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츠다 유사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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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츠다 유사쿠는 일본의 배우, 영화 감독, 가수이다. 1949년 재일 한국인 어머니와 일본인 아버지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으며, 1973년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1970년대 형사 드라마 《태양을 향해 외쳐라!》로 인기를 얻었으며, 이후 다양한 영화에 출연하며 액션 스타에서 개성파 배우로 변신했다. 영화 《블랙 레인》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했으나, 방광암으로 40세에 사망했다. 그는 만화, 게임 등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 국적을 가진 어머니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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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다 유사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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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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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마츠다 유사쿠 (松田 優作) |
출생일 | 1949년 9월 21일 |
출생지 | 일본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 |
사망일 | 1989년 11월 6일 |
사망지 | 일본 도쿄도 무사시노시 |
국적 | 일본 |
활동 기간 | 1972년–1989년 |
직업 | 배우, 가수 |
키 | 183 cm |
혈액형 | A형 |
배우자 | 마츠다 미치코 (1975년–1981년) 마츠다 미유키 (1983년–1989년) |
자녀 | 마츠다 류헤이 (장남) 마츠다 쇼타 (차남) 마츠다 유히 (차녀) |
로마자 표기 | Yusaku Matsuda |
한자 표기 | 松田優作 |
주요 작품 | |
텔레비전 드라마 | 태양에 짖어라! 우리들의 훈장 대도시 PARTII 탐정 이야기 신・꿈천대 일기 |
영화 | 폭력 교실 인간의 증명 유희 시리즈 되살아나는 금랑 야수 죽어야 한다 가족 게임 탐정 이야기 아・호맨스 화의 난 |
해외 영화 | 블랙 레인 |
수상 내역 | |
일본 아카데미상 | 우수 주연 남우상 되살아나는 금랑 가족 게임 그 후 폭풍의 언덕, 화의 난 특별상 |
키네마 준보 베스트 텐 | 주연 남우상 가족 게임, 탐정 이야기 |
요코하마 영화제 | 심사위원 특별상 |
호치 영화상 | 주연 남우상 가족 게임, 탐정 이야기 |
기타 정보 | |
관련 인물 | 구마가이 마미 (의붓 누나) |
2. 생애
마츠다 유사쿠는 1949년 9월 21일(호적상으로는 1950년 9월 21일) 일본인 아버지와 재일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우작(金優作)이었으며, 어머니는 '동급생들보다 키도 크고 지혜도 있으니 유리할 것'이라는 생각에 출생 신고를 늦게 했다.[64]
형사 드라마 《태양을 향해 외쳐라!》로 인기를 얻었으며, 1970년대 후반부터 토에이 센트럴 필름 작품, 카도가와 영화 작품으로 액션 스타로서 인기를 얻었다. 1980년대부터는 연기파 배우로 인정받았다. 의협심이 넘치고 인정이 두터우며 용맹한 인간성과 탁월한 연기력으로, 1980년대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일본 영화 배우 중 한 명으로 평가되었다.[64]
어린 시절을 시모노세키시에서 보냈고, 학창 시절에는 미국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배우 데뷔 후 1970년대에는 주로 액션 영화에 출연하며 큰 인기를 얻었고, 1980년대에는 연기 변신을 시도하여 할리우드에 진출하기도 했다.
1975년 쿠마모토 미치코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으나 1981년 이혼했다. 1983년 미유키와 재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는데, 아들 류헤이와 쇼타는 배우가 되었고, 딸 유키는 가수가 되었다.[4]
1989년 11월 6일 오후 6시 45분, 방광암의 요부 전이로 인해 도쿄도의 한 병원에서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
2. 1.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1949년 9월 21일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에서 재일 한국인 3세 어머니와 나가사키시 출신 보호사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39세였던 아버지는 고향에 처자식이 있었고, 180cm에 가까운 큰 키였다.[65] 마츠다는 사생아로 자랐으며, 두 명의 형이 있었다. 형제간 우애는 좋았지만, 점차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게 되면서 고독을 느꼈다.1966년 시모노세키시립 분요중학교를 졸업하고, 시모노세키 시립 제1고등학교 (현 야마구치 현립 시모노세키 중등교육학교)에 진학했다.
1967년 11월, "미국에 가서 변호사가 되라"는 어머니의 엄명으로 시모노세키시립 제1고등학교를 2학년 때 중퇴했다. 이후 작은아버지 부부에게 맡겨져 미국 국적을 얻기 위해 캘리포니아주 몬테레이로 건너가 씨사이드 시의 씨사이드 고등학교에 입학, 1년 미만 체류했다.
1968년 작은아버지 부부의 이혼 소송과 언어 문제로 고민하다 9월에 어머니 몰래 씨사이드 고교를 중퇴하고 귀국했다. 중학교 때부터 가라테를 배웠으며, 유파는 불분명하지만 이단이 공인되어 있다. 귀국 후 극진회관 본부 도장에서 연습했고, 이 경험은 훗날 액션 장면에 도움이 되었다. 이케부쿠로의 큰 형 집에 더부살이하며 도쿄도 도시마구 호난고등학교 야간부 보통과 4학년에 편입했다.
1969년 3월 호난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70년 4월 간토학원대학 문학부에 입학했다.
1971년 3월 문학좌 입소 시험을 치렀으나 1차 필기시험에서 불합격했다. 같은 해 5월 가네코 노부오 주재 극단 '신 연극인 클럽 마루이'에 입단, 첫 아내 미치코 (아메미야 사키)를 만났다.
1972년 간토학원대학 문학부를 중퇴했다. 같은 해 4월 문학좌 부속 연기 연구소 12기생이 되었다. 동기는 아가와 야스코, 타카하시 요코, 후배는 나카무라 마사토시, 2기 선배는 모모이 카오리 등이다. 역할에 전념하기 위해 6월 대학에 자퇴서를 냈다. 《돌격! 휴먼!!》의 '휴먼/이와키 준이치로' 역 오디션을 봤다고 한다.[66]
2. 2. 1970년대: 배우 데뷔와 인기
1973년 7월 20일, 형사 드라마 《태양을 향해 외쳐라!》에 '청바지 형사'로 출연하여 그 활약과 순직 장면이 화제가 되었다.[66][26][27] 같은 해 9월, "현재는 '마츠다 유사쿠'라는 가명을 사용하고 있어 프로그램 관계자들도 모르는 이야기 입니다만, 만약 제가 재일 한국인인 것을 알게 되면 여러분의 실망이 클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는 이유로 법무성에 귀화 신청을 하고, 일본 국적을 취득.[67][22] 가명이었던 '마쓰다 유사쿠'가 본명이 되었다.1973년, 시가키 타로 주연의 《늑대의 문장》(도호)으로 스크린 데뷔를 했다.
1975년 1월 31일, 같은 해 7월 19일 《우리들의 훈장》의 가고시마 로케이션 사전회의를 하던 날 밤, 19세의 재수 학원생에게 공연자 E와 함께 폭력을 휘두르고, 전치 3개월의 중상을 입게 한 용의로 경시청 신주쿠 경찰서에 체포되었다.[17] 이 때문에 1년 간의 근신 생활을 보냈다. 도쿄 구치소에 옮겨진 후, 상해 혐의로 기소 당해 같은 해 3월 10일, 도쿄 지방 재판소에서 징역 10월, 집행 유예 3년의 유죄판결을 받았다.[22]
1976년 1월 방송의 형사 드라마 《대도시 싸움의 나날》 제4화 협력자 게스트로 복귀했다.
1976년 5월, 《폭력교실》(도호, 오카모토 아키히사 감독)이 크랭크인되면서 이 작품을 통해 영화에 복귀한다.[34]
1976년 7월 25일, 앨범 "축제 노래"로 가수 데뷔를 했다.
1977년, 영화 《인간의 증명》(카도가와) 무네이 형사 역으로 출연했고, 형사 드라마 《대도시 PARTII》로 텔레비전에 본격 복귀했다.
1978년, 무라카와 토오루 감독의 도호 센트럴 필름 영화 《유희 시리즈》 제1탄 《가장 위험한 유희》 주연을 맡았다. (같은 해 《살인 유희》, 다음 해 《처형 유희》)
1979년에는 무라카와 토오루 감독의 카도가와 영화 《되살아나는 킨로》 주연 (다음 해 《야수, 죽여야 한다》), TV 드라마 《탐정 이야기》 주연을 맡으면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높은 인기를 얻게 된다.[2] 이 시기에 많은 액션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상해 사건의 집행 유예 기간도 만료되었다.
2. 3. 1980년대: 연기 변신과 할리우드 진출
1980년대에 마츠다 유사쿠는 액션 스타 이미지를 벗고 연기 변신을 시도했다. 1983년 모리타 요시미쓰 감독의 영화 《가족 게임》에서 이전과는 다른 연기를 선보여 많은 상을 받았다.[2] 1985년에는 영화 《그리고》에서 다시 한번 모리타 요시미쓰 감독과 호흡을 맞췄다.[2]1986년에는 영화 《어 호먼스》 제작 도중 감독이 하차하자 직접 메가폰을 잡아 영화 감독으로 데뷔했다.[2] 이 영화는 야쿠자 항쟁과 SF 요소를 융합한 독특한 작품이었다.
1988년, 미국 영화 《블랙 레인》에 출연하여 염원하던 할리우드 진출을 이루었다.[2] 암 투병 중에도 촬영에 매진하는 투혼을 보였으며, 리들리 스콧 감독을 비롯한 동료 배우들은 그의 프로 정신과 연기에 찬사를 보냈다.[5]
2. 4. 사망
1988년, 마츠다 유사쿠는 영화 《블랙 레인》 촬영이 시작되기 전에 방광암 진단을 받았다. 마츠다는 영화 촬영에 지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여 항암 화학 요법을 거부했다.[4] 촬영 기간 동안 혈뇨 증세를 보였다. 1989년 3월 촬영이 끝날 무렵, 암은 척추와 폐로 전이되어 수술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1989년 10월 7일 입원했으며, 한 달 후인 11월 6일 오후 6시 45분, 도쿄도의 한 병원에서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 그는 도쿄도 아키루노시의 西多摩霊園|니시타마 영원일본어에 안장되었다.[8]《블랙 레인》으로 높은 평가를 받던 마츠다에게는 할리우드에서 로버트 드 니로와의 공동 출연 등 여러 출연 제의가 들어왔다. 마츠다가 동생처럼 아꼈던 나카무라 토오루는 마츠다의 영정 앞에서 "유사쿠 씨, 일어나세요. 너무 이르잖아요!"라고 울부짖었다.
3. 사생활
마쓰다 유사쿠의 본명은 김우작(金優作)으로, 일본인 아버지와 재일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64] 실제 생년월일은 1949년 9월 21일이지만, 어머니가 출생 신고를 늦게 하여 호적상으로는 1950년 9월 21일생으로 되어 있다. 시모노세키시에서 사법관인 아버지(만난 적 없음)와 재일 한국인 어머니 가네코 마쓰다(본명 김씨)[4]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사망한 일본인 남성과 결혼했던 한국인 여성이었다.[4]
山口현시모노세키시에서 전당포를 경영하던 한국인(재일 1세) 어머니 사이에서 비친생자로 태어났다.[20][21] 아버지는 나가사키 출신의 보호관찰관으로 당시 39세였고 고향에 처자식이 있었다.[22] 아버지는 우작이 태어나자마자 사망했다.[17] 이복형이 두 명 있었고, 형제간 사이는 좋았으나, 점차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그로 인해 고독감을 느꼈다.
1957년시모노세키시립 칸다소학교에 입학했고, 1963년시모노세키시립 분요중학교, 1966년야마구치현립 시모노세키 제1고등학교(현 야마구치현립 시모노세키 중등교육학교)에 입학했다.[17] 1967년 11월, 어머니의 권유로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주몬터레이 군시사이드시의 시사이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17][23] 그러나 고모 부부의 이혼 소송, 언어 장벽 등으로 1968년 9월 시사이드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했다.[17][23] 도쿄도토시마구에 있는 형의 집에 얹혀살며 토요나미 고등학교 야간부 4학년에 편입, 1970년 칸토가쿠인대학문학부에 입학했다.
극단 동료이자 작가인 마츠다 미치코와 1975년 9월 21일에 결혼하여 장녀를 얻었으나, 마츠다 미유키와의 불륜으로 1981년 12월 24일에 이혼했다. 미유키와는 《탐정 이야기》에 함께 출연하며 알게 되었으며, 장남 류헤이 출산 후 결혼하였다. 미유키와의 사이에 장남 류헤이, 차남 쇼타, 장녀(유사쿠 사망 시 1세)를 두었다.
드라마 ''태양에 저으며!''에 출연하던 중 미치코의 도움을 받아 국적을 한국에서 일본으로 변경했다. 미치코의 아버지는 자민당 소속으로 당시 총리의 지원 사무소장을 역임한 인물이었다.[4]
1975년에는 두 명의 기자와 시비, 한 여학생의 켄도 나무검 공격 사건에 휘말려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이로 인해 연예 활동에 큰 차질을 빚었다.[4]
키는 185cm로 알려졌으나(아내 마쓰다 미유키에 따르면 실제 키는 183cm), 이시하라 유지로의 공식 키가 181cm였기 때문에 183cm로는 키 차이가 없어 185cm로 발표했다고 한다. 1975년 인터뷰에서는 186cm라고 밝혔다.[23]
말년에는 이즈시 구마자카에 선도장을 열고 있던 종교가 I를 “마음의 스승”으로 여기고 반야심경 독송과 참선, 사경 등에 매진하면 암이 낫는다고 믿었다.[17]
초기 프로필에는 유도 2단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국제공수도연맹·극진회관 기관지에는 1969년 6월 20일 자 4급 합격자로 기록되어 있다.
마쓰다 미치코에 따르면, 유사쿠는 유곽 한구석에서 태어나 자란 것과 한국 국적이라는 것을 사활 문제처럼 고민했다고 한다.[45]
마작을 매우 잘했으며, 자신의 주연 영화 『가장 위험한 오락』에서 그 실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각가와 하루키에 따르면, 요령이 좋은 반면 소심한 면도 있었다고 한다. 영화 『인간의 증명』 뉴욕 로케 촬영 중 상해 사건을 일으켰을 때나, 흑인만 있는 가게에 들어갔을 때 겁먹은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50]
로버트 드 니로는 영화 『블랙 레인』에서 마쓰다의 연기를 극찬하고 함께 출연하고 싶다는 오퍼를 보냈지만, 사망 소식을 듣고 실망했다고 한다.
하루 100개 이상의 헤비 스모커였으나, 존경하는 와타루 테쓰야의 금연을 받아들여 하루 15개까지 줄였다고 한다.
1980년 4월 29일 방송된 『체코의 방』에 출연했을 때는 음주, 흡연하면서 토크를 했다.[51]
요시다 타쿠로의 팬이었다.[53]
미유키와의 사이에, 차례로 장남 마쓰다 류헤이, 차남 마쓰다 쇼타, 장녀 마쓰다 유키가 있다. 또한, 쇼타의 아내이자 모델인 아키모토 코즈에의 아버지는 전 대일본 스모 선수이자 제58대 요코즈나 치요노후지 미츠구이다.
4. 인물됨과 평가
의협심이 넘치고 인정이 두터우며, 용맹한 인간성과 탁월한 연기력으로 1980년대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일본 영화 배우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64] 데뷔 초에는 액션 스타로 주목받았지만, 연기에 대한 열정으로 점차 연기 폭을 넓혀 개성파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성격은 급한 면이 있었지만, 불의를 참지 못하고 동료를 소중히 여기는 의리 있는 사람이었다. 미즈타니 유타카, 마루야마 쇼이치, 사토 가지로 등 많은 친구들이 그의 인간됨을 증언하고 있다. 특히 사토 가지로는 "유사쿠만큼 선배를 존중하는 배우는 없었다"고 회상했다.
마작 실력이 뛰어나 거의 진 적이 없었다고 하며, 《태양을 향해 외쳐라!》 출연도 마작 승부에서 이긴 덕분이라는 일화가 있다.
신인 시절에는 홑꺼풀에 대한 콤플렉스로 쌍꺼풀 수술을 하기도 했다. 금전적으로 어려운 시기였지만, 수술비를 마련해 직접 실밥을 뽑았다는 일화는 그의 끈기와 집념을 보여준다.
평소 패션에는 무심했지만, 근시 때문에 쓴 윗부분이 검은 테인 안경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였다.
하기와라 겐이치와 함께 동시대를 대표하는 스타였으며, 그의 독창적인 연기 스타일은 많은 후배 배우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만화 《북두의 권》의 주인공 '켄시로', 게임 《귀무자》의 '야규 쥬베이' 등 많은 캐릭터들이 그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
전처 마쓰다 미치코에 따르면, 그는 한국 국적이라는 사실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고 한다.
말년에는 종교에 귀의하여 반야심경 독송과 참선, 사경 등에 매진하며 암을 극복하려 했다.
5. 작품
마츠다 유사쿠는 1973년 TV 형사 드라마 《태양에 닿아라!》에서 신참 경찰관 역으로 스크린 배우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2] 1970년대에는 다양한 TV 시리즈와 액션 영화에 출연했는데, TV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역할은 사립탐정으로 출연한 《탐정 이야기》였다.[2] 영화에서는 《유기》 시리즈의 암살자 나루미 쇼헤이 역과 《황금 늑대의 부활》의 거물 범죄자 아사쿠라 역 등 총을 든 역할로 유명했다.
1980년대에는 액션 스타 이상의 배우로 인정받고자 다양한 드라마틱한 역할을 맡았다.[2] 1980년 영화 《죽음을 향한 짐승》에 출연하기 위해 극적인 체중 감량을 했고, 1983년에는 《탐정 이야기》와 《가족 게임》으로 제8회 호치 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3] 1986년에는 《호만스》를 감독했는데, 이 작품이 그의 유일한 감독 작품이다.
1989년, 암 진단을 받은 상태였지만 《블랙 레인》에서 악당 사토 역을 맡았다. 리들리 스콧 감독과 마이클 더글러스 등 공동 출연 배우들은 그의 전문성과 연기에 찬사를 보냈다.[5]
사후에도 그의 이미지는 광고에 계속 사용되었고, 그의 가장 유명한 캐릭터의 축소 모형과 같은 제품들이 계속 등장했다.[6] 2009년에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인 마츠다 미유키가 헌정 영화 《소울 레드》를 제작했다.
만화 《북두의 권》의 주인공 '켄시로'는 퍼스널리티 면에서 마츠다를 모델로 만들어졌고, 《원피스》의 해군 대장 '아오키지'도 마츠다를 모델로 한 캐릭터이다.
5. 1. 영화
마츠다 유사쿠는 1973년 영화 《늑대의 문장》으로 스크린 데뷔를 하였다. 이후 여러 영화에 출연하며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다음은 마츠다 유사쿠가 출연한 영화 목록이다.순서 | 연도 | 제목 (원제) | 제목 (풀이) | 역할 |
---|---|---|---|---|
1 | 1973년 | 狼の紋章일본어 | 늑대의 문장 | 하구로 |
2 | 1974년 | ともだち일본어 | 친구 | 코마츠 |
3 | 1974년 | 竜馬暗殺일본어 | 료마 암살 | 미기타 |
4 | 1976년 | 暴力教室일본어 | 폭력 교실 | 미조구치 카츠토시 |
5 | 1976년 | ひとごろし일본어 | 살인자 | 후타고 로쿠베 |
6 | 1977년 | 人間の証明일본어 | 인간의 증명 | 무네이 형사 |
7 | 1978년 | 最も危険な遊戯일본어 | 가장 위험한 유희 | 나루미 쇼헤이 |
8 | 1978년 | 殺人遊戯일본어 | 살인 유희 | 나루미 쇼헤이 |
9 | 1978년 | 沖縄列伝・第一일본어 | 오키나와 열전·제1 | 나레이션 |
10 | 1979년 | 俺達に墓はない일본어 | 우리에게 무덤은 없다 | 시마 카츠오 |
11 | 1979년 | 蘇える金狼일본어 | 되살아나는 킨로 | 아사쿠라 테츠야 |
12 | 1979년 | 処刑遊戯일본어 | 처형 유희 | 나루미 쇼헤이 |
13 | 1980년 | レイプハンター 狙われた女일본어 | 레이프 헌터, 노려지는 여자 | |
14 | 1980년 | 薔薇の標的일본어 | 장미의 표적 | 호텔 손님 (게스트) |
15 | 1980년 | 野獣死すべし일본어 | 야수, 죽여야 한다 | 다테 쿠니히코 |
16 | 1981년 | ヨコハマBJブルース일본어 | 요코하마 BJ 블루스 | BJ |
17 | 1981년 | 陽炎座일본어 | 아지랭이 자리 | 마츠자키 |
18 | 1983년 | 家族ゲーム일본어 | 가족 게임 | 요시모토 카츠 |
19 | 1983년 | 探偵物語일본어 | 탐정 이야기 | 츠지야마 슈이치 |
20 | 1985년 | それから일본어 | 그리고 | 나가이 요스케 |
21 | 1986년 | ア・ホーマンス일본어 | 어 호먼스 | 바람 |
22 | 1988년 | 嵐が丘일본어 | 폭풍의 언덕 | 타카시 |
23 | 1988년 | 華の乱일본어 | 꽃의 난 | 아리시마 다케오 |
24 | 1989년 | ブラック・レイン일본어 | 블랙 레인 | 사토 히로후미 |
1970년대에는 주로 액션 영화에 출연하여 《유희》 시리즈의 암살자 나루미 쇼헤이 역과 《황금 늑대의 부활》의 거물 범죄자 아사쿠라 역 등 총을 든 역할로 유명세를 얻었다. 1980년대에는 액션 스타 이미지를 벗고 다양한 연기를 시도했다. 1980년 영화 《죽음을 향한 짐승》에 출연하기 위해 체중을 감량했고, 1983년에는 《탐정 이야기》와 《가족 게임》으로 호치 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86년에는 《어 호먼스》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 1989년에는 암 진단을 받은 상태에서도 《블랙 레인》에서 악당 사토 역을 맡아 리들리 스콧 감독을 비롯한 여러 출연 배우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5]
5. 2. 드라마
시합을 관전하는 유도 부원야마모토 쿠라조
ラストエンペラーに仕掛けられた妖しい女の罠|도요 와이도 게키조, 사쿠라코와 와라우
라스토 엠페라니 시카케라레타 아야시이 온나노 와나일본어
사쿠라코는 미소 짓는다
마지막 엠페러에 걸린 요염한 여자의 올가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