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윤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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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윤겸은 해주 오씨 시조 오인유의 14세손으로, 임진왜란 때 정철의 종사관으로 활약하고, 광해군 때 일본에 사행하여 포로를 쇄환하는 등 외교 활동을 펼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인조반정 이후 대사헌, 좌의정 등을 역임하며 노서와 소서의 갈등을 중재하고, 영의정에 이르렀다. 인조의 생부 추숭에 반대하다가 사망했으며, 사후 충간의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는 《추탄문집》 등이 있으며, 경기도 용인시에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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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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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오윤겸 |
원어명 | 吳允謙 |
한자 | 吳允謙 |
로마자 표기 | O Yun-gyeom |
Mr | O Yun'gyŏm |
출생 | 1559년 |
사망 | 1636년 2월 25일 |
국적 | 조선 |
별명 | 자 여익(汝益), 호 추탄(楸灘)·토당(土塘), 시호 충정(忠貞) |
본관 | 해주(海州) |
학력 및 경력 | |
학력 | 1597년 문과 급제 |
직업 | 문신, 정치인 |
주요 경력 | 대사헌, 좌의정, 영의정 |
가족 관계 | |
배우자 | 경주 이씨(慶州李氏) 이응화(李應華)의 딸 |
자녀 | 5남 5녀 |
부모 | 아버지 오희문(吳希文), 어머니 이인순(李仁順) |
친인척 | 13대손 오세훈(吳世勳) |
주요 관직 | |
좌의정 | 임기 시작: 1633년 10월 21일 임기 종료: 1636년 2월 25일 이전: 김류 이후: 홍서봉 |
좌의정 | 임기 시작: 1627년 10월 12일 임기 종료: 1628년 8월 17일 이전: 신흠 이후: 김류 |
영의정 | 임기 시작: 1628년 12월 16일 임기 종료: 1631년 9월 22일 이전: 심흠 이후: 윤방 |
우의정 | 임기 시작: 1626년 11월 20일 임기 종료: 1627년 10월 12일 이전: 심흠 이후: 김류 |
2. 생애
해주 오씨 시조 오인유의 14세손으로, 1582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89년 관직에 나아갔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시 정철의 종사관으로 활동했으며, 평강현감 재직 중이던 1597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1602년 스승 성혼을 변호하다 외직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광해군 대에는 정인홍 등 북인 세력과 대립하여 강원도 관찰사로 좌천되었으나, 재임 중 단종의 묘를 정비하는 등 치적을 남겼다. 1617년에는 회답 겸 쇄환사의 정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임진왜란 때 끌려간 포로 150여 명을 데려오는 성과를 거두었다. 1618년 폐모론에 반대하여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1622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공으로 우참찬에 올랐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대사헌을 시작으로 이조·형조·예조 판서를 역임하였고, 서인 내 노서의 영수로 활동하며 당파 간의 균형을 꾀하고자 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 때는 인조를 호종하였고, 1626년 우의정, 1627년 정묘호란 이후 좌의정에 올랐다. 1628년 영의정에 이르러서는 노서와 소서 간의 갈등 중재에 힘썼다.
인조의 생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숭하는 논의에 반대하여 잠시 물러났다가 1633년 좌의정에 복귀하였고, 인렬왕후의 국상 때 총호사(摠護使)로 과로하다 병사하였다. 사후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2. 1. 가계와 초기 생애
해주 오씨 시조 오인유의 14세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오경민(吳景閔)이고, 아버지는 선공감역 오희문(吳希文)이며, 어머니는 연안 이씨(延安李氏)로 군수 이정수(李廷秀)의 딸이다.1582년(선조 15)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89년 전강에서 장원하여 영릉참봉(英陵參奉)과 봉선전참봉(奉先殿參奉)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호체찰사(兩湖體察使)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 발탁되었다. 이후 시직(侍直)을 거쳐 평강현감으로 5년간 재직하였으며, 재직 중이던 1597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현감을 그만둔 뒤 한때 결성(結城)에 머물렀다가 부수찬(副修撰), 이조좌랑, 지제교(知製敎), 부교리(副校理)를 역임하였다. 1602년에는 모함을 받아 어려움에 처한 스승 성혼을 변호하다가 당시의 여론에 밀려 경성판관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7년간 안주목사, 동래부사 등의 외직을 지내며 안주성 축조를 담당했고, 북도순안어사(北道巡按御史)로서 함경도의 민생 문제를 살피기도 하였다.
1610년(광해군 2) 동래 부사 임기를 마친 후 비로소 내직으로 돌아와 호조참의, 우부승지, 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며 사림과 대립하자, 이를 비판하다가 왕의 뜻을 거슬러 강원도 관찰사로 다시 좌천되었다. 약 1년간 관찰사로 재임하며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데 힘썼고, 영월에 있는 단종의 묘를 정비하고 제례 절차와 제수 마련 방법을 정하여 이후 표준으로 삼게 하였다.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첨지중추부사가 되었으나, 집권 세력이던 북인의 세력이 강해지고 계축옥사가 일어나는 등 정계가 혼란해지자, 연로한 부모 봉양을 이유로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자청하여 외직으로 나갔다.
2. 2. 임진왜란과 관직 생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호체찰사(兩湖體察使)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 발탁되었다. 이후 시직(侍直)을 거쳐 평강현감으로 5년간 봉직하였으며, 재임 중이던 1597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현감을 그만둔 뒤에는 잠시 결성(結城)에 머물렀다가, 부수찬, 이조좌랑, 지제교, 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1602년에는 모함을 받아 곤경에 처한 스승 성혼을 변호하다가 당시의 여론(時論)에 의해 배척받아 경성판관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7년간 안주목사, 동래부사 등 외직을 지내며 안주성을 축조하고, 북도순안어사(北道巡按御史)로서 함경도의 민폐를 조사하기도 하였다.
1610년(광해군 2) 동래 부사 임기를 마친 후 내직으로 돌아와 호조참의, 우부승지, 좌부승지 등을 지냈다. 그러나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며 사림과 대립하자, 오윤겸은 이를 탄핵하다가 광해군의 뜻을 거슬러 강원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약 1년간 관찰사로 재임하며 기민(饑民)을 구제하고, 영월에 있는 단종의 묘를 수리하여 제례 절차와 제수 마련 방법을 정비하였다. 이는 이후 표준적인 규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다시 중앙 정계로 복귀하여 첨지중추부사가 되었으나, 집권 세력이던 북인의 세력이 강해지며 계축옥사가 발생하는 등 정계가 혼란해지자, 연로한 부모 봉양을 이유로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자원하여 외직으로 나갔다.
1617년 다시 첨지중추부사가 되어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의 정사로서 사절단 400여 명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때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잡혀갔던 포로 150여 명을 데려왔으며, 이를 계기로 일본과의 외교 관계가 정상화되었다.
1618년 북인들에 의해 인목대비를 폐위하자는 폐모론(廢母論)이 제기되자 이를 반대하며 관련 논의에 참여하지 않았다(정청 불참). 이로 인해 탄핵을 받자 벼슬을 그만두고 광주 선영 아래의 토당(土塘)으로 물러나 정치적 화를 피했다.
1622년 명나라 희종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사신(하극사, 賀極使)으로 선발되었다. 당시 육로는 후금에 의해 막혀 있었기 때문에, 배를 타고 바다를 통해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이 공로로 우참찬에 임명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대사헌에 임명되었고, 이후 이조판서, 형조판서, 예조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북인 출신 남이공(南以恭)의 등용 문제를 놓고 서인이 노서(老西)와 소서(少西)로 분열될 때, 김류(金瑬), 김상용(金尙容) 등과 함께 노서의 중심인물이 되어 남인과 북인 인사를 고르게 등용할 것을 주장하며 민심 수습을 꾀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를 공주까지 호종하였다. 난이 진압된 후 예조판서, 지중추부사를 거쳐 1626년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정묘호란이 발생하자 왕명을 받고 자전(慈殿)과 중전을 모시고 먼저 강화도로 피난했으며, 한양으로 돌아온 뒤 좌의정이 되었다. 1628년(인조 6) 유효립(柳孝立)의 난을 진압하는 데 기여한 공로로 영사원종공신 1등(寧社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1628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당시 노서와 소서 간의 대립이 심화되자 이를 중재하는 데 힘썼으며, 특히 경연에서 정치 쇄신을 위한 왕의 각성과 성리학 공부에 전념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듬해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을 원종(元宗)으로 추존하고 종묘에 배향(부묘, 柎廟)하려는 논의가 일자, 이에 반대하여 영돈녕부사로 물러났다. 1633년 좌의정에 다시 임명되었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인렬왕후의 국상 때 총호사(摠護使)로서 장례를 총괄하다가 과로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2. 3. 광해군 시기의 활동
1610년(광해군 2) 동래부사 임기를 마친 후 내직으로 돌아와 호조참의, 승정원 우부승지, 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당시의 권신인 정인홍이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며 사림과 대립하자, 오윤겸은 이를 탄핵하였다. 이 일로 왕의 뜻에 거슬려 강원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년 남짓 관찰사로 재임하는 동안 기민(饑民)을 구제하는 한편, 영월에 있는 단종의 묘(장릉)를 수축해 제례 절차와 각 고을로부터의 제수 마련 법식을 제정하여 이후 이를 준용하게 하였다.다시 중앙으로 들어와 첨지중추부사가 되었으나, 집권 세력인 북인의 발호로 계축옥사가 일어나는 등 정계가 혼란해지자 늙은 어버이의 봉양을 구실로 광주목사를 자원하였다.
1617년(광해군 9) 다시 첨지중추부사가 되어 회답 겸 쇄환사(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한국어)의 정사(正使)로서 사행 400여 명을 이끌고 일본에 가서 임진왜란 때 잡혀갔던 포로 150여 명을 쇄환했으며, 이때부터 일본과의 수교가 다시 정상화되었다.[2][3] 이 사절단은 조선 조정에 의해 명확히 "회답겸쇄환사"로 규정되었으며, 관계가 "정상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는 이해되지 않았다.[4] 조선 국왕의 특사 일행은 교토까지만 이동했으며, 그곳에서 후시미성에서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에 의해 접견되었다.[5]
1618년(광해군 10) 북인들에 의해 폐모론이 제기되자 이를 반대, 정청(庭請)에 불참하였다. 이로 인해 탄핵을 받자 벼슬을 그만두고 광주 선영 아래의 토당(土塘)으로 물러나 화를 피하였다.
1622년(광해군 14) 명나라 희종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하극사(賀極使)로 선발되어, 육로가 후금에 의해 폐쇄되었으므로 바다로 명나라를 다녀와 그 공으로 우참찬에 올랐다.
2. 4. 일본과의 외교 활동
1617년 오윤겸은 첨지중추부사로서 광해군의 명을 받아 일본에 파견되는 사절단의 정사(책임자)로 임명되었다.[2] 이 사절단은 조선 조정에 의해 공식적으로 '회답 겸 쇄환사'()로 명명되었는데, 이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잡혀간 조선인 포로들을 데려오고 일본의 국서에 회답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오윤겸은 사행 400여 명을 이끌고 일본으로 가서 포로 150여 명을 쇄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이 사절단 파견은 임진왜란 이후 단절되었던 양국 관계를 개선하고 무역 재개를 위한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양국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외교 채널로서 기능했다.[3] 그러나 조선 조정은 이 사절단 파견이 양국 관계의 완전한 '정상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4]
오윤겸이 이끄는 조선 특사 일행은 교토까지만 이동했으며, 후시미 성에서 당시 일본의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접견하였다.[5] 이 사행은 이후 일본과의 외교 관계 개선에 기여하였다.
2. 5. 인조반정 이후의 활동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대사헌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이조·형조·예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북인 남이공(南以恭)의 등용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노서(老西)와 소서(少西)로 나뉠 때, 김류(金瑬)·김상용(金尙容) 등과 함께 노서의 입장에서 남인과 북인의 고른 등용을 주장하며 민심 수습을 위해 노력하였다.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를 공주까지 호종하였다. 이후 예조판서와 지중추부사를 거쳐 1626년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인 1627년 정묘호란이 발생하자 왕명을 받고 자전(慈殿)과 중전을 모시고 강화도로 먼저 피난했으며, 환도 후 좌의정이 되었다. 1628년(인조 6) 유효립의 난 진압에 기여한 공으로 영사원종공신 1등(寧社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같은 해 영의정에 이르렀다. 이 시기 노서와 소서 간의 대립과 갈등이 심해지자 이를 중재하려 힘썼으며, 특히 경연에서 정치 혁신을 위한 왕의 각성과 성리학에의 전념을 촉구하였다.
이듬해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을 원종(元宗)으로 추숭하고 사당에 신주를 모시려는(부묘, 柎廟) 논의가 일자 이에 반대하여 영돈녕부사로 물러났다. 1633년 좌의정에 다시 임명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인렬왕후(仁烈王后)의 국상 때 총호사(摠護使)를 맡아 일하다 과로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죽기 직전 유언으로 조정에 시호를 청하지 말고 신도비를 세우지 말 것을 당부했으나, 1663년(현종 4) 충간(忠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경기도 광주(廣州, 현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의 구암서원(龜巖書院)과 평강의 산앙재영당(山仰齋影堂)에 제향되었다.
2. 6. 죽음과 사후
1635년 인렬왕후의 상(喪)에 총호사(摠護使)로서 과로한 나머지 병을 얻어 죽었다. 죽기 직전 유언으로 조정에 시호를 청하지 말고 신도비를 세우지 못하게 했으나, 사후 1663년(현종 4년) 충간(忠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경기도 광주(현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되고, 평강의 산앙재영당(山仰齋影堂)에 제향되었다.
《오윤겸선생묘》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에 있다. 부인 경주 이씨와의 합장묘로 봉분은 2개이고, 묘역은 후손들이 1986년에 새로 단장하면서 봉분 아랫부분에 원형으로 둘레석을 둘렀다. 2개의 묘 사이에는 상석·향로석이 있고, 상석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동자상·망주석·문인석이 각 1쌍씩 배열되어 있다. 왼쪽 묘의 앞에 묘비가 있는데, 비문은 김상헌이 짓고 송준길이 글을 쓴 것으로, 인조 25년(1647년)에 세운 것이다. 1987년 2월 12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104호로 지정되었다.
3. 평가
예론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특히 인조의 생부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고 종묘에 배향하려는 움직임에 반대하는 논리적 근거를 세웠다. 선조의 왕통을 이은 인조에게 선조는 비록 할아버지이지만 종묘의 예묘에 해당하므로, 왕이 아닌 대원군을 예묘로 삼는 것은 예법에 어긋난다는 의견이었다.
지방관으로 재직할 당시에는 평강현과 경성부의 민폐를 해결하여 정치를 잘하는 수령으로 명성을 얻었다. 중앙 관직에 있을 때는 온화하고 단정하며 공정한 자세를 유지하여 주변의 촉망을 받았다.
만년에 재상의 자리에 10여 년간 있으면서 백성의 편의를 위해 연해 지역 공물의 작미와 대동법 시행을 추진하였다. 또한 명분론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얼 등용을 주장하는 등 개혁적인 면모를 보였다. 사림을 아끼고 보호하여 '어진 재상'이라 불리기도 했다.
한편, 덕행 수양에 힘쓰고 학문과 문장에는 큰 뜻을 두지 않았다고 하나, 그의 문장은 평이하면서도 논리가 정연하고, 시는 맑으면서도 운율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평가받는다. 성혼 문하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이귀, 정경세, 이준, 김류 등과 교유하였다. 특히 이귀와는 함께 공부한 동문이자 외가로 인척 관계였으며, 임진왜란 중에는 친교가 더욱 두터워졌다. 그러나 이후 노서와 소서의 정치적 대립 과정에서 이귀가 소서의 영수가 되어 추숭 문제를 적극 추진하자 두 사람 사이에 틈이 벌어졌다.
4. 저서
오윤겸의 저서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전해진다.
5. 가족 관계
- 증조부 : 사섬시주부(司贍寺主簿) 오옥정(吳玉貞)
- * 조부 : 감찰 오경민(吳景閔)
- ** '''부''' : 선공감역 오희문(吳希文, 1539 ~ 1613)
- * 외조부 : 군수 이정수(李廷秀)
- * 외조모 : 이계환(李桂環, 1513 ~ ?) - 성종의 9남 익양군의 차녀
- ** '''모''' : 이인순(李仁順, 1540 ~ ?)
남동생 : 오윤해(吳允諧, 1562 ~ ?)
남동생 : 오윤함(吳允諴, 1570 ~ ?)
여동생 : 오숙란(吳淑蘭, 1572 ~ ?)
남동생 : 오윤성(吳允誠, 1576 ~ ?)
여동생 : 오숙진(吳淑眞, 1579 ~ ?)
- ** 장인 : 첨정(僉正) 이응화(李應華) -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후손
'''정부인''' : 경주 이씨
* '''장녀''' : 오정임(吳正任, 1585 ~ ?)
* 사위 : 정두망(鄭斗望)
* '''차녀''' : 오절임(吳節任, 1596 ~ ?)
* 사위 : 능성 구씨 구봉서(具鳳瑞)
** 외손녀 : 구경사(具敬姒, 1618 ~ ?)
** 외손녀 : 구숙사(具叔姒, 1621 ~ ?)
** 외손녀 : 구제사(具弟姒, 1632 ~ ?)
** (양)외손자 : 구이성(具爾性, 1646 ~ ?) - 구봉우(具鳳羽)의 아들
* '''장남''' : 오달천(吳達天, 1598 ~ ?)
* 며느리 : 능성 구씨 - 구곤원(具坤源)의 딸
** 손자 : 오도종(吳道宗, 1618 ~ ?)
** 손녀 : 오정사(吳正姒, 1624 ~ ?)
** 손자 : 오도륭(吳道隆, 1626 ~ ?)
** 손녀 : 오효사(吳孝姒, 1628 ~ ?)
* 며느리 : 한양 조씨 - 조간(趙幹)의 딸
** 손녀 : 오연사(吳戀姒, 1634 ~ ?)
** 손녀 : 오명사(吳命姒, 1641 ~ ?)
** 손자 : 오도일(吳道一, 1645 ~ 1703)
* 며느리(측실) : 덕향(德香) - 관비 출신
** 서손녀 : 오향생(吳香生, 1629 ~ ?)
* 며느리(측실) : 명덕(命德) - 노비 출신
** 서손녀 : 오투지(吳投知, 1630 ~ ?)
* 며느리(측실) : 순례(順禮) - 노비 출신
** 서손녀 : 오오진(吳吳進, 1645 ~ ?)
* '''차남''' : 오달주(吳達周, 1600 ~ ?)
* 며느리 : 경주 김씨 - 지사(知事) 김규(金頍)의 딸
** 손녀 : 오순사(吳順姒, 1626 ~ ?)
** 손자 : 오도민(吳道敏, 1640 ~ ?)
** 손자 : 오도익(吳道翊, 1643 ~ ?)
'''계부인''' : 덕수 이씨
* '''4녀''' : 오명임(吳命任, 1602 ~ ?)
* 사위 : 경주 이씨 현감(縣監) 증 참의(贈 參議) 이경선(李慶善)
** 외손녀 : 이성사(李聖姒, 1618 ~ ?)
** 외손자 : 이인섭(李寅爕, 1621 ~ ?)
** 외손녀 : 이희사(李喜姒, 1624 ~ ?)
** 외손녀 : 이미사(李美姒, 1629 ~ ?)
** 외손자 : 이인형(李寅炯, 1632 ~ ?)
* '''3남''' : 오달조(吳達朝, 1604 ~ ?)
* 며느리 : 파평 윤씨 - 윤대기(尹大起)의 딸
** 손녀 : 오예사(吳禮姒, 1627 ~ ?)
** 손녀 : 오혜사(吳惠姒, 1630 ~ ?)
** 손녀 : 오호사(吳好姒, 163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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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자 : 오도존(吳道存, 164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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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느리(측실) : 불용(不用) - 양민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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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남''' : 오달원(吳達遠, 16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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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자 : 오도전(吳道全, 1627 ~ ?)
* '''5남''' : 오달사(吳達士, 1611 ~ ?)
* 며느리 : 신평 한씨 - 동지(同知) 한원(韓瑗)의 딸
** 손자 : 오도중(吳道重, 1635 ~ ?)
** 손자 : 오도동(吳道東, 1643 ~ ?)
* 며느리(측실) : 오생(五生) - 관비 출신
** 서손자 : 오필귀(吳必貴, 1642 ~ ?)
* '''5녀''' : 오임정(吳任貞, 1618 ~ ?)
* 사위 : 영월 엄씨 엄석구(嚴碩耉)
** 외손자 : 엄륜(嚴綸, 1635 ~ ?)
** 외손자 : 엄전(嚴絟, 1639 ~ ?)
** 외손녀 : 엄혜령(嚴惠靈, 1650 ~ ?)
** 외손녀 : 엄최령(嚴最靈, 1654 ~ ?)
'''측실''' : 노비 진옥(眞玉)
* '''3녀''' : 오애임(吳愛任, 1598 ~ ?)
* 사위 : 아산 장씨 동지(同知) 장후완(蔣後琬)
** 외손자 : 장눌(蔣訥, 1612 ~ ?)
** 외손녀 : 장옥사(蔣玉姒, 1615 ~ ?)
** 외손자 : 장원(蔣謜, 1618 ~ ?)
** 외손자 : 장량(蔣諒, 1620 ~ ?)
** 외손자 : 장후(蔣詡)
** 외손녀 : 장절사(蔣切姒)
** 외손녀 : 장말사(蔣末姒)
- 13대손 : 오세훈(吳世勳)
6. 기타
참조
[1]
서적
State and Diplomacy in Early Modern Japan: Asia in the Development of the Tokugawa Bakufu
1991
[2]
서적
Korea in the middle: Korean studies and area studies
2007
[3]
간행물
Foreign Affairs and Frontiers in Early Modern Japan: A Historiographical Essay
Early Modern Japan
2002-09-01
[4]
서적
Frontier contact between Chosŏn Korea and Tokugawa Japan
https://books.google[...]
2003
[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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