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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리오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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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카리오스 3세는 1913년 키프로스에서 태어난 인물로, 키프로스 정교회 대주교이자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는 에노시스 운동을 주도하며 영국의 식민 지배에 저항했고, 1960년 키프로스 독립을 이끌었다.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에는 그리스계와 터키계의 화합을 위해 노력했지만, 1963년 헌법 개정안으로 갈등이 심화되었고, 1974년 쿠데타로 축출되었다가 귀환했다. 그는 키프로스 독립의 아버지로 평가받지만, 키프로스 분단을 막지 못한 한계도 지적된다. 마카리오스 3세는 197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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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리오스 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존칭 접두사각하
이름마카리오스 3세
1962년 마카리오스
1962년의 마카리오스
서명
직책
키프로스 대통령제1대
대통령 재임 기간
1차 임기 시작1960년 8월 16일
1차 임기 종료1974년 7월 15일
2차 임기 시작1974년 12월 7일
2차 임기 종료1977년 8월 3일
데 팍토니코스 삼프손 (임시)
직무 대행글라프코스 클레리데스 (임시)
후임스피로스 키프리아누
부통령 (1959–1973)파질 퀴취크
부통령 (1973–1974)라우프 덴크타슈
부통령 (이후)공석
대주교 재임 기간
임기 시작1950년 9월 18일
임기 종료1977년 8월 3일
이전 대주교마카리오스 2세
다음 대주교크리소스토모스 1세
개인 정보
출생일1913년 8월 13일
출생지파노 파나기아, 영국령 키프로스 (현재 키프로스)
본명미하일 크리스토둘루 무스코스
사망일1977년 8월 3일 (향년 63세)
사망지니코시아, 키프로스
안장지스로니 산, 키코스 수도원, 키프로스
모교아테네 대학교
보스턴 대학교
직업성직자
소속 정당무소속

2. 초기 생애와 종교 활동 (1913-1950)

마카리오스 3세는 1913년 본명 미하일 크리스토둘루 무스코스(Μιχαήλ Χριστοδούλου Μούσκοςel)로 키프로스 서부 파포스 구의 작은 마을 파나이야에서 태어났다. 1926년, 13세의 나이로 키코스 수도원에 수련 사제로 들어갔다. 이후 니코시아의 판키프리안 김나지움에서 수학하여 1936년에 중등 교육을 마쳤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중에는 그리스 아테네 대학교에서 신학과 법학을 공부했고, 1942년에 졸업했다. 졸업 후 키프로스 정교회에서 사제로 봉직하면서도 신학 연구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다. 세계 교회 협의회의 장학금을 받아 미국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보스턴 대학교에서 신학을 더 깊이 공부했다.

1948년, 보스턴 유학 중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키티온(현재의 라르나카)의 주교로 선출되었다. 이때 그는 '축복받은 자'라는 뜻의 그리스어 이름인 Μακάριος|마카리오스el를 자신의 성직명으로 채택하고 키프로스로 돌아왔다. 귀국 후 마카리오스는 당시 많은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처럼 키프로스그리스의 통합 운동인 에노시스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활동을 펼쳤다.

1950년 9월 18일, 그는 키프로스 정교회대주교로 선출되었다.

3. 에노시스 운동과 EOKA (1950-1955)

1950년 9월 18일, 37세의 나이로 키프로스 대주교로 선출되었다. 이 직위는 키프로스 동방 정교회의 수장일 뿐 아니라, 키프로스 그리스계 주민들의 실질적인 민족 지도자인 에트나르크 역할도 겸하는 것이었다. 이 강력한 지위를 통해 마카리오스는 키프로스 정치의 중심 인물로 부상했다.

1950년대에 들어 마카리오스는 대주교이자 에트나르크로서 에노시스(키프로스와 그리스의 통일) 운동을 적극적으로 이끌었다. 그는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누렸으며, 그리스 정부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54년 8월, 마카리오스의 요청에 따라 그리스는 국제 연합(UN)에 키프로스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하며, 자기 결정 원칙에 따른 해결을 주장했다. 에노시스 지지자들은 이것이 국민 투표를 통해 그리스와의 자발적인 통합으로 이어질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당시 키프로스를 중동 지역의 중요 거점으로 여기던 영국 정부는 섬의 탈식민화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55년, 에노시스를 지향하는 무장 조직인 EOKA(키프로스 투사 민족 조직, Εθνική Οργάνωσις Κυπρίων Αγωνιστώνel)가 조지 그리바스의 주도로 결성되었다. EOKA는 영국 식민 통치에 반대하며 무장 투쟁을 시작했다.

마카리오스가 EOKA와 정치적 목표를 공유하고, 조직의 군사 지도자인 조지 그리바스와도 알고 지낸 것은 분명하지만, EOKA의 무장 활동에 직접적으로 얼마나 관여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마카리오스 자신은 훗날 EOKA가 벌인 폭력적인 저항 활동에 대한 어떠한 개입도 부인했다.

4. 추방, 분할 위협, 독립 (1955-1960)

1955년 8월 20일, 그리스는 국제 연합에 키프로스 국민에게 자결권 원칙을 적용해 달라는 청원을 제출했다. 이에 키프로스 식민 정부는 그리스와의 통합을 지지하는 시위를 막기 위해 반선동 법을 시행했으나, 마카리오스 대주교는 이에 굴하지 않고 키프로스의 자결권을 계속해서 요구했다.

1955년 10월, 안보 상황이 악화되자 영국총독인 존 하딩 경은 섬의 미래에 대한 회담을 시작했다. 이 시기 마카리오스는 EOKA 반란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의심을 받았고, 결국 회담은 1956년 초 아무런 합의 없이 결렬되었다. 영국 언론의 비난과 영국 당국의 의심을 받던 마카리오스는[2] 1956년 3월 9일, 니코시아 공항에서 항공기에 탑승하려다 특별반 요원들에게 체포되었다. '아폴로 작전'이라는 암호명의 합동 경찰/군사 작전에 따라, 그는 세이셸 총독이자 사령관인 윌리엄 아디스 경의 '손님' 자격으로 세이셸의 마헤 섬으로 추방되었다. 마카리오스와 그의 수행원은 아덴을 거쳐 몸바사로 이송되었고, 케냐 항구에서 동아프리카 해군 선박 ''로잘린드''에 탑승했으며, 프리깃함 HMS ''로흐 파다''의 호위를 받았다. 이들은 3월 14일 포트 빅토리아에 도착했다.

1950년대 후반, 터키계 키프로스인 공동체는 그리스계의 ''에노시스''(통합) 주장에 맞서 ''탁심''(분할)이라는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제기하기 시작했다. ''탁심'' 지지자들은 터키계 키프로스인 공동체가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에게 박해받을 것을 우려했으며, 섬의 일부를 영국이나 터키의 주권 하에 두어야만 안전이 보장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키프로스 분쟁은 섬의 미래에 대한 서로 다른 비전을 가진 두 공동체 사이에서 점차 양극화되었다.

마카리오스는 추방된 지 1년 만에 풀려났지만, 키프로스로의 귀국은 여전히 금지되었다. 대신 그는 아테네로 가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아테네에 머물면서 그는 에노시스를 위한 활동을 계속했다. 이후 2년 동안 그는 키프로스 문제가 논의된 국제 연합 총회에 참석하며 그리스와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그리스에서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가 총리로 재임하는 동안, 에노시스 목표는 점차 키프로스 독립으로 방향을 틀었다. 1958년 협상을 통해 독립의 기초가 되는 취리히 협정이 마련되었고, 마카리오스는 1959년 계획을 최종 조율하기 위해 런던으로 초청되었다. 마카리오스는 처음에는 이 계획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그가 기존의 자결 또는 에노시스 입장을 바꾸고 최종적으로 키프로스 독립 조건에 서명한 것은 그리스와 영국 정부의 압력 때문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1959년 3월 1일, 마카리오스 대주교는 니코시아로 돌아와 전례 없는 환영을 받았다. 당시 그리스계 키프로스인 성인 인구의 거의 3분의 2가 그를 맞이하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1959년 12월 13일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마카리오스는 경쟁자인 변호사 요안니스 클레리데스 (글라프코스 클레리데스의 아버지)를 득표율 3분의 2로 누르고 승리했다.[4] 이로써 마카리오스는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뿐만 아니라 모든 키프로스인의 정치 지도자가 되었다.

5. 대통령 재임과 키프로스 문제 (1960-1977)

마카리오스 대통령, 1962년 서베를린 국빈 방문 중


1960년 키프로스가 독립하면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마카리오스 3세는 초기 에노시스(그리스와의 통일) 노선에서 현실적인 판단에 따라 독립 국가로서의 키프로스를 이끌었다. 그는 비동맹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국제 사회에서 키프로스의 독자적인 위상을 구축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국내적으로는 그리스계와 터키계 주민 간의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1963년 마카리오스가 제안한 헌법 개정안은 터키계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양 민족 간의 폭력 사태로 이어졌다. 결국 1964년에는 상황 안정을 위해 유엔 키프로스 평화 유지군(UNFICYP)이 파견되었다.

1967년 그리스에서 군사 정권이 들어서면서 마카리오스와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그리스 군사 정권은 에노시스를 강경하게 주장하는 EOKA B와 같은 준군사 조직을 지원하며 마카리오스 정부를 전복시키려 시도하는 등, 키프로스 내정에 노골적으로 개입하였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키프로스 정세는 극도로 불안정해졌다.

결국 1974년 7월 15일, 그리스 군사 정권의 지원을 받은 키프로스 국가 방위군 내 그리스계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마카리오스는 실각하고 해외로 망명해야 했다. 이 쿠데타는 튀르키예에게 군사 개입의 빌미를 제공했고, 7월 20일 터키는 키프로스 북부를 침공하였다. 이 침공으로 인해 키프로스는 사실상 분단되었고, 이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스 군사 정권이 붕괴한 후 마카리오스는 키프로스로 돌아와 대통령직에 복귀했지만, 이미 고착화된 분단 상황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는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보지 못한 채 1977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5. 1. 대통령 취임과 초기 활동 (1960-1963)



로버트 F. 와그너 2세 시장이 뉴욕 시청에서 마카리오스 대주교를 환영하고 있다.


마카리오스 대통령, 1962년 서독 국빈 방문 중 에서


마카리오스는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부통령 당선자인 파질 퀴취크와 함께 키프로스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수립했다. 이 시기 마카리오스는 에노시스(그리스와의 합병)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키프로스 내 민족 간 조화를 보장하는 유일한 길은 강력한 독립이라는 점을 받아들였다. 1960년 8월 16일, 니코시아에서 영국 국기가 내려진 날 공식 취임한 마카리오스는 키프로스 정치에서 중도 노선을 채택했다. 그는 비동맹 운동 정책을 적극 추진하며 터키뿐만 아니라 그리스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고, 키프로스를 비동맹 운동의 주요 회원국으로 이끌었다.

1961년 3월, 키프로스는 영연방에 가입했으며, 마카리오스는 같은 해 열린 1961년 영연방 총리 회담에 키프로스 대표로 참석했다. 또한 1961년 9월에는 베오그라드에서 개최된 제1차 비동맹 운동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그의 이러한 비동맹 외교 노선과 서방에 대한 다소 미온적인 태도는 런던워싱턴 D.C. 정부의 우려를 샀다. 베오그라드 방문 중 세르비아 정교회의 베오그라드 성 미카엘 대성당에서 전례를 주재한 일[5] 등은 미국에서 그가 공산주의 진영에 기울고 있다는 의심을 사기도 했다.[6] 이로 인해 마카리오스는 미국 언론으로부터 '지중해카스트로'라는 비판적인 별명을 얻었으나,[7] 영국 언론에서는 그의 성직자 신분을 고려해 '검은 막(Black Mak)'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다르게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카리오스가 추구한 독립 노선은 키프로스 내부에서 순탄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헌법 운영을 둘러싸고 터키계 키프로스인과 그리스계 키프로스인 간의 갈등이 점차 심화되었고, 마카리오스는 국가 체제의 붕괴를 막기 위해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1963년 11월, 그는 취리히 및 런던 협정에서 설정된 민족별 공직 할당 등 여러 제한을 완화하는 내용의 13개 헌법 개정안을 제안했다. 마카리오스는 이를 통해 정부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고, 엄격한 민족 간 법적 경계를 허물어 공동체 통합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다수의 터키계 키프로스인들은 이 개정안이 그리스계 다수에 의한 지배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는 헌법적 장치를 약화시키는 것이라며 반발했다.[8]

이러한 마카리오스의 제안에 반발하여 부통령 퀴취크를 비롯한 대부분의 터키계 공직자들이 사임했다. 또한 많은 터키계 키프로스인들이 그리스계와 섞여 살던 지역을 떠나 터키계 주민이 밀집된 마을이나 도시 지역으로 이주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이주의 배경에 관해서는 그리스계의 위협 때문이었다는 주장과, 터키계 공동체가 의도적으로 키프로스 합의를 방해하고 터키에 의한 분할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주장이 엇갈리며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결국 1963년 말, 키프로스에서는 다시 민족 간 폭력 사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5. 2. 헌법 개정 제안과 갈등 심화 (1963-1964)

키프로스의 독립적인 노선에 대한 생각은 국내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터키계 키프로스인과 그리스계 키프로스인 사이에서 헌법 운영을 둘러싼 갈등이 점차 커졌고, 마카리오스는 국가 기구의 임박한 붕괴를 막기 위해 조치를 취해야 했다.

1963년 11월, 마카리오스는 런던 및 취리히 협정에서 합의된 민족별 할당 제한으로부터 많은 공직을 자유롭게 하는 13개 조항의 헌법 개정안을 제안했다. 그는 이를 통해 정부가 더 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엄격한 민족 간 법적 경계를 완화하여 공동체를 통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많은 터키계 키프로스인들은 이 개정안이 다수인 그리스계 키프로스인에 의한 지배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는 헌법적 장치를 위협한다고 여겼다.[8]

마카리오스의 제안에 대한 반발로, 부통령 파즐 퀴취크를 포함한 대부분의 터키계 공직자들이 사임했다. 또한 많은 수의 터키계 키프로스인들이 민족 혼합 지역을 떠나 이미 터키계 주민이 다수인 마을과 도시 지역으로 이주했다. 이러한 이주의 동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이 있는데, 일부에서는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의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터키계 공동체가 키프로스 합의를 의도적으로 방해하고 터키에 의한 분할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1963년 말에 이르러서는 민족 간 폭력이 다시 발생했으며, 이듬해인 1964년에는 결국 유엔 키프로스 평화 유지군이 파견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었다.

5. 3. 유엔 평화 유지군 파견과 지속적인 노력 (1964-1974)

1964년 유엔 키프로스 평화 유지군(UNFICYP)이 파견되어 키프로스의 불안정한 상황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이르지 못했다. 마카리오스 3세는 비동맹 운동의 원칙에 따라 중립 노선을 견지하며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지만, 터키계 키프로스인들에게 독립 키프로스에서의 안전을 보장하거나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에게 독립이 에노시스(그리스와의 통일)보다 나은 선택임을 설득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1968년 2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마카리오스는 약 96%에 달하는 220,911표를 얻어 압도적으로 재선되었다. 이는 그의 개인적인 리더십과 독립 노선에 대한 국민들의 강력한 지지를 보여주는 결과였다. 에노시스를 주장했던 경쟁자 타키스 에브도카스는 8,577표를 얻는 데 그쳤다. 마카리오스는 취임 연설에서 키프로스 문제는 무력으로 해결될 수 없으며, 유엔의 틀 안에서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함을 강조했다. 또한 모든 시민이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단일 국가를 지향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화해적인 노선은 일부 강경파의 반대에 부딪혔고, 1970년에는 그를 겨냥한 암살 시도가 발생하기도 했다.[9]

1967년 그리스에서 쿠데타로 군사 정권이 들어서면서 마카리오스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마카리오스는 그리스 군사 정권이 에노시스를 추구하는 준군사 조직을 지원하여 자신의 권위를 약화시키려 한다고 비판했다.

1971년 여름, 키프로스 내 그리스계와 터키계 사이의 긴장이 다시 고조되었다. 과거 그리스 신문을 통해 마카리오스를 비판했던 그리바스가 비밀리에 키프로스로 돌아와 EOKA B(키프로스 투사 국가 조직 B, Ethniki Organosis Kyprion Agoniston B|에트니키 오르가노시스 키프리온 아고니스톤 Bgre)라는 이름의 게릴라 조직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에노시스를 지지하는 새로운 신문들도 창간되었는데, 이러한 활동들은 모두 그리스 군사 정권의 자금 지원을 받았다.

그리스 군사 정권은 키프로스 문제 해결을 위해 과거 에치슨 계획과 유사한 분할안에 동의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마카리오스는 이를 거부했다. 마카리오스를 축출하는 것이 군사 정권의 주요 목표가 되었고, 이를 위해 그리바스를 지원했다. 그리바스는 은신하며 테러와 선전 활동을 통해 마카리오스 정부를 흔들려 했지만, 마카리오스는 여전히 강력한 지지를 받는 지도자였다.

니코시아와 아테네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자, 그리스 군사 정권은 마카리오스에게 정권에 비판적인 각료들을 해임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 마카리오스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보여주었으나, 결국 그는 그리스의 압력에 굴복하여 내각을 개편해야 했다.

또한 키프로스 국가 방위군 장교 대부분이 그리스 군사 정권을 지지하는 그리스 정규군 출신이라는 점도 마카리오스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이들은 마카리오스를 제거하고 에노시스를 달성하려는 군사 정권의 의도에 동조했다. 노련한 그리바스 역시 마카리오스에게 지속적인 위협이었다. 그는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했으며, 완전한 에노시스가 아닌 어떠한 타협안에도 격렬하게 반대했다.

1972년 봄, 마카리오스는 키프로스 정교회 내부로부터 또 다른 도전에 직면했다. 세 명의 주교가 그의 세속적인 대통령직 수행이 교회법에 어긋난다며 사임을 요구하는 이른바 '교회 쿠데타'를 시도한 것이다. 마카리오스는 이들의 시도를 좌절시키고 1973년 여름, 세 주교를 면직시켰다. 후임자를 임명하기 전에 주교 수를 다섯 명으로 늘려 개별 주교의 권한을 분산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리바스가 EOKA-B를 동원한 게릴라 전술로 에노시스를 강요하려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이는 오히려 키프로스 그리스계 공동체 내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1973년 말, 마카리오스를 지지하는 세력이 내전에서 우위를 점하면서 그리바스는 궁지에 몰렸다. 같은 해 11월, 그리스에서는 강경파인 디미트리오스 이오안니디스가 게오르기오스 파파도풀로스를 축출하고 새로운 군사 정권을 수립했다. 그리바스는 이 새로운 정권과 접촉을 시도했으나, 이오안니디스는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1974년 1월 27일, 그리바스는 심장마비로 사망했다.[10]

마카리오스는 그리바스의 사망을 계기로 그의 추종자들에게 사면령을 내렸다. 그는 이를 통해 EOKA-B가 와해되고 정치적으로 안정될 것을 기대했다. 많은 EOKA-B 조직원들이 사면을 받아들였지만, 이는 오히려 조직 내 강경파의 입지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오안니디스는 마침내 자신의 목표를 드러내고, EOKA-B에 마카리오스를 축출하라는 비밀 지령을 내렸다.

5. 4. 그리스 군사정권과의 갈등과 EOKA-B (1967-1974)

1967년 그리스에서 군사 정권이 쿠데타로 집권하면서 마카리오스와의 관계는 긴장 상태에 놓였다. 마카리오스는 그리스 군사 정권이 에노시스(Enosis, 그리스와의 통일)를 지지하는 준군사 조직을 지원하여 자신의 권위를 약화시키려 한다고 비판했다.

1971년 여름, 키프로스 내 그리스계와 터키계 사이의 긴장이 다시 고조되었고 사건 발생 빈도도 잦아졌다. 같은 해 늦여름 혹은 초가을, 과거 EOKA 지도자였으며 그리스 신문을 통해 마카리오스를 비난했던 게오르기오스 그리바스(Grivas)가 비밀리에 키프로스로 돌아와 EOKA B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게릴라 조직(''Ethniki Organosis Kyprion Agoniston B'')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에노시스를 주장하는 세 개의 신문이 창간되었는데, 이 모든 활동은 아테네 군사 정권의 자금 지원을 받았다.

군사 정권은 키프로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에치슨 계획(Acheson Plan)과 유사한 형태의 분할에 동의했을 수 있지만, 마카리오스는 이를 거부했다. 군사 정권은 마카리오스 축출을 주요 목표로 삼고, 이 목표 달성을 위해 그리바스를 지원했다. 그리바스는 은신처에서 테러 공격과 선전 활동을 지휘하며 마카리오스 정부를 흔들려 했으나, 마카리오스는 여전히 강력하고 인기 있는 지도자로 남아 있었다.

니코시아와 아테네 간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어, 그리스 군사 정권의 대령들은 마카리오스에게 정부 내 비판적인 각료들을 해임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대규모 시위가 마카리오스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보여주었지만, 결국 그는 그리스의 압력에 굴복하여 내각을 개편했다.

마카리오스에게 불리하게 작용한 또 다른 요소는 키프로스 국가 방위군의 장교 대부분이 군사 정권을 지지하는 그리스 정규군이었고, 그들은 마카리오스를 해임하고 어느 정도의 에노시스를 달성하려는 군사 정권의 의지를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노련한 그리바스 역시 대주교에게 계속 위협이 되었다. 그는 강력한 세력을 유지했으며, 그의 키프로스 귀환을 허용한 군사 정권으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리스 대령들은 때때로 터키와 키프로스 문제에 대해 협상할 의향을 보였지만, 그리바스는 완전한 에노시스로 이어지지 않는 어떤 합의에도 격렬하게 반대했다.

1972년 봄, 마카리오스는 교회 쿠데타라는 또 다른 공격에 직면했다. 키프로스 교회의 세 명의 주교가 그의 세속적인 의무가 교회법을 위반한다고 주장하며 대통령직에서 사임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마카리오스는 세 주교의 시도를 좌절시키고 1973년 여름에 그들을 면직시켰다. 후임자를 선택하기 전에, 그는 주교의 수를 다섯 명으로 늘려 개별 주교의 권한을 줄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EOKA-B의 준군사 조직을 이용한 게릴라 전술을 통한 그리바스의 에노시스 추구는 마카리오스가 자기 결정-그리스와의 연합 정책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데 실패했고, 키프로스 그리스계 공동체 내에서 무장 내전의 시대로 이어졌다. 1973년 말까지 마카리오스 군대는 내전에서 승리했고, 그리바스는 절박한 상황에 놓였다. 1973년 11월, 강경 민족주의 여단장 디미트리오스 이오안니디스(Dimitrios Ioannidis)는 게오르기오스 파파도풀로스(Georgios Papadopoulos)를 전복시키고 "보이지 않는 독재자"로서 두 번째 정권을 수립했다. 그리바스는 1973년 말에 그리스의 새로운 정권에 연락을 시도했지만, 이오안니디스는 키프로스에서의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즉각적인 암시를 제공하는 것을 거부했다. 1974년 1월 27일, 그리바스는 이오안니디스의 계획에 대한 불확실성을 남긴 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10]

한편 마카리오스는 그리바스의 사망을 이용하여 죽은 지도자의 추종자들에게 사면을 부여했다. 그는 그리바스가 사라지면 EOKA-B가 게릴라 부대로서 사라지고 정치적으로 길들여질 수 있다고 희망하고 믿었다. 실제로 많은 EOKA-B 구성원들이 사면 조건을 수락했지만, 이것은 단순히 나머지 운동 내에서 강경파의 영향력을 증가시켰을 뿐이었다. 이오안니디스는 마침내 자신의 목표를 공개했다. 그는 EOKA-B가 마카리오스를 퇴위시키도록 헌신할 비밀 각서를 조직에 부과했다.

5. 5. 축출과 귀환 (1974)

1974년 5월 3일, 마카리오스 3세는 키프로스에 주둔한 일부 그리스 군 장교들이 키프로스 정부를 약화시키려 한다고 지적하는 서한을 그리스 정부에 보냈다. 그리스 정권은 해당 장교들을 철수시키겠다고 답했다. 1974년 6월 후반, 마카리오스는 아테네에 직접 도전하기로 결정하고, 7월 2일에는 모든 그리스 장교들이 19일 이내에 섬을 떠나라는 요구를 담은 서한을 보냈다. 그리스 외무장관 스피리돈 테테네스는 마카리오스가 직접 대체 장교를 선택하는 타협안을 제시했으나, 마카리오스는 이를 거부했다. 7월 11일, 당시 국회의장이던 글라프코스 클레리데스가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마카리오스를 방문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나흘 뒤인 7월 15일 오전 8시 15분, 디미트리오스 이오안니디스가 이끄는 그리스 군사정권니코시아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마카리오스는 파포스로 탈출했고, 영국 헬리콥터에 의해 구조되어 키프로스를 떠났다. 쿠데타 직후 그가 살해되었다는 잘못된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쿠데타 세력은 니코스 삼손을 새로운 대통령으로 임명했다.

키코스 수도원 근처의 마카리오스 3세 대주교 동상


7월 19일, 마카리오스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 연설하며 쿠데타를 그리스 군사정권이 조작한 "침략"으로 규정하고, 키프로스의 평화를 해쳤다고 비난했다.[11] 그의 연설 5시간 후인 7월 20일, 터키의 키프로스 침공이 시작되었다. 보장 조약에 따라 영국, 그리스, 터키는 섬의 헌법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개입할 권리가 있었으나, 당시 그리스 군사정권은 붕괴 직전이었고 영국 정부 역시 국내 정치 상황으로 인해 적극적인 개입이 어려웠다. 일각에서는 마카리오스가 런던 체류 중 영국의 군사 개입을 막기 위해 로비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12] 그러나 1974년 7월 17일 마카리오스와 영국 총리 해럴드 윌슨의 회의 공식 의사록에 따르면, 마카리오스는 윌슨에게 터키 총리 블렌트 에제비트에게 연락하여 "어떤 실질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는지 전달해 달라"고 촉구하며 터키의 개입 가능성을 타진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13]

터키의 침공은 쿠데타 발생 5일 만에 이루어졌으며, 이 사건은 키프로스 섬의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북키프로스 지역은 현재까지 터키군에 의해 점령된 상태로 남아있다. 터키 측은 이 침공을 터키계 주민 보호를 위한 "평화 작전"이라고 주장하지만, 유럽 인권 재판소는 이를 그리스계 키프로스 주민과 터키 간의 무력 충돌로 규정하고 있다.

터키의 침공 이후 며칠 만에 아테네의 군사정권은 붕괴했다. 군사정권은 터키의 개입을 예측하거나 막지 못하면서 정당성을 상실했다. 지원 기반을 잃은 니코스 삼손은 7월 23일 사임했고 대통령직은 글라프코스 클레리데스에게 넘어갔다. 마카리오스는 런던에서 5개월간 머물렀다. 국제 사회로부터 키프로스의 합법적인 정부 수반으로 인정받은 그는 키프로스로 돌아와 영토 회복을 위해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터키는 점령군으로 남았고, 키프로스의 분단 상태와 정치적, 군사적, 외교적 지위는 미해결 과제로 남게 되었다.

6. 사망 (1977)

마카리오스 묘


마카리오스 3세는 1977년 8월 3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는 그해 초부터 심장 문제를 겪었으며, 이는 수년간의 과도한 흡연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마카리오스의 심장은 부검 중에 적출되었으며, 이후 대주교 궁전의 그의 이전 침실에 보존되어 있다.[14]

그는 생전에 원했던 대로 쓰로니 산에 묘가 조성되었다. 묘는 키코스 수도원 근처에 있으며, 그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이곳에서 수련했다.

니코시아의 대주교청 밖 성 요한 대성당에서 열린 그의 장례식에는 52개국에서 온 182명의 고위 관계자들이 참석했으며, 약 25만 명의 조문객(섬의 그리스계 키프로스인 인구의 절반)이 그의 관을 지나갔다.

그의 삶을 기념하기 위해, 니코시아의 대주교 궁전 밖에 웅장한 청동 마카리오스 동상이 세워졌으며, 2008년에는 이 동상이 키코스 수도원으로 옮겨지고, 마카리오스의 실물 크기 대리석 동상으로 교체되었다.

7. 평가

마카리오스 3세는 키프로스 독립 운동의 중심인물이었으며, 독립 후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여 '키프로스 독립의 아버지'로 여겨진다.[1] 그는 초기에는 그리스와의 통합을 추구하는 에노시스 운동에 참여했으나, 영국에 의해 세이셸로 추방된 이후 독립 노선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국제 연합 총회에서 키프로스의 독립을 호소했다.[2]

1960년 키프로스 독립과 함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그는, 초기에는 터키계 부통령 파즐 퀴취크와 협력하며 그리스계와 터키계 주민 간의 통합을 시도했다.[3] 그러나 1963년 헌법 개정을 통해 터키계의 권한을 축소하려 하면서 양 민족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4] 이러한 갈등은 결국 유엔 평화유지군 파견으로 이어졌으며, 마카리오스 3세 자신도 급진적인 EOKA 세력의 테러 대상이 되는 등 양측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5]

1974년 그리스 군사 정권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로 잠시 실각했으며, 이는 터키가 터키계 주민 보호를 명분으로 키프로스 북부를 침공하는 빌미를 제공했다.[6] 이 사건으로 키프로스의 분단은 고착화되었고, 마카리오스 3세는 민족 간 화해를 이루지 못한 채 1977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7] 그는 키프로스의 독립을 이끌었지만, 민족 갈등을 봉합하지 못하고 분단이라는 비극을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다.

8.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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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결과당락
1959년 선거키프로스의 대통령1대무소속66.8%144,501표1위당선
1968년 선거키프로스의 대통령1대무소속96.3%220,911표1위당선
1973년 선거키프로스의 대통령1대무소속단독후보무투표1위당선


참조

[1] 서적 The Archbishops of Cyprus in the Modern Age: The Changing Role of the Archbishop-Ethnarch, their Identities and Politics https://books.google[...] Cambridge Scholars Publishing 2017-04-17
[2] 서적 Cyprus Before the United Nations: Communications, Press Statements, and Memoranda on the Cyprus Question Royal Greek Embassy, Information Service
[3] 간행물 The First Republic of Cyprus: A Review of an Unworkable Constitution https://www.jstor.or[...] 1966-09
[4] Youtube Crisis Ends. 3 Nations Rejoice At Cyprus Settlement, 1959/02/26 (1959) https://archive.org/[...] Universal Newsreel 2012-02-22
[5] 서적 Socialist Yugoslavia and the Non-Aligned Movement: Social, Cultural, Political, and Economic Imaginaries McGill-Queen's University Press 2023
[6] 웹사이트 Turkey's Invasion of Greek Cyprus http://www.globalsec[...] GlobalSecurity.org 2008-10-09
[7] 웹사이트 War in the Balkans, 1991–2002 http://www.strategic[...] 2008-06-06
[8] 웹사이트 The Main Narrative, continued http://www.cyprus-co[...] 2007-02-17
[9] 뉴스 Makarios: Cypriot Nationalism Incarnate https://www.washingt[...] 1977-08-04
[10] 뉴스 'The Tragic Duel and the Betrayal of Cyprus' 2011
[11] 뉴스 Makarios Assails Greek Junta, Asks U.N. for All Possible Aid 1974-07-20
[12] 문서 Graduation 1974 Oceanis 2001
[13] 문서 Η Τραγική Αναμέτρηση και η Προδοσία της Κύπρου 2011
[14] 웹사이트 "Macabre battle over Makarios' heart" http://www.cyprus-ma[...] Cyprus Mail 2006-11-16
[15] 웹사이트 Makarios' biography http://www.imkykkou.[...] Kykkos Monastery homepage 2008-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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