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들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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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사들의 난은 1522년부터 1523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에서 일어난 제국 기사들의 반란이다.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소외, 그리고 종교 개혁의 영향으로 인해 발생했으며, 프란츠 폰 지킹겐과 울리히 폰 후텐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이들은 트리어 대주교를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지킹겐은 사망하며 반란은 진압되었다. 기사들의 난은 기사 계급의 몰락을 가속화시켰으며, 독일 농민 전쟁과 종교 개혁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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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들의 난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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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전쟁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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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름 | 독일어: Ritterkrieg (리터크리크) 독일어: Pfälzischer Ritteraufstand (팔츠 기사 반란) |
일부 | 유럽 종교 전쟁 종교 개혁 |
기간 | 1522년 8월 27일 ~ 1523년 5월 6일 |
장소 |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 라인 및 상부 라인 원 (현재의 남부 독일) |
결과 | 제국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 1 | 형제 협약지킹겐은 그의 군인들에게 제국 깃발을 휘날리게 했으며, 황제를 대신하여 행동한다고 주장했다. |
지휘관 및 지도자 | |
교전 1 지휘관 | |
교전 2 지휘관 | |
전력 |
2. 배경
중세 독일에서 기사는 전장의 핵심 전력이었으나, 화약의 등장에 따른 전술 변화, 화폐 경제 보급에 따른 봉건 제도 붕괴, 신성 로마 제국 내 법 정비와 영방 성장으로 점차 몰락해 갔다.
특히 독일 남서부 라인강 상류(오버라인 지방)는 소영지를 가진 하급 귀족과 영방 군주가 난립하여 혼란스러웠다. 이 지역 유력 기사인 지킹엔은 인근 제후나 도시를 공격해 배상금을 갈취하기도 했다.
울리히 폰 후텐 또한 이 지역 출신 기사로, 신학과 문학을 배우고 여러 나라를 다니며 인문주의에 감화되었다. 후텐은 교회에 대한 반감과 독일에 대한 애국심으로 반(反)로마주의자가 되었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으로 종교계가 분열되자, 1522년 가을 지킹엔과 후텐은 몰락 기사들을 이끌고 루터를 지지하며 가톨릭 교회를 몰아내겠다는 명분으로 트리어 대주교령을 공격했다. 그러나 1523년 봄 주변 제후들에게 진압되었다.
이 사건은 단순 돈벌이(페데), 프로테스탄트의 성급한 종교 개혁, 봉건 제도하 독일 기사의 생존 투쟁, 독일 농민 전쟁 서막, 독일 민족 자립과 통일을 위한 선구자들의 영웅담 등 다양하게 해석된다.
2. 1. 제국 기사 계급의 몰락
중세 시대 후기, 제국 기사들은 여러 요인으로 인해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도시 중심의 상업과 산업 발달은 전통적인 농업 경제를 위협했고, 금리 상승과 토지 가치 하락으로 기사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부유한 도시들은 자체 방어력을 갖추게 되면서 기사들의 군사적 영향력은 감소했다.로마법 도입으로 상위 귀족인 제후들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관습법에 의존하던 기사들은 정치적으로도 불리해졌다. 군사 기술과 전술의 발달 또한 기사들의 몰락을 가속화했다. 용병 란츠크네히트가 전쟁의 주력이 되었고, 1503년 체리뇰라 전투에서 아르케부스의 효과가 입증되면서 개인의 무용보다는 화약 무기의 중요성이 커졌다.[2] 1521년에는 머스킷으로 알려진 무거운 아르케부스가 등장했다.[3]
기사들은 도시나 상위 귀족과의 협력을 통해 개혁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4] 상위 귀족은 기사들의 개혁 요구에 소극적이었고, 도시와 농민들은 기사들을 불신했다.[9]
독일의 상황은 장미 전쟁 (1455–1485) 이후 헨리 7세가 중앙 집권화를 추진하며 봉건 귀족 세력을 약화시킨 영국과는 달랐다.[5][6] 헨리 7세는 상인 계급에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재정을 확보하고 상업을 장려하여 봉건 제도를 약화시켰다.[8]
그러나 독일은 강력한 중앙 정부가 없어 무역 관세 수입이 여러 공국과 봉토의 봉건 영주들에게 돌아갔다.[4] 작은 왕국과 봉토의 모자이크로 분열된 독일에서 기사들은 개혁을 위한 도시와 농민의 지지를 얻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4] 농민들은 농노제와 귀족 특권 폐지를 원했기 때문에 기사들과 협력하기 어려웠다.[9]
화약의 등장에 따른 전술 변화, 화폐 경제 보급에 따른 봉건 제도 붕괴, 신성 로마 제국 내 법 정비와 영방 성장은 기사 계급 몰락의 주요 원인이었다. 특히 독일 남서부 라인강 상류(오버라인 지방de・en)에서는 소영지를 가진 하급 귀족과 영방 군주가 난립했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 1522년 가을 지킹겐과 후텐은 몰락 기사들을 이끌고 트리어 대주교령을 공격했으나, 1523년 봄 주변 제후들에게 진압당했다. 이 싸움은 단순한 돈벌이, 프로테스탄트의 성급한 종교 개혁, 봉건 제도하 독일 기사의 생존을 위한 투쟁, 독일 농민 전쟁의 서장, 독일 민족 자립과 통일을 위한 선구자들의 영웅담 등 다양하게 해석된다.
1495년 막시밀리안 1세가 제정한 란트 평화령(영구 란트 평화령)은 제국 내 법과 질서에 기반한 지배 체계를 확립하고 제국 의회의 위상을 명확히 했다.
"란트 평화령"은 원래 신성 로마 제국 내 "페데"(사투)를 금지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효과가 없었다. 1495년 "영구 란트 평화령"은 제국 내 사법권을 확립하고, 영방 군주의 권리와 의무를 법제화했다.
영구 란트 평화령에 따라, 대중 지배, 세금 징수, 징병은 영방이나 제국 자유 도시가 담당하게 되었고, 제국 직속은 영방, 대중은 간접적 신민이 되었다. 하급 귀족인 기사 계층(de)은 제국 직속 신분임에도 제국 의회 표결권이 없었다.[12] de(라인강 상류, 독일 남서부)에는 제국 기사와 소영방이 많았다.
화약 등장과 기술 발전으로 전술이 변화하면서, 성능 좋은 대포와 철포, 시민병이 중요해졌다. 막시밀리안 1세가 "마지막 기사"로 불린 것처럼, 15세기 말~16세기 기사 시대는 끝나가고 있었다. 화폐 경제 보급과 도시 발전은 봉건적 기사 계급 지위를 낮췄다. 기사들은 영방에서 중용되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빈궁하여 도적 기사(Raubritter)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2. 2. 영구 평화령 (1495)
1495년 제국 의회에서 제국 도시들은 제국 의회에서 자신들의 대표성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는 여러 조항을 담은 항의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실제로 통과된 것은 사적 전쟁 금지 조항뿐이었다. 심지어 그 당시에도 제후들은 이 금지 조항이 기사들에게만 적용되고, 제후들이 참여할 수 있는 사적 전쟁은 특별히 면제되도록 했다. 이는 기사들에게 주요 수입원과 자부심을 빼앗는 결과를 가져왔다. 도시와 제후를 붙잡아 몸값을 요구하는 것이 기사들의 주요 수입원이었다.[12]15세기에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국정 개혁이 추진되어 제국 지배에 관한 법 제도가 정비되었다. 1495년 막시밀리안 1세가 제정한 란트 평화령(Ewiger Landfriede|영구 란트 평화령de)에 의해 이 제도는 일정한 완성을 보았다. 이 평화령은 제국 내 여러 자립 세력과 황제가 맺은 협약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제국 내에는 법과 질서에 기반한 지배 체계가 확립됨과 동시에 여러 세력으로 구성된 제국 의회의 위상이 명확해졌다.
"란트 평화령"은 1495년 이전에도 여러 차례 발포되었다. 그 원래 취지는 신성 로마 제국 내 "페데"(사투)를 금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페데는 합법성을 가진 결투의 일종으로, 원래는 적절한 절차를 통해 문제 해결을 무력으로 행하는 권리(페데권)였지만, 이윽고 몸값 목적의 유괴나 약탈의 방편으로 횡행하게 되었다. 이것을 금지하기 위해 "란트 평화령"이 종종 발포되었지만, 실제로는 별 효과가 없었다. 1495년의 "영구 란트 평화령"은 이 조치를 항구화하려는 명목으로 체결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제국 내 사법권이 확립되었고, 그 사법권을 유지하기 위해 각 영방 군주의 권리와 의무가 법제화되었다.
영구 란트 평화령에 따라, 대중을 직접 지배하고 세금을 징수하거나 징병을 실시하는 것은 영방(세속 제후인 영방 군주나 성계 제후인 대주교 등)이나 제국 자유 도시가 담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국의 직속 하에 있는 것은 영방이며, 대중은 간접적인 신민이 되었다. 특히 하급 귀족인 기사 계층의 신분 처리는 모호하여, 그들은 제국 기사로 위치 지어져 제국 직속인 듯했지만, 제대로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들은 제국 직속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제국 의회의 표결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12]
2. 3. 종교 개혁의 영향
르네상스의 한 갈래인 인문주의가 이탈리아에서 독일로 전해지면서, 독일에서는 애국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 또한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연구를 통해 성경 원문을 읽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났고, 이는 가톨릭 교회의 "공식" 라틴어 성경에 대한 비판과 교리 및 제도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졌다.독일 인문주의자의 대표 주자인 에라스무스는 가톨릭 사제로서 교회 내부에서 비판을 가했지만, 가톨릭 교회의 틀 안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은 일부 인문주의자들은 더 강력한 교회 비판을 전개하며 반(反)로마 정서를 조성했고, 이 흐름 속에서 루터가 등장하여 1517년 종교 개혁을 시작했다.
처음에 대부분의 인문주의자들은 종교 개혁을 "수도사들의 싸움"으로 여기며 관망했다. 그러나 1519년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루터와 요한 에크의 토론을 계기로 상황이 바뀌었다. 에라스무스에게 감명받은 인문주의자들 사이에서 루터를 지지하고 교회를 비판하며 반로마 입장을 명확히 하는 종교 개혁자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울리히 폰 후텐과 지킹겐은 모든 독립적인 공국 폐지, 독일어 사용 지역의 통일, 교회 공국과 영지의 세속화, "군주가 이끄는 귀족 민주주의" 설립을 주장하는 개혁안을 공동으로 마련했다.[10] 후텐의 영향으로 지킹겐의 에버른부르크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루터교 사상의 중심지가 되었다. 지킹겐은 요한 로이힐린이 쾰른의 도미니코회에서 탈출하도록 도왔고, 마틴 부처와 요하네스 오이콜람파디우스 등 다른 개혁가들을 보호했다. 보름스 국회 이후 마르틴 루터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려 했으나, 루터는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와 함께 머물기로 결정했다.
3. 주요 인물
프란츠 폰 지킹겐과 울리히 폰 후텐은 기사들의 난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지킹겐은 크라이히가우 출신의 제국 기사로, 에베른부르크 성을 본거지로 삼아 라인 지방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마르틴 루터를 보호하려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에게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후텐은 슈테켈베르크 성 출신의 하급 귀족으로, 에라스무스와 교류하며 인문주의적 관점에서 교회를 비판했다. 루터를 지지하며 교회 개혁을 위해 그의 힘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이 외에도 부처와 Johannes Oekolampadius|오콜람파디우스영어 같은 인문주의자들이 종교 개혁에 참여했다. 부처는 도미니코회 수사 출신으로 루터와 츠빙글리의 중재자 역할을 했으며, 스트라스부르에서 종교 개혁을 이끌었다. 오콜람파디우스는 에라스무스의 성서 번역을 돕고, 바젤 대학교 신학 교수로 개혁 교회 관점에서 종교 개혁을 수행했다.
3. 1. 프란츠 폰 지킹겐 (1481-1523)

'''프란츠 폰 지킹겐'''(1481년-1523년)은 독일 남서부 크라이히가우 출신의 제국 기사였다. 보름스 서쪽에 있는 에베른부르크 성을 본거지로 삼았으며, 알자스 지방까지 영지를 넓혔다. 영지 내 철과 수은 광산 덕분에 라인 지방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 기사로 성장했다.
지킹겐은 뛰어난 무예를 바탕으로 1517년부터 막시밀리안 1세 황제의 군사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1519년에는 슈바벤 동맹과 뷔르템베르크 공국의 울리히 공작 간의 전투에서 울리히 추방군의 주력으로 참전했다.
하지만 지킹겐은 성격적 결함으로 주변과 잦은 갈등을 빚었다. 그는 배상금을 노리고 인근 제후들을 공격했는데, 1515년부터 1518년까지 보름스 시, 헤센 방백 필리프 1세의 다름슈타트, 로렌 공작 앙투안을 공격해 금화 35,000냥을, 메츠 시를 포위해 금화 20,000냥을 뜯어냈다. 상인들을 습격하기도 했다. 1519년 막시밀리안 1세 사후, 황제 선거가 진행 중이던 프랑크푸르트 시까지 공격했다.[13]
1521년 봄, 마르틴 루터가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로부터 보름스 제국 의회 출두 명령을 받았다. 지킹겐은 루터의 주장에 공감하여 카를 5세에게 루터 보호를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고, 부하를 보내 자신의 본거지인 에베른베르크 성으로 피신하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루터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3. 2. 울리히 폰 후텐 (1488-1523)
울리히 폰 후텐은 1488년 프랑켄 지방과 헤센 방백령 경계 부근, 슈테켈베르크 성에서 태어난 하급 귀족이다. 기사 신분이었지만, 후텐 가문은 쇠퇴하고 있었다. 10세에 신학교에 들어가 독일 각지에서 신학을 공부했지만, 18세 무렵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의 프랑크푸르트-오데르 대학에서 문학을 접하고 신학교를 중퇴, 문학의 길로 들어서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인문주의에 눈을 떴지만, 라이프치히에 유행병이 돌아 몇 년간 여행을 떠났다. 북해를 방랑한 뒤, 보헤미아, 빈, 파비아, 볼로냐를 방문했다. 이 동안 학생이자 용병으로 생활했다고 한다.1514년 독일로 돌아온 후텐은 에라스무스와 친분을 맺고 몇 년을 함께 보냈다. 저술 활동을 했으며, 『Epistulae obscurorum virorum』(1516년) 등의 작품이 알려져 있다. 인문주의 입장에서 교회를 비판했지만, 교리나 교황을 직접 공격할 정도는 아니었다. 1517년에는 막시밀리안 1세로부터 계관 시인의 명예를 받았다. 이후 Erzstift Magdeburg|마그데부르크 대주교|label=마그데부르크 대주교de Albrecht von Brandenburg|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 (1490-1545)|label=알브레히트de를 섬겼다. 그는 루터에 의한 교회 비판의 방아쇠를 당긴 인물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반로마적인 저작 때문에 알브레히트 곁을 떠나야 했다.
그 후에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여러 차례 서신을 보내 가톨릭 교회의 개혁 필요성을 설파했지만 무시되었다. 격렬한 애국심과 로마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며 교회에 대한 혁명적 투쟁을 기획했다. 처음에는 라틴어였지만, 나중에는 독일어로 쓰여졌으며, 1520년에는 『대화집』을 저술했다. 이는 독일의 애국주의와 로마 교회 비판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후텐은 인문주의자들 중에서 정치가로서 가장 눈에 띄는 존재가 되었다.
후텐은 교회 비판을 시작한 루터에게 서신을 보내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제가 곁에 있습니다. 우리는 공동의 자유를 옹호합시다"라고 말하며 루터를 강력하게 지지한다고 표명했다. 그러나 후텐은 루터파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교리 면에서는 루터와 생각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지만, 교회 개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루터의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521년 보름스 제국 회의에 루터 소환이 결정되자, 후텐은 카를 5세에게 간곡히 편지를 보내 루터의 생각을 받아들일 것을 호소했다.
종교 개혁의 움직임은 루터의 의도와 달리 급진적이고 과격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루터는 관용과 인내로 천천히 착실한 개혁을 원했지만, 보름스 제국 회의에 참석하여 제국 금지령을 선고받은 루터가 그 직후 "실종"되면서, 지도자를 잃은 종교 개혁파가 과격해져 버린 것이다. 후텐은 "검과 펜의 투사"로서 그러한 과격한 봉기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입장이 되었다.
프란츠 폰 지킹겐과 알게 된 후, 후텐과 지킹겐은 모든 독립적인 공국 폐지, 모든 독일어 사용 지역의 단일 국가 정부 통일, 모든 교회 공국과 영지의 세속화, 그리고 "군주가 이끄는 ''귀족 민주주의''"의 설립을 요구하는 일련의 개혁안을 공동으로 마련했다.[10] 후텐과 지킹겐은 이 프로그램이 농민들이 기사들과 함께 개혁을 추진하도록 격려하기에 충분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후텐의 영향으로 지킹겐의 에버른부르크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이후 루터교 사상의 중심지가 되었고, 많은 팸플릿이 성에서 나왔다. 지킹겐은 요한 로이힐린이 쾰른의 도미니코회에서 탈출하도록 도왔고, 마틴 부처와 요하네스 오이콜람파디우스와 같은 다른 개혁가들을 보호했다. 그는 심지어 보름스 국회 이후 마르틴 루터에게 피난처를 제공했지만, 루터는 대신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와 함께 머물기로 결정했다.
1521년 봄, 이미 교회로부터 파문을 선고받은 루터에게 황제 카를 5세로부터 제국 의회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이 도착했다. 이때, 후텐이 지킹겐에게 루터에 대해 이야기하자, 지킹겐은 루터의 주장에 공감했다고 한다. 이후 지킹겐은 종교 개혁 초기 루터의 군사적 보호자로서 작센 선제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존재로 행동했다. 지킹겐은 직접 카를 5세에게 루터를 보호하라는 서한을 보내는 한편, 부하 부처를 제국 의회가 열리는 보름스로 가는 길에 있는 루터에게 보내, 에버른부르크 성으로 도망가도록 권유했다. 그러나 이때 루터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3. 3. 기타 인물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은 인문주의자들 중에는 교회를 더욱 가혹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반(反) 로마 분위기를 조성했고, 그 속에서 루터가 등장하여 혹독한 교회 비판을 가하며 1517년에 종교 개혁의 시작을 알렸다.인문주의에서 종교 개혁으로 전향하여 종교 개혁가로서 이름을 남긴 인물로는 부처(Martin Bucer, 1491-1551)와 Johannes Oekolampadius|오콜람파디우스영어(1482-1531)가 있다.
부처는 도미니코회 수사였으며, 루터와 츠빙글리와 교류하며 두 사람의 중재를 했던 인물이다. 1520년부터 지킹겐과 함께 행동했다. 부처는 기사 전쟁 이후 제국 자유 도시 스트라스부르로 옮겨 그곳에서 종교 개혁을 완수하게 된다.
오콜람파디우스는 뷔르템베르크 공국 출신으로, 바젤에서 에라스무스의 성서 번역에 협력했다. 1518년에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성직을 얻었지만, 종교 개혁을 겪으며 교회의 모습에 대해 고민하여 수도원으로 물러났다. 그곳에서 복음주의에 눈을 뜨게 되어 지킹겐에게로 왔다. 오콜람파디우스는 기사 전쟁 후에 바젤 대학교 신학 교수가 되어 개혁 교회의 입장에서 종교 개혁을 수행하게 된다.
4. 전쟁의 경과
1522년 황제가 스페인에 있는 동안, 지킹겐은 기사들의 "형제 협약"을 소집했다.[9] 이들은 제국 의회에서 열악한 대표성을 통해 얻을 수 없었던 것을 무력으로 얻기로 결의하고, 루터와 그의 지지자들의 강력한 반대자인 트리어의 리하르트 주교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9] 지킹겐은 자신의 군대와 이웃 기사들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소집하고 제국 깃발을 휘날리며 황제를 대신하여 행동한다고 주장했지만, 뉘른베르크의 제국 의회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제국 추방령의 위협 아래 작전 중단을 명령했다.[9]
지킹엔은 우애 동맹의 기사들을 이끌고 트리어 대주교의 영지를 공격했다. 당시 트리어 대주교 리샤르트 폰 그라이펜클라우는 1519년 황제 선거 때 카를 5세의 대항마였던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를 지지했던 인물이었다.[17] 지킹엔 군은 먼저 장크트 벤델을 손쉽게 함락시키고, 9월 8일 저녁에 트리어에 도착하여 교외에 진을 쳤다.
트리어의 병력은 1,800명이었던 반면, 지킹엔 측의 병력은 8,000~12,000명 정도였다. 지킹엔은 트리어의 항복을 예상했지만, 트리어 대주교는 농성을 결정하고 철저히 항전했다. 결국 지킹엔은 9월 14일에 진을 철수하고 귀가했다.
지킹겐은 에버베르크를 떠나 난슈타인 성(란츠튈 근처)에서 겨울을 보내며 투쟁을 계속하려 했다.[11] 리하르트 대주교, 루이 5세 팔츠 선제후, 헤센 방백 필리프가 란츠튈 근처 그의 성을 포위했을 때, 지킹겐은 최소 4개월은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새로운 포병 무기의 위력을 과소평가했다. 일주일 만에 그의 방어는 붕괴되었으며, 그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1523년 5월 7일, 그는 세 명의 제후에게 항복했고, 부상으로 사망했다.[11]
4. 1. 형제 협약 (1522)
1522년, 황제가 스페인에 있는 동안, 지킹겐은 기사들의 "형제 협약"을 소집했다.[9] 협약은 그를 지도자로 선출하고, 제국 의회에서 열악한 대표성을 통해 기사들이 얻을 수 없었던 것을 무력으로 얻기로 결의했다.[9] 기사들이 반란을 시작하기 위해 선택한 목표는 트리어의 리하르트 주교였다.[9] 그는 루터와 그의 지지자들의 강력한 반대자였다.[9] 공격의 명분은 몇 년 전에 그들을 사로잡았던 다른 기사에게 두 시의원이 지불하지 않은 몸값이었다.[9] 지킹겐의 선전 포고는 도시 사람들이 항복하고 대주교를 전복하도록 장려하여 기사들이 포위 공격을 하는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고안된 종교적 수사로 가득 차 있었다.[9]지킹겐은 일부는 자신의 힘으로, 일부는 이웃 기사들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소집했다.[9] 지킹겐은 그의 병사들에게 제국 깃발을 휘날리게 했고, 황제를 대신하여 행동한다고 주장했다.[9] 그러나 카를 5세의 부재 동안 섭정 역할을 한 뉘른베르크의 제국 의회는 동의하지 않고, 제국 추방령의 위협 아래 그의 작전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9] 작전은 가을에 시작되었는데, 이는 지킹겐이 그 해 더 이상 진격할 의도가 없었음을 나타낸다.[9]
4. 2. 트리어 포위전 (1522)
1522년 8월, 지킹엔은 우애 동맹의 기사들을 이끌고 트리어 대주교의 영지를 공격했다. 당시 트리어 대주교 리샤르트 폰 그라이펜클라우는 1519년 황제 선거 때 카를 5세의 대항마였던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를 지지했던 인물이었다.[17]트리어 대주교령은 성계 제후 중 최대 세력이었지만, 그 본거지 트리어 도시의 군사력은 7명의 선제후 영지 중 가장 작았다. 지킹엔 군은 먼저 장크트 벤델을 손쉽게 함락시키고, 9월 8일 저녁에 트리어 대주교의 본거지 트리어에 도착하여 교외에 진을 쳤다.
이때 트리어를 지키는 병력은 겨우 1,800명이었던 반면, 지킹엔 측의 병력은 총 8,000~12,000명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지킹엔은 이 병력 차이로 트리어는 쉽게 항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트리어 대주교는 농성을 결정하고 철저히 항전하기로 했다. 지킹엔은 트리어를 포위하고, 트리어 대주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배신하고 프랑스와 내통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결국 지킹엔은 트리어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9월 14일에 진을 철수하고 귀가했다.
4. 3. 란츠슈툴 성 포위전 (1523)
지킹겐은 에버베르크를 떠나, 최근 대대적인 보수를 마친 그의 가장 강력한 성인 난슈타인 성(란츠튈 근처)에서 겨울을 보내며 투쟁을 계속하려 했다.[11] 리하르트 대주교, 루이 5세 팔츠 선제후, 헤센 방백 필리프가 란츠튈 근처 그의 성을 포위했을 때, 지킹겐은 최소 4개월은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고, 그동안 증원군이 도착하여 그를 구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11]그러나 그는 새로운 포병 무기의 위력을 과소평가했다. 일주일 만에 그의 방어는 붕괴되었으며, 그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1523년 5월 7일, 그는 세 명의 제후에게 항복했고, 부상으로 사망했다.[11]
5. 결과 및 영향
"기사들의 난" 주요 지지자들은 대부분 성을 몰수당했다. 마인츠 선제후는 음모에 연루된 혐의로 벌금을 부과받기도 했다. 기사들은 인플레이션 심화, 농업 쇠퇴, 영주들의 요구 증가, 그리고 합법적인 '강도질'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된 "기사들의 난" 실패로 인해 일반적으로 파산했다.
이후 대부분의 기사들은 소규모 영주로 살면서 농민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매기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들은 이제 실질적인 독립을 잃었고, 그들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들은 영주들을 위한 유능한 관리자, 사제, 장군으로 활동했다. 플로리안 가이어와 같은 소수의 기사들은 굴복을 거부하고 몇 년 후 농민들의 반란을 도왔다.
"기사들의 난" 동안 교회 십일조 납부를 거부하는 행위가 널리 퍼지면서, 이후 농민 계층으로 확산되었고, 이는 농민 전쟁의 원인 중 하나인 십일조 납부 거부로 이어졌다. 따라서 해당 지역의 정부는 부패한 기관을 처리해야 하거나, 농민들이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약탈할 수밖에 없었다.
화약의 등장에 따른 전술 변화, 화폐 경제 보급에 따른 봉건 제도 붕괴, 신성 로마 제국 내 법 정비와 영방 성장으로 몰락해 가던 기사들은 란츠크네히트라는 용병으로 모습이 변해, 30년 전쟁에서 독일 각지에 파멸적인 파괴를 초래하게 되었다. 16세기 후반 제국 직속 기사 신분이 개선되어 지방마다 기사 사령관(리터하우프트만)이 설치되었고, 그 소유지 내 영주 재판권과 종교상 벌령권, 군역과 제국세 면제 등이 규정되었으며, 이러한 특권 대신 상납금을 황제에게 직접 납부하게 되었다.
루터는 이 소란을 부정적으로 보고, 『세속 권위에 관하여』(Zwei-Reiche-Lehre)를 저술하여 기사들을 단죄했다. 루터는 이 안에서 위에 서는 권위에 따를 의무를 설파했다. 권력에 거스르는 것은 권력자가 복음을 부정하도록 강요하는 경우뿐이며, 그럴 경우에도 가능한 것은 영지를 떠나는 것뿐이라고 설파했지만, 이는 나중에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이 가톨릭 황제 침략으로부터 영지를 지키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전쟁 후, 부처는 질버라이젠이라는 수녀와 결혼하여 스트라스부르로 이주했고, 성직자이면서 아내가 있다는 것은 파계였지만, 시 참사회는 이들 성직자를 비호하게 되었다. 이렇게 부처는 스트라스부르 종교 개혁에 선두를 섰다. 후에 슈말칼덴 동맹이 결성되자, 부처는 남서 독일 여러 도시를 이끌고 이에 가맹했다.
에콜람파디우스도 전쟁 후 스위스로 도망쳐 바젤 출판업자에게 몸을 숨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젤에서 다시 설교를 시작하여 복음주의 가르침을 널리 퍼뜨렸다.
헤센 방백은 루터파 입장에서 종교 개혁 그룹 대동 단결을 호소했지만, 종교 개혁파 내부에는 교리와 이해관계 차이로 다양한 유파로 분파되었으며,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루터와 츠빙글리가 갈라져 대동 단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헤센 방백은 작센 선제후와 함께 1530년대 슈말칼덴 동맹을 주재하게 되었다.
헤센 방백은 과거 뷔르템베르크에서 쫓겨난 울리히(헤센 방백의 백부)가 루터파로 개종하자 그를 지원하게 되었다. 뷔르템베르크 공령은 합스부르크 가 영지로 편입되었으며, 남독일에서 가톨릭(합스부르크 가)과 프로테스탄트(울리히) 사이 정치 문제가 되었다.[22] 독일 남서부 여러 도시가 잇따라 프로테스탄트로 전환되자 슈바벤 동맹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1532년 트리어 대주교 등에 의해 해산이 결정되었다. 뷔르템베르크를 지킬 세력이 없어지자, 헤센 방백은 울리히에게 병사를 주어 뷔르템베르크를 합스부르크 가의 페르디난트로부터 빼앗게 했다. 이 결과 뷔르템베르크 공국은 슈말칼덴 동맹의 남독일 최대 세력이 되었다.
6. 후대의 평가
화약의 등장에 따른 전술 변화, 화폐 경제 보급에 따른 봉건 제도 붕괴, 신성 로마 제국 내 법 정비와 영방 성장으로 몰락해가던 독일 기사들의 이 싸움에 대한 평가는 입장이나 시대에 따라 다양하다. 단순한 돈벌이 싸움이었다는 것부터, 프로테스탄트의 성급한 종교 개혁, 봉건 제도에서 독일 기사의 생존을 건 영지 다툼, 독일 농민 전쟁의 서장, 독일 민족의 자립과 통일에 헌신한 선구자들의 영웅담 등 여러 해석이 있다.
마르틴 루터는 이 소란을 부정적으로 보고, 『세속 권위에 관하여』(Zwei-Reiche-Lehre)를 저술하여 기사들을 단죄했다. 루터는 이 책에서 위에 있는 권위에 따를 의무를 설파했다.
19세기에 독일 제국으로 통일되면서, 독일 통일을 위한 애국심을 고취할 소재로 종교 개혁과 그 시대 투사들에 관한 작품이 다수 나왔다. 후텐과 지킹겐의 이야기는 독일 민족을 위해 싸우다 패배한 인물로서 인기 있는 소재 중 하나였다. 여기에서는 후텐의 애국적 성격이 강조되었다. 대표작 중 하나가 시인 콘라트 페르디난트 마이어(1825-1898)의 운문 소설 『''훗텐의 마지막 날들'' (''Huttens letzte Tage'') 』(1872년)이다. 이 작품 속에서 기사 전쟁의 지도자들은 "농민 전쟁의 지도자", "역사 속의 비극적이고 영웅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1774-1840)는 1823년, 기사 전쟁 300주년을 기념하여 『''훗텐의 무덤'' (''Huttens Grab'') 』이라는 연작을 발표했다.
참조
[1]
문서
Sickingen had his soldiers fly the Imperial flag, and he claimed he was acting on behalf of the Emperor.
[2]
서적
The Gunpowder Age: China, Military Innovation, and the Rise of the West in World History
Princeton University Press
[3]
서적
The Renaissance at War
Cassell & Co.
[4]
간행물
The Peasant War in Germany
International Publishers: New York
[5]
간행물
[6]
서적
A History of England
Holt, Rinehart and Winston, Inc: New York
[7]
서적
A History of England
[8]
서적
A History of England
[9]
간행물
The Peasant War in Germany
[10]
간행물
The Peasant War in Germany
[11]
간행물
The Peasant War in Germany
[12]
문서
帝国騎士(ライヒスリッター)よりもさらに格下の、「ラント騎士(ラントリッター、Landritter)」と呼ばれる階層もあった。
[13]
문서
この脅しによって、ジッキンゲンは帝国侍従の地位を認めさせている。
[14]
문서
ドイツの南部は、おおまかに西のシュヴァーベン地方と東のバイエルン地方に大別される。バイエルン地方にはバイエルン大公があり、ドイツ南東部からオーストリアにかけての広い地域を支配した。一方シュヴァーベン地方は小諸侯や都市が乱立していた。シュヴァーベン地方の勢力は、バイエルン公国に対抗するために15世紀の後半に同盟を結成した。これがシュヴァーベン同盟である。神聖ローマ皇帝マクシミリアン1世のとりなしによって両者は和解したが、今度は同盟とヴュルテンベルク公が対立するようになった。
[15]
문서
ヤン・ジシュカは15世紀のフス戦争の英雄である。
[16]
문서
7人の内訳は、世俗諸侯としてザクセン選帝侯、プファルツ選帝侯、ブランデンブルク選帝侯、ボヘミア王の4人、聖界諸侯としてマインツ大司教、トリーア大司教、ケルン大司教の3人。
[17]
문서
皇帝選挙は7名の選帝侯の多数決によって行われるが、多数票を得た候補を最終的に全選帝侯が全会一致で選出する、ということになっている。
[18]
문서
ジッキンゲンの勢力範囲であるライン川流域は、ドイツとフランスの国境地帯にあたり、これまでもジッキンゲンはしばしばフランス側の勢力や町を攻撃していた。
[19]
문서
「プファルツ地方」というのはライン川の上流域の地方名である。プファルツの領主は神聖ローマ帝国の初期に宮中伯という要職に任じられており、「ライン宮中伯」とも呼ばれていた。このライン宮中伯に選帝侯位が授けられて、プファルツ選帝侯と呼ばれるようになった。
[20]
문서
はじめはエラスムスに匿ってもらおうとしたが、断られたという。
[21]
문서
エーレンブライトシュタイン要塞はライン川岸の岩山の上に築かれており、現存する。
[22]
문서
この時期には各諸侯が自領地の宗派を選ぶ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っており、南西ドイツ最大の領地をもつヴュルテンベルク公領がカトリックになるのかプロテスタントになるのかは、両派にとって重大な意味を持つことにな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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