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카 마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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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나카 마키코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944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와세다 대학 졸업 후 배우로 활동하다가 1993년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과학기술청 장관, 외무대신, 문부과학대신 등을 역임했으며,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에서 여성 최초로 외무대신에 취임했다. 외무대신 재임 중 외무성 관료들과의 갈등, 비서 급여 유용 의혹 등으로 논란이 있었으며, 2002년 의원직을 사퇴했다. 이후 무소속과 민주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2012년 정계를 은퇴했다.

다나카 마키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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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공식 초상화
이름다나카 마키코
원어 이름田中 眞紀子
로마자 표기Tanaka Makiko
출생일1944년 1월 14일
출생지도쿄도 분쿄구, 일본 제국
학력와세다 대학교 상학 학사
배우자다나카 나오키
자녀3명
부모다나카 가쿠에이 (아버지)
직업
현직에치고 교통 대표이사 상담역
소속 정당
정당무소속 (2003–2009; 2018–현재)
이전 정당자유민주당 (2003년까지)
민주당 (2009–2016)
민주당 (2016–2018)
훈장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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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일대수장
학위상학사 (와세다 대학교, 1968년)
국회의원
소속중의원
선거구니가타 5구
임기 시작2003년 11월 10일
임기 종료2012년 11월 16일
이전 선거구니가타 3구 (1993–1996)
니가타 5구 (1996–2002)
이전 의원호시노 유키오
다음 의원나가시마 타다요시
임기 시작21993년 7월 18일
임기 종료22002년 8월 9일
이전 의원2다선거구
다음 의원2호시노 유키오
주요 경력
직책문부과학대신
임기 시작2012년 10월 1일
임기 종료2012년 12월 26일
총리노다 요시히코
이전 대신나카가와 마사하루
다음 대신시모무라 하쿠분
직책2외무대신
임기 시작22001년 4월 26일
임기 종료22002년 1월 29일
총리2고이즈미 준이치로
이전 대신2고노 요헤이
다음 대신2가와구치 요리코
직책3과학기술청 장관
임기 시작31994년 6월 30일
임기 종료31995년 8월 8일
총리3무라야마 도미이치
이전 장관3오미 미키오
다음 장관3우라노 야스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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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944년 1월 14일 도쿄도 분쿄구에서 다나카 가쿠에이와 다나카 하나의 장녀로 태어났다. 본적지는 니가타현 가시와자키시이다. 저먼타운 프렌즈 스쿨(Germantown Friends School), 일본여자대학 부속 중학교·고등학교를 거쳐 와세다 대학 상학부를 졸업했다. 와세다 대학 재학 시절에는 연극 서클 극단 코다마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동기로는 쿠메 히로시와 나가츠카 교조가 있었다. 대학 졸업 후인 1969년까지 극단 구름 연구소에 소속되어 여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1969년, 일본강관 직원이던 다나카 나오키와 결혼했다. 남편은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의 데릴사위로 들어가면서 다나카 나오키로 개명했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마나코, 차녀는 마미코, 장남은 다나카 유이치로이다.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가 병환 중일 때는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1993년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같은 해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구 니가타 3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득표 1위로 당선되었다. 이후 자민당에 입당했다.

1994년 무라야마 내각에서 과학기술청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년차 의원임에도 장관으로 입각하여 파문을 일으켰으며, 교육실습자원봉사 활동 의무화 제안을 실현시켜 논란을 일으켰다.

1996년 제4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니가타 5구에서 자민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재선에 성공했다.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탄생에 크게 기여하여 외무대신에 취임했다. 외무대신 재임 중, 9·11 테러 직후 콜린 파월 미국 국무장관과 미국 국방부의 피난처를 기자회견에서 밝혀 논란이 되기도 했다. 북한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에 대해서도 고이즈미 총리와 의견 차이를 보였다.

2002년 8월, 비서 급여 횡령 의혹으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같은 해 9월 도쿄 지방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고, 2003년 11월 무소속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다시 출마했다.

2009년 8월 15일,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입당을 표명했다. 하토야마 유키오 대표는 "부부 동반 민주당 입당을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밝혔다. 같은 해 9월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 발족에 따라 중의원 문부과학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했다. 2011년 9월 노다 내각 발족에 따라 중의원 외무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했다.

2012년 10월, 노다 제3차 개조내각에서 문부과학대신에 임명되어, 2001년 제1차 고이즈미 내각 이후 약 11년 만에 세 번째 입각을 했다. 같은 해 11월, 2013년 봄 개교 예정이었던 3개 대학 신설 불허를 시사했다가, 문부과학성은 11월 8일 신설 3개교를 정식으로 인가했다.

2012년 12월 16일 총선에서 낙선했고, 12월 26일 사퇴했다.

2.1. 초기 생애

1944년 1월 14일, 도쿄도 분쿄구에서 다나카 가쿠에이와 다나카 하나의 장녀로 태어났다. 본적지는 니가타현 가시와자키시이다. 저먼타운 프렌즈 스쿨(Germantown Friends School), 일본여자대학 부속 중학교·고등학교를 거쳐 와세다 대학 상학부를 졸업했다.

와세다 대학 재학 시절에는 연극 서클 극단 코다마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동기로는 쿠메 히로시와 나가츠카 교조가 있었다. 대학 졸업 후인 1969년까지 극단 구름 연구소에 소속되어 여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2.2. 결혼과 가족

1969년, 일본강관 직원이던 다나카 나오키와 결혼했다. 남편은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의 데릴사위로 들어가면서 다나카 나오키로 개명했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마나코, 차녀는 마미코, 장남은 다나카 유이치로이다.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가 병환 중일 때는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2.3. 정치 경력

다나카 마키코는 1993년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같은 해 7월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구 니가타 3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득표 1위로 당선되어 초선 의원이 되었다. 이후 자민당에 입당했다.

1994년 무라야마 내각에서 과학기술청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년차 의원임에도 장관으로 입각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교육실습자원봉사 활동 의무화 제안을 실현시켜 논란을 일으켰다.

1996년 제4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니가타 5구에서 자민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재선에 성공했다.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탄생에 크게 기여하여 외무대신에 취임했다. (외무대신 시절의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 참조)

2002년 8월, 비서 급여 횡령 의혹으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같은 해 9월 도쿄 지방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고, 2003년 11월 무소속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다시 출마했다.

2009년 8월 15일,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입당을 표명했다. 하토야마 유키오 대표는 "부부 동반 민주당 입당을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밝혔다. 같은 해 9월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 발족에 따라 중의원 문부과학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했다. 2011년 9월 노다 내각 발족에 따라 중의원 외무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했다.

2012년 10월, 노다 제3차 개조내각에서 문부과학대신에 임명되어, 2001년 제1차 고이즈미 내각 이후 약 11년 만에 세 번째 입각을 했다. 같은 해 11월, 2013년 봄 개교 예정이었던 3개 대학 신설 불허를 시사했다가, 문부과학성은 11월 8일 신설 3개교를 정식으로 인가했다.

2012년 12월 16일 총선에서 낙선했고, 12월 26일 사퇴했다.

2.3.1. 외무대신 시절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탄생에 크게 기여하여 여성 최초로 외무대신에 취임했다.

외무대신 재임 중, 고이즈미 내각 및 외무성 관료들과 여러 갈등을 겪었다. 2001년 4월 26일 외무상 취임 직후, 미국 리처드 아미티지 부장관과의 회담에서 일본 정부의 입장과 달리 미사일 방위 구상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밝혔다. 또한, 콜린 파월 장관과의 전화 통화에서 아미티지 차관의 방일을 고대한다고 말했지만, 정작 아미티지 차관이 일본에 와서 고이즈미 총리를 만나려 하자 직전에 일정을 취소하기도 했다.

9·11 테러 직후에는 당시 기밀 정보였던 파월 국무장관과 미국 국방부의 피난처를 기자회견에서 밝혀 논란이 되기도 했다.

북한에 대한 정책에서도 고이즈미 총리와 의견 차이를 보였다. 2001년 5월 1일,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이 출입국관리법 위반으로 나리타 국제공항(신 도쿄 국제공항)에서 체포되었을 때, 다나카는 "빨리 추방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2007년 스즈키 무네오의 질의에 대해 그러한 발언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후쿠다 야스오 총리 대신 마치무라 노부타카 관방장관이 답변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에 대해서도 고이즈미 총리와 강하게 대립했다.

외무성 관료들과의 관계도 순탄치 않았다. 다나카는 외무성을 "마귀굴(伏魔殿)"이라 부르며 비판했고, 외무성 기밀비 유용 사건과 자신이 추진하려 했던 외무성 개혁 및 인사 문제로 외무성과 대립했다. 특히 외무성 관료들의 인사 이동에 개입하려 했으나, 장관에게는 인사권이 없어 부처 내부의 반발을 받고 무산되었다.

스즈키 무네오와의 갈등도 있었다. 외무대신 재임 중, 북방 영토 반환 문제와 외무성 개혁 등을 둘러싸고 당시 중의원 의원 운영 위원장으로 외무성에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스즈키 무네오와 갈등을 빚었다.

결국 2002년 1월, 아프가니스탄 재건 회의에 NGO 피스윈즈 재팬의 참석 취소 사건에 대해 다나카가 "사무국은 '스즈키 의원으로부터의 압력이 있었다'고 자신에게 말했다"고 발언하면서,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다나카 대신과 노가미 기지 외무차관총리대신 관저로 불러 두 명을 경질했다. 다나카는 카메라 앞에서 눈물을 흘렸고, 이 사건으로 고이즈미 내각의 지지율은 크게 하락했다.

2.4. 외무대신 경질 이후

2002년, 비서 급여 유용 의혹으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자유민주당을 탈당했다. 2003년 11월, 무소속으로 중의원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9년 8월, 민주당에 입당했다. 같은 해 9월,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 발족에 따라 중의원 문부과학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했다. 2011년 9월에는 노다 내각 발족에 따라 중의원 외무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했다.

2012년 10월 1일, 노다 요시히코 내각 개편으로 문부과학대신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2일, 대학 신설 불허 문제로 논란을 일으켰다. 문부과학대신이 문부과학성의 자문 기관인 대학 설치·학교 법인 심의회의 결정을 번복한 것은 30년 만의 일이었다. 결국 비판 여론에 밀려 결정을 번복하고 신설을 승인했다.

2012년 12월 16일 총선에서 낙선했다. 같은 해 12월 26일, 문부과학대신 직에서 사퇴하며 정계를 사실상 은퇴했다.

3. 정치 성향 및 평가

다나카 마키코는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의 정치적 기반을 이어받아 니가타현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중도진보(사회자유주의) 성향으로 분류되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포퓰리즘적인 언행을 자주 보였다는 비판을 받았다. 아버지 다나카 가쿠에이를 배신한 다케시타 노보루 파벌에 속한 사람들을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에서 외무대신으로 재임할 당시, 외무성 관료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외교 정책 수행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스즈키 무네오와의 갈등은 큰 논란을 일으켰다.

자민당 탈당 이후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등 자민당 주류 정치인들을 비판하는 발언을 자주 했으며,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와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특히, 독도는 일본 영토라는 고이즈미의 발언을 강하게 비판했다.

민주당 입당 후에는 간 나오토, 노다 요시히코 등 민주당 내 주요 정치인들과도 갈등을 빚었다.

다나카 마키코의 언행은 때때로 다른 정치인에 대한 단순한 욕설이나 인격 비방으로 이어진다는 비판을 받았다.

3.1. 비판 및 논란

다나카 마키코는 다른 정치인에 대한 인신공격성 발언으로 여러 차례 논란이 되었으며, 특히 단순한 욕설이나 인격 비방이 많다는 지적을 받았다.

* 외무대신 시절:
* 외무성 직원들과의 갈등 및 외무대신으로서의 자질 논란을 일으켰다. 2001년 가을 가든파티에 자신의 후원회 관계자를 참석시키지 못한 것에 항의하여 외무성 인사과에 2시간 동안 틀어박혀 여성 직원에게 인사과장 경질 명령서 작성을 강요하는 소동을 일으켰다.
* 자신의 반지가 없어졌다며 비서관에게 백화점에 가게 해 이란 외무장관과의 회담에 30분 늦는 "반지 소동"을 일으켰다.
* 9·11 테러 직후, 당시 기밀 정보였던 콜린 파월 국무장관의 피난처(아링턴 국립묘지)와 미국 국방부의 피난처(스미소니언 박물관)를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 외무성을 "마귀굴(伏魔殿)"이라 부르며, 외무성 기밀비 유용 사건과 자신이 추진하려 했던 외무성 개혁 및 인사 문제로 외무성과 대립했다.
* 북방 영토 반환 문제와 관련하여 스즈키 무네오와의 갈등과 관료들과의 마찰이 있었다.
* 2002년 1월, 아프가니스탄 재건 회의에 NGO 피스윈즈 재팬의 참석 취소 사건에 대해 “사무국은 ‘스즈키 의원으로부터의 압력이 있었다’고 자신에게 말했다”고 발언하여 논란이 되었다.

* 비서 급여 유용 의혹:
* 2002년, 비서 급여 유용 의혹으로 의원직을 사퇴했다. 사민당의 쓰지모토 기요미 의원과 함께 비서 급여 유용 의혹이 보도되었고, 두 사람 모두 의원직을 사퇴했다.
* 2003년 9월, 도쿄 지방법원은 "공설 비서에게는 근무 실태가 있었다"며 불기소 처분(혐의 없음)을 내렸다.

* 문부과학대신 시절:
* 2012년 11월, 대학 신설 불허 문제로 논란을 일으켰다. 문부과학성의 자문 기관인 대학 설치·학교 법인 심의회의 인가를 받은 3개 대학(아키타공립예술대학, 삿포로보건의료대학, 오카자키여자대학)의 신설을 불허했다가, 여론과 언론의 반발 및 민주당 내부의 압력으로 결정을 번복하고 신청을 승인했다.
* 국립경기장 건설에 대해, 2012년 11월에 문부과학상으로 재임하던 시기에 결정된 자하 하디드 안을 백지화한 것에 대해, 이미 지출된 약 6200이 동일본 대지진 피해자들을 위해 사용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내용의 독자 투고를 마이니치 신문에 기고했다.

* 기타 논란:
* 2003년 10월, 후지시마 마사유키 후보 지원 연설에서 북한에 의한 납치 피해자 가족 연락회와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기 위한 전국 협의회를 비판했다.
* 2004년 3월, 장녀의 기사와 관련하여 장녀가 프라이버시 침해를 이유로 기사 출판 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여 인용되었으나, 이후 도쿄고등법원에서 취소되었다.

* 정치인에 대한 비판적 발언들:
*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에 대해 "치마를 밟고 있었다", "미국을 너무 좋아한다", "멸치 찌꺼기 같은 얼굴" 등의 발언을 했다.
* 오부치 유코 의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공주님"이라고 비판했다.
*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에 대해 "69세 복사 인간", "곧 70세, 노인 요양 시설에 갈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 아베 신조 전 총리에 대해 "아버지의 신발을 신고 뛰쳐나가 오른쪽으로 갔다", "작은 폭죽" 등의 발언을 했다.
* 아소 다로 전 총리에 대해 "익살스런 총리", "알츠하이머" 등의 발언을 했다.
* 간 나오토 전 총리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 이시하라 신타로 전 도쿄도지사에 대해 "폭주 노인"이라고 비판했다.
*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에 대해 "아베가의 음식물 쓰레기통 뚜껑"이라고 비판했다.
* 이시바 시게루 의원에 대해 "낫토 떡"이라고 비판했다.
* 키시다 후미오 의원에 대해 "냉동 투명 인간"이라고 비판했다.
* 그 외에도 노나카 히로무, 카메이 시즈카, 카토 고이치, 모리 요시로, 호소다 히로유키, 오기가타 센케이, 코이케 유리코, 하시모토 류타로 등 여러 정치인에 대해 인신공격성 발언을 했다.

다나카 마키코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작가 소노 아야코는 "언론에 각광받는 재능은 있지만, 정치가로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평가했다.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 또한 다나카 마키코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다.

4.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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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이름비고
부친다나카 가쿠에이제64·65대 내각총리대신
모친다나카 하나(구 성씨: 사카모토)
남편다나카 나오키제10대 방위대신
장남다나카 유이치로세리사법인 트러스트 CEO, 트러스트FAS주식회사 이사회장, 주식회사 비즈니스비전 대표이사회장
장녀마나코1974년생주간문춘 2004년 3월 25일호 기사에서 1974년 가을 임신 중이었다고 언급됨.
차녀마미코
마사노리4세에 사망
이부언니시즈코이케다 하야토의 조카(여동생의 아들)와 결혼. 이 조카의 사촌(이케다 하야토의 딸)은 브리지스톤 이시바시 쇼지로의 조카와 결혼하여 다나카, 이케다, 이시바시, 하토야마, 미쓰이 재벌 단가는 친척 관계임.
이부동생다나카 교, 유아버지의 첩 츠지 와코의 자녀.
이부여동생마사츠지 와코의 딸, 요절.
이부여동생사토 아츠코아버지와 사토 아키코의 자녀 (인지는 되지 않음)

5. 기타

니가타현 주에쓰 지방의 기업 에치고교통 그룹의 오너이다. 에치고 교통의 영업소는 선거시 정보 수집이나 표밭 다지기 등의 역할을 담당한다. 이는 아버지였던 다나카 가쿠에이가 구축한 것을 계승한 것이다. 에치고 교통 그룹은 다나카 마키코의 선거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22년 6월, 그룹 사장이 남편인 다나카 나오키에서 이비쿠로 바뀌었다. 나오키는 대표권이 있는 회장이 되었고, 회장이었던 마키코는 대표권이 있는 고문이 되었다.

아버지의 오랜 지지자들과의 마찰 중 하나로, 2004년부터 2005년에 걸쳐 발생한 JR 우라사역 앞에 서 있는 동상을 둘러싼 관리 단체와의 갈등을 들 수 있다. 2004년 11월, 다나카 마키코는 관리 단체인 “각우회”에 동상에 지붕을 씌워야 한다는 의견을 제안했으나 난색을 표했다. 2005년 2월, “다나카 각에이 기념관”을 통해 무쓰마치간이재판소에 조정을 신청했다. 협의 끝에 동상의 관리는 다나카 가문이 맡게 되었고 “각우회”는 해산되었다. 동상 자체는 지지자들이 다나카 가쿠에이의 지역 발전에 대한 공로에 감사하여 약 200을 들여 1985년에 건립한 것이다. 2005년에는 동상에 지붕이 설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