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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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화 이론은 영화의 예술성을 탐구하는 학문 분야로, 20세기 초 이탈리아의 리치오니 카뉴도가 영화를 제7의 예술로 주장하며 시작되었다. 이후 프랑스의 루이 델뤼크는 포토제니 개념을 통해 영화의 예술성을 강조했고, 독일 표현주의 영화와 러시아 몽타주 이론을 거치며 발전했다. 몽타주 이론은 레프 쿨레쇼프,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등에 의해 체계화되었으며, 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앙드레 바쟁의 리얼리즘, 작가주의, 정신분석학, 젠더 연구 등 다양한 이론들이 등장했다. 현대 영화 이론은 장치 이론, 인지 영화 이론, 페미니스트 영화 이론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었으며, 한국 영화 이론 또한 몽타주 이론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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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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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론 정보 | |
학문 분야 | 영화학 |
하위 분야 | 영화 비평 기호학 정신분석학 문화 연구 젠더 연구 |
주요 인물 | 세르게이 예이젠슈테인 레프 쿨레쇼프 장루이 보드리 크리스티앙 메츠 로라 멀비 데이비드 보드웰 노엄 촘스키 슬라보예 지젝 |
관련 개념 | 몽타주 미장센 시선 내러티브 이데올로기 재현 주체 욕망 무의식 알튀세르 라캉 |
영향 받은 분야 | 영화 제작 영화 비평 미디어 연구 문화 정책 |
주요 저서 | "영화의 감각" (세르게이 예이젠슈테인) "영화 언어: 영화 기호학 입문" (크리스티앙 메츠)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 (로라 멀비) "내러티브 예술" (데이비드 보드웰) |
관련 학회 | 영화 연구 학회 (Society for Cinema and Media Studies) |
관련 저널 | 영화 분기별 (Cinema Journal) 영화 평론 (Film Criticism) 시선 (Camera Obscura) 사이트 앤 사운드 (Sight & Sound) 카이에 뒤 시네마 (Cahiers du Cinéma) |
2. 역사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1896)은 20세기 초 영화의 탄생과 함께 영화 이론의 발전을 예견했다. 베르그송은 운동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그러나 1906년 에세이 ''L'illusion cinématographique''에서 그는 영화를 자신이 염두에 두었던 것의 예로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 후, 철학자 질 들뢰즈는 ''시네마 I''과 ''시네마 II''(1983-1985)에서 ''물질과 기억''을 자신의 영화 철학의 기초로 삼고 베르그손의 개념을 재검토하여 찰스 샌더스 퍼스의 기호학과 결합했다.
초기 영화 이론은 무성 영화 시대에 등장했으며, 주로 매체의 핵심 요소를 정의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리치오토 카누도는 영화를 "''움직이는 조형 예술''"로 간주하고 영화에 "''제6 예술''"이라는 칭호를 부여한 초기 이탈리아 영화 이론가였으며, 나중에 "''제7 예술''"로 변경되었다.
1910년대 배철 린제이는 영화에 관한 책을 썼고, 1년 후 휴고 뮌스터버그가 뒤를 이었다. 린제이는 영화를 ''액션 영화'', ''친밀한 영화'', ''화려한 영화''의 세 가지 범주로 분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5] 그는 또한 영화를 연극의 촬영 버전으로 보고 ''포토플레이''라고 부르는 현대적 개념에 반대하며, 대신 영화를 ''카메라로 태어난'' 기회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또한 영화를 이미지에 기호를 포함한다는 의미에서 ''상형 문자''로 묘사했다. 그는 이러한 시각성이 영화에 보편적인 접근성을 부여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뮌스터버그는 영화 기법과 특정 정신 과정 사이의 유사점을 언급했다.[5] 예를 들어, 클로즈업을 마음이 주의를 기울이는 것에, 플래시백은 기억을 떠올리는 것에 비유했다. 이어서 영화 기법이 예술로서 영화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한 루돌프 아른하임의 ''형식주의''가 이어졌다.[5]
초기 프랑스 이론가 중 제르멘 륄라크는 겹쳐 찍기를 통해 영화에 ''인상주의''의 개념을 도입했다.[5] 장 엡스타인은 촬영이 사물에 "개성" 또는 "정신"을 부여하는 동시에 "거짓, 비현실, '초현실'"을 드러낼 수 있다고 언급했다.[5] 벨라 발라즈 또한 유사한 이유로 클로즈업을 칭찬했다.[5]
러시아 혁명 이후, 지카 베르토프와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작품에서 몽타주 이론이 나왔다.[5] 모스크바 영화 학교가 설립된 후, 레프 쿨레쇼프는 편집을 "영화 촬영술의 본질"로 삼아 영화의 형식적 구조를 연구하는 워크숍을 설립했다.[5] 에이젠슈테인은 "몽타주는 갈등이다"라고 주장했다.[5] 반면 베르토프는 키노-프라브다, 즉 ''영화의 진실''과 키노-아이를 개발하는 데 주력했는데, 그는 이것이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더 깊은 진실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6][7]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의 영화 평론가이자 이론가인 앙드레 바쟁은 영화의 본질은 현실과의 차이점이 아닌, 현실을 기계적으로 재현하는 능력에 있다고 주장했다.[8] 그는 예술의 목적이 현실을 보존하는 것이라고 믿었으며, "사진 이미지는 그 대상 그 자체이다"라는 유명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롱 테이크와 심도의 사용을 옹호했다.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 역시 사실주의가 영화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고 주장했다.[9]
작가주의는 알렉상드르 아스트뤽 등의 접근 방식에서 파생되었으며, ''카이에 뒤 시네마''의 기사에서 발전했다.[10] 프랑수아 트뤼포는 ''카이에''에 기고한 에세이에서 작가주의 선언문을 발표했다.[11] 조르주 사둘은 영화의 "작가"를 배우로 간주하기도 했지만, 영화는 실제로 협업적인 작품이라고 여겼다.[14]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영화 이론은 정신 분석학, 젠더 연구, 인류학, 문학 이론, 기호학 및 언어학과 같은 기존 학문 분야의 개념을 도입하여 학계에 자리 잡았다. 크리스티앙 메츠와 같은 학자들이 이러한 발전을 이끌었다.[16] 데이비드 보드웰은 1970년대 이후 영화 이론의 많은 주요 발전에 반대하는 "신포멀리즘"을 장려한다.[18]
1990년대 동안 영상 기술의 디지털 혁명은 영화 이론에 영향을 미쳤다. 메리 앤 도인, 필립 로젠, 로라 멀비와 같은 이론가들은 셀룰로이드 필름의 능력에 다시 초점을 맞췄다. 슬라보예 지젝은 "시선"의 새로운 측면을 제시했다.[19] 브라차 L. 에팅거의 매트릭스 이론[20]은 페미니스트 영화 이론을 혁신했다.[21][22] 그녀의 개념인 매트릭스적 시선[23]은 여성적 시선을 확립하고 남성적 시선과의 차이점을 명확히 한다.
클라이브 마이어는 ''비평적 영화: 실천 이론을 넘어서''(2011)에서 '영화는 집이나 미술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과는 다른 경험'이라고 주장하며, 영화 이론가들이 다른 매체와 구별되는 영화의 철학적 개념의 특수성을 재고할 것을 주장한다.
2. 1. 초기 이론 (1910년대 ~ 1940년대)
영화의 예술성을 이론적으로 처음 주장한 사람은 이탈리아인 리치오니 카뉴도(1879-1923)이다. 1911년, 그는 영화가 본질적으로 '빛의 펜'으로 그려지고 영상으로 만들어진 시각(視覺)의 드라마라고 주장했다. 그는 예술의 기본은 건축과 음악이며, 이를 보충하는 것으로서 그림과 조각과 시와 무용을 들었고,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 영화이며 움직임의 조형 예술이라 하여 영화를 제7의 예술이라고 주장했다. 카뉴도는 영화의 연극성을 부정함으로써 자기의 주장을 분명하게 하였고, 영화의 영상성(映像性)의 순수성에만 그 표현력을 제약했다고 할 수 있다.[30]프랑스의 루이 델뤼크(1890-1924)는 카뉴도의 영향을 받은 저널리스트이자 문학자였다. 그는 영화의 영상이 단순한 사진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유기적인 내재성을 주장하고 이것을 '''포토제니'''(photegenie)라 이름지었다.[30] 델뤼크는 포토제니의 4가지 기본적 요소로서 '장치', '조명(빛)', '억양(抑揚)', '마스크(面)'를 들고, 이 요소들을 감독이 자유로이 선택하고 짜맞춘 창조 위에 영화의 예술성이 성립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억양'을 중요시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몽타주론의 발전을 가져왔다. 델뤼크는 1920년대에 발달한 프랑스 전위 영화(아방가르드)의 이론적인 리더가 되었으나, 애석하게도 요절(夭折)했다.
프랑스에서 #몽타주론의 전제를 이루는 이론 정립이 활발해졌을 무렵, 독일에서도 사회학과 미학(美學)의 두 견지에서 영화의 예술론이 추구되었다. 콘라트 폰 랑게는 <현재와 미래의 영화>(1920)에서 영화의 예술성에 대한 부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는 영화가 대상(자연)을 기계적으로 재현하고 현실화할 뿐이며, 예술로서 필요한 의식적인 자기 기만성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즉, 인간의 정신적인 창작활동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랑게의 설은 1910년대 표현주의와 영화의 연결에 있어서 "소재를 제약하고 판타지의 표현을 추구"하는 면에서 1920년대의 영화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제1차 대전 패전 후 독일의 경제적·사회적 혼란은 표현주의를 크게 육성하는 요인이 되었다. 독일의 표현주의는 문학과 연극에서 영화에 미쳤으나 이론화되기 전에 <이기주의자>(1919)와 같은 걸작이 나왔다. 1921년 화가 한스 리히터(Hans Richter)는 추상적인 화상(畵像)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순수한 조형적인 실험영화를 발표하여, 급진적인 성격은 더욱 강력해졌다.
#포토제니론에서 표현주의 영화, 아방가르드 영화에 이르는 일련의 전위주의 영화의 이론적인 근거는 영상의 중요성과 움직임을 수반한 새로운 조형주의의 주장이라는 점에서 뚜렷이 밝혀져 있었다. 한편으로는 영화속 영상의 사실성에 영상의 의미를 제1의(第一義)로 주장하는 자가 나타났다. 그 선구자가 미래파의 영향을 받은 러시아 혁명 후 인민위원회의 뉴스영화의 일을 보고 있던 지가 베르토프(1896-1954)였다. 베르토프는 렌즈의 절대적인 묘사력을 믿어 의심치 않던 인물이었다. 그는 '''영화의 눈(영화안, 映畵眼)'''이 모든 것을 창조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몽타주론과 다큐멘터리론의 가능성을 내포한 베르토프의 <'''영화안(映畵眼, 키노키)'''>설이다. 그러나 베르토프의 이론은 카메라가 아무리 대상을 충실하게 잡았다 해도 편집단계에서 선택성이 개입하면 사실(事實)은 사실(事實)일 수 없게 된다는 점에서 자기모순을 안고 있었다.
영화이론은 '''몽타주론'''의 조직적인 추구에 따라 근본적으로 확립되었다. 몽타주(montage)는 프랑스어로 '짜맞추다', '결합하다' 등의 뜻이 있는데, 이 시기(1920년대)의 영화에 있어서는 촬영된 필름의 단편을 '편집하는' 기술용어였다. 몽타주의 중요성을 조직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베르토프와 같은 시대의 이론가 레프 쿨레쇼프(Lev Kuleshov)다. 쿨레쇼프는 필름 하나하나의 단편은 아직 영화가 아니라 그 소재에 지나지 않으며, 영화 예술은 이 필름들에게 순서를 부여했을 때에 시작된다고 주장했다.
쿨레쇼프의 주장은 '연쇄몽타주'라 불리고 있는데, 그것을 개개의 쇼트의 뜻을 지닌 진정한 몽타주론으로 전개시킨 것은 푸도프킨과 에이젠슈테인이다.
'''프세볼로드 푸도프킨'''(1893-1953)은 쿨레쇼프의 직접 계승자로, 영화예술의 기초는 몽타주라는 사고방식에서 출발한다. 그는 몽타주의 구성단위를 미시적(微視的)인 점까지 추구하여 슬로모션 촬영의 기교를 사용한 '시간의 클로즈업'에 대한 생각에까지 도달했다. 푸도프킨은 몽타주 방법론을 분석 확립했는데, 그에 따르면, 몽타주는 '대조', '병행', '유사(類似)', '동시성', '라이트 모티브'의 5가지 방법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1898-1949)은 영화의 표현은 변증법적인 비약으로서 달성된다는 점에서 쿨레쇼프와 푸도프킨의 연쇄설과 대조적이다. 그의 이론은 '상극(相剋) 몽타주'라고 불린다. 에이젠슈테인의 상극 몽타주의 근거는, 몽타주는 쇼트의 연쇄가 아니라 영상의 충돌이며, 이 충돌로 주장하고 설명할 개념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헝가리 시인이자 작가인 '''벨라 블라지'''(Bela Blazs, 1884-1949)는 1924년에 발표한 <시각적인 인간> 이후, 영화미학의 창조적인 계통 수립과 뛰어난 선견지명을 보인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몽타주와 같이 클로즈업을 중요시하여 이 두 가지가 영화언어(映畵言語)의 가장 큰 요소라고 말했다. 벨라 블라지와 동시대의 이론가로서는 <예술로서의 영화>의 저자인 독일의 루돌프 아른하임과 <영화의 문법>의 저자인 영국의 레이먼드 스포티스우드가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몽타주론의 영향을 받았다.
영국의 폴 로다(Paul Rotha, 1907-?)는 <다큐멘터리 영화>(1936)에서 몽타주의 기본이 되는 촬영대본(撮影臺本:콘티뉴이티)의 확립이 중요하다고 했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1896)은 20세기 초 영화 이론의 발전을 예견했다. 베르그손은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수십 년 후, 철학자 질 들뢰즈는 ''시네마 I''과 ''시네마 II''(1983-1985)에서 ''물질과 기억''을 자신의 영화 철학의 기초로 삼았다. 초기 영화 이론은 무성 영화 시대에 등장했으며, 주로 매체의 핵심 요소를 정의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리치오토 카누도는 영화를 "''움직이는 조형 예술''"로 간주하고 영화에 "''제6예술''"이라는 칭호를 부여했으며, 나중에 "''제7예술''"로 변경되었다.
1915년 배철 린제이는 영화에 관한 책을 썼고, 1년 후 휴고 뮌스터버그가 뒤를 이었다. 린제이는 영화를 ''액션 영화'', ''친밀한 영화'', ''화려한 영화''의 세 가지 범주로 분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5] 클로즈업을 마음이 주의를 기울이는 것에 비유한 뮌스터버그의 연구에 이어서 루돌프 아른하임의 ''형식주의''가 이어졌다.[5]
초기 프랑스 이론가 중 제르멘 륄라크는 겹쳐 찍기를 통해 영화에 ''인상주의''의 개념을 도입했다.[5] 장 엡스타인은 촬영이 사물에 "개성" 또는 "정신"을 부여하는 동시에 "거짓, 비현실, '초현실'"을 드러낼 수 있다고 언급했다.[5] 벨라 발라즈 또한 유사한 이유로 클로즈업을 칭찬했다.[5]
러시아 혁명 이후, 지가 베르토프와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작품에서 몽타주 이론이 나왔다.[5] 모스크바 영화 학교가 설립된 후, 레프 쿨레쇼프는 편집을 "영화 촬영술의 본질"로 삼아 영화의 형식적 구조를 연구하는 워크숍을 설립했다.[5] 이를 위해 에이젠슈테인은 "몽타주는 갈등이다"라고 주장했다.[5] 반면 베르토프는 키노-프라브다, 즉 ''영화의 진실''과 키노-아이를 개발하는 데 주력했는데, 그는 이것이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더 깊은 진실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6][7]
2. 2. 1940년대 이후의 이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의 영화 평론가이자 이론가인 앙드레 바장은 영화의 본질이 현실과의 차이점이 아닌, 현실을 기계적으로 재현하는 능력에 있다고 주장했다.[8] 그는 예술의 목적이 현실을 보존하는 것이라고 믿었으며, "사진 이미지는 그 대상 그 자체이다"라는 유명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현실의 ''구조적 깊이''를 드러내고 이미지에서 객관적으로 의미를 찾기 위해 롱 테이크와 심도의 사용을 옹호했다.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 역시 사실주의가 영화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9]1947년에는 젊은 영화 작가 알렉산드르 아스트뤼크가 '''카메라 만년필설'''을 제창하여 시네마 베리테의 선행자가 되었다. 그는 영화가 시각·영상지상주의에서 해방되어, 쓰여진 언어와 같은 유창함으로 섬세한 문학의 한 형식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알렉산드르 아스트뤼크프랑스어는 '''카메라 만년필설'''에서 모든 분야가 영화의 영역이 될 수 있으며, 세계에 관한 사상과 비전들을 영화만이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앙드레 바장은 #몽타주론의 지나침이 전형적인 영상의 결여를 초래했다며, 종합적인 화면구성과 시야 깊은 팬포커스 묘법(描法)이 시네마스코프에서 와이드 스크린 시대를 창조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아스트뤼크의 '''카메라 만년필설'''은 이탈리아의 네오 리얼리즘, 프랑스의 누벨바그, 영국의 프리 시네마 같은 영화의 스타일에 영향을 주었다.
작가주의는 평론가이자 영화 제작자인 알렉상드르 아스트뤽 등의 접근 방식에서 파생되었으며, 원래 바쟁이 공동 창립한 영화 저널인 ''카이에 뒤 시네마''의 기사에서 발전했다.[10] 프랑수아 트뤼포는 ''카이에''에 기고한 에세이에서 작가주의 선언문을 발표했다.[11] 조르주 사둘은 영화의 "작가"를 배우로 간주하기도 했지만, 영화는 실제로 협업적인 작품이라고 여겼다.[14]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영화 이론은 정신 분석학, 젠더 연구, 인류학, 문학 이론, 기호학 및 언어학과 같은 기존 학문 분야의 개념을 도입하여 학계에 자리 잡았다. 크리스티앙 메츠와 같은 학자들이 이러한 발전을 이끌었다.[16]
1990년대 동안 영상 기술의 디지털 혁명은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 이론에 영향을 미쳤다. 메리 앤 도인, 필립 로젠, 로라 멀비와 같은 이론가들은 셀룰로이드 필름의 능력에 다시 초점을 맞췄다.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슬라보예 지젝은 현대 영화 분석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시선"의 새로운 측면을 제시했다.[19] 브라차 L. 에팅거의 매트릭스 이론[20]은 페미니스트 영화 이론을 혁신했다.[21][22] 그녀의 개념인 매트릭스적 시선[23]은 여성적 시선을 확립하고 남성적 시선과의 차이점을 명확히 한다.
3. 현대 영화 이론의 동향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영화 이론은 리얼리즘과 사회성에 대한 탐구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프랑스의 앙드레 바장, 독일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한 지크프리트 크라카워 등은 영상에 의한 리얼리즘 추구와 영화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깊이 연구했다.[1]
1947년, 젊은 영화 작가 알렉산드르 아스트뤼크는 '''카메라 만년필설'''을 주장하며 시네마 베리테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는 영화가 시각적 요소와 삽화의 제약에서 벗어나 문학처럼 섬세한 표현 형식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또한, 영화는 철학, 심리학, 형이상학 등 모든 분야를 다룰 수 있으며, 세계에 대한 사상과 비전을 표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1]
앙드레 바장은 #몽타주론의 과도함이 전형적인 영상의 결핍을 초래했다고 비판하며, 종합적인 화면 구성과 팬포커스 묘법을 통해 시네마스코프와 와이드 스크린 시대를 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1]
이탈리아의 네오 리얼리즘, 프랑스의 누벨바그, 영국의 프리 시네마와 같은 영화 스타일은 아스트뤼크의 '''카메라 만년필설'''과 관련이 있지만, 방법론적, 미학적으로 통일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영화들이 등장한 배경에는 영화 제작 기술의 발전으로 누구나 쉽게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된 기술 혁명이 있었다.[1]
1960년대-1970년대에는 크리스티앙 메츠의 영화 기호학이 등장하여 영화 이론이 학문적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했다. 정신분석학, 인류학, 문학 이론 등 다양한 학문 분야의 개념이 도입되었으나, 정신분석학의 경우처럼 그 개념적 틀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었다.[1]
1980년대 초반까지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유리 로트만, 움베르토 에코 등 기호학적 사고가 영화 이론을 지배했다. 그러나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컬처럴 스터디스적 사상이 등장하면서, 인터텍스츄얼리티와 장르 연구가 영화 이론과 영화사를 연결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주목받았다.[1]
1990년대 디지털 혁명은 영화 이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메리 앤 도언, 필립 로젠, 로라 멀비 등은 셀룰로이드 필름이 순간의 지표적 영상을 포착하는 능력에 주목했다. 톰 가닝, 미리암 한센, 유리 치비안 등은 초기 영화의 상영 방식과 관객에 대한 역사적 재탐구를 진행했다.[1]
현대 영화 이론은 몽타주나 리얼리즘, 기호학처럼 영화사 전체를 포괄하는 이론을 제시하기보다는 개별적이고 비체계적인 "개념 창출"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질 들뢰즈의 『시네마』 역시 이러한 시도 중 하나로 볼 수 있다.[1]
4. 주요 이론
영화의 예술성을 이론적으로 처음 주장한 사람은 이탈리아인 리치오니 카뉴도였다. 그는 1911년에 영화는 본질적으로 '빛의 펜'으로 그려지고 영상으로 만들어진 시각(視覺)의 드라마라고 주장했다. 그는 예술의 기본은 건축과 음악이며, 이를 보충하는 것으로서 그림과 조각과 시와 무용을 들었고,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 영화이며 움직임의 조형 예술이라 하여 영화를 제7의 예술이라고 주장했다.[30] 카뉴도는 영화의 연극성을 부정하고 영상성의 순수성에 표현력을 제약하여 '영화시(映畵詩)의 전도사(傳道師)'라고 불렸다.
프랑스의 루이 델뤼크는 카뉴도의 영향을 받아 영화의 영상이 단순한 사진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유기적인 내재성을 주장하고 이것을 '''포토제니'''(photegenie)라 이름지었다.[30] 델뤼크는 포토제니의 4가지 기본적 요소로서 '장치', '조명(빛)', '억양(抑揚)', '마스크(面)'를 들고, 이 요소들을 감독이 자유로이 선택하고 짜맞춘 창조 위에 영화의 예술성이 성립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억양'을 중요시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몽타주론의 발전을 가져왔다. 델뤼크는 1920년대에 발달한 프랑스 전위 영화(아방가르드)의 이론적인 리더가 되었다.
프랑스에서 #몽타주론의 전제를 이루는 이론 정립이 활발해졌을 무렵, 독일에서도 사회학과 미학(美學)의 두 견지에서 영화의 예술론이 추구되고 있었다. 콘라트 폰 랑게는 <현재와 미래의 영화>(1920)에서 영화는 대상(자연)을 기계적으로 재현하고 현실화할 뿐 예술로서 필요한 인류전에 의한 의식적인 자기 기만성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즉, 인간의 정신적인 창작활동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고 보았다.
1910년대에 독일에서 일어난 새로운 예술운동인 '''표현주의'''는 1920년대의 영화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제1차 대전의 패전 후 독일의 경제적·사회적 혼란은 '''표현주의'''를 크게 육성하는 요인이 되었다. 1921년에 화가 한스 리히터는 추상적인 화상(畵像)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순수한 조형적인 실험영화를 발표했다.
#포토제니론에서 표현주의 영화, 아방가르드 영화에 이르는 일련의 전위주의 영화의 이론적인 근거는 영상의 중요성과 움직임을 수반한 새로운 조형주의의 주장이었다. 한편으로는 영화속 영상의 사실성에 영상의 의미를 제1의(第一義)로 주장하는 자가 나타났다. 그 선구자가 지가 베르토프였다. 베르토프는 렌즈의 절대적인 묘사력을 믿어 의심치 않던 인물이었다.
베르토프의 <'''영화안(映畵眼, 키노키)'''>설은 몽타주론과 다큐멘터리론의 가능성을 내포했다. 그러나 베르토프의 이론은 카메라가 아무리 대상을 충실하게 잡았다 해도 편집단계에서 선택성이 개입하면 사실(事實)은 사실(事實)일 수 없게 된다는 점에서 자기모순을 안고 있었다.
영화이론은 '''몽타주론'''의 조직적인 추구에 따라 근본적으로 확립되었다. 몽타주(montage)는 프랑스어로 '짜맞추다'라는 뜻이 있는데, 이 시기(1920년대)의 영화에 있어서는 촬영된 필름의 단편을 '편집하는' 기술용어였다.
몽타주의 중요성을 조직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레프 쿨레쇼프다. 쿨레쇼프의 주장은 일반적으로 '연쇄몽타주'라 불리고 있는데, 그것을 개개의 쇼트의 뜻을 지닌 진정한 몽타주론으로 전개시킨 것은 푸도프킨과 에이젠슈테인이다.
'''프세볼로드 푸도프킨'''(1893-1953)은 쿨레쇼프의 직접 계승자로, 영화예술의 기초는 몽타주라는 사고방식에서 출발한다. 푸도프킨은 몽타주 방법론을 분석 확립했는데, 그에 따르면, 몽타주는 '대조', '병행', '유사(類似)', '동시성', '라이트 모티브'의 5가지 방법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1898-1949)은 영화의 표현은 변증법적인 비약으로서 달성된다는 점에서 쿨레쇼프와 푸도프킨의 연쇄설과 대조적이다. 그의 이론은 일반적으로 '상극(相剋) 몽타주'라고 불리고 있는 것이다. 에이젠슈테인의 상극 몽타주의 근거는, 몽타주는 쇼트의 연쇄가 아니라 영상의 충돌이며, 이 충돌로 주장하고 설명할 개념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벨라 블라지는 1924년에 발표한 <시각적인 인간> 이후, 영화미학의 창조적인 계통 수립과 뛰어난 선견지명을 보인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몽타주와 같이 클로즈업을 중요시하여 이 두 가지가 영화언어(映畵言語)의 가장 큰 요소라고 말했다.
벨라 블라지와 동시대의 이론가로서는 <예술로서의 영화>의 저자인 독일의 루돌프 아른하임과 <영화의 문법>의 저자인 영국의 레이먼드 스포티스우드가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몽타주론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영국의 폴 로다는 <다큐멘터리 영화>(1936)에서 영화의 창조적인 성과는 콘티뉴이티를 세우는 단계에 있어서의 분석과 몽타주의 종합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제2차 대전 이후 영상에 의한 리얼리즘의 추구와 영화의 사회성에 대하여 프랑스의 앙드레 바장,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 간 지크프리트 크라카워 및 그 밖의 사람들에 의하여 더욱 탐구되었다.
1947년에 알렉산드르 아스트뤼크는 '''카메라 만년필설'''을 제창하여 시네마 베리테의 선행자가 되었다. #몽타주론의 지나침이 전형적인 영상의 결여를 초래했다 하여 오히려 종합적인 화면구성과 시야 깊은 팬포커스 묘법(描法)이 오래지 않아 시네마스코프에서 오늘의 와이드 스크린 시대를 창조하게 됐다는 앙드레 바장의 주장도 있었다.
이탈리아의 네오 리얼리즘, 프랑스의 누벨바그, 영국의 프리 시네마 같은 영화의 스타일에 '''카메라 만년필설'''이 연결되어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1896)은 20세기 초 영화의 탄생과 함께 영화 이론의 발전을 예견했다. 베르그손은 운동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고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수십 년 후, 철학자 질 들뢰즈는 ''시네마 I''과 ''시네마 II''(1983-1985)에서 ''물질과 기억''을 자신의 영화 철학의 기초로 삼았다.
1915년 배철 린제이는 영화에 관한 책을 썼고, 1년 후 휴고 뮌스터버그가 뒤를 이었다. 린제이는 영화를 ''액션 영화'', ''친밀한 영화'', ''화려한 영화''의 세 가지 범주로 분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5] 뮌스터버그는 차례로 영화 기법과 특정 정신 과정 사이의 유사점을 언급했다.[5] 예를 들어, 그는 클로즈업을 마음이 주의를 기울이는 것에 비유했다.[5] 이어서 영화 기법이 예술로서 영화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한 루돌프 아른하임의 ''형식주의''가 이어졌다.
초기 프랑스 이론가 중 제르멘 륄라크는 내부 경험과 외부 현실 사이의 경계의 가변성을 탐구하는 영화에 ''인상주의''의 개념을 도입했다.[5] 장 엡스타인은 촬영이 사물에 "개성" 또는 "정신"을 부여하는 동시에 "거짓, 비현실, '초현실'"을 드러낼 수 있다고 언급했다.[5] 벨라 발라즈 또한 유사한 이유로 클로즈업을 칭찬했다.[5]
러시아 혁명 이후, 지카 베르토프와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작품에서 몽타주 이론이 나왔다.[5] 레프 쿨레쇼프는 편집을 "영화 촬영술의 본질"로 삼아 영화의 형식적 구조를 연구하는 워크숍을 설립했다.[5] 편집은 또한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적인 개념인 변증법적 유물론과 관련되었다.[5] 이를 위해 에이젠슈테인은 "몽타주는 갈등이다"라고 주장했다.[5] 반면 베르토프는 키노-프라브다, 즉 ''영화의 진실''과 키노-아이를 개발하는 데 주력했는데, 그는 이것이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더 깊은 진실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6][7]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의 영화 평론가이자 이론가인 앙드레 바쟁은 영화의 본질은 현실과의 차이점이 아닌, 현실을 기계적으로 재현하는 능력에 있다고 주장했다.[8] 그는 예술의 목적이 현실을 보존하는 것이라고 믿었으며, "사진 이미지는 그 대상 그 자체이다"라는 유명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8] 곧이어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이 부상했다.[8]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 역시 사실주의가 영화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9]
작가주의는 평론가이자 영화 제작자인 알렉상드르 아스트뤽 등의 접근 방식에서 파생되었으며, 원래 바쟁이 공동 창립한 영화 저널인 ''카이에 뒤 시네마''의 기사에서 발전했다.[10] 프랑수아 트뤼포는 두 편의 ''카이에'' 에세이에서 작가주의의 선언문을 발표했다.[11] 조르주 사둘은 영화의 추정 "작가"를 배우로 간주하기도 했지만, 영화는 실제로 협업적인 작품이라고 여겼다.[14]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영화 이론은 정신 분석학, 젠더 연구, 인류학, 문학 이론, 기호학 및 언어학과 같은 기존 학문 분야의 개념을 도입하여 학계에 자리 잡았다.
크리스티앙 메츠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발전했다.[16] 그러나 1980년대 후반이나 199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영화 이론 ''그 자체''가 영화 연구를 지배해 온, 영화 쓰기, 제작, 편집 및 비평의 실질적인 요소에 초점을 맞춘 기존의 인문주의적 작가주의를 대체하면서 미국 대학에서 두각을 나타냈다.[17] 미국의 학자 데이비드 보드웰은 1970년대 이후 영화 이론의 많은 주요 발전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그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 자크 라캉, 루이 알튀세르, 롤랑 바르트의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한 영화 연구를 지칭하는 경멸적인 용어 "SLAB 이론"을 사용한다.[18]
1990년대 동안 영상 기술의 디지털 혁명은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 이론에 영향을 미쳤다. 메리 앤 도인, 필립 로젠, 정신 분석학의 영향을 받은 로라 멀비와 같은 이론가들은 시간 속의 한 순간을 "지표적" 이미지로 포착하는 셀룰로이드 필름의 능력에 다시 초점을 맞췄다.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라캉의 "현실" 개념 이후, 슬라보예 지젝은 현대 영화 분석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시선"의 새로운 측면을 제시했다.[19] 1990년대부터 예술가이자 정신분석가인 브라차 L. 에팅거의 매트릭스 이론[20]은 페미니스트 영화 이론을 혁신했다.[21][22] 그녀의 개념인 매트릭스적 시선[23]은 여성적 시선을 확립하고 남성적 시선과의 차이점을 명확히 하며, 여성 및 모성적 특수성과 "공동 출현"의 잠재력과 관련하여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비판한다.[24][25] 또한, 톰 거닝, 미리엄 한센, 유리 치비안과 같은 작가들에 의해 초창기 영화 상영, 관행 및 관람 방식에 대한 역사적 재고가 이루어졌다.
클라이브 마이어는 ''비평적 영화: 실천 이론을 넘어서''(2011)에서 '영화는 집이나 미술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과는 다른 경험'이라고 주장하며, 영화 이론가들이 다른 매체와 구별되는 영화의 철학적 개념의 특수성을 재고할 것을 주장한다.[29]
- 장치 이론
- 작가 이론
- 인지 영화 이론
- 페미니스트 영화 이론
- 장르 연구
- 언어학적 영화 이론
- 마르크스주의 영화 이론
- 정신분석학적 영화 이론
- 퀴어 이론
- 슈라이버 이론
- 스크린 이론
- 구조주의 영화 이론
몇몇 측면에서,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의 저서 『물질과 기억』은 영화가 새로운 미디어로서 막 태동하려던 1896년 당시 영화 이론의 발전을 예측하고 있다. 운동에 대한 사고의 새로운 방법에 대한 필요성을 언급하며 "시간 이미지"(image-temps영어 "시간으로서의 영상"의 의미) 및 "운동 이미지" (image-mouvement영어 "운동으로서의 영상"의 의미)라는 단어를 창안했다. 그러나, 1906년의 시론 『영화적 환상 ''L’illusion cinématographique프랑스어''』(저서 『창조적 진화』 수록)에서 그는 논하려는 사항의 예시로서 영화를 거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 후 철학자 질 들뢰즈는 그의 저서 『시네마 1』과 『시네마 2』(1983년–1985년)에서 『물질과 기억』을 들뢰즈의 영화 철학의 기초로 삼아 찰스 샌더스 퍼스의 기호학과 결합하여 베르그송의 개념을 재탐구했다.
이탈리아의 미래파 리초토 카누도는 최초의 진정한 영화 이론가로 여겨진다. 1911년 『제7의 예술의 탄생 ''The Birth of the Seventh Art영어''』을 저술했다. 또 다른 초기의 시도는 심리학자 휴고 뮌스터버그가 저술한 『영화극 ''The Photoplay영어''』(1916년)이다.
소위 고전적 영화 이론(1910년대부터 거의 1970년까지)은 무성 시대에 흥행하며 영화라는 미디어의 중요한 요소의 정의에 대부분 관여했다. 제르멘 뒤락이나 루이 델뤽, 장 엡스타인,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레프 쿨레쇼프, 지카 베르토프, 폴 로사와 같은 영화 감독의 작품, 그리고 루돌프 아른하임이나 벨러 벌러즈,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와 같은 영화 이론가들이 주로 영화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들 각 개인은 영화가 어떻게 현실과 다른지, 또는 영화의 예술로서의 독자성을 직관적이거나 논리적으로 탐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수년 동안 프랑스의 영화 평론가이자 영화 이론가인 앙드레 바쟁이 영화에 대한 이러한 접근 방식에 대해 반발했다. 영화의 본질은 현실과의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기계적으로 재현하는 능력에 있다고 논박했다. 바쟁은 영향력 있는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를 공동 창간했다. 『카이에』지는 영화 이론보다는 영화 비평에 더 관여했지만, "작가주의 이론"의 탄생지였다.
이후 영화 감독이 된 프랑수아 트뤼포나 장 뤽 고다르와 같은 『카이에』지의 젊은 비평가들은 대중적인 할리우드 영화를 하나의 예술 형식으로 진지하게 다룬 최초의 인물들이었다. "서부극"이나 "갱 영화"에 대한 그들의 열광은 장르 연구의 발전을 촉진했다.
1960년대 - 1970년대에 영화 이론은 아카데미즘에서 시민권을 얻었지만, 그 기반을 다진 것은 60년대에 동시대 프랑스 영화를 소재로 고찰한 크리스티앙 메츠의 영화 기호학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70년대에 영화 이론은 정신분석학, 인류학, 문학 이론, 기호학과 언어학과 같은 기존 학문 분야에서 개념을 도입했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의 경우처럼 현재는 그 개념적 틀의 실효성이 의심되는 논고도 적지 않게 나타났다. 특히 영향력 있는 영국의 잡지 『스크린』에 의해 촉진된 경향이다.
메츠의 영화 기호학 외에도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유리 로트만, 움베르토 에코 등 80년대 초반까지는 세계적으로 기호학적, 기호론적 사고가 영화 이론에서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총칭되는 문화적 현상(고도 소비 사회의 출현, "역사의 종말", 절충적 스타일이나 과거에 대한 향수, 등)이 현저해지자 영화 이론에는 "컬처럴 스터디스"적 사상의 영향이 나타났다. 그중에서, 인터텍스츄얼리티나 장르가 영화의 이론적 연구와 영화사를 잇는 중요한 개념으로 주목받았으며 흥미로운 개별 연구도 나타났지만, 그것들은 보편적인 영화 이론으로 체계화되지는 못했다.
영상 기술에서의 1990년대 디지털 혁명은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 이론에 영향을 미쳤다. 셀룰로이드 필름이 그 순간의 지표적 영상을 놓치지 않고 캡처할 수 있다는 점에 다시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메리 앤 도언이나 필립 로젠, 로라 멀비 등 영화 이론가들에 의해서이다. 톰 가닝, 미리암 한센, 유리 치비안과 같은 저술가들이 초기 영화의 상영, 실천, 관객의 방식에 대한 역사적 재탐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새로운 영화 이론의 틀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때 소비에트 몽타주 학파가 영화 예술의 본질을 이루는 보편적 구성 원리로서 몽타주를 제시하거나, 바쟁이 "영화 언어의 진화"라는 관점에서 리얼리즘 영화론을 내놓거나, 메츠가 정밀한 과학적 분석 장치로서 기호학적 체계를 내세웠던 시대와 달리, 현재의 영화 이론은 영화사 전체를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자처하는 흐름을 형성하지 않고, 개별적이고 비체계적인 "개념 창출"의 시도에 그치는 경향이 강하다. 들뢰즈의 『시네마』도 결코 체계성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그러한 시도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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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자작인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빙상(氷上)의 싸움의 장면에서 프로코피에프가 작곡한 17소절의 음악과 몽타주의 관계를 상세히 분석 해설한 흥미깊은 문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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