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토 대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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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간토 대지진은 1923년 9월 1일에 발생한 대규모 지진으로, 일본 간토 지방을 중심으로 막대한 인명 및 재산 피해를 입혔다. 지진 발생과 함께 강풍으로 인해 대규모 화재가 발생하여 사망자 대부분이 화재로 인해 사망했으며, 쓰나미와 산사태로 인한 피해도 컸다. 지진 이후 '조선인이 방화와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 정부는 제도부흥원을 설치하고 도시 재개발 및 내진 설계를 도입하는 등 복구 사업을 진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자가용의 보급이 늘고 도시 계획이 변화했다. 국제 사회에서도 구호 물품 및 성금 지원이 이어졌으며, 간토 대지진은 일본의 방재 의식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고, 역사 인식 문제로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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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 대진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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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 | |
발생일 | 1923년 9월 1일 11시 58분 32초 () |
진앙 | 사가미만 북서부 () |
진원 깊이 | 0 - 10 km (추정) |
규모 | M7.9 - M8.3 (추정) |
최대 진도 | 진도 7 (가나가와현, 사이타마현, 도쿄도, 지바현, 시즈오카현, 야마나시현) |
쓰나미 | 높이: 최대 12m (아타미시) 도달 시간: 지진 발생 후 5-10분 |
피해 | |
인명 피해 | 사망자: 105,000여 명 행방불명자: 37,000여 명 |
건물 피해 | 전파: 128,266채 반파: 126,233채 소실: 447,128채 |
경제 피해 | 당시 일본 국가 예산의 3.8배에 달하는 금액 |
관련 정보 | |
이전 명칭 | 다이쇼 지진 (大正地震) |
같이 보기 | 수도직하형지진 난카이 해곡 거대지진 1923년의 일본 |
기타 | |
일본 기상청 지진 ID | 19230901115831 |
2. 역사적 배경
간토 대지진은 20세기 초 일본의 근대화 과정 속에서 발생한 대규모 자연재해로, 당시 일본 사회의 여러 측면과 맞물려 큰 피해를 낳았다. 목조 건물이 밀집된 도시 구조와 특정 시간대, 기상 조건이 결합되어 화재 피해가 극심했으며(지진 발생 이전의 사회상, 지진의 규모와 특징 참조), 지진 발생 직전의 정치적 공백 상태는 초기 대응에 혼란을 야기했다(지진 발생 참조). 또한, 재해 복구 과정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외채 도입과 새로운 기술 도입은 이후 일본 경제와 사회 구조에 큰 영향을 미쳤다(메이지 유신 이후의 근대화, 경제 상황 참조). 지진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유언비어가 확산되며 조선인과 중국인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2. 1. 지진 발생 이전의 사회상

간토 대지진 발생 당시, 도쿄시를 비롯한 피해 지역은 목조 주택이 밀집된 형태의 도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9] 이러한 도시 환경은 지진 발생 시각이 점심 식사 준비를 위해 부뚜막이나 화로 등에 불을 지피는 시간대(정오 직전)와 겹치면서, 지진으로 인한 화재가 급속도로 번지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10][11] 또한, 당시 일본 근해를 북상하던 태풍의 영향으로 강풍이 불었던 점도 화재 확산을 부추겼다.[9]
2. 1. 1. 메이지 유신 이후의 근대화
간토 대진재는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진 재해 복구 과정에서 새로운 기술과 시스템이 도입되는 계기가 되었다.지진 재해 후, 일본에서 처음으로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었다. 재난 상황에서의 정보 전달 필요성이 부각되면서 라디오는 빠르게 보급되었으며, 이후 국정 홍보 수단으로도 활용되었다.[12]
교통 분야에서는 도쿄시가 T형 포드 약 800대를 수입하여 버스 사업을 시작했다(엔타로 버스).[18][19] 이는 기존의 도쿄 시전 기능 마비를 대체하기 위한 조치였으며,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버스 사업이 확산되었다. 또한, 수입된 트럭을 이용한 화물 수송도 시작되어 여객 및 물류 분야에서 모터리제이션 시대를 열었다.[19] 전화 역시 자동 교환기가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20]
경제적으로는 금융의 정체로 지진 재해 어음이 발생하자 긴급 칙령에 의한 모라토리엄이 부여되었다. 부흥 사업을 위해 상당액의 외채가 투입되었는데, 특히 화력 발전 도입기에 있던 전력 사업에 많은 자금이 소비되었다. 모건 상회는 1931년(쇼와 6년)까지 당시 일본 국가 예산의 60%를 넘는 규모인 10억엔 이상의 지진 재해 선후 처리 공채를 인수했으며,[13] 인수에는 로스차일드 가도 참여했다.[14] 이러한 외채는 부흥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일본의 국채 및 사채 양면에서 대외 채무를 급증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이후 지진 재해 불황으로부터 쇼와 금융 공황(1927년), 1930년(쇼와 5년)에 실시된 금 해금[16]을 거쳐 세계 대공황(쇼와 공황)으로 이어지는 어려운 경제 상황에 영향을 미쳤으며, 결국 이듬해에는 '''금 수출 금지'''[17] 조치가 내려졌다.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도쿄시와 요코하마시에서 오사카부나 아이치현 등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특히 오사카시는 제1차 세계 대전 특수 경기로 경제력을 회복한 상태였고, 1925년 인근 군부를 편입하며 인구가 크게 늘어나 도쿄시를 넘어 세계 6위의 인구를 가진 도시로 성장하는 등 대오사카 시대를 맞이하기도 했다. 이는 육대 도시의 서열에 영향을 미쳤다(참조).
2. 1. 2. 경제 상황
간토 대지진은 일본 경제에 큰 혼란을 가져왔다. 금융 시스템이 마비되면서 지진 재해 어음 문제가 심각해졌고, 이에 일본 정부는 긴급 칙령을 통해 모라토리엄(지불 유예 조치)을 선포해야 했다.막대한 피해 복구를 위한 부흥 사업에는 상당한 금액의 외채가 투입되었다. 특히 도입 초기 단계였던 화력 발전 관련 전력 사업에 외채의 절반가량이 집중되었다. 당시 주요 전력 회사들의 외채 발행 내역은 다음과 같다.
회사명 | 발행 연도 | 금액 | 통화 |
---|---|---|---|
도쿄 전등 | 1923년 6월 | 300만파운드 | 파운드 |
다이도 전력 | 1924년 8월 | 1500만달러 | 달러 |
도쿄 전등 | 1925년 2월 | 60만파운드 | 파운드 |
우지가와 전기 | 1925년 3월 | 1400만달러 | 달러 |
도호 전력 | 1925년 3월 | 1500만달러 | 달러 |
도호 전력 | 1925년 7월 | 30만파운드 | 파운드 |
다이도 전력 | 1925년 7월 | 1350만달러 | 달러 |
도쿄 전등 | 1925년 8월 | 2400만달러 | 달러 |
신에쓰 전력 | 1927년 12월 | 675만달러 | 달러 |
일본 전력 | 1928년 1월 | 900만달러 | 달러 |
도쿄 전등 | 1928년 6월 | 7000만달러 | 달러 |
도쿄 전등 | 1928년 6월 | 400만파운드 | 파운드 |
도호 전력 | 1929년 7월 | 1145만달러 | 달러 |
일본 전력 | 1931년 2월 | 150만달러 | 달러 |
타이완 전력 | 1931년 7월 | 2280만달러 | 달러 |
미국의 거대 금융 자본인 모건 상회는 1931년까지 지진 재해 선후 처리 공채 10억엔 이상을 인수했는데, 이는 당시 일본 국가 1년 예산의 60%를 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13] 이 과정에는 로스차일드 가도 참여했으며,[14] 재무 관료였던 모리 겐고가 자금 마련을 위해 비밀리에 활동했다.[15] 이러한 대규모 부흥 사업 자금 조달은 국채와 사채 발행을 통해 이루어졌고, 결과적으로 일본의 대외 채무를 급증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지진 피해는 직접적인 경제 불황으로 이어졌다. 이는 1927년 쇼와 금융 공황의 한 원인이 되었으며, 경제 회복을 위해 1930년 단행된 금 해금(금 수출 허용 조치)[16]은 때마침 불어닥친 세계 대공황(쇼와 공황)과 맞물려 일본 경제에 더 큰 타격을 주었다. 결국 일본 정부는 다음 해인 1931년 '''금 수출을 다시 금지'''[17]하는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지진 피해로 수도 도쿄와 요코하마의 기능이 마비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오사카부나 아이치현 등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이후 일본 내 경제 중심지의 변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교통 및 통신 분야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파괴된 도쿄 시영 전차를 대체하기 위해 도쿄시는 T형 포드 약 800대를 수입하여 시영 버스 사업(엔타로 버스)을 시작했다.[18][19] 이는 전국적으로 버스 사업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수입 트럭을 이용한 화물 운송도 활발해지면서 일본 사회의 모터리제이션을 촉진했다.[19] 또한, 전화 시스템 복구 과정에서 자동 교환기의 보급이 확산되었다.[20]
2. 2. 지진 발생
간토 대지진은 가나가와현 및 도쿄부(현 도쿄도)를 중심으로 인접 지역까지 광범위한 피해를 입힌 대규모 재해였다. 이는 2011년 동일본 대진재 이전까지 일본 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기록한 지진이다.
지진 발생 당시 일본은 정치적 공백 상태에 있었다. 가토 도모사부로 내각총리대신이 지진 발생 8일 전에 급사하여, 외무대신 우치다 고사이가 내각총리대신 임시대리로서 내각을 이끌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국가 기능이 집중된 수도 도쿄를 강타한 재난에 대한 정부의 초기 대응을 지연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지진 발생 다음 날인 9월 2일에 야마모토 곤노효에가 신임 총리로 취임했고, 본격적인 복구 작업을 위한 제도부흥원은 고토 신페이 내무대신을 총재로 하여 9월 27일에 설치되었다.
경제적으로도 큰 혼란이 발생했다. 금융 기능 마비로 진재수표 문제가 심각해지자 정부는 긴급칙령을 통해 모라토리엄(지급유예)을 선언했다. 복구를 위해 막대한 외채가 도입되었는데, 상당 부분은 당시 도입기였던 화력 발전소 건설 등 전력 사업에 투입되었다. 모건 상회는 1931년까지 당시 일본 국가 예산의 60%를 넘는 10억엔 이상의 진재전후처리공채를 인수했으며[13][152], 로스차일드 가도 공채 인수에 참여했다.[14][153] 이러한 대외 채무 증가는 이후 진재 불황과 쇼와 금융 공황, 쇼와 공황으로 이어지는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켰다.[17][155]
사회적으로도 지진은 큰 변화를 가져왔다. 파괴된 도쿄와 요코하마를 떠나 오사카나 아이치현 등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특히 오사카시는 1925년 주변 지역 통합 후 인구가 급증하며 대오사카 시대를 맞이했다. 교통 분야에서는 파괴된 도쿄도 전차를 대체하기 위해 도쿄시가 포드 모델 T 약 800대를 수입하여 '엔타로 버스'라 불리는 버스 운행을 시작했고, 이는 전국적인 버스 사업 확산과 모터리제이션의 시작을 알렸다.[18][19][156][157] 통신 분야에서는 자동 전화 교환기 도입이 촉진되었다.[20][158]
2. 2. 1. 지진의 규모와 특징


간토 대지진은 가나가와현 및 도쿄부(현 도쿄도)를 중심으로, 인접한 이바라키현, 지바현에서 시즈오카현 동부까지 내륙과 연안의 넓은 지역에 걸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190만 명이 피해를 입었고, 사망 또는 실종자는 10만 5,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는 동일본 대지진 이전까지 일본에서 가장 큰 인명 피해를 낸 지진 재해였다.[7] 희생자의 대부분은 도쿄부와 가나가와현에서 발생했다. 건물 피해는 전괴(완전히 무너짐) 약 10만 9,000동, 전소(완전히 불탐) 약 21만 2,000동에 달했다.[7]
다른 대지진과 비교했을 때 간토 대지진 사망 원인의 가장 큰 특징은 화재로 인한 소사(燒死)가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점이다.[8][150]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진재에서는 건물 붕괴로 인한 압사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에서는 쓰나미로 인한 익사가 가장 많았던 것과 대조적이다. 지진 발생 당시 일본해 연안을 북상하던 태풍의 영향으로 간토 지방에 강한 바람이 불고 있었고[9][151], 목조 주택이 밀집해 있던 도쿄시(도쿄 15구) 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화재가 발생했다. 또한 지진 발생 시각이 점심 식사 준비 시간대인 정오 직전이어서 부뚜막이나 화로 사용이 많았던 점, 피난민들이 대팔차 등에 가연성 가재도구를 싣고 이동하다 불이 옮겨붙은 점[10][11], 수도관 파열로 소방 활동이 어려웠던 점 등이 겹쳐 화재는 3일간이나 지속되었다. 특히 혼조 피복창 터에서는 피난민 수만 명이 화재 선풍에 휩쓸려 3만 5천 명 이상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30]
지진의 강한 흔들림 자체로 인한 건물 붕괴와 압사 피해도 컸으며, 진원 단층이 위치한 가나가와현 내륙 지역에서 특히 심했다. 액상화에 의한 지반 침하, 절벽 붕괴와 이에 따른 토석류 피해도 가나가와현 산간부와 하천 하류 지역에서 발생했다. 가나가와현 아시가라시모군 네부카와역 부근에서는 산사태로 열차가 바다로 추락하여 100명 이상이 사망하는 사고도 있었다. 쓰나미는 태평양 연안의 사가미만과 보소반도 연안을 덮쳤으며, 시즈오카현 아타미시에서 6m, 지바현 아이하마(현 다테야마시)에서 9.3m, 가나가와현 미우라에서 6m 높이의 쓰나미가 관측되었다. 가마쿠라시 유이가하마 해변에서는 쓰나미로 약 300명이 실종되었다.[31]
당시 도쿄제국대학 이과대학 교수였던 데라다 도라히코는 지진 발생 순간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그는 지인과 카페에서 대화하던 중 "두 발의 발바닥을 아래에서 나무 망치로 급속히 난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와 함께 강한 진동을 느꼈고,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비정상적인 대지진임을 직감했다. 건물이 4~5초 주기로 느릿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며 건물이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라 판단했고, 이후 더 강한 2차 진동을 겪은 뒤 점차 진동이 잦아들었다고 묘사했다.
주일 프랑스 대사였던 폴 클로델은 피난민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통해 당시 일본인들의 침착함에 대해 기록했다. 그는 "며칠 동안... 나는 불평하는 소리 하나도 듣지 못했다. ... 같은 작은 배를 탄 것처럼 사람들은 모두 가만히 조용히 있는 것 같았다"라고 당시 일본인의 모습을 적고 있다.[21][159]
정부 기능이 집중된 수도 도쿄가 직접적인 타격을 입어 국가 기능이 마비되었고, 지진 발생 8일 전에 가토 도모사부로 총리가 급사하여 우치다 고사이 외무대신이 총리 대리를 맡고 있던 정치적 공백기였기 때문에 정부의 초기 대응은 혼란스러웠다. 지진 다음 날인 9월 2일에야 야마모토 곤노효에가 신임 총리로 취임했고, 9월 27일에 고토 신페이 내무대신을 총재로 하는 제도부흥원이 설치되어 본격적인 복구 사업이 시작되었다.
피해 규모는 지역별로 차이가 컸으며, 주택 피해와 인명 피해를 종합한 통계는 다음과 같다.
주택 피해 동수 | 사망자・행방불명자 수 | ||||||||||||
---|---|---|---|---|---|---|---|---|---|---|---|---|---|
지역 | 전괴 | 비소실 전괴 | 반괴 | 비소실 반괴 | 소실 | 유실・매몰 | 합계 | 주택 전괴 | 화재 | 유출・매몰 | 공장 등 | 합계 | |
가나가와현 | 63,577 | 46,621 | 54,035 | 43,047 | 35,412 | 497 | 125,577 | 5,795 | 25,201 | 836 | 1,006 | 32,838 | |
도쿄부 | 24,469 | 11,842 | 29,525 | 17,231 | 176,505 | 2 | 205,580 | 3,546 | 66,521 | 6 | 314 | 70,387 | |
지바현 | 13,767 | 13,444 | 6,093 | 6,030 | 431 | 71 | 19,976 | 1,255 | 59 | 0 | 32 | 1,346 | |
사이타마현 | 4,759 | 4,759 | 4,086 | 4,086 | 0 | 0 | 8,845 | 315 | 0 | 0 | 28 | 343 | |
야마나시현 | 577 | 577 | 2,225 | 2,225 | 0 | 0 | 2,802 | 20 | 0 | 0 | 2 | 22 | |
시즈오카현 | 2,383 | 2,309 | 6,370 | 6,214 | 5 | 731 | 9,259 | 150 | 0 | 171 | 123 | 444 | |
이바라키현 | 141 | 141 | 342 | 342 | 0 | 0 | 483 | 5 | 0 | 0 | 0 | 5 | |
나가노현 | 13 | 13 | 75 | 75 | 0 | 0 | 88 | 0 | 0 | 0 | 0 | 0 | |
도치기현 | 3 | 3 | 1 | 1 | 0 | 0 | 4 | 0 | 0 | 0 | 0 | 0 | |
군마현 | 24 | 24 | 21 | 21 | 0 | 0 | 45 | 0 | 0 | 0 | 0 | 0 | |
합계 | 109,713 | 79,733 | 102,773 | 79,272 | 212,353 | 1,301 | 372,659 | 11,086 | 91,781 | 1,013 | 1,505 | 105,385 |
- 비소실 전괴・반괴는 소실 및 유출, 매몰 피해를 입지 않은 동수.
이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 중에는 일본 황족과 저명인사들도 다수 포함되었다.
이름 | 신분/직업 | 사망 경위 |
---|---|---|
히로코 여왕 | 간인노미야 사네히토 친왕의 넷째 딸 | 오다와라시 별저 붕괴 |
모로마사 왕 |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의 둘째 아들 | 후지사와시 별장 붕괴 |
사키코 여왕 | 야마시나노미야 타케히코 왕의 비 | 가마쿠라시 별저 붕괴 |
고노에 히데토시 | 고노에 히데마로 자작의 장남 | 가마쿠라 저택에서 쓰나미에 휩쓸림 |
마츠오카 야스토 | 추밀 고문관, 니혼 대학 총장 | 하야마 별장 붕괴 |
소노다 코키치 | 실업가, 남작 | 니노미야 별장 붕괴 |
이소베 시로 | 정치가, 법학자, 변호사 | 피난처인 피복창 터에서 소사 |
쿠리야가와 하쿠손 | 영문학자, 평론가 | 가마쿠라에서 쓰나미에 휩쓸려 다음날 사망 |
츠지무라 이스케 | 원예가, 등산가 | 오다와라 자택 뒤편 절벽 붕괴로 가족과 함께 희생 |
토미타 보포 | 하이쿠 시인 | 스미다 자택에서 피난 중 소사 |
5대 레이레이테이 류큐 | 라쿠고가 | 피난처인 피복창 터에서 소사 |
윌리엄 헤이그 | 영국 외교관 | 요코하마 영사관 붕괴 |
제니 카이퍼 | 페리스 화영 여학교 교장 | 교사 붕괴로 압사 |
2. 2. 2. 피해 지역


간토 대지진은 가나가와현과 도쿄부(현 도쿄도)를 중심으로 이바라키현, 지바현에서 시즈오카현 동부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190만 명이 피해를 입었으며, 사망 또는 실종자는 10만 5,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는 2011년 동일본 대진재 이전까지 일본 역사상 가장 큰 인명 피해를 낸 지진 재해였다.[7] 건물 피해는 전소 약 21만 2,000동, 전괴(완전히 무너짐) 약 10만 9,000동에 달했다.
다른 대지진과 비교했을 때 간토 대지진의 가장 큰 특징은 사망 원인 중 소사(불에 타 사망)가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점이다.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진재는 건물 붕괴로 인한 압사가, 2011년 동일본 대진재는 쓰나미로 인한 익사가 많았던 것과 대조적이다.[8][150] 이는 지진 발생 당시 일본해 연안을 북상하던 태풍의 영향으로 간토 지방에 강풍이 불었기 때문이다.[9][151] 목조 주택이 밀집했던 도쿄시(도쿄 15구) 등에서 지진 발생 시각(정오 직전)에 점심 준비를 위해 사용하던 불씨가 강풍을 타고 삽시간에 번져 대규모 화재로 이어졌다. 또한, 피난민들이 대팔차 등에 가재도구를 싣고 이동하면서 피난 경로를 막고 화재 확산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10][11] 수도관 파열로 소화 작업도 어려워 화재는 40시간 이상 지속된 후 9월 3일 10시경에야 진화되었다.
화재는 도쿄 시가지의 약 43%(34.7)와 요코하마시 10를 태웠으며,[37] 전체 사망자의 약 90%가 화재로 인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38] 특히 혼조구 혼조요코아미초(현 스미다구 요코아미)의 육군 혼조 피복창 터(현 요코아미초 공원 일대)에서는 피난민 수만 명이 몰려든 가운데 화재 선풍이 발생하여[36] 3만 8천여 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는 참사가 벌어졌다.[30] 화재 선풍의 위력은 매우 강력하여 희생자의 시신이 15km 떨어진 이치카와시까지 날아가기도 했다.[39] 당시 화재의 고열로 녹아내린 철골 구조물은 현재 도쿄도 부흥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도쿄의 화재 피해가 크게 보도되었지만, 진원 단층이 위치한 가나가와현 역시 지진동에 의한 건물 붕괴, 액상화에 따른 지반 침하, 절벽 붕괴 등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연안 지역에서는 쓰나미 피해도 발생했다. 시즈오카현 아타미시에서는 6m, 지바현 아이하마(현 다테야마시)에서는 9.3m, 스자키에서는 8m, 가나가와현 미우라에서는 6m 높이의 쓰나미가 관측되었다. 가마쿠라시 유이가하마 해변에서는 쓰나미로 약 300명이 실종되었고, 국지적으로는 9m에 달하는 쓰나미가 덮치기도 했다.[31] 가나가와현 서부 산간 지역에서는 산사태와 토석류로 인한 가옥 유실 및 매몰 피해가 컸으며, 특히 가타우라촌에서는 철도 사고와 토석류로 수백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도쿄시 내 가옥의 약 60%가 파괴되면서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 사람들은 인근 사찰(59곳)이나 학교(42곳) 등 임시 피난소로 몰려들었다.[22] 정부는 육군 텐트를 빌려 메이지 신궁 외원, 궁성 앞 광장 등에 임시 수용소를 설치했으며, 9월 4일부터는 가설 주택(바락) 건설을 시작했다. 관민의 협력으로 메이지 신궁, 히비야 공원 등지에 대규모 바락촌이 형성되었고, 학교 운동장 등에도 소규모 바락이 들어섰다. 11월 15일 조사에서는 시·구가 관리하는 바락 101곳에 8만 6천여 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23] 그러나 좁은 공간에 피난민이 밀집하면서 위생 및 치안 문제가 발생하고 일부 지역은 슬럼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24] 이에 정부는 바락 철거 계획을 세우고 쓰키시마, 오구 등지에 소규모 주택 단지를 조성했으며, 의연금으로 설립된 재단법인 도준회도 주택 건설에 나섰다.[25] 도쿄의 피해가 심각하자 정부는 지방으로의 피난(소개)을 장려하여 최대 100만 명이 도쿄를 떠났으며, 11월 15일에도 78만 명이 도쿄와 가나가와현 이외 지역에 피난 중이었다.[26]

군대는 조직적으로 구호 활동에 참여하여 치안 유지 및 이재민 구호에 기여했다.[27] 경찰력이 마비된 상황에서 군의 활동은 당시 사회에 긍정적인 인상을 주기도 했다.[28][29] 각지의 재향군인회에서도 8,400명 이상이 구호 활동에 참여했다.[27]
지진의 참상을 기록한 영상으로는 시라이 시게루의 '관동 대진 대화재 실황'과 요코하마 시네마 상회(현 요코시네 디 아이 에이)의 '요코하마 대지진 화재 참상' 등이 남아있다.[32]
주택 피해 동수 | 사망자・행방불명자 수 | ||||||||||||
---|---|---|---|---|---|---|---|---|---|---|---|---|---|
지역 | 전괴 | 비소실 전괴 | 반괴 | 비소실 반괴 | 소실 | 유실・매몰 | 합계 | 주택 전괴 | 화재 | 유출・매몰 | 공장 등 | 합계 | |
가나가와현 | 63,577 | 46,621 | 54,035 | 43,047 | 35,412 | 497 | 125,577 | 5,795 | 25,201 | 836 | 1,006 | 32,838 | |
도쿄도 | 24,469 | 11,842 | 29,525 | 17,231 | 176,505 | 2 | 205,580 | 3,546 | 66,521 | 6 | 314 | 70,387 | |
지바현 | 13,767 | 13,444 | 6,093 | 6,030 | 431 | 71 | 19,976 | 1,255 | 59 | 0 | 32 | 1,346 | |
사이타마현 | 4,759 | 4,759 | 4,086 | 4,086 | 0 | 0 | 8,845 | 315 | 0 | 0 | 28 | 343 | |
야마나시현 | 577 | 577 | 2,225 | 2,225 | 0 | 0 | 2,802 | 20 | 0 | 0 | 2 | 22 | |
시즈오카현 | 2,383 | 2,309 | 6,370 | 6,214 | 5 | 731 | 9,259 | 150 | 0 | 171 | 123 | 444 | |
이바라키현 | 141 | 141 | 342 | 342 | 0 | 0 | 483 | 5 | 0 | 0 | 0 | 5 | |
나가노현 | 13 | 13 | 75 | 75 | 0 | 0 | 88 | 0 | 0 | 0 | 0 | 0 | |
도치기현 | 3 | 3 | 1 | 1 | 0 | 0 | 4 | 0 | 0 | 0 | 0 | 0 | |
군마현 | 24 | 24 | 21 | 21 | 0 | 0 | 45 | 0 | 0 | 0 | 0 | 0 | |
합계 | 109,713 | 79,733 | 102,773 | 79,272 | 212,353 | 1,301 | 372,659 | 11,086 | 91,781 | 1,013 | 1,505 | 105,385 |
가나가와현 및 도쿄부(현: 도쿄도)를 중심으로 인접한 이바라키현·지바현에서 시즈오카현 동부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에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총 190만 명 이상이 피해를 입었으며, 사망하거나 실종된 사람은 약 10만 5천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7][33] 건물 피해 역시 전파 약 10만 9천 동, 전소 약 21만 2천 동에 달하는 등 극심했다.[7]
* 비소실 전괴・반괴는 소실 및 유출, 매몰 피해를 입지 않은 동수.
* 사망자·실종자 수는 2004년 다케무라 마사유키 등의 연구 결과를 반영하여 이과 연표 2006년판부터 수정된 수치(10만 5,385명)를 따름.[33]
3. 피해 상황
한신·아와지 대지진의 압사나 동일본 대지진의 익사와는 달리, 간토 대지진에서는 화재로 인한 소사가 사망의 주된 원인이었다.[8] 지진 발생 시각이 점심 준비 시간대였던 데다, 일본해 연안을 북상하던 태풍의 영향으로 인한 강풍[9], 목조 건물이 밀집된 도시 구조, 피난민들이 옮기던 가연성 가재도구[10][11], 수도관 파열로 인한 소화 활동의 어려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화재가 3일간 지속되며 피해를 키웠다.
수도 도쿄가 직접적인 타격을 입으면서 정부 기관 건물이 다수 소실되고 금융 시스템이 마비되는 등 국가 기능이 일시적으로 마비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지진 발생 8일 전 내각총리대신 가토 도모사부로가 급사하여 우치다 야스야 외무대신이 임시 겸임하던 혼란 속에서, 지진 다음 날인 9월 2일에야 야마모토 곤베에가 신임 총리에 취임하여 내각을 구성했다. 이후 9월 27일, 고토 신페이 내무대신을 총재로 하는 제도부흥원이 설치되어 본격적인 복구 사업에 착수했다. 금융 마비에 대응하기 위해 긴급 칙령으로 모라토리엄(지불유예)이 선언되었고, 막대한 복구 비용 충당을 위해 대규모 외채가 도입되었으나[13][14], 이는 이후 일본 경제에 부담으로 작용했다.[16][17]
도쿄 시내 가옥의 약 60%가 파괴되면서[22] 수많은 피난민이 발생하여 사찰, 학교 등 임시 피난소나 정부와 민간에서 건설한 가설 주택에서 생활했으며[22][23], 최대 100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도쿄를 떠나 지방으로 피난(소개)하기도 했다.[26] 혼란 속에서 군대가 치안 유지와 구호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27][28][29], 각지의 재향군인회 회원들도 구호에 참여했다.[27]
이 지진은 일본 사회에 여러 변화를 가져왔다. 정보 전달의 중요성이 부각되며 일본 최초의 라디오 방송 시작의 계기가 되었고[12], 마비된 시영 전차를 대체하기 위해 도입된 엔타로 버스는[18][19] 일본 모터리제이션의 시작을 알렸다.[19] 전화의 자동 교환기 보급도 촉진되었다.[20]
당시 지진을 직접 겪은 도쿄 제국 대학 교수 테라다 토라히코는 지진의 순간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T 군과 찻집에서 홍차를 마시면서 그의 출품작 「I자키의 여자」에 대한 그 모델의 남편으로부터의 철회 요구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중 급격한 지진을 느꼈다. 의자에 앉아 있는 두 발의 발바닥을 아래에서 나무 망치로 급속히 난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마 그 전에 왔을 약한 초기 미동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곧바로 주요 동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래도 묘하게 단주기의 진동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드디어 진짜 주요 동이 급격히 덮쳐왔다. 동시에, 이것은 자신이 전혀 경험하지 못한 이상 대지진이라고 알았다. 그 순간에 어릴 적부터 여러 번 어머니께 들어왔던 토사의 안세이 지진 이야기가 생생하게 떠올랐고, 마치 배를 탄 것처럼, 천천히 흔들린다는 형용이 적절하다는 것을 느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회장의 건축의 흔들림 정도를 주의해서 보니 4, 5초 정도라고 생각되는 긴 주기로 삐걱삐걱 소리를 내면서 느슨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을 보았을 때 이것이라면 이 건물은 괜찮다는 것을 직감했기에 무섭다는 느낌은 곧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이 진귀한 강진의 진동의 경과를 가능한 한 자세히 관찰하려고 노력했다.''
''주요 동이 시작되어 깜짝 놀란 지 몇 초 후에 일시적으로 진동이 잦아들고, 이 정도로는 별일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즈음 또다시 급격한, 처음보다 더욱 격렬한 파도가 와서 두 번째로 깜짝 놀랐지만, 그 이후로는 점차 감쇠하여 장주기의 파도만 남았다.''
주일본 프랑스 대사였던 폴 클로델은 재해 속 일본인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피해자들을 수용하는 거대한 야영지에서 보낸 며칠 동안... 나는 불평하는 소리 하나도 듣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행동이나 사람을 상처 주는 감정의 폭발로 주변 사람을 귀찮게 하거나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 같은 작은 배를 탄 것처럼 사람들은 모두 가만히 조용히 있는 것 같았다.''[21]
한편, 간토 대지진 당시 발생한 조선인 학살 사건과 관련하여 역사 인식 문제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일례로 요코하마시 시립 중학교 부독본의 학살 관련 서술이 수정되었다가 논란 끝에 다시 복원되는 일이 있었으며[252][253][254], 2013년에는 한국의 한 기록사진연구가가 오카다 고요가 촬영한 요시와라 유곽 화재 사망자 사진을 조선인 학살 희생자 사진으로 잘못 해석하여 공개하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257][258][255]
3. 1. 인명 피해
가나가와현 및 도쿄부(현: 도쿄도)를 중심으로 인접한 이바라키현·지바현에서 시즈오카현 동부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에 막대한 인명 및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총 190만 명이 피해를 입었으며, 사망하거나 실종된 사람은 10만 5천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7][171] 건물 피해는 전파 약 10만 9천 채, 전소 약 21만 2천 채에 달했다. 희생자 대부분은 도쿄부와 가나가와현에서 발생했다.
한신·아와지 대지진의 압사나 동일본 대지진의 익사와 달리, 간토 대지진의 가장 큰 사망 원인은 화재로 인한 소사였다.[8] 지진 발생 시각이 점심 준비 시간대였고, 당시 일본해 연안을 북상하던 태풍의 영향으로 간토 지방에 강풍이 불었으며[9], 목조 주택이 밀집된 도쿄시 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화재가 발생하여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피난민들이 대팔차 등에 가재도구를 싣고 이동하면서 피난 경로를 막고 화재 확산을 부추기기도 했다.[10][11] 수도관 파열로 소화 작업이 어려워지면서 화재는 3일간 지속되었고, 특히 혼조 피복창 터에서는 피난민 수만 명이 화재 선풍으로 인해 참혹하게 희생되었다.[30]
화재 외에도 지진의 직접적인 흔들림으로 인한 건물 붕괴, 쓰나미 발생, 산사태 및 토석류 등 다양한 원인으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도쿄의 피해는 화재가 중심이었던 반면, 진원 단층이 위치한 가나가와현에서는 지진동으로 인한 건물 붕괴, 액상화에 의한 지반 침하, 절벽 붕괴, 쓰나미 피해가 두드러졌다.
지진 직후 통신망 마비와 언론사 소실로 정확한 피해 상황 파악과 정보 전달에 큰 혼란이 있었으며, 간토 이외 지역에서는 부정확하거나 과장된 정보가 유포되기도 했다.[182]
3. 1. 1. 사망자 및 실종자 수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190만명 중 10만 5천명 정도가 사망하였거나 실종된 것으로 추정된다.[171] 2004년 이전까지는 지진 발생 2년 후 작성된 "진재예방조사회 보고"에 따라 사망자 및 실종자를 약 14만 명으로 추정했으나, 2000년대 이후 다케무라 데라유키 등의 연구에서 중복 집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반영하여 일본 이과연표에서는 2006년부터 사망자 및 실종자 수를 10만 5천명으로 수정하여 기재하고 있다.[171]
희생자 대부분은 도쿄부와 가나가와현에서 발생했으며, 지진의 흔들림으로 인한 건물 붕괴 사망자도 많았지만, 특히 강풍을 동반한 화재로 인한 사망자가 가장 많았다. 또한 쓰나미도 발생하여 태평양 연안, 사가미만 연안 및 보소반도 연안 지역에 최대 10m 높이의 쓰나미가 덮쳐 익사자도 발생했다. 가마쿠라시 유이가하마에서는 약 300명이 쓰나미로 실종되기도 했다.[168] 산사태나 절벽 붕괴도 빈번하여 가나가와현 산간 지역과 서부 하류 지역에서 토석류로 인한 가옥 유실 및 매몰 피해가 발생했으며, 특히 가나가와현 아시가라시모군 가타우라촌에서 발생한 철도 사고로 100명 이상이 사망했고, 그 외 토석류로 수백 명이 사망했다. 오다와라시 네부카와에서는 산사태로 마을 가옥 64채가 매몰되어 300명 이상이 희생되었다.[52]
다음은 도도부현별 피해 통계이다.
지역 | 주택 피해 등 | 사망자 및 실종자 수 | ||||||||
---|---|---|---|---|---|---|---|---|---|---|
완전 붕괴 (비소실) | 반파 (비소실) | 소실 | 유실, 매몰 | 총 합 | 주택 붕괴 | 화재 | 쓰나미, 매몰 | 공장 등 | 총 합 | |
가나가와현 | 46,621 | 43,047 | 35,412 | 497 | 125,577 | 5,795 | 25,201 | 836 | 1,006 | 32,838 |
도쿄부 | 11,842 | 17,231 | 176,505 | 2 | 205,580 | 3,546 | 66,521 | 6 | 314 | 70,387 |
지바현 | 13,444 | 6,030 | 431 | 71 | 19,976 | 1,255 | 59 | 0 | 32 | 1,346 |
사이타마현 | 4,759 | 4,086 | 0 | 0 | 8,845 | 315 | 0 | 0 | 28 | 343 |
야마나시현 | 577 | 2,225 | 0 | 0 | 2,802 | 20 | 0 | 0 | 2 | 22 |
시즈오카현 | 2,309 | 6,214 | 5 | 731 | 9,259 | 150 | 0 | 171 | 123 | 444 |
이바라키현 | 141 | 342 | 0 | 0 | 483 | 5 | 0 | 0 | 0 | 5 |
나가노현 | 13 | 75 | 0 | 0 | 88 | 0 | 0 | 0 | 0 | 0 |
도치기현 | 3 | 1 | 0 | 0 | 4 | 0 | 0 | 0 | 0 | 0 |
군마현 | 24 | 21 | 0 | 0 | 45 | 0 | 0 | 0 | 0 | 0 |
합계 | 79,733 | 79,272 | 212,353 | 1301 | 372,659 | 11,086 | 91,781 | 1,013 | 1,505 | 105,385 |
- '''주:''' 비소실의 완전 붕괴 및 반파 수치는 화재로 인한 소실, 쓰나미로 인한 유실, 매몰 피해를 입지 않은 주택 수를 의미한다.
지진으로 사망한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 히로코 여왕: 오다와라시 별궁 붕괴로 사망.
- 모로마사왕: 후지사와시 별장 붕괴로 사망.
- 사키코 여왕: 가마쿠라시 별장 붕괴로 사망.
- 마쓰오카 야스코와: 추밀고문관, 니혼 대학 교장. 하야마정 별장 붕괴로 사망.
- 소노다 고기치: 실업가, 남작. 니노미야 별장 붕괴로 사망.
- 이소베 시로: 정치인, 법학자, 변호사. 피난처인 피복창터에서 화재로 사망.
- 구리야가와 하쿠손: 영문학자, 평론가. 가마쿠라에서 쓰나미에 휩쓸려 사망.
- 쓰지무라 이스케: 원예가, 산악인. 오다와라 자택 뒷산 산사태로 아내와 함께 사망.
- 도미타키 아유미: 하이쿠 시인. 무카이지마 자택에서 피난 중 화재로 사망.
- 레이레이테이 류쿄 5대손: 만담가. 화재로 사망.
- 윌리엄 헤이그: 영국 외교관. 요코하마 영사관 붕괴로 사망.
- 예니 마리 메리 카위퍼르: 페리스 화영어학교 교장. 학교 붕괴 후 화재로 사망.
- 이토 쇼지로: 신파 배우. 사망 경위 불분명.
- 이시카와 고자부로: 신파 배우. 피복창터에서 화재로 사망.
- 가타기리 시로: 영화 배우. 피복창터에서 화재로 사망.
- 무라오카 히로시: 인쇄업자, 무라오카 하나코의 남편. 요코하마 사옥 붕괴로 직원 70명과 함께 사망.
- 아타리야 노부타로: 스모 선수. 사망지 불명.
- 우메가키 나오지로: 스모 선수. 아내와 함께 사망 추정.
- 산유테이 가유: 만담가, 음곡사. 사망지 불명.
- 기텐토키 쇼쇼이치: 마술사. 피복창터에서 사망.[172]
- 야스다 요시오: 실업가. 혼조 요코아미 자택에서 화재로 사망.
- 야마다 덴신
- 고메이로 구니스케: 만담가. 사망 경위 불분명.
- 요시다 히사기쿠 초대손: 낭곡사. 요코하마 공연 중 사망.

한편, 간토 대지진 당시 발생한 조선인 학살 사건과 관련하여 역사 인식 문제가 지속되고 있다. 요코하마시 시립 중학교 부독본에서는 2011년, 조선인 학살 관련 내용을 "자경단 중에 조선인을 살해하는 이로 치닫는 사람들이 있었다"에서 "군대나 경찰, 자경단 등은 조선인을 박해하고 학살했다. 요코하마에서도 각지에서 자경단이 조성되어 조선인이나 중국인이 학살당하는 일이 일어났다"로 수정했다.[252][253] 그러나 요코하마 시의회에서 이 수정이 문제시되자,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는 "군대나 경찰이 학살했다고 오해할 수 있다"며 2012년 담당 과장과 주사들에게 징계 처분을 내렸다.[253] 이후 2016년,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는 논란이 되었던 수정 내용을 다시 포함하기로 결정했다.[254]
또한 2013년, 한국의 기록사진연구가 정성길은 사진작가 오카다 고요가 촬영한 요시와라 유곽 화재 사망자 사진을 간토 대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들의 사진이라고 공개하며 한국 사회에 파장을 일으켰다.[257][258] 하지만 해당 사진을 소장한 오카다 고요 사진관 측은 정성길 연구가의 주장이 불분명한 정보에 기반한 것이라고 반박했다.[255]
3. 1. 2. 주요 사망자
2004년 무렵까지 사망자 및 실종자는 약 14만 명으로 추정되었으나, 이는 지진 발생 2년 후 작성된 "진재예방조사회 보고"의 수치이다. 2000년대 이후 다케무라 데라유키 등의 조사에서 중복 집계된 경우가 많다는 연구가 나오면서, 일본 학계는 이 설을 받아들여 이과연표에서는 2006년부터 간토 대지진의 사망자 및 실종자 수를 10만 5천 명으로 정정하였다.[171]지진의 흔들림으로 인한 건물 붕괴로 압사한 사람도 많았지만, 대부분의 사망자는 강풍을 동반한 화재 때문에 발생했다. 또한 쓰나미가 발생하여 태평양 연안, 사가미만 연안 지역 및 보소반도 연안에 최대 10m 높이의 쓰나미가 덮쳐 익사자도 발생했다. 산사태나 절벽 붕괴도 일어나 가나가와현 산간 지방에서 서부 하류 지역까지 토석류로 인한 가옥 유실 및 매몰 피해도 있었다. 특히 가나가와현 아시가라시모군 가타우라촌에서 발생한 철도 사고로 100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이 외에도 토석류로 수백 명이 사망했다.
다음은 간토 대진재 당시 주요 사망자 목록이다.
이름 | 직업/신분 | 사망 경위/장소 |
---|---|---|
히로코 여왕 |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 제4왕녀 | 오다와라시 간인노미야 별궁 붕괴로 사망 |
모로마사왕 | 히가시쿠니 나루히코왕 제2왕자 | 후지사와시 별장 붕괴로 사망 |
사키코 여왕 | 야마시나노미야 다케히코 왕비 | 가마쿠라시 야마시나노미야 별장 붕괴로 사망 |
마쓰오카 야스코와 | 추밀고문관, 니혼 대학 교장 | 하야마정 별장 붕괴로 사망 |
소노다 고기치 | 실업가, 남작 | 니노미야 별장 붕괴로 사망 |
이소베 시로 | 정치인, 법학자, 변호사 | 피난처인 피복창터에서 화재로 사망 |
구리야가와 하쿠손 | 영문학자, 평론가 | 가마쿠라에서 쓰나미에 휩쓸려 다음 날(9월 2일) 사망 |
쓰지무라 이스케 | 원예가, 산악인 | 오다와라 자택 뒷산 산사태로 아내와 함께 사망 |
도미타키 아유미 | 하이쿠 시인 | 무카이지마 자택에서 지진 후 피난 중 화재로 사망 |
레이레이테이 류쿄 5대손 | 만담가 | 화재로 사망 |
윌리엄 헤이그 | 영국 외교관, 축구 발전에 기여 | 근무지인 요코하마 영사관 붕괴로 사망 |
예니 마리 메리 카위퍼르 | 페리스 화영어학교 교장 | 근무지인 학교 붕괴 후 화재로 사망 |
이토 쇼지로 | 신파 배우, 전 라쿠고가 | 사망 경위에 여러 설이 있음 |
이시카와 고자부로 | 신파 배우 | 피복창터로 피난 중 자손, 문하생 1명과 함께 화재로 사망 |
가타기리 시로 | 영화 배우 (국제활영, 마쓰타케 가마타 촬영소 소속) | 피복창터에서 피난 중 화재로 사망 |
무라오카 히로시 | 일본의 인쇄업자 (무라오카 하나코의 남편) | 요코하마 사옥 붕괴로 직원 70명과 함께 사망 |
아타리야 노부타로 | 스모 선수 | 사망지 불명 |
우메가키 나오지로 | 스모 선수 | 사망지 불명 (아내와 함께 사망 추정) |
산유테이 가유 | 만담가, 음곡사 | 사망지 불명 |
기텐토키 쇼쇼이치 | 마술사 | 피복창터로 피난 중 사망[172] |
야스다 요시오 | 실업가 | 혼조 요코아미 야스다 가문 본저에서 처자식과 함께 화재에 휩쓸려 육군군의학교에서 사망 |
야마다 덴신 | 불명 | (사망 경위 정보 없음) |
고메이로 구니스케 | 만담가 | 사망 경위에 여러 설이 있음 |
요시다 히사기쿠 초대손 | 낭곡사 | 요코하마 히사테이에서 공연 중 대들보에 깔려 사망 |
3. 1. 3. 간토 대지진으로 사망한 주요 인물
- 히로코 여왕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 제4왕녀): 오다와라시의 간인노미야 별궁에서 피서 중 별장 붕괴로 사망하였다.
- 모로마사왕 (히가시쿠니 나루히코왕 제2왕자): 후지사와시의 별장에서 피서 중 별장 붕괴로 사망하였다.
- 사키코 여왕 (야마시나노미야 다케히코 왕비): 가마쿠라시에 있는 야마시나노미야 별장 붕괴로 사망하였다.
- 마쓰오카 야스코와 (추밀고문관, 니혼 대학 교장): 하야마정의 별장 붕괴로 사망하였다.
- 소노다 고기치 (실업가, 남작): 니노미야 별장 붕괴로 사망하였다.
- 이소베 시로 (정치인, 법학자, 변호사): 피난처인 피복창터에서 화재로 사망하였다.
- 구리야가와 하쿠손 (영문학자, 평론가): 가마쿠라에서 쓰나미에 휩쓸려 다음 날인 9월 2일에 사망하였다.
- 쓰지무라 이스케 (원예가, 산악인): 오다와라의 자택 뒷산에서 산사태가 일어나 아내와 함께 휩쓸려 사망하였다.
- 도미타키 아유미 (하이쿠 시인): 무카이지마의 자택에서 지진을 맞고 피난 중 화재로 사망하였다.
- 레이레이테이 류쿄 5대손 (만담가): 화재로 사망하였다.
- 윌리엄 헤이그 (영국 외교관): 근무지인 요코하마 영사관 붕괴로 사망하였다.
- 예니 마리 메리 카위퍼르 (페리스 화영어학교 교장): 근무지인 학교 붕괴 후 화재로 사망하였다.
- 이토 쇼지로 (신파 배우, 전 라쿠고가인 고콘데이 신교): 사망 경위에 여러 설이 있다.
- 이시카와 고자부로 (신파 배우): 피복창터로 피난했으나 이시카와 자손, 문하생 1명과 함께 화재로 사망하였다.
- 가타기리 시로 (영화 배우, 국제활영, 마쓰타케 가마타 촬영소 소속): 피복창터에서 피난 중 화재로 사망하였다.
- 무라오카 히로시 (일본의 인쇄업자, 무라오카 하나코의 남편이자 무라오카 게이조의 동생): 요코하마의 사옥 붕괴로 직원 70명과 함께 사망하였다.
- 아타리야 노부타로 (스모 선수): 사망지는 불명이다.
- 우메가키 나오지로 (스모 선수): 사망지는 불명이며 아내와 함께 사망하였다고 추정된다.
- 산유테이 가유 (만담가, 음곡사): 사망지는 불명이다.
- 기텐토키 쇼쇼이치 (마술사): 피복창터로 피난했으나 사망하였다.[172]
- 야스다 요시오 (실업가): 혼조 요코아미의 야스다 가문 본저에서 처자식과 함께 화재에 휩쓸렸고 육군군의학교에서 사망하였다.
- 야마다 덴신
- 고메이로 구니스케 (만담가): 사망에 여러 설이 있다.
- 요시다 히사기쿠 초대손 (낭곡사): 요코하마 히사테이에 출연 중 대들보에 깔려 사망하였다.
3. 1. 4. 간토 대지진 사망자 위령시설
(해당 섹션 제목과 관련된 내용이 원본 소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3. 2. 재산 피해
간토 대지진은 도쿄부(현 도쿄도)와 가나가와현을 중심으로 이바라키현, 지바현, 시즈오카현 동부 등 광범위한 지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190만 명 이상이 피해를 입었으며, 사망하거나 실종된 사람은 약 10만 5,000명으로 추산된다.[7][33] 초기에는 사망·실종자가 약 14만 명으로 알려졌으나, 2000년대 이후 연구를 통해 중복 집계된 부분이 확인되어 10만 5,000명으로 수정되었다.[171][33]
주요 피해 원인은 지진의 강한 흔들림으로 인한 건물 붕괴, 지진 직후 발생하여 강풍을 타고 번진 대규모 화재, 사가미만과 보소반도 연안을 덮친 쓰나미, 가나가와현 산간 지역 등에서 발생한 산사태와 토석류 등이었다.[8] 특히 사망자의 대다수는 화재로 인한 소사였으며[8], 혼조 피복창 터에서는 화재선풍으로 인해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하기도 했다.
건물 피해는 전파 약 10만 9,000동, 전소 약 21만 2,000동에 달했다.[7] 도쿄 시내의 약 60%에 해당하는 가옥이 피해를 입었으며[22], 주요 관공서, 상업 시설, 문화 시설 등이 파괴되었고, 귀중한 서적과 문화재도 다수 소실되었다. 진앙에 가까웠던 요코하마시는 특히 피해가 심각하여 관공서, 호텔, 외국 영사관, 공장 등이 대부분 파괴되었다.
다음은 지역별, 피해 원인별 피해 집계이다.
- 비소실 전괴・반괴는 소실 및 유출, 매몰의 피해를 받지 않은 동수.
경제적으로도 큰 타격을 입었다. 금융 시스템이 마비되면서 지진 재해 어음 문제가 발생했고, 정부는 긴급 칙령을 통해 모라토리엄(지불유예)을 선언해야 했다. 막대한 복구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상당한 규모의 외채가 도입되었는데, 모건 상회와 로스차일드 가 등이 참여하여 10억 엔 이상의 지진 재해 선후 처리 공채를 인수했다. 이는 당시 일본 국가 예산의 60%를 넘는 거액이었다.[13][14] 이 외채의 상당 부분은 전력 사업 확충에 투입되었다. 이러한 대규모 외채 도입은 일본의 대외 채무를 급증시켰고, 이후 지진 재해 불황과 쇼와 금융 공황(1927년), 세계 대공황(쇼와 공황)으로 이어지는 어려운 경제 상황에 영향을 미쳤다.[16][17]
지진 피해로 인해 도쿄와 요코하마에서 오사카부나 아이치현 등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는 당시 일본 육대 도시의 인구 및 경제적 서열에도 영향을 미쳤다. 또한, 도쿄 시영 전차의 기능 마비를 대체하기 위해 T형 포드 버스 약 800대가 도입되어 엔타로 버스로 운행되기 시작했으며[18][19], 이는 일본 전역에 버스 사업이 확산되고 모터리제이션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19] 전화의 자동 교환기 보급도 촉진되었다.[20]
3. 2. 1. 건물 붕괴

지진의 강한 흔들림으로 수많은 건물이 무너져 내려 많은 사람이 압사하는 피해가 발생했다.
도쿄 시내에서는 아사쿠사의 상징적 건물이었던 료운카쿠(아사쿠사 12층)가 지진으로 크게 파손되었고[40][41][42], 건설 중이던 마루노우치의 내외빌딩이 붕괴되어 작업 중이던 인부 약 300명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대장성, 문부성, 내무성, 외무성, 경시청 등 주요 관공서 건물과 도쿄 제국대학, 제국극장, 니혼바시 미쓰코시 본점 등 다수의 교육·문화·상업 시설이 지진과 뒤이은 화재로 소실되었다. 간다 진보초의 서점가, 제국대학 도서관, 마쓰노 문고, 오쿠라 집고관 등도 화재 피해를 입어 수많은 귀중한 서적과 문화재가 손실되었다.
진앙에 가까웠던 요코하마시에서는 관공서를 비롯해 그랜드 호텔[43], 오리엔탈 팰리스 호텔[44] 등 석조나 벽돌로 지어진 서양식 건물들이 지진으로 순식간에 붕괴되어 안에 있던 사람들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압사했다. 화재로 인해 모든 외국 영사관이 소실되었으며, 공장과 회사 사무실의 약 90%가 파괴되었다.
지바현 보소 지역 역시 피해가 심각했다. 특히 호조마치에서는 후루카와은행과 보슈은행(모두 현재 지바은행의 전신) 건물을 제외한 군청, 철도역 등 거의 모든 건물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측후소와 여러 여관 건물도 지진으로 인한 균열 후 붕괴되는 등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건물 붕괴로 인해 사망한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인물 | 신분/직업 | 사망 장소 및 경위 |
---|---|---|
히로코 여왕 |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 제4왕녀 | 오다와라시 간인노미야 별궁 붕괴 |
모로마사왕 | 히가시쿠니 나루히코왕 제2왕자 | 후지사와시 별장 붕괴 |
사키코 여왕 | 야마시나노미야 다케히코 왕 왕비 | 가마쿠라시 야마시나노미야 별장 붕괴 |
마쓰오카 야스코와 | 추밀고문관, 니혼 대학 교장 | 하야마정 별장 붕괴 |
소노다 고기치 | 실업가, 남작 | 니노미야 별장 붕괴 |
윌리엄 헤이그 | 영국 외교관 | 요코하마 영사관 붕괴 |
예니 마리 메리 카위퍼르 | 페리스 화영어학교 교장 | 학교 건물 붕괴 후 화재 |
무라오카 히로시 | 인쇄업자 (무라오카 하나코의 남편) | 요코하마 사옥 붕괴 (직원 70명과 함께 사망) |
요시다 히사기쿠 초대손 | 낭곡사 | 요코하마 공연장 대들보에 깔림 |
당시 비교적 최신 공법이었던 철근 콘크리트 건물도 피해를 피하지 못했다. 지진 발생 몇 년 전부터 건설되기 시작했지만, 건설 중이던 내외빌딩이 붕괴했고, 일본공업클럽과 마루노우치 빌딩 등도 지진으로 반파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반면, 나이토 다추가 설계하여 지진 발생 불과 3개월 전에 완공된 일본흥업은행 본점 건물은 거의 손상을 입지 않고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이는 이후 일본 건축계에서 내진설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3. 2. 2. 화재
지진 발생 시각이 점심 식사 준비 시간과 겹쳤기 때문에, 부뚜막이나 화로 등 불을 사용하던 중 지진이 발생하여 도쿄시 등에서 동시에 136건의 화재가 발생했다. 이 중에는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화학약품 선반이 무너지면서 발화한 경우도 있었다. 당시 일본해 연안을 북상하던 태풍의 영향으로 간토 지방 전역에 강풍이 불고 있었는데[9], 이는 일기도를 통해 확인된다.
강풍은 화재를 급속도로 확산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특히 혼조구 혼조요코아미초(현재의 스미다구 요코아미)에 있던 육군본소 피복창 부지(현재의 요코아미초 공원 및 스미다구 구립 료고쿠 중학교, 니혼 대학 제1중학교·고등학교 부지 포함)에서는 대규모 화재가 발생했다. 이곳으로 피난했던 약 4만 명의 피난민들이 가지고 온 가재도구 등에 불이 붙으면서 거대한 화재선풍이 발생했고[173], 이로 인해 약 3만 8천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화재선풍으로 인해 많은 이재민들이 공중으로 날아가기도 했으며, 피복창 부지에서 사망한 한 이재민의 시신은 약 15km 떨어진 이치카와시까지 날아간 사례도 있었다.[176] 이 화재선풍으로 인한 고열로 녹아 덩어리가 된 철골 구조물 일부가 현재 도쿄도 부흥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러한 대규모 화재로 인해 구 도쿄시 면적의 약 43%가 소실되었으며[174], 화재는 발생 40시간이 넘은 9월 3일 오전 10시경이 되어서야 진화되었다. 간토 대지진 전체 사망자 및 실종자 약 10만 5천 명 중 90% 이상인 91,781명이 화재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되었다.[175][8] 목조 주택이 밀집해 있었고, 피난민들이 대팔차 등에 실은 가연성 가재도구가 피난을 방해하고 연소 확대를 부추긴 것도 피해를 키운 원인으로 지적된다.[10][11] 또한 수도관 파열로 소방 활동이 어려웠던 점도 화재 확산의 원인이었다.
도쿄 시내에서는 료운카쿠(아사쿠사 12층)가 지진으로 크게 파손되었고[177][178][179][40][41][42], 건설 중이던 마루노우치의 내외빌딩이 붕괴되어 작업 인부 약 300명이 압사했다. 대장성, 문부성, 내무성, 외무성, 경시청 등 주요 관공서 건물과 도쿄제국대학, 제국극장, 니혼바시 미쓰코시 본점 등 교육, 문화, 상업 시설 대부분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간다 고서점가와 도쿄제국대학 대도서관, 마쓰노 문고, 오쿠라 집고관 등도 화재로 소실되어 수많은 귀중한 서적과 문화재가 불타 사라졌다.

진원지와 가까웠던 요코하마시에서는 관공서, 뉴 그랜드 호텔[43], 오리엔탈 팰리스 호텔[44] 등 석조 및 벽돌 구조의 서양식 건물이 지진으로 순식간에 붕괴되어 많은 압사자가 발생했다. 또한 화재로 모든 외국 영사관이 소실되었으며, 공장, 회사, 사무실 등도 90% 가까이 소실되었다.
지진 이후에도 기상 관측을 계속한 중앙기상대(현재의 일본 기상청)는 9월 1일 21시경부터 비정상적인 고온을 관측하기 시작하여, 다음 날인 2일 새벽 1시경에는 최고기온 46.4°C를 기록하였다.[180][45] 이 무렵 중앙기상대로 도쿄의 화재가 점차 다가왔고, 결국 기상대 본관 건물도 화재로 소실되어 수많은 지진 관련 기록들이 소실되었다.[181][46] 당시 기록된 기온은 공식적으로는 무효 처리되었으나, 당시 화재의 엄청난 규모와 열기를 짐작하게 하는 기록으로 남아있다.
한편, 지진과 화재로 인한 혼란 속에서 일본 내무성 경보국과 경시청 등은 조선인이 방화와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내용의 정보를 유포했으며[192][59], 이는 이후 조선인 학살 사건으로 이어지는 비극의 배경이 되었다.
3. 2. 3. 철도 사고

가나가와현 아시가라시모군 가타우라촌(현 오다와라시)에 위치한 네부카와역 부근에서 발생한 대규모 산사태는 큰 철도 사고로 이어졌다. 역으로 진입하던 마나즈루행 하행 열차가 기관차와 객차 2량과 함께 토사와 함께 바다로 추락하여, 승객과 승무원 약 110여 명이 사망했다. 또한 이 산사태와 이어진 토석류로 인해 역 주변 마을 주민 약 200명도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33][171]
이 지진을 계기로 철도성은 목조 객차의 화재 및 충돌 시 취약성을 인지하고 안전 대책 마련에 나섰다. 지진 이후에도 1926년 9월 산요 본선 특급열차 탈선 사고에서 목조 객차가 크게 파손되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1927년부터 새로 발주하는 모든 전동차와 객차는 강성이 높은 철제 차체로 전면 전환하게 되었다.[247]
3. 2. 4. 쓰나미
쓰나미는 사가미만 연안부와 보소반도 연안부 등 태평양 연안 지역을 덮쳤다.[7] 지진으로 인한 건물의 붕괴와 화재 피해가 워낙 막대하여 쓰나미와 지진동에 의한 피해를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고, 쓰나미에 대한 기록은 단편적이어서 전체적인 피해 상황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기록에 따르면, 시즈오카현 아타미시에서는 6m, 지바현 아이하마(현재의 다테야마시)에서는 9.3m, 스자키에서는 8m, 가나가와현 미우라에서는 6m 높이의 쓰나미가 관측되었다. 특히 가마쿠라시 유이가하마에서는 국지적으로 9m에 달하는 높은 쓰나미가 발생했으며, 이 지역에서만 약 300명이 행방불명되었다. 즈시·가마쿠라·후지사와 연안에도 5m에서 7m 높이의 쓰나미가 도달했다. 에노시마 전철의 유이가하마 정류장 부근까지 쓰나미가 밀려왔다는 기록도 있으며, 나카무라 키쿠조의 수기 '다이쇼 가마쿠라 여화'에는 유이가하마 피난소에서 쓰나미 피해자로 보이는 여성의 시신을 목격했다는 내용이 있다.[31]
쓰나미로 인한 익사자도 발생했으며, 영문학자이자 평론가였던 구리야가와 하쿠손은 가마쿠라에서 쓰나미에 휩쓸려 다음 날인 9월 2일에 사망했다. 그러나 간토 대지진 전체 사망자 중에서는 지진 직후 발생한 대규모 화재로 인한 사망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8]
3. 2. 5. 토사 재해
지진의 강한 흔들림은 가나가와현의 산간 지역부터 서부 하류 지역에 걸쳐 산사태와 절벽 붕괴를 일으켰다. 이로 인해 발생한 토석류는 많은 가옥을 유실시키거나 매몰시키는 피해를 낳았다.
특히 가나가와현 아시가라시모군 가타우라촌에서는 토석류가 네부카와역을 덮쳐 열차 탈선 사고가 발생하였고, 이 사고로 1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 외에도 여러 지역에서 토석류로 인해 수백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원예가이자 산악인이었던 쓰지무라 이스케는 오다와라의 자택 뒷산에서 일어난 산사태에 아내와 함께 휩쓸려 사망하기도 했다.
3. 3. 사회 기반 시설 피해
간토 대진재는 가나가와현 및 도쿄부(현: 도쿄도)를 중심으로 인접한 이바라키현·지바현에서 시즈오카현 동부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의 사회 기반 시설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총 190만 명 이상이 피해를 입었고, 사망 또는 실종자는 약 10만 5천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7][33] 이는 지진 발생 2년 후 발표된 "진재예방조사회 보고"의 14만 명에서 중복 계산 등을 제외하고 2006년 이과 연표에서 정정한 수치이다.[171][33] 건물 피해는 전괴 약 11만 동, 전소 약 21만 2천 동에 달했다.[7]
지진의 흔들림으로 인한 건물 붕괴도 많았지만, 사망자의 대부분은 지진 직후 발생한 대규모 화재로 인한 소사였다.[8] 지진 발생 시각이 점심 준비 시간대였고, 일본해 연안을 북상하던 태풍의 영향으로 강풍이 불었으며[9], 목조 주택이 밀집된 도시 구조와 피난 시 가연성 가재도구를 옮기던 상황[10][11], 수도관 파열로 인한 소화 활동의 어려움 등이 겹쳐 화재가 3일간 지속되며 피해를 키웠다. 특히 도쿄시(도쿄 15구)의 니혼바시, 교바시, 시타야, 아사쿠사, 혼조, 후카가와, 간다 지역은 거의 전멸 상태였으며[30], 혼조 피복창 터에서는 피난민 약 3만 5천 명이 화재 선풍으로 희생되는 참사가 발생했다.[30]
쓰나미 역시 태평양 연안, 사가미만 연안, 보소반도 연안 지역을 덮쳐 익사자를 발생시켰다. 시즈오카현 아타미시에서 6m, 지바현 아이하마(현 다테야마시)에서 9.3m, 스자키에서 8m, 가나가와현 미우라에서 6m의 쓰나미가 관측되었고, 가마쿠라시 유이가하마에서는 약 300명이 행방불명되었다.[31]
가나가와현에서는 진원 단층의 영향으로 진동에 의한 건물 붕괴 외에도 액상화에 의한 지반 침하, 절벽 붕괴 등의 피해가 컸다. 특히 산간 지역에서는 산사태와 토석류로 인한 가옥 유실 및 매몰 피해가 심각했으며, 가타우라촌에서는 철도 사고 외에도 토석류로 수백 명이 사망했다.
교통과 통신망 역시 완전히 마비되었다. 도쿄시 내 전차, 야마노테선 등 주요 교통망과 전신, 전화선이 모두 끊겼다.[30](자세한 내용은 #교통 마비, #통신 두절 참조)
수도 도쿄의 기능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주요 관공서 건물이 소실되고 금융 시스템이 정체되었으며, 정부 기능마저 일시적으로 마비되는 사태를 맞았다.(자세한 내용은 #수도 기능 마비 참조)
주택 피해 동수 | 사망자・행방불명자 수 | ||||||||||||
---|---|---|---|---|---|---|---|---|---|---|---|---|---|
지역 | 전괴 | 비소실 | 반괴 | 비소실 | 소실 | 유실・매몰 | 합계 | 주택 전괴 | 화재 | 유출・매몰 | 공장 등 | 합계 | |
가나가와현 | 6만 3577 | 4만 6621 | 5만 4035 | 4만 3047 | 3만 5412 | 497 | 12만 5577 | 5795 | 2만 5201 | 836 | 1006 | 3만 2838 | |
도쿄도 | 2만 4469 | 1만 1842 | 2만 9525 | 1만 7231 | 17만 6505 | 2 | 20만 5580 | 3546 | 6만 6521 | 6 | 314 | 7만 0387 | |
지바현 | 1만 3767 | 1만 3444 | 6093 | 6030 | 431 | 71 | 1만 9976 | 1255 | 59 | 0 | 32 | 1346 | |
사이타마현 | 4759 | 4759 | 4086 | 4086 | 0 | 0 | 8845 | 315 | 0 | 0 | 28 | 343 | |
야마나시현 | 577 | 577 | 2225 | 2225 | 0 | 0 | 2802 | 20 | 0 | 0 | 2 | 22 | |
시즈오카현 | 2383 | 2309 | 6370 | 6214 | 5 | 731 | 9259 | 150 | 0 | 171 | 123 | 444 | |
이바라키현 | 141 | 141 | 342 | 342 | 0 | 0 | 483 | 5 | 0 | 0 | 0 | 5 | |
나가노현 | 13 | 13 | 75 | 75 | 0 | 0 | 88 | 0 | 0 | 0 | 0 | 0 | |
도치기현 | 3 | 3 | 1 | 1 | 0 | 0 | 4 | 0 | 0 | 0 | 0 | 0 | |
군마현 | 24 | 24 | 21 | 21 | 0 | 0 | 45 | 0 | 0 | 0 | 0 | 0 | |
합계 | 10만 9713 | 7만 9733 | 10만 2773 | 7만 9272 | 21만 2353 | 1301 | 37만 2659 | 1만 1086 | 9만 1781 | 1013 | 1505 | 10만 5385 |
- 비소실 전괴・반괴는 소실 및 유출, 매몰의 피해를 받지 않은 동수.
도쿄 시내 약 60%의 가옥이 피해를 입어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 이들은 사찰, 학교 등 임시 피난소나 정부 및 민간에서 건설한 가설 주택에서 생활했다.[22][23] 11월 15일 조사에서는 시·구 관리 바락에만 8만 6천여 명이 거주했으며[23], 최대 100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도쿄를 떠나 지방으로 피난(소개)하기도 했다.[26] 군대는 치안 유지와 구호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27][28][29], 각지의 재향군인회 회원들도 구호 활동에 참여했다.[27]
이 지진의 피해 상황은 기록 영화 카메라맨 시라이 시게루의 '관동 대진 대화재 실황' 등 영상 기록으로 남아 있으며, 도쿄 국립 근대 미술관 필름 센터 등에서 소장하고 있다.[32]
3. 3. 1. 교통 마비
지진 발생 직후 도쿄시 내의 전차, 야마노테선 등 주요 교통망이 완전히 마비되었다.[30] 전신과 전화선도 끊겨 통신 역시 두절되었다.[30]가나가와현에서는 심각한 철도 피해가 발생했다. 특히 아시가라시모군 가타우라촌에서는 토석류로 인한 철도 사고가 발생하여 100명 이상이 사망했다. 네부카와역에서는 열차가 토석류에 휩쓸려 바다로 떠내려가는 사고도 있었다.
철도성 건물 자체도 지진으로 완파되었으며, 지진과 이어진 화재로 수많은 목조 객차가 불에 탔다. 이는 이후 철도 차량 안전 기준 강화에 영향을 미쳤다. 철도성은 이 경험을 교훈 삼아 1927년부터 발주하는 모든 신규 전차와 객차를 강철제 차체로 전환하게 된다. 이는 1926년 산요 본선 특급 열차 탈선 사고에서 목조 객차의 취약성이 다시 한번 드러난 것도 계기가 되었다.
도쿄시는 마비된 시영 전차를 대체하기 위해 미국의 포드 사로부터 포드 모델 T 트럭 섀시 약 800대를 긴급 수입하여 버스로 개조, 운행을 시작했다.[18][19] 이는 '엔타로 버스'라 불리며 도쿄 시영 버스의 시초가 되었고, 일본 전역에 버스 사업이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수입된 트럭은 화물 운송에도 사용되어 일본 모터리제이션의 시작을 알렸다.[19]
지진 직후 닛포리역 등에서는 증기 기관차가 끄는 열차를 이용해 피난민들을 수송하기도 했다.
3. 3. 2. 통신 두절
간토 대지진 발생 직후, 도쿄 시내의 주요 기반 시설은 큰 타격을 입었다. 도쿄 히비 신문 9월 2일자 머리기사에는 당시 상황이 기록되어 있는데, "전신, 전화, 전차, 가스, 야마노테선 전부 끊어짐"이라고 보도될 정도로 통신망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이러한 통신 두절은 재난 상황에서의 정보 전달을 극도로 어렵게 만들었으며, 혼란을 가중시키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지진 재해 이후 복구 과정에서는 통신 시스템의 현대화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특히 전화의 경우, 자동 교환기가 보급되기 시작했다.[20] 이는 지진으로 파괴된 기존 통신망을 복구하는 것을 넘어, 장기적으로 통신 인프라를 개선하는 계기가 되었다.
3. 3. 3. 수도 기능 마비
가나가와현 및 도쿄부(현: 도쿄도)를 중심으로 인접한 이바라키현·지바현에서 시즈오카현 동부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이 피해를 입었다. 특히 정부 기관이 집중된 수도 도쿄를 강타하여 국가 기능이 마비되는 심각한 상황이 되었다.[7]지진 발생 직후, 도쿄 시내의 주요 기반 시설이 일시에 마비되었다. 전신, 전화, 전차, 가스, 야마노테선 운행이 모두 중단되었으며[30], 수도관 파열로 소화 활동에도 큰 어려움을 겪었다.[10][11] 대장성, 문부성, 내무성, 외무성, 경시청 등 주요 관공서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었고[177][178][179], 도쿄제국대학 등 교육 시설과 제국극장, 니혼바시 미쓰코시 본점 등 문화, 상업 시설 대부분도 불타버렸다. 간다 고서점가와 도쿄제국대학 대도서관, 마쓰노 문고, 오쿠라 집고관 등도 화재로 소실되어 귀중한 서적과 문화재가 다수 사라졌다. 중앙기상대(현재의 일본 기상청) 본관마저 화재로 소실되어 수많은 지진 기록들이 없어지는 피해를 입었다.[181]
정부 기능 역시 큰 혼란을 겪었다. 지진 발생 8일 전인 8월 24일에 내각총리대신 가토 도모사부로가 급사하여, 외무대신 우치다 야스야가 내각총리대신을 임시 겸임하는 직무 집행 내각 상태였다. 지진 발생 다음 날인 9월 2일에야 야마모토 곤베에가 신임 총리에 취임하여 내각을 구성했다. 이후 9월 27일에는 내무대신 고토 신페이를 총재로 하는 제도부흥원을 설치하여 본격적인 부흥 사업에 착수했다.
금융 시스템도 마비 상태가 되었다. 일본은행 본점은 화재 피해를 입었으나, 다행히 실제 은행권 소실은 약 8.5%에 그쳤다. 하지만 당시 일본 유일의 지폐 인쇄 공장이었던 도쿄 오테정의 일본 국립인쇄국은 공장과 설비, 은행권 원판, 제조 중이거나 완료된 은행권 전체가 소실되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금융 시스템이 정체되자 긴급 칙령에 의한 모라토리엄(지불유예령)이 발령되었고, 지진 재해 어음 문제가 발생하는 등 경제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러한 수도 기능 마비 상황 속에서 참모본부를 중심으로 수도 이전 논의가 제기되기도 했다. 당시 참모부원이었던 이마무라 히토시는 경성부 인근의 용산, 가코가와시, 하치오지시 등을 후보지로 검토했다고 회고했다.[248][249] 그러나 지진 발생 11일 후인 9월 12일, 정부는 도쿄를 수도로 유지하며 복구하겠다는 조서를 발표함으로써 천도 논의는 일단락되었다.[250]
언론 기능도 마비되어, 도쿄 아사히 신문, 요미우리 신문, 국민 신문 등 주요 신문사의 사옥이 소실되었다. 유일하게 남은 도쿄 히비 신문을 통해 참상이 일부 전달될 수 있었다.[30]
4. 사회적 혼란과 사건
간토 대지진은 가나가와현 및 도쿄부(현 도쿄도)를 중심으로 주변 지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한신·아와지 대지진이나 동일본 대지진과 달리, 화재로 인한 사망자(소사)가 유독 많았다.[8] 지진 발생 시각이 점심 준비 시간대였고, 태풍의 영향으로 강풍이 불었으며[9], 목조 주택이 밀집된 도쿄시(도쿄 15구)의 특성상 화재가 삽시간에 번졌다. 수도관 파열로 소화 작업도 어려워 화재는 3일간 지속되었다. 피난민들이 대팔차 등에 실은 가재도구가 피난을 방해하고 불쏘시개 역할을 하기도 했다.[10][11]
지진 발생 8일 전 가토 도모사부로 내각총리대신이 급사하여 우치다 야스야 외무대신이 총리 대리를 맡고 있던 혼란 속에서, 정부는 지진 다음 날인 9월 2일 야마모토 곤베에를 신임 총리로 임명하고(대명강하는 8월 28일), 9월 27일 고토 신페이 내무대신을 총재로 하는 제도부흥원을 설치하여 부흥 사업에 착수했다.
이 재해는 일본 사회에 여러 변화를 가져왔다. 재해 정보를 신속히 전달할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일본 최초의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었고, 이는 빠르게 보급되었다.[12] 도쿄시와 요코하마시의 기능 마비로 많은 주민이 오사카부나 아이치현 등지로 이주하면서, 오사카시는 제1차 세계 대전 특수 경기 이후 다시 한번 성장하여 대오사카 시대를 맞이하는 등 도시 서열에도 영향을 미쳤다. 도쿄 시영 전차의 기능 부전을 대체하기 위해 도쿄시가 T형 포드 약 800대를 수입하여 버스 사업(엔타로 버스)을 시작한 것은[18][19] 전국적인 버스 사업 확산과 화물 자동차를 이용한 물류 운송의 시작을 알리며 모터리제이션 시대를 열었다.[19] 전화 교환기의 자동화(자동 교환기)도 촉진되었다.[20]
경제적으로는 금융 시스템이 마비되어 지진 재해 어음 문제가 발생했고, 정부는 긴급 칙령으로 모라토리엄(지불유예)을 선언했다. 부흥 자금 마련을 위해 막대한 외채가 도입되었는데, 모건 상회와 로스차일드 가 등이 참여하여 당시 일본 국가 예산의 60%를 넘는 규모의 공채를 인수했다.[13][14][15] 이 외채는 특히 화력 발전 설비 도입에 많이 쓰였다. 막대한 대외 채무는 이후 쇼와 금융 공황(1927년)과 세계 대공황(쇼와 공황)으로 이어지는 일본 경제의 불안정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16][17]
도쿄 시내 가옥의 약 60%가 파괴되면서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 9월 5일 기준으로 1만 2천 명 이상을 수용하는 집단 피난소가 160곳에 달했으며, 사찰(59곳)과 학교(42곳)가 주요 피난 장소로 활용되었다.[22] 정부는 육군 텐트를 빌려 메이지 신궁 외원, 궁성 앞 광장 등에 임시 피난소를 설치했고, 관민 협력으로 가설 주택(바라크) 건설이 빠르게 진행되어 11월 15일에는 시·구 관리 바라크에 8만 6천여 명이 거주했다.[23] 하지만 피난민 밀집으로 인한 치안 악화와 슬럼화 문제가 발생하자[24], 정부는 이듬해부터 바라크 철거와 함께 쓰키시마, 후카가와구 등에 소규모 주택 단지를 조성하고, 재단법인 도준회를 통해 주택 건설을 지원했다.[25] 또한, 내무성은 최대 100만 명에 달하는 이재민을 지방으로 분산 수용(소개)하도록 지시했다.[26]
혼란 속에서 군대는 조직적인 구호 활동을 펼쳤다.[27] 치안 유지뿐 아니라 기술력과 동원력을 바탕으로 이재민 구호에 나서면서, 당시 민주주의 의식이 확산되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군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형성되기도 했다.[28][29] 각지의 재향군인회에서도 8,400명 이상이 구호 활동에 참여했다.[27]
당시 도쿄 제국 대학 교수였던 테라다 토라히코는 지진 순간을 "의자에 앉아 있는 두 발의 발바닥을 아래에서 나무 망치로 급속히 난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전혀 경험하지 못한 이상 대지진이라고 알았다"라고 생생하게 기록했다. 주일 프랑스 대사 폴 클로델은 피난민들의 질서정연한 모습에 대해 "불평하는 소리 하나도 듣지 못했다... 같은 작은 배를 탄 것처럼 사람들은 모두 가만히 조용히 있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21]
지진의 참상을 기록한 영상으로는 시라이 시게루가 촬영한 '관동 대진 대화재 실황'과 요코하마 시네마 상회(현 요코시네 디 아이 에이)의 '요코하마 대지진 화재 참상' 등이 남아 있다.[32]
4. 1. 유언비어 유포
간토 대지진 당시 퍼진 악의적인 유언비어로 인해 수많은 조선인이 일본인 자경단 등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 조선인 학살 사건은 이후 한일 간의 중요한 역사인식 문제로 이어지게 되었다.4. 1. 1. 유언비어의 내용과 확산 경로
요코하마시 시립 중학교 부독본에서는 간토 대지진 당시 유언비어 확산과 그로 인한 조선인 살해에 대한 기술이 변경되는 과정이 있었다. 2011년, 해당 부독본은 기존의 "자경단 중에 조선인을 살해하는 이로 치닫는 사람들이 있었다"라는 표현을 "군대나 경찰, 자경단 등은 조선인을 박해하고 학살했다. 요코하마에서도 각지에서 자경단이 조성되어 조선인이나 중국인이 학살당하는 일이 일어났다."라고 수정하였다.[252][253]이러한 문구 수정은 시의회에서 논란이 되었으며,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는 "요코하마에서도 군대나 경찰이 학살을 했다고 오해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이며 2012년 9월 관련 지도과장에게 견책 처분을, 지도주사들에게는 문서 훈계 처분을 내렸다.[253] 하지만 이후 2016년,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는 "조선인, 중국인이 살해되었다"는 내용이 포함된 수정된 기술을 다시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254]
4. 1. 2. 유언비어 검증 및 수습
간토 대지진 당시 자행된 조선인 학살 사건은 이후 역사 인식 문제로 이어졌다.
요코하마시의 시립 중학교 부교재에서는 간토 대지진 당시 유언비어 확산과 조선인 살해에 대한 기술을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다. 2011년, 해당 부교재는 기존의 "자경단 중에 조선인을 살해하는 이로 치닫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내용을 "군대나 경찰, 자경단 등은 조선인을 박해하고 학살했다. 요코하마에서도 각지에서 자경단이 조성되어 조선인이나 중국인이 학살당하는 일이 일어났다"로 수정했다.[252][136] 그러나 시의회에서 이 수정이 문제가 되자,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는 "요코하마에서도 군대나 경찰이 학살을 했다고 오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2012년 9월 당시 지도과장에게 경고 처분을 내리고 지도주사들에게는 문서훈계 처분을 내렸다.[136] 이후 2016년,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는 "조선인, 중국인이 살해되었다"는 내용을 다시 포함하기로 결정했다.[254]
한편, 2013년 2월 3일 대한민국의 기록사진 연구가 정성길은 오카다 고요가 촬영한 사진을 간토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증거 사진으로 공개하여 국내 언론에 보도되었다.[257][140] 이 사진은 오카다 고요가 도쿄부의 위촉을 받아 촬영하여 지진 89일 후 발매한 "다이쇼 대지진 대화재 참상 사진집"과 사가판 앨범에 "요시하라 공원 마노이케 부근"이라고 기록된 요시와라 유곽의 화재 사망자 사진이었다.[255][138] 그러나 오카다 고요 사진관 측은 정성길 연구가의 주장에 대해 불분명한 정보라고 반박했다.[137]
일본 정부는 조선인 학살 사실에 대해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 내각의 내각관방장관인 마쓰노 히로카즈는 대지진 100주년을 앞둔 2023년 8월 30일 기자회견에서 조선인 학살에 대한 질문에 "정부 조사 결과, 사실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고 답변했다.[141][142][143] 이는 아베 신조 내각 시절인 2017년과 2019년의 입장과 동일하다.
4. 2. 조선인 학살
간토 대지진 당시 혼란 속에서 퍼진 유언비어로 인해 수많은 조선인이 일본인 자경단, 군인, 경찰 등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재난 상황에서의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당시 일본 사회에 만연했던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적대감이 표출된 결과로 해석된다. 오늘날까지도 학살의 정확한 희생자 수, 가해 주체, 일본 정부의 책임 등에 대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으며, 이는 한일 간의 중요한 역사인식 문제로 남아 있다.4. 2. 1. 학살 배경
간토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사건은 역사인식 문제로도 발전하였다.요코하마시 시립 중학교 부독본 내용에서는 간토 대지진 당시 유언비어의 확산과 조선인의 살해에 대해서 2011년 원래 "자경단 중에 조선인을 살해하는 이로 치닫는 사람들이 있었다"라는 말을 "군대나 경찰, 자경단 등은 조선인을 박해하고 학살했다. 요코하마에서도 각지에서 자경단이 조성되어 조선인이나 중국인이 학살당하는 일이 일어났다."라고 수정하였다.[252][253] 시의회에서 이런 문구 변경이 문제가 되어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는 "요코하마에서도 군대나 경찰이 학살을 했다고 오해할 수 있다"라고 하며 당시 지도과장을 2012년 9월 계고 처분을 내렸으며, 당시 지도주사들도 문서훈계 처분을 받았다.[253] 이런 내용은 2016년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가 "조선인, 중국인이 살해되었다"라는 내용을 다시 수정하여 사용하기로 결정하면서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254]
2013년 2월 3일, 대한민국의 기록사진연구가인 정성길은 오카다 고요가 도쿄부의 위촉을 받아 촬영하고 지진 89일 후 발매한 "다이쇼 대지진 대화재 참상 사진집"(大正大震災大火災惨状写真集)과 비매 사가판 앨범소장집인 "요시하라 공원 마노이케 부근"(吉原公園魔ノ池附近)이라 기록된 요시와라 유곽에서의 사망자 사진[255][256]을 간토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자 사진으로 공개하여 대한민국 내에서 보도되기도 하였다.[257][258] 그러나 오카다 고요 사진관은 이를 불분명한 정보라고 부정하였다.[255] 1911년(메이지 44년) 요시와라 대화재 당시의 사진을 가져온 것이 아닌가라는 의견도 존재한다.[258]
4. 2. 2. 학살 가해 주체 및 양상
간토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사건은 역사인식의 문제로 이어지기도 했다.
요코하마시의 시립 중학교 부교재에서는 간토 대지진 당시 유언비어 확산과 조선인 살해에 대한 기술이 논란이 되었다. 2011년, 해당 부교재는 기존의 "자경단 중에 조선인을 살해하는 이로 치닫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서술을 "군대나 경찰, 자경단 등은 조선인을 박해하고 학살했다. 요코하마에서도 각지에서 자경단이 조성되어 조선인이나 중국인이 학살당하는 일이 일어났다"로 수정하였다.[252][253] 그러나 이러한 문구 변경이 시의회에서 문제가 되자,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는 "요코하마에서도 군대나 경찰이 학살을 했다고 오해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2012년 9월 당시 담당 지도과장에게 계고 처분을 내리고, 지도주사들에게는 문서훈계 처분을 하였다.[253] 하지만 2016년,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는 다시 "조선인, 중국인이 살해되었다"는 수정된 내용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254]
한편, 학살의 참상을 보여주는 자료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2013년 2월 3일, 대한민국의 기록사진연구가 정성길은 오카다 고요가 도쿄부의 위촉을 받아 촬영하고 지진 89일 후 발매한 "다이쇼 대지진 대화재 참상 사진집"과 비매품 앨범에 실린 요시하라 유곽에서의 사망자 사진("요시하라 공원 마노이케 부근"으로 기록됨)을 간토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희생자들의 사진이라며 공개했고, 이는 대한민국 내 언론에 보도되었다.[257][258] 그러나 이 사진에 대해 오카다 고요 사진미술관 측은 요시와라 유곽 관련 사진이라는 입장을 보이며 정성길의 주장이 불분명한 정보라고 반박했다.[255] 해당 사진은 도쿄 대학 사회정보연구소 히로이 히로시 연구실 홈페이지에 "도쿄 요시히라 유곽 내 연못에서의 익사자 인상 후 참상"이라는 제목으로 게시되어 있기도 하다.[256] 일각에서는 이 사진이 1911년(메이지 44년) 요시와라 대화재 당시의 사진일 수 있다는 의견도 제기되었다.[258]
4. 2. 3. 학살 피해자 수
간토 대진재 당시 조선인 학살 사건은 역사 인식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요코하마시 시립 중학교 부독본에서는 간토 대진재 당시 유언비어 확산과 조선인 살해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2011년에는 기존의 "자경단 중에 조선인을 살해하는 이로 치닫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소극적인 표현을 "군대나 경찰, 자경단 등은 조선인을 박해하고 학살했다. 요코하마에서도 각지에서 자경단이 조성되어 조선인이나 중국인이 학살당하는 일이 일어났다"는 보다 명확한 서술로 수정하였다.[252][253] 그러나 시의회에서 이러한 문구 변경이 문제시되자,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는 "요코하마에서도 군대나 경찰이 학살을 했다고 오해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당시 담당자들에게 징계를 내리는 등 논란이 있었다.[253] 이후 2016년,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는 "조선인, 중국인이 살해되었다"는 내용을 다시 포함하기로 결정하여 학살 사실을 명기하게 되었다.[254]
2013년 2월 3일, 대한민국의 기록사진 연구가인 정성길은 오카다 고요가 촬영하여 발매한 "다이쇼 대지진 대화재 참상 사진집"에 실린 요시와라 유곽 사망자 사진을 간토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희생자 사진으로 공개하여 대한민국 내에서 주목받았다.[257][258] 그러나 오카다 고요 사진관 측은 해당 사진이 조선인 학살 희생자를 촬영한 것인지에 대해 불분명하다는 입장을 밝혔다.[255] 이 사진은 도쿄 대학 사회정보연구소 히로이 히로시 연구실 홈페이지에 "도쿄 요시히라 유곽 내 연못에서의 익사자 인상 후 참상"이라는 제목으로 게시되어 있기도 하다.[256]
4. 2. 4. 조선인 보호 사례
(해당 섹션 제목 '조선인 보호 사례'에 대한 내용은 주어진 원본 소스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4. 3. 사회주의자 및 기타 희생자
2004년 무렵까지 사망자 및 실종자는 약 14만 명으로 추정되었으나, 이는 지진 발생 2년 후 "진재예방조사회 보고"에 따른 수치였다. 2000년대 이후 다케무라 데라유키 등의 연구에서 중복된 수가 많다는 지적이 제기되었고, 이 설이 일본 학계에 받아들여지면서 이과연표는 2006년부터 사망자 및 실종자 수를 10만 5천 명으로 정정하였다.[171]
지진의 흔들림으로 인한 건물 붕괴로 압사한 사람도 많았지만, 대부분의 사망자는 강풍을 동반한 화재 때문에 발생했다. 또한 쓰나미가 태평양 연안, 사가미만 연안 지역 및 보소반도 연안을 덮쳐 최대 10m 높이의 파도로 인한 익사자도 발생했다. 가나가와현 산간 지방에서는 산사태나 절벽 붕괴로 인한 토석류 피해가 발생하여 가옥이 유실되거나 매몰되었으며, 특히 가나가와현 아시가라시모군 가타우라촌에서 발생한 철도 사고에서는 100명 이상이 사망했고, 다른 토석류 피해로도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진으로 인해 희생된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신분 | 사망 경위 |
---|---|---|
히로코 여왕 |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 제4왕녀 | 오다와라시의 간인노미야 별궁 붕괴로 사망 |
모로마사왕 | 히가시쿠니 나루히코왕 제2왕자 | 후지사와시 별장 붕괴로 사망 |
사키코 여왕 | 야마시나노미야 다케히코 왕비 | 가마쿠라시 야마시나노미야 별장 붕괴로 사망 |
마쓰오카 야스코와 | 추밀고문관, 니혼 대학 교장 | 하야마정 별장 붕괴로 사망 |
소노다 고기치 | 실업가, 남작 | 니노미야 별장 붕괴로 사망 |
이소베 시로 | 정치인, 법학자, 변호사 | 피난처인 피복창 터에서 화재로 사망 |
구리야가와 하쿠손 | 영문학자, 평론가 | 가마쿠라에서 쓰나미에 휩쓸려 다음 날 사망 |
쓰지무라 이스케 | 원예가, 산악인 | 오다와라 자택 뒷산 산사태로 아내와 함께 사망 |
도미타키 아유미 | 하이쿠 시인 | 무카이지마 자택에서 피난 중 화재로 사망 |
레이레이테이 류쿄 5대손 | 만담가 | 화재로 사망 |
윌리엄 헤이그 | 영국 외교관, 초기 축구 발전에 기여 | 요코하마 영사관 붕괴로 사망 |
예니 마리 메리 카위퍼르 | 페리스 화영어학교 교장 | 근무지인 학교 붕괴 후 화재로 사망 |
이토 쇼지로 | 신파 배우, 전 라쿠고가 | 사망 경위에 여러 설이 있음 |
이시카와 고자부로 | 신파 배우 | 피복창 터에서 화재로 사망 (자손, 문하생 1명 포함) |
가타기리 시로 | 영화 배우 (국제활영, 마쓰타케 가마타 촬영소 소속) | 피복창 터에서 피난 중 화재로 사망 |
무라오카 히로시 | 인쇄업자 (무라오카 하나코의 남편) | 요코하마 사옥 붕괴로 직원 70명과 함께 사망 |
아타리야 노부타로 | 스모 선수 | 사망지 불명 |
우메가키 나오지로 | 스모 선수 | 사망지 불명 (아내와 함께 사망 추정) |
산유테이 가유 | 만담가, 음곡사 | 사망지 불명 |
기텐토키 쇼쇼이치 | 마술사 | 피복창 터에서 피난 중 사망[172] |
야스다 요시오 | 실업가 | 혼조 요코아미 본가에서 화재에 휩쓸려 육군군의학교에서 사망 |
야마다 덴신 | - | - |
고메이로 구니스케 | 만담가 | 사망 경위에 여러 설이 있음 |
요시다 히사기쿠 초대손 | 낭곡사 | 요코하마 히사테이에서 대들보에 깔려 사망 |
간토 대지진 당시 발생한 조선인 학살 사건은 역사 인식 문제로 이어지기도 했다. 요코하마시 시립 중학교 부독본에서는 2011년, "자경단 중에 조선인을 살해하는 이로 치닫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기존 내용을 "군대나 경찰, 자경단 등은 조선인을 박해하고 학살했다. 요코하마에서도 각지에서 자경단이 조성되어 조선인이나 중국인이 학살당하는 일이 일어났다"로 수정했다.[252][253] 그러나 시의회에서 이 수정이 문제가 되자,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는 "요코하마에서도 군대나 경찰이 학살을 했다고 오해할 수 있다"며 2012년 9월 관련 공무원들에게 징계 처분을 내렸다.[253] 이후 2016년,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는 "조선인, 중국인이 살해되었다"는 내용을 다시 포함하기로 결정했다.[254]
2013년 2월, 대한민국의 기록사진 연구가 정성길은 오카다 고요가 촬영한 "다이쇼 대지진 대화재 참상 사진집"에 실린 요시하라 유곽 사망자 사진을 간토 대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의 사진이라고 주장하며 공개했다.[257][258] 이 사진은 도쿄부의 위촉으로 촬영되어 지진 89일 후 발매된 사진집과 비매품 앨범에 "요시하라 공원 마노이케 부근"(吉原公園魔ノ池附近일본어)이라는 설명과 함께 실려 있었다.[255] 그러나 오카다 고요 사진관 측은 정성길의 주장에 대해 불분명한 정보라고 반박했다.[255]
4. 3. 1. 가메이도 사건
(작성할 내용 없음 - 원본 소스에 '가메이도 사건' 관련 내용이 없습니다.)4. 3. 2. 아마카스 사건
(해당 섹션 제목 '아마카스 사건'에 대한 내용이 주어진 원본 소스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 본문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4. 4. 치안 유지 긴급 칙령 발표
간토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사건은 역사인식 문제로도 발전하였다.
요코하마시 시립 중학교 부독본 내용에서는 간토 대지진 당시 유언비어의 확산과 조선인의 살해에 대해서 2011년 원래 "자경단 중에 조선인을 살해하는 이로 치닫는 사람들이 있었다"라는 말을 "군대나 경찰, 자경단 등은 조선인을 박해하고 학살했다. 요코하마에서도 각지에서 자경단이 조성되어 조선인이나 중국인이 학살당하는 일이 일어났다."라고 수정하였다.[252][253] 시의회에서 이런 문구 변경이 문제가 되어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는 "요코하마에서도 군대나 경찰이 학살을 했다고 오해할 수 있다"라고 하며 당시 지도과장을 2012년 9월 계고 처분을 내렸으며, 당시 지도주사들도 문서훈계 처분을 받았다.[253] 이런 내용은 2016년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가 "조선인, 중국인이 살해되었다"라는 내용을 다시 수정하여 사용하기로 결정하면서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254]
2013년 2월 3일, 대한민국의 기록사진연구가인 정성길은 오카다 고요가 도쿄부의 위촉을 받아 촬영하고 지진 89일 후 발매한 "다이쇼 대지진 대화재 참상 사진집"(大正大震災大火災惨状写真集일본어)과 비매 사가판 앨범소장집인 "요시하라 공원 마노이케 부근"(吉原公園魔ノ池附近일본어)이라 기록된 요시하라 유곽에서의 사망자 사진을 간토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자 사진으로 공개하여 대한민국 내에서 보도되기도 하였다.[257][258]
4. 5. 계엄령 발표
간토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사건은 역사인식 문제로도 이어졌다.
요코하마시 시립 중학교 부독본에서는 간토 대지진 당시 유언비어 확산과 조선인 살해에 대해 2011년, 기존의 "자경단 중에 조선인을 살해하는 이로 치닫는 사람들이 있었다"라는 서술을 "군대나 경찰, 자경단 등은 조선인을 박해하고 학살했다. 요코하마에서도 각지에서 자경단이 조성되어 조선인이나 중국인이 학살당하는 일이 일어났다."라고 수정하였다.[252][253] 그러나 이러한 문구 변경이 시의회에서 문제가 되자,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는 "요코하마에서도 군대나 경찰이 학살을 했다고 오해할 수 있다"며 2012년 9월 당시 지도과장에게 계고 처분을 내렸고, 지도주사들도 문서훈계 처분을 받았다.[253] 이후 2016년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는 "조선인, 중국인이 살해되었다"는 내용을 다시 포함하기로 결정하였다.[254]
한편, 2013년 2월 3일 대한민국의 기록사진연구가 정성길은 오카다 고요가 도쿄부의 위촉을 받아 촬영하고 지진 89일 후 발매한 "다이쇼 대지진 대화재 참상 사진집" 및 비매품 앨범 소장집에 실린 요시하라 유곽 사망자 사진("요시하라 공원 마노이케 부근" 기록)을 간토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사진으로 공개하여 국내에 보도되기도 하였다.[257][258] 해당 사진은 요시하라 유곽 화재 당시 연못에서 익사한 희생자들의 사진으로 알려져 있으며,[255][256] 오카다 고요 사진미술관 측은 정성길 연구가의 주장을 불분명한 정보라고 부인하였다.[255] 일각에서는 1911년 요시와라 대화재 당시 사진일 가능성도 제기되었다.[258]
5. 대응 및 복구
미증유의 피해를 낳은 간토 대지진 이후, 국가 기능이 마비된 상황 속에서 정부와 민간, 그리고 국제 사회의 노력이 결합된 대규모 대응 및 복구 작업이 시작되었다. 지진 발생 당시 내각총리대신 가토 도모사부로의 급서로 인한 정치적 공백 속에서, 야마모토 곤베에가 신임 총리로 취임하며 정부 차원의 대응이 본격화되었다.[253] 9월 27일에는 고토 신페이를 총재로 하는 제도부흥원이 설치되어 체계적인 부흥 사업의 기틀을 마련했다.
초기 대응은 혼란 속에서 이루어졌다. 군대가 동원되어 치안 유지와 구호 활동에 나섰으며,[27] 당시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28][29] 각지의 재향군인회 역시 구호 활동에 힘을 보탰다.[27] 막대한 피해를 입은 이재민들을 위해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임시 피난소와 가설 주택을 건설했으나,[22][23] 일부 지역은 슬럼화되는 등 어려움도 따랐다.[24] 도쿄의 피해가 극심하여 최대 100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지방으로 피난(소개)하기도 했다.[26] 국제 사회에서도 구호의 손길이 이어졌는데, 특히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성금과 구호 물품을 지원했다.[232][233][235][236]
본격적인 복구 및 부흥 사업은 제도부흥원 주도로 추진된 제도부흥계획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 계획은 에도 시대부터 이어져 온 도시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도로 확장, 구획 정리 등 현대적인 도시 인프라 구축을 목표로 했으나, 막대한 예산 문제와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원안보다 상당히 축소되어 시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업을 통해 새로운 도로, 교량, 공원, 도준카이 아파트와 같은 주택 등이 건설되며 도시의 모습은 크게 변화했다. 또한 지진 피해를 교훈 삼아 내진 설계 기준이 법제화되고[246] 도시 불연화 개념이 도입되는 등[247] 건축 및 도시 계획 분야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지진 피해 복구를 위한 자금 조달 과정에서 발생한 지진 재해 어음 문제가 불거졌고, 정부의 모라토리엄(지급유예령) 발령과 손실 보상 조치에도 불구하고 불량채권 처리 문제 등이 겹치면서 1927년 쇼와 금융공황으로 이어지는 등 경제 침체를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17] 막대한 복구 비용 충당을 위해 외채가 대거 도입되기도 했다.[13][14][15]
사회적으로는 대중교통 마비로 인해 버스 사업이 시작되고[18][19] 자가용 보급이 늘어나면서 일본 모터리제이션의 계기가 마련되었다.[19] 또한, 피난의 교훈으로부터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어 빠르게 보급되었고[12], 전화망 역시 자동 교환기가 도입되는[20] 등 통신 기술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1930년, 쇼와 천황은 부흥 사업이 완료된 도쿄를 순행하며[229] 제국수도부흥제를 개최했고,[230] 부흥 사업 관계자들에게는 기념장이 수여되었다.[231] 이후 간토 대지진의 교훈을 되새기기 위해 1960년부터 지진 발생일인 9월 1일이 방재의 날로 지정되어 매년 방재훈련이 실시되고 있다.
5. 1. 초기 대응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간토 대진재는 도쿄부(현 도쿄도)와 가나가와현을 중심으로 막대한 피해를 남겼다. 지진 발생 직후, 도쿄시와 요코하마시 등 주요 도시는 통신, 교통, 전기, 가스 등 기반 시설이 완전히 마비되었고, 특히 점심 준비 시간과 겹쳐 발생한 화재는 강풍을 타고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도쿄 아사히 신문, 요미우리 신문 등 주요 언론사 사옥도 소실되어 정보 전달에도 큰 차질이 빚어졌다. 유일하게 남은 도쿄 니치니치 신문은 9월 2일 자에서 "도쿄 시 전체가 불바다가 되다", "니혼바시, 교바시, 시타야, 아사쿠사, 혼조, 후카가와, 간다 거의 전멸, 사상자 수십만"이라고 보도하며 참상을 전했다.[30]
지진 발생 당시 일본 정부는 내각총리대신 가토 도모사부로가 8일 전 급서하여 외무대신 우치다 야스야가 임시 대리 총리를 맡고 있는 비상 상황이었다. 국가 기능이 마비된 가운데, 정부는 9월 2일 야마모토 곤베에를 신임 총리로 임명하고 계엄령을 선포하여 군대를 동원해 치안 유지와 구호 활동에 나섰다. 또한 9월 27일에는 고토 신페이를 총재로 하는 제도부흥원을 설치하여 본격적인 복구 및 부흥 사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초기 피해 집계는 혼란 속에서 정확히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2004년경까지는 사망 및 실종자를 약 14만 명으로 추산했으나, 이후 연구를 통해 중복 집계 등이 확인되어 2006년부터는 약 10만 5천 명으로 수정되었다.[171][33] 사망 원인은 지진으로 인한 건물 붕괴보다는 화재로 인한 소사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며[8], 쓰나미와 토석류로 인한 인명 피해도 발생했다.
5. 1. 1. 정부의 대응
일본은행 본점은 화재 피해를 입었으나 실제 은행권은 약 8.5%만 소실되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에서 유일한 지폐인쇄공장이었던 도쿄시 오테정의 일본 국립인쇄국은 증권인쇄부와 공장, 약 730대의 기계 설비, 은행권 원판, 제조 중이거나 완료된 은행권 전체가 소실되었으며, 도쿄시 오지(王子)에 있던 인쇄국 초지부도 건물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9월 하순 오사카 지지 신문에서는 인쇄국 잔해에서 기적적으로 1엔, 5엔, 10엔, 20엔, 100엔의 원판이 소실되지 않고 발견되어 일본은행 금고로 이송했다고 보도하였다.처음에는 긴급 지폐 발행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10월 중순 일부 은행에서 예금 인출이 잇따르자 11월 6일 일본은행은 대장대신에게 미발행 고액지폐인 "갑 200엔" 발행을 신청하였다. 오사카의 증권인쇄회사인 쇼에이도 인쇄소를 하청으로 하여 신규 지폐 인쇄를 시작했으나, 연말에는 지폐 수요가 많지 않다는 것이 확인되어 갑 200엔 권 발행은 중단되었고 1926년 남은 지폐가 모두 소각되었다.
1924년 조선총독부 인쇄국이 도쿄 인쇄국으로 미제 요판 속쇄판과 팬터그래프를 반송하였으며, 이후 새롭게 발주한 미제 요판, 평판 인쇄기도 도착하여 1926년 3월 인쇄국 업무가 완전히 복구되었다.
한편, 간토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사건과 관련하여 역사 인식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요코하마시 시립 중학교 부독본에서는 2011년, 간토 대지진 당시 유언비어 확산과 조선인 살해에 대해 기존의 "자경단 중에 조선인을 살해하는 이로 치닫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서술을 "군대나 경찰, 자경단 등은 조선인을 박해하고 학살했다. 요코하마에서도 각지에서 자경단이 조성되어 조선인이나 중국인이 학살당하는 일이 일어났다."라고 수정하였다.[252][253] 그러나 시의회에서 이 문구 변경이 문제시되자,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는 "요코하마에서도 군대나 경찰이 학살을 했다고 오해할 수 있다"며 2012년 9월 당시 지도과장을 계고 처분하고 지도주사들도 문서훈계 처분을 내렸다.[253] 이러한 논란 끝에 2016년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는 "조선인, 중국인이 살해되었다"는 수정된 내용을 다시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254]
5. 1. 2. 군의 활동
요코하마시 시립 중학교의 부독본에서는 간토 대진재 당시 조선인 학살에 대한 기술이 논란이 된 바 있다. 2011년, 해당 부독본은 기존의 "자경단 중에 조선인을 살해하는 이로 치닫는 사람들이 있었다"라는 내용을 "군대나 경찰, 자경단 등은 조선인을 박해하고 학살했다. 요코하마에서도 각지에서 자경단이 조성되어 조선인이나 중국인이 학살당하는 일이 일어났다"로 수정하였다.[252][253]이 수정 내용은 시의회에서 문제가 되었고,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는 "요코하마에서도 군대나 경찰이 학살을 했다고 오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2012년 9월 관련 공무원들에게 징계 처분을 내렸다.[253] 그러나 2016년,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는 "조선인, 중국인이 살해되었다"는 내용을 다시 포함하기로 결정하였다.[254] 이는 간토 대진재 당시 군대와 경찰의 역할 및 조선인 학살 관여 여부가 일본 내에서도 지속적인 논의 대상임을 보여준다.
5. 1. 3. 민간의 자구 노력
간토 대진재로 도쿄시 내 가옥의 60% 이상이 피해를 입으면서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하여 인근 대피소로 몰려들었다. 지진 직후 도쿄시의 조사에 따르면, 9월 5일에만 피난민 12,000명 이상이 머무는 집단 피난소가 160곳에 달했다.[160] 이 중 사찰이 59곳으로 가장 많았고, 학교가 42곳으로 뒤를 이었다.
정부 차원에서도 구호 노력이 이루어졌다. 내무성 진재구호사무국은 일본 제국 육군의 야영 텐트를 빌려 메이지신궁외원, 황거외원 등에 대규모 텐트촌을 설치했다. 9월 4일부터는 내무성 진재구호사무국과 도쿄부가 협력하여 가설주택 건설을 시작했다.
정부뿐만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도 활발한 자구 노력이 이어졌다. 간사이 지방의 부현(府県)이나 재벌, 종교단체 등이 자발적으로 임시주택 건설에 나섰다. 메이지 신궁이나 히비야 공원 등에는 한 번에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임시주택 단지가 조성되었고, 불타버린 각 초등학교 터나 교정에도 소규모 막사들이 들어섰다. 지진 발생 약 두 달 후인 11월 15일 조사에서는 시(市)나 구(区)가 관리하는 대피소가 101개소였으며, 이곳에 21,367세대, 86,581명이 수용되어 있었다.[161]
그러나 좁은 공간에 많은 피난민이 몰리면서 위생 문제가 발생하고 치안이 악화되는 등 어려움도 따랐다. 일부 대피소는 슬럼화되기도 했다.[162] 이에 이듬해 내무성 사회국, 경시청, 도쿄부, 도쿄시는 협의를 통해 대피소의 판자촌을 철거하고 새로운 주거 공간을 마련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도쿄시는 쓰키시마섬, 미노와, 후카가와구, 사루에 지역에, 도쿄부는 와다호리, 오구정, 오지 지역에 소규모 주택들을 건설하여 이재민들에게 제공했다.[163] 또한, 기부금으로 설립된 재단법인 동윤회를 통해서도 주택 건설이 이루어졌다.
5. 2. 복구 및 부흥
미증유의 피해를 낳은 간토 대지진 이후, 도쿄와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복구 및 부흥 사업이 시작되었다. 지진 직후 도쿄시 내 약 60%의 가옥이 소실되면서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고, 이들은 사찰, 학교 등 임시 피난소로 이동했다.[22] 정부는 군용 텐트와 가설 주택을 건설하여 이재민을 수용했으나, 일부 지역은 슬럼화되는 문제를 겪기도 했다.[24] 이에 정부는 철거 계획과 함께 새로운 주택 단지를 조성했으며, 재단법인 도준회도 주택 건설에 참여했다. 피해가 극심했던 도쿄에서는 최대 100만 명[26]이 지방으로 피난(소개)하기도 했다. 혼란 속에서 군대는 치안 유지와 구호 활동에 동원되었고,[27] 당시 사회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28][29] 각지의 재향군인회 역시 구호 활동에 참여했다.[27]
본격적인 도시 재건을 위해 야마모토 곤노효에 내각은 "제도부흥심의회"를 설치했으며, 이후 고토 신페이를 총재로 하는 제도부흥원이 발족하여 제도부흥계획을 추진했다. 이 계획은 에도 시대부터 이어진 도시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도로 확장, 구획 정리 등 현대적인 도시 인프라 구축을 목표로 했으나, 예산 문제와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원안보다 상당히 축소되어 시행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지진 피해 복구를 위한 자금 조달 과정에서 발생한 진재수표 문제가 불거졌고, 정부의 모라토리엄(지급유예령) 발령과 손실 보상 조치에도 불구하고 불량채권 처리 문제 등이 겹치면서 1927년 쇼와 금융공황으로 이어지는 등 경제 침체를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이는 이후 쇼와 공황이라는 장기 불황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막대한 복구 비용 충당을 위해 외채가 대거 도입되기도 했다.[13] 사회적으로는 대중교통 마비로 자가용의 필요성이 부각되면서 자동차 보급이 급증했고,[222][223] 이는 일본 모터리제이션의 시작을 알렸다.[19] 또한, 지진 피해를 피해 오사카부나 아이치현 등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인구가 늘어나면서 도시 간 인구 분포에도 변화가 생겼다. 지진을 계기로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고 전화의 자동 교환기가 보급되는[20] 등 통신 기술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국제사회에서도 지진 피해 소식에 많은 국가들이 구호의 손길을 내밀었다. 특히 미국은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대규모 지원을 제공했으며,[233] 영국, 중화민국 등 여러 국가에서 성금과 구호 물품을 보내왔다.[235][236] 해저 통신 케이블이 두절된 상황에서 이와키 국제무선전신국의 장파 무선을 통해 미국 등 해외로 피해 상황을 알린 것은 비상시 무선 통신의 중요성을 보여준 사례가 되었다.[239][240]
1930년, 쇼와 천황은 부흥 사업이 완료된 도쿄를 순행하며[229] 제국수도부흥제를 개최했고,[230] 부흥 사업 관계자들에게는 기념장이 수여되었다.[231] 이후 간토 대지진의 교훈을 되새기기 위해 1960년부터 지진 발생일인 9월 1일이 방재의 날로 지정되어 매년 방재훈련이 실시되고 있다.
5. 2. 1. 제도부흥원 설치
9월 27일, 고토 신페이를 총재로 하는 제도부흥원이 설치되어 제도부흥계획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부흥계획은 재해 지역 전체를 국가가 매입하고, 자동차 시대를 대비한 100m 도로 계획(진재 이전 계획에 있던 저속차선과 고속차선 분리 포함) 및 중요 인프라의 공동구화 등 21세기 관점에서도 이상적인 근대 도시 계획안이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경제 상황과 정당 간 대립으로 인해 예산이 대폭 축소되어 원안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고토 신페이의 원안은 30억엔 규모였으나, 최종적으로는 5억엔을 약간 넘는 수준으로 삭감되어 통과되었다. 또한, 간다스루가다이 주민들이 토지 매입 결정에 반발하는 등 어려움도 있었다. 부흥 계획의 축소는 훗날 도쿄 대공습 당시 화재 확산 방식이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고도경제성장기 자동차 사회에 대한 대응에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수도고속도로 건설 시 방재 목적으로 계획된 광역 피난용 부흥공원(스미다 공원 등) 부지의 상당 부분이나 광역 연소 차단을 위해 계획된 도로 중앙분리대 녹지 등이 활용되었다.5. 2. 2. 부흥 계획
야마모토 곤노효에 수상을 총재로 한 "제도부흥심의회"가 창설되면서 본격적인 부흥 계획이 시작되었다. 에도 시대 이래 이어져 온 도쿄 시가지를 대대적으로 개조하여 도로 확장 및 구획 정리 등 인프라 정비가 이루어졌다. 대중교통이 지진으로 대부분 파괴되자 자가용이 교통수단으로서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고, 지진 이후 자동차 보유 수가 급증하여 1923년 12,765대였던 자가용 수가 1924년에는 24,333대,[222] 1926년에는 40,070대로 가파르게 늘어났다.[223] 1929년 세계 대공황 등의 불황에도 자가용 수는 꾸준히 증가했다.
한편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불황세에 있던 일본 경제는 지진 이후 진재수표 문제나 부흥 자재 수입 초과 문제 등이 겹치면서 경제 침체가 심화되어 이후 쇼와 공황이라는 긴 불황의 늪에 빠져들었다. 지진 직후인 9월 7일에는 긴급칙령으로 모라토리엄(지급유예령)이 발령되었고, 29일에는 진재수표할인 손실보상령이 내려져 진재어음 손실을 일본 정부가 보상해주기로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불량채권까지 동일하게 보상되면서 채권 및 수표 처리가 복잡해졌고, 이는 1927년 쇼와 금융공황 발생의 한 원인이 되었다.
진재 부흥 사업으로 지어진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도준카이 아파트, 히지리바시, 부흥소학교, 부흥도로, 진재부흥공원, 스미다강의 진재부흥교, 구단시타 빌딩 등이 있다. 또한 지진 이후 부흥의 상징으로, 지진 전에는 바다였던 곳을 자갈과 모래로 매립하여 야마시타 공원이 조성되었다. 이 공원은 1935년 "부흥 기념 요코하마 대박람회"의 주요 장소로 사용되었다. 공원 안에는 1939년 인도 상인 조합이 요코하마 시민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지은 급수탑인 인도 수탑이 세워졌다. 이는 당시 일본에 거주하던 인도인들의 사업 부활을 위해 저리 융자 및 상가 재건 등을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현재 이 식수대는 사용되지 않지만, 이슬람 모스크 양식의 지붕을 가진 수탑 건축물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224]
요코스카 군항에서는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 따라 순양전함에서 항공모함으로 개조 중이던 아마기급 순양전함 아마기[225]가 간토 대지진으로 용골이 손상되어 수리 불능 판정을 받았다.[226] 그 대신 해체 예정이었던 가가급 전함 가가가 항공모함으로 개장되었다.[226][227] 가가와 아마기의 자매함인 아카기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이 운용하였다.
지진 발생 당시 일본 연합함대는 다롄 앞바다에서 훈련 중이었다.[228] 지진 발생 보고를 받고 연합함대 각 함정은 훈련을 중지하고 구호물자를 실은 뒤 도쿄만으로 향했는데,[228] 이때 영국 왕립해군은 오스미 해협에서 일본 연합함대가 약 시속 26노트의 속력으로 항해 중인 것을 관측하였다.[228]
9월 27일, 고토 신페이를 총재로 하는 제도부흥원이 설립되어 제도부흥계획이 시작되었다. 이 부흥 계획은 재해 지역을 국가가 모두 매입하자는 제안, 자동차 시대를 대비한 100m 도로 계획(저속차선과 고속차선 분리 포함), 중요 인프라의 공동구화 등 당시로서는 매우 현대적인 도시 계획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경제 상황과 정당 간의 대립으로 예산이 대폭 축소되어(고토 신페이 안은 30억엔 규모였으나 최종적으로 5억엔 남짓으로 삭감), 원안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또한 토지 매입 결정에 대해 간다스루가다이 주민들이 반발하기도 했다. 축소된 부흥 계획은 이후 도쿄 대공습 당시 화재 확산 방식이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고도경제성장기 자동차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도로 계획 축소는 훗날 수도고속도로 건설 시 부흥 공원 부지를 활용하거나 도로 중앙분리대 녹지를 이용하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1930년(쇼와 5년) 3월 24일, 쇼와 천황은 부흥 및 복구 작업을 마친 도쿄를 순행하였다.[229] 26일에는 니주바시 앞 광장에서 제국수도부흥제가 열렸다.[230] 쇼와 천황은 이날 "제도 부흥 사업은 민관 협동의 노력을 통해 세월을 단축하고 그 위업을 잘 달성하였다. 짐은 이를 깊이 기뻐하며, 지금 친히 도시가 완비되어 크게 옛 모습에서 바뀐 것을 보고 오로지 여러 사람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 한 번 더 시정이 발전되기를 바란다."는 칙어를 발표했다.[231]
같은 해 8월에는 제도부흥기념장이 제정되어(1930년 8월 13일 칙령 제148호 "제도부흥기념장령" 제1조) 제도 부흥 사업에 직접 관여하거나 관련 사무에 종사한 사람들에게 기념장이 수여되었다.
'''제도부흥기념장'''
이후 1960년, 간토 대지진이 발생했던 9월 1일은 방재의 날로 지정되어 일본 정부를 중심으로 매년 방재훈련이 실시되고 있다. 다만, 미야기현이나 가고시마현처럼 자체적으로 별도의 방재의 날을 정해 훈련하는 지역도 있다.

일본의 지진 소식이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많은 국가에서 구호품, 성금, 의료 물자 제공 의사를 밝혔다.[232]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국으로 함께 싸웠던 미국의 지원이 가장 많았으며,[233] 일본 측에 필요한 물품을 거리낌 없이 요청하라고 전하기도 했다.[234] 미국과 대영제국에서 가장 많은 성금이 모였고, 그 외에도 영국령 인도 제국, 오스트리아, 캐나다, 독일, 프랑스, 벨기에, 페루, 멕시코 등에서도 구호 물자나 성금을 보냈다.[235][236] 미국과 영국 군함은 구호물자 수송과 피난민 이송에 참여하기도 했다.[237][238]
당시 해외 통신 수단은 제한적이었으나, 일본은 장파 무선을 이용하여 이와키 국제무선전신국 하라마치 송신소를 통해 미국으로 지진 소식을 전달했다. 이는 무선 통신이 비상 상황에서 정보 전달에 유용함을 보여준 첫 사례였다. 지진으로 해저 케이블이 끊어지면서 장파 무선만이 유일한 미국과의 통신 수단이 되었다. 이와키 국제무선전신국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간토 지역의 막대한 피해 소식을 접하고 국내용 무선 전보 수신을 위해 기계를 개조하여 정보를 얻은 뒤 미국으로 긴급 전보를 발신했다. 이 전보는 우연히 일본이 중국 베이징에 건설 중이던 무선국에도 감청되어 중국과 유럽에도 지진 소식이 전파되었다. 결과적으로 이와키 국제무선전신국은 유일한 해외 연락망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당시 국장이었던 요네무라 가이치로는 설비 부족과 비상 통신 체제 미비를 지적하며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239][240]
지진에 대한 각국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중화민국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이자 당시 중화민국 내 청나라 소조정의 수장이었던 푸이는 지진 소식에 깊은 슬픔을 표하며[241] 기부 의사를 밝혔다. 그는 자금성 내 보석들을 일본 특명전권공사 요시자와 겐키치에게 전달하여 현금화한 뒤 성금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일본 정부는 보석을 환전하는 대신, 평가액(20만달러 상당)과 동일한 금액을 일본 황실에서 마련하고 보석은 황실 재산으로 보관하기로 결정했다. 1923년 11월, 일본 정부는 푸이에게 대표단을 보내 감사의 뜻을 전했다.[241] 푸이의 교사였던 레지널드 존스턴은 당시 푸이의 기부가 정치적 동기 없이 순수한 동정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평가했다.[242]
;미국
제1차 세계 대전의 동맹국이었던 미국은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대규모 지원을 제공했다. "수 분이 생사를 가른다"(Minutes make lives)라는 유명한 표어는 이때 등장했다. 미국 전역에서 모금 운동이 벌어졌고, 당시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 제도 배타정부의 미국 육군 기지에서도 다양한 물자를 지원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지도자 마커스 가비도 다이쇼 천황에게 위로 전문을 보내고 모금 운동을 벌였다. 미국 해군은 미국 아시아 함대를 파견하여 피란민과 물자 수송을 도왔다.
- 미 해군의 주요 대일 지원 함정[243]
- * 장갑순양함: USS 사우스다코타
- * 구축함: USS 스튜워트, USS 스미스 톰슨, USS 배이커, USS 트래시, USS 존 D. 에드워드, USS 휘플, USS 헐버트, USS 윌리엄 B. 프레스턴, USS 프레블, USS 노아
- * 구축함모함: USS 블랙 호크
- * 수송선: 메리트(Merrit), 애배레다(Abareda), 베가(Vega)
- * 보급함: USS 페코즈
;벨기에
지진 직후 벨기에 정부는 "일본인 이재민 구호 벨기에 국내위원회"를 설립하고, 벨기에 왕실과 벨기에 적십자를 통해 일본을 지원했다. 민간에서도 모금 활동, 콘서트, 바자회 등을 통해 얻은 수익금을 위원회를 통해 기부했다.
5. 2. 3. 부흥 사업
야마모토 곤노효에 수상을 총재로 한 "제도부흥심의회"가 창설되어 본격적인 부흥 계획이 시작되었다. 에도 시대 이래 이어져 온 도쿄 시가지를 대대적으로 개조하여 도로 확장 및 구획 정리 등 인프라 정비가 이루어졌다. 대중교통이 지진으로 대부분 파괴되자 자가용이 교통수단으로서 가치를 인정받게 되면서, 이로 인해 자동차 보유 수가 급증하였다. 1923년 12,765대였던 자가용 수는 1924년 24,333대,[222] 1926년 40,070대로[223] 가파르게 증가했다. 1929년 세계 대공황 등 불황에도 불구하고 자가용 보유 수는 꾸준히 늘어났다.한편,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불황을 겪던 일본 경제는 지진 이후 진재수표 문제와 부흥 자재 수입 초과 문제 등으로 경제 침체가 더욱 심화되어, 이후 쇼와 공황이라는 장기 불황에 빠져들었다. 지진 직후인 9월 7일에는 긴급칙령으로 모라토리엄(지불유예령)이 발령되었고, 29일에는 진재수표할인 손실보상령이 내려져 일본 정부가 진재어음 손실을 보상해주기로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불량채권까지 동일하게 보상되면서 채권 및 수표 처리에 문제가 발생했고, 이는 1927년 쇼와 금융공황의 원인이 되었다.
진재 부흥 사업으로 지어진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도준카이 아파트, 히지리바시, 부흥소학교, 부흥도로, 진재부흥공원, 스미다강 진재부흥교, 구단시타 빌딩 등이 있다. 또한 지진 이후 부흥의 상징으로, 지진 전에는 바다였던 곳을 자갈과 모래로 매립하여 야마시타 공원을 조성했다. 이 공원은 1935년 "부흥 기념 요코하마 대박람회"의 주요 장소로 사용되었다. 공원 안에는 1939년 인도 상인 조합이 요코하마 시민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지은 급수탑인 인도 수탑이 세워졌다. 이는 당시 일본에 거주하던 인도인들의 사업 부활을 위해 저리 융자 및 상가 재건 등을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현재 이 식수대는 사용되지 않지만, 이슬람 모스크 양식의 지붕을 가진 건축물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224]
요코스카 군항에서는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 따라 순양전함에서 항공모함으로 개조 중이던 아마기급 순양전함 아마기[225]가 간토대지진으로 용골이 손상되어 수리 불능 판정을 받았다.[226] 이에 따라 해체 예정이었던 가가급 전함 가가가 대신 항공모함으로 개조되었다.[226][227] 가가와 아마기의 자매함 아카기는 모두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이 운용하였다.
9월 27일, 고토 신페이를 총재로 하는 제도부흥원이 세워져 제도부흥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했다. 이 계획은 재해 지역 국가 매입, 자동차 시대를 대비한 폭 100m 도로 계획, 중요 인프라의 공동구화 등 현대적 도시계획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경제 상황과 정당 간의 대립으로 예산이 대폭 축소되어 원안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고토의 안에서는 30억엔이 필요했으나 최종적으로는 5억엔이 살짝 넘는 수준까지 삭감되어 통과되었다. 또한, 토지 매입 결정에 대해 간다스루가다이 주민들이 반발하기도 했다. 이처럼 부흥 계획이 축소된 것은 훗날 도쿄 대공습 당시 화재 확산이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고도경제성장기 자동차 사회 대응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도로 계획 축소는 이후 수도고속도로 건설 시 부흥 공원 부지를 잠식하거나 도로 중앙분리대 녹지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1930년(쇼와 5년) 3월 24일, 쇼와 천황은 부흥 및 복구 작업을 마친 도쿄를 순행하였다.[229] 26일에는 니주바시 앞 광장에서 제국수도부흥제가 열렸다.[230] 같은 해 8월에는 제도부흥기념장이 제정되어(1930년 8월 13일 칙령 제148호 "제도부흥기념장령" 제1조[231]) 제도부흥사업에 직접적으로 혹은 이에 수반하는 사무에 관여한 자에게 기념장이 수여되었다.
1960년 간토 대지진이 있었던 9월 1일을 방재의 날로 정하여 일본 정부를 중심으로 매년 이 날에 방제훈련이 진행된다. 다만 미야기현 해역 지진 등을 겪는 미야기현과 사쿠라지마섬이 있는 가고시마현 같이 독자적으로 별도의 방재의 날을 정해 그 날에 방재훈련을 진행하는 현도 있다.
5. 3. 도시 계획 변화
야마모토 곤노효에 내각은 지진 직후 고토 신페이를 총재로 하는 제도부흥원을 설치하고 제도부흥계획에 착수했다. 이 계획은 에도 시대부터 이어져 온 도쿄의 낡은 도시 구조를 근대적으로 개편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도로를 넓히고 복잡한 시가지를 구획 정리하는 등 대대적인 인프라 정비가 추진되었다.고토 신페이가 구상한 원안은 매우 혁신적이었다. 재해 지역 전체를 국가가 매입하고, 다가올 자동차 시대를 대비해 폭 100m의 도로를 건설하며, 전기, 수도 등 중요 인프라를 공동구에 통합 관리하는 등 21세기 기준으로도 이상적인 도시 계획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경제 상황과 정당 간의 대립으로 인해 예산은 원래 필요했던 30억 엔에서 5억 엔 남짓으로 대폭 삭감되었다. 또한 간다스루가다이 주민들이 토지 매입에 반발하는 등 계획 추진에 어려움이 따랐다. 결국 원안대로의 실현은 불가능했고, 축소된 계획은 훗날 도쿄 대공습 당시 화재 확산 방식이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고도경제성장기 자동차 사회 문제에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수도고속도로 건설 시 부흥 계획으로 확보된 공원 부지나 도로 녹지대가 상당 부분 활용되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부흥 사업을 통해 도준카이 아파트, 히지리바시, 부흥소학교, 부흥도로, 진재부흥공원, 스미다강의 여러 다리(진재부흥교), 구단시타 빌딩 등 새로운 도시 기반 시설과 건축물이 들어섰다. 특히 지진 전에는 바다였던 곳을 잔해 등으로 매립하여 조성한 야마시타 공원은 부흥의 상징적인 공간이 되었다.
한편, 지진으로 시영 전차 등 기존 대중교통 시스템이 마비되면서 자가용이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부상했다. 자동차 보유 대수는 1923년 12,765대에서 1924년 24,333대,[222] 1926년에는 40,070대로 급증했다.[223] 도쿄시는 교통 공백을 메우기 위해 T형 포드 약 800대를 수입하여 버스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는 '엔타로 버스'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전국적인 버스 사업 확산의 계기가 되었다.[18][19] 이와 함께 수입 트럭을 이용한 화물 운송도 활발해져, 일본 사회의 본격적인 모터리제이션 시대를 열었다.[19] 전화망 역시 자동 교환기 방식으로 전환되어 보급되었다.[20]
1930년 3월, 쇼와 천황은 복구가 완료된 도쿄를 순행했으며,[229] 니주바시 앞 광장에서는 제국수도부흥제가 열렸다.[230] 같은 해 8월에는 부흥 사업 관련자들에게 제도부흥기념장이 수여되었다.
간토 대진재의 경험은 재난 대비의 중요성을 일깨워, 지진 발생일인 9월 1일은 방재의 날로 지정되어 매년 방제훈련이 실시되고 있다.
5. 3. 1. 내진 설계 도입
간토 대진재로 벽돌 건물이 대부분 무너졌고, 철근 콘크리트 건물 역시 피해를 보았다. 지진 발생 몇 년 전부터 짓기 시작한 철근 콘크리트 건물 중 건설 중이던 내외빌딩이 붕괴했으며, 일본공업클럽과 마루노우치 빌딩도 절반가량 파괴되는 등 피해가 컸다. 그러나 나이토 다추가 설계하여 지진 발생 3개월 전에 완공된 일본흥업은행 본점 건물은 거의 손상되지 않아, 이를 계기로 내진 설계의 중요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이미 1919년에 공포되어 1920년부터 시행 중이던 시가지건축물법은 1924년에 개정되어 일본 최초의 법적 내진 설계 기준을 포함하게 되었다. 이 법은 이후 건축기준법의 기초가 되었다. 1925년에는 내진 및 내화 건축 분야를 선도하게 된 윌리엄 메렐 보리스 건축사무소가 설계한 슈후노토모샤 본사 건물(현 오차노미즈 스퀘어)이 준공되었고, 일본 최초의 서양식 아파트인 오차노미즈 문화 아파트 등도 건설되었다.[246]
한편, 지진으로 인한 화재 사망자가 많았기 때문에 불에 타기 쉬운 목조 건물이 밀집된 좁은 골목길을 정비하는 '도시 불연화(不燃化)'가 추진되었다. 복잡한 거리를 구획 정리하고, 불에 잘 타지 않는 건물을 곳곳에 배치하며, 넓은 도로나 공원을 만들어 화재 확산을 막으려 했다. 이는 나이토 다추와 대립했던 사노 도시키 등이 주장한 개념으로, 후에 고토 신페이가 제도부흥계획을 통해 구체화했다.
철도성 역시 지진으로 많은 목조 객차가 불탄 것을 교훈 삼아 더 안전한 철제 객차 도입을 추진했다. 특히 1926년 9월 발생한 산요 본선 특급열차 탈선 사고에서 목조 객차가 파괴되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1927년부터 발주하는 모든 신형 전동차와 객차는 철제 차체로 전면 전환하게 되었다.[247]
5. 3. 2. 불연화 추진
대지진으로 벽돌 건물이 대부분 붕괴되었으며, 철근 콘크리트 건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건설 중이던 내외빌딩이 붕괴하고 일본공업클럽과 마루노우치 빌딩 등도 반파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지진 발생 3개월 전에 완공된 나이토 다추 설계의 일본흥업은행 본점은 거의 손상되지 않아, 내진 설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기존에 시행 중이던 시가지건축물법(1919년 공표, 1920년 시행)은 1924년에 개정되어 일본 최초의 법적 내진설계 기준을 포함하게 되었다. 이 법은 이후 건축기준법의 토대가 되었다. 1925년에는 내진 및 내화 건축 분야를 선도한 윌리엄 메렐 보리스 건축사무소가 설계한 슈후노토모샤 본사 건물(현 오차노미즈 스퀘어)이 준공되기도 하였다.[246]
한편, 지진 재해 당시 화재로 인한 사망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점을 교훈 삼아 도시 자체의 '불연화(不燃化)'가 추진되었다. 이는 화재에 취약한 목조 건물이 밀집된 좁은 골목길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구획 정리를 실시하고, 내화성 건물을 배치하며, 넓은 도로나 공원을 조성하여 화재 확산을 막으려는 계획이었다. 이러한 도시 불연화 구상은 사노 도시키 등이 주장하였고, 고토 신페이가 제도부흥계획을 통해 구체화시켰다.
철도성 또한 지진으로 수많은 목조 객차가 불타버린 경험을 바탕으로 안전성이 높은 철제 객차 도입을 추진하였다. 1926년 9월 산요 본선 특급열차 탈선 사고에서 목조 객차의 취약성이 다시 한번 드러나자, 1927년부터 발주되는 모든 신형 전차와 객차는 전면적으로 철제 차체를 채택하게 되었다.[247]
5. 4. 인구 이동
지진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도쿄와 요코하마 등지에서 대규모 인구 이동이 발생했다. 도쿄시 내에서만 약 60%의 가옥이 피해를 입어 수많은 주민이 집을 잃고 인근 피난소로 몰려들었다.[22] 지진 직후인 9월 5일 조사에 따르면, 도쿄시 내에는 1만 2천 명 이상을 수용하는 집단 피난소가 160곳에 달했으며, 주로 사찰(59곳)과 학교(42곳)가 피난소로 활용되었다.[22]정부 차원에서도 피난민 구호를 위해 메이지 신궁 외원, 궁성 앞 광장 등에 군용 텐트를 설치했으며, 9월 4일부터는 내무성과 도쿄부가 주도하여 가설 주택(바락) 건설을 시작했다.[23] 관서 지방의 행정 단위, 재벌, 종교 단체 등 민간에서도 적극적으로 바락 건설에 참여하여 메이지 신궁이나 히비야 공원 등에는 단기간에 수천 명 규모의 바락촌이 형성되었다.[23] 11월 15일 조사 기준으로 시·구에서 관리하는 바락은 101곳, 약 8만 7천 명을 수용했다.[23] 그러나 좁은 공간에 피난민이 밀집하면서 위생 및 치안 문제가 발생하고 일부 지역은 슬럼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24] 이에 따라 다음 해부터 정부는 바락 철거 계획을 추진했으며, 철거민들을 위해 쓰키시마, 산노와, 후카가와구, 사루에, 와다호리, 오구, 오지 등지에 소규모 주택 단지를 조성했다.[25] 또한 의연금으로 설립된 재단법인 도준회도 주택 건설 사업을 진행했다.
한편, 도쿄의 극심한 피해로 인해 내무성은 피난민들을 지방으로 분산 수용하도록 지시했으며, 이에 따라 최대 100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도쿄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소개했다.[26] 지진 발생 두 달이 지난 11월 15일 시점에도 여전히 약 78만 명이 도쿄와 가나가와현 이외의 지역에 피난 상태로 남아 있었다.[26] 이러한 대규모 인구 이동은 지진 이후 일본 사회의 인구 분포와 도시 구조에 큰 영향을 미쳤다.
5. 4. 1. 도쿄와 요코하마에서의 인구 유출
지진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도쿄와 요코하마 시가지에서는 인구가 교외로 유출되어 이주하는 현상이 잇따랐다. 지진 발생 전 해인 1922년에 분양을 시작한 전원도시 회사의 센조쿠 전원도시 주택지와 하코네 토지의 메지로 문화촌은 지진 피해가 적어 지진 이후 인구가 급증했다. 또한 도키와다이나 구니타치 학원도시 등 교외 주택 개발이 이어지면서, 교외에 거주하며 도심으로 출퇴근하는 것이 하나의 사회적 지위처럼 여겨지기도 했다.한편, 오사카시는 도쿄와 요코하마에서 온 이주민들로 인해 인구가 급증하여 한때 도쿄를 제치고 일본 최대 인구 도시가 되었다. (이는 1925년 오사카시가 인근 히가시나리군 및 니시나리군 전역을 편입하여 시 면적이 확장된 영향도 있다.) 나고야시, 교토시, 고베시 역시 간토 지역 이주민 유입으로 일시적인 인구 증가를 겪었다. 이러한 인구 분포 변화는 1932년 도쿄시가 주변 지역을 편입하여 행정구역을 확장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5. 4. 2. 오사카 등 타 도시로의 인구 유입
지진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도쿄와 요코하마 시가지에서는 인구가 유출되어 교외로 이주하는 현상이 잇따라 일어났다. 지진 발생 전 해인 1922년에 분양을 시작했던 센조쿠 전원도시 주택지와 메지로 문화촌 등은 지진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지진 이후 이주민이 몰리면서 인구가 급증하였다. 또한 도키와다이나 구니타치 학원도시 같은 교외 주택 개발이 활발해지면서, 교외에 거주하며 도심으로 출퇴근하는 생활 양식이 확산되었다.한편, 오사카는 도쿄와 요코하마에서 온 이주자들이 더해지면서 인구가 급증하여 한때 도쿄를 제치고 일본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가 되기도 하였다. 나고야, 교토, 고베 등 다른 주요 도시들도 간토 지역 이주자로 인해 일시적으로 인구가 증가했다. 이러한 인구 분포 변화는 1932년 도쿄시가 주변 지역을 편입하여 행정 구역을 확장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6. 국제 사회의 반응
간토 대지진의 참상이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여러 국가에서 구호품, 성금, 의료 물자 등 다양한 형태의 지원 의사를 표명했다.[232] 특히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으로 함께 싸웠던 미국은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대규모 지원을 제공했으며,[233] 대영제국을 비롯한 영국령 인도 제국, 캐나다, 프랑스, 벨기에 등 많은 국가들이 구호 물자와 성금을 보냈다.[235][236] 미국과 영국의 군함은 구호물자 수송과 피난민 이송에 동원되기도 했다.[237][238]
지진으로 기존 통신망이 마비된 상황에서, 후쿠시마현의 이와키 국제무선전신국 하라마치 송신소에서 발신한 장파 무선이 유일한 해외 통신 수단이 되어 피해 상황을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39][240] 국제 사회의 이러한 동정과 지원에 대해 일본 귀족원과 중의원은 1923년 말 감사를 표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6. 1. 구호 및 지원
간토 대지진의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 대영제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구호품, 성금, 의료 물자 등 다양한 형태의 지원 의사를 밝혔다.[232][235][236]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국으로 함께 싸웠던 미국의 지원이 가장 많았으며,[233] 미국과 영국의 군함은 구호물자 수송 및 피난민 이송에 동원되기도 했다.[237][238]
지진으로 인해 해저 케이블 등 기존 통신망이 마비된 상황에서, 후쿠시마현의 이와키 국제무선전신국 하라마치 송신소에서 발신한 장파 무선이 유일하게 해외로 소식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었다. 이를 통해 미국의 무선국과 교신하여 피해 상황을 알렸고, 이는 비상시 무선 통신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239][240] 이 전보는 우연히 중국 베이징의 무선국에도 감청되어 중국과 유럽에도 지진 소식이 전파되었다.
6. 1. 1. 주요 지원 국가 및 단체
일본에서의 지진 소식이 전해지면서, 많은 국가에서 구호나 성금, 의료 물자 제공 신청이 이어졌다.[232]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국으로 함께 싸웠던 미국의 지원이 가장 많았으며,[233] 미국 측은 "사양하지 말고 희망하는 물품을 신청하라"라고 안내하기도 하였다.[234] 미국과 대영제국에서 가장 많은 성금이 보내졌으며, 그 외에도 영국령 인도 제국, 오스트리아, 캐나다, 독일, 프랑스, 벨기에, 페루, 멕시코 등 여러 국가에서 구호 물자나 성금을 보냈다.[235][236] 미국이나 영국 군함이 구호물자와 피난민을 수송하는 역할도 담당했다.[237][238]
당시 해외 통신 수단은 제한적이었으나, 일본은 장파 무선을 이용해 이와키 국제무선전신국 하라마치 송신소를 통해 미국으로 지진 소식을 전달했다. 이는 무선 전신이 비상시 정보 전달에 유효함을 보여준 첫 사례였다. 지진으로 해저 케이블이 끊어져 장파 무선만이 유일한 통신 수단으로 남았는데, 후쿠시마현의 이와키 국제무선전신국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아 간토 지역의 피해 상황을 수신할 수 있었다. 전화 등이 불통인 상황에서 국내용 무선 전보를 수신하기 위해 기계를 개조하여 정보를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미국에 긴급 전보를 발신했다. 이 긴급 전보는 우연히 일본이 중국 베이징에 시험 중이던 무선국에 감청되어 중국과 유럽에도 지진 정보가 전파되었다. 결과적으로 이와키 국제무선전신국은 유일한 해외 연락망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당시 전신국 국장이었던 요네무라 가이치로는 설비 부족과 비상 통신 체계 미비를 아쉬워했다고 전해진다.[239][240]
지진에 대한 정보가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각국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중화민국'''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이자 당시 중화민국의 청나라 소조정 수장이었던 푸이는 간토 대지진 소식에 깊은 슬픔을 표했다고 한다.[241] 푸이는 일본에 기부금을 전달할 의사를 밝혔으며, 자금성 내 소장품 중 방대한 양의 보석을 일본 측 특명전권공사 요시자와 겐키치에게 기증하여 현금화한 뒤 성금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일본 정부는 이 보석을 환전하는 대신, 20만달러 상당의 평가액과 동일한 금액을 일본 황실 예산에서 마련하고 보석은 황실 재산으로 보관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1923년 11월, 일본 정부는 푸이에게 대표단을 보내 감사의 뜻을 전했다.[241]
푸이의 교사였던 레지널드 존스턴은 푸이가 훗날 일본의 도움으로 만주국 황제가 되지만, 1923년 당시의 기부는 정치적 동기 없이 순수한 동정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평가했다.[242]
'''미국'''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과 함께 연합국으로 참전했던 미국은 민간과 정부 차원에서 대규모 지원을 펼쳤다. "수 분이 생사를 가른다"(Minutes make lives)라는 유명한 표어가 이때 등장했다. 미국 전역에서 지진 피해 복구를 위한 모금 운동이 이어졌고, 당시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 제도 배타정부에 주둔하던 미국 육군 기지에서도 다양한 물자를 지원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지도자 중 한 명인 마커스 가비도 다이쇼 천황에게 위로 전문을 보내고 모금 운동을 벌였다. 또한 미국 해군은 미국 아시아 함대를 파견하여 피란민과 구호 물자 수송을 도왔다.
미 해군 중 주요 대일 지원 함정은 다음과 같다.[243]
- 장갑순양함 : USS 사우스다코타
- 구축함 : USS 스튜어트, USS 스미스 톰슨, USS 베이커, USS 트레이시, USS 존 D. 에드워드, USS 휘플, USS 헐버트, USS 윌리엄 B. 프레스턴, USS 프레블, USS 노아
- 구축함모함 : USS 블랙 호크
- 수송선 : 메리트(Merrit), 애버레다(Abareda), 베가(Vega)
- 보급함 : USS 페코스
'''벨기에'''
지진 발생 직후 벨기에 정부는 "일본인 이재민 구호 벨기에 국내위원회"를 설립하고, 벨기에 왕실과 벨기에 적십자사를 통해 일본을 지원했다. 민간에서도 모금 활동, 콘서트, 바자회 등을 통해 모인 수익금을 위원회에 기부했다.
9월 3일,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열린 제4차 국제연맹 총회에서는 간토 대지진 피해에 대한 동정 결의와 함께 각국이 일본 제국도서관에 서적을 기증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은 각국 대표들이 개인적으로 모금한 자금도 전달받았다.
전 세계 개인, 기업, 도시, 기관, 국가에서 제공된 원조는 1923년 10월 이후 일본 정부가 정리한 "우리 진재에 대한 여러 국가의 동정 및 구원 기록"(我震災に対する諸外国の同情及救援の記録)이라는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 책자에는 일본 정부 관계자들의 감사의 말이 담겨 있다.
: 이번의 대진재에 대해 세계 여러 나라가 우리 국민에게 나타내 준 열렬한 동정은 이 정도로 두터울 수 있는 것인지, 그저 놀라움과 감사함만 나타낼 뿐이다. 이러한 때에 세계 여러 국민의 깊고 두터운 마음을 충분히 인식함과 동시에 일반 국민에게 국제적 정신을 고양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다.
:: -- 도쿄고등사범학교 교수 도모에다 다카히코의 『국제적 정신 요청』
: 우리나라의 이번 지진에 대해 각국 국민의 동정은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강대국은 물론이요 쿠바, 산마리노 등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매우 활발하며 각각 그에게 맞는 도움을 주고 있다. … 우리는 이 외국의 깊은 동정에 감사를 표한다.
:: -- 문부대신 오카노 게이지로의 『국제교육의 필요성』
: 일본에 대한 각국 국민의 진지하고 이를 데가 없는 동정 사실을 듣고 감격의 마음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 이번에 각국에서 들어 온 동정에 관해서는 깊이 이를 기념하여 훗날 우방국에서 불행한 일이 생길 경우에 극렬히 이에 보답할 각오를 평소부터 해두어야 한다.
:: -- 외무대신 이주인 히코키치의 『대진재와 외국의 동정』
: 지나(중국)은 마침 한창 배일운동을 하던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재 소식이 한 번 전해지자 남북을 통틀어 어제의 배일론자가 곧바로 오늘의 후원자가 되었다. … 또 미국은 대통령 캘빈 쿨리지가 9월 3일 교서를 내 일본의 대지진에 대해 동정을 표명하고 미국민에게 일본 구제 기부금 응모를 선전하자 전미가 동정을 모여 예정액이었던 1,000만 엔을 넘기고 이미 1,600만 엔을 달성하기에 이르렀다. 그 밖에도 미국 적십자사나 각종 단체의 활동은 자신한테 재난이 닥친 것처럼 진실한 노력들로 이루어졌다. 기부금 이외에도 의복, 식료품, 건축자재 등 … 그 밖에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인도 등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의 나라도 전보나 기타 위문, 비슷한 자본을 보내어 우리 국민의 불행을 도와주었다.
:: --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국제 공조 정신의 현현』
이러한 국제 사회의 원조 활동에 대해 1923년 11월 11일 일본 귀족원이, 12월 13일 중의원이 감사를 표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또한 1930년에는 "시민의 사은심을 전하는 우아한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양가의 자녀" 5명(아시노 기미, 도쿠다 준코, 사토 요시코, 마쓰다이라 요시코, 나카무라 게이코)과 감독자 마쓰다이라 도시코가 선발되어 미국에 답례사절단으로 파견되었다.[245]
6. 1. 2. 지원 물품 및 성금
일본에서의 지진 소식이 전해지면서, 많은 국가에서 구호품, 성금, 의료 물자 제공 의사를 밝혔다.[232]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국으로 함께 싸웠던 미국의 지원이 가장 많았으며,[233] 미국은 "사양하지 말고 희망하는 물품을 신청하라"고 안내하기도 하였다.[234] 미국과 대영제국에서 가장 많은 성금이 보내졌으며, 그 외에도 영국령 인도 제국, 오스트리아, 캐나다, 독일, 프랑스, 벨기에, 페루, 멕시코 등 여러 나라에서 구호 물자나 성금을 보냈다.[235][236] 미국이나 영국 군함이 구호물자와 피난민을 실어 나르기도 하였다.[237][238]
당시 해외 통신은 주로 해저 케이블이나 장파 무선을 이용했는데, 지진으로 해저 케이블이 끊어지면서 후쿠시마현의 이와키 국제무선전신국 하라마치 송신소에서 보낸 장파 무선만이 유일한 통신 수단으로 남았다. 이 무선 전신을 통해 미국으로 지진 소식이 전달되면서, 비상시 무선 통신의 중요성이 처음으로 입증되었다. 전화 등 다른 통신 수단이 모두 불통인 상황에서, 이와키 국제무선전신국은 긴급하게 국내용 무선 전보 수신 장비를 개조하여 정보를 얻고 미국으로 긴급 전보를 발신했다. 이 긴급 전보는 우연히 일본이 중국 베이징에 시험 중이던 무선국에 감청되어 중국과 유럽에도 지진 소식이 전파되었다. 결과적으로 이와키 국제무선전신국은 유일한 해외 정보 연락망으로서 큰 역할을 했지만, 당시 국장이었던 요네무라 가이치로는 "훌륭한 활약을 하였으나 일본에서 이와키 한 곳에서만 국제 통신을 할 수밖에 없었던 설비 부족 및 비상시의 통신체제에 대해 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던 것이 후회된다"라고 술회했다.[239][240]
지진에 대한 정보가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각국의 반응과 지원은 다음과 같았다.
;중화민국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이자 당시 중화민국의 청나라 소조정 황제였던 푸이는 간토 대지진 소식에 깊은 슬픔을 표했다.[241] 푸이는 일본에 기부금을 전달할 의사를 밝히고, 자금성 내 소장품 중 보석들을 보내 환금하여 성금으로 사용하도록 일본 공사 요시자와 겐키치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보석을 환전하는 대신, 20만달러 상당의 평가액과 동일한 금액을 일본 황실 예산으로 마련하고 보석은 황실 재산으로 보관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1923년 11월, 일본 정부는 푸이에게 대표단을 보내 감사의 뜻을 전했다.[241] 푸이의 교사였던 레지널드 존스턴은 당시 푸이의 기부가 정치적 동기 없이 순수한 동정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평가했다.[242]
;미국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과 함께 연합국 측으로 같이 활약하던 미국은 민간 및 정부 양측에서 대규모로 지원하였다. 당시 유명한 표어였던 "수 분이 생사를 가른다"(Minutes make lives)라는 말은 이 때부터 등장하였다. 미국 전역에서 지진 피해에 대한 모금 운동이 잇다랐으며 당시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 제도 배타정부(Insular Government of the Philippine Islands)에 있던 미국 육군 기지에서도 다양한 물자를 보내주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마커스 가비도 다이쇼 천황에게 전보를 보내고 모금 운동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미국 해군은 미국 아시아 함대를 파견하여 피란민과 물자 수송에 도움을 주었다.
함종 | 함명 |
---|---|
장갑순양함 | USS 사우스다코타 |
구축함 | USS 스튜워트, USS 스미스 톰슨, USS 배이커, USS 트래시, USS 존 D. 에드워드, USS 휘플, USS 헐버트, USS 윌리엄 B. 프레스턴, USS 프레블, USS 노아 |
구축함모함 | USS 블랙 호크 |
수송선 | 메리트(Merrit), 애배레다(Abareda), 베가(Vega) |
보급함 | USS 페코즈 |
;벨기에
지진 직후 벨기에 정부는 "일본인 이재민 구호 벨기에 국내위원회"를 세우고 벨기에 왕실 내 인원과 벨기에 적십자에서 일본을 지원하였다. 민간에서도 모금 활동과 콘서트, 바자회 등을 통해 얻은 수익금으로 위의 위원회를 통해 기부하였다.
1923년 9월 3일,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제4차 국제연맹 총회가 열렸다. 이 총회에서는 간토 대지진 재해를 동정하는 총의 및 각국이 일본 제국도서관에 서적을 기증한다는 결의가 통과되었으며 일본은 각국 대표로부터 개인적으로 모금된 자금도 받았다.
전 세계에서 개인, 기업, 도시, 기관, 국가에서 제공된 원조는 10월 이후부터 일본 정부가 정리한 "우리 진재에 대한 여러 국가의 동정 및 구원 기록"(我震災に対する諸外国の同情及救援の記録)이라는 문서로 정리되어 있다. 이 목록을 정리한 책자에는 일본 정부 관계자의 아래와 같은 여러 감사의 말이 적혀 있다.
:> ''이번의 대진재에 대해 세계 여러 나라가 우리 국민에게 나타내 준 열렬한 동정은 이 정도로 두터울 수 있는 것인지, 그저 놀라움과 감사함만 나타낼 뿐이다. 이러한 때에 세계 여러 국민의 깊고 두터운 마음을 충분히 인식함과 동시에 일반 국민에게 국제적 정신을 고양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다.''
:> — 도쿄고등사범학교 교수 도모에다 다카히코의 『국제적 정신 요청』
:> ''우리나라의 이번 지진에 대해 각국 국민의 동정은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강대국은 물론이요 쿠바, 산마리노 등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매우 활발하며 각각 그에게 맞는 도움을 주고 있다. … 우리는 이 외국의 깊은 동정에 감사를 표한다.''
:> — 문부대신 오카노 게이지로의 『국제교육의 필요성』
:> ''일본에 대한 각국 국민의 진지하고 이를 데가 없는 동정 사실을 듣고 감격의 마음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 이번에 각국에서 들어 온 동정에 관해서는 깊이 이를 기념하여 훗날 우방국에서 불행한 일이 생길 경우에 극렬히 이에 보답할 각오를 평소부터 해두어야 한다.''
:> — 외무대신 이주인 히코키치의 『대진재와 외국의 동정』
:> ''지나(중국)은 마침 한창 배일운동을 하던 중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진재소식이 한 번 전해지자 남북을 통틀어 어제의 배일론자가 곧바로 오늘의 후원자가 되었다. … 또 미국은 대통령 캘빈 쿨리지가 9월 3일 교서를 내 일본의 대지진에 대해 동정을 표명하고 미국민에게 일본구제기부금 응모를 선전하자 전미가 동정을 모여 예정액이었던 1000만엔을 넘기고 이미 1600만엔을 달성하기에 이르었다. 그 밖에도 미국 적십자사나 각종 단체의 활동은 자신한테 재난이 닥친 것처럼 진실한 노력들로 이루어졌다. 기부금 이외에도 의복, 식료품, 건축자재 등 … 그 밖에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인도 등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의 나라도 전보나 기타 위문, 비슷한 자본을 보내어 우리 국민의 불행을 도와주었다.''
:> —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국제 공조 정신의 현현』
이러한 개인이나 단체로부터의 원조 활동에 대해 1923년 11월 11일 귀족원이, 12월 13일 중의원이 사의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또한 1930년에는 "시민의 사은심을 전하는 우아한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양가의 자녀" 5명, 아시노 기미, 도쿠다 준코, 사토 요시코, 마쓰다이라 요시코, 나카무라 게이코, 감독자 마쓰다이라 도시코가 선발되어 미국으로 견미답례사로 파견되었다.[245]
6. 2. 국제 관계에 미친 영향
일본에서의 지진 소식이 전해지면서, 많은 국가에서 구호나 성금, 의료 물자 제공 신청이 이어졌다.[232]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국으로 함께 싸웠던 미국의 지원이 가장 많았으며,[233] 미국은 일본 측에 "사양하지 말고 희망하는 물품을 신청하라"고 안내하기도 하였다.[234] 미국과 대영제국에서 가장 많은 성금이 보내졌으며, 그 외에도 영국령 인도 제국, 오스트리아, 캐나다, 독일, 프랑스, 벨기에, 페루, 멕시코 등 여러 나라에서 구호 물자나 성금을 보냈다.[235][236] 미국이나 영국 군함은 구호물자 수송과 피난민 이송에 동원되기도 하였다.[237][238]
당시 해외로 소식을 전달하는 통신 수단은 실용적이지 않았으나, 일본은 이와키 국제무선전신국 하라마치 송신소를 통해 장파 무선으로 미국에 지진 소식을 보냈다. 이는 무선 전신을 통한 비상 정보 전달의 유효성을 처음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지진으로 일본과 미국을 잇는 해저 케이블이 끊어지면서, 유일하게 남은 통신 수단은 후쿠시마현의 이와키 국제무선전신국뿐이었다. 이 전신국은 지진 피해가 크지 않았지만, 간토 지역의 막대한 피해 소식을 간간이 접하고 있었다. 전화 등이 모두 불통인 상황에서, 직원들은 급히 국내용 무선 전보 수신을 위해 기계를 개조하여 정보를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미국에 긴급 전보를 발신했다. 이 긴급 전보는 우연히 일본이 중국 베이징에 건설 중이던 시험 무선국에 감청되었고, 이를 통해 지진 정보가 중국과 유럽에도 전파되었다. 결과적으로 이와키 국제무선전신국은 유일한 해외 정보 연락망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당시 전신국 국장이었던 요네무라 가이치로는 "훌륭한 활약을 했지만, 일본에서 이와키 한 곳에서만 국제 통신이 가능했던 설비 부족과 비상시 통신 체계 대비 미비는 후회스러운 점"이라고 술회했다.[239][240]
지진에 대한 정보가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각국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중화민국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이자 당시 중화민국 내 청나라 소조정의 수장이었던 푸이는 간토 대지진 소식에 깊은 슬픔을 표했다.[241] 그는 일본에 기부 의사를 밝히고, 자금성에 소장하고 있던 보석들을 일본 측 특명전권공사 요시자와 겐키치에게 전달하여 현금화한 뒤 성금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일본 정부는 이 보석들을 환전하지 않고, 20만달러 상당의 평가액과 동일한 금액을 일본 황실 예산으로 마련했으며, 보석은 황실 재산으로 보관하기로 결정했다. 1923년 11월, 일본 정부는 푸이에게 대표단을 보내 감사의 뜻을 전했다.[241] 푸이는 이후 일본의 도움으로 만주국 황제로 즉위하게 되지만, 그의 교사였던 레지널드 존스턴은 1923년 당시 푸이의 기부는 정치적 동기 없이 순수한 동정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평가했다.[242]
;미국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과 연합국으로 함께 싸웠던 미국은 민간과 정부 차원에서 대규모 지원을 제공했다. 당시 유명했던 표어 "수 분이 생사를 가른다"(영어: Minutes make lives)는 이때 등장했다. 미국 전역에서 지진 피해 복구를 위한 모금 운동이 이어졌고, 당시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 제도 배타정부의 미국 육군 기지에서도 다양한 물자를 지원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지도자 중 한 명인 마커스 가비도 다이쇼 천황에게 위로 전문을 보내고 모금 운동을 벌였다. 미국 해군은 미국 아시아 함대를 파견하여 피란민과 물자 수송을 도왔다.
함종 | 함명 |
---|---|
장갑순양함 | USS 사우스다코타 |
구축함 | USS 스튜어트, USS 스미스 톰슨, USS 베이커, USS 트레이시, USS 존 D. 에드워드, USS 휘플, USS 헐버트, USS 윌리엄 B. 프레스턴, USS 프레블, USS 노아 |
구축함모함 | USS 블랙 호크 |
수송선 | 메리트(Merrit), 애배레다(Abareda), 베가(Vega) |
보급함 | USS 페코스 |
출처: [243]
;벨기에
지진 발생 직후 벨기에 정부는 "일본인 이재민 구호 벨기에 국내위원회"를 설립하고, 벨기에 왕실과 벨기에 적십자사를 통해 일본을 지원했다. 민간에서도 모금 활동, 콘서트, 바자회 등을 통해 얻은 수익금을 위원회에 기부했다.
간토 대지진 당시 발생한 조선인 학살 사건은 이후 한일 간의 역사 인식 문제로 이어지기도 했다.
요코하마시 시립 중학교 부독본에서는 간토 대지진 당시 유언비어 확산과 조선인 살해에 대한 내용이 논란이 되었다. 2011년, 기존의 "자경단 중에 조선인을 살해하는 이로 치닫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표현이 "군대나 경찰, 자경단 등은 조선인을 박해하고 학살했다. 요코하마에서도 각지에서 자경단이 조성되어 조선인이나 중국인이 학살당하는 일이 일어났다"로 수정되었다.[252][253] 이러한 수정은 일본 내에서도 논란을 일으켰고, 시의회에서 문제가 제기되자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는 "요코하마에서도 군대나 경찰이 학살을 했다고 오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2012년 9월 당시 지도과장을 계고 처분하고, 지도주사들에게는 문서훈계 처분을 내리는 등 논란을 축소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253] 그러나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2016년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는 "조선인, 중국인이 살해되었다"는 내용을 다시 포함하기로 결정했다.[254]
2013년 2월 3일, 대한민국의 기록사진 연구가 정성길은 오카다 고요가 촬영한 사진 중 요시하라 유곽 사망자 사진[255][256]을 간토 대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들의 사진이라고 주장하며 공개했고, 이는 대한민국 내 언론에 보도되었다.[257][258] 하지만 오카다 고요 사진관 측은 이 주장이 불분명한 정보에 기반한 것이라고 반박했다.[255]
7. 영향 및 평가
간토 대지진은 가나가와현 및 도쿄부(현 도쿄도)를 중심으로 인접한 이바라키현, 지바현에서 시즈오카현 동부에 걸친 넓은 지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 재해로 190만 명이 피해를 입었으며, 사망하거나 실종된 사람은 10만 5,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7] 건물 피해는 전파 약 10만 9,000동, 전소 약 21만 2,000동에 달했다.
다른 대지진과 비교했을 때, 간토 대지진은 특히 화재로 인한 사망자(소사)가 많았다.[8] 지진 발생 당시 일본해 연안을 북상하던 태풍의 영향으로 간토 지방에 강풍이 불었고,[9] 이는 목조 주택이 밀집했던 도쿄시 등에서 대규모 화재로 이어졌다. 점심 준비 시간과 겹쳐 부뚜막이나 화로 사용이 많았던 점, 피난 시 대팔차 등에 실은 가연성 가재도구가 화재 확산의 원인이 된 점도 피해를 키웠다.[10][11] 수도관 파열로 소화 작업도 어려워 화재는 3일간 지속되었다.
지진의 직접적인 흔들림으로 인한 건물 붕괴와 압사 피해도 발생했으며, 사가미만 연안부와 보소반도 연안부에서는 높이 10m 이상의 쓰나미가 발생하여 피해를 입혔다. 특히 가마쿠라시 유이가하마에서는 쓰나미로 약 300명이 실종되었고, 즈시, 가마쿠라, 후지사와 연안에는 5m에서 7m 높이의 쓰나미가 도달했다.[31] 가나가와현 산간부에서는 산사태, 절벽 붕괴, 토석류로 인한 가옥 유실 및 매몰 피해가 발생했다.
도쿄의 피해가 크게 보도되었지만, 실제 피해의 중심은 진원 단층이 위치한 가나가와현이었다. 이곳에서는 진동에 의한 건물 붕괴 외에도 액상화 현상에 따른 지반 침하, 절벽 붕괴, 연안부의 쓰나미 피해가 심각했다. 도쿄 아사히 신문, 요미우리 신문, 국민 신문 등 주요 신문사 사옥도 소실되었고, 유일하게 남은 도쿄 히비 신문은 "도쿄 시 전체가 불바다", "니혼바시, 교바시, 시타야, 아사쿠사, 혼조, 후카가와, 간다 거의 전멸", "요코하마시는 전멸" 등 참상을 연일 보도했다. 특히 수만 명의 피난민이 몰렸던 혼조 피복창 터에서는 화재 선풍으로 3만 5천여 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30]
주택 피해 동수 | 사망자・행방불명자 수 | ||||||||||||
---|---|---|---|---|---|---|---|---|---|---|---|---|---|
지역 | 전괴 | 비소실 | 반괴 | 비소실 | 소실 | 유실・매몰 | 합계 | 주택 전괴 | 화재 | 유출・매몰 | 공장 등 | 합계 | |
가나가와현 | 63,577 | 46,621 | 54,035 | 43,047 | 35,412 | 497 | 125,577 | 5,795 | 25,201 | 836 | 1,006 | 32,838 | |
도쿄도 | 24,469 | 11,842 | 29,525 | 17,231 | 176,505 | 2 | 205,580 | 3,546 | 66,521 | 6 | 314 | 70,387 | |
지바현 | 13,767 | 13,444 | 6,093 | 6,030 | 431 | 71 | 19,976 | 1,255 | 59 | 0 | 32 | 1,346 | |
사이타마현 | 4,759 | 4,759 | 4,086 | 4,086 | 0 | 0 | 8,845 | 315 | 0 | 0 | 28 | 343 | |
야마나시현 | 577 | 577 | 2,225 | 2,225 | 0 | 0 | 2,802 | 20 | 0 | 0 | 2 | 22 | |
시즈오카현 | 2,383 | 2,309 | 6,370 | 6,214 | 5 | 731 | 9,259 | 150 | 0 | 171 | 123 | 444 | |
이바라키현 | 141 | 141 | 342 | 342 | 0 | 0 | 483 | 5 | 0 | 0 | 0 | 5 | |
나가노현 | 13 | 13 | 75 | 75 | 0 | 0 | 88 | 0 | 0 | 0 | 0 | 0 | |
도치기현 | 3 | 3 | 1 | 1 | 0 | 0 | 4 | 0 | 0 | 0 | 0 | 0 | |
군마현 | 24 | 24 | 21 | 21 | 0 | 0 | 45 | 0 | 0 | 0 | 0 | 0 | |
합계 | 109,713 | 79,733 | 102,773 | 79,272 | 212,353 | 1,301 | 372,659 | 11,086 | 91,781 | 1,013 | 1,505 | 105,385 |
- '''주석:''' 비소실 전괴・반괴는 소실 및 유출, 매몰의 피해를 입지 않은 동수. 사망자·실종자 수는 2004년경까지 약 14만 명으로 알려졌으나, 이후 연구를 통해 중복 집계 가능성이 제기되어 2006년부터 이과 연표 등에서 10만 5천 명으로 수정되었다.[33]
지진 발생 당시 내각총리대신 가토 도모사부로가 급사한 상태였기 때문에, 외무대신 우치다 야스야가 임시 총리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지진 다음 날인 9월 2일 야마모토 곤베에가 신임 총리로 취임했으며, 정부는 9월 27일 제도부흥원(총재: 고토 신페이)을 설치하여 본격적인 부흥 사업에 착수했다.
경제적으로는 금융 시스템 마비로 지진 재해 어음 문제가 발생하자, 정부는 긴급 칙령으로 모라토리엄(지불유예)을 선언했다. 부흥 자금 마련을 위해 상당액의 외채가 도입되었는데, 그중 절반가량은 당시 도입기였던 화력 발전 사업에 투자되었다. 모건 상회와 로스차일드 가 등이 참여한 지진 재해 선후 처리 공채 발행 규모는 당시 일본 국가 예산의 60%를 넘는 수준이었다.[13][14][15] 이러한 대규모 외채 발행은 일본의 대외 채무를 급증시켰고, 이후 지진 재해 불황, 쇼와 금융 공황, 세계 대공황(쇼와 공황)으로 이어지는 어려운 경제 상황에 악영향을 미쳤다.[16][17]
사회적으로는 도쿄와 요코하마의 막대한 피해로 인해 오사카부나 아이치현 등지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오사카시는 제1차 세계 대전 특수를 바탕으로 경제력을 회복한 상태였고, 1925년 주변 지역 편입으로 인구가 급증하며 세계 6위의 도시로 성장했다. 이는 한신 간 모더니즘 후기의 대오사카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도쿄 시영 전차의 기능 마비를 대체하기 위해 도쿄시가 포드 모델 T 약 800대를 수입하여 버스 사업(엔타로 버스)을 시작하면서[18][19] 전국적으로 버스 운행이 확산되었고, 수입 트럭을 이용한 화물 운송도 시작되어 모터리제이션 시대를 열었다.[19] 전화 자동 교환기 보급도 촉진되었다.[20]
도쿄 시내 가옥의 약 60%가 피해를 입어 많은 주민이 피난길에 올랐다. 9월 5일 기준으로 1만 2천 명 이상이 모인 집단 피난소가 160곳에 달했으며, 주로 사찰(59곳)과 학교(42곳)가 피난소로 활용되었다.[22] 정부와 도쿄부는 메이지 신궁 외원, 궁성 앞 광장 등에 군용 텐트를 설치하고 가설 주택(바락) 건설을 시작했다. 관서 지방 정부, 재벌, 종교 단체 등의 지원으로 메이지 신궁, 히비야 공원 등지에 대규모 바락촌이 형성되었고, 학교 운동장 등에도 소규모 바락이 세워졌다. 11월 15일 조사에서는 공공 관리 바락 101곳에 8만 6천여 명이 거주했다.[23] 그러나 피난민 밀집으로 위생 및 치안 문제가 발생하고 일부 지역이 슬럼화되자[24], 정부는 이듬해부터 바락 철거와 함께 쓰키시마, 산노와, 후카가와구, 사루에, 와다호리, 오구, 오지 등에 소규모 주택 단지를 조성했다.[25] 의연금으로 설립된 재단법인 도준회도 주택 건설에 참여했다. 한편, 내무성은 최대 100만 명에 달하는 이재민을 도쿄 외부 지역으로 소개(疎開, 피난 분산)시켰다.[26]
군은 조직적으로 지진 구호 활동을 전개했다.[27] 당시 언론과 시민들은 "군대가 없었다면 안녕 질서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군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28] 경찰이 소방 및 치안 유지 실패로 위신을 잃은 반면, 군은 치안 유지뿐 아니라 기술력, 동원력, 공정한 구호 활동을 통해 민주주의 의식이 확산되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신뢰를 얻었다.[29] 각지의 재향군인회에서도 8,400명 이상이 구호 활동에 참여했다.[27]
지진 당시의 기록 영상으로는 기록 영화 촬영가 시라이 시게루의 '관동 대진 대화재 실황' 등이 남아 도쿄 국립 근대 미술관 필름 센터 등에 소장되어 있다.[32]
7. 1. 방재의 날 제정
(내용 없음)7. 2. 역사 인식 문제
간토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사건은 역사인식 문제로도 이어졌다.
요코하마시 시립 중학교 부독본에서는 간토 대지진 당시 유언비어 확산과 조선인 살해에 대한 내용이 다뤄졌다. 2011년, 기존의 "자경단 중에 조선인을 살해하는 이로 치닫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서술이 "군대나 경찰, 자경단 등은 조선인을 박해하고 학살했다. 요코하마에서도 각지에서 자경단이 조성되어 조선인이나 중국인이 학살당하는 일이 일어났다."로 수정되었다.[252][253] 그러나 이 수정이 시의회에서 문제가 되자,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는 "요코하마에서도 군대나 경찰이 학살을 했다고 오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2012년 9월 당시 지도과장에게 계고 처분을 내리고, 지도주사들에게는 문서훈계 처분을 했다.[253] 이러한 논란 끝에 2016년,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는 "조선인, 중국인이 살해되었다"는 내용을 다시 포함하여 사용하기로 결정했다.[254]
2013년 2월 3일, 대한민국의 기록사진연구가인 정성길은 오카다 고요가 도쿄부의 위촉을 받아 촬영하고 지진 89일 후 발매한 "다이쇼 대지진 대화재 참상 사진집"과 비매품 앨범에 "요시하라 공원 마노이케 부근"(吉原公園魔ノ池附近일본어)이라 기록된 요시하라 유곽에서의 사망자 사진을 간토 대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의 사진으로 공개하여 대한민국 내에서 보도되기도 하였다.[257][258] 그러나 오카다 고요 사진관 측은 정성길 연구가의 주장에 대해 불분명한 정보라고 반박하였다.[255]
7. 3. 문화적 영향
간토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사건은 역사인식 문제로 이어졌다. 요코하마시 시립 중학교 부독본에서는 2011년, 기존의 "자경단 중에 조선인을 살해하는 이로 치닫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표현을 "군대나 경찰, 자경단 등은 조선인을 박해하고 학살했다. 요코하마에서도 각지에서 자경단이 조성되어 조선인이나 중국인이 학살당하는 일이 일어났다."로 수정하였다.[252][253] 이 수정은 시의회에서 논란이 되었고,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는 "군대나 경찰이 학살을 했다고 오해할 수 있다"며 관련자들을 징계했다.[253] 그러나 2016년,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는 "조선인, 중국인이 살해되었다"는 내용을 다시 포함하기로 결정했다.[254]
2013년 2월, 대한민국의 기록사진 연구가인 정성길은 오카다 고요가 촬영한 요시와라 유곽의 화재 사망자 사진을 간토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희생자들의 사진이라고 주장하며 공개했다.[257][258] 이 사진은 대한민국 내 언론에 보도되었으나, 사진을 소장한 오카다 고요 사진관 측은 정성길의 주장이 불분명한 정보에 기반한 것이라며 부인했다.[255]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지진은 여러 영향을 미쳤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와 같은 간토 지역의 문화예술인들이 간사이 지방으로 대거 이주하면서 한신칸 모더니즘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지진으로 일자리를 잃은 도쿄의 덴푸라 장인들이 일본 전역으로 흩어지면서 에도식 덴푸라가 확산되었다. 간토와 간사이 요리사들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간사이풍 오뎅이 간토 지방에 전해졌고[259], 식당에서 손님이 카운터에 직접 가서 주문하는 문화가 간토 지역에 퍼지는 등 음식과 식생활 문화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지진 재해 이후, 일본 최초의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었다. 피난 경험을 통해 라디오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빠르게 보급되었고, 국위 선양에도 이용되었다.[12]
당시 도쿄 제국 대학 교수였던 테라다 토라히코는 지진 당시의 경험을 상세히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지진의 강렬한 충격과 건물이 흔들리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며, 어린 시절 들었던 안세이 난카이 지진의 기억을 떠올렸다고 적었다. 한편, 주일 프랑스 대사였던 폴 클로델은 피난소에서 목격한 일본인들의 침착함과 질서정연한 모습에 대해 기록하며, "갑작스러운 행동이나 사람을 상처 주는 감정의 폭발로 주변 사람을 귀찮게 하거나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 같은 작은 배를 탄 것처럼 사람들은 모두 가만히 조용히 있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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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추정사진'..누가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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虐殺の主体鮮明に…横浜市教委が中学生用副読本を改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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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学校副読本:誤解招く表現 横浜市教委が処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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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중학 부교재에 간토대지진 '조선인 살해' 내용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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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術館日記: 岡田紅陽が撮影した関東大震災の写真につい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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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大学社会情報研究所廣井研究室のウェブページ内「災害情報資料室」の「02関東大震災絵葉書」写真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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関東大震災朝鮮人虐殺当時の写真か 韓国研究家が公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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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記録写真研究家が関東大震災の朝鮮人虐殺写真を訴える 別の写真を使い捏造の可能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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おでんの変遷とこれか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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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久夢二 大正ロマンの画家、知られざる素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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