 규정하고, 고등군사훈련소(CAEM)가 1968년에 작성한 "잉카 계획"에 따라 국가 구조 개혁을 추진했다. 반제국주의를 내세운 벨라스코 정권은 동유럽 여러 국가와 국교를 수립하고, 1969년 2월에는 페루의 배타적경제수역(200해리)을 침범한 미국 참치 어선을 나포하는 등 자주 외교와 대미 종속으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했다.[34][35][36]
1969년 6월 24일, 투팍 아마루 2세의 슬로건과 함께 토지개혁법이 공포되었고, 남미 최대 규모의 토지개혁이 실시되었다. 이를 통해 정권의 정통성이 크게 강화되었고, "44가문 지배"라고 불리는, 토지에 의존해 온 페루의 지주 과두 지배층은 해체되었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1970년 저서 『빼앗긴 땅, 라틴 아메리카 500년』에서 "안데스 지방에서는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지하수맥처럼 군인들의 민족주의가 맹렬한 기세로 되살아났다"고 평가했다.[33]
벨라스코 정권은 종속이론의 영향을 받아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인간적인 사회주의"를 추구했으며,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자주관리 사회주의를 모델로 삼았다. 1969년 12월에는 사법 개혁으로 부패한 대법관들이 해임되었고, 1971년 6월에는 대중의 정치 참여를 위한 전국사회동원기구(SINAMOS)가 설립되었다. 또한, 원주민을 차별적인 "인디오" 대신 "캄페시노"(농민)로 부르는 등 원주민 복권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정책으로 민중의 지지를 얻은 벨라스코는 "엘 치노"(친근하게 사용되는 '중국인'이라는 뜻)라는 애칭으로 불렸다.[34][35][36]
경제적으로는 외국 경제 종속에서 벗어나 국민경제를 확립하기 위해 수입대체산업화를 추진했다. 세로 데 파스코 동광 회사와 어분 회사 등이 국유화되었고, 1970년 6월에는 프라도 일가 소유의 방코 포플라르가 국유화되는 등 은행 통제가 강화되었다.
외교적으로는 미국 일변도 외교에서 벗어나 1971년 알바니아 결의에 찬성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1972년에는 소비에트 연방 및 쿠바와 국교를 수립했다. 동유럽, 서유럽, 일본, 칠레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도 교류를 강화하고, 비동맹 운동과 제3세계 국가들과의 교류도 심화했다.
벨라스코의 군사혁명정권은 안데스 지역의 혁신적인 군사정권과 파나마의 오마르 토리호스 정권 등에 모방되어 하나의 모델 체제가 되었다.[37] 또한, 이 시기 행사에 참석한 베네수엘라 육군 사관학교생 우고 차베스에게 직접 정치 개혁에 관한 책을 건네주기도 했다.[38]
3. 1. 쿠데타 이전의 정치적 상황
1968년 페루 쿠데타 이전, 페르난도 벨라운데 테리 대통령의 집권 기간(1963~1968) 동안 페루는 정치적 불안정에 시달렸다. 벨라운데 대통령은 의회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해, 미국인민혁명동맹(APRA)과 오드리스트국민연합(UNO) 연합이 장악한 의회와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심지어 대통령 자신의 정당인 인민행동당과도 갈등이 있었다.[6] 의회는 벨라운데 정부의 여러 내각을 불신임했고, 전반적인 정치 불안정이 만연했다.[6]1964년부터 1965년 사이에는 쿠바 혁명에 영향을 받은 두 차례의 군사 반란이 일어났다. 에르난도 베하르와 하비에르 에라우드가 지휘하는 페루국민해방군(ELN)과 APRA 당원 루이스 데 라 푸엔테 우세다와 기예르모 로바톤이 이끄는 페루혁명좌파운동(MIR)이 게릴라 전술을 통해 혁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페루 군 장교들은 빈곤 지역을 방문하여 농촌의 현실을 목격하고 사회 불평등과 빈곤을 국가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7]
페루 북부 라 브레아 이 파리냐스 유전에 대한 국제석유회사(International Petroleum Company)와의 라이선스 분쟁은 계약서의 중요한 페이지(11번째 페이지)가 누락된 것이 발견되면서 전국적인 스캔들로 번졌다.[8] 이러한 상황은 또 다른 반란이나 APRA당의 권력 장악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
3. 2. 쿠데타 발발
페르난도 벨라운데 대통령 집권 시기(1963~1968) 페루는 정치적 분쟁에 휩싸였다. 의회는 미국인민혁명동맹(APRA)과 오드리스트국민연합(UNO) 연합이 장악했고, 벨라운데 대통령과 의회, 심지어 대통령과 자신의 정당인 인민행동당 사이에도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 의회는 벨라운데 정부의 내각을 여러 차례 불신임했고, 정치 불안정이 만연했다.[6]1964년부터 1965년 사이에는 쿠바 혁명에 영향을 받은 군사 반란이 두 차례 발생했다. 페루국민해방군(ELN)과 페루혁명좌파운동(MIR)은 게릴라 전술로 혁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군 장교들은 빈곤 지역을 방문하며 사회 불평등과 빈곤을 국가 안보 위협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7]
국제석유회사(International Petroleum Company)와의 유전 라이선스 분쟁 중 계약서 11페이지가 누락된 사실이 밝혀지며 전국적인 스캔들이 발생했다.[8] 페루군은 이 스캔들이 반란이나 APRA당의 집권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1968년 10월 3일, 당시 합참의장이었던 후안 벨라스코 알바라도 장군은 무혈 쿠데타로 벨라운데 정부를 축출하고 대통령은 망명했다.[6] 쿠데타 직후 군은 분쟁 중이던 유전을 점령하며 반발을 잠재웠다.[6]
4. "페루 혁명"과 주요 정책 (1968-1975)
1968년 10월 3일, 후안 벨라스코 알바라도는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페르난도 벨라운데 테리 대통령을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다음 날, 벨라스코는 타라라 협정을 무효화하고, 10월 9일에는 인터내셔널 페트롤리엄 컴퍼니(IPC)의 모든 자산을 압류하여 국민들의 환호를 받았다.[33] 그는 자신의 정권을 "군부혁명정권"으로 명명하고, 반제국주의를 내세우며 수입 대체 산업화를 추진하는 등 국가 구조 개혁에 착수했다.[34][35][36]
벨라스코 정부는 "페루애국주의"를 표방하며 국유화 정책을 통해 빈곤층에게 정의를 제공하고자 했다.[9] 그의 통치는 사회 민주주의, 개발주의, 그리고 독립적인 민족주의 정책을 특징으로 하였으며, 페루의 국제적 독립성을 높이기 위해 강력한 국내 산업을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9] 이를 위해 어업, 광업, 통신, 발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활동 분야의 기업들을 국유화하고, 단일 산업 중심의 정부 운영 기관으로 통합했다.[9]
벨라스코는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인간적인 사회주의"를 추구하며, 유고슬라비아의 자주관리 사회주의를 모델로 삼았다.[34][35][36] 1971년 6월에는 대중의 정치 참여를 실현하기 위해 전국사회동원기구(SINAMOS)를 설립했다.[34][35][36] 또한, "인디오"를 "캄페시노"(농민)로 바꾸는 등 원주민의 복권을 도모했다.[34][35][36]
대외 정책에서 벨라스코는 소련 세력권과의 협력을 추구하며 쿠바와 피델 카스트로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대량의 소련제 군사 장비를 구매했다.[18][19] 미국과의 관계는 긴장되고 적대적이었는데, 이는 페루 정부의 사회주의적 성향 정책과 더불어, 페루 국민들이 미국이 다른 국가들을 우선시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19][20]
4. 1. 교육 개혁
1972년 교육 개혁은 안데스와 아마존 지역의 원주민들에게 이중 언어 교육을 제공했는데, 이는 당시 인구의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11] 1975년 벨라스코 정부는 케추아어를 스페인어와 동등한 페루의 공용어로 만드는 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이 법은 시행되지 않았고, 케추아어와 아이마라어가 법에 따라 우세한 지역에서만 공용어가 되는 1979년 헌법이 발효되면서 효력을 상실했다.[11]근본적인 교육 개혁은 모든 페루인들 사이의 포용성을 증진하고 새로운 국가적 사고방식과 감정으로 이끌고자 했으며, 빈곤층과 가장 소외된 계층이 우선순위를 차지했다.[10] "인디오의 날" 또는 "페루 인디언의 날"은 "농민의 날" 또는 "페루 농민의 날"로 바뀌었다. 이 축제일은 겨울 동지였던 6월 24일, 전통적인 토지의 축제일이었다.[10]
4. 2. 토지 개혁
1969년 6월 24일, 호세 가브리엘 콘도르칸키(투팍 아마루 2세)의 슬로건과 함께 토지개혁법이 공포되었고, 남미 최대 규모의 토지개혁이 실시되었다.[12] 이를 통해 "44가문 지배"라고 불리는, 토지에 의존해 온 페루의 지주 과두 지배층은 해체되었다.[33]혁명 정부는 집권 10년 동안 1만 5천 개의 부동산(총 9백만 헥타르)을 몰수하여 약 30만 가구에 혜택을 주었다.[12] 이 프로그램에 반대한 전 토지 소유주들은 몰수된 자산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고, 국가 공무원과 농민 수혜자들이 몰수 후 부동산을 잘못 관리했다고 개탄했다.[13] 몰수가 토지개혁 채권으로 지불되었기 때문에 몰수와 더 유사하다고 주장하는 소유주도 있었는데, 이 채권은 1980년대 후반 페루 경제에 영향을 미친 초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정부가 채무 불이행을 하여 현재 가치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페루 정부를 상대로 10년간의 소송으로 이어졌다.[13]
벨라스코의 토지개혁은 쿠바에 이어 라틴 아메리카 역사상 두 번째로 큰 규모였다.[12]
4. 3. 국유화 정책
벨라스코 정부는 "페루애국주의"를 표방하며 국유화 정책을 통해 빈곤층에게 정의를 제공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어업, 광업, 통신, 발전 등 광범위한 분야의 기업들을 국유화하고, 단일 산업 중심의 정부 운영 기관으로 통합했다.[9]국유화된 기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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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scaPeru |
MineroPeru |
Petroperú |
SiderPeru |
Centromin Peru |
ElectroPeru |
Enapu |
EnatruPeru |
Enafer |
Compañía Peruana de Teléfonos |
EntelPeru |
Correos del Peru |
이러한 기관들을 독점으로 강화하고 해당 분야의 민간 활동을 억제함으로써 경제 활동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강화했다.[9]
1971년 벨라스코는 페루에서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경제 정책을 추구한다고 밝혔다.[16] 1975년 연설에서는 자신의 혁명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모두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17]
경제적으로는 외국 경제의 종속에서 벗어나 국민경제를 확립하기 위해 수입대체공업화를 추진했다. 세로 데 파스코 동광 회사와 어분 회사 등이 국유화되었고, 은행에 대한 통제도 강화되어 1970년 6월에는 프라도 일가의 소유물이었고 경영 파탄 직전이었던 방코 포플라르를 국유화했다.
벨라스코 정부의 경제 정책의 성공 여부는 오늘날에도 논쟁의 여지가 있다.[14] 페루 군정은 더 큰 부채에 시달리면서 통화 가치를 절하하고 인플레이션 정책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는 부분적으로 1970년대 에너지 위기로 인해 페루 경제가 영향을 받았고, 벨라스코 정부가 가장 야심찬 개혁 중 일부에 자금을 지원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정부의 경제 성장은 꾸준했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1인당 실질 GDP (2000년 미국 달러 기준)는 1968년부터 1975년까지 연평균 3.2% 증가했다.[15]
4. 4. 경제 정책 및 이념
벨라스코 정부는 "페루애국주의"를 표방하며 국유화 정책을 통해 빈곤층에게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다.[9] 그의 통치는 사회 민주주의, 개발주의, 독립 민족주의를 특징으로 하며, 페루의 국제적 독립성을 높이기 위해 강력한 국내 산업을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9] 이를 위해 어업, 광업, 통신, 발전 등 다양한 분야의 기업들을 국유화하고, 정부 운영 기관으로 통합하여 독점을 강화하고 민간 활동을 억제했다.[9]주요 국유화 기업은 다음과 같다.
기업명 | 분야 |
---|---|
PescaPeru | 어업 |
MineroPeru | 광업 |
Petroperú | 석유 |
SiderPeru | 철강 |
Centromin Peru | 광업 |
ElectroPeru | 전력 |
Enapu | 항만 |
EnatruPeru | 육상 교통 |
Enafer | 철도 |
Compañía Peruana de Teléfonos | 전화 |
EntelPeru | 통신 |
Correos del Peru | 우편 |
벨라스코 정부는 교육 개혁을 통해 모든 페루인들의 포용성을 증진하고 새로운 국가적 사고방식을 형성하고자 했다.[10] 특히 빈곤층과 소외 계층을 우선시했으며, 1972년에는 안데스 및 아마존 지역 원주민들에게 이중 언어 교육을 제공했다.[11] 1975년에는 케추아어를 스페인어와 동등한 페루의 공용어로 지정하는 법을 제정했으나, 이 법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11]
또한, 농장 몰수와 토지 소유권 다양화를 위한 토지개혁을 단행했다.[12] 집권 10년 동안 1만 5천 개의 부동산(총 9백만 헥타르)을 몰수하여 약 30만 가구에 혜택을 주었다.[12] 이는 쿠바에 이어 라틴 아메리카 역사상 두 번째로 큰 규모의 토지개혁이었다.[13] 그러나 토지 소유주들은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반발했고, 국가 공무원과 농민 수혜자들의 부동산 관리 부실을 비판했다.[13]
벨라스코 정부는 수입 대체 산업화 정책을 추진하고 엄격한 외환 및 무역 통제를 시행했다. 그의 경제 정책 성공 여부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14] 1970년대 에너지 위기로 인해 페루 경제는 어려움을 겪었고, 정부는 부채 증가, 통화 가치 절하, 인플레이션 정책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15]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8년부터 1975년까지 1인당 실질 GDP는 연평균 3.2% 증가했다.[15]
벨라스코는 1971년 자신의 경제 정책이 페루에서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16] 1975년 연설에서는 자신의 혁명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거부하는 것이라고 밝혔다.[17] 그는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인간적인 사회주의"를 추구했으며, 유고슬라비아의 자주관리 사회주의를 모델로 삼았다.[34][35][36]
경제적으로 외국 경제 종속에서 벗어나 국민 경제를 확립하기 위해 수입 대체 산업화를 추진했다.[34][35][36] 세로 데 파스코 동광 회사와 어분 회사 등을 국유화하고, 은행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34][35][36] 1970년 6월에는 프라도 일가의 소유였던 방코 포플라르를 국유화했다.[34][35][36]
4. 5. 외교 정책
벨라스코는 대외 정책에서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과 달리 소련 세력권과의 협력을 추구하며 쿠바와 피델 카스트로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대량의 소련제 군사 장비를 구매했다.[18][19] 1973년에는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다.벨라스코 정부와 미국과의 관계는 긴장되고 적대적이었는데, 이는 페루 정부의 사회주의적 성향 정책과 더불어, 페루 국민들이 미국이 다른 국가들을 우선시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영토 분쟁에서 미국이 칠레를 지지하거나, 살로몬-로사노 조약에서 콜롬비아를 중재한 것 등이 그 예시이다.[19][20]
1968년 집권 직후, 벨라스코는 페루 북부 탈라라의 아메리칸 인터내셔널 페트롤리엄 컴퍼니(IPC) 석유 시설을 국유화했다. 이는 리처드 닉슨 행정부의 첫 대외 정책 위기 중 하나였으며, 존 N. 어윈 2세가 특별 대사로 임명되어 해결을 모색했다. 결국 이 분쟁은 더 넓은 청구 합의의 맥락에서 해결되었지만, 페루는 IPC에 대한 보상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유지했다.[21]
미국과 페루의 불일치는 200해리 어업 한계에 대한 페루의 주장, 미국 구리 광산 회사 몰수 등 광범위한 문제로 이어졌다. 그러나 미국은 1970년 1970년 안카시 지진 당시 인도적 지원을 제공했다.[22]
벨라스코 정부는 군사력 강화에 주력했다. 1970년부터 1975년까지 페루는 소련 무기 구매에 최대 20억달러(2021년 기준 약 250억달러)를 지출한 것으로 추산된다.[24] 여러 자료에 따르면 600~1200대의 T-55 전차, 장갑차, 60~90대의 수호이 Su-22 전투기, 50만 정의 돌격 소총을 구매했으며, 영국의 센토르급 경항공모함 HMS 불워크 함의 구매도 고려했다.[24]
이러한 페루의 무기 구매는 1976년 미국의 헨리 키신저와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간의 회담으로 이어졌다. 칠레는 페루의 공격 가능성을 우려했지만, 일부 분석가들은 이러한 두려움이 과장되었다고 본다.[23]
벨라스코는 1971년 알바니아 결의에 찬성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1972년에는 소련, 쿠바와 국교를 수립했다. 또한, 동유럽, 서유럽, 일본,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과 교류를 강화하고, 비동맹 운동을 추진하며 제3세계 국가들과도 긴밀히 협력했다.
5. 몰락과 실각 (1975)
1974년 언론탄압 이후 인플레이션, 실업, 식량 부족과 같은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반대 세력의 증가는 벨라스코 정권에 대한 압력을 증가시켰다.[28] 1975년 8월 29일, 여러 군 지휘관들이 타크나 남부 도시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이는 "타크나조(Tacnazo)"라고 불린다.[28]
제1, 제2, 제3, 제4, 제5 군사 지역의 군 지휘관들은 벨라스코가 "페루 혁명"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고, 더 이상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새로운 군사 정부는 만장일치로 프란시스코 모랄레스 베르무데스 총리를 대통령으로 임명했다.[29]
벨라스코는 축출되기 전 최소 1년 동안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었다. 그는 색전증으로 다리를 잃었고, 순환기 문제로 인지 능력과 성격에 영향을 받았다는 소문이 있었다. 쿠데타 당시 그는 리마 동쪽 20km 지점의 차클라카요에 있는 대통령 별장에서 요양 중이었다. 그는 즉시 리마 시내 정부 청사에서 장관 회의를 소집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1975년 8월 29일 저녁, "페루인들은 서로 싸울 수 없다"는 이유로 쿠데타에 저항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발표하는 마지막 연설을 했다.[6]
1973년 석유 파동으로 페루 경제는 침체되었고, 같은 해 2월 벨라스코는 왼쪽 다리를 절단했다. 이후 벨라스코의 의심은 강해졌고, 정권 내부의 불화가 두드러졌다.[39]
같은 해 9월 11일 칠레 쿠데타로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이 붕괴되고, 반공주의를 내세운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정권이 들어서면서 칠레와의 군사 충돌 위기가 고조되었다. 파라과이, 볼리비아, 우루과이 등에서도 반공 군사 정권이 수립되면서 페루의 고립은 심화되었다. 1974년에는 미국, 칠레, 브라질 등에서 벨라스코가 태평양 전쟁에서 잃은 타라파카를 탈환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피노체트는 기갑사단을 북부 안토파가스타에 집결시켰다.[40]
군부의 권위주의적 태도와 대중 참여의 실현은 조화를 이루지 못했고, 민중은 정부가 정한 참여형 프로젝트를 통해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1975년 2월에는 경제적 실패로 경찰이 파업을 벌였고, 폭동으로 이어져 리마가 약탈당했다. 폭동 진압을 위해 군대가 출동하여 1,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벨라스코는 2월 28일 뇌졸중으로 쓰러졌지만, 4월에 복귀하여 6월에는 케추아어를 공용어로 제정했다. 그러나 경제 위기는 군 내 반 벨라스코 세력을 결집시키기에 충분했다. 벨라스코는 1975년 8월 29일, 프란시스코 모랄레스 베르무데스 장군의 무혈 쿠데타로 실각했다.
벨라스코는 1977년 12월 24일 리마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6. 사망과 유산
벨라스코 장군은 1977년 사망할 때까지 페루 정계에서 조용히 지냈다. 그의 장례식에는 많은 지지자들이 참석하여 정부가 행사 중 질서를 요청하는 공보를 발표해야 할 정도였다.[30]
1970년대 페루 수출품에 대한 국제 시장의 수요 감소로 인해 벨라스코가 전통 수출 산업을 강화하려는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부채 부담으로 이어졌다.[1] 그의 정부는 국가 중앙 집중화에 일부 책임이 있다. 토지 개혁 이후 사람들이 리마와 다른 해안 도시로 이동하면서 전국적으로 도시화가 시작되었다. 벨라스코 정부는 인구 유입을 적절히 관리하지 못했고, 이후 정부들도 이 문제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페루 도시 주변에 빈민가가 생기는 데 기여했다.[31]
1974년,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우고 차베스와 십여 명의 젊은 사관 및 병사들이 아야쿠초 전투 1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페루의 아야쿠초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벨라스코 장군을 직접 만났다. 벨라스코는 그들에게 "페루 국가 혁명" (''La Revolución Nacional Peruana'')의 소형판 책을 각각 한 권씩 선물했다. 사관들은 벨라스코가 페루 대중과 페루 군대의 일반 병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여겼다. 차베스는 이 책에 애착을 가지고 내용을 연구하고 항상 소지하고 다녔다. 그러나 차베스는 1992년 베네수엘라 쿠데타 시도를 주도한 후 체포된 뒤 이 책을 잃어버렸다. 25년 후 대통령이 된 차베스는 벨라스코의 선물에 대한 부분적인 경의를 표하며 정부의 새로운 볼리바르 헌법을 소형 청색 소책자 형태로만 수백만 부 인쇄하도록 지시했다.[32]
벨라스코의 정책은 의도했던 종속 경제의 극복에는 실패했고, 공무원 수의 증가로 벨라스코 자신이 싫어했던 관료화가 진행되었다. 토지 개혁으로 지주 과두 지배층은 해체되었지만, 벨라스코가 구상한 과두 지배층의 완전 해체에는 이르지 못했고, 토지 개혁으로 인한 농촌 지역의 권력의 공백이 1980년대 센데로 루미노소를 비롯한 농촌 게릴라의 등장을 불러왔다는 견해도 있다.[41]
하지만, 벨라스코는 투팍 아마루 2세의 반란 이후, 페루 근대사상 처음으로 페루가 안고 있는 병폐에 대한 과감한 대책을 시행한 인물이며, 페루 혁명으로 인디오의 복권이 진행된 결과, 인디오는 피사로의 정복 이후 400년 이상 잃어버렸던 자존심을 되찾을 기회를 잡았고, 혁명 이후 백인에 대한 인디오와 초로의 비굴한 태도는 현저히 감소했다. 또한, 그때까지 금기시되었던 인디오의 인권 문제나 자주 외교 등의 주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고, 벨라스코에 의해 페루 사회가 획기적인 변혁을 이룬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42]
7. 어록
Campesino, el patrón ya no comerá más de tu pobreza|농민들이여, 지주는 다시는 여러분의 가난을 이용하지 못할 것입니다es - 투팍 아마루 2세의 말을 되풀이하며 토지개혁을 맞아 한 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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