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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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권진이는 19세기 초 조선에서 순교한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이다.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천주교에 입교한 권진이는 12~13세에 결혼했으나 가난한 남편 때문에 친척 집에서 생활했다. 유방제 신부를 돕다 좋지 않은 소문으로 교회에 해를 끼치자, 회개하고 순교를 결심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모진 고문에도 신앙을 지켰으며, 1840년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1925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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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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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아가타 권진이 |
로마자 표기 | Agata Gwon Jin-i |
세례명 | 아가타 |
출생 | 1820년 |
출생지 | 서울 |
사망 | 1840년 1월 31일 |
사망지 | 서울 서소문 |
기념일 | 9월 20일 |
신분 | 순교자 |
시복 |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 |
시성 |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주요 성지 | 당고개 순교 성지 |
2. 생애
권진이는 한양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어머니 한영이와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였다.[1][2]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어머니, 이경이 등 동료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1][2] 혹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켰으며,[1][2] 1840년 1월 31일 한양 근교 당고개(현 용산구)에서 다른 천주교 신자 5명과 함께 참수형을 받고 21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1][2] 그녀의 어머니 성녀 한영이 막달레나 역시 기해박해 때 순교하였다.[1][2]
2. 1. 출생과 가정 환경
권진이는 한양의 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1][2] 아버지는 권 진사로 불리던 정부 관리였으며,[1][2] 어머니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성녀 한영이 막달레나이다.[1][2] 아버지의 임종 유언에 따라 권진이와 어머니 한영이는 천주교에 입교하였다.[1][2] 권진이는 12~13세 경 어린 나이에 결혼하였으나, 남편이 너무 가난하여 결혼식도 올리지 못했고 집도 없었기에 친척인 정하상의 집에서 얹혀살았다.[1][2]2. 2. 천주교 입교와 신앙 생활
권진이는 아버지 권 진사의 유언에 따라 어머니 한영이와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12~13세 경 어린 나이에 결혼하였으나, 남편이 경제적으로 어려워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집도 없어 친척인 정하상의 집에서 지냈다.[1][2]청나라 출신 사제인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권진이는 그의 식복사(성직자를 시중드는 사람)로 일하게 되었다. 권진이는 유방제 신부에게 처녀로 살기를 원한다고 밝혔고, 유방제 신부는 그녀의 혼인을 무효로 하여 그 뜻을 이루도록 도왔다.[2]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유방제 신부와 권진이의 관계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퍼져 교회에 어려움을 주었다.[2]
이에 새로 입국한 프랑스인 사제 모방 신부는 상황을 파악하고 유방제 신부를 청나라로 돌려보냈다. 모방 신부는 권진이를 불러 어려운 상황을 잘 극복하도록 격려하였고, 이 덕분에 몇 달 동안 교우들을 불안하게 했던 소문은 점차 가라앉았다. 권진이는 자신의 행동이 의도치 않게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음을 깨닫고 깊이 회개하였으며, 속죄의 마음으로 하느님을 위해 순교자가 되기로 결심했다.[2] 이후 어머니 한영이에게 돌아가 함께 살게 된 이경이와 더불어 신앙생활에 더욱 힘썼다.
2. 3. 유방제 신부와의 갈등과 회개
중국인 사제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권진이는 그의 식복사, 즉 성직자를 시중드는 사람으로 일했다.[1][2] 권진이는 유방제 신부에게 동정녀로 살기를 원한다고 말했고, 유방제 신부는 그녀의 요청에 따라 "동정녀가 될 수 있도록" 결혼을 무효화했다.[2]그러나 이후 유방제 신부와 권진이 사이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돌아 교회에 해를 입혔다.[2]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프랑스인 사제 모방 신부는 조선에 입국하자마자 유방제 신부를 청나라로 돌려보냈다.[2] 또한 모방 신부는 권진이를 곁에 불러 그녀가 어려운 상황을 잘 극복하도록 격려하였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몇 달 동안 교우들을 불안하게 했던 소문은 가라앉았다.
권진이는 자신의 행동이 의도치 않게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음을 깨닫고 깊이 회개하였다. 그녀는 속죄의 마음으로 스스로 하느님을 위해 순교자가 되기로 결심했다.[2] 이후 권진이는 어머니 한영이에게 돌아가 함께 살게 된 이경이와 더불어 신앙생활에 더욱 매진하였다.
2. 4. 기해박해와 체포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배교자 김여상의 밀고로 그해 7월 17일 권진이는 어머니 한영이와 이경이와 함께 체포되었다.[2] 권진이와 이경이는 포졸들의 감시 아래 사관청에 따로 감금되었다.[1][2]기록에 따르면, 평소 두 사람의 미모를 탐내던 김여상이 이들을 납치하려 했으나, 이를 동정한 몇몇 포졸들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한양에 있는 한 교우의 집에 숨을 수 있었다.[1][2] 다른 기록에서는 한 "배교자"(김여상으로 추정)가 권진이에게 자신과 함께 떠나면 자유를 주겠다고 제안하며 거절하면 위협했지만, 권진이가 이를 거부하자 경비병들이 동정심을 느껴 세 여성(권진이, 이경이, 하녀)의 탈출을 도왔다고도 전한다.[1]
그러나 먼저 체포되었던 한 하녀가 포졸들에게 이들이 숨은 곳을 밀고했고, 결국 권진이와 이경이는 다시 체포되었다.[1][2] 이들의 탈출을 도왔던 경비병들은 상사로부터 처벌을 받았다.[1] 다시 체포된 두 사람은 수많은 혹독한 고문에도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1][2] 특히 권진이는 법정에서 다리에 심한 매질을 당하는 형벌을 받았다.[1]
2. 5. 투옥과 순교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배교자 김여상의 밀고로 7월 17일 권진이는 어머니 한영이와 이경이와 함께 체포되었다.[1][2] 권진이와 이경이는 포졸들의 감시 아래 사관청에 따로 감금되었다. 평소 그들의 미모를 탐내던 김여상이 접근하여 자신과 함께 떠나면 자유를 주겠다고 제안하며 위협했으나[1], 권진이는 이를 거부했다. 그녀의 태도에 동정심을 느낀 몇몇 포졸들의 도움으로 두 사람은 탈출하여 한양의 한 교우 집에 숨었다.[1][2] 그러나 먼저 체포되었던 한 하녀가 포졸들에게 그들이 숨은 곳을 알렸고, 결국 다시 체포되었다. 탈출을 도왔던 포졸들은 처벌을 받았다.[1][2]재체포된 후 권진이는 혹독한 고문을 겪었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2] 법정에서는 다리에 심한 매를 맞기도 했다.[1] 감옥에서 어머니 한영이를 만나 천국에서의 영원한 행복을 희망하는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다.[2] 또한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 하느님의 뜻에 대한 깊은 애정과 순종의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2]
관찬 기록인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당시 21세였던 권진이는 1840년 1월 31일, 한양 근교의 당고개(현재 용산구)[1]로 압송되어 다른 다섯 명의 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1][2]
3. 시복 · 시성
권진이 아가타는 1925년 7월 5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9]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다.[10] 이후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집전한 미사 중 거행된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3][4][5][6]
권진이 아가타는 1839년부터 1840년까지 이어진 기해박해[3] 때 성녀 이성례 마리아를 포함한 10명의 다른 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이는 약 100년간 지속된 한국 천주교 박해의 일부로, 당시 조선 사회의 유교 질서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최대 1만 명에 달하는 신자들이 희생된 다섯 차례의 주요 박해 중 하나였다.
1984년 시성식에서는 권진이 아가타를 포함한 당고개 순교자 9명과 다른 한국 순교자들, 그리고 프랑스 선교사들을 포함하여 총 103명이 성인으로 선포되었다.[3][4][5][6] 한국의 주교들은 권진이 아가타에 대해 "이 젊은 한국 여성은 예수 시대의 마리아 막달레나보다 더 많은 눈물과 더 향기로운 향수를 하느님께 바쳤다"고 평가하였다.[2]
현재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위치한 당고개 순교성지는 권진이 아가타를 비롯한 순교자들을 기리는 성지로, 한국에서 세 번째로 많은 순교 성인을 모시고 있다.[7]
4. 평가
한국의 주교들은 권진이 아가타에 대해 "예수 시대의 마리아 막달레나보다 더 많은 눈물과 더 향기로운 향수를 하느님께 바쳤다"고 평가했다.[2]
권진이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였으며,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한국 103위 순교성인의 일원으로 시성되었다.[3][4][5][6] 이는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녀가 순교한 당고개에는 순교자들을 기리는 성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이곳은 한국에서 세 번째로 많은 순교 성인을 모시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7]
5. 같이 보기
- 성녀 이성례 마리아
- 성녀 아가타 이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기해박해
- 한국 103위 순교 성인
- 당고개 순교성지
5. 1. 관련 인물
- 성녀 이성례 마리아: 권진이의 어머니로, 1839년 기해박해 때 성녀 아가타 이를 포함한 10명의 수감자와 함께 처형되어 순교하였다.[3]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03위 순교 성인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3][4][5][6]
- 성녀 아가타 이: 권진이의 어머니 성녀 이성례 마리아와 함께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였다.[3]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03위 순교 성인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3][4][5][6]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1984년 방한하여 권진이의 어머니 성녀 이성례 마리아와 성녀 아가타 이를 포함한 103위 순교 성인을 시성하였다.[3][4][5][6]
5. 2. 관련 사건
권진이는 100여 년간 이어진 한국 천주교 박해 시기의 순교자 중 한 명이다. 당시 조선 사회는 천주교 신앙이 기존의 유교 질서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5차례의 큰 박해를 가했으며, 이 과정에서 최대 1만 명에 달하는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다.[2] 권진이는 1839년부터 1840년까지 이어진 기해박해 때 성녀 이성례 마리아를 비롯한 10명의 다른 신자들과 함께 처형되었다.[3] 한국의 주교들은 권진이에 대해 "이 젊은 한국 여성은 예수 시대의 마리아 막달레나보다 더 많은 눈물과 더 향기로운 향수를 하느님께 바쳤다"고 평가하기도 했다.[2]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을 방문하여 권진이를 포함한 한국 순교자 103위와 프랑스 선교사들을 시성하였다.[3][4][5][6] 권진이가 순교한 장소로 알려진 당고개에는 순교자들을 기리는 성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이는 한국에서 세 번째로 많은 순교 성인을 모신 곳이다.[7]
5. 3. 관련 장소
권진이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였다.[3] 그녀를 포함한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당고개에는 성지가 조성되어 있다.[7] 이 성지는 권진이를 포함하여 기해박해로 순교한 9명의 성인을 기리는 곳으로, 한국에서는 세 번째로 많은 순교 성인을 모시고 있는 장소이다.[7] 권진이를 포함한 이들 순교자들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03위 한국 순교 성인의 일원으로 시성되었다.[3][4][5][6]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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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Agatha Kwon Ch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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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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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Korean Martyr Saints - 권진이 아가타 Agatha Kwon Ch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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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s Martyred M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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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e Canonizes 103 Korean Martyrs: 6 May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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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e Canonizes 103 Martyrs in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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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Pope Francis to visit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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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위 성인 (百三位聖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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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화해와 평화..8월의 크리스마스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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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방송
2014-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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