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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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0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는 1974년 7월 7일에 실시되었으며, 총 130석(보충의원 4석 포함)을 선출했다. 선거권자는 75,356,068명이었으며, 지역구와 전국구 투표율은 73.20%를 기록했다. 선거 결과, 자유민주당이 62석을 얻었으며, 일본 사회당 28석, 공명당 14석, 일본 공산당 13석, 민주사회당 5석, 기타 정당 1석, 무소속 7석을 확보했다. 선거 이후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의 금권 정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고, 결국 다나카는 금맥 의혹으로 인해 퇴진하고 미키 내각이 발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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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거 정보
1974년 7월 7일 일본에서 실시된 참의원 선거이다.[2] 당시 일본은 심각한 물가 인플레이션과 1973년 석유 위기의 여파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며 내각 지지율은 20%를 밑돌았다.[4]
위기감을 느낀 자유민주당(자민당) 총재 다나카 가쿠에이는 기업으로부터 거액의 선거 자금을 동원하여 대규모 선거 운동을 벌였다. 당시 교통망이 발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나카 총리는 헬리콥터 2대를 동원하여 도치기현을 제외한 46개 도도부현, 147곳을 방문하며 유세를 펼쳤다. 이러한 금권 선거 논란은 선거 후 매스컴의 비판을 받게 된다.[5]
선거 전, 정치 평론가들의 예측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자민당의 참패를 예상하는 시각과 상당한 성공을 거둘 것이라는 예측이 공존했다.[1] 선거 결과, 투표율은 역대 최고인 73%를 기록하며 야당에 표가 몰렸고, 자민당은 목표했던 과반수 의석 확보(63석)에 실패했다. 무소속 의원 2명의 도움으로 간신히 과반수를 유지하는 데 그쳤다.[1] 일본 공산당은 득표율을 높이며 의석 수를 두 배로 늘리는 등 가장 큰 성과를 거두었다.[1]
자민당 내부의 파벌 싸움도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4명을 선출하는 홋카이도 지역구에서는 자민당 후보 2명과 보수 성향 무소속 후보가 출마하여 보수 표가 분산되었고, 결국 야당이 모든 의석을 차지하는 결과를 낳았다.[1] 또한 도쿠시마현 선거구에서는 미키 다케오 파의 현직 의원 쿠구시메 켄타로가 당의 공천을 받지 못하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다나카 총리가 지원하는 신인 고토다 마사하루와 격돌했다. 이 치열한 선거전은 "아와 전쟁"이라고 불렸으며, 결국 쿠구시메가 승리했다.[1][6] 이 사건은 다나카 총리의 당내 입지를 약화시키는 동시에, 도쿠시마현 자민당을 미키파와 반미키파로 분열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1980년대 중반까지 선거 때마다 격렬한 대립을 이어갔다.[6]
선거 결과는 다나카 총리의 구심력 약화로 이어졌고, 가을에는 금권 문제가 불거지면서 결국 총리직에서 사퇴하게 되었다.[5] 한편, 다나카 총리를 비판했던 미키 다케오와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의 파벌 역시 세력이 약화되는 결과를 맞았다.[1]
투표 당일, 동해 지역은 칠석 호우로 큰 수해를 입었다. 미에현 이세시에서는 1,000가구 이상이 침수되고 교통이 마비되어 투표가 연기되기도 했다.[7]
2. 1. 투표일
1974년 7월 7일2. 2. 선거권자
- 선거권자 75,356,068명
2. 3. 개선 의석 수
2. 4. 선거 제도
- '''지방구'''
- *소선거구제: 개선 의석 26석
- **2인 선거구(개선 1명, 단기투표): 26선거구
- *중선거구제: 개선 의석 50석
- **4인 선거구(개선 2명, 단기투표): 15선거구
- **6인 선거구(개선 3명, 단기투표): 4선거구
- **8인 선거구(개선 4명, 단기투표): 2선거구
- '''전국구'''
- *대선거구제: 개선 의석 54석 (이 중 4석은 임기 3년의 보궐 선출)
- '''투표 방식'''
- *비밀투표
- '''유권자'''
- *자격: 만 20세 이상 남녀
- *총 유권자 수[8]: 75,356,068명
- **남성: 36,451,277명
- **여성: 38,904,791명
3. 선거 결과
1974년 7월 7일 실시된 제10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는 전체 의석의 절반을 새로 선출하는 선거였다.[2] 선거 전, 정치 평론가들의 예측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심각한 인플레이션과 1973년 석유 위기의 여파로 집권 자유민주당(자민당)이 참패할 것이라는 전망과, 반대로 선거가 다가오면서 자민당이 상당한 성공을 거둘 것이라는 예측이 공존했다.
선거 결과는 양측 예측의 중간 지점에 가까웠다. 자민당은 개선 대상 의석 확보에는 실패하여 총 126석으로 줄어들었고, 자민당 성향의 무소속 의원 2명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과반수를 유지하는 데 그쳤다. 이는 목표로 했던 63석 확보에 1석이 모자란 결과였다. 특히 4명을 선출하는 홋카이도 선거구에서는 자민당 후보 2명 외에 보수 성향 무소속 후보가 난립하여 표가 분산되면서, 야당에게 모든 의석을 내주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1]
야당 중에서는 일본 공산당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공산당은 주요 정당 중 유일하게 득표율이 증가했으며, 특정 후보에게 표가 쏠리는 것을 막고 효율적으로 표를 배분하는 전략을 통해 의석 수를 두 배로 늘리는 데 성공했다. 전국구 선거에서 공산당 후보 다수가 당선권 하위 순위에 고르게 분포된 것이 이를 증명한다.[1] 반면 일본 사회당과 민사당은 의석 수가 감소했다.
이 선거 결과는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의 당내 입지를 크게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물가 상승과 지가 급등 등 경제 실정에 대한 비판이 높은 가운데,[4] 다나카 총리는 기업으로부터 거액의 정치 자금을 동원하여 금권선거 논란을 일으켰다. 헬리콥터까지 동원하며 전국적인 유세를 펼쳤으나[5], 선거 패배로 구심력을 잃었고, 이는 같은 해 가을 금권 문제가 불거지며 총리직 사퇴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자민당 내 파벌 갈등도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도쿠시마현 선거구에서는 다나카 총리가 지지하는 신인 고토다 마사하루에 맞서, 반(反)다나카 파벌의 수장인 미키 다케오 파벌 소속 현직 의원 쿠지메 켄타로가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 사건은 미키의 고향 이름을 따 '아와 전쟁'이라 불리며[1], 이후 도쿠시마현 자민당의 극심한 분열과 대립으로 이어졌다.[6] 자민당은 오키나와와 같은 단수 선거구에서도 야당에 패배했지만,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이던 농촌 지역의 다른 단수 선거구에서는 대부분 승리했다. 대신 의석 수가 많은 도시 지역에서 패배가 두드러졌는데, 이는 과거 선거와 유사한 경향이었다.[1] 선거 결과, 다나카 총리 자신의 파벌 의석은 늘었지만, 그를 비판하던 미키 다케오와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의 파벌 세력은 약화되었다.[1]
투표 당일 동해 연안 지역에서는 '칠석 호우'라 불리는 집중 호우로 수해가 발생했다. 특히 미에현 이세시에서는 1,000가구 이상이 침수되고 교통이 마비되어 투표가 연기되는 사태도 있었다.[7]
3. 1. 투표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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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 정당별 의석 현황
3. 3. 지역구별 당선자
3. 4. 전국구 당선자
아래는 보궐 당선(임기 3년) - 제9회에서 선출된 노가미 겐, 이베 마사루, 시바타 리우에몬, 미즈구치 코조의 공석에 따른 것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