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절일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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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망절일랑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광복 후 한국에서 양일랑이라는 이름으로 성장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국적을 회복했지만, 유산 문제와 한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귀국하여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양산에서 버섯 재배를 시작하여 팽이버섯 재배에 성공하고, 신농민상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버섯 박사"로 불렸다. 2012년 뇌졸중으로 사망했으며, 사후 그의 농장은 아들이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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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절일랑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본명 | 아미키리 이치로(일본어명) |
| 별칭 | 양일랑(梁一郞, 아명), 버섯박사(별명) |
| 출생일 | 1942년 9월 5일 |
| 출생지 |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창원군 진해읍(현 대한민국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 사망일 | 2012년 8월 21일 |
| 사망지 | 대한민국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내송리 |
| 국적 | 일본 (1942~1945, 1968~1970), 대한민국 (1945~1968, 1970~2012) |
| 직업 | 농민 |
| 배우자 | 정순남 |
| 자녀 | 슬하 2남 2녀 |
| 학력 | |
| 학력 | 충무상업고등학교 (중퇴) |
| 로마자 표기 | |
| 문화관광부 2000년식 로마자 표기 | Mangjeol Illang |
2. 생애
망절일랑은 1942년 경상남도에서 일본인 아버지 아미키리 요시우에몬과 한국인 어머니 양두연 사이에서 태어났다.[4][2] 1945년 광복으로 아버지가 일본으로 강제 송환되면서 헤어졌고, 외가에서 어머니의 성을 따라 '양일랑'이라는 이름으로 성장했다.[4][2]
청년 시절 친아버지를 찾기 시작하여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NHK의 도움으로 아버지와 연락이 닿았으나,[6][2] 1967년 아버지는 망절일랑과 직접 만나지 못한 채 사망하였다.[2] 1968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국적을 회복했으나,[4] 아버지의 유산을 둘러싼 갈등[6][2]과 한국에 대한 애정 등으로 1970년 대한민국으로 돌아와 귀화하였다.[4][2]
이후 경상남도 양산시에 정착하여 아버지의 성씨 '아미키리'(網切)의 한국식 한자음 '망절'과 자신의 이름 '일랑'을 합쳐 '망절일랑'(網切一郎)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아버지의 고향 가고시마현 미나미타네정 시마마(島間)의 한국식 발음인 '도간'(島間)을 본관으로 하는 도간 망절씨(島間 網切氏)의 시조가 되었다.[4][2]
양산에서 버섯 재배에 뛰어들어 1994년 새송이버섯의 국내 첫 재배에 성공하고[7][3] 다양한 기능성 버섯을 개발하는 등 농업 분야에서 혁신을 이루며 '버섯 박사'로 불렸다.[7][3] 이후 친환경 수경 농법을 도입하는 등 농업 발전에 기여했다.[8] 2012년 8월 21일 농장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져 69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7]
2. 1. 출생과 성장
망절일랑은 1942년 경상남도 창원군 진해읍에서[4] (다른 자료에서는 김해 출생으로도 언급됨) 일본인 아버지 아미키리 요시우에몬(網切善右衛門, 망절 길우에몬, 전직 경찰관/순사부장[2])과 한국인 어머니 양두연(梁斗連, 양두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1945년 8월, 광복과 함께 아버지 요시우에몬이 수용소에 연금되었다가 9월에 일본으로 강제 송환되면서[2] 아버지와 헤어지게 되었다. 이후 진주시의 외할아버지에게 맡겨져 외가의 성을 따른 양일랑(梁一郞)이라는 이름으로 성장했다.[4][2] 한국인으로 살아가면서 주변의 박대를 경험하기도 했다.[2]
진해의 충무상업고등학교(현 진해세화여자고등학교의 전신)에 다니다가 2학년 때 외할아버지가 사망하자 중퇴하였고,[4][2] 1958년부터 부산 축산업 협동조합에서 근무했다.[5][2] 수년 후 혼인 신고 과정에서 외할아버지의 호적에 양자로 등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친아버지를 찾기 시작했다.[2]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NHK 라디오 프로그램 '찾아가는 시간'의 도움으로 1967년 1월, 일본 가고시마현 다네가섬에서 후두암으로 투병 중이던 아버지와 연락이 닿아 서신 교환을 시작했다.[6][2] 그러나 당시 병역 의무를 마치지 않아 해외여행 허가를 받지 못해 직접 만날 수는 없었다.[2] 아버지는 아들을 일본 호적에 올리기 위한 인지 절차를 밟기 위해 가고시마시를 방문했다가 1967년 8월 초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같은 달 31일에 사망했다.[2]
일본 국적 회복과 유산 문제 등을 해결하고,[2]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일본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2] 1968년 5월 병역에 복무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가족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국적을 회복하였다.[4]
1970년, 재판 끝에 아버지의 호적에 정식으로 입적되었고, 23개월간의 병역 의무를 마치고 제대했다.[2] 이 과정에서 재판 비용으로 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2] 일본으로 이주하는 것도 고려했으나, 아버지의 유산을 둘러싼 일본인 사촌 등과의 갈등[6][2]과 자신이 자라온 한국에 대한 애정 등으로 인해 결국 대한민국으로 돌아와 다시 귀화하여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4][2]
이후 경상남도 양산군 동면에 정착하였고,[4] 이때부터 아버지의 성씨인 아미키리(網切)를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은 '망절'(網切)과 자신의 이름 '일랑'(一郎)을 합쳐 '망절일랑'(網切一郎)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출신지인 가고시마현 미나미타네정 시마마(島間)의 한국식 발음인 '도간'(島間)을 본관으로 하는 도간 망절씨(島間 網切氏)의 시조가 되었다.[2] (일본어 발음 '아미키리'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망절'로 중재안을 따름[2])
2. 2. 대한민국에서의 초기 활동
1942년 경상남도 김해 (일부 자료에서는 창원시 진해읍[4])에서 일본인 아버지 망절 길우에몬(網切 吉右衛門|아미키리 요시우에몬일본어)과 한국인 어머니 양두련(梁斗連, 또는 양두연[4])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시 순사부장이었다.1945년 광복과 함께 아버지가 일본으로 강제 송환되면서[4], 어머니의 외가가 있는 진주에서 외할아버지에게 맡겨져 외가의 성을 따른 '''양일랑'''(梁一郞)이라는 이름으로 성장했다.[4] 이 과정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가면서도 일본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주변의 박대를 받기도 했다.
진해의 충무상업고등학교(현 진해세화여자고등학교의 전신)에 다니다 2학년 때 중퇴하였고, 1958년부터 부산의 축산업협동조합에서 근무했다.[5] 혼인 신고 과정에서 외할아버지의 양자로 입적된 사실을 알게 되면서 친아버지를 찾기 시작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NHK 라디오의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을 통해 1967년 1월, 일본 가고시마현 다네가섬에서 암 투병 중이던 아버지와 연락이 닿아 서신 교환을 시작했다.[6] 그러나 병역 의무 미이행 문제로 정부로부터 출국 허가를 받지 못했으나,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1968년 어렵게 일본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뇌졸중으로 쓰러진 상태였으며, 같은 해 8월 31일에 사망했다.[4]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일본 국적을 회복하고 잠시 일본에 머물렀지만, 아버지의 유산을 둘러싸고 일본인 사촌 등과 갈등을 겪었다.[6]
결국 자신이 자란 한국을 그리워하게 되면서 1970년,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아와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경상남도 양산군에 정착했다.[4] 이때부터 아버지의 일본 이름 '아미키리 이치로'(網切 一郎|아미키리 이치로일본어)의 한국식 한자 독음인 '''망절일랑'''(網切 一郞)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아버지의 고향인 일본 가고시마현 미나미타네정 시마마(島間|시마마일본어)의 한국어식 발음을 따라 '도간'(島間)을 본관으로 하는 도간 망절씨의 시조가 되었다. (처음에는 일본어 발음 '아미키리'를 성으로 사용하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한국식 독음 '망절'이라는 중재안을 따랐다.)
양산시 동면에서 친척에게 물려받은 농원에서 처음에는 벼농사를 지었으나 잘 되지 않자, 1972년부터 버섯 재배를 시작했다.[3] 초기에는 버섯 재배 효율을 높이기 위해 기존 연탄 보일러를 폐유 재활용 보일러로 바꾸는 등 기술 개발에 힘썼다.[4]
2. 3. 일본 국적 회복과 귀국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NHK 라디오 프로그램 '찾아가는 시간' 등의 도움을 받아 일본 가고시마현 다네가섬에 거주하던 아버지 網切義右衛門|아미키리 요시우에몬일본어 (망절 길우에몬)과 연락이 닿아 서신 교환을 시작했다.[6] 당시 아버지는 후두암 투병 중이었으며 후유증으로 구음 장애가 있었다.[6] 망절일랑은 하루빨리 아버지를 만나고 싶었으나, 병역 의무 미이행 상태여서 해외 출국이 불가능했다.1967년 1월, 아버지로부터 편지가 도착했고,[6] 같은 해 8월 초 아버지는 망절일랑의 인지 절차를 위해 가고시마시를 방문했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8월 31일 사망했다.[4] 아버지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일본 국적을 회복하여 "일본 남자로서 살아가겠다"는 소망을 이루기 위해, 1968년 5월부터 병역에 복무하기 시작했다.
1968년 가족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국적을 회복했다.[4] 이후 1970년 재판을 통해 아버지의 호적에 정식으로 입적되었고, 병역 의무가 소멸되어 23개월 만에 제대했다. 이 과정에서 재판 비용으로 상당한 빚을 지기도 했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아버지의 유산을 두고 일본인 사촌 등 친척들과 갈등을 겪었으며,[6][2] 점차 자신이 성장한 한국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결국 일본 영주 대신 1970년 대한민국으로 돌아와 다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고 경상남도 양산군에 정착했다.[4] 이때부터 아버지의 성씨인 아미키리(網切)의 한국식 한자음인 '''망절'''과 자신의 이름 일랑을 합쳐 '''망절일랑'''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아버지의 고향인 가고시마현 미나미타네정 島間|시마마일본어의 한국식 독음인 '도간'을 본관으로 삼아 도간 망절씨(島間 網切氏)의 시조가 되었다.[4]
2. 4. 농업 혁신과 업적
1970년 대한민국으로 돌아와 경상남도 양산군 동면에 정착한 망절일랑은 처음에는 친척에게 물려받은 농원에서 벼농사를 지었으나 성과가 좋지 않았다.[3] 1972년부터 버섯 재배로 작목을 전환하였고,[3] 버섯 살균 방식을 기존의 연탄 보일러 대신 폐유를 재활용하는 보일러로 바꾸는 등 기술 혁신을 이루었다.[4]1994년에는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새송이버섯 재배에 성공하였으며,[7][3] 이후에도 연구를 지속하여 2004년에는 홍삼 성분이 함유된 홍삼새송이버섯, 2005년에는 미네랄 함량을 높인 고미네랄 버섯 등 다양한 기능성 버섯을 개발하였다.[7] 이러한 버섯 재배 분야에서의 30여 년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2001년 제35회 신농민상 대통령상을 수상하였고,[3] "버섯 박사"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3] 또한 지역 사회 활동에도 참여하여 이장을 역임하기도 했다.[3]
운영하던 버섯 농장이 택지개발지구에 편입되면서 농장을 이전한 후 버섯 농사를 그만두었다.[8][3] 2009년부터는 상추와 미나리 재배를 시작하였으며,[3] 일본에서 광합성세균 농법을 도입하여 2010년에는 이를 활용한 친환경 수경농법으로 상추를 재배하는 데 성공하였다.[8] 이외에도 한일 양국 농가의 교환 홈스테이를 주선하는 등 한일 민간 교류와 친선 활동에도 힘썼다.[3]
2. 5. 사망
2012년 8월 21일,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에 위치한 자신의 농장에서 농작업을 하던 중 뇌졸중으로 쓰러져 69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7] 그의 사후, 운영하던 농장은 둘째 아들 망절웅(1970년생)이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다.[9]3. 가족 관계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시절 전직 순사부장이자 여객사 영업소장이었던 일본인 망절 길우에몬(網切 儀右衛門일본어)이며, 어머니는 한국인 양두련이다. 망절일랑은 1942년 경상남도 김해에서 두 사람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2]
1945년 8월, 광복과 함께 아버지 길우에몬은 수용소에 연금되었고, 그해 9월 일본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당시 근처 집에 놀러 갔던 망절일랑은 아버지와 헤어진 채 진주시에 있는 외할아버지 양씨에게 맡겨져 그의 손자로 자랐다. 한국인으로 살아가면서도 일본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주변의 박대를 경험하기도 했다.[2]
고등학교 2학년 때 외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1958년 부산 축산업 협동조합에 취직했다. 몇 년 후 결혼을 위해 혼인 신고를 하던 중 자신이 외할아버지의 친손자가 아닌 양손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친부모를 찾기 시작했다.[2]
NHK 라디오의 '찾아가는 시간'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1967년 1월, 아버지 길우에몬으로부터 편지를 받게 되었다. 당시 아버지는 후두암 수술 후유증으로 발음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 주로 서신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망절일랑은 하루빨리 아버지를 만나고 싶었지만, 병역 의무를 마치지 않아 해외여행 허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67년 8월 초, 아버지가 아들 망절일랑을 자신의 호적에 올리는 인지 절차를 위해 일본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를 방문했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같은 해 8월 31일 사망했다.[2]
아버지의 임종은 지키지 못했지만, "일본 남자로 살아가겠다"는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1968년 5월부터 병역 의무를 이행했다. 1970년, 재판을 통해 아버지의 호적에 정식으로 이름을 올리면서 병역 의무가 소멸되어 23개월 만에 제대했다. 이 과정에서 재판 비용으로 많은 빚을 지기도 했다.[2]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정착하는 것도 고려했지만, 아버지의 유산 문제[2]와 자신이 나고 자란 한국에 대한 애정 등으로 결국 대한민국으로 귀화했다. 귀화하면서 아버지의 고향인 가고시마현 미나미타네정 시마마(島間일본어)를 본관으로 하는 시마마 망절 씨(島間網切氏일본어)의 시조가 되었다. 성씨의 한국어 표기를 두고 원래 일본어 발음인 '아미키리'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망절(網切)'로 읽는 중재안을 따르게 되었다.[2]
한국인 아내 정순남과 결혼하여 슬하에 망절용, 망절웅 두 아들을 포함한 2남 2녀를 두었다. 두 아들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2]
| 관계 | 이름 | 비고 |
|---|---|---|
| 아버지 | 망절 길우에몬(網切 儀右衛門일본어) | 일본인, 전직 순사부장, 여객사 영업소장 |
| 어머니 | 양두련 | 한국인 |
| 외조부 | 양씨 | 진주 거주 의사, 망절일랑을 양육 |
| 배우자 | 정순남 | 한국인 |
| 자녀 | 망절용 (아들) 망절웅 (아들) 딸 2명 | 2남 2녀, 아들들은 농업 종사 |
4. 수상 이력
참조
[1]
뉴스
버섯박사 망절일랑 별세
http://ysnews.co.kr/[...]
梁山市民新聞
[2]
뉴스
일본 아버지 성씨 찾은 한국인 망절일랑씨
http://m.news.naver.[...]
聯合ニュース
2010-03-24
[3]
뉴스
양산의 큰 별이 지다버섯박사 망절일랑씨 별세
http://www.ystv.co.k[...]
梁山ニュース
2012-08-29
[4]
뉴스
귀화 일본인의 한국 버섯 사랑
http://news.jtbc.joi[...]
중앙일보
2012-06-12
[5]
뉴스
親자연농법 전파 '버섯 신지식인'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9-10-11
[6]
뉴스
일본 아버지 성씨 찾은 한국인 망절일랑씨
http://www.yonhapnew[...]
연합뉴스
2010-03-24
[7]
뉴스
버섯박사 망절일랑 별세
http://ysnews.co.kr/[...]
양산시민신문
2012-08-28
[8]
웨이백
‘버섯박사’ 망절일랑 ‘상추박사’로 변신
http://ysnews.co.kr/[...]
양산시민신문
2010-05-31
[9]
뉴스
망절 농장 버섯 꽃송이처럼 피어나다
http://www.yangsanil[...]
양산신문
2013-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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