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복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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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각복전쟁은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일본 자유민주당 내에서 벌어진 권력 투쟁을 일컫는 말로, 주로 다나카 가쿠에이와 후쿠다 다케오를 중심으로 한 파벌 간의 경쟁을 의미한다. 1972년 다나카 가쿠에이가 총리 자리에 오르면서 시작된 이 전쟁은 1980년대 다나카의 몰락, 후쿠다의 사망을 거치며 점차 약화되었고, 2012년 아베 신조의 자민당 정권 재창출로 완전히 종식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한국과의 관계는 일본 정계의 권력 변화에 따라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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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복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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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명칭 | 각복 전쟁 |
로마자 표기 | Gakufuku Sensō |
주요 인물 | 다나카 가쿠에이 후쿠다 다케오 |
시기 | 1970년대 초 ~ 1980년대 초 |
배경 | 자유민주당 내 파벌 간 권력 투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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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 내용 | |
원인 | 자유민주당 내 파벌 간 권력 다툼 다나카 가쿠에이와 후쿠다 다케오 개인 간의 경쟁 의식 |
주요 사건 |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1972년, 1974년, 1976년, 1978년) 로스 의혹 사건 |
결과 | 다나카 가쿠에이의 몰락 후쿠다 다케오의 단명 정권 자유민주당 내 파벌 정치의 심화 |
영향 | |
정치 | 자유민주당의 쇠퇴 일본 정치의 불안정화 |
사회 | 국민의 정치 불신 심화 |
평가 | |
긍정적 평가 | 파벌 정치의 폐해를 드러냄 |
부정적 평가 | 일본 정치의 후진성을 보여줌 자유민주당의 쇠퇴를 가속화 |
관련 인물 | |
주요 관련 인물 | 미키 다케오 오히라 마사요시 나카소네 야스히로 |
기타 | |
관련 사건 | 로스 의혹 사건 |
2. 제1차 각복전쟁 (1970~1972)
이케다 하야토의 뒤를 이어 총리직을 수행한 사토 에이사쿠는 1970년 재선에 출마하지 않기로 했다. 사토는 자신의 형인 기시 노부스케의 파벌을 이어받은 후쿠다 다케오에게 총리직을 물려주려 했다. 그러나 사토 파벌에서 요직을 거치며 성장한 다나카 가쿠에이 역시 총재 자리에 도전했다.[1]
다나카는 공명당의 언론 출판 방해 사건 수습을 도운 사실이 드러나면서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2] 이때 다나카는 가와시마 쇼지로와 손잡고 사토가 오키나와 반환을 이뤄야 한다고 설득해 4선에 도전하도록 만들었다. 사토의 4선 성공 후, 다나카는 사토파의 2/3를 포섭했다.
1972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서 다나카는 후쿠다를 6표 차로 앞섰다. 결선 투표에서는 100표 가까이 따돌리며 총재 자리를 차지했는데,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다나카 지지를 표명했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약 7억엔의 자금이 지원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나카와 후쿠다는 탄광국관 의혹, 쇼와 전공 사건 등 의혹 사건으로 체포, 기소된 과거가 있으나 모두 무죄로 확정되었다.
요시다 시게루와 하토야마 이치로, 이케다 하야토와 사토 에이사쿠의 정쟁은 있었지만, '''각복 전쟁'''이라고까지 형용되지는 않았다.
다나카는 일본 열도 개조론을 내걸고 적극 재정에 의한 고도 경제 성장 노선 확대를 주장한 반면, 후쿠다는 균형 재정 지향의 안정 경제 성장론을 주장했다.[1] 친중파였던 다나카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중일 국교 회복을 서둘렀고, 친대만파인 후쿠다는 대만과의 균형을 중시하는 등 외교 정책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2. 1. 배경
이케다 하야토 총리의 뒤를 이어 장기 집권한 사토 에이사쿠는 1970년 재선에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기시 노부스케의 파벌을 이어받은 후쿠다 다케오는 사토의 유력한 후계자로 여겨졌다. 한편, 사토 파벌에서 요직을 거치며 급부상한 다나카 가쿠에이 역시 총재 자리에 도전했다.[1]하지만 다나카는 공명당의 언론 출판 방해 사건 수습을 도운 사실이 드러나면서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2] 이러한 상황에서 다나카는 가와시마 쇼지로와 손잡고 사토가 오키나와 반환을 이뤄야 한다고 설득하여 4선에 도전하도록 만들었다. 사토의 4선 성공 후, 다나카는 사토파의 2/3를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1972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서 다나카는 후쿠다를 6표 차이로 앞섰지만, 결선 투표에서는 100표 가까이 따돌리며 총재 자리를 차지했다. 이는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다나카 지지를 표명했기 때문인데, 이 과정에서 약 7억엔의 자금이 지원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2. 2. 전개
이케다 하야토로부터 선양받은 사토 에이사쿠는 6년 동안 3선을 한 뒤 1970년 재선에 출마하지 않기로 했다. 후임 총재로는 형 기시 노부스케의 파벌을 이었던 후쿠다 다케오에게 물려줄 생각이었지만, 사토가 이끌던 파벌에서 여러 요직을 거치며 힘을 키웠던 다나카 가쿠에이도 총재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창가학회를 모체로 하여 창당된 공명당이 자당에 비판적인 서적의 출판·유통을 방해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를 당시 자민당 간사장이었던 다나카가 도와주는 것이 발각되면서 다나카는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1]후쿠다에게 정권이 넘어가는 것을 막고 싶었던 다나카는 부총재이자 반 후쿠다 파벌인 가와시마 쇼지로와 손을 잡고 오키나와의 본토 복귀는 사토 내각에서 해야 한다는 생각을 보여 사토의 4선 분위기를 조성했다. 사토는 총재 선거에 출마하여 4선을 달성했지만, 당내 인사를 변경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와시마·다나카의 의도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사이에 다나카는 다수파 공작을 착실하게 진행해 나갔다. 또한 1971년 개조 내각에서는 통상 산업 대신으로 입각하여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았던 미일 섬유 교섭을 강행하여 타결하는 등 실적도 올렸다. 후쿠다 측은 사토의 다나카 설득과 선양을 믿었지만, 총재 4기째에 접어든 사토에게는 후계 지명의 힘이 남아 있지 않았고, 다나카가 사토 파벌의 3분의 2를 장악하며 다나카 파벌을 결성하여 힘을 키워가는 가운데, 속수무책이었다.[2]
1972년 자민당 총재 선거 직전, 사토는 다나카와 후쿠다 앞에서 2위가 1위에 투표할 것을 요청했고, 두 사람 모두 이를 받아들였지만 나중에 이를 어겼다. 당초 형세는 팽팽한 것으로 보였지만, 직전에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던 나카소네 파벌이 다나카 파벌을 지지하겠다고 표명하며 다나카가 우위를 점했다. 총재 선거에는 다나카, 후쿠다, 오히라 마사요시, 미키 다케오 4명이 출마하여 각각 156표, 150표, 101표, 69표를 얻어 다나카와 후쿠다의 결선 투표가 이루어졌고, 다나카 282표, 후쿠다 190표로 다나카가 사토의 후계자가 되었다. 출마하지 않은 나카소네 야스히로에게는 이 당시 7억엔의 자금이 다나카로부터 흘러 들어갔다고 한다.
2. 3. 한국의 관점
당시 한국은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고 있었으며, 자민당 내 권력 투쟁은 한일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변수였다. 다나카 가쿠에이는 중일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여 한국의 외교 정책에 영향을 주었다.[1]3. 휴전기 (1974~1976)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이 제10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금권정치로 비판받고, 록히드 사건으로 인해 다나카가 총재 자리에서 물러난 후, 미키 다케오가 후임 총재로 취임했다. 미키는 록히드 사건 수사를 지지했지만, 이에 다나카 가쿠에이, 후쿠다 다케오, 오히라 마사요시 등이 반발하여 '미키 끌어내리기'를 시도했다.[1]
3. 1. 미키 끌어내리기
미키 다케오가 록히드 사건 수사를 지지하자, 다나카 가쿠에이는 물론 후쿠다 다케오, 오히라 마사요시 등도 이에 반발하며 이른바 '미키 끌어내리기'를 두 차례 시도했다.[3]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패배하자, 미키는 그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물러났다.3. 2. 한국의 관점
록히드 사건은 한국에서도 큰 관심을 받았으며, 일본 정치의 부패상을 보여주는 사례로 인식되었다.[2] 미키 다케오의 퇴진은 한일 관계의 불확실성을 증폭시켰다.4. 제2차 각복전쟁 (1978)
미키 다케오 끌어내리기가 진행되던 중, 후쿠다 다케오는 오히라 마사요시와 이른바 '대복밀약'을 맺었다. 이 밀약은 후쿠다가 총재 선거에서 이기도록 오히라가 협력하되, 오히라를 자유민주당 간사장으로 임명하고 2년 뒤에 정권을 넘긴다는 내용이었다.[1] 밀약대로 후쿠다가 총재가 되었지만, 2년 후 후쿠다는 재선 의지를 밝히며 오히라와 대립했다. 오히라는 친대만파였던 후쿠다가 중일 국교 정상화 이후 친중파로 돌아서자, 원래 친중파였던 자신의 입지가 줄어들 것을 우려했다.
다나카 가쿠에이는 록히드 사건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진 상황에서, 후쿠다가 총재 자리를 계속 차지하면 자신을 더욱 옥죄일 것이라 생각하여 1978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오히라를 지원했다. 다나카는 측근 다케시타 노보루를 통해 당원 명부를 빼돌리고, 고토다 마사하루를 통해 비서들을 총동원하여 호별 방문 및 전화 공세를 펼쳤다. 당초 현직이었던 후쿠다의 재선이 점쳐졌지만, 예비선거에서 오히라가 승리하자 후쿠다는 본선거를 포기하고 오히라 내각이 출범하게 된다.[1]
4. 1. 배경
미키 다케오 끌어내리기가 진행되던 중, 후쿠다 다케오는 오히라 마사요시와 접촉하여 자신이 총재 선거에서 이기도록 오히라가 협력하되, 오히라를 자유민주당 간사장으로 임명하고 2년 뒤에 정권을 넘기기로 하는 밀약을 맺었다. 이를 '다이후쿠(大福) 밀약'이라고 부른다. 이 밀약에 따라 후쿠다가 총재에 취임했지만, 2년 후 후쿠다는 재선 의지를 밝히며 오히라와 대립하기 시작했다.[1]오히라는 본래 친중파였으나, 친대만파였던 후쿠다가 중일 국교 정상화를 이루고 친중파로 돌아서자 자신의 입지가 줄어들 것을 우려했다고 한다.
다나카 가쿠에이는 록히드 사건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진 상황에서, 후쿠다가 총재 자리를 계속 차지하면 자신을 더욱 옥죄일 것이라 생각했다. 이에 1978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오히라를 지원했다. 다나카는 측근인 다케시타 노보루를 통해 당원 명부를 빼돌리고, 고토다 마사하루를 통해 비서들을 총동원하여 호별 방문 및 전화 공세를 펼쳤다.[5]
4. 2. 전개
다나카 가쿠에이는 측근 다케시타 노보루를 통해 당원 명부를 빼돌리고, 고토다 마사하루를 통해 비서들을 총동원하여 호별 방문 및 전화 등의 조직적인 선거 운동을 펼쳤다.[1] 예비 선거에서 오히라 마사요시가 승리하자 후쿠다 다케오는 본선거를 포기하고, 오히라 내각이 출범했다.[1]4. 3. 한국의 관점
오히라 마사요시는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의 집권은 한일 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되었다.[1]5. 제3차 각복전쟁 (1979~1980)
1978년 자민당 총재 예비 선거에서 승리한 오히라 마사요시는 제1차 오히라 내각을 성립시켰지만, 1979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의석을 줄이는 결과를 얻었다. 이에 후쿠다파, 미키파, 나카소네파는 오히라의 퇴진을 요구했고, 오히라가 이를 거부하자 수반 지명에서 후쿠다에게 투표하는 사태가 발생했다(''40일 항쟁'').[6] 이후 제2차 오히라 내각이 발족했지만, 이듬해인 1980년에도 대립은 이어져 일본사회당이 제출한 내각 불신임 결의안 표결 시 반주류파가 결석하면서 불신임 결의가 가결되었고, '''해프닝 해산'''으로 이어졌다.
5. 1. 40일 항쟁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1석 차이로 패배하자, 후쿠다파, 나카소네파, 미키파 등은 오히라 마사요시의 퇴진을 요구했다. 3년 전 총선에서 자민당이 패배했을 때 총재였던 미키 다케오가 물러난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히라는 다나카 파벌의 지원을 바탕으로 퇴진을 거부했다. 이후 당내 분쟁은 점차 격화되었고, 새로 개원한 국회에서 자민당 후보로 오히라와 후쿠다 다케오가 동시에 총리 후보로 나서는 등 대립이 절정에 달했다. 결국 오히라가 총리 재선에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무려 40일이나 소요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6]5. 2. 해프닝 해산과 오히라의 죽음
일본사회당 주도로 내각불신임안이 제출되자 공명당, 민사당도 이에 동조했는데, 후쿠다파와 미키파 등이 표결에 불참하면서 찬성 243표, 반대 187표로 27년 만에 불신임안이 가결되었다. 이에 오히라 마사요시는 중의원 해산(해프닝 해산)으로 맞섰다. 선거를 앞두고 자민당은 주류파와 반주류파로 갈려 따로 선거를 대비하는 상황에 처했다.[6] 하지만 선거 기간 중 오히라가 급사하면서 자민당이 동정표를 얻어 대승을 거두었다.오히라의 죽음을 계기로 자민당이 하나로 뭉쳐 선거에서 이겼기 때문에 반주류파는 총재 자리를 둘러싼 정쟁을 일으킬 힘을 상실했고, 이후 오히라파의 간부였던 스즈키 젠코가 합의 추대라는 형식으로 후임 총재가 되었다.
5. 3. 한국의 관점
오히라 마사요시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한국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의 후임으로 누가 선출될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1]6. 다나카 지배의 확립 (1980~1982)
오히라 마사요시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스즈키 젠코(鈴木善幸)가 다나카 파의 지원을 받아 새로운 총재로 취임하면서 다나카 파의 지배력이 더욱 강화되었다.[1] 다나카 가쿠에이는 킹메이커로서 정치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스즈키는 행정 수반으로서 미숙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안정적인 과반 의석을 바탕으로 정국을 운영해 나갔다. 그러나 스즈키의 실수로 미국과의 관계가 다소 소원해지자, 스즈키는 스스로 총재 선거 불출마를 선언하며 재선을 포기했다. 이후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총재 선거에서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지만, 이는 다나카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1]
나카소네는 다나카의 지지를 바탕으로 총재가 된 후, 다나카 파와 나카소네 파를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했다. 이는 '다나카소네 내각'이라 불리며 편파 인사라는 비판을 받았고, 당내에서도 반발이 컸다. 이에 후쿠다 다케오, 미키 다케오 등 전직 총리들과 야당까지 합세하여 다나카 파의 니카이도 스스무를 총재로 옹립하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하지만 다나카의 반대와 니카이도 옹립에 대한 신중론이 대두되면서 이 구상은 무산되었다.[1]
니카이도 옹립 구상의 실패는 자민당 원로들의 영향력 감소를 가져왔고, 다나카 파 내부에서는 최고 충신이었던 니카이도가 다나카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점에서 분열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는 이후 다케시타 노보루와 가네마루 신이 다나카 파 내부에서 창정회를 결성하고, 경세회를 결성하여 독립을 꾀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케시타의 배신에 충격을 받은 다나카는 이후 정치적 영향력을 사실상 상실하게 되었다.[1]
6. 1. 스즈키 젠코 내각
스즈키 젠코는 다나카 파의 지원을 받아 총재로 선출되었으며, 다나카 가쿠에이는 킹메이커로서 정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1] 스즈키 젠코는 '화합의 정치'를 내세워 파벌 간 갈등을 완화하려 노력했다.[1]6. 2. 한국의 관점
鈴木 善幸|스즈키 젠코일본어 내각은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이는 한일 관계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했다.[1]7. 후쿠다의 마지막 반격 (1982~1984)
스즈키 젠코는 행정 수반으로서 미숙함을 보였지만, 안정적인 의석을 바탕으로 무난하게 정국을 운영했다. 그러나 미국과의 관계가 소원해지자 스즈키는 총재 선거 불출마를 선언하고 재선을 포기했다. 이후 1982년 총재 선거에서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압도적인 득표율로 신임 총재에 취임했다. 하지만 스즈키의 퇴진은 다나카 가쿠에이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고, 나카소네는 이 사실을 1주일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한다.[7]
나카소네는 다나카의 지지를 받아 다나카파와 나카소네파 위주로 내각을 구성하여 '다나카소네 내각'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당내 반발을 샀다. 이에 스즈키의 주도로 후쿠다 다케오파, 미키 다케오파, 심지어 야당까지 합세하여 다나카파의 니카이도 스스무를 총재로 옹립하려는 계획이 추진되었으나, 다나카와 다케시타 노보루, 가네마루 신 등의 반대와 스즈키·후쿠다파 내부의 신중론으로 인해 무산되었다.[7]
니카이도 옹립 구상은 전직 총리들인 후쿠다, 미키, 스즈키 등이 주도했으나 실패하면서 자민당 원로들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또한, 니카이도가 다나카에게 사실상 반기를 들었다는 점에서 다나카파 내부의 분열이 시작되었고, 이는 이후 다케시타와 가네마루가 창정회와 경세회를 결성하여 독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나카는 다케시타의 배신에 충격을 받아 쓰러진 뒤 정치적 영향력을 사실상 상실하게 되었다.[7]
7. 1.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다나카 파벌의 지원을 받아 총재로 선출되었으며, '다나카소네 내각'이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편파적인 인사를 단행했다.[7] 이는 당내에서도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스즈키 젠코의 주도 하에 후쿠다파·미키파와 야당까지 합세하여 다나카파의 니카이도 스스무를 총재로 옹립하려는 계획이 추진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구상은 다나카와 다케시타 노보루, 가네마루 신 등의 반대와 스즈키·후쿠다파 내부의 신중론으로 인해 무산되었다.7. 2. 니카이도 옹립 구상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다나카 가쿠에이의 지지를 바탕으로 총재가 된 후, 다나카파와 나카소네파 위주로 내각을 구성하자 '다나카소네 내각'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당내 반발이 심해졌다.[7] 이에 스즈키 젠코의 주도 하에 후쿠다 다케오파, 미키 다케오파, 심지어 야당까지 합세하여 다나카파의 니카이도 스스무를 총재로 옹립하려는 구상이 추진되었다.하지만 다나카는 자신의 파벌에서 자신 외의 총재 후보가 나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니카이도가 총재로 옹립되는 것을 반대한 다케시타 노보루, 가네마루 신과 스즈키·후쿠다파 내에서도 신중론이 대세를 점하면서 이 구상은 실패로 끝났다.[7]
이 구상은 전직 총리들인 후쿠다, 미키, 스즈키 등이 주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가면서 자민당 원로들의 영향력이 줄어들게 되었다. 한편, 니카이도가 다나카에게 사실상 반기를 들었다는 점에서 다나카파 내부의 분열이 시작되었고, 이는 이후 다케시타와 가네마루가 창정회와 경세회를 결성하여 독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나카는 다케시타의 배신에 충격을 받아 쓰러진 뒤 정치적 영향력을 사실상 상실하게 되었다.[7]
7. 3. 한국의 관점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대한민국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의 집권은 한일 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니카이도 옹립 구상은 일본 정치의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인식되었다.[7]8. 다나카 지배의 종언과 각복전쟁의 종결 (1985~1990년대)
1985년 다나카 가쿠에이가 뇌경색으로 쓰러지면서, 후쿠다 다케오와 미키 다케오는 점차 영향력을 상실했다. 1988년 미키가 사망한 후, 다나카 파와 후쿠다 파는 후계자인 다케시타 노보루와 아베 신타로의 맹우 관계를 통해 협력 노선에 들어갔다.[8]
1990년대 다나카와 후쿠다가 사망하면서 각복전쟁은 막을 내렸다. 다케시타와 아베 신타로는 파벌을 물려받아 협력 관계를 유지했고, 다나카-다케시타 파벌의 영향력은 건재했다.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경세회의 지원을 받지 않고 취임한 첫 총리'라고 자평하며 총재로 당선되자, 노나카 히로무 등은 이에 반발하며 저항 세력으로 규정되었고, 언론은 이를 '유한시합'(遺恨試合)이라고 보도했다.
2007년 후쿠다 다케오의 장남 후쿠다 야스오가 총리가 되고, 제1야당 당수로 다나카의 애제자였던 오자와 이치로가 취임하면서, 각복전쟁의 재래라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2012년 아베 신타로의 아들 아베 신조가 이끄는 자민당이 정권을 탈환하고, 오자와가 이끄는 일본미래당이 대패, 다나카 마키코가 낙선하면서, 언론은 각복전쟁의 종결을 선언했다.
8. 1. 창정회 결성과 다나카의 몰락
1985년 2월 7일, 자민당을 탈당했음에도 파벌 영수로 영향력을 유지하던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다케시타 노보루, 가네마루 신 등이 반기를 들어 "창정회"를 결성했다.[8] 다나카는 과도한 음주로 인해 얼마 지나지 않은 2월 27일에 뇌경색으로 쓰러졌다.1987년 7월 4일, 다케시타 등 113명의 의원은 다나카 파에서 정식으로 독립하여 "경세회(経世会)"를 결성했다.[8] 이 해에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총재 선거 불출마를 결정했다. 다나카는 총재 선거에서 니카이도 스스무를 전면적으로 지원하려 했지만, 다나카 파의 대부분의 의원이 경세회에 참가했기 때문에 니카이도를 지원한 것은 불과 십여 명이었다. 그 결과, 니카이도는 출마를 보류하고, 다케시타 노보루, 아베 신타로, 미야자와 기이치의 3명의 후보자에 의한 경쟁은 나카소네 재정에 의해 다케시타가 총재에 취임했다.
8. 2. 다케시타 노보루 내각과 안타케 협력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뒤를 이어 다케시타 노보루가 총재에 취임했다.[8] 다케시타 노보루와 아베 신타로는 맹우 관계였기 때문에 협조 노선을 유지하면서 다나카-다케시타 파벌의 영향력을 유지했다.8. 3. 한국의 관점
다나카 가쿠에이의 몰락은 한국에서 큰 관심을 받았으며, 이는 일본 정치의 세대 교체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인식되었다.[8] 다케시타 노보루 내각은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노력했으나, 리크루트 사건으로 인해 조기에 퇴진했다.9. 각복전쟁 이후
다나카 가쿠에이와 후쿠다 다케오가 1990년대에 나란히 사망하면서 각복전쟁은 막을 내렸다. 둘의 파벌을 물려받은 다케시타 노보루와 아베 신타로는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1] 그러나 이후 고이즈미 준이치로, 후쿠다 야스오, 오자와 이치로, 아베 신조 등의 등장은 각복전쟁의 재래 또는 종언으로 언론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9. 1.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등장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스스로 "헤이세이 연구회(경세회)의 지원을 받지 않고 취임한 최초의 총리"라고 자평하며, 기존 파벌 정치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자신에게 반발하는 노나카 히로무 등을 '저항 세력'으로 규정하고 대립했는데, 당시 언론에서는 이를 '유한시합'(遺恨試合)이라고 보도했다.[1]9. 2. 후쿠다 야스오와 오자와 이치로의 대결
2007년 9월, 후쿠다 다케오의 장남 후쿠다 야스오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면서, 후쿠다와 최대 야당 민주당 대표 오자와 이치로의 대결 구도가 명확해졌다. 다나카 가쿠에이의 제자였던 오자와와 후쿠다의 대결은 '각복전쟁의 재래'로 불리기도 했다.[1][9]9. 3. 아베 신조의 집권과 각복전쟁의 종언
2012년 12월,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아베 신타로의 아들 아베 신조가 이끄는 자민당이 압승하여 3년 만에 정권을 탈환하였다. 한편, 다나카 가쿠에이의 제자로 알려진 오자와 이치로가 이끄는 일본 미래의 당은 대패하였고, 다나카 가쿠에이의 딸인 다나카 마키코마저 낙선하였다.[9] 이 선거 결과로 인해, 언론에서는 각복전쟁이 완전히 종식되었다는 평가를 내놓았다.9. 4. 한국의 관점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로 대한민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으나, 후쿠다 야스오 내각은 관계 개선에 노력했다. 아베 신조 내각은 역사 문제와 영토 문제로 대한민국과의 갈등이 심화되었다.참조
[1]
서적
山一証券破綻と危機管理
朝日新聞社
1998
[2]
뉴스
一人にしぼれぬ 角福調整最終的に断念
朝日新聞
1972-06-19
[3]
간행물
財政赤字の政治学-政治的不安定性,経済バブル,財政赤字
http://www.esri.go.j[...]
慶應義塾大学出版会
[4]
문서
福田赳夫内閣|改造前 の田中派への閣僚割り当ては運輸大臣・郵政大臣・行政管理庁長官、改造後は厚生省|厚生大臣・防衛庁長官・環境庁長官。
[5]
서적
自民党総裁 死闘・大角連合
[6]
문서
衆議院・第161回国会本会議第4号(平成十六年十月二十二日)、小里貞利議員・在職二十五年代表謝辞
https://kokkai.ndl.g[...]
[7]
문서
このときの話し合いで田村元が持ち込んだ総理総裁分離が浮上し中曽根総理、福田総裁案を福田は呑んだといわれているが、田中の意を受けた中曽根は蹴った。
[8]
뉴스
田中角栄に反旗、竹下派旗揚げ 「政界のドン」金丸信(5)
https://www.nikkei.c[...]
2020-08-02
[9]
문서
亀井は自民党時代は清和会(福田派)に属して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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