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는 독일 루터교 목사이자 신학자인 마르틴 니묄러가 나치 정권의 억압에 저항하며 쓴 시로, 사회적 무관심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니묄러는 처음에는 히틀러를 지지했지만, 나치의 종교 탄압에 반대하여 고백교회를 창설하고 나치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체포되어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으며, 2차 세계 대전 후 석방되어 독일 국민의 참회와 화해를 이끌었다. 이 시는 다양한 판본으로 존재하며,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유대인 등 박해받는 집단을 언급하며, 결국 침묵하는 개인에게까지 그 피해가 미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는 미국, 한국 등 여러 나라에서 사회 운동, 대중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한국에서는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권위주의 정권에 저항하는 메시지로 널리 인용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홀로코스트 문학 - 페트르 긴츠
페트르 긴츠는 체코슬로바키아 출신 유대인 소년으로, 테레지엔슈타트 강제 수용소에서 잡지 《베뎀》을 창간하고 편집장으로 활동했으며, 그의 그림 '달에서 본 지구'는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기리는 상징으로 사용되는 등 그의 삶과 업적은 다양한 방식으로 기려지고 있다. - 반파시즘을 소재로 한 작품 - The Wall
The Wall은 핑크 플로이드의 록 오페라 앨범으로, 록 스타 핑크의 삶을 통해 버려짐, 폭력, 고립과 같은 주제를 탐구하며, 멤버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되어 상업적 성공과 함께 다양한 형태로 각색되었다. - 반파시즘을 소재로 한 작품 - 벨라 차오
벨라 차오는 이탈리아 포 강 유역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요에서 기원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중 파르티잔들이 저항의 상징으로 부르면서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자유, 평등, 저항의 상징이 되었고, 다양한 사회 운동과 영화를 통해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이탈리아 민요이다. - 인지 관성 - 현상 유지 편향
현상 유지 편향은 손실 회피, 보유 효과, 인지적 제약 등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현재 상태를 선호하고 변화를 꺼리는 심리적 경향을 말하며, 개인의 의사 결정은 물론 사회, 경제, 정치 등 여러 분야에 영향을 미친다. - 인지 관성 - 인지부조화
인지 부조화는 상반된 믿음이나 정보 간의 충돌로 발생하는 정신적 불편함이며, 사람들은 이를 해소하기 위해 인지를 변화시켜 조화를 추구한다는 이론이다.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 | |
---|---|
개요 | |
![]() | |
내용 | '나치 정권 하의 지식인과 성직자를 포함한 특정 집단의 수동성에 대한 후회의 표현이다.' '처음에는 공산주의자들을, 그 다음에는 사회주의자들을,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에게 왔다.' |
기원 | '마틴 니묄러 목사가 다양한 연설에서 언급한 내용에서 유래' |
주제 | 정치적 박해, 침묵의 위험성, 개인의 책임 |
영향 | '홀로코스트와 전체주의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로 널리 인용됨' |
전문 (다양한 버전) | |
버전 1 |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유대인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항의할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
버전 2 | '처음에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잡으러 왔다, 그리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다음에 그들은 사회주의자들을 잡으러 왔다, 그리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다음에 그들은 노동조합원들을 잡으러 왔다, 그리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다음에 그들은 유대인들을 잡으러 왔다, 그리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을 때, 나를 위해 말해 줄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맥락 및 해석 | |
역사적 배경 | '나치 독일 시기, 다양한 집단에 대한 박해' |
니묄러의 의도 | '개인의 침묵과 무관심이 사회에 미치는 위험 경고' |
현대적 의미 | '인권과 사회 정의 옹호의 중요성 강조' |
인용의 정확성 | |
니묄러의 실제 발언 | '여러 연설에서 다양한 형태로 표현, 정확한 문구는 다를 수 있음' |
변형 및 오해 | '시간이 지나면서 문구가 바뀌거나 의미가 왜곡될 수 있음' |
같이 보기 | |
관련 항목 | 마틴 니묄러 고백교회 나치즘 홀로코스트 전체주의 |
외부 링크 | |
참고 자료 | '마틴 니묄러 재단: 니묄러는 실제로 무엇을 말했나?' 'Harold Marcuse: 니묄러, 유명한 인용구 "그들이 처음 공산주의자들을 잡으러 왔을 때..."의 기원' '인권운동사랑방: ‘인권문헌읽기’ 마틴 니묄러 “그들이 왔다”' |
2. 역사
마르틴 니묄러는 1892년 독일 립슈타트에서 태어난 루터교회 목사이자 신학자였다. 니묄러는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히틀러의 등장을 지지했다. 그러나 히틀러가 국가의 우월성을 종교처럼 주장하자, 니묄러는 환멸을 느꼈다. 그는 히틀러를 반대하는 독일 성직자 그룹의 리더가 되었지만, 다른 독일 성직자들은 나치의 위협에 굴복했다. 히틀러는 개인적으로 니묄러를 매우 싫어하여 그를 체포했으며, 결국 작센하우젠과 다하우 강제 수용소 등에 감금했다. 니묄러는 1945년 연합군에 의해 강제수용소에서 풀려났다. 그는 독일에서 성직자로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국민들을 참회와 화해를 이끄는 대변자로서 활동했다.
1946년 1월 6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고백 교회 연설에서 니묄러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1]
> "... 당시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들이었습니다. 누가 그들을 신경이나 썼겠습니까? 우리는 알았고,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누가 목소리를 높였을까요, 아마 고백 교회가?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공산주의자, 종교의 반대자, 기독교의 적들—'내가 내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까?'
>
> 그러다 그들은 병든 사람, 소위 불치병 환자들을 제거했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나눈 대화를 기억합니다. 그는 "아마도 옳은 일일 것입니다. 이 불치병 환자들은 국가에 돈만 들게 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될 뿐입니다. 그들을 [사회]에서 제거하는 것이 모두에게 최선이 아닙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제야 교회는 이를 알아차렸습니다.
>
> 그러다 우리는 말을 하기 시작했고, 우리의 목소리는 다시 공개적으로 침묵당했습니다.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
> 유대인 박해, 우리가 점령지를 대했던 방식, 또는 그리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또는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일들은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고백 교회 기독교인들이 다음과 같이 말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만약 내가 발언했더라면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는 변명으로 우리는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
> 우리는 침묵을 지키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우리에게 분명 과실이 있으며, 저는 1933년 또는 1934년에—가능성이 있었을 텐데—독일의 14,000명의 개신교 목사와 모든 개신교 공동체가 죽을 때까지 진실을 옹호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끊임없이 자문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때 헤르만 괴링이 단순히 10만 명의 공산주의자를 수용소에 가둬 죽게 내버려두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면 말입니다. 저는 어쩌면 3만에서 4만 명의 개신교 기독교인들이 목숨을 잃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3천만에서 4천만 명의 사람들을 구출했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치르고 있는 대가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연설은 1947년에 영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지만, 니묄러가 나치의 초기 지지자였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나중에 철회되었다.[5] 1955년 니묄러의 연설 버전에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학교, 유대인, 언론, 교회가 언급되었으며, 이는 니묄러의 말을 인용한 독일 교수의 인터뷰에서 인용되었다. 미국의 한 대표는 1968년에 비슷한 연설을 했지만, 공산주의자는 생략하고 나치에 의해 개별적으로 표적이 된 산업 자본가들을 포함시켰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타바버라의 해럴드 마르쿠세 교수가 확인한 증거에 따르면,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 박물관 버전은 니묄러가 종종 "공산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했지 "사회주의"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정확하다.[1] "공산주의자" 대신 "사회주의자"를 사용하는 것은 반공주의의 영향이며, 미국에서 널리 퍼진 버전에서 가장 흔하게 나타난다. 마르쿠세에 따르면, "니묄러의 원래 주장은 그와 그의 청중이 본능적으로 신경 쓰지 않을 집단을 지목하는 것을 전제로 했습니다. 워싱턴에서 공산주의자를 생략하고 독일에서 유대인을 생략하는 것은 그 의미를 왜곡하며 수정되어야 합니다."[1]
1976년 니묄러는 시의 기원에 대한 인터뷰 질문에 "제가 한 말에 대한 기록이나 사본은 없으며, 다르게 표현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디어는 어쨌든 다음과 같았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우리는 여전히 침착하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리고 노동 조합도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심지어 사회 민주당원도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었습니다."라고 답했다.[6] ''마틴 니뮐러 재단''은 이것을 연설의 "고전" 버전으로 간주한다.
2. 1. 나치 정권과의 관계
니묄러는 국가주의 보수주의자로서 바이마르 공화국에 반대하며 1933년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을 환영했다. 그는 히틀러가 국가 부흥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었다.[1] 그러나 히틀러가 종교에 대한 국가의 우위를 주장하며 종교를 국가에 종속시키려 하자, 이에 반대하며 1934년 가을 카를 바르트, 디트리히 본회퍼와 같은 루터교 및 개신교 성직자들과 함께 고백교회를 창설했다. 고백교회는 독일 개신교 교회의 나치화에 반대하는 개신교 단체였다.[1]1935년 설교에서 니묄러는 유대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하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 온 [그들의] 반유대주의의 명백한 처벌 이유는 무엇인가? 형제 여러분, 그 이유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1] 그러나 그는 자신의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유대인 후손들을 보호했는데, 이들은 인종적 반유대주의로 인해 나치에게 박해를 받았다.[1]
1936년에는 나치의 "아리아인 조항"에 분명히 반대했다. 니묄러는 나치 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아리아인 조항이 자비라는 기독교적 덕목과 양립할 수 없다고 선언한 개신교 성직자 그룹의 청원에 서명했다.[1] 나치 정권은 대규모 체포와 약 800명의 목사 및 교회 변호사에 대한 혐의로 대응했다.
그는 투옥된 후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역할을 되살려 잠수함 사령관으로 자원했지만, 이 제안은 나치 당국에 의해 거부되었다. 작가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토마스 만은 니묄러의 설교를 미국에서 출판하고 그의 용기를 칭찬했다.[1]
2. 2. 체포와 수감
1937년 마르틴 니묄러는 나치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설교와 활동으로 인해 체포되어 작센하우젠 강제 수용소와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잠수함 함장이었던 경력을 들어 석방을 조건으로 군 복무를 제안했지만, 나치 당국에 의해 거부당했다.2. 3. 석방 이후
1945년 연합군에 의해 강제수용소에서 풀려난 마르틴 니묄러는 독일에서 성직자로서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국민의 속죄와 화해를 위한 주요 대변자 역할을 했다.3. 시의 내용과 논란
이 시는 나치가 권력을 잡은 후, 독일에서 다양한 집단들을 점차적으로 탄압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노동조합원, 유대인 등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박해가 시작되었지만, 결국에는 모두가 피해자가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는 여러 판본이 존재하며, 언급되는 집단의 순서나 종류가 조금씩 다르다. 1946년 연설에서 마르틴 니묄러는 공산주의자, 불치병 환자, 유대인 또는 여호와의 증인, 점령 국가 국민을 언급했다. 1955년 문서에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학교, 언론, 유대인, 교회가 등장한다. 1976년 인터뷰에서 니묄러는 "공산주의자, 노동조합, 사회민주당, 유대인" 순서로 언급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다양한 판본이 존재하는 이유는 니묄러 자신이 여러 차례 표현을 바꾸기도 했고,[12] 시가 구전되면서 내용이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에서는 반공주의 정서 때문에 '공산주의자'를 '사회주의자'로 바꾸거나 아예 삭제하는 경우가 많았다.[1]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타바버라의 해럴드 마르쿠세 교수는 "니묄러의 원래 주장은 그와 그의 청중이 본능적으로 신경 쓰지 않을 집단을 지목하는 것을 전제로 했다"며, 미국에서 공산주의자를 생략하는 것은 시의 의미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1]
3. 1. 원문과 번역문
이 시는 독일에서 수년간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1955년 밀턴 마이어가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They Thought They Were Free'')》라는 책으로 출판하였다.[16] 이 인용은 1960년대 말 미국의 사회운동가들에게 널리 퍼졌다. 그러나 시의 정확한 원본은 불명확하며, 적어도 한 명의 역사가는 이 시가 니묄러 사후에 생겼다고 잘못 주장하기도 했다.[16] 최근 연구에 따르면, 니뮐러는 1946년에 이 시에서 표현된 취지를 담은 연설을 했다.[17]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 기원, 그리고 이 시의 여러 버전에서 언급되는 집단들의 이름과 순서에서, 이 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1946년 연설에서 니묄러는 공산주의자, 불치병에 걸린 자, 유대인 혹은 여호와의 증인 신자(연설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점령당한 국가의 국민을 언급한다. 1955년 문서에서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또는 학교, 언론, 유대인 등등'이며, 마지막엔 '교회'로 끝난다.
2001년 11월 리처드 존 뉴하우스가 인용하면서, 1971년에 니묄러에게 정확한 버전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그렇게 멋진 말을 했던 때를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만일 사람들이 그것을 인용하고자 한다면, 그는 다음과 같은 버전을 선호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독일에서) 그들이 처음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유대인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이어서. . . 그들이 내게 왔을 때 . . .
:그때는 더 이상 나를 위해 말해 줄 이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르틴 니묄러 (1892년-1984년) 목사의 시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의 원문과 번역은 다음과 같다.
원문 | 번역 |
---|---|
Als die Nazis die Kommunisten holten, |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
1950년대부터 유포되기 시작한 이 고백의 가장 잘 알려진 영어 버전은 시 형태로 편집된 버전이다.[1]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 박물관은 이 연설의 많은 시적 버전 중 하나로 다음 텍스트를 인용한다:[2][3]
홀로코스트 기념일 트러스트(영국 정부가 설립한 자선 단체)의 더 긴 버전은 다음과 같다:[4]
1946년 1월 6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고백 교회 연설에서 니뮐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일부를 고백했다:[1]
> "... 당시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들이었습니다. 누가 그들을 신경이나 썼겠습니까? 우리는 알았고,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누가 목소리를 높였을까요, 아마 고백 교회가?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공산주의자, 종교의 반대자, 기독교의 적들—'내가 내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까?'
>
> 그러다 그들은 병든 사람, 소위 불치병 환자들을 제거했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나눈 대화를 기억합니다. 그는 "아마도 옳은 일일 것입니다. 이 불치병 환자들은 국가에 돈만 들게 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될 뿐입니다. 그들을 [사회]에서 제거하는 것이 모두에게 최선이 아닙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제야 교회는 이를 알아차렸습니다.
>
> 그러다 우리는 말을 하기 시작했고, 우리의 목소리는 다시 공개적으로 침묵당했습니다.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
> 유대인 박해, 우리가 점령지를 대했던 방식, 또는 그리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또는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일들은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고백 교회 기독교인들이 다음과 같이 말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만약 내가 발언했더라면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는 변명으로 우리는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
> 우리는 침묵을 지키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우리에게 분명 과실이 있으며, 저는 1933년 또는 1934년에—가능성이 있었을 텐데—독일의 14,000명의 개신교 목사와 모든 개신교 공동체가 죽을 때까지 진실을 옹호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끊임없이 자문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때 헤르만 괴링이 단순히 10만 명의 공산주의자를 수용소에 가둬 죽게 내버려두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면 말입니다. 저는 어쩌면 3만에서 4만 명의 개신교 기독교인들이 목숨을 잃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3천만에서 4천만 명의 사람들을 구출했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치르고 있는 대가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연설은 1947년에 영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지만, 니뮐러가 나치의 초기 지지자였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나중에 철회되었다.[5] 1955년 니뮐러의 연설 버전에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학교, 유대인, 언론, 교회가 언급되었으며, 이는 니뮐러의 말을 인용한 독일 교수의 인터뷰에서 인용되었다. 미국의 한 대표는 1968년에 비슷한 연설을 했지만, 공산주의자는 생략하고 나치에 의해 개별적으로 표적이 된 산업 자본가들을 포함시켰다.
니뮐러는 그의 생애 동안 이 텍스트의 여러 버전을 사용한 것으로 인용되지만,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타바버라의 해럴드 마르쿠세 교수가 확인한 증거에 따르면,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 박물관 버전은 니뮐러가 종종 "공산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했지 "사회주의"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정확하다.[1] "공산주의자" 대신 "사회주의자"를 사용하는 것은 반공주의의 영향이며, 미국에서 널리 퍼진 버전에서 가장 흔하게 나타난다. 마르쿠세에 따르면, "니뮐러의 원래 주장은 그와 그의 청중이 본능적으로 신경 쓰지 않을 집단을 지목하는 것을 전제로 했습니다. 워싱턴에서 공산주의자를 생략하고 독일에서 유대인을 생략하는 것은 그 의미를 왜곡하며 수정되어야 합니다."[1]
1976년, 니뮐러는 시의 기원에 대한 인터뷰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1] ''마틴 니뮐러 재단''("Martin Niemöller Foundation")은 이것을 연설의 "고전" 버전으로 간주한다.
기본적인 내용은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이 박해 대상을 점차 확대해 가는 모습에 공포를 느끼면서도 "나는 해당 집단의 관계자가 아니니까"라며 외면하다가, 정작 자신이 박해 대상이 되었을 때 사회에는 목소리를 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강력한 메시지성을 내포하고 있기에 정치에 무관심한 층을 향한 호소로 세계 각국에서 널리 인용되어 왔지만, 니묄러 본인도 종종 표현을 바꾸었고, 인용자에 의해 수정·부가되기도 하여 많은 판본이 존재한다. 이러한 판본에서는 새롭게 박해 대상에 추가되는 집단으로, 사회주의자(사회민주주의자), 노동조합원, 유대인, 장애인, 가톨릭 교회, 여호와의 증인, 도시 노동자 등이 언급되며 순서도 앞뒤가 바뀐다.[12] 참고로, 처음에 연행되는 대상으로 언급되는 것은 반드시 공산주의자이다.
니묄러는 1976년의 인터뷰에서 "공산주의자, 노동조합, 사회민주당, 유대인" 순서로 언급한 것이 처음이라고 답변했지만, 1946년에는 "공산주의자, 불치병 환자, 유대인과 여호와의 증인, 나치에 의해 점령된 나라의 사람들" 순으로 언급한 연설이 있어, 그의 회상은 정확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12]
니멜러 재단은 1976년 니멜러에 대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시를 재구성하고 있다. 니멜러는 이 인터뷰에서 유대인 박해에 대해서도 언급했지만, 재단이 작성한 시에는 유대인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11] 재단은 니멜러가 1933년 9월에 반나치 운동을 시작했고, 1937년에 강제 수용소에 수감된 점을 들어, 유대인이 수용되기 시작한 시기나, 가톨릭 교회에 대한 공격이 본격화된 시기를 체감하지 못했다고 보고 있다.[11]
미르턴 마이어는 1955년 저서 『그들은 자유라고 생각했다』에서 독일인 교수에게 들은 이야기로 니묄러의 행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12]
마루야마 마사오는 논문 「현대에서의 인간과 정치」(1961년)에서 같은 책에서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1950년대에 미국에서 이 시가 소개되었을 때, 공산주의자에 대한 구절은 삭제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공산주의의 위협'이 선전되고 매카시즘과 적색 공포가 한창이던 사회적 배경을 반영한 것이다. 1968년에는 연방 의회에서 실업가가 '유대인 → 가톨릭교도 → 실업가와 노동조합 → 개신교 교회' 순서의 버전을 인용했고, 같은 해에 의원이 이를 인용했다.[12] 영국과 미국에서 자주 보이는 포스터에는 '사회주의자 → 노동조합원 → 유대인 → 나' 순으로 이어지며, 역시 공산주의자의 존재가 삭제되어 있다. 한편, 타임에서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50주년인 1989년 8월 28일에 발표된 판에서는 '공산주의자 → 유대인 → 가톨릭 교회 → 나' 순으로 이어진다.
이 시는 사회파 음악에도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Yellow Triangle''" 등이 있다. 또한, 다른 사회 문제를 다룰 때, 언급 대상이 변경된 버전도 제작되었다.[12]
3. 2. 다양한 판본과 논쟁
이 시의 정확한 원본은 불분명하며, 마르틴 니묄러 자신도 여러 차례 표현을 바꾸었다.[16][17] 1946년 연설에서는 공산주의자, 불치병 환자, 유대인 또는 여호와의 증인, 점령 국가 국민을 언급했다.[1] 1955년 독일 교수의 기록에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학교, 언론, 유대인, 교회가 등장한다.[12] 이러한 차이는 시가 구전되면서 변형되었거나, 니묄러의 기억이 불완전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1971년 리처드 존 뉴하우스가 니묄러에게 정확한 버전에 대해 질문했을 때, 니묄러는 자신이 그런 말을 한 시점을 특정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인용하고자 한다면 다음 버전을 선호한다고 답했다:[1]
> (독일에서) 그들이 처음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 이어서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에게 왔을 때,
>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 이어서 그들이 유대인들을 덮쳤을 때,
>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 이어서. . . 그들이 내게 왔을 때 . . .
> 그때는 더 이상 나를 위해 말해 줄 이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1976년 인터뷰에서 니묄러는 시의 기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했으며,[1] 마틴 니묄러 재단은 이것을 연설의 "고전" 버전으로 간주한다.[1]
> 제가 한 말에 대한 기록이나 사본은 없으며, 다르게 표현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디어는 어쨌든 다음과 같았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우리는 여전히 침착하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리고 노동 조합도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심지어 사회 민주당원도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니묄러 재단은 1976년 인터뷰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시를 재구성했다.[13]
> 나치가 공산당원을 잡으러 왔을 때,
> 나는 침묵했다.
>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니까.
>
> 그들이 사회민주당원을 가두었을 때,
> 나는 침묵했다.
>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으니까.
>
> 그들이 노동조합원을 잡으러 왔을 때,
> 나는 침묵했다.
>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니까.
>
>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을 때,
> 항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밀턴 마이어는 1955년 저서 《그들은 자유라고 생각했다》에서 독일인 교수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니묄러의 행동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12]
> 목사 니묄러는 나와 같은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을 대신하여, (자신에 대해 너무 겸손하게) 말했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를 공격했을 때 그는 약간 불안했지만, 결국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사회주의자를 공격했고, 그는 약간 더 불안했지만, 여전히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학교, 언론, 유대인 등을 공격했고, 그는 항상 더 불안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를 공격했고, 그는 교인이었다. 그래서 그는 무언가를 했다. 그러나 그때는 너무 늦었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논문 「현대에서의 인간과 정치」(1961년)에서 위 내용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14]
> 나치가 공산주의자를 공격했을 때, 나는 약간 불안해졌다. 그러나 결국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
> 그러고 나서 나치는 사회주의자를 공격했다. 나의 불안은 약간 증가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
> 그러고 나서 학교가, 신문이, 유대인이, 라는 식으로 차례차례 공격의 손길이 더해져, 그 때마다 나의 불안은 증가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
> 자, 그러고 나서 나치는 교회를 공격했다. 그리고 나는 바로 교회의 인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무언가를 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이미 늦었다.
특히 미국에서는 반공주의 정서로 인해 '공산주의자' 대신 '사회주의자'가 사용되거나 아예 삭제되는 경우가 많았다.[1] 이는 시의 본래 의도를 왜곡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타바버라의 해럴드 마르쿠세 교수는 "니묄러의 원래 주장은 그와 그의 청중이 본능적으로 신경 쓰지 않을 집단을 지목하는 것을 전제로 했습니다. 워싱턴에서 공산주의자를 생략하고 독일에서 유대인을 생략하는 것은 그 의미를 왜곡하며 수정되어야 합니다."라고 지적했다.[1]
4. 시의 메시지와 영향
니묄러의 시는 나치가 박해 대상을 점차 확대해 가는 모습에 공포를 느끼면서도 "나는 해당 집단의 관계자가 아니니까"라며 외면하다가, 정작 자신이 박해 대상이 되었을 때 사회에는 목소리를 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특정 집단에 대한 억압과 박해에 침묵하고 방관하는 것이 결국에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앗아가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한다.
이 시는 정치에 무관심한 층을 향한 호소로 세계 각국에서 널리 인용되었으며, 니묄러 본인도 종종 표현을 바꾸었고, 인용자에 의해 수정·부가되기도 하여 많은 판본이 존재한다.[12] 이러한 판본에서는 사회주의자(사회민주주의자), 노동조합원, 유대인, 장애인, 가톨릭 교회, 여호와의 증인, 도시 노동자 등이 언급되며 순서도 앞뒤가 바뀐다.[12]
다음은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 박물관이 인용하는 시의 한 버전이다.[2][3]
먼저 사회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 유대인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 그들이 나를 덮쳤을 때—나를 위해 말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홀로코스트 기념일 트러스트의 더 긴 버전은 다음과 같다.[4]
먼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 사회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 유대인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 나를 덮쳤을 때
아무도 남지 않았다
나를 위해 말해 줄 사람은
이 시는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 체제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차별과 혐오 현상에도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정치적 무관심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연대와 지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또한, 부당한 권력에 대한 저항과 비판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와 감시가 필수적임을 일깨워준다.
1950년대에 미국에서 이 시가 소개되었을 때, 공산주의자에 대한 구절은 삭제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공산주의의 위협'이 선전되고 매카시즘과 적색 공포가 한창이던 사회적 배경을 반영한 것이다.[12]
4. 1.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
1965년 재즈 뮤지션 찰스 밍거스는 "Don't Let it Happen Here"라는 곡에서 이 시를 차용했다.[1] 2006년 미국의 펑크록 밴드 Anti-Flag는 앨범 ''For Blood And Empire''의 노래 "Émigré"에서 이 시를 언급했다.[1] 2003년 미국의 펑크록 밴드 NOFX는 앨범 ''War on Errorism''의 노래 "Re-gaining Unconsciousness"에서 이 시를 차용했다.[1] 2007년 영국의 작사가 빌 프린스는 앨범 "Peace And Freedom"에서 이 시에 기초를 둔 "None Of My Business"를 녹음했다.[1] 2006년 아일랜드 포크록 가수 크리스티 무어는 이 시를 바탕으로 ''Yellow Triangle''를 녹음했다.[1]2007년 ABC 방송의 위기의 주부들 에피소드 "이웃의 한계"(''Art Isn't Easy'')에서 이 시가 언급되었다. 극중에서 리 맥더못(케빈 람 분)은 리네트 스카보(펠리시티 허프먼 분)에게 이 시의 변형된 버전을 암송한다.[1]
이 시는 예루살렘 서부의 홀로코스트 기념관 야드 바셈에 전시되어 있다.[1] 또한 버지니아 홀로코스트 박물관(리치몬드), 뉴잉글랜드 홀로코스트 기념관(보스턴), 플로리다 홀로코스트 박물관(세인트피터스버그), 일리노이 홀로코스트 박물관 및 교육 센터(스키키)에도 전시되어 있다.[1]

4. 2.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
대한민국에서는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이 시가 자주 인용되면서,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저항과 민주주의 가치 수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1980년대 민주화 운동 당시 학생, 노동자, 종교인 등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이 이 시를 통해 연대 의식을 고취하고, 군부 독재의 폭력과 억압에 맞서는 용기를 얻었다.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이 시는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 정치적 무관심과 냉소주의가 만연한 상황에서, 이 시는 시민들에게 연대와 참여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건강한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노력을 촉구하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Martin Niemöller's famous confession: "First they came for the Communists ... "
http://www.history.u[...]
[2]
백과사전
Holocaust Encyclopedia
https://encyclopedia[...]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2018-07-25
[3]
백과사전
Holocaust Encyclopedia
https://www.ushmm.or[...]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2018-07-25
[4]
웹사이트
First they came - By Pastor Martin Niemoller
https://www.hmd.org.[...]
[5]
웹사이트
Of Guilt and Hope
http://www.history.u[...]
[6]
웹사이트
Was sagte Niemöller wirklich?
http://martin-niemoe[...]
[7]
서적
First Commandment
London
1937
[8]
웹사이트
Die Bekennende Kirche
http://www.dhm.de/le[...]
Dhm.de
2014-06-19
[9]
뉴스
Niemoeller Volunteers for U-Boat Service; Nazis Reject Imprisoned Pastor's Offer
https://www.nytimes.[...]
2024-08-30
[10]
웹사이트
First they came for the Socialists...
http://www.ushmm.org[...]
2011-02-05
[11]
웹사이트
Was sagte Niemöller wirklich?
https://martin-niemo[...]
Martin Niemöller Stiftung
2024-12-11
[12]
웹사이트
Niemöller, origin of famous quotation “First they came for the Communists...”
https://marcuse.facu[...]
2024-12-11
[13]
웹사이트
„Als die Nazis die Kommunisten holten…..“
https://martin-niemo[...]
Martin Niemöller Stiftung
2024-12-11
[14]
웹사이트
過去の講義:3 「ある自由主義者への手紙」から学ぶこと|丸山眞男|21世紀の日本と国際社会
https://www.ne.jp/as[...]
2024-12-11
[15]
웹인용
‘인권문헌읽기’ 마틴 니묄러 “그들이 왔다”
http://sarangbang.or[...]
인권운동사랑방
2016-02-27
[16]
웹인용
Martin Niemöller
http://www.spartacus[...]
Spartus ducational, by John Simkin
2006-02-16
[17]
웹인용
Martin Niemöller
http://www.history.u[...]
2006-02-1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